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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프레스터존의 전설
    프레스터 요한과 그의 왕국은 실존하는가? 아니면 허구인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중심주의적, 자문화 중심주의적 역사왜곡의 매개체로서, 그리고 대항해시대 동인으로서의 프레스터 요한(존)의 전설에 대하여.....그리스 신화나 전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동방견문록에서 지루할 때 마다 간혹 등장하여 호기심 자극제 역할을 했던 전설들과 신비한 일화는 나를 흥미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서 동방견문록의 몇 군데에서 가끔 언급되고 있는 프레스터 요한의 전설에 대해서 알아보고, 다른 관련 도서를 참고하여 그 의미 또한 알아 보고자 한다.중세 유럽에는 매우 그럴 듯 하게 회자되었던 한 왕국의 전설이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프레스터 요한(존)의 전설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많은 지면은 아니지만, 프레스터 요한과 그가 군주로 있는 왕국과 관련하여 간헐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뒤에서 재차 언급을 하겠지만 마르코 폴로 또한 당시 기독교 중심주의적 세계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기에, 전설의 왕국을 믿었고, 프레스터 요한이라는 인물을 칭키스칸 이전에 몽골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케레이트(kereit) 왕국의 옹 칸(Uncan)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럼 마르코 폴로 조차 굳게 믿고 있었던 프레스터 요한은 누구이며, 그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중세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어떠한 역사적 조건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지금부터 약 천 년 전, 중세 유럽인들은 동방세계 어디엔가 거대한 기독교 왕국이 존재하며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력한 사제왕이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당시 지중해 동쪽 레반트 지방에서 무슬림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십자군은 동방의 기독교 군주 요한이 어서 빨리 와서 ‘사라센’을 물리쳐주었으면 하고 고대했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고 매달렸던 ‘요한의 왕국’은 한낱 허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동방견문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는 것으로 보아,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동방에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고, 그들은 아시아 내륙지방의 초원과 사막, 인도와 중국 등지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다만 서구인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사라센’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왕국이 아니었을 뿐, 당시 서구인들이 동방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 근거 없는 환상이라고만 말하기는 힘들다.유럽인들에게 비친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은 페르시아 동쪽에서부터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지를 지배하고 있으며 윤택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게다가 요한 왕은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라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십자군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동방은 이슬람교가 지배권을 잡고 있어 이베리아 반도는 고사하고 예루살렘까지도 이슬람의 수중에 있었다. 그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서방의 십자군 원정은 좀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도들은 이슬람권보다 더 동쪽에 있다는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이라는 존재를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원군처럼 생각했다고 한다.전설의 왕국에 관한 최초 기록은 1145년 시리아의 위고 주교가 로마 교황청에 보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동쪽으로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으며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인 국왕이 성지 탈환을 위해 출정했습니다. 하마단을 점령했으나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환했습니다.” 라는 것으로, 이는 독일 역사가이자 성직자였던 오토가 기록한 연대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위고가 전해준 이야기는 과연 사실이었을까? 아니 적어도 어떤 역사적 근거는 있는 것이었을까? 위고 주교의 보고 내용은 1141년에 중앙 아시아의 사마르칸드 북방에 있는 카타완이라는 평원에서 역사적으로 길이 기억될 만한 전투였던, 이슬람권의 맹주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군주 산자르와, 카라키타이라고 불리는 집단을 이끌고 온 야율대석 이라는 인물의 전쟁이 프레스터 요한과 이슬람권과의 전쟁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기독교권 최대의 적인 셀주크은 당연했고 더 나아가 그들은 그가 기독교를 신봉하는 군주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소문이 와전된 것이 단순히 무지와 부주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독교가 아닌 야율대석의 중앙 아시아 원정이 사제왕 요한의 서아시아 원정으로 둔갑된 이면에는 소문을 전달한 사람의 의도적인 과장이나 그것을 듣는 사람의 희망적인 기대가 모두 작용 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무슬림측 자료 어디에도 사제왕 요한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유독 서구 기독교권과 동방의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만 그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던 것도 바로 이 양자가 요한의 전설의 공급자이자 소비자로서 일종의 재생산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제왕 요한은 바로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25년 뒤 1170년에 이 요한 왕의 서신을 옮겨 쓴 것이라는 글이 전 유럽에 유포되었다. 그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나 로마 교황에게 보낸 글이었는데, 프레스터 요한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동방 박사들의 후손이라는 것과 그의 왕국이 동쪽으로는 인도 끝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바빌론의 사막을 넘어서 바벨 탑에 이를 정도로 광대하여, 영토를 전부 돌아 보려면 4개월이나 걸린다는 것 등이 적혀 있었고 영토 안에 청춘의 샘이나 금은 보석이 흐르는 강이 있다는 것 등 그야 말로 낙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서신은 훗날 여러번의 위조와 삽인된 흔적이 있다는 점이 지적 되었다고 한다. 이 서신의 원문을 분량상 여기에 다 기제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내용의 이면을 깊이 성찰해보면, 동방의 어떤 인물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 서구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관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요한의 편지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어떤 동방의 군주가 쓴 것이 아니라 유럽인의 작품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런 편지를 써서 유포시킨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이 편지의 이면에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즉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대립과 충돌, 십자군 왕국들과 비잔틴 제국 사이의 알력과 배신은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깊이 병들게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편지의 작자는 요한의 이름을 빌려서 유럽의 상황을 맹렬하게 질타함으로써 화해와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이 나라에 대한 그 후의 이야기는 1221년에 알려진다. 동방의 위대한 그리스도교도인 군주인 다윗왕이 이슬람군과 싸워서 정복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 유럽은 이 소식에 어쩔 줄 모르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을 격파한 자는 그리스도교도 왕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야만스럽기 그지 없는 칭기스칸 이었다. 즉 칭기스칸이 이슬람권을 대표하던 하레즘측과 군사적 충돌을 벌인 것이 마치 동방 기독교 세력의 서방진출의 결과로 이해되었고, 그 모든 활동을 거대한 기독교 왕국의 군주 ‘다윗왕’의 것으로 인식한 것이며, 사제왕 요한에 대한 환상을 집요할 정도로 간직하고 있던 서구인들은 ‘다윗왕’을 그의 후손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제왕 요한에 관한 소식이 최초로 서구에 전달된 1145년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그의 후손 다윗 왕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오고 있다는 1221년경의 소문 역시 우연히 생겨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파된 것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집단에 의해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즉 수적으로는 적지만 여러 곳에 흩어져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은 정치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며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되고 주장함으로써 요한 왕의 설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사정을 몰랐던 서구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희망에 따라서 이해했고 동방세계에서 출현한 기독교 군주가 장차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위기에 빠진 십자군을 도와줄 것이라는 꿈을 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의 꿈은 깨지고 말았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복제국의 발말굽소리에 온 유럽은 두터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유럽에 전해진다. 1202년경에 칭기스칸이 요한왕을 죽이고 그 딸과 혼인했다는 요한왕의 사망 소식이 온 유럽에 전해졌다. 물론 사제왕 요한이 죽음을 당했다는 이 이야기에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즉 칭기스칸은 처음에 몽골리아 최강의 세력을 자라하던 케레이트족의 옹 칸 휘하에 있으면서 그를 도와 여려 차례 전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1202년에 칭기스칸은 옹 칸과의 우호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큰 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과의 혼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결과 1203년에 양측의 전투가 벌어져 케레이트측이 패배하고 옹 칸은 전사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케레이트족은 이미 오랜 전부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어 왔다는 측면에서 옹칸은 사제왕 요한으로 불린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또한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 폴로 특유의 상상력이 가미되고 루스티켈로의 문학적 수사까지 동원되면서 그전의 유럽인들의 보고 속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요소들이 첨가 되어있다. 그 중 하나가 사제왕 요한과 금왕과의 전투에 관한 내용으로, 이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또 하나는 사제왕 요한의 후예가 살아 있으며 대칸의 신하로 봉사하고 있다는 기록이다. 그는 중국 북부 내몽골에 있는 텐둑을 설명하면서, 그곳을 다스리는 왕이자 동시에 사제이기도 한 조르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조르지 왕은 요한의 자리에 계승한 여섯 번째 군주였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는 또한 대초원 부분에서 조르지가 요한의 손자였으며, 대칸의 명령을 받들어 카이두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많은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그러나 조리지가 사제왕 요한인 케레이트족의 군주 옹 칸의 후예였다는 마르코 폴로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성립될수 없다고 한다. 비록 이 두 부족이 모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했던 것은 사실이나 지리적으로 고비 사막의 이남과 이북에 떨어져 살고 있던 엄연히 별개의 집단 .
    인문/어학| 2005.06.18| 4페이지| 1,000원| 조회(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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