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quiem for a Dream☆I. 서론이렇게 나누는 방식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관객의 관점에서 흥행을 기준으로 나눈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관객이 몰리는 재미있는 영화와 관객의 외면을 받는 재미없는 영화-좋게 말해 작품성 있는 영화-이다.우리가 이번에 본 영화는 솔직히 평소에 영화관에서 그런 영화가 하는지조차 무관심할 정도의 작품성있는 영화로 제목이 Requiem for a Dream", 번역하면 꿈을 위한 진혼곡 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 교수님은 인간의 어두운 치부를 보여주기 때문에 보면서 거부감을 느낄거라고 하시면서 보여주셨는데, 실제로 보니 보는 이가 몰입하면 할수록 속에서 표현하기 힘든 기분 나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게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었다.어찌보면 간단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바로 마약중독으로 종국에는 영화 속 주요 캐릭터들이 다 파국으로 치닫기 때문에 마약중독을 다룬 영화라고 요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요즘 마약공익광고에서 마약은 곧 죽음 이라며 스스로 무덤파고 들어가서 눕는 장면이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하지만 우리가 예정된 철학 강의의 반을 소화한 상황에서 이 영화를 보여준 것은 필시 단순히 위와같이 영화평을 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때, 지성을 갖춘 대학생으로서 또한 철학강의를 듣는 수강생으로서 심도있게 영화를 본 소감과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이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 조가 상의한 것을 기초로 본 영화를 짚어보고자 한다.II. 본론1. 꿈을 위한 진혼곡우리는 먼저 영화의 제목에 대해 논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과 부합될 수도 있고 정반대로 역설적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문학,영화,예술등의 그 어떤 장르의 작품도 그 제목에는 내용과 주제를 함축하게 되어 있다.이 영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약중독과 그 최후의 결말을 섬뜩하리만치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혀 꿈 과는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그 뒤에 붙는 진혼곡이라는 말이 제목에 어울리게 만든다. 자세히 말해보겠다.먼저 꿈에 대해서이다. 영화 속의 4명은 각자 나름대로 꿈을 갖고 마약과 관련된다.(어머니인 사라가 먹은 약인 중독성이 강한 각성제도 마약으로 본다.)어머니는 옛 모습을 되찾아 TV에 출연하는 꿈을 갖고, 아들인 해리는 마약을 팔아 큰 돈을 벌어 여자친구인 메리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꿈을 갖고 있으며, 여자친구인 메리언도 안정된 삶을 꿈꾸고 있고, 친구인 타이론도 한바탕 멋지게 살고픈 꿈을 갖고 있는데, 그들은 그 꿈-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의였든 타의였든 간에 마약을 선택한다.보통 사람들인 우리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들의 꿈 자체는 악하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단은 올바르지 않았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 모두가 절망적인 파국을 맞았을 때, 권선징악적으로써 그 결말을 올바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서 꿈을 위한 진혼곡 이란 제목에 대해왜 그런 제목을 지었을까?라는 질문에 대부분그들의 꿈이 사실상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을 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잘못된 수단에 의해 자기자신의 삶이 사실상 끝나버렸다는 것인데, 의외의 의견도 있었다.그것은 이 영화가 죽음의 냄새가 지배하고 또 영화 속 캐릭터들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지만, 아직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며 결말부에서 그들이 살고자 하는 의욕을 봤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거나 별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토론 결과가 뻔할 것이라 여겼던 나에게는 놀라운 의견이었다. 아! 꼭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하튼 그 의견에 따르면 그들의 꿈이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아직 살고자하는 의욕이 있기 때문에 꿈이 끝나버린 것은 아니며 따라서 제목은 그에 대한 역설이라고 그 견해를 피력했다. 중론에 비해 소수 의견이지만, 그 나름대로 관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서 팔이 잘리고, 전기충격을 받고, 변태들의 성노리개로 전락하고, 정서불안으로 쪼그려자는 모습등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가혹한 절망감을 맛봤고, 거기서 희망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그들의 파탄이 된 꿈에 진혼곡을 울리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2. 늪우리가 토론하면서 다들 공감한 표현이 누군가가 말한 늪 이었다.이 영화에서 무엇을 느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부분 마약 중독에 의한 잔인한 결말과 죽음, 어두움등을 말했는데, 누군가가 영화를 보면서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라고 했을 때 모두들 딱히 형용할 수는 없지만 공감을 표시했다. 그래서 다시그 늪이 무엇일까요?하고 물었는데, 그의 대답이우리가 사는 삶을 지구라고 했을 때, 그 지구 곳곳에 늪이 군데군데 있지요. 그런데, 그 늪을 피하면 삶을 잘 영위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캐릭터들처럼 그 속에 빠지면 허우적대다가 결국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끝내 절망적인 결말을 맞게 됩니다.라고 했다. 모두들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번에는 모두에게 물어봤다.그럼 이들이 그 늪 속에 빠진 것은 누구 책임일까요? 현대문명의 폐해에 그들이 당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그 사람들의 인생이 밑바닥으로 빠진 것은 모두 자기잘못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자기자신에 의한 것이 될 것이며, 현대문명폐해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책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그 말에 대한 반론은 없었다.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늪에 빠졌고, 그것은 그들의 전적인 잘못이며 영화에서의 어두운 결말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3.쾌락주의영화를 본 후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쉬는 시간에 친구와 영화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쾌락주의 얘기를 했다. 미처 생각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귀가 번쩍 뜨이는 부분이어서 기억해뒀다가 꼭 논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토론중에 그 얘기를 했다. 모두들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던지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이 영화에서 쾌락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약중독 이다.먼저 어머니인 사라같은 경우는 옛날에 남편이 살아있던 아들 졸업식 때 입었던 빨간 드레스를 입고 TV에 출연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되고, 3류 병원을 찾아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약을 복용하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10kg이상을 빼면서 성공한 듯 보이나, 중독이 되면서 정해진 복용량으로는 만족을 못 얻게 되고, 만족을 얻기 위해 복용량을 늘려 나간다. 그 결과 중독으로 인해 거식증과 정신착란에 빠져 정신병원에서 강제로 취식을 하고 최악의 단계의 전기충격요법을 받게 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현실과는 정반대의 꿈을 꾸게 된다.아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마약중간상이 성공한 듯 보이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일 뿐 실패하고 더 강한 마약을 하다보니 마약중독으로 인한 썩은 육신만 남아 마약주사바늘로 인해 짓물러 썩어버린 팔을 절단해 버리게 된다. 또한 여자친구인 메리언도 결국 몸을 팔아 마약을 얻는 결말을 보여주고, 친구인 타이론도 금단증상으로 정서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것에서 모두들 쾌락을 추구하다 너무 과(過)해서 파국을 맞게 되었다는 점에서 양적 쾌락주의가 생각되었다. 앞에서 말한 그들의 파국까지의 과정을 보면 경제에도 있는 말이지만 벤담이 말한 한계효용 과 부합된다.즉, 벤담이 말한 한계효용이란 행복은 부의 양이 늘면 늘수록 줄어든다 는 것으로서 쾌락과 부는 양에 비례치않는다는 것인데, 영화 속 그들도 처음에는 적은 양으로 쾌락과 함께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만, 결국 쾌락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양을 사용하다보니 행복은커녕 불행도 이런 상불행(?)이 없을 정도로 최악의 결말을 초래했다.우리는 마약에 의한 쾌락을 벤담이 말한 쾌락과 비교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이런 쾌락의 속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가 감각적·양적 쾌락주의를 몸과 마음의 고통을 초래할 뿐이라며 지속적·정신적 쾌락만이 최고선이라 하였고, 벤담도 행위가 가져온 행복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하면서 자신의 행복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유명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라는 행위 원칙을 주창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덧붙여 이 영화를 행위가 가져온 행복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실업’이라는 말은 과거에는 사회에서 극히 일부분의 문제정도였으나, 요즘에는 ‘취업대란’이니 ‘실업률 증가’니 하는 말등을 통해서 느끼듯이 사회초년병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나나 다른 대학생들에게는 제일 큰 문제로 대두되어 있다. 그러나 언론이나 그런 말등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아직도 막연한 느낌일 뿐이다. 막연한 두려움만 느끼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얼마나 큰 문제인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에 있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를 못 하다. 그러한 때에 인위적이긴 하지만 ‘The Full Monty'라는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실업’문제가 왜 큰 문제가 되는지, 즉 실업을 하게되면 그에 동반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취업문제에서 나라고 결코 예외일 수 없는 것이고 나도 실업자가 되면 영화 속 캐릭터들처럼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과 생각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고 봤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처럼 나도 결국은 어떤 옷을 입든 노동자이기 때문인지 그들에게 많은 공감이 갔다.어느 나라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경제를 살리고 실업문제를 해소하고 복지국가를 이상향으로 한다면서 제각기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자기 노선을 정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패를 지어 당을 만들고 정권을 취득하면 그 생각에 맞춰 경제정책을 추진한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저번에 교수님이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대처주의(Thatcherism)'에 대해 알고 보면 좋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대처주의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동기부여를 한 배경정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대처주의에 대해 내가 보고 생각한대로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은 대처수상도 기존의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이 했던 경제정책이 잘못되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테고, 보수당의 승리로 자신이 집권하게 되면서 기존 정책들을 파하고 자신이 생각해 왔던 정책을 편 것이 대처주의라고 본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노동당은 산업시설이나 기업을 국유화하고 복지정책에 큰 비중을 두었는데 그것이 인플레이션을 가져오면서 경기가 침체되고 사회의 무력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대처수상은 보고 자신이 집권하자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복지정책 축소,노동조합 활동 규제,기업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등의 정책을 펴서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경기는 회복되었다. 하지만 ‘풀 몬티’에서 본 것처럼 실업자들이 증가하여 불만과 비판을 샀다.바로 앞에서 말한 것 같이 그러한 대처주의에 의해 풀 몬티에서 본 실업자들이 양산 된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감상했기 때문인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내는데 별로 힘들지 않았다. 왜 대처주의를 알고 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영화 초반에서부터 느껴지는 남자들의 이미지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의욕도 없고 자신감도 결여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나같은 경우도 ‘실업’하면 우선 ‘돈 문제’가 제일 클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그 돈이란 것이 없다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것-직장,생계,자식과 아내 즉 가정-을 빼앗아 갔으니 그들이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여자들이 남자의 영역을 침범할 정도로 목소리가 큰 것은 인상적이었다. 실업자 남편과 이혼하거나 여성전용 스트립쇼관에 가고, 남자처럼 서서 소변을 보는 행위등에서 ‘남자들이 실직을 많이 하면 여권이 신장하나?’라는 엉뚱한 궁금증도 생겼다.어쨌든 영화속에서 실업자들을 통해 실업을 하게되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기 힘들고,생계를 걱정해야 하며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무서운 것임을 봤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자신이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라면 모르겠지만, 자신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며 자기자식들에게도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내게 꽤 큰 충격을 준 것이 실직한 아버지가 자식과 다니며 절도를 하고 자기문제를 아들에게 적극 피력하고 스트립퍼가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자기 아들과 계속 같이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실직 후 어두운 모습과 과정을 숨기지 않고 자식에게 보여주고 심지어 동참시키는 것인데 그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정서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부모님들은 그런 문제가 있어도 자식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대처주의에 대한 글에서 ‘대처세대’ 또는 ‘대처의 아이들’이라고 해서 대처수상 집권하에서 기초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10대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흡연과 알콜중독자가 많으며 비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문제도 은연중에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영화에서 전체적으로 6명의 캐릭터들에게 가장 큰 초점은 ‘옷을 몽땅 벗기’이다. 결국엔 맨 끝 장면에서 벗어버리지만, 그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내주는 사람이 ‘제랄드’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간부 출신이어서인지 몰라도 그는 ‘체면’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실직한 사실을 부인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계속 출근하는 행세를 하며, 여전히 높은 월급과 지위가 보장되는 직장을 찾고 스트립퍼멤버가 되서도 남의 이목에 크게 신경을 쓰는 모습은 체면을 버리지 못한 실직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직자에게 체면은 사치일 뿐이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이 향후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데 독은 될지언정 도움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옷을 몽땅 벗는다는 것은 그들이 갖고있던 쓸데없는 ‘체면’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제목도 그렇고 큰 줄기도 그렇고 옷을 몽땅 벗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스트립쇼에 보내던 환호를 그들의 새로 태어남을 축하하는 모습으로 본 것은 혹자는 무리가 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보였었다.
〈참선과 단전호흡>I.참선(參禪)참선이란 좌선(坐禪)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을 말하는데,쉽게 말해 불교에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조용히 앉아서 선정(禪定:속정(俗情)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혀 삼매경에 이르는 일)으로 들어가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수행이라 풀어 말할 수 있다.짧게는 선(禪)이라고도 하는데, 이하 본론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불교에서는 불법으로 가는 길이 크게 두 갈래 길이 있는데, 그 하나는 부처님의 교(敎)이고, 다른 한 길은 선(禪)이다.이에 대해 서산(西山)대사의 말씀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그 중에 선은 옛 인도말인 '산스크리트'어의 드야나(dhyana)에 해당되는 말로 '드야나'는 생각한다, 바르게 생각한다, 생각해서 닦는다는 뜻이니 즉, 고요히 생각해서 마음을 닦는 것을 선이라 할 수 있다.또한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와 같은 말로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닦는다고 할 때 어떤 물건을 닦듯이 닦을 수는 없는 것으로 마음이 탁하고 더러워진 것 즉, 마음이 흐리고 어두울 때 이 흐린 마음, 어두운 마음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것을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그럼 선이 좋다 좋다 하는데, 왜 좋다고 하는 것일까?그것은 자기의 주인공을 찾아서 참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바로 아는 수행법이기 때문이고 스스로 부처가 되어서 자기를 완성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불교에서 말하기를 보통 사람의 마음은 장마철의 하늘과 같고, 밤중과 같다고 한다. 장마철에 먹구름으로 잔뜩 흐려 해를 볼 수 없는 하늘과 같고, 밤중과 같이 캄캄하고 어두운 것이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중생계는 암흑(暗黑)의 세계라고 한다.그리고 중생을 말할 때, 미망중생(迷妄衆生), 미혹(迷惑)한 중생이라 한다. 중생은 어둡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무엇에도 홀리고, 사소한 것에도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사람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 운운 하며 큰소리 치지만, 광듯 온갖 망상이 들끓어서 불안하고 어지럽고 괴로우면 마음이 흐려지고 어두워져서 본래면목은 볼래야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일체의 번뇌망상과 근심걱정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져서 나의 근본은 저절로 나타게 된다.그래서 옛 어른은, "참선자는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고 하였다.쉬라는 것은 번뇌망상을 쉬고, 쉬고, 또 쉬고, 그것도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쉬면 곧 깨닫는다."고 하였으니 쉬고 쉬어서 망상과 집착이 사라지면 자기 참모습이 저절로 나타난다.하지만 스님들이나 이리 할 수 있는 것이고, 보통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음을 쉴 수 없으니 부득이 화두라는 방편을 써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자기의 본성을 발견하게 하는 방법이 간화선이다.선하는 방법에는 크게 보면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이 있다.묵조선은 일체의 사량(思量)과 분별을 끊고, 고요하게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닦는 것을 묵조선이라 하는데 간화선 이전에는 주로 묵조선을 하였다.지금도 불교의 조동종(曹洞宗)의 수행방법으로 이어지고 있다.간화선은 볼 간(看)자, 화두의 화(話)자, 화두를 보는 선인데, 화두를 본다는 것은,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것이다. 화두 참구법은 지금까지 인간이 개발한 가장 확실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화두(話頭)란 참선자가 참구해야 할 문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칙(古則) 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조사 스님 이 말씀하신 법문이나, 종사(宗師) 스님이 깨달으신 기연(機緣)이나, 학인을 가르치던 행위의 종요(宗要)를 모아 참선자에게 규범이나 과제로 준 것이 화두이인데, 화두는 옛 사람이 만든 규범, 즉 법칙이라 해서 고칙(古則)이라 하고, 공부(公府), 즉 관공서의 안독(案犢), 법령과 같이 준엄한 것이라 해서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 것이다.예를들어 화두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어떤 학인 스님이 유명한 조주(趙州) 스님께 물었다."조사(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화두는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화두는 외우고 생각해서는 몇 년을 하고 몇 십 년을 해도 진의(眞疑)가 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화두참구는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뭣꼬?"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라 했을까?"하고 의심을 지어가야 한다.화두의 생명은 의정이라는 것을 알고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정은 화두를 보는 길잡이이다. 의정이 없는 화두는 화두가 아니다. 의정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는 화두 공부가 아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키는데 뜻이 있다.그리고 그 의정은 크게 일으켜야 한다.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칠 수 있고, 의정은 크게 일으킬수록 좋다. 의정이 없으면 깨치지 못한다는 것을 꼭 알아둬야 할 것이다.둘째, 화두에 대한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내가 하는 화두를 참구하면 나도 깨칠 수 있다, 나도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 화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다.'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온전히 믿어야 한다. 그래서 화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거나 사량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셋째, 화두는 간절하게 들어야 한다.옛 선사의 말씀에, "화두 공부는 간절 절(切)자 한 자면 족하다."고 하였다. 어떤 스님은, "참선하는 데는 간절함 한 마디가 가장 요긴하다." 하였고 어떤 선지식은, "참선자는 간절 절(切)자를 이마에 써붙이고 다녀라." 하였다.화두는 참으로 간절하게 들으라는 것이다. 화두참구에는 여러 말이 필요치 않다. 오직 심하게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간절 간절하게 화두 참구로 들어가면 된다.마지막으로 선의 효능(效能)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첫째, 선은 안심(安心)을 얻게 한다. 즉, 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이뭣꼬?" "어째서 무(無)라 했을까?" 지극하게 참구하여 진의(眞疑)가 돌발하면 화두만 간절하게 들릴 것이고 화두에 의심이 간절하게 일어나면 일체의 번뇌와 망상이 사라지면서 괴로운 마음, 슬픈 마음, 성내는 마음,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 불안과 공포, 일 급한 성미도 느린 듯 침착해지고, 행동도 중후해지며, 자세도 의젓하여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 모습이 사라지게 된다.즉 큰 사람으로 진면모(眞面模)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다섯째, 일에 능률이 오른다.선수행을 하여 도덕을 갖추게 되면 자연스럽게 능력을 갖추게 되고 능률도 오르게 된다. 능률을 올리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데, 참선자는 화두하듯이 일하는 데도 정신을 집중하니 일에 열중하게 되고, 일을 열심히 빠지듯이 하니 능률은 오를 수 밖에 없게 된다.무슨 일이든 정신을 집중해서 해야 한다. 머리를 쓰는 사람일수록 반드시 집중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그런데 일하는 데 정신 집중은 묵조선이 더 효과적입니다.여섯째, 질병을 고칩니다.선수행을 잘하여 마음이 고요해지고, 몸도 편안한 상태가 되어 오묘한 법열을 느끼는 경계가 되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좋아진다.이런 경계에서는 우선 몸은 맑고 가벼워지고, 맑고 가벼워지면 기분은 저절로 좋아진다. 또 육체 깊은 곳에서 묘한 즐거움까지 느끼면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이렇게 좋은 기분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면 왠만큼 안좋던 건강도 어느 사이 좋아지고, 오장육부의 기능이 원만해지고 신진대사(新陳代謝)가 촉진된다.옛 사람 말씀에, "수행이 지극하면 노쇠(老衰)해서 시들어 가거나 병약한 사람도 고목에서 꽃이 피듯 건강을 되찾고, 노화방지도 되어 장수하게 된다."고 하였다.선수행은 특히 신경 계통의 병에 좋은 효과가 있다.일곱째, 신통력이 생긴다.공부가 깊어지면 신통한 경계를 느낄 때가 있다.신통(神通)이란 보통 사람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 걸림이 없는 것을 신통이라고 한다.선은 신통력이 생길 정도로 대단한 힘과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다.여덟째, 깨달음을 얻게 된다.선의 목적은 깨달음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 효능은 깨달음으로 향하는 수행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는 이익이라 할 수 있다.선의 이상은 스스로 자기의 성품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란 가장 완벽하게 인격을 갖춘 최고의 인간 광의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까? 지금 시중에서 펼쳐지고 있는 단전호흡 수련의 양상을 보면 본래의 뜻을 전하는 곳이 없다. 대부분의 단전호흡 수련에서는 精, 氣, 神만을 가지고 논하고 있고 精, 氣, 神에 관한 이론도 잘못된 중국 단학의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로 체계가 잘 잡혀 있다는 큰 단체는 어느 정도의 정통성이 있어서 수련법의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는 있으나 본래의 전통 수련법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血에 대한 수련법은 아예 취급을 하고 있지 않다.이렇게 깨달음이라는 알맹이가 없이 행공 동작만을 가르치다 보면 혹세무민 할 수가 있다.氣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氣를 이용한 능력을 앞세워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허상에 얽매이게 하는 많은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단전호흡이라는 정의를 확실하게 내려보면 우리 몸에서 순환하고 있는 心(神)과 氣와 血과 精을 모두 단련하는 호흡이라고 할 수 있다.사실 돌단자리를 단전(丹田)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데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血은 그 자체적으로 붉기 때문에 丹이라고 할 수 있고 나머지 心과 氣와 精은 돌면서 우리 몸의 열을 내는 역할을 한다. 열을 낸다고 하는 것은 불을 의미하고 불은 붉게 나타나지 않는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 心(神),氣, 血, 精을 모두 丹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더욱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田에 관한 의미이다. 돌리면서 단련을 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팔이나 다리에 흐르고 있는 혈관은 단전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핏줄이라고 한다.그러면 어떤 자리를 단전(돌단자리)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心(神)과 氣로 본 단전, 血과 精으로 본 단전으로 나누어서 본래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먼저 心(神)과 氣로 본 단전을 알아보자.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心(神)과 氣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허상이다.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인정을 하고 그 진의를 찾을 수 있는 반면 눈에 보
★사형존폐론★Ⅰ.머리말1.사형제도의 의의사형은 수형자의 생명을 박탈하여 그 사회적 존재를 영구적으로 말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형벌이다. 사형의 본질은 생명의 박탈이므로 이를 생명형이라고 말하고, 또 형벌의 성질상 가장 중한 형벌이므로 이를 극형이라고도 한다. 생명형?극형(極刑)이라고도 하는 사형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그 대가로 행해지는 형벌 중 가장 무거운 형벌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형벌이다. 여기서 우리는 형벌의 한 수단으로써 사형제도의 의의를 내릴 수 있다.하지만 형벌은 인권 침해를 막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국가 구성원의 합의 하에 만든 제도이다. 즉 형벌의 궁극적인 목적은 수형자로 인한 다수 비수형자의 인권 침해를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형제도는 수형자의 생명을 박탈해야 한다는 행위로 인해 인권보호와 인권침해라는 양면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권 보호를 위한 인권 침해의 제도’라는, 사형제도의 또 다른 의의를 알 수 있다.2.사형의 역사사형의 역사는 비 기록적이고 추론적으로 살펴 볼 때 그 시초는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있다. 고대에는 제한적인 자원의 소유를 위해 전쟁이 일어났는데 자신이 가진, 자신이 속한 그룹의 자원을 무력에 의해 빼앗겼을 경우 자원을 빼앗긴 그룹은 다시 자원을 확보 하기 위해 자원을 빼앗아간 그룹에 대해 다양한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그중 빼앗은 것 만큼 다시 빼앗아 온다는 행위도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빼앗긴 그룹이 빼앗아간 그룹의 ‘빼앗음’이라는 행위를, 증여 또는 대여라는 의미의 허가된 행위가 아닌 무허가의 행위라 판단하에 일종의 징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응보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행해지는 살인은 빼앗김을 당한 쪽에서는 합법적인 행위라 할 수 있고 이는 사형이 가지는 형벌적인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렇듯 고대시대에서 형벌은 개인의 복수심 또는 집단간의 복수심을 기초로 하여 주로 응보의 목적에서 행해졌다. 이때의 형벌은 원한이라는 감정적 판단에 는 1998년의 2,258명에 비해 그 수치가 감소되기는 하였으나 1999년 한해동안 세계 31개국에서 총 1,813명 이상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63개국에서 총 3,857명 이상이 사형을 선고받았음을 확인하였다고 하며 실제수치는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사형제도 폐지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98년 105개국에서 3개국이 늘어, 21세기에 들어선 현재 총 108개국이 법률상 혹은 실제적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하여 세계 반 이상의 국가가 법률상 혹은 실제에 있어 사형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내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한 국가 : 73개국-일반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한 국가 : 13개국-사형은 존치하나 최근 10년 이상 선고?집행을 하지 않은 국가 : 22개국-여전히 사형을 존치하고 있는 국가 : 한국을 비롯하여 총 87개국 - 매년 실제집행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그런데, 1999년 알려진 사형집행 중 85%가 중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콩고민주공화국, 미국에서 있었다.-중국 : 최소 1,077명 (실제 수치는 훨씬 더 높음) -비공식 사형집행이 많다.-이란 : 최소 165명 -사회가 불안정하다.-콩고민주공화국 : 약 100명(군사재판) -내전종식 후 사후처리.-사우디아라비아 : 103명 (실제 수치는 훨씬 더 높음) -전통적 가치관 우세.-미국 : 98명 -평소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라서 의외이지만, 각 주마다 다르다.즉, 특정 몇몇국가를 제외하면 사형은 전세계적으로 감소 및 폐지 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 30개 이상의 국가/영토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다.- 절대적 폐지국 :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한 나라로서 독일, 프랑스, 스웨덴, 필리핀 등 34개국에 이른다.- 상대적 폐지국 : 군범죄를 제외한 일반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한 나라로서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캐나다 등 18개국이다.- 사실상 폐지국 : 지난 10년간 사형집스의 사상을 카톨릭신학에 결부시켜 발전시킨 것으로 형벌을 과함으로써 균형을 회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형벌에 응보적 성격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다시 사형은 전체 사회의 질서를 방위하기 위하여 유익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물론 사형은 국가적 질서의 방위를 위한 것이므로 국가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위정자만이 형벌의 권한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사형을 적극적으로 찬미한 것이 아니고 사형 반대론에 대한 반박을 하기 위하여 사형의 정당성을 주장한테 불과한 것이었다.유명한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는 “형사집행을 위하여 검을 사용하는 것은 신에게의 봉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검을 휘둘러 살육하는 손은 이미 인간의 손이 아니고 神의 손이다”라고 하였다. 즉 사형집행을 위하여 검을 사용하는 것은 신성한 것으로 보고 이를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아이러니하게도 근대에 와서 사형폐지론의 계기가 되었던 계몽주의의 주창자들인 로크(Locke), 루소(Rousseau), 블랙스톤(Blackstone), 칸트(Kant)등의 대부분의 계몽주의사상가들은 사형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생명권을 가지고 있으나 살인자는 그 권리를 침해한 자이며, 따라서 범죄에 의하여 자신의 생명권을 상실당한 살인자를 처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루소를 예로 들자면 그가 말하기를 사회 계약론에서 사회계약은 계약당사자의 안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단에는 다소의 위험 그리고 다소의 손해까지도 있게 마련이다. 타인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타인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범죄자에게 과하여진 사형도 이와 똑같은 관점에서 고찰되어진다. 이 계약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생명을 양도할 것인가보다는 그 안전보증을 확보하는 것에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계약 당사자중에 계약시점에 있어서 자기가 교수 구형이 될 것을 예상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어서 자유적?합리적?인도적 형사정책의 노력을 섣불리 포기하려는 미신적 사고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형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법의식이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실정이다.④만일 사형이 폐지되었을 경우,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살인범의 생명이 희생된 피해자의 생명보다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보호된다고 할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의 생명과 인권의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근대법의 정신에 모순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절대적 정의와 근대법적인 평등이념에 입각하여 평등한 인격자로서 스스로 한 계약의 이행을 담보하는 수단으로써 사형제도를 찬성한다.반론:상기 주장은 보수와 응보적 감정을 기초로 하는 바 그 사상적 배후에는 인간의 생명을 부인하고 국가권력의 절대성을 옹호하며 지지하는 권위주의사상에 입각한 것이므로 사형은 인도적 견지에서 용납 될 수 없다.⑤사형은 정의의 요청에 부합한다.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의 존치는 일반인의 법감정과도 합치한다.⑥사형은 인간이 가장 애착을 느끼는 생명을 박탈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위하력을 가지고 있다.⑦사형은 국가사회의 방위를 위해 필요하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이 남북이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자에 대해서 사형에 적용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 진다.⑧오판의 예는 극소하다.⑨사형은 사형(私刑)의 방지를 위해 필요하다.2.폐지론근대 형법학의 시조로 불리우는 이탈리아의 밀라노 태생의 청년귀족 베까리아(Cesare Bonesana Marsese di Beccaria)는 사형은 정당한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사람은 사회와 계약을 할 때 생명에 대한 권리를 주권자에게 예탁해서는 안된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전제적인 왕권과 교권에 근거해 있던 형사제도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형벌제도를 사회계약설에서 구한 결과, 사형은 애초에 사회 계약의 본래적인 취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생명은 모든 인간의 이익 가운데서도 최대의 것이며 국민이 자기의 생명을 의하여 자기도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즉 바꾸어 말한다면 자기만 죽으면 타인을 죽여도 좋다는 정당화의 심리가 작용되어 살인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계약에 대한 규범적 약속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반론:만약 사형폐지의 입법을 한다면 어떠한 흉악범 또는 정치범도 그 생명만은 절대적으로 보장한다는 법률을 공포하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현재에 있어서는 사형의 존속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③사형집행이 범죄자를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범죄자의 죄질에 따라서 그가 죽을 때까지 교도소에서 노동만 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빨리 사형당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일정수준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범죄자가 사형을 염두해두고 더욱 극악무도한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범죄인의 죄가 커서 그를 크게 처벌해야 하는 경우 사면불가 조건의 종신형으로 교도소에서 평생 그 죄값을 치루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범죄자를 죽이는 것만으로 그 죄값을 다 치루게 했다고 볼 수는 없다.반론:피해자의 생명권을 침해한 극악한 범죄에 대한 사형은 책임주의와 일치하는 범위에서 유지되어야 한다.④사형제도가 억울한 사람이 범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집행된 다음 그 누명이 벗겨졌다고 할 때, 그 수습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집행시엔 법의 심판과 응징의 차원으로 행한 것이 억울한 피해자를 처형한 것일 때,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반론: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 없듯이 극소수인 사형제도의 오판때문에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다만 신중한 재판과 선고가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⑤사형은 야만적이고 잔인한 비인도적 형벌이다.⑥오판의 경우 구제가 불가능하다.⑦형벌의 교육, 개선적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⑧사형은 위하의 효과를 전혀 갖지 못한다.⑨사형은 피해자에 대해 응보감정의 만족은 줄 수 있을지언정 피해배상과 구제라는 실리적 목적의 달성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⑩범죄의 원인에는 개인적 원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