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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최치원의 생애와 문학사상 평가A좋아요
    [학부 논문]최치원의 생애와 문학사상담당교수 : 심치열 교수님학 과 : 국어국문과학 번 : 200111722이 름 : 박 은 미목 차Ⅰ. 서론 . 2Ⅱ. 본론1. 시대적 배경 ...... 31) 남북국시대2) 신라하대의 혼란3) 신라와 당과의 관계4) 신라에서 본 당대 문인의 역할2. 최치원의 생애 ................ 63. 최치원의 사상 ................ 91) 역사관2) 종교관⑴ 유학관⑵ 불교관⑶ 도교관⑷ 三敎混融의 종교관3) 개혁사상⑴ 유교적 이상정치와 복고개혁⑵ 비판적 현실인식과 개혁의지⑶ 시무십여조와 四海一家的 시국관4. 문학세계 ... 185. 작품감상 및 분석 ...... 201) 한시2) 전기소설 [최치원전]3) 산문 [산문 작품 원문]Ⅲ. 결론 ... 31Ⅳ. 참고문헌 ....온유하였으며, 글 공부를 좋아하였다.864년(경문왕4) 충청도 보령군 성주산 등지에서 학업을 연마하였다.868년(경문왕8)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는데, 이때 그의 아버지 견일공은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다. “네가 당나라에 가서 10년을 공부하고서 과거에 응시하되,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 아비의 소원하는 바를 잊지 말고 반드시 공을 세우도록 하라.” 이에 어린 나이의 고운은 아버지와 애절한 이별을 나누고, 단신으로 충청도 보령군 남포면 월전리 맥도에서 장삿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당에 입국하였다.874년(경문왕14) 풍속이 다른 당나라에서 고운은 고단하고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엄격한 훈계를 마음에 새겨 학업에 특별히 마음을 썼다. 그리하여 훌륭한 스승을 찾아 독서에 힘썼으니, 마침내 당나라에 입국한 지 6년 되는 9월에 예부에서 실시한 과거에 응시하여 단번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 과거를 주관하고 문제를 출제한 이는 예부시랑 裴纘이었는데, 그는 고운의 답안지를 보고서는 극찬하였다고 한다. 고운의 아버지 견일공이 “10년을 공부하고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한 당부를 고운은 6년만에 성사시킨 것이다.875년(헌강왕1) 주나라의 도읍지였던 낙양을 유람하며 많은 시부를 지었다. 이때 지은 賦 5수, 詩 100수, 雜詩賦 30수를 모아 3권의 시부집을 펴냈는데, 후에 귀국하여 桂苑筆耕集과 함께 헌강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이때 소금장사 출신의 黃巢가 산동지방에서 계속된 흉년과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시달리던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876년(헌강왕2)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강소성 宣州관할의 漂水縣尉에 임명되었다. 현위는 조선시대 고을 수령에 해당하는 지방행정관인 바, 젊은 나이의 외국인으로서 현위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우대였다고 하겠다. 고운은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서 공무에 초탈과 변모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다음으로는 나말의 혼란과 왕권의 추락에 대한 수습과 회복을 위한 자세이다. 그는 [帝王年代曆]을 통해 왕권의 권위와 정통성을 회복하고 정통국가로서의 신라가 해동의 중심체임을 강조했던 것이다.정의를 지키고 떳떳함을 실천하는 것이 도이며 위험에 처해서 규범을 바꾸는 것은 權이다. 어진자는 세상사에 순응함으로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逆理에 패망하기 마련이다.이처럼 그는 비록 골품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조국과 그 상징인 왕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즉 두 왕을 섬기는 비례를 거부한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최치원의 현실 개혁론은 귀족의 부패, 호족의 탈법, 신분질서의 문란에 따른 정치?사회기강의 회복에 기본 틀을 두지 않을 수 없다.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이 받드는 것은 도이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도가 높아진다면 사람은 저절로 귀하게 될 것이니, 능히 도를 돕는 것은 오직 덕을 높일 뿐이다. ([東文選] 권 64)그의 역사관은 결국 ‘덕의 실천과 도의 구현’을 위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군주의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다.따라서 최치원은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인식된 당시 세계적 역사개념으로서의 중국적 역사체계 속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과 역사를 그 속에서 조명?정립시키려는 노력으로 볼 때, 그는 중국과 신라와의 차이를 확고함으로서 중국과 대등한 국가의식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최치원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목할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은 시키는 것이니 좌우에게 붓을 잡고 기록하는 것이다. 傳이라는 것은 옮기는 것 이니 경전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傳중은 비문의 간략함을 넓혀 후세사람에게 전수하게 하는 것이다.? 옛적에 傳을 짓는데 그 형태와 같지 않아서 먼저 결과를 살핀 후에 그 원인을 펴는 것이며, 혹은 첫 머리에 이름을 쓰고 뒤에 행적을 적기도 한다. 그러므로 司馬遷이 백이?숙제 등의 전기를 쓸 때, 반드시 들은 바를 먼저 쓰고 보고자 하는 강한 포부와 집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가 신라 말의 정치 현실에 대해 염증을 느낄 정도로 몹시 실망하면서도, 끝내 정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 사회의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의 척도를 만드는 책무와 권응을 갖고 있는 것이 ‘정치’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최치원은 타의에 의해 정계에서 물러나 해인사에 ?居하는 도중 [해인사 선안주원 벽기]를 통해 ‘人能弘道’?‘道不遠人’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더욱 강렬하게 나타냈다.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이 마루로 삼는 것은 도이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그러므로 도가 높아진다면 사람은 저절로 귀하게 된다. 도를 資助kf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덕있는 이를 존중하는 것인가 한다. 그렇게 되면 도가 높아지고 덕있는 사람이 귀하게 될 것이니, 돌아보건대 法道(法界에서 가장 존중을 받는 大德)라야 바야흐로 세상 인심을 흡족하게 할 수 있고, 반드시 명칭을 바로하고서야 ‘大德’이라 일컫는 것이다. ‘大德’이란 말은 도를 억지로 이름하여 ‘大’라 하고, 덕이 이루어지면 윗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譯註 桂遠筆耕集(2)]위의 인용문은 불교에서 고승을 일컫거나 法階의 하나였던 ‘大德’에 대하여 儒?道 양가의 개념을 이끌어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이 깊게 배어 있다. 사람은 하늘에 근원을 두고 도를 실천하는 주체이다. 사람밖에 도가 없고 도밖에 사람없다. 도는 사람을 떠나 高遠한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러기에 [中庸]에서는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 한다면 도라 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의 실체는 無爲하므로, 도가 사람을 넓혀 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도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존귀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道義社會’가 구현될 때 인간이 존중되고, 존엄성이 한층 더 강조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라 것이다.)5. 작품감상 및 분석1) 한시최치원은 자신의 처지나 세태에 대한 감회를 한시를 통해 피력했다. 그 한시는 대체로 그의 처지에 대응된다.그가 지은 시는 「계원필경 서문」에서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기까지의 작품이 상자에 가득했다고 했고, 급제 이후 유랑하던 시기, 또 고변의 종사관으로 지내던 시기를 비롯한 在堂시기의 작품이 수백 수로 추산되고, 신라에 귀국해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남겼을 터이나 거의 인멸되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계원필경』에 수록된 60수의 시외에 수십편이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만한 현존 작품만으로도 신라 한문학의 유산으로서는 양적으로 가장 많은 것이요 질적으로도 발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시세계에는 자연 경물을 읊은 것, 교유관계를 읊은 것, 풍속을 읊은 것등도 있으나 특히 시름과 번뇌, 비판적인 내면의식을 표출한 것이 많고, 또 그 가운데에 빼어난 작품이 많다.孤蓬再此接恩輝 나그네길 다시 들어 은택을 입으니吟對秋風恨有違 가을 바람에 읊조리며 어그러진 신세 한하노라門柳已凋新歲葉 문 앞의 버드나무 금년의 잎도 벌써 시들었는데旅人猶着去年衣 나그네는 여전히 작년 옷을 입고 있네.[秋日再旴胎經縣寄李長官]이는 자기에게 은택을 베풀어준 이장관에게 사례하는 시로서, 그 은택의 따스함, 자연진행의 순조로움과 대조하여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두드러지게 했다. 가을바람은 이국인의 뒤숭숭한 심정을 더욱 고조시키고, 버드나무 잎과 시인 자신의 옷이 비교되고 있다. 시인 자신은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고 보잘것 없는 옷을 입고 있는데, 저 버드나무는 봄에 새 잎으로 단장했다가 가을이 되자 벌써 또 다른 잎으로 교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이국에서 체험한 좌절감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 겨우 시적 세계는 이원화된다. 시적 자아가 발 딛고 있는 세계는 하나같이 각박하고 냉혹하다. 시적 자아가 그리워하는 세계 즉 고향은 시적 자아가 현재 당면한 고뇌를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기에 충분한 이상적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인문/어학| 2006.03.15| 34페이지| 2,500원| 조회(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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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소설] 고전소설 작품분석(금방울전·김원전·이화전·당태종전) 평가B괜찮아요
    고전소설의 분석 및 연구(금방울전·김원전·이화전·당태종전){제 출 일 : 6월 17일과 목 : 고전문학 특강담당교수 : 이지형 교수님학 과 : 국어국문과학 번 : 200111722이 름 : 박은미目 次「금령전」Ⅰ. 서론 ........... 1Ⅱ. 본론1. 작품 분석 .... 11) 해룡의 전생담과 약화된 영웅적 능력2) 금령의 전생담과 신화적 능력3) 해룡과 금방울의 용신관념2. 민담의 수용과 변이 ..... 53. 「금방울전」의 신화적 요소 ....... 61) 국조신화의 의식과 해룡2) 금방울과 난생관계 및 웅녀상Ⅲ. 결론 ........... 9「김원전」Ⅰ. 서론 ........... 10Ⅱ. 본론1. 작품의 구성과 설화의 수용과정 111) 설화의 수용과정과 세계성2. 국조신화의 수용양상 ... 131) 적강 모티프의 신화성과 고소설 및 미래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금령이 현실계에 금방울 태어나자 그녀를 없애고자 행해졌던 고통과 고난은 시련 중에 시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련을 곡식의 낟알이 땅 속에 묻혀 썩었다가 다시 싹이 돋 는 곡령신앙과 견주어 본다면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는 입사식과 연관되어 설 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김무로, 「한국신화의 원형」, 정음문화사, 1988, 140쪽. 재인용금방울이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여 해룡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금령공주라는 신분으로까 지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곡식의 낟알이 땅속에서 썩었다가 다시 싹이 나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는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금방울의 운명은 신화상의 주인공의 운명처럼 천장적으로 예고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방울이라는 인물은 입사식과정처럼 고난을 극복하는 상투적 인물에 속 하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단순인물로서, 예를 들자면 주몽·춘향·심청등 을 들수 있다. 금방울 또한 그들과 동일한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 E. M Forster, Aspects of the Novel, Pegunin Books, 1957, pp.75-85. 재인용이라고 볼수 있어 천장적 인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반교어문학회편, 앞의 책, 411-418쪽.2. 민담의 수용과 변이「지하국대적제치설화」는 대개 다음과 같은 순차적 구조를 갖는다.{1 공주(부잣집 딸)가 대적(귀신)에게 피랍된다.2 주인공이 공주를 찾아 떠난다.3 주인공이 난관을 무릅쓰고 공주를 찾는다.4 신령의 힘으로 주인공이 지하국에 도달한다.5 주인공이 대적과 싸운다.6 대적을 퇴치한다.7 첫 재난을 일소한다.8 주인공이 종자에게 배신을 당한다.9 종자들만 귀환하여 공주를 생환한 공을 차지한다.⑽ 주인공은 지하국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⑾ 주인공이 생환한다.⑿ 종자들의 간계가 폭로된다.⒀ 종자들은 벌을 받는다.⒁ 주인공은 공주와 결혼한다.이는 결국 어떤 가능성이 열려짐→주-426쪽.김원전Ⅰ. 서론「김원전」은 조선조 말에 작가 미상의 소설로 전해지며, 이것의 근간적 소재는 민담류의 지하국대적퇴치설화로 여겨진다. 원이 10년동안 고난을 겪은 후 허물을 벗어 대장부로 변시하게 된다는 줄거리는 입사식의 한 과정이므로, 국조신화의 동굴모티프와 관련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천상에서 남두성이란 별이 옥제에게 죄를 지어, 그 벌로 지상으로 적강된다. 청상으로부터 적강된 남부성은 김규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는데, 그 생김새가 수박과 같은 형상이었기에 김규내외는 근심 걱정에 쌓이게 된다. 그러나 원은 10년 동안 고난을 겪은 후 보를 씌운 것이 벗겨지면서, 장부로 변신한다. 원은 천서 세권을 읽고 지혜와 총명이 열리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비상하였고, 또한 풍운조화의 신통술을 부리기까지 하였으므로 신인의 경지에 이르렀었다.원이 재주를 시험하기 위해 창검궁시를 가지고 천마산에서 무술 연습을 익히고 있을 때 머리가 아홉이고 몸집이 집채만한 괴물이 미인 셋을 등에 업고 가는 것을 보고 쫓아가 싸웠지만 세 여인을 구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기만 하였다. 괴물은 원을 잡아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암굴로 들어가 버리자 원도 그 입구를 봐두고 돌아왔다.조정에서는 대낮에 황제의 세 공주가 괴물에게 납치된 사실을 알고서는 이들을 구할 사람을 물색하던 중에 원이 출정하게 되었다. 원은 부원수 강문추를 데리고 괴물이 사라진 천마산 동굴로 들어가 세 공주를 구하고 지상으로 올려 보내고 원이 굴 밖으로 나갈 차례였으나 부원수가 원의 공을 시기하여 칡덩굴을 내려 보내지 않고, 그 굴을 막아 버려 동굴 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 이것은 입사식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원은 탈출하기 위해 굴 속을 헤매며 지나다가 괴물에게 잡힌 용자를 구해주게 되어 용왕의 환대를 받고 용녀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다시 인간세계로 나오는 행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원은 귀향도중 점주를 만나 용왕이 준 연적을 빼앗기고 피살된다. 용녀는 용궁으로 도망가서 용왕에게 고하고, 왕은 즉시 점주를 찾아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는 생활을 하여 수박의 형태에서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원은 신이 아닌 관계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찾기 위해 지하국에 헤매일 수밖에 없었다. 원의 영웅적 존재가 여지 없이 허물어진 상태였으니, 그의 지하국에서의 생활은 죽음과 다름없는 생활을 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원은 동굴에 갖혀서 헤매이다가 괴물에 납치되었던 용자를 구해준 공으로 용궁에 들어가 용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용왕으로부터 연적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인간세계로 나오지만 점주가 이를 가지고 싶은 욕심으로 원을 죽이게 된다. 그렇게 죽은 원은 공주와 용녀의 도움으로 환생초와 병수를 마시고 다시 살아나게 되므로 이것은 제의적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제의적 죽음이란 재생하는 계기를 이루는데 큰 인물이 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므로 원의 죽음과 재생은 단군신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김원전」의 원형은 국조신화와 주몽사상의 광명사상이 수용된 것이다. 웅녀가 단군을 낳기 전에 빛없는 동굴 속에 있었다는 것은 모태회귀로 돌아온 것에 비유된다. 「김원전」은 국조신화의 동굴모티프와 지하국대적제치설화의 변신계형 모티프가 수용된 것이다. 원은 타고난 운명이 불행했으나 불행을 행복으로 역전시키는 노력과 선행을 한데서 구원자가 나타나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따라서 「김원전」의 원형은 국조신화와 주몽신화를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원전」의 궁극의 목표는 고난 많은 이승을 광명의 삶으로 다스리고 등선하는 데에 있는데, 국조신화에서 곰이 통과의례를 겪은 후 웅녀로 변시하여 단군을 낳아 홍익인간 사상으로 지상을 다스리다가 다시 산신으로 되는 과정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고 보여진다.또한 원이 천상득죄를 하여 그 대가로 고난을 받지만 죄절하지 않고 극복하는 자세로 생활하면서 그 죄를 속죄하여 광명생활을 맞이하고, 죽어서 등선할 수 있었던 것은 국조신화의 수용인 것이다.「김원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지하국대적제치에서의 결말은 등선장면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 소설 이 적극 수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설화의 주인공은 모두 소금장수 혹은 담력이 센 사람, 건달 등 하층민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미천한 혈통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들로, 남이 가기 꺼리는 任地에 자원하여 원이 되는 설화가 대부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의 계층이 나타 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시의 니홰란 쟝짜 이셔 일짜 무과츌신힝여 오링 벼싶을 못힝고 분울힝여 �愎醮� 칭언을 듯고 샹소힝여 쥬왈 신이 이제 과거힝와 십여 년의 벼싶을 못힝옵고 셩하의 무익힝오믈 슉야의 �坪� 깁싶더니 이졔 여산의 짜변이 고이힝와 본슈이 위팅 힝오니 신이 비록 짜죄 업싶오나 신이 �� 번 입거힝와 샤변을 졔어힝오리다. 상이 스싶로 보시고 딪희힝샤 즉일 녀산 부싶을 졔수힝시니{) 신태수, 앞의 책, p.3-4. 재인용이화는 무과 출신이다. 10여 년 벼슬을 못한 소위 閑良 출신이다. 이러한 주인공을 상층 의 인물로 보는가, 아니면 하층민으로 보는가 하는 성격 규정의 문제는 중요하다. 이는 당 시의 조선 시대의 무과 제도를 살펴봄으로서써 가능할 것이다. 武科는 이에 응시한 未任 者를 閑良이라 했고 그 자격에 제한이 있었다. 「經國大典」에 의하면 문과의 응시자는 罪犯永不敍用者{) 국가 관료가 될 자격을 박탈당한 자, 贓吏之子{) 국가의 재정을 횡령한 자의 아들, 再嫁失行婦女子及孫{) 두 번 시집가거나 절개를 잃은 부녀의 자식이나 손자, 庶孼子孫은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庶孼子孫은 뒤에 약간 완화되었으며, 遷人만이 그 자격이 없었다. 경국대전의 조건을 보면 위에 열거한 경우만 제외하면 양민도 응시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양민의 문과 지원에는 많은 제약이 따라 응시가 불가능하였다.{) 첫째, 일반 양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과거 준비를 할 만한 경제력을 가지지 못하는 경 우가 많았다. 경제력이 미약한 양인 농민의 아들이 25-30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과거 준비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실제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둘째, 교육 환경이 주체자
    인문/어학| 2004.10.13| 41페이지| 1,000원| 조회(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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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문학] 독일문학-브레히트
    브레히트의 현실비판의식-「소시민의 칠거지악」, Bertolt Brecht-- 목 차 -브레히트의 현실비판의식 -「소시민의 칠거지악」, Bertolt Brecht -Ⅰ. 서론 ....... 1Ⅱ. 본론1. 작품의 생성사 ............. 12. 작품 분석 . 23. 독일사회와 브레히트의 현실비판의식 ............ 4Ⅲ. 결론 ...... 7Ⅰ. 서론「소시민의 칠거지악」은 프롤로그와 그 뒤를 잇는 일곱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각 장면들은 공통적으로 세 부분, 즉 장면 제목, 등장인물들의 춤이나 행동으로 묘사되는 사건 진행, 안나Ⅰ이나 가족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으며, 칠거지악이란 불의를 저지를 때 게으름을 피우는 것,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상품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 비열함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는 것, 절제 없이 먹고 마시는 것(배부름, 스스로를 먹어치우는 행위), 호색(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랑), 도둑질과 사기 행각을 벌일 때 탐욕을 부리는 것, 행복한 사람을 시기하는 것을 말한다.여기서는 이러한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배경과 작품에 대한 분석, 독일사회 속에서 브레히트의 현실비판의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작품 속에 드러나 있는 독일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한다.Ⅱ. 본론1. 작품의 생성사1933년 2월 28일, 독일 제국 의회가 나치에 의해 불탄 다음날 브레히트는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프라히와 빈, 취리히를 거쳐 스위스의 카로또는 시적인 악행, 공적인 이익」이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브레히트는 「자본론」에서 많이 언급되었던 이 작품을 마르크스를 공부하던 1920년대 후반 처음 접한다. 꿀벌 국가의 우화를 통해 당대 사회를 비판한 이 작품에서 발레 텍스트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생각 즉,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악행이 필수불가결하며 또한 유용하다는 기본 구상 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브레히트는 일 주일여만에 텍스트를 완성시키며 여기에 바일이 곡을 붙여 1933년 6월 7일 「칠거지악」(초연당시의 제목에는 소시민의 가 빠져 있었다)의 첫막이 파리에서 오른다.2. 작품 분석이 작품은 고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발레가 아니다. 우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노래로 된 대사가 있으며, 안무를 위한 세밀한 지침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매 장면마다 그 장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대략의 윤곽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연구가들은 이 작품을 짧은 오페라, 발레판토마임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또한 서사적 오페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 장르명을 부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브레히트와 바일이 의도적으로 발레 같지 않은 발레 를 만들면서 현실과 괴리된 고전적인 발레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노력은 브레히트가 시, 드라마, 산문 등에서 했던 시도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1920년대 후반 이후 사실주의 작가로서 현실의 모순된 모습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브레히트는 기존의 장르나 형식들이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기존의 장르 틀을 벗어나는 많은 형식 실험을 시도한다. 브레히트는 이 새로운 실험들로 예술 작품을 소비재가 아닌 생산재로, 관객을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소시민의 칠거지악」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브레히트는 전통적인 발레 또는 춤의 기능이 현대 사회에서는 단순한 소비재로 전락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발레라는 무대 예술의 기능 전환을 시도했다고 보는 심이라는 것은 부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 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안나는 예술가가 되려 했고 또 예술을 하려 했지요…그들은 돈을 지불하는 대신 그 돈 가치에 합당한 것을 보려 했어요.…안나야 자부심이라는 것은 부자들에게나 허용된단다.…3장에서 안나Ⅱ는 비열함과 불의에 대한 분노 를 표시하다 해고를 당할 위기에 처한다. 안나Ⅰ은 이러한 분노의 직접적 표출이 약한자,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파멸을 초래할 위험한 행동이라는 점을 동생에게 납득시킨다.…불의를 막으려는 자는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지요. 야비함에 화를 내는 사람은 스스로를 곧 매장하게 되고, 비열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도 참지 못하지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도 속죄하는 것이 세상이니까요.…불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동생의 못된 버릇을 이렇게 고쳐주었어요…조심스럽게 굴어야지 안나야…4장에서는 절제없이 먹고 마시는 것 이 죄악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기독교적인 금욕이 미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절제없는 행동은 곧 바로 자신의 상품성을 떨어트리는,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매일 그 애는 몸무게를 잰다는군요. 일 그램이라도 더 나가면 참 큰일이에요. 그들은 52킬로그램에 안나를 샀대요. 더 나간다면, 그것은 죄악이에요.…먹는 것을 탐하는 것은 죄악이란다.…5장에서 이제 스타가 된 안나Ⅱ는 자신을 좋아하는 돈 많은 파트론과 자신이 좋아하는 애인 사이에서 재주를 피우 다 공장보다도 더 값나가는 엉덩이 를 공짜로 길가의 구경꾼들에게 보여주는 추태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파트론 외에 다른 애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호색 , 음탕함으로 해석된다는 것에 동의하고 결국 애인을 버린다.…그녀는 자신의 하얀 엉덩이를 작은 공장보다도 더 값나가는 그 엉덩이를 공짜로 거리의 구경꾼들과 거렁뱅이 아이들에게 보람들을 시기했어요. 즉 매일 매일을 게으름 피우며 보내는 사람들, 자신을 팔기 위해 내놓지 않고, 자만해도 되며, 비열함에 화를 내고, 자신의 충동대로 사는 사람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늘 필요한 것을 당당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을요.…젊음은 사라질 뿐이야. 승리하는 것은 너야, 그들은 닫혀진 문 앞에서 모든 것을 잃고 떨며 서 있게 될거야. 얼마나 놀라운 뒤바뀜이니.…에필로그의 역할을 하는 마지막 노래에서는 일곱 가지 죄악을 어렵사리 피해가면서 마침내 성공 한 안나 자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며 이들의 고향 미시시피에는 가족과 함께 살 작은 집 이 세워진다.3. 독일사회와 브레히트의 현실비판의식19세기에 형성된 독일 내부의 국수주의적인 기운도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남으로서 점차 그 기세를 잃어갔다. 독일에서는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 국가 형태로서의 왕국은 붕괴되고, 그 대신 민주주의적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싹이 터서 조금씩 자라오던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쉽게 정착할 수 없었다.당시 독일은 극우 세력인 나치의 세력이 급성장하게 되었고 좌파와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은 작가들에게 보다 분명한 정치 노선과 직접적이며 투쟁적인 문학 활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분위기에 맞게 브레히트에게도 일련의 투쟁적인 시들이 나타나며 막심 고리키의 동명 소설을 희곡으로 번안한 「어머니」가 씌어진다. 그러나 공산당과 사민당, 또한 사민당 내의 상이한 노선등으로 분열되었던 좌파는 나치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였고, 1933년 1월 히틀러가 제국 수상에 임명되면서 그에 반대하던 많은 지식인들은 망명길을 재촉하게 된다. 1933년 1월 30일 그 당시 제국 대통령이던 파울 폰 힌데부르크는 오랜 망설임 끝에 히틀러를 제국 수상으로 임명했는데,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안 가서 히틀러는 민주적으로 통치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드러냈던 것이다. 1933년 4월 제국 의사당이 불탄 다음날 브레히트는 조국을 떠나게 된다. 이후 1949년 마르크스를 접하고 유물변증법적인 인식론과 정치경제학적인 분석능력을 얻은 후에야 이것을 이해하게 된다.나는 그때 한 연극을 위해 그 배경으로 시카고의 곡물시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였다.…그러나 아무도…이 곡물시장의 돌아가는 일들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나는 그때 이 일들이 도저히 설명 될 수 없는, 즉 이성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그 결과 계획했던 드라마는 중단되었고 대신 나는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하였다.…그때야 비로소 내가 갖고 있던 산발적인 실제 체험들과 인상들은 제대로 살아 있는 지식이 되었다.이처럼 마르크시즘은 브레히트에게 무엇보다도 현실인식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마르크시즘을 통해 브레히트의 현실비판은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을 찾게 된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자본주의 사회를 도둑질하는 사회로 풍자한 「서푼짜리 오페라」에 잘 나타나 있으며, 「소시민의 칠거지악」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소시민의 칠거지악」에서는 총 7장에 걸쳐 소시민들이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일곱 가지 죄악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작품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브레히트가 기독교의 도덕률이 금기시하는 죄악들을 성경의 말씀 과 전혀 다르게,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제 12장 31∼32절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 요한 1서 5장 16∼17절위에서 보듯자이다.
    인문/어학| 2004.10.14| 9페이지| 1,000원| 조회(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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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 경주답사기
    < 답사 2차 레포트 >효의 진정한 의미(경주 답사기)제 출 일 : 2003년 5월 10일과 목 : 삼국유사의 세계담당교수 : 신동하 교수님학 교 : 성신여대학 과 : 국어국문과 3학년아 이 디 : SSWU200111722이 름 : 박은미목 차Ⅰ. 서론 .............. 1Ⅱ. 본론1. 삼국유사의 효선편 .......... 12. 불국사와 석굴암 .............. 3Ⅲ. 결론 .............. 10Ⅳ. 참고문헌 ....... 11Ⅰ. 서론처음 경주로 떠날 때는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효불효터를 중점적으로 돌아볼 생각이었으나 경주로 들어선 순간 수많은 유적지들을 보면서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첫날 짐도 풀기 전에 경주시내부터 돌아보기 시작하여 남산까지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돌아다니다보니 이틀동안의 일정이 너무 빠르기기만 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다면 좀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에 선조들의 발자취를 등에 지고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지금부터 이틀동안의 여정을 풀어보기로 하자.Ⅱ. 본론1. 삼국유사의 효선편그림 불국사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三國遺事]는 王曆, 紀異, 興法, 塔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善등 모두 아홉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三國遺事]의 이와 같은 篇名에는 의해나 감통과 같은 중국의 高僧傳에 보이는 것도 있지만, 避隱이나 孝善과 같이 독특한 것도 있다.[三國遺事]의 여러편목 중에서도 신라의 효행 사례를 수록하고 있는 효선편은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이 편에 대한 종래의 연구는 일연의 효선사상에 주목하기도 하고 신라불교에서의 효관념을 고찰하기도 했으며, 신라 중대 유교의 비판에 대한 불교계의 대응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한 사]에 효선편이 실리게 된 배경을 살펴보려 할 때 일연의 효성을 간과할 수 없게 된다.효선편에 수록된 효행 사례에는 향득할고공친이나 손순매아, 그리고 빈녀양모등의 경우처럼 불교적인 성격이 약한 것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향득과 손순이 그들의 옛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기에 불교와 어느정도 연결된다. 효선편에서도 진정과 대성의 효가 강조된 편이고, 이들의 효는 전적으로 불교적이다. 진정효선쌍미조는 효선편 설정의 본래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더 주목된다. 효선쌍미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진정의 효선은 효선이라는 편명과 가장 잘 어울리는 내용이기 때문이다.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도 빠른데, 효도를 다 마친 후면 역시 늦지 않겠느냐? 어찌 생전에 네가 가서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속히 가는 것이 옳겠다. ???나를 위하여 출가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온갖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이처럼 진정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는 내용은 곧 불교의 효를 설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일연의 효선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출가수행으로 불법을 구하던 진정과 절을 지어 불법의 전파에 기여한 대성의 효선을 일연은 부각시키려 했던 것 같다. 이것은 구법과 전교가 효도를 온전하게 이루는 것이라고 했던 의천의 인식과도 부합된다. 그리고 부모를 인도하여 정법으로 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부모를 제도하여 세상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강조하는 효의 본질이다. 사복이 어머니를 등에 업고 연화장세계로 갔다거나 진정의 어머니가 하늘에 태어났다는 설화는 이와 같은 불교의 효선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효선편을 설정한 것도 유교의 효와는 다른 불교의 효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 불국사와 석굴암그림 석가탑경주를 여행하기 위해 처음 숙박을 잡을 때 무척 고생을 했다. 황금연휴라서 빈방을 찾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였다.“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므로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안락을 누리고 장수할 것입니다.”대성이 그 말을 듣고는 집으로 달려와 그의 어머리에게 말하였다.“제가 문밖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었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제 또 시주를 하지 못한다면 오는 세상에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세의 응보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과 같은 때였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왼쪽 주먹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7일만에 폈는데,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금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다시 대성이라 짓고 그의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안에 두고 함께 봉양하였다.대성이 어른이 된 뒤에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아래 마음에서 묵게 되었다.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며 말하였다.“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다시 너를 잡아먹겠다.”대성이 두려워하며 용서를 비니, 귀신이 말했다.“나를 위해 절을 지어줄 수 있겠느냐?”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불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후부터는 사냥을 하지 않고 꿈속에 나타났던 곰을 위해 장수사를 세웠다. 이일로 해서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로운 바람이 더욱 독실하게 되었다.이로 인하여 이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워, 신림과 표훈 두 승려에게 각각 절에 머물도록 부탁하였다. 대성은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길러준 부모의 노고에 보답하였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도 듣기 어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전각들을 세운 대표적 가람이다. 현재의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이 각각 중심 건물이 된다. 극락전 뒤쪽에 복원되지 않았으나 법화전터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창건 당시의 불국사와 현재의 불국사 규모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현재 낱낱의 영역은 영역에 이르기 위해 계단, 영역 입구인 문, 영역의 중심 건물, 영역을 둘러싼 회랑 등의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다. 불교적 해석을 빌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영화장세계를 나타낸 것이다.불교와 관련한 효행은 불국사 관련 이야기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다.진정법사의 효도와 선행이 모두 아름답다법사 眞定은 신라 사람이다. 그는 승려가 되기 전에 군졸로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도 못하고, 부역하면서 품팔이하여 곡식을 받아 홀로 된 어머니를 모셨다.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겨우 다리가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어느 날 어떤 승려가 문 앞에 이르러 절을 짓는 데 필요한 쇠붙이를 구하자 어머니는 솥을 시주하였다.얼마 후 진정이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하고 아들의 뜻이 어떠한가 살폈다. 진정은 얼굴에 기쁜 기색을 보이며 말하였다.“부처님의 일을 위해 시주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비록 솥이 없다 한들 걱정할 것이 무엇입니까?”그래서 질그릇을 솥으로 삼아 음식을 끓여 어머니를 모셨다.진정은 일찍이 군대에 있으면서 의상법사가 태백산에 머물며 설법을 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는 곧 사모하는 뜻을 가져 어머니에게 말하였다.“효도를 다하고 나면 반드시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겠습니다.”어머니가 말하였다.“부처님의 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그런데 효를 다하고 간다면 너무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서 도를 들었다는 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자, 손순은 민망하게 여겨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모실 수 없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 밥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이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의 배를 채워드리도록 해야겠소.”그리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자 이상한 돌종이 나왔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재빨리 나무 위에 걸고 한번 쳐보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듣기에 좋았다.아내가 말하였다.“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도 아이의 복인 것 같으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어요.”남편도 그렇게 여겨 아이를 종과 함께 업고는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매달고 쳤다. 그러자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려 흥덕왕이 듣고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그 맑고 고운 것이 보통 종과 비길 바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왕의 사신이 와서 그의 집을 조사하고 그 사유를 모두 아뢰었다. 왕이 말하였다.“옛날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으려 하자 하늘이 금솥을 내려주었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돌종이 솟았으니, 곽거의 효도와 손순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본 것이다.”따라서 집 한 채를 내려주고 해마다 벼 50섬을 주어 극진한 효성을 기렸다.손순은 옛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라 하고 돌종을 두었는데, 진성왕대에 후백제의 독적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는 바람에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그 종을 얻은 자리를 완호평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이라 한다.손순의 이야기는 현재 경북 안동에 위치한 홍은사의 유래담이다.그림 홍은사 (인터넷에서 사진 인용)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때 후백제와의 전란으로 인하여 석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었으나 그 절 또한 세월 속에 사라졌다가 1994년 한다.
    인문/어학| 2004.10.14| 13페이지| 1,000원| 조회(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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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원탐구] 박지원 탐구 평가C아쉬워요
    한국사인물탐구 발표 레포트박지원 탐구제 출 일 : 2004년 5월 17일과 목 : 한국사 인물탐구담당교수 : 오종록 교수님학 과 : 국어국문학과학 번 : 200111722이 름 : 박은미과 목 : 한국 인물사 탐구 학 과 : 국어국문과 학 번 : 200111722 이 름 : 박은미박지원 탐구1. 생애연암 박지원(1737∼1805)은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에 한양의 반송방(盤松坊) 야동에서 반남(潘南) 박씨 사유(師愈)와 어머니 함평윤씨(咸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열상외사(洌上外史)라고 하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 유안재(遺安齎) 이보천의 집안에 장가든 뒤, 유안재에게서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이양천에게서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3년 남짓한 사이에 경사·백가서를 두루 통달하고 천문·지리와 경세요무를 강구하였다.1765년(영조 41)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에 백탑 근처로 이사하게 되어 박제가·유득공·이서구·서상수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이 교유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홍대용·이덕무·정철조등과도 이용후생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다. 특히 30세 때에는 전년에 연행하고 돌아온 홍대용과 교유하면서 청나라의 실정과 국제정세, 그리고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 학문에 접함으로써 마침내 북학에 뜻을 두었다.1777년(정조 1)에 세도가 홍국영에 의해 벽파인 홍낙성의 일파로 몰려 신변에 위협이 있게 되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피신하여 지내다가, 1780년(정조 4)에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 박지원의 연행은 그가 당시 집권층인 서인 노론계에 속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그의 학맥은 노론에서도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론 계열에 속한다. 그와 동종인 박윤원은 홍대용과 함께 미호 김원행에게서 동문수학한 처어 있다. 즉 자서(自序)에 이어 「마장전」「예덕선생전」「민옹전」「양반전」「김신선전」「광문전」「우상전」과 그리고 불살라 없어졌다는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이 목차에 실려 있다. 저자는 자서에서 이들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간명하면서도 주제 파악이 잘 되도록 쓰고 있다. 그리고 연암의 걸작품인 「호질」은 「열하일기」의 관내정사 에, 「허생전」은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연암의 최고 걸작인 「열하일기」는 『연암집』의 11권에서 15권까지 24편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6권에서 17권은 정조 명찬으로 된 농서로서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이다.2. 시대적 배경 및 문체반정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상호 유기적 연결을 가진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는 탕평론 및 세도정치의 전개라는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18세기 조선시대 정치를 특징짓는 탕평론 은 주자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사서보다도 원시유학의 기초가 되는 유경 중에서 『향서(공필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군주는 탕평·정직의 정치를 행함으로써, 사회 일반이 나쁜 무리와 아첨이 통하는 기풍을 없애고, 호악·편당·반측같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제반 현상들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군주권이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성 곧, 전제적 성격이 강했던 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결국 사대부에 대한 군주권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집권관료제를 재정비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국운영 노력이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분당을 와해시키고, 왕실 외척세력을 포함하는 특권적 양반 벌열가문을 설립하려는 정책이었다. 정조때 탕평정국에서는 새로운 청요직인 규장각 건설과 국왕 친위군영의 강화로 군주권 및 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이루어진 점,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 왔던 향반이나 역관·서얼·상인세력 같은 중간계층의 성장을 정치구조 속에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진 점, 유이민과 노비계층의 안정과 지위 향상 노력이 탕평적 정국운영론. 이후 연암은 고문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도덕과 자기 문장이 일치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정조가 다음 번 정승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속설도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가 급서함으로써 탕평의 시대가 끝나고, 서학을 연구한 남인들과, 규장각을 거점으로 성장한 박제가를 위시한 북학파들은 제거되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운 노론 외척의 세도 정치가 시작 될 즈음인 순조 5년에 연암은 홀연히 세상을 떴다. 그의 제자이자 학문적 동지였던 박제가도 그의 장례에 참석한 직후 곧바로 그의 뒤를 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학문정치를 바탕으로 준론탕평 을 실시한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문인이자 학자였다.3. 박지원의 문학관박지원의 문학관은 근본적으로 글(작품)은 왜 쓰는가에 관한 문제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박지원의 경우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태도와 견해를 가지고 있다.먼저 왜 쓰는가 하는 것은 창작의 이유와 목적에 관한 문제이다. 당시 일반적인 문인들은 지위 상승을 위해 과거지문인 詞章{) 문사를 통칭하는 말. 사장(辭章)이라고도 한다. 뒤에는 시문 잡문 등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성리학 도학의 상대적 인 명칭으로 사장학, 사림파에 상대적인 명칭으로 사장파라고 하였다. 사장이 문학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고려 후기 무신란을 계기로 당시 지식인들이 문사에 힘쓰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 사대부들은 경학보다는 사장을 중요시하였으나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새로운 학풍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신진유학자들은 사장 중심에서 경학 중심으로 학풍을 전환하려고 시도하였다. 사장학은 집권층과 연결되어 조선 전기에 가장 득세한 논리였다. 중종 이후 도학을 위주로 하는 조광조(趙光祖) 일파에 대하여 최부(崔溥) 남효온(南孝溫) 남곤(南袞) 등이 사장파로서 시부를 옹호하였으나 사림파가 학문의 주도권을 잡자 사장학 사장파는 후퇴하게 되었다. 이후 사장은 문장이라는 용어의 대용으로 겸칭하게 되었다.을 하거나 심성을 수양하기 위해 재도지륭하다고 칭찬하고는 참된 시야말로 자기 시대의 것을 다룬 시이고 그런 시야말로 진실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그가 즉사유진취(卽事有眞趣) , 곧 사물에 바로 접하면 진실된 맛이 있다고 한 것은 자기 시대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면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뜻으로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이러한 현실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자기 시대의 생활현장에서 사용되는 시속어 곧 일상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좋은 작품을 쓰는데 반드시 성현의 문구나 경전의 구절을 따올 필요가 없으며 일상어가 훨씬 효과가 크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통해 그런 논리를 철저히 밀고나가 당대에 절대적으로 숭상하던 중국의 고문체를 버리고 시속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결국 연암체라는 것을 만들어 냈으며 그 때문에 사대부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격노와 문체반정이라는 문화계의 대사건까지 몰고 왔다.박지원은 고문의 모방을 극력 배격하였지만 그것이 고문 자체의 가치에 대한 부정이나 고문과는 무조건 결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고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글을 그르치게 한다고 개탄한 것으로 창의를 강조하였다. 우선은 옛것을 본받는다는 法古 와 새것을 창조한다는 新 에 대해 비판을 가했는데 옛것을 본받는 자는 옛것에 빠져 옛것을 절대시하여 맹목적으로 지나치게 모방한다고 하였다. 법고의 참뜻은 옛것이 지닌 원리나 본질, 기본적인 방법 같은 것을 배워 계승하는 것인데 당시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흉내만 낸다는 것이다. 한편 새것을 창조하는 자는 불경한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는데 불경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옛것을 본받되 변통할 줄 알아야 하고 새것을 창조하되 전아할 수 있어야 한다(法古而知變 新而能典)는 것을 결론으로 삼았다. 옛것을 본받되 변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고문의 창작정신을 본받되 자기 시대의 현실적인 요청에 부응하도록 일정한 변화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고, 새것을 창조하되 전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창의화사상가들에 의해 재발견된다.이들에게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조선 사회의 정주성리학적 질서와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사회 건설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다.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용후생할 방도를 강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새로운 방법과 묘한 방법이 있다면, 아무리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사대부들이 그들의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원해야 한다 고 하여 「열하일기」와 「과농소초」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그는 우리나라가 가난하게 된 원인을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개 수레는 하늘에서 나와서 땅 위에 다니는 것으로서, 뭍에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집이다. 나라의 큰 쓰임이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례』에 임금의 부를 물었을 때 수레의 수로 대답하였다 하니, 수레는 다만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우는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 하여 수레가 국력을 상징하는 척도라고 보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재화를 유통시키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보았다. 수레가 다니지 않음으로서 재물이 유통되지 못하고 한곳에 머무르게 되며, 이러한 병폐로 인해 한 쪽은 항상 부족하고 다른 한 쪽은 항상 넘쳐나게 된다는 것이다. 수레와 배를 이용한 상품의 유통은 물가를 안정시키며, 전국적으로 시장을 형성하여 생산물을 유통시킴으로서, 결국 농업과 수공업을 다 함께 발전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박지원의 주장은 북학사상의 핵심인 상공업의 활성화와 관련이 깊다. 그는 우리나라의 생산이 발달하지 않는 이유를 상공업의 부진에서 찾았다. 당시 일반적인 사회분위기는 농·공·상에도 종적 질서가 존재하여 공인과 상인을 천시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횡적 평등과 그 내부의 균형적 발전을 꾀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상공업의 활성화에 있어 士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사·농·공·상의 명목이 겨우 존재하고 이용후생의.
    인문/어학| 2004.10.14| 9페이지| 1,000원| 조회(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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