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론을 통해 바라본 발해- 목 차 -Ⅰ. 머리말Ⅱ. 발해의 지방제도와 교통로를 통해 본 고구려 계승Ⅲ. 발해문화의 역사적 위상1. 발해의 건축과 온돌 - 거주 유적을 중심으로2. 무덤을 통해 바라본 발해의 고구려 계승Ⅳ. 발해의 외교1. 발해의 대당?대일본 외교(1) 발해 영토확장에서의 대당외교(2) 일본의 발해에 대한 외교적 입장2. 발해와 통일신라의 대립과 교섭(1) 발해와 통일신라의 대립(2) 발해와 통일신라의 교섭Ⅴ. 고려의 발해인식의 다양한 양상1. 고려 초기 발해인식 - 동류의식2. 고려중기 발해 인식 - 동류와 비정통이라는 견해의 대립3. 무신집권기의 발해인식Ⅵ. 맺음말Ⅰ. 머리말발해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아스라이 떠오르는 옛 추억과 같은 것이면서도 무언가 잘 잡히지 않는 존재가 아닌가. 발해는 고구려 옛 장수였던 대조영이 세운 나라였고, 그것은 엄연히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배워왔으면서도, 사실은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우리의 역사와 유적으로 다가오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워온 것처럼 우리 민족의 전유물로 인정하기에는 난관들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이에 본고는 발해의 위상정립을 위하여 정치, 문화, 외교, 계승의식을 다루어 볼 것이다.정치면에서는 지방제도를 다루어 고구려와 중복되는 지역의 통치와 각 지방에서 외교시에 사용했던 교통로를 통해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문화면에서는 발해건축 중 온돌과 고분을 통해 그 안에서 우리 민족이 이루어 놓은 공통성을 찾아내고 나아가 발해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새로운 문화의 발생?발전과정은 사회의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의존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자립성을 가지며, 새 문화는 앞선 문화와의 연관 속에서 발전하고 창조된다는 것을 보이지 않게 강조하게 될 것이다.외교 면에서는 발해의 대당?대일본 외교를 살펴보고 이 관계를 통해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과정을 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남북국이 서로 공동체 의식이 있었음을 밝히고자 한행되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발해건축의 기본적인 모습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집터들은 살림 집터[住居址], 궁전터), 관청터, 절터, 정원터, 석등(石燈)) 및 24개석)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나라 건축의 전통적인 민족적 형식과 생활 풍습을 가장 밀접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살림집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살림집과 온돌만을 살펴보고자 한다.발해 사람들은 자기 나라 기후 풍토에 맞는 살림집을 짓고 살았다. 이러한 살림집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알려진 공통점들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발해의 살림집이 알려진 곳들은 발해의 다섯 개 큰 도시 가운데서 오늘날 그 위치가 뚜렷하게 밝혀진 세 개의 도시(동경성 - 상경 용천부, 오동성 - 중경 현덕부, 팔련성 - 동경 용원부)를 비롯한 발해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이 살림집들에서는 많은 공통점들을 찾아보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온돌이 있다는 것이다. 온돌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면서 우리 민족이 즐겨 써온 고유의 난방형식이다.발해의 살림집 가운데서 그 모습이 가장 뚜렷한 것은 발해 상경 용천부 궁성지 서구에서 알려진 살림집(아래에서는 서구살림집이라고 부른다)이다. [그림1]이 집에서는 긴 고래온돌을 놓았다. 온돌방은 일곱 개가 알려졌는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쪽에 있는 온돌 및 서쪽 회랑에 있는 온돌은 두 고래온돌이고 북쪽 화랑에 있는 두 개의 온돌과 서쪽방의 서쪽에 있는 온돌은 외 고래온돌이다. 외 고래온돌은 두 고래 온돌이 굴목과 잇닿은 곳마다 하나씩 붙어있고 두 고래온돌과 합쳐 굴뚝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으로서 불이 잘 들게끔 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온돌 마다 아궁이 달렸고 굴뚝은 불속에 크게 두개를 쌓았다.비록 그 시대를 살던 살았던 모두가 서구 살림집과 같은 집에서 살 수는 없었을 테지만 이러한 살림집이 발해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고 각이한 계층들이 살던 곳에서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무지무덤의 시기적인 변화를 반영함과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① 무기단 돌무지무덤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은 강가의 모래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 뒤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냇돌을 덮은 간단한 형식의 것이다.② 기단식 돌무지무덤땅을 고른 후 그 위에 넙적한 판석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강가뿐만 아니라 산기슭에도 만들어져 있어 무덤축조의 재료로서도 냇돌 외에 모난 산돌도 많이 이용되었다.③ 계단식 돌무지무덤계단식 돌무지무덤은 기단 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과 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 겹의 돌로 덮은 것이다.▶ 봉토무덤봉토무덤은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무덤양식이다.봉토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주체시설로서 지상이나 반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이 아닌 흙을 덮었다는 점이다.봉토무덤은 4세기 이후 1세기 이상 돌무지무덤과 공존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다양한 무덤양식을 파생시킨다.① 봉토돌방무덤재래의 돌무지무덤에서와 같이 돌로 기단을 두른 후 흙으로 덮는 형식이다.② 봉석돌방무덤반대로 봉토무덤처럼 돌방을 지상에 설치하고 돌을 덮은 돌무지무덤이다.③ 돌방무덤완전한 봉토가 아닌 흙과 돌을 섞은 방식이다.특히 발해가 남긴 많은 고분들 중에 돌무덤이 많은데 다시 나누자면 돌방무덤[石室墓] · 돌덧널무덤[石槨墓] · 돌널무덤[石棺墓]으로 나뉜다. 이중에서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이 발해고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이 대체적으로 많아 주목하고 그 연원을 따져보고자 한다. 그래서 다음의 무덤들을 표본으로 삼았다.가장 대표적인 문왕(文王)의 딸들인 육정산 무덤군의 정혜공주 묘와 용두산 무덤군의 정효공주 묘, 삼령둔 무덤군, 동청의 발해 무덤군, 용두산 발해 고분군, 최근 2004년에 북한 함경북도 화대군 금성리에서 발견된 발해 무덤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부근 체르냐찌 요동지역이 발해의 영토였음은 확연한 사실이고 732년에 발해가 요동지역을 공격한 것도 사실로 여겨진다.- [동경(요양)은 옛 발해의 땅이었는데 태조(야율아보기)가 20여 년 힘겹게 싸워서 얻었다])- [(거란이) 그 무리를 이끌고 발해의 요동을 토벌하였다])- [당나라의 고종이 고려(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는데 훗날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 [요동 땅이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어 나라를 전하기를 10여 대가 지나 5대 시대 거란이 발해와 수십 년 싸워 드디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에 요동의 땅이 모두 요나라로 들어왔다])- [ ……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을 공격하였다])- [요양부는 …… 본래 발해 요양의 옛 성이었다])- [일본은 동쪽으로 멀리 있고, 요양은 서쪽의 장벽이니, 두 나라의 거리가 만 리가 넘는다])이 모든 자료들이 발해의 요동 경영을 증명하고 있다.다시 말해 요서의 지역의 공격 즉 당에 대한 발해의 공격은 기정사실이며 요동반도의 점령이 등주 공격을 성립시켰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등주공격에서 시작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발해에 복속하던 흑수말갈이 발해의 양해 없이 726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입조(入朝)하면서 일어났다. 당나라는 발해의 배후에 있는 흑수말갈을 적극 활용하여 발해의 세력 확산을 견제하려 하였고, 발해는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당나라와 관계를 차단하려 하였다) 그런 가운데 발해의 무왕의 아우 대문예가 당에 망명함으로써 발해와 당은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전쟁에서 선수를 친 쪽은 발해였다. 732년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는 인안(仁安) 13년인 서기 732년 9월에 발해의 두번째 황제인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의 명령을 받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압록강 하구를 출발, 해로로 당나라의 등주, 오늘날의 산동성 봉래시 동남부를 기습 공격하여 초토화시켰다 신속하게 등주에 들이닥친 발해군은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를 초토화시킨 후 바로 철수해 버렸다.당은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적인 면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귀족들은 이것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확대 해석할 가능성도 있었다. 즉, 이러한 현상들은 민심의 동요와 왕에 대한 귀족들의 도전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는 구실로 작용하여, 원성왕에게는 위협적인 사건들이었다. 이때 원성왕은 정치 안정을 위해 내부적인 노력도 했지만, 외부적으로는 발해와의 교섭을 단행하였다. 즉, 신라의 발해에 대한 사신 파견은 신라 내부의 정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위 사료를 보면 시중의 임명이 이루어진 해에 신라에서 발해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 모두 신라의 정치적 문제와 관련이 있는 일련의 사건이 아닌가 한다. 결국 당시의 남북교섭은 양국의 대립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라 내부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 타개 노력이었던 것이다. 내부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외부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원성왕도 아마 정치적 관심을 발해로 이전시켜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나 한다.이후 애장왕대에는 남북국의 관계가 소원해진다. 애장왕은 발해와의 교섭 대신 당과 일본과의 교섭을 더욱 행하였다. 애장왕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당과 일본과 모두 교섭하였던 이원적 동시 외교를 펼쳤다. 원성왕대에는 발해와 직접 대화를 함으로써 해결하려 하였는데, 애장왕은 당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애장왕대 남북간의 교섭이 없었던 원인은 당?일과의 이원적 동시외교를 통한 발해 견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라는 다시 헌덕왕 4년에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다. 이는 헌덕왕의 왕권 획득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헌덕왕은 자신의 조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불법적인 왕위 계승은 원성계 자손들 사이에서 권력 쟁탈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불법적 왕위 찬탈을 통해 등장한 헌덕왕은 원성왕도 그랬듯이, 반대세력에 대한 무마책과 왕권 안정이라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개혁 및 반대세력에 대한 정치적 배려였으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