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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북한의 의생활 평가A+최고예요
    Ⅰ. 서론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독특성을 개발하는 사회로, 그 독특성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 패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식주라는 말 중에 의복이 여기에 적합한 표현수단이 될 수 있다.특히 한민족은 옛날부터 체면의 문화가 발달해서 먹는 것보다 먼저 의복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문화가 있다. 그러나 의복은 경제적 여건과 사회의 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 것으로, 특히 경제와 대중적인 선호도에 따라 패션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북한은 오랫동안 개방을 하지 않았고 폐쇄주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패션을 지켜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들의 옷은 거의 일편적인 패션이라는 것을 복 수 있고, 옷의 디자인들은 무척 단순하다.한복이나 양장도 단순하고, 절대 치마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이며, 옷들이 대체로 국민복처럼 활동하거나 근무하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조선옷(한복)을 일상복으로 널리 입고 있는 반면, 남쪽에서는 주로 행사복으로 입고 있다. 특이한 것은 남성들이 조선옷을 입지 않는다는 점이며, 대체로 남성들은 옷들이 양복이나 인민복으로 단순한 편에 속한다.북한도 가끔씩 의상전시회를 갖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의상발표회와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북한에서도 의상발표회를 할 때 모델들을 등장시키고 있으며, 현대 옷과 전통 옷을 병행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과거의 흰 저고리, 검은 치마의 전통에서 현대적 사회주의 미감에 맞지 않는다는 김정일의 교시가 있은 뒤로 화려함이 강조된 것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의 조선옷은 남쪽 사람들에게는 현란해 보이기까지 하며, 진노랑, 빨강 색 따위의 원색 패션이 과감히 등장하고 문양도 돌출하고 있다. 당의 간부의 가족들은 양장을 할 때 상당한 패션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 80년대 중반이후에는 고위간부 가족이나 예술인들이 선보인 앞가슴이 패인 노출복장 등 각종 서구식 옷차림이 여성들의 욕구를 자극하여 패션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게 되면서{)두루마기를 해 입었으나 대개는 큰 저고리를 입고 살았다. 해방이 되자 북한의 의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물질적인 조건의 제한성과 전쟁으로 인한 모든 방직 등 피복생산 시설과 의복재료의 파괴는 의생활의 처지를 어렵게 하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그야말로 낡은 옷을 기워 입으면서 살아야 할 정도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전후 복구 건설 현장에 투입된 일꾼들의 형편없이 남루한 옷차림이 당시 북한사람들의 보편적인 복장이었다.해방 후 복식의 변화는 우선 조선옷을 변화시켜 그 결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키워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남자옷의 경우 조선저고리와 바지, 겉옷으로 나타났고 여자는 조선저고리와 치마, 겉옷으로 나타났다. 당시에 양복은 고급스런 옷이어서 여전히 부유층이나 식자층의 옷이었다. 따라서 조선옷의 계승은 남자옷은 간편한 방식으로 변화를 이루어 나가다가 나중에는 전혀 입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즉 여성들은 조선옷을 강조한데 비하면 남성들은 조선옷을 청산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보여주었다.여성들의 경우에는 조선옷이 상당히 중요한 옷으로 변천해 왔다. 그것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풍의 다소 획일적인 옷차림이 이루어지다가 그 이후에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색깔과 문양의 다양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조선옷의 개조가 이루어져 의생활의 다양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변화를 이룬 것이다. 따라서 현재 북한 사회에서는 남자들의 조선옷은 구경하기 어렵고 변화, 발전된 형식의 조선옷이 여성들에게만 입혀지고 있는 중이다.2. 북한 의생활의 변천과정북한은 모든 주민들의 복장을 사회주의 생활양식과 노동당 시대의 천리마 기수 들의 감정에 어울리도록 주체성 있게 발전시킨다는 목표 하에 경공업위원회의 피복공업총국산하에 있는 피복연구소에서 주민들의 직업, 체격, 연령 등에 맞는 옷의 형태와 규격을 연구하여 모든 의복을 규격화하고 기성복화 하여 왔다.해방이후 남자옷은 생산활동에서의 거추장스러움을 제거하기 위해 저고리고름을 떼고 단추 해방 전의 밑이 터지고 가랭이가 매우 넓은 옷에서 밑이 터지지 않고 가랭이도 좁아지고 바지의 아랫단 윗단을 달아 고무줄을 넣어 활동의 편리함을 강조하였다. 속옷은 경공업공장의 편직내 의류가 보급되면서 속속옷·바지·단속곳 등이 서서히 사라졌다.즉 여자옷도 시대적 요구에 맞지 않고 불합리한 것을 업애고 활동적이고 실용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이루었다. 어린이 옷의 경우는 색상에 있어 다양성이 채택되었고, 뜨개실을 이용한 간편한 양복 형식도 나타났다. 양복의 경우는 해방 전에는 양복 안 입는 것을 애국이라 생각했듯이 대개의 민중들은 양복을 못입었다. 해방 후 양복이 비로소 대두하였으나, 조선옷의 영향을 받고 온돌방 생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옷이 풍성하게 큰 것이 특징이었다.즉 해방 이후 전후복구 건설기까지 의생활 특징은 민족적인 옷차림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새사회를 건설하는 사람들의 요구와 미감에 맞게 간편하고 쓸모있는 방향을 개조를 이루었다. 동시에 민족옷과 양복을 입게 되면서 화동이 민첩하고 편리하게 되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제 옷차림도 사회주의적 생활약식에 맞는 다양한 것으로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즉 시대가 변하였습니다. 시대가 변화하는데 따라 사람들의 미감도 달라지고 생활풍습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민족적 전통을 바로 살리면서 현시대 사람들의 미감에 맞게 의복제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조선녀성」, 1980년 7월호)는 명제 아래 양풍을 따르거나 복고주의를 거부하고 점잖으면서도 노동에 편리하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옷 을 입는 방양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양복이 매우 중요한 옷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남자들의 나들이옷은 주로 양복이 되었고 여자들은 양복과 조선옷을 섞어 입었다. 양복은 주체적 입장에서 변화를 이루었는 바. 조선사람의 체질에 맞게, 기후조건에 맞게, 인민의 기호에 맞게 변화를 채택하였다. 무엇보다 옷색깔과 형태를 민족적 정서에 맞게 원색보다는 아름답고 선명한 분홍색, 연한 하늘색, 연한 풀색, 재색 등의 중1960년대 수준을 상시켜 주는 듯한 촌스러운 옷 도 많다. 물론 우리의 촌티라는 시각에는 서구의 패션문화를 거의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감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199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북한에서는 옷차림은 우리 인민의 감정과 취미, 생활기품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는 명제가 유효한 것이다. 가령 여자옷의 특징도 조선옷은 몸매에 어울리게 위가 짧고 아래가 길게 보이도록 치마저고리의 비례를 미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조선녀성」, 1990년 3월호) 색에 있어서는 단색보다는 삼회장도 하고 반회장도 하여 옷을 다양하게 만들어 입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따라서 북한 인민 들의 현재 옷차림은 전래의 조선옷과 주체적 입장에서 수용한 양복이 주종을 이루면서 의생활 풍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 일상복은 근로생활에 편리한 작업복이고, 학생들은 교복을 지급받는다. 옷과 관련하여 특히 여성들의 옷차림을 화려하게 해주는 각종 장신구나 화장품 등도 오늘의 한국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다. 양복 등을 맞추어 입는 데는 많은 돈이 지출됨을 앞에서 밝혔거니와,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생필품 이외네는 추가적인 선택의 폭이 좁은 것이다. 그 제품들의 질도 남한에 비하여 뒤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99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 사회의 옷차림에도 많은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고 최근의 각종 방문기들은 지적하고 있다. 반팔 티셔츠와 그 동안 금기시 되었왔던 반바지 착용을 허용하였고, 다양한 디자인과 제작방법을 청년전위, 천리마 등 대중잡지에 상세히 소개하였다.최근에는 평양 등 대도시에서 화려하고 다양한 서양패션이 일부 주민들간에 유행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영문이 표기된 옷과 치마바지, 청바지 등은 청소년들에게 입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Ⅲ. 옷의 종류앞에서 언급되었던 옷들을 종류별로 명확하게 갈라보기로 한다. 북한에서는 옷에 대한 개념 정리를 형식상 조선옷과 양복들로 기른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조선옷이 우선적으 등6)조끼치마목둘레를 허리선까지 깊이 파 준 조끼치마, 허리띠가 있는 조끼치마, 허리에 고리장식을 한 조끼치마, 단추로 장식한 조끼치마, 가름선이 있는 조끼치마, 어깨에 터짐이 있는 조끼치마 등7)외투허리띠를 맨 봄가을 외투, 웃깃이 둥근 봄가을 외투, 닫긴깃 봄가을 외투. 겹섶으로 된 봄가을 외투, 어깨달린 소매 봄가을 외투, 가름선을 이용하여 주머니를 낸 봄가을 외투. 가름선이 있는 봄가을 외투, 가슴에 둥근 바대를 단 봄가을 외투, 선깃으로 된 겨울 외투, 털깃으로 된 겨울 외투 등2. 남자옷남자옷은 크게 양복저고리, 적삼 및 와이셔츠, 잠바, 외투, 솜저고리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양복저고리덧붙이 주머니를 단 홑섶 양복저고리, 아래깃이 큰 제낀깃홑섶 양복저고리 등2)적삼 및 와이셔츠가름선이 있는 와이셔츠형 적삼, 어깨선이 앞으로 넘어온 와이셔츠형 적삼, 선깃 적삼, 제낀깃 적삼, 주머니에 선박이 장식을 한 와이셔츠, 가슴바대가 있는 와이셔츠, 장식주머니가 달린 와이셔츠, 어깨에 장식단이 있는 와이셔츠 등3)잠바제낀깃 잠바, 아래옷깃이 달린 잠바, 와이셔츠깃 잠바, 기슭단에 고무줄을 놓은 잠바, 가름선을 이용하여 주머니를 낸 잠바, 어깨달린 쇄잠바, 아랫깃 너비가 웃깃보다 더 넓은 제낀깃 잠바 등4)외투세폭소매 봄가을 외투, 덧받이와 가름선이 있는 봄가을 외투, 제낀깃 겨울 외투, 겹섶으로 된 겨울 외투 단긴깃 겨울 외투, 가름선이 있는 겨울 외투, 덧받이가 달리 겨울 외투 등5)솜저고리제낀깃 솜저고리, 가름선이 있는 제낀깃 솜저고리, 잠바형 솜저고리 등3. 어린이 옷어린이 옷에는 리본자식을 한 달린옷, 목둘레에 애기장식을 한 달린옷, 해군깃셔츠와 반바지, 깃없는 셔츠, 소매없는 달린옷, 목둘레에 나풀단을 단 달린옷, 가슴바대 셔츠, 조끼달린 달린옷, 수장식을 한 달린옷, 네모고대 셔츠, 닫긴깃 외투, 어깨달리 소매외투, 가슴바대 장식을 한 외투, 선깃 외투 등이 있다.4. 옷색깔과 옷차림1)옷색깔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생활
    사회과학| 2005.11.08| 9페이지| 1,000원| 조회(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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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북한과 중국의 관광 개혁 개방정책 평가B괜찮아요
    Ⅰ. 서론지구촌, 글로벌화가 되어지고 있는 세계는 혼자의 힘으로는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다. 인터넷, 교통의 발달이라는 급속한 문명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로 묶어 놓았고 이에 그 어떠한 나라도 독불장군식의 형태로 혼자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과거 공산주의라는 장벽으로 자신들끼리만, 혼자서만 살아가던 러시아, 중국과 같은 강대국들도 이제는 개혁개방의 물결을 일으키며 서방세계와의 접촉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넘어서서 이제는 타국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앞서 언급한 중국이나 러시아는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서방의 개혁, 개방의 물결에 동참하지 않은 채 지내오던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한계점을 드러내며 지금은 개혁, 개방의 물결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개혁, 개방과 발 맞추어 우리와 휴전선을 두고 대립하고 있는 북한도 조금씩 개혁,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흡족한 결과이지 않을 수 없다.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며 독불장군식의 모습을 보이던 북한이 이제는 자신들도 한계를 인식하고 경제특구 등의 개방을 하면서 서방세계와의 단절되었던 모습을 조금씩 벗어나며 우리와의 관계도 호전되고 있는 모습이다. 전 세계는 얼마전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으로 긴장감에 휩싸였었지만 북한의 핵무기를 포기함으로써 세계와 더불어 나아갈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북한의 개혁, 개방 모습을 지켜보며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북한의 개혁, 개방 정책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또한 북한에게 현재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해서도 알아봄으로써 두 국가를 비교하여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본 보고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경제, 정치 등의 개혁, 개방보다는 금강산관광을 시작으로 하여 개방되어지고 있는 북한 관광, 그리고 중국의 개혁, 개방 속에서의 중국 관광을 개방되어지는 시점으로부터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모색하고자 한다.Ⅱ.는 그 전 마오쩌둥의 공산 정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 발전으로 중국을 절대적 빈곤에서 구해냈으며 중국 내의 사람들에게 노동에 대한 동기 부여에도 기여했다. 덩샤오핑의 이러한 정책의 시행 이 후, 중국은 각 분야에서 무서운 속도로 그 지위를 향상시켜 나갔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란 미국이나 일본 등의 선진국조차도 자신들의 지위를 염려해야 할만큼 방대한 것이었다. 이런 중국의 모습 중에서 앞서 비교하기로 한 관광은 현재 중국이 기대하고 있는 발전 분야 중 하나일 뿐 만 아니라 실제로도 중국의 관광객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 유적지나 문화재 등은 중국의 역사만큼이나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99년 중국은 WTO가입 이후 관광분야에서 3년 이내에 호텔 투자의 100% 개방을 약속하였다.1) 관광 정책의 변화중국정부는 1990년 10월 동남아3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여행을 허용하고, 이어 1992년 7월 필리핀여행을 추가 허용하는 등 일련의 해외여행 완화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후 중국인의 해외여행자 수가 급증하자 중국정부는 1997년 7월 `중국국민 자비해외여행 관리임시법'을 발표하고 내국민의 해외여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중국관광정책의변화{1973년 이전1978년 이후외교적 수단외화획득의 수단감시·통제의 대상개발·지원의 대상중앙정부의 일괄적 운영지방분권화·민영화생산자위주 관광상품소비자위주 관광상품중국 관광정책의 변화는 중국정부가 관광을 외교적 수단으로만 인정하던 태도를 바꿔 외화획득을 위한 중요한 경제활동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1978년부터 일어났다. 중국정부는 이 때부터 내외국인의 관광교류를 감시·통제의 대상으로 제한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지원·개발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정부의 독점적인 여행업 운영도 점차 분권화, 민영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중국정부의 이러한 태도변화를 아래의 네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보았다.(1) 외교적 수단에서 외화획득의 수단으로개방정책 실시 이전까지 관광산업의 경제적인 면이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정부는 이제 관광산업을 중국근대화를 위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중요한 산업으로 간주하고 관광산업 진흥을 국가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실시하고 있다.(2) 감시·통제의 대상에서 육성·개발의 대상으로1964년에야 비로소 국가관광기구로서 중국여유국(China Bureau of Travel and Tourism: CBTT)이 국무원내 외교부 산하에 설립되었는데, 방중 외래객에 대한 비자발급이나 이들이 어디를 누구의 안내로 방문할 수 있는지 등이 철저하게 외교부의 통제관리 대상이었다.그러나 1970년 대말 관광산업이 급격히 성장하고 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여유국(National Tourism Administration of the People's Rspublic of China: NTA)는 종전의 시시콜콜한 개별적 관리를 그만두고 이제 전중국의 관광정책개발을 통한 거시적 통제에 힘쓰고 있다. 즉, 관광관련 제반 규정 및 법규 제정, 해외홍보, 관광정보 서비스제공, 지역간 원활한 협조를 위한 조정, 종사원 교육·훈련 등의 업무를 맡아하고 있다.(3) 독점적 여행업 운영에서 분권화·민영화로중국이 강력한 중앙통제에 의한 계획경제 체제하에 있고 관광이 외교적인 수단으로만 인식되던 시절, 관광업 경영은 공공사업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었고, 모든 여행사 업무가 중앙의 통제를 받는 소수의 여행사들에 의해 독점경영 되었다. 중국국제여행사, 중국여행사와 후에 추가된 중국청년여행사가 그러한 국영여행사들이다. 이 세 여행사들은 엄밀히 말해 독립된 여행사들이라기 보다는 정부조직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1996년 중국에는 4,252개의 여행사들이 영업을 시작하고, 359개 여행사가 일류여행사로 구분되어 해외여행 업무에 직접적으로 뛰기 시작했으며 쉐라톤, 홀리데이 인, 힐튼, 샹그리라 등의 호텔들이 사업을 시작하였다.(4) 수요자 중심에서 상품 중심으로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는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중화 파악의 중요성 및 마케팅 홍보 활동의 필요를 깨달은 중국 정부는 외국인들의 비자 및 국경통과 수속을 간소화하고 해외 주요시장에 관광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외래객 유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2) 중국관광 조직 구조도중국의 중앙정부조직으로서 중국 국가 여유국이 있어 중국의 국내외 관광산업발전을 위한 각종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방에는 중앙정부 조직과는 별도로 省級(성급), 市級(시급), 縣級(현급)의 관광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해당 지역의 관광산업 관련 업무를 관리하고 있다. 省 여유국은 각 省, 자치구 및 직할시에 설치되어 있으며 省정부의 지도와 국가여유국의 지도 아래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市 여유국은 지방 여유국이라고도 하며 지방정부 및 省정부의 지도아래 해당 지방의 관광산업 업무를 담당한다.(1) 중국국가여유국중국의 관광산업의 50,60년대에 외국의 귀빈을 외교적인 목적으로 환대 또는 감시하는 수단쯤으로 여겨지던 시대로부터 현재는 국가경제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기까지 국가관광기구로서의 중국국가 여유국은 다음과 같은 기능의 변화와 조정을 거쳐왔다.1 조직의 변화과정개방과 함께 중국정부는 관광산업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면서 중국여유국을 局(국)에서 部(부)로 승격하고 명칭을 중국국가여유부로 바꾸었다. 1981년 중국국가여유부는 외교부에서 분리·독립하여 독자적인 부서를 조직하고 인력을 보강하였다. 1983년에 중국국제여행사는 중국국가여유부의 하나의 하부조직으로 분류되고 중국국가여유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여유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993년에 중국국가여유국으로 다시 개칭되었다.2 현재의 기능현재 중국국가여유국은 9개국 1특별구(홍콩)에 11개 해외지사를 두고 활발한 국내외 관광진흥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명실공히 정부관광기구로서 산하기관 및 여행사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며 관광정책을 입안하고 행정업무를 관장한다..주요역할-관광정책 입안 및 행정관장-관광업계 지도 감독 및 관광사업체 인허가-관광시장 개척, 국가관광 이미지 홍보포르싱가포르독 일프랑크푸르크홍 콩홍 콩스페인마드리드호 주시드니(2) 국가여유사업위원회국가여유사업위원회는 1988년 5월 관광산업의 발전에 따라 관광행정 업무의 복잡성이 증가하자 관계부처간 협력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중국관광정책 조정기구이다. 국가여유사업위원회는 국가여유국의 상위기구로서 국무원가 같은 위상 조직이다..주요역할- 국무원의 비준을 받은 중국관광산업의 중대한 방침과 정책을 연구- 관광산업 관련 법령의 제정- 중요관광자원 개발계획 심사- 지방정부 스스로가 해결하기 어려운 관광산업 관련 문제 조정 해결- 기타 국무원이 위임한 관광산업 관련 업무를 담당Ⅲ. 북한의 관광개방정책1. 대외개방의 의의북한의 대외개방은 분명 김정일로 대변되는 정책결정자의 이해관계에 달려있다. 북한은 현재 체제유지냐?, 개방이냐? 의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의 흐름이 북한이 개방을 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정책결정자는 대외개방청책의 결정에 있어서 정책 수용정도를 고려해야만 한다. 여느 집단의 정책결정자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민감한 대외정책의 결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수용에 정도를 더욱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북한의 대외개방이 가지는 의미는 다른 나라들과는 다를 수 있다. 북한의 대외개방은 북한의 체제가 심각한 경제난으로 인해서 흔들리고 있다는 점과 다른 체제와의 융합을 내재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체제의 유지가 자신의(정책결정자) 생명과 동일시되는 북한의 사회에서 대외개방이 가지는 의미는 정말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궁영, ‘동북아 경제협력과 북한의 대외개방 정책’, 「통일경제」 96. 4, P.1092. 수용, 수용거부수용과 수용거부의 의지는 전적으로 정책결정자에게 달려있다.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수용과 수용거부 사이에는 집단간의 상당한 이해 간계가 존재할 수 있다. 정책의 수용이나 수용거부로 나타날 수 있는 효과에 대한 이익이나 손해의 측정이 이를 있다.
    경영/경제| 2005.11.08| 8페이지| 1,0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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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북한의 식생활 평가A좋아요
    Ⅰ. 서론북한의 경제는 이른바 자립적 민족경제체제를 표방하고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차등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경제구조 수립을 목표로 운영되어 왔다. 즉, 북한사회주의 경제의 운영은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추구하며 중공업·경공업·농업 등을 종합적으로 개발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자본주의를 배척하는 북한의 기본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이에 따라, 식량배급제를 사회주의체제 성립의 근간으로 삼는 북한에 있어 식량의 자급자족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었으며 김일성이 일찍이 쌀은 곧 공산주의 라는 말을 한 것은 먹는 문제의 해결없이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을 달성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때문에 북한의 음식이나 식생활은 현재 남한의 그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일제 식민지 해방이후 자본주의와 함께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남한은 식생활 역시 거의 서구화가 되어서 어떠한 면에서는 북한의 음식이 전통음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또한 북한에서는 과거부터 내려오던 의식주 라는 말은 식의주 라고 고쳐 부르게 할 정도로 주민들에게 먹는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특히 2002년에 있었던 경제관리개선조치{) 북한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물가와 임금의 대폭인상, 가격설정방식 개편, 공장· 기업소에 경영자율권을 부여, 국가계획수립권한의 일부 하부 위임, 분배의 차등화 강화, 사회 보장체계 개편(배급제 폐지)등의 경제조치를 단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에 의해 쌀의 수매가와 판매가를 대폭 인상한 것은 북한 경제에 있어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자체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한 결과 85년에는 이른바 알곡 1000만톤 생산 을 달성하였다고 발표하는 등 80년대 중반까지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으나 80년대 후반부터는 생산량이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생산과 분배의 딜레마, 90년대에 일어난 대홍수 등 자연재해가 농경지심으로 식량배급이 중단되기 시작했고, 2002년 5월부터 평양에서도 배급량이 300g에서 250g으로 줄어들게 됐다. 이러한 가운데 2002년 7월 1이부터 식량과 생활필수품, 그리고 교통비의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취했다.2. 식생활 풍습의 변화북한 사회는 일찍부터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진척시켰다. 이는 인민들의 생활영역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을 정착시켰으며, 필연적으로 식생활에서의 변화도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협동화 농장에서의 집체적인 생활과 더불어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강화되어 나가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그 결과 식생활에서 전래의 생활과는 많은 차이가 벌어졌다.먼저, 집에서 가정별로 마련하였던 장류가 우선적으로 공업화되었다. 가령 된장은 보통된장과 가공된장으로 나뉘며 공장에서 대량 생산 체제에 의해 생산된다. 1981년 기준으로 약 120여 종의 식료가공품 중에서 장류가 10여 종이나 된다. 따라서 우리 전래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된장·고추장·가장 등의 장담그기 풍습이 사라졌다. 참기름이나 들기름짜기도 공업적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밥공장도 만들어져서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먹는 식생활 양식도 부수적으로 이루어졌다.그 결과 중앙경공업 공장과 각 지역에서는 자체적으로 해당지역의 식료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즉, 각 지역의 자연적·경제적인 여건과 현실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특색있는 식료품이 개발되고 있으며, 유통의 문제도 지역단위를 우선 전제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북한의 경제운용에 있어서의 지역단위성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북한자료들에 보이는 사회 급양망 이라는 체계 역시 바로 식생활의 지역성을 잘 보여준다.결국 북한 사회에서의 식생활 변화는 식료품의 기계화, 자동화인 공업화로 귀결되었다. 여자들이 대거 노동에 진출하게 된 이유 외에도, 사회주의 계획경제 하에서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는 변화된 생활환경에 맞게 근로자들의 식생활을 원만히 보장해 주려면 식료가공 공업을 발전시켜 여러 가지 식료품을 공급하여야 한다 를 만들기도 한다.북한지역은 예로부터 쌀농사보다는 밭농사 농업지대이다.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잡으면 대부분의 논농사가 중부 이남으로 집중되어 있었으며, 해방 당시에도 사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쌀생산이 온난저습한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저수지나 댐 같은 수리시설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산이 많은 북쪽에서 쌀농사 짓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방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전국을 통틀어 쌀밥을 주식으로 먹는 경우란 지주들이 아니면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보릿고개를 면한 것이 아득한 옛날은 아닐 것이다. 쌀이 부족한 북쪽 지방은 보리·밀·귀리·수수·메밀·콩 같은 잡곡이 상당히 중요했다. 가령 같은 남쪽이라도 강원도 지방은 감자바위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감자를 많이 먹었던 사정과도 일치된다. 식량문제 역시 자연경제적 토대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더욱이 민족의 분단은 농업생산에서도 불균형 문제를 가져와 상대적으로 농지가 좁은 북한 지역에의 식량사정을 더욱 여의치 못하게 하였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건설한 북쪽 지방의 전력사업, 함흥 등지의 공업단지 등이 분단과 함께 북쪽에 잔류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남쪽이 낳은 고통을 당했다면 북한 역시 생필품뿐 아니라 농산물의 유통단절로 인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전쟁은 그나마 있던 농경지를 파괴하였으며, 심각한 식량사정을 야기하였다.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봉착한 것이다. 여전히 소농경영이 지배적인 여건 아래서 생산력의 급격한 증가도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북한의 식생활 사정은 전쟁 이후 전후 복구건설이 마무리되고 농촌경리의 협동화가 완성되면서 본격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대한 체제 에서 인민생활을 부단히 향상시키는 것이 우리당 활동의 최고 원칙 이라고 천명하고 있거니와, 농업생산력의 일대 증강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우선 주식에 있어서 쌀농사를 짓기 위하여 산간지역에까지 관개수리사업이 활발해졌으니, 농촌의 수리화·기계화·화학화가 촉진되었업반 과 분조 가 있으며, 관리감독기관으로서 협동농장관리위원회 {) 협동농장관리위원회의 임기는 1년이며, 리(里)인민위원장이 겸임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군 협동농장 관리위원회에서 모든 일을 장악하고 있다.와 협동농장검사위원회 {) 협동농장검사위원회는 5~15명 정도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검열 결과를 분기당 1회씩 농장원총 회 또는 농장원대표자회의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가 있다. 또한 의결기관으로서는 농장원총회 와 농장원대표자회의 가 있다. 생산물의 분배는 사회주의적 분배원칙, 즉 제공된 노동에 의해 분배되므로 노동의 질과 양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1) 분조관리제북조관리제도는 1965년 김일성의 강원도 포천협동농장 현지지도 시 창안되어 1966년부터 전국의 협동농장에서 도입·실시되었다. 작업반보다 규모가 작은 분조를 관리단위로 하여 협동농장원들에게 임무와 책임한계를 명확히 제시하여 집단주의정신을 발휘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북한이 1960년대 초부터 실시한 작업반우대제 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작업반우대제는 작업반의 생산량이 우대기준을 초과 달성하면 그 초과분은 공동분배에 포함시키지 않고 해당 작업반에게 우대 몫으로 지급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생산실적의 과대평가, 비현실적인 생산목표량의 설정 등 각종 부작 용으로 인해 실패하였다.2) 협동농장의 분배방법북한의 분배방법은 노동에 의한 분배가 기본적이다. 결산분배는 추수와 탈곡이 끝나는 연말에 협동농장별로 이루어진다. 협동농장에서 얻은 수입에서 생산비와 관리운영비 등 제반비용과 각종 공동기금의 조성금이 제외된 나머지가 협동농장원의 몫이 된다. 협동농장의 분배는 각 농장원의 작업 능률에 따라 노력일{) 노력일이란 농장원이 자연적 시간개념에 의해 작업에 참가한 날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협 동농장 기준작업정량표에 의해 평가된 노동일수를 말한다. 기준작업정량표에는 협동농자의 모 든 작업공정과 기본 노력일수가 표시되어 있다.을 확정한 후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한다.2. 식량난북한은 경기침체와 더불어 매년 엄동설한인 겨울철과 춘궁기를 넘길 수 있을까하는 우려가 제기될 만큼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 1991년 고깃국과 이밥론이 다시 등장한 김일성 신년사 를 통해 식량사정이 어려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 들면서 북한은 빈번한 자연재해와 병충해 확산, 토지의 산성화와 농민들의 생산의욕 저하 등으로 생산량이 급감하게 되었다.김정일은 옷감이나 집은 없어서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픈 것과는 타협할 수 없다 라고 강조함으로써 식량난 해결을 최우선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북한당국은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를 고수할 수 없고 강성대국 건설도 다그칠 수 없다는 생각에 식량문제해결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다. 1,500만 톤 알곡기지점령 , 30만 정보 간척지 조성 , 20만 정보 새땅찾기 , 다수확칭호 쟁취운동 등 각종 농업관련 사업을 추진한 바 있으며, 특히 1992년을 대농의 해 로 지정하여 식량생산에 주력하였다.관련기관이 추정하는 북한의 한해 곡물 수요량은 6백50만톤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북한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생산한 곡물량은 1991년 440여만톤, 1992년 420만톤, 1993년 380여만톤, 그리고 1994년에는 410여만톤 정도로 매년 200여만톤 이상의 곡물부족에 시달려왔다. 이에 따라 북한 당국은 1991년 130만톤, 1992년 83만톤, 1993년 128만톤, 그리고 1994년 36만톤 정도를 수입해 부족분을 근근히 메워왔다. 식량난의 근본원인으로는 첫째, 작물 생육에 불리한 기후환경{) 서리가 내리지 않는 일수를 나타내는 무상일수는 남한의 경우 제주도가 270일, 대관령이 140 일인 반면에 북한의 경우 135일, 원산이 201일로서 농작물이 자랄 수 있는 기간이 매우 짧다, 또한 북한지역에는 산악지형이 많고 토양에는 유기물 함량이 낮다.과 협소한 경지면적으로는 자급자족하는데 원척적으로 한계가 있다. 둘째, 생산의욕을 자극하지 못하있다.
    사회과학| 2005.11.08| 7페이지| 1,000원| 조회(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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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북한의 혼상제
    Ⅰ. 서론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태어나서 100일째 되는 날에는 백일상을 받고 돌에는 돌상을 받는다. 별탈없이 성장하여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고 아기를 낳고 살다가 환갑을 거쳐 때가 되면 죽음의 세계로 떠나며 장례를 치르게 된다. 남겨진 후손들은 조상들을 기리는 제사를 모시게 된다. 이같은 일을 일러 예로부터 관·혼·상·제라 불러왔다.관혼상제는 실로 오랜 전통을 지녀온 우리의 생활과 풍습의 전형성을 지닌 것이다. 물론, 봉건제하에서나 통용되던 유교적 관례는 남북한 모두 자연스럽게 사라졌으니 관혼상제란 말은 차라리 혼상제로 바뀌어야 할 상황이다. 민족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혼상제의 전통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결혼식을 한다든가 상을 입게 되면 바쁜 와중에도 가능한 한 들러서 인사드리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일은 전세계적으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나름대로의 풍습으로 존재하지만 우리 민족의 혼상제 예법은 특히 유난한 편이다.북한의 혼상제 등의 현주소를 살피는 일은 곧바로 북한 사람들의 전통생활의 전승 정도를 이해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사실 오늘날의 북한의 혼상제를 알려주는 자료는 매우 적다. 간혹 북한 방문기 등에 약간씩 언급되는 정도이고 그 구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방문지들조차도 40여 년 세월의 생활상의 변화추이를 제대로 알려주는 경우는 매우 적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참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들도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 혼상제의 모습들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다루는데는 매우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단계에서 북한의 혼상제를 살펴보는 일은 민족 동질성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북한 사회의 혼상제 역시 사회주의 생활양식의 문제 라는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한 대목이다. 오늘날 북한에서의 생활양식은 사실 세태풍속이나 가정생활에 국한되는 것성 을 점차적인 방법으로 개조해 나가는 일은 북한 사회의 전시기에 걸친 생활풍속 개조상의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모든 사회풍습은 대개 사회의 발전경로에 부합된다고 볼 때 북한의 혼상제도 나름의 사회변화에 발맞추어 변화, 발전해 온 것이다. 이 점은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왕의 전래의 혼상제가 벼화를 이루엇고, 더욱이 새로운 풍습이 가미되고 첨가되어 급격한 변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의 발전 경로를 살피고 오늘의 처지를 동시에 고려해 보는 일은 북한의 혼상제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를 마련해 준다고 하겠다.Ⅱ. 가족 및 사회생활 풍습의 변화명절이나 놀이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가족 및 사회생활 풍습에 있어 전형으로서의 혼상제의 큰 변화는 1950년대의 농업협동화 운동과 관련된다. 즉 8·15해방 후 북한정권이 창출된 지 10여 년이 넘은 1950년대 중반가지만 해도 전래의 가족 및 사회생활 풍습의 전반적인 모습이 오늘날과 같다고는 볼 수 없다. 비교적 전래의 전통들이 완강히 살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사회주의 집단경리 과정은 농민들의 삶의 처지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되었다. 당시 북한 주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니, 협동화 과정은 북한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풍습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야기시킨 것을 알 수 있다.우리 한국 사회의 혼상제의 토대는 농민사회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결혼을 하고 장례를 지내는 풍습은 전적으로 마을 단위의 삶에 토대를 두어 혼상제 등의 상부상조 조직을 꾸려서 공동으로 준비하고 돕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 협동화농장이란 새로운 삶의 방식이 전개되면서 이러한 전래의 삶의 질서는 전적으로 변모를 겪게 된다.중앙력사박물관관장을 지낸 김신숙이 1958년 당시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북한 농촌에서의 혼상제의 모습들은 낡은 생활과 새로운 풍습 의 혼재 속에서 점차 협동농장의 처지에 알맞는 새로운 풍습 으로 변모해 나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즉, 여전히 낡은 잔재 가 사회주의 사회건설에 방해가 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공동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탁아소의 신설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가족관계에서도 봉건적 가족관계는 붕괴되고 보다 집단경리에 알맞는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이에 따라 마을단위에 뿌리를 둔 생활풍습들도 필연적으로 변모할 수 밖에 없었다.이러한 변모의 결과는 1970, 1980년대가 경과하면서 더욱 고정된 정착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의 혼상제를 확립하게 된다. 더욱이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정립됨에 따라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일정한 규정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Ⅲ. 북한의 혼상제1. 혼례풍습1950년대 중반까지는 전래의 혼례풍습이 많이 잔존하고 있었다. 즉, 선보기·결혼식·예상(납채)·동상례 등의 혼인풍습이 많이 온존하였다. 그러나 차츰 이러한 복잡한 전통은 시기가 지나가면서 단순하게 축소, 변화하였다. 우선 전래의 매파(중매)기능은 협동조합의 책임일꾼들이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당 전체 일꾼들도 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농민들의 살림살이가 조합 단위로 되었기에 결혼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조합살림을 책임진 책임일꾼들의 관심사로부터 제외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친소관계의 진전에 따라 매파에 의해 이루어지던 전래의 선보기가 많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동시에 신랑신부에 대한 관념도 달라졌다. 가령 종전에는 좋은 신부감이란 부모가 현존하고 본인이 건강하며 믿음직하고 어린아이를 잘 낳아 기를 수 있는 여성을 말한다. 그러나 여성들도 조합일에 종사하는 노동자인 까닭에 일을 얼마나 잘하며 또 대중들의 신망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믿음직하고, 민청활동을 잘 하는가, 군중오락, 특히 서클사업에 잘 참가하는가, 어떠한 특별한 재능이 있는가 등등이 좋은 자격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사회주의 풍조의 만연으로 신부 부모의 재산정도, 직장 및 직위, 해외 연고 유무 등을 최우선 조건으로 친다.신랑신부를 정함에 있어 동성동본 결혼은 북한 사회에서도 피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법으로 동성동본 결혼까지 금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세가 대부분이다. 이는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된 것이라고 한다. 남성들의 결혼 연령은 우리와 같이 군대생활을 감안하면 이해될 일이고, 여성들의 경우는 당에서 공부시킨 데 대한 보답으로 사회에 나와 4~5년 정도는 봉사하다가 가정을 이루는 것 이 그 요인이라고 한다. 한편 최근에는 결혼연령이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연애 풍조의 확산과 더불어 강화되는 추세이며, 혼전에 아기를 갖는 미혼모 문제가 사회문제로까지 등장하는 경우도 차츰 많아진다고 한다. 특별한 것은 여자의 경우 대학재학 중에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한다.결혼식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먼저 결혼식 날짜를 정하게 되는데, 예전처럼 길일을 잡아서(혹은 손업는 날)하는 법은 없고 휴가일자는 맞추어 날을 길게 잡아 휴가기간과 합해 준비한다고 한다. 결혼식은 예식장이 아닌 결혼식당 이라고 하는 데서 간단한 의례와 더불어 피로연을 겸한 뒤풀이 형식으로 잔치가 마련된다. 의례는 매우 단순하여 어버이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선생님의 배려 속에 결혼식을 올린다 라는 식으로 결혼식이 치루어진다. 대개 자기가 속해 있는 직장 책임자나 협동농장의 관리간부, 당 및 사회단체 간부가 주례형식을 맞게 되며 간단한 격려사와 선물교환 및 축사로서 식을 올린다. 가족들이 들러리로 배석한 가운데 합환주 를 한 잔씩 신랑신부가 나눠 마시는 정도가 격식이라면 격식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도 결혼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농촌에서는 공공장소를 주로 이용하거나 집을 이용한다. 집에서 하는 경우에는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집에 가서 잔치상을 받고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온 뒤 다시 신랑집에서 잔치를 벌인다.이러한 풍습은 여전히 남자가 장가를 든다는 전래 풍습이 변화된 형태로나마 전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랑집에서 결혼식은 대개 가족들과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치뤄진다. 참석한 사람들은 축의금이나 가벼운 선물을 준비한다고 한다.혼례식의 복장은 대개 여자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남근 분수대에서 사진을 촬영한다고 한다. 첫날밤은 보통 신부집에서 잔다고 한다. 신혼살림은 아파트에 마련하는 것이 도시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근년의 대대적인 아파트 건설로 미루어보아 주택문제 해결이 쉽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2, 장례풍습전래적인 우리의 장례는 매우 복잡한 절차를 밟았다. 지관이 풍수를 보아서 묘를 잡아 유교식 장례예법에 의해서 상을 치렀다. 보통 3일장을 지냈으며 밤샘을 하고 상여 같은 것은 공동으로 마련해 두고 쓰며 친지들이 상포계 등을 기초로 하여 술과 고기·쌀·찬·양초 등을 가져오는 상부상조의 전통이 깊게 배어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농촌에 가도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도 몹시 가난한 사람들은 장례의 예법이 매우 간단하였으며,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장례의 절차와 형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1950년대 중반 정도까지는 북한에서도 장례는 마을단위로 행해져서 주로 마을 인근의 산야에까지 상여 등으로 운반하는 일이 흔하였다. 그러나 협동화가 이루어지면서 장례일도 전적으로 조합의 일이 되어버렸다.상례는 조합 전체의 일로 이루어지는데, 전래의 유교의식과는 달리 많이 변화된 양상으로 사람이 죽으면 우선 의사가 와서 사망을 확인한 뒤 염을 하고 매장할 준비를 한다. 복잡한 상례가 간단하게 변한 것이다. 흔히 옛 식으로 3일장이 보통이며 1~2일장도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3일장을 치르는 동안에는 가족들이 주관 하에 친지들이나 특히 조합원들이 문상을 오게 된다.매장에 있어서는 꽃상여 등이 사라지고 차량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북한사회에서는 화장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무덤을 쓰되 아무 데나 쓰는 것이 아니고 공동묘지를 이용한다. 북한에서도 묘지 확대로 인한 토지 이용상의 문제를 고려하여 묘지의 집단화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예전에 하던 식으로 풍수를 짚어서 명당자리만을 찾는 풍습은 사라졌다. 산의 소유권 자체가 종중이나 마을 소유에서 조합의 소유로 바뀐 탓으로 선산의 개념도 없어졌다.묘지 앞의 비석도 예전처럼 한문으로 새기는 것이
    사회과학| 2005.11.08| 6페이지| 1,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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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북한의 여가생활
    Ⅰ. 서론일과 더불어 적절한 여가생활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불가결의 요소이다. 건강한 노동도 온전한 휴식이 뒷받침될 때 더욱 빛이 난다. 그래서 여가생활의 여유 정도를 통해서 그 사회의 복지나 생활수준을 측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과연 북한 주민들의 여가생활이 어떤가라는 질문은 북한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어떤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다.이 문제의 경우에도 우리 생각의 출발점은 북한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라 집단주의 사회이다 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집단주의 사회의 기본은, 개인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개인을 위하는 사회 인 탓으로 여가생활 역시 조직 되는 것이다. 그것도 우연한 것보다는 전사회적으로 조직된다. 특히, 여가생활은 지난 1980년대 중반 이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Ⅱ. 북한의 여가생활북한 주민들의 아침은 청소로부터 시작된다. 각 동네마다 새벽청소가 조직되어 있으며, 이제는 습관이 되어 하루 생활의 첫 장이 되었다. 아침의 극히 짧은 여가를 집단적 청소로 시작한다는 사실에서 북한의 여가생활에 대한 하나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직장별로 지역을 분담하여 화단을 가꾸거나 페인트칠을 도맡아 한다. 일요일에도 평양거리에서는 옹기종기 모여서 미화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평일에 차량이 워낙 적은 탓으로 한국의 서울에서와 가튼 러시아워는 없지만 버스 안이 상당히 붐빈다고 한다. 대개의 사람이 저마다의 일터로 나간 낮시간에는 버스와 지하철이 텅텅 비어 있다. 낮에 여가생활을 즐기면서 낮술에 취한다거나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한다거나 극장구경을 다니고 친구들과 카페를 찾아 다니는 식의 여가생활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은 여느 자본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죽은 듯이 고요한 평양거리라는 식의 방문기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서 하는 말일 것이다. 바쁜 낮시간에 일터에 머물지 않고 돌아 다니는 일이 적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소비 사회라고도 할 일을 종합하는 총괄모임을 갖는다. 자기가 하룻동안 한 일에 대하여 토론이 이루어지며 잘잘못에 대한 판단이 나오고 근무를 태만히 한 사람은 자기비판을 한다. 이러한 토론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되고 또 계속해서 학습과 교양을 받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부부간에도 모양새는 다르지만 여러 가지 갈등을 토론형식으로 풀고 아이들에게는 토론보다는 교양으로 지도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분방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숨막히는 체제로 여겨지는 대목이나, 정작 당사자들은 모든 것들이 조직된다는 사실을 매우 당연하게 여긴다고 한다. 노동과 휴식, 학습은 바로 북한 사회의 여가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이제 북한의 여가생활을 알아보기 위해서 노동과 휴식자체가 어떠한 수준에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북한 사회주의 노동법에서는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을 근로자들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노동으로서 가장 신성하고 영예로운 것이며 집단적인 노동 이라고 성격짓고 있다. 따라서 모든 근로자들은 노동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가지며, 동시에 근로자들의 보호를 위해 노동과 휴식을 옳게 결합할 것을 명시하고 잇다.노동법에 의하면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 기본이며 세 자녀를 가진 부인 노동자는 6시간이다. 매년 14일의 정기휴가와 7~21일의 보충휴가가 주어지고 임산부에게는 산전 35일과 산후 42일 휴가가 주어진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쉬는 날에 노동을 시킨 경우에는 1주일 안에 반드시 대체 휴가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생산과제 완수의 문제, 경쟁운동을 앞세운 봉사운동, 정세 긴장시의 지원노동 등을 이유로 이것이 철저히 지켜지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법제도상으로 부여된 규정과 실제 휴가일수의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1985년부터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퇴근시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점은 정치학습 강화와 연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퇴근시간을 앞당겨 로동신문 독보회 가튼 정치학습모임을 갖는다. 김일성의 방침이나 노선과도 유관하며 사무실의 근로 인텔리들이나 고위직의 간부들도 육체노동의 참맛을 느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고위직 간부들이 바쁜 농업일손을 메꾸어 주거나 건설현장 등에 투입되는 사례가 매우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최근의 일이 아니고 일찍이 전후 복구사업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거니와 노동력이 엄청나게 부족했던 시기에 고급간부들이 모두 노동현장으로 나가서 인민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는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이다.근로자들의 전국가적인 노동력의 사회적 혜택으로서는 주택, 식량, 탁아소, 유치원, 무료의무교육, 각종 연금, 휴가, 정·휴양제, 양로원·양생원, 무상치료제 등을 열거하고 있다.북한 사회주의 헌법 제 57조에는 공민은 휴식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노동시간제, 공휴일제, 유급휴가제, 국가비용에 의한 정·휴양제, 계속 늘어가는 문화시설에 의해 보장된다 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에는 전국에 걸쳐 휴양소, 야영소(휴양소와 동일하게 취급) 및 정양소가 산재해 있다.고급 간부를 위한 유양소와 중견 간부, 모범 노동자, 열성 당원, 열성 사로청원을 대상으로 한 일반 휴양 및 정양소가 별도로 존재한다. 일반 휴양과 정양 인원의 배당은 직업총동맹에서 취급한다. 분기별로 각 직업별·도별로 입소할 인원을 할당하여 휴양권 및 정양권을 해당 단체에 보낸다.휴양 기간은 왕복기일을 제외하고 14일간이며, 정야 기간은 14일로부터 특별한 경우 1개월까지로 되어 잇다. 입소 후 정·휴양소 생활은 지정된 일과표에 따라 진행되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식사·운동 외에 오락과 집체학습(김일성 교시, 공산주의자 교양)등으로 짜여지며 급식 및 기타 시설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여가생활과 관련하여 의료문제 역시 중요하다. 북한 의료제도의 특징은 완전하 무상 치료제와 예방의학의 관철, 의사 담당구역제, 고려의학과 함께 신의학을 발전시킨다는 원리, 주민들의 활발한 보건사업 참여 등이다. 이러한 의료정책에서도 민족의 생활풍습은 관철되는 바, 의료사업·의학연구와 교육에서 동의학한의 여가생활 역시 일정한 보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Ⅲ. 여가생활의 조직조직된 여가생활은 삶의 질을 보다 높이기 위한 길이 된다.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여가생활 역시 다양한 변모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주민생활의 향상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많은 주민들이 즐기는 여가생활의 대종은 순수한 개인적 차원에서의 독서나 산보, 텔레비전 시청이나 라디오 청취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쇼핑·문화 생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쇼핑 부분에서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존의 국영상점 외에 직매점이 늘어나고 있다. 직매점은 생활필수품을 소비자에게 직접 배급하여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가령, 조선 대외문화연락협회가 1986년에 소개한 자료에 의하면 평양시 보통강 서장동에 수산물 직매장이 개장되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선어와 패류를 취급하며 상품은 동해의 원산이나 서해의 해주 등에서 냉동된 상태로 공급된다. 밝은 조명과 깨끗한 시설을 자랑하고 있으나 어패류의 종류는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저녁 7시까지 문을 여는 것은 부녀자들이 퇴근 후에 물건을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배려이다. 즉 부녀자들의 역생활에서는 쇼핑이 빠질 수 없는 것임을 알려 준다. 일용잡화 및 생활필수품 직매점은 전국에 수백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에는 공장 직매점이라는 것도 있어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동안 영업을 한다. 그러나 식량배급이 제대로 안되는 북한의 현실에서 각종 상점의 이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물건값도 외화로 바꾼 돈표 로 치르도록 되어 있어 관광객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북한의 쇼핑시간은 일과 후라는 특징이 있으며 농촌에는 재래 장터를 연상시켜 주는 농민시장이 존재한다. 사거래 시장과 농민시장은 평양시의 각 구역마다 하나씩 상설되어 있는 만큼 퍼져 있다. 이곳에서는 식량·담배·술 등의 거래가 금지되어 있지만 암거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대도시에는 일부나마 개인 상행위도 등장하였다. 유원지에서 사진을 찍어주거나 지하도 입구에서 금붕어·결혼식꽃 등다. 즉 최근 북한의 신도시에서는 으레 삶의 질과 밀접한 편의시설들이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추세이다. 가령 칠골업체다리로부터 만경대 학생소년궁전까지의 넓은 가로변을 따라 12~30층 규모의 고층 아파트 약 2만 세대가 건립되어 있는 광복거리의 6구획 봉사망은 청춘관과 대성종합직매점(식료품상점·남새상점·물고기상점·공업품상점), 이발소, 미용원 등 여러 가지 봉사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식당과 여러 가지 상점망, 그리고 각종 편의시설망을 다 포괄하는 조건에서 하나의 큰 종합봉사망을 이루도록 조직되어 있다.광복거리의 청춘관은 현대식 식당으로 단고기 식사실, 국수 식사실, 동석 식사실, 북고기 식사실, 연회장, 중국요리 식사실, 찬요리 가공실, 더운요리 가공실, 빵 가공실 등이 있다. 이 봉사망들은 모두 표준설계에 의해서 사전에 고려된 신도시 설계방식인 셈이다. 이들은 현대적인 위생문화 봉사기지로 불리우고 있으며, 각 지방 소도시에도 확충되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이래 눈에 띄게 달라지는 양상이다.여가생활에는 이발이나 미용, 옷차림, 화장 등도 포함된다. 근년에 평양을 방문한 이들의 기행문에 의하면 여성들의 머리형과 복장이 변화하고 있다고 전한다. 화장법 등을 적극 소개하고 권장하는 글들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북한에서 강조하고 있는 화장법의 일례를 잡지 천리마 를 통하여 살펴본다. 즉, 미안(美顔)을 위해서는 얼굴 문지르기를 자주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두 번 정도 찬물로 세수하는 것이 좋다고 권장하고 있다. 얼굴 문지르기의 방법으로는 깨끗하게 세수한 얼굴에 기름크림을 바른 뒤 이마로부터 목 쪽으로 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5~6회 정도 반복하면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가볍게 눌러 주면 된다고 소개한다. 얼굴 살갗과 화장 이라는 글에서는 화장을 여러 가지 화장품으로 살갗을 부드럽고 윤택하게 함으로써 건강미를 나타내고 아름답게 하는 미용의 한 공정 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특히 피부 성질에 따라 화장품을 골라 쓸 것있다.
    사회과학| 2005.11.08| 5페이지| 1,000원| 조회(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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