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복지란?복지에 대해 생각하면 그것이 지금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상당히 의심스러워진다. 우리가 내는 세금 중 일부를 모아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하기는커녕 항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형식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말이다. 복지란 무엇일까? 언제나 가진 자만을 위한,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일까? 아니면 국가 재정-정확히는 고위 공직자들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허울 좋은 것인가? 왠지 모르게 없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가 복지국가의 반열에 언제 들어서게 될지 의문시된다. 우리는 복지를 실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든 자료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물론, 지금 현 상황에서 한정된 국가 세금 재원을 바탕으로 복지에 많은 돈을 쏟기는 불가능하다는 상황이 있다. 바로 분단으로 인한 과다한 국방비. 분명, 지금 현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국방비에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하기에 어찌 보면 복지정책에 대한 비용을 늘리자는 방안은 먼 훗날에나 거론되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양 여러 나라들과 주변 각국들의 상황과 또한 현 시점에서 점점 더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를 생각하면, 솔직히 꼭 꿈으로만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끝도 없는 비관론 보다는 고쳐나가야 할 문제점과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모델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적어보도록 하겠다.앞서 이야기 했듯이 지금 한국은 결코 복지국가가 아니다. 복지국가로 조차 분류되지 않는 타 국가보다 더 적은 예산을 할애하고 있는 지금 무엇으로 복지국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복지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가능성에 대해 솔직히 부정하고 싶다. 우리는 급격한 경제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서구 사회의 많은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화인 마냥 흐름만을 쫓아왔다. 아마도 여기에서 일차적인 문제가 발생된 것은 아닌가 싶다. 분명 무엇을 시행해 나감에 있어 도입초반기에는 많은 부작용을 수반하기는 한다. 그러나 지금 시행되고 있는 4대 사회보험의 경우 복지를 위한 보험이 아닌 그저 사회적 저금통에 불과한 느낌을 준다. 자신이 낸 만큼 다시 돌려받기 위해 만든 거라면, 차라리 은행에 저금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것이 과연 복지인가? 이것은 국가에 의해 강제된 예금-이자율 0%, 오히려 더 많은 손해를 입는-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의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와 시장 경쟁에서 실패한 자에게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 복지란 무엇인가, 적어도 사회적 약자와 시장 경쟁에서 실패한 자들에게 한번의 기회는 주어야 한다. 하지만, 경제성장 과정에서 보여져 왔듯이 가진 자만을 위한 정책이 존재할 뿐. 일반 국민들에게 돌아올 혜택은 보장된 적도 만들어진 적도 없다. 무조건 서구식으로 가자는 서구 지향주의로 겉모습은 복지를 위해 내달리고 있지만, 속은 가진 자만을 위한 귀족 사회로의 회귀임에 확실하다.선 성장, 후 분배의 기치를 내세워 대기업 위주의 단기간의 성장을 노린 정책이 실패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분명 대기업의 성장으로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향상된 생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를 축적한 대기업이 힘으로 다시 힘을 갖는 사이클이 반복되게 되었다. 사회 전체적으로 퍼져야 할 부가 한 곳으로 집중되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빠르고 확실할지는 몰랐어도, 성급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빈부의 격차는 순식간에 몇 갑절로 불어났으며, 가진 자에 의해 복지에 대한 발언들은 흐지부지되어 왔다. 복지 정책과 경제 성장이 꼭 비교하여서 한 쪽이 무엇의 원인이라고는 말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나라의 모습에서 비추어 볼 때, 항상 그 사회의 부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많은 것이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고 빈자를 위한 정책보다는 자신들의 경쟁에 유리한 입법이 많은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대기업의 부를 뺏어 빈자에게 나눠주는 정책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부터 라도 많이 번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없는 사람이 적게 내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한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없는 사람은 더 없게 되는 것이 자유주의 시장 경제사회다. 우리는 이 점을 너무 간과한 것이 아닐까? 그 얄팍한 사회보험이라는 간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은 것은 아닐까? 과연 자유주의 시장 경제하의 사회 복지-저소득층에 초점을 맞추지만 낮은 수급을 주고 그들을 낙인 찍는 경향이 강한-가 사회적 약자, 경제적 빈자들 모두를 끌어 안을 수 없을 것이다.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지비용에 많은 세금을 쏟아 부을 수 없는 실정인 상황에서 복지 비용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세입을 늘리는 것은 올바른 것도 아니다. 복지 정책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옳다고 본다. 분명 복지에 대한 문제가 국가만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사회 성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수급 받는 입장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요구하고 내어줘야 할 것은 내어줘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우리의 자세도 문제가 있다. 각각의 입장만을 내세우며 파벌 식으로 나뉘어진 노조나 타 조합들의 모습을 보면, 다른 측면에서는 배가 불러하는 소리라고 비난을 듣기 일쑤이다. 가진 자만이 가진 것을 찾을 수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올바른 복지란 평등성의 강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너무도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유주의 복지국가의 모델조차 따라가지 못한 채, 유명무실한 복지 정책만을 양산하는 모습이 옳다고 볼 수 없다. 과거의 행정부의 잘못을 현재의 행정부에게 해결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예전부터 내려온 국민들의 정부를 바라보는 시선을 정부 스스로가 고쳐나가야 한다. 가진 자만이 국민, 사회 성원이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더 많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빈약한 복지체제를 부풀려 완벽하다고 밀고 나간다면 한국은 가진 자만을 위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에겐 복지보다는 자신의 권익을 보장해주는 더 많은 악법을 요구할 것이다.부의 재분배가 한국 복지의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받지 못한 그것을 분배 받고,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제도를 확립 시켜 나가야 한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복지가 뿌리 내리려면, 가진 자들의 희생과 적게 벌고 많이 내는 서민의 심정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로 따를 것이다. 너무 가진 자들만 희생시켜 하향평준화 되는 것은 아니냐는 반론의 제기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아직 재분배의 시점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 안다. 그러나 이 상황 그대로 이어진다면 사회적 약자, 빈자의 구제는 영영 해결할 길이 없을 것이다. 복지국가로 불리지 않는 국가의 복지 재정의 반에도 못 미치는 지금 현실을 타개 하기 위해 서민의 고혈을 짜내는 것보다, 가진 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조금 더 나누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 사회가 그들의 부의 보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주지 시키고, 그들 또한 실패자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과 가족에게 복지를 책임 지우는 것은 사회를 고사 시킬 위험성이 높다. 복지 국가의 반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가진 자와 없는 자의 합일점을 찾는 것이 지금으로선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가 스스로가 어떠한 복지국가가 되어야 하는 지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노르웨이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로 가기에는 무리가 따른 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하지만 자유주의 복지의 문제점이 들어 나고 있는 지금, 계속해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있는 복지 체계를 고수하는 것은 복지 퇴행의 길을 걷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한번의 실패로 낙인을 찍기보다는 마지막 한번의 기회라도 더 주어 더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복지가 아닐까 싶다. 국가 모두가 책임을 지는 것이 국민에게 또 다른 부담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가진 자가 더 많이 내는 세금 체계가 확립된다면 그리 큰 부담만은 아닐 것이다.최종적인 걸림돌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빈부의 격차일 것이다. 이 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한국의 복지는 단순한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 고려청자청자란 무엇인가청자는 고려 시대에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운 자기로 유약 가운데 미량의 철분이 있어 환원염(還元焰)에 의해 구워지는 과정에서 청록색을 띠게 된 자기로 순청자, 상감청자, 철회청자 등이 있다.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으면 유색이 녹황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띠게 되는데 그것도 청자라 부른다.고려청자의 특징고려시대 귀족문화와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청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통일신라시대 도자기 전통에 중국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발전한 고려자기는 중국 청자와 다른 독특한 푸른색을 개발하여 비색(翡色)이라 칭하는 독특한 유색(釉色)을 띠고 있다. 특히 상감기법(象嵌技法)은 세계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였던 중국에서도 만들어지지 않은 장식기법으로 고려청자만의 독창적인 특징이다.당시 고려청자와 같이 11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지는 경질자기는 중국과 우리나라 단 두 곳에서만 생산되었다.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원료 흙을 찾아 불순물을 제거하고 고운 입자로 정선한 후 적당한 철분 함량과 유약의 두께를 유지하고 도자기를 굽는 가마 안의 온도와 분위기를 환원염으로 조절하여야만 비로소 은은한 비색의 청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공들은 탁월한 미적 감각 뿐 아니라 실험적인 경험으로 이렇게 복잡한 여러 변수들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원하는 미적 효과를 얻으려면 어떤 기술을 조절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미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우리의 도자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려 청자의 대표적인 제작지는 강진과 부안지역으로서, 특히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고려 초기부터 14세기 후반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요지이다. 이들 요지는 대개 조창(漕倉)이 있던 바닷가 근처이며, 도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과 물, 그리고 땔감으로 필요한 나무가 무성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려청 상감청자의 전성기를 이루는 시기이다. 상감기법을 도자무늬로 응용한 시기는 대체로 의종 초년경이다. 상감청자는 청자의 비색 다음으로 그 특징을 들 수 있는데 12세기 중엽 이후 13.14세기를 거쳐 15세기 조선 분청사기와 백자에까지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상감기법은 12세기 후반이 되면 점차로 무늬가 복잡 화려해지고 사실적인 도안으로부터 공예의장적인 양식화가 현저해져서 그릇 내.외면에 빈틈없이 흑백 상감된다. 서해안일대에 주로 퍼져 있던 청자가마가 11세기 후반부터는 차츰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일대로 집중되기 시작하여 12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두 지역 외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는다.④말기(약 1275년경~약1391년경)말기는 고려사회의 큰 변혁기로써 도자공예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기형은 대형화하며 실용 위주로 변해가고 주둥이가 작은 당당하던 매병은 그 곡선에 변화가 오고 특히 앞뒤 배가 편평하고 넓어진 주둥이를 가진 편병의 출현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무늬에서는 전시대에 유행하던 상감무늬의 내용이 답습되나 점점 쇠락해지거나 생략되어 가며 조잡한 초화무늬가 전면에 시문되기도 한다. 또한 원의 영향을 받아 파도무늬, 용무늬, 물고기무늬, 쌍봉무늬 등이 등장한다. 특히 편병의 경우 앞뒤 편평한 곳에 능화형의 이중선을 돌리고 그 안에 누각인물무늬, 나무밑원숭이무늬,수조무늬, 매화무늬, 대나무무늬 등과 같은 무늬를 상감하는 새로운 현상도 보인다고려청자의 종류1. 순청자순청자는 상감이나 다른 물질에 의한 장식무늬가 들어가지 않는 청자를 말한다.음각, 양각, 투각기법으로 장식된 청자들과 동, 식물 등을 모방해 만든 상형청자등도 여기에속한다. 이러한 순청자는 고려시대초기부터 점차로 세련되어 12세기 초에는 그 정점에 이르며 12세기 중엽이후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때에도 꾸준히 제작되었다.그 절정기인 12세기 초 중기의 순청자는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었으며 유약 속에 작은 기포가 가득 차있어 반투명하며 이러한 유약과 바탕흙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표면이 염 번조였기 때문에 일부의 예를 제외하고는 황갈색인 경우가 많다. 또 대개의 경우 유약이 얇고 바탕흙 속에 모래 등의 불순물이 섞인 것이 많아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다.철화청자는 중국 송, 원나라의 자주요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1세기 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변조 수법이나 기형 문양에서 그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 말까지 계속된다. 초기의 청화청자는 조그만 접시나 바래기 등의 안쪽 면 사방에 새로 선을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성기(盛期)에는 병 종류에 당초무늬를 주로 하여 모란 무늬 이형 초목무늬, 새무늬, 버들무늬, 시명 등이 그려지며 말기에는 간단한 당초무늬가 그려진다.그릇모양은 매병과 광구장경병, 주전자, 기름병 등이 많으며 발색이나 문양 등에도 전형적인 고려청자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드물게 중국의 매병모양이지만 무늬가 간결하고 필치가활달하거나 아니면 중국적인 문양이면서도 소박한 필치와 구도에서 고려적인 특징이 엿보이는 것도 있다.고려청자의 용도청자는 지금에야 귀한 유물이라, 박물관 같은 곳에 전시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용기였다. 물론, 만들기 굉장히 까다로운 만큼 좀 부유한 층에서나 썼을 것이다.현재 발견되는 것 중에서 가장흔한 것은 '매병(梅甁)'이다. 매병이 우리가 가장 많이 본 고려청자의 형태일 것이다. 매병은 중국 청나라 쪽에서 유래된 말로 여기에다가 꽃을 장식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이야기이고 매병의 실제 쓰임새는 술병이다. 위 그림에는 뚜껑이 없지만, 본래는 뚜껑이 있었던 건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뚜껑이 분실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종류의 술을 담았는데 특히 인삼주 같은 것을 많이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 청자 중에 보면 인삼 잎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들도 꽤 있다.'내용물이 인삼주 입니다.'라는 일종의 표식인 셈이라고 한다.그 외에도 작은 기름병에서부터, 물병, 연적, 찻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고려시대, 부유한 사람들의 생활용기인 셈. 확실하기운이 감도는 청백색, 윳빛의 유백색등 세 가지로 나누지만, 이외에도 백자의 색깔 역시 청자의 경우처럼 다양하다.②백자의 기형청자에서 나타났던 절제미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청자에 비해 다소 서민적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는 격조와 서민성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백자의 포용성에 대한 칭찬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기형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백자 주병을 보면 아래로 처져있는 배 부분이 마치 만삭의 산모 둘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풍부한 느낌을 준다.유명한 백자 항아리를 보면 우주의 공전운동을 연상시킬 정도로 풍부함과 함께 신비감을 느낄 수 있다.③백자의 문양백자가 후반부로 가면서 용이나 호랑이 등을 그린 소위 청화백자(백자청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만히 그림들을 살펴보면 중국 도자기에 자주 등장하는 용이나 호랑이와 조선백자에 등장하는 그것들의 모양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우리 선조들의 창의성, 문화적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조선백자가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백토를 이용해 기물(器物)을 만드는 것은 이미 중국의 은대(殷代)부터 시작되어 백자는 육조시대(六朝時代) 이후 수대(隋代)를 거쳐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도자생산에 있어서 청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것은 당대(唐代) 형주요(邢州窯) 이후이다. 송의 정요(定窯)를 비롯해 원대(元代)에 이르러 경덕진요(景德鎭窯)가 크게 융성하면서 백자의 생산은 가속화되었고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명(明)·청(淸) 대에는 다양한 채색(彩色) 자기와 함께 백자 중에서도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유명해 우리나라·일본·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 각국에 전래되어 영향을 미쳤다. 푸젠 성[福建省] 덕화요(德化窯)는 지방의 백자가마로서 유백색의 치밀한 백자를 생산해 세계로 수출했다.조선백자의 종류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가 만들어졌으며, 그 수법은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 물감(안료쪽의 좁은 면에는 파도 무늬를 양각하고 그 위에 해태 모양의 물구멍이 있으며, 그 반대쪽과 뒷면에는 매화를 양각하였다.③ 음각백자: 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④ 투각백자: 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투각백자 연환문필통(連環文筆筒)은 푸른색이 감도는 유약을 칠하였으며, 밑으로 크게 처져서 가로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옆으로 고리 세 개씩을 연결하면서 고리는 물론이고, 고리와 고리를 연결한 십자형(十字形) 줄기의 공간도 투각하였다. 아래쪽은 사십자형(斜十字形) 무늬를 새겼으며, 그 때문에 생기는 사각형 공간도 투각하였다.⑤ 상형백자: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색을 좋아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때로 효과를 무시하고 백색만으로도 만들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복숭아연적은 굵은 가지로 받침을 만들고 복숭아에 긴 잎이 붙어 있어 끝이 뾰족하고 안으로 홈이 패어 있는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2) 청화백자: 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일본 전통문화의 이해경영정보학과2003280035장준영①무사도의 성립일본의 武士道(무사도)는 일본의 춘추전국시대에 전투를 業(업)으로 하는 계급집단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封建制(봉건제)의 확립과 함께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기로는 12세기 전후인 일본의 平安時代(평안시대), 한국사에서는 高麗仁宗(고려인종)의 시대, 최충헌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잡은 시대, 서양에서는 제3회 십자군의 원정과 거의 같은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초창기의 무사집단은 都城(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출신자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용맹성은 인정되었으나 처음부터 학문과 도덕성을 겸비한 엘리트적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거칠고 품위가 없이 蠻勇(만용)만을 부리는 집단이었다. 이러한 무사집단은 서로간의 개성이 인정되고 상호간의 윤리가 통용되는 규범이 필요한 법으로 이러한 집단 의 상호윤리규범의 필요성에 의해 탄생된 것이 바로 武士道인 것이다.(前岡純一(전강순일), 1992, 9)주니치 마에오카(前岡純一)에 의하면 武士道란 武士와 道가 합쳐진 말이며, 다시 武士는 武와 士로 나뉘고, 武는 止(지)와 戈(과)로 이루어졌으며 止는 足(족)으로 발자취, 선다, 막는다, 간다의 뜻이고, 창(戈)을 가지고 전장에 나가는 뜻이며, 武字(무자)는 본래의 의미는 창을 멈추게 한다. 전쟁을 끝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으며, 다음에 “士”란 어떤 종류의 큰 도끼를 가지고 부릴 수 있는 재능 있는 자, 戰士(兵士), 전문적 道와 藝(예)를 수업한 자의 지칭, 武士의 뜻이며 道란 行한다, 바르게 한다. 다스린다, 이끈다, 펼친다, 돕는자“의 뜻이다 라 하여 무사도란 봉건적인 집단의 계급인 무사가 항상 갖고 지켜야할 도덕적, 윤리적 규범의 그 자체를 말한다.(김정행, 1997)②사무라이1) 사무라이의 신분사무라이는 본래 일본 봉건시대에 처음 생겨난 무사계급으로 한자로는 侍(시)라고 쓴다. 侍는 ‘모신다’ 는 뜻으로 당시 영주와 같은 귀인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인)?勇(용)을 목표로 극기훈련을 그 정신적 요체로 한다.사무라이는 최초로 나라(奈良)시대 말기의 광인(光仁)천황 보룡(寶龍)연간 서기 770년 전후에 출현하게 되었다. 당시 황실의 실권은 미약했으며 대장원을 소유한 호족들의 세력이 발호할 무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 보호 및 확장을 위하여 동족의 자제들과 수하들의 무장화를 통하여 무장세력을 양성화하였으며, 이러한 상설된 무장집단을 ‘사무라이’라고 하였다.초기의 사무라이의 신분은 귀족 수하의 노복(종)에 불과하여 농민과 함께 ‘家人(가인)’이라 불렸으나, 헤이안조(平安朝)이후 무사계급이 발달됨에 따라 官(관)이나 院(원)에서 경호를 위한 무사계급의 필요성에 따라 점차 특수한 집단으로 세력과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다.1192년 관동의 사무라이 집단은 군사권력 기관인 幕府(막부)를 설립하여 중앙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지배계층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당시 법에는 郞黨(랑당)을 거느리고 말을 탄 무사를 사무라이라고 했으며,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상급무사를 사무라이라 칭하였다.1603년경 에도(江戶)시대에는 도쿠가야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사무라이의 신분을 고정 시켰다. 법령의 내용으로는 첫째, 士. 農. 工. 商중 士에 속하는 자를 사무라이라 칭한다. 둘째, 신분은 세습가능하고 계급의 전환을 금지한다. 셋째, 사무라이들은 특수한 신분의 표시로 허리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닌다. 당시의 사무라이들은 특권계급으로서의 법적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이는 家康遺訓白條(가강유훈백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는 사민의 우두머리로서 농. 공. 상 무리들은 사에 대하여 무례를 범하여서는 아니 된다. 무례라는 의미는 곧 마음속에 사무라이가 없음을 가리킨다. 마음에 사무라이가 없는 자에 대하여서는 사무라이는 그를 죽여도 괜찮다.”(강효백, 1995)도쿠가와 시대의 사무라이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武人은 아니었다. 그들은 점차로 그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執事(집사), 고전극이나 茶道(는 그들의 소관이었고, 다이묘의 策謀(책모)는 그들의 교묘한 술책에 의해 수행되었다. 태평한 200년은 긴 세월이라 할 수 있다. 또 단순히 개인적으로 칼을 쓰는 기회도 제한되었다. 마치 상인들이 엄중한 신분제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도시생활과 예능과 오락에 높은 가치를 두는 생활양식을 발달시킨 것처럼, 사무라이들도 늘 칼을 뺄 준비를 하면서도 평화의 기술을 발달시킨 것이다.(국화와 칼, 1991)일본의 무사계급은 전답을 가지지 않은채 領主(영주)가 사는 도시에 살면서 그들의 세습지위에 걸맞은 祿俸(녹봉)을 영주로부터 받았으며, 영주의 지역 안에 거주하며 행정 사법의 직무를 맡았다. 그들의 지위와 祿俸은 세습되었으며 그들은 영주로부터 자신들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였으며 직무에도 충실을 기하였다. 이러한 영주와 무사계급간의 관계는 무사계급으로 하여금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 같은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업무에 비중을 두게 되었으며 또한 청렴까지도 요구하게 되었다.이러한 사실들은 그들로 하여금 독서에도 힘쓰며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하였으며, 관직에 긍지를 갖고 자신의 영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약속하며 君主나 領主에게 순종하고 아울러 지식과 책임감도 갖게 되었다. 일본인 지배계층의 滅私奉公(멸사봉공)의 정신과 淸廉潔白(청렴결백)의 정신은 江戶時代(강호시대)의 무사계급의 세습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2) 사무라이의 윤리 및 삶의 태도무사계급의 중요한 윤리로 忠외에 勇을 생각 할 수 있다. 유교의 고전에 친숙한 무사들은 中庸(중용) 제 20장의 “知仁勇三者(지인용삼자), 天下之達德也(천하지달덕야)에 착안하여 그것을 武士道의 勇과 결합시켰다. 예를 들어 古學派(고학파)인 오규 소라이는 이 한구절을 주석하여 ”용감은 역시 성인의 큰 덕이다....... 대개 성인의 덕 가운데 그 큰 것을 들자면 仁智(인지)가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勇을 들어 그것들을 거들게 한다면, 군자로서 무사의 갖춤이 없을 수 없다“고 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오규 소라이는 “辨名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勇武에의 관심은 중국유학 예를 들어 陳淳(진순)의 “北溪字義(부계자의)” 등에는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이다.이와 같은 勇武의 덕목을 중시하는 사회통념 속에서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 기초를 둔 자본주의 경쟁원리를 비교적 쉽게 도입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은 ‘의강능약(倚强凌弱)’을 경계하며 경쟁보다도 상호부조를 중시하여 경쟁원리에는 잘 대응할 수 없었던 중국과는 대조적인 결과를 이루었다.(동양사상과 사회발전, 1996)한편 사무라이는 主君에 대하여 무조건 복종함을 원칙으로 하며 주군에 대한 반항을 가장 극악한 죄로 간주한다. 주군은 부하 무사에게 ‘領地(영지)’를 내림으로써 은혜를 베풀며 사무라이는 전쟁에 나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또한 사무라이는 家長의 가르침에 복종하며, 가장의 가르침에 불복하는 자는 ‘義切(의절)’의 방식으로 불복자의 명예와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사실은 계급과 질서의식의 고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사무라이의 이상적인 생활방식은 ‘피’ 와 ‘눈물’이라는 상반된 개념으로 표현 될 수 있다. 여기서 ‘피’는 전투정신과 영웅적 기백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들은 죽음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눈물’은 약자에 대하여 보이는 동정심을 의미한다.사무라이의 생활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철두철미한 반성적 태도. 즉 사무라이는 자신의 인격에 맞는 행동을 하였는가 항상 검증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둘째, 사무라이는 생활의 검소, 소박함을 중히 여기며, 전쟁에서는 사무라이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셋째, 그들에게 있어 염치를 아는 것이 최고의 도덕준칙으로, 명예가 훼손되었을 경우 ‘割腹(할복)’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애쓴다. 이때 목숨을 버리면서 수호하려고 하는 곳은 개인의 명예가 아닌 사무라이의 신분과 명예를 의미한다.(강효백, 1995)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정치사회학자인 Rieseman은 사무라이의들은 강렬한 감정적 색채를 띤 사회도덕과 여론의 구속력과 집단 안의 개인의 명예를 중시한다고 하였다.전통적 일본사회의 지배계층은 사무라이들이었으며 그들은 일상생활에서의 節約(절약)과 儉素(검소)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지배계층이 사회의 전반적인 것을 유도한다고 했을 때 현대 일본인들의 절약과 검소의 정신은 바로 위로부터의 행위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③무사도 ? 기사도 ? 선비정신공통점차이점무사(일본의 사무라이)봉건 사회의 산물로서 주군에 대한 충성과 대인관계에서 신의, 싸움에서의 용기, 약자에 대한 배려를 기본 규범으로 삼고 명예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다.엄격한 주종관계(충성과 복종)기사(유럽)엄격한 주종관계(충성과 복종)선비(한국)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지님임금이 부당한 행위, 정치에 대해 목숨을 걸고 비판영화와 무사도라스트사무라이줄거리:"사람들은 일본은 칼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라고 한다. 그들은 옛날신이 산호 잎을 바다에 담갔 다가, 다시 꺼냈을 때 네 개의 완전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 방울들이 일본이 된 것이다. 내 생각엔 일본은 소수의 용맹한 자 들의 의해 만들어졌다. 전사들은 그들의 생명을 내던졌다. 이젠 잊혀진 단어 '명예'라는 것을 위 해."조국과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터를 누볐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 그러나 남북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변했다. 용기와 희생, 명예와 같은 군인의 덕목은 실용주의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대 흐름에 밀려 설 자리를 잃게 되고, 그가 참여했던 전쟁의 명분조차 퇴색해버리자 알그렌은 허탈감에 빠진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선 또 한명의 무사가 가치관의 혼란 속에 갈등을 겪고 있었다. 황제와 국가에 목숨 바쳐 충성해온 사무라이의 마지막 지도자 카츠모토가 바로 그이다. 미국이 신문명의 조류 속에서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던 그 시기에 일본의 전통 문화 역시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개혁의 홍역을 앓고, 새롭게 도입된 철도와 우편제도는 사무라이가 수세기 동안 목숨 걸고 지켜온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