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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종문제]미국내의 인종갈등과 다문화주의
    발표주제 - 미국의 인종갈등1. 머리말2. 인종갈등의 배경3. 미국 내 인종갈등의 현실4. 실제 인종갈등의 사건1) 흑인과 백인의 갈등 - LA흑인폭동과 뉴올리언스복구문제2) 흑인과 히스패닉의 갈등5. 인종갈등의 해결책-다문화주의의 관점에서1) 다문화주의의 정의2) 다문화주의의 성과6. 미국 인종이론-melting pot에서 salad bar로7. 맺음말1. 머리말현재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다인종 다민족이 모여 결합한 세계 최대의 다민족국가이다. 미국내의 인종갈등에 대한 발표주제를 공부하면서 알아낸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혼혈(混血)에 대한 것이다.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헐리우드의 스타들 중에 대다수는 혼혈이다. 언뜻 보기에 확실히 백인인 카메론 디아즈나 제니퍼 로페즈를 포함하여 백인이라고 판단하기 머뭇거려지는 안젤리나 졸리나 제시카 알바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혼혈이었다. 미국 내 인구 조사 통계에 따르면 2000년 혼혈인은 전체 인구 2억 8150만명 가운데 2.6%인 730만명이라고 한다. 따라서 2006년인 오늘날에는 그 수가 더 늘어났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다. 사실, 순수 미국인이라는 민족적인 분류는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이처럼 ‘순수 미국인’의 개념이 확실하지 않은 채 다인종 다민족이 결합하여 발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각기 다른 민족과 인종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2. 인종갈등의 배경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이후 1607년 버지니아를 시작으로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넓은 땅은 끊임없이 노동력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1619년 아프리카대륙의 흑인은 버지니아를 시작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것이 미국대륙에 (원주민을 제외하고)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들어온 첫 시작이었다. 그들은 흑인노예는 백인기에는 88만명이던 것이 17세기에는 275만명, 18세기는 700만명, 19세기는 825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1783년 미국이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에 1863년 노예해방을 통해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흑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법적보호와 권리를 요구하며 민권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결실로 1964년 민권법을 통해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가에 근거한 고용차별이 금지되고 공공장소에서의 흑백분리도 금지되었다.3. 미국 내 인종갈등의 현실하지만 지금까지도 흑백이 좀처럼 섞이지 않는 것이 미국내의 현실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능력을 서로 인정하며 공존하는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백인의 우월주의는 미국 사회에서 뿌리 뽑기 힘든 하나의 이념이 되었다. 잘 알려진 흑인 배우 윌스미스는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인종주의는 여전히 일상의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아프리카대륙에서 노예로 왔던 흑인의 후손들은 이제 노예가 아닌 어엿한 미국의 시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흑인은 백인미국인과 동등한 기회를 누리지 못한다. 가장 기본적인 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경제가 호황일 때 가장 늦게 고용되고, 경기 불황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해고당한다. 조사하면서 찾은 영화 대사 중에는 “미국에는 이민 온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의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말이 현재 미국의 인종갈등의 양상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흑백은 또한 공간적으로도 분리된다. 도심의 대부분은 흑인과 소수민족, 교외는 백인 중상층과 상류층의 주거지이다. 흔히 도심의 거주공간의 이미지는 술과 마약, 폭력이 가득한 곳이고 교외의 거주공간은 넓은 집과 쾌적하고 풍요로운 생활의 이미지로 대표된다. 이렇게 확연한 공간 분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서 조금씩 변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 흑인 가족이 한둘씩 정착하면 흑인 밀집 거주지역을 말하는데, 게토에 거주하는 것은 대부분 극빈층 흑인이다. 흑인 내에서도 경제적 능력에 따라 중산층 흑인과 극빈층 흑인으로 나누어 졌다.‘흑인게토’라고 불리는 미국의 게토는 유대인의 게토와는 달리 강제적으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흑인의 자립과 단결을 위해 형성되었다. 게토 내부의 아파트 ·상점 ·식당 ·학교 ·교회 등의 건물과 시설은 흑인 전용의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빈곤과 실업문제, 열악한 주거환경과 생활전반의 불균형이 집중되어 도심의 게토는 슬럼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4. 실제 인종갈등의 사건그럼 실제로 이런 인종갈등이 어떤 사건으로 촉발되었는지 LA폭동과 작년 뉴올리언스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자.1) 흑인과 백인의 갈등ⅰ. 90년대에 가장 유명한 인종갈등 사건은 91년, 92년에 걸쳐 일어난 LA흑인폭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91년 3월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이 과속으로 달리다가 멈추라는 경찰을 무시하고 질주하다 결국 붙잡혔는데 경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드니 킹을 곤봉으로 심하게 구타했다. 후에 이것이 녹화된 필름이 공개되면서 뉴스에서 방영되게 되고, 흑인들은 백인경찰들에 의해 흑인의 인권이 침해되었다고 분개하게 되었다. 이후 1992년 4월에 백인경찰 4명의 죄를 묻는 재판이 전국적인 관심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 백인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단이 경찰에게 무죄평결을 내리자 LA의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마침 지나가던 백인트럭운전사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이 생중계로 방송되면서 흑인들이 일제히 주변의 주유소와 가게를 약탈하였다.이 폭동은 주 방위군과 대통령의 지시로 연방군까지 동원되고 대통령이 직접 피해지역을 방문하여 자제를 호소하고 흑인 지도자들이 폭동 종식을 호소하여 5일간의 폭동이 겨우 진화되었다. 이때 L A 한인타운을 포함한 도시의 대부분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고 불탔다.좌측은 로드니킹을 폭행하고 있는 경찰의 모습이고 우측은 폭동 당년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하였는데, 이 지역은 본래 유명한 면화생산지로 흑인노예가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흑인인구가 약 70%를 차지하는 뉴올리언스에서는 허리케인이 오는걸 알면서도 마땅한 이동수단이 없어 대피하지 못한 빈곤층흑인의 피해가 컸다.이후 흑인 거주 지역에 대한 구호 및 복구문제에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다민족ㆍ다원화를 앞세운 ‘위대한 미국 정신’도 빈부격차와 인종차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결국 카트리나의 재앙은 피해규모도 기록적이었지만 미국 내 흑백과 빈부갈등의 문제를 드러난 사건이라고 기억되었다. 카트리나 이후 1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 거주 지역에 대한 복구가 원활하지 못해 또 한 번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참고 동영상http://news.naver.com/tv/read.php?mode=LSS2D&section_id=&section_id2=&office_id=052&article_id=00000904952) 흑인과 히스패닉의 갈등미국 내의 인종갈등은 더 이상 흑인과 백인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최근 미국의 인종갈등 구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는데, 2005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백인은 66.8%, 흑인은 11.9%, 남미국가출신의 합법 및 불법 이민자를 지칭하는 히스패닉은 14.5%로 히스패닉이 흑인을 앞섰다. 이렇게 히스패닉계 이민자가 크게 성장하면서 소수민족가운데 유권자가 가장 많은 히스패닉의 인심을 잡기 위한 정치권의 움직임도 활발해질 정도라고 하니 히스패닉세력의 성장을 알 수 있다.이러한 히스패닉의 성장을 배경으로 기존의 ‘흑인 대 백인’보다 ‘흑인 대 히스패닉’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주로 극빈층흑인이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하는데, 미국 조지아주의 소도시 윌러쿠치 근교마을에서 지난해 6명의 히스패닉 농장 노동자가 4명의 흑인 강도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폭력적인 범죄로 기록되고 있다.이제로 고용주는 히스패닉은 상대적으로 불법이민자가 많아 흑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선호하고 있다. 이에 뉴욕 타임즈는 “새롭게 나타난 인종적 갈등이 공포와 인종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5. 인종갈등의 해결책-다문화주의의 관점에서여기서는 인종갈등의 해결책으로 다문화주의를 다루고자 한다.1) 다문화주의의 정의다문화주의(多文化主義 : multiculturalism)란 여성문화, 소수파문화, 비서양문화 등 그동안 소외되었던 비주류의 문화를 제도권 안으로 수용하자는 입장을 말한다. 여기서 반대로 주류란 유럽 백인 남자 중심의 문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다문화주의는 이러한 지배문화로부터 벗어나, 그 동안 주변부로 밀려나 소외되어온 흑인, 인디언, 히스패닉 아시아계 등 소수인종문화의 적극적인 포용을 주장한다.이 개념은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다양한 문화 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활발하게 논의된 바 있다. 다문화주의는 교육에 적용되어 종래의 교과과정이 개편되고,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제공되는 과목과 가르치는 방식이 소수집단과 다양한 문화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2) 다문화주의의 성과다문화주의에 의한 교육을 다문화교육이라고 하는데 1988년 “인종, 젠더, 비유럽학 수강규정”을 제정한 오레곤 대학을 시작으로 다양한 노력들이 실시되었다. 예를 들면 일부 학교는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의 자녀를 위해 영어-스페인어 공용의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한다거나, 민족과 인종을 연구하는 학과가 창설되거나, ‘문화적 다양성’과 관련된 과목이 교과과정에 포함되거나 하는 것 등이다.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들에 대한 조사결과가 최근 속속 발표되고 있는데, 2005년의 조사에서는 다양한 인종출신이 함께 어우러진 학교가 상대적으로 왕따가 적고 성적도 높았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으며, 또한 18세에서 29세사이의 남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95%가 흑백간의 데이트가 가능하다고 답했고,
    인문/어학| 2006.11.14| 7페이지| 1,000원| 조회(1,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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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베트 역사]티베트의 역사와 문화
    *강역서장(西藏)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성급 행정구역으로 티베트고원(청장고원)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동쪽으로 사천성과 접하고, 동남쪽으로 운남성과 연접하고, 북쪽으로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청해성과 이웃하고 있으며, 서부에서 남부까지 차례로 카슈미르?인도?네팔?시킴?부탄?미얀마 등의 국가?지역과 접하여, 국경선은 모두 4000km에 달한다. 남북으로 최장 거리는 약 1000km이고, 동서로 가장 넓은 곳은 2000km에 달한다. 전체 토지면적은 122만 ㎢로 대략 전국 총면적의 12.8%를 차지한다*지형지구상 최대·최고의 고원인 티베트 고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고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4,000m가 넘어 파미르 고원과 함께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티베트의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지형으로 보면, 크게 3대 자연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① 북쪽으로 쿤룬산, 커커시리산, 탕구라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캉디스산, 녠칭탕구라산에 이르는 광활한 지대는 장북고원으로, 남?북 강당산원호(羌塘山原湖) 분지와 쿤룬산지역을 포함하고, 대략 자치구 면적의 2/3를 차지하며, 고도차이가 100-400일 뿐인 일련의 평탄한 산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좁고 복잡한 많은 분지가 있으며, 이곳은 시짱의 주요 목축지대다. ② 남쪽에서 캉디스산과 히말라야산 사이는 야루짱뽀강의 간류와 지곡 위주의 장남곡지로, 이곳 일대는 수많은 넓이가 일정하지 않은 하곡평지와 호분곡지를 띠고 있다. ③그 외의 하곡평지는 토지는 평탄하고 비옥하며 관개시설이 편리하여, 공업과 농업이 행해진다*호수와 강서장은 중국에서 호수와 강이 가장 많은 성의 하나다. 서장고원은 중국 최대의 호수 밀집지역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호수면이 가장 높고 범위가 가장 크고 수량이 가장 많은 고원 호수지역이다.*인구주민의 대부분은 티베트족이고 그외에 한족(漢族)·후이족[回族]·몽골족[蒙古族]이 약간 산다. 티베트는 지대의 구분과 인구밀도분포가 비슷하설도 있다. 근래에는 본토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추세인데, 이것은 티베트 민간에서 유전되어온 창세기 전설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신이 티베트에 극락세계를 세우기 위해 신령한 원숭이를 내려 보내 동굴 안에 살던 바위의 정령과 결합하게 하고 이들에게 농사짓는 법등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카르르유적카르르유적은 중국에서 발견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다. 카르로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 탄소 측정을 거쳐서 지금으로부터 5500?4300년으로 비정되었다. 유적의 원초면적은 약 1만 제곱미터로, 초기에 파괴된 것 외에는, 그 주요부분이 전부 발굴되었다. 고고학자의 세밀한 발굴을 거쳐서, 원시사회의 집 유적을 깨끗이 정리하고 대량의 문물을 출토하고, 많은 집자리, 자갈길, 돌담, 아궁이, 돌제품, 뼈제품, 도기조각, 장식품, 짐승뼈, 새뼈, 조개껍질과 좁쌀 유해 등의 유물을 발굴했다. 발견된 짐승의 뼈로 유추해볼때 당시 카르로 지구의 기후가 현재보다 온난하고 습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식피(植被)에 대한 꽃가루 분석도 이점을 증명한다.카르로 유적의 고대인들은 이미 빈부가 분화한 양상을 보이며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아울러 가축사육과 목축업을 겸하였던 생활했다. 카르르유적은 원시종교가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반영했다. 그들이 남긴 바위그림은 티베트 초기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이고, 후대인들로 하여금 당시 인류 활동의 진실한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다. 비록 현재 고고학적 자료가 결핍되어, 이들 원시종교 관념이 어떻게 발전하여 후의 뵌교가 되었는지 분명히 알기 어렵지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양자의 사이가 꼭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티베트의 문자30개의 자모와 4개의 원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7c에 만들인 티베트의 문자는 티베트고원을 통일한 쏭짼감포왕에 의해 만들어졌다. 티베트어는 3대 방언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중부의 라싸(위짱지역)방언, 동부의 캄, 북부의 암도방언이 그것이다. 티베트어는 좌에서 우로 가로표의 독자적인 문자를 갖춘 참신한 문명시대로 진입하였다.* 퇸미 쌈보따퇸미 쌈보따는 7세기에 야르룽짱뽀강 남안, 지금의 티베트 로카[산난] 지구의 륀쩨 현에서 탄생하였다(녜모 현의 퇸미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 부친은 퇸미雅魯로, 토번 쏭짼감뽀(srong-btsan-sgam-po, 당나라 때의 역사책에는 ‘棄宗弄贊’-약 617?65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의 어전대신(御前大臣)이다. 퇸미 쌈보따는 티베트어, 문법 상에서 성취가 두드러졌을 뿐만 아니라, 번역에도 자못 조예가 있어서, 탁월한 번역가라고 칭할 수 있다. 그는 20여종의 불경을 번역하였다. 티베트 사회 초기의 위대한 언어문자가와 번역가로서, 퇸미 쌈보따가 창제한 티베트문자는 티베트 사회를 참신한 문명사회로 이끌어 들였고, 이후 티베트 사회에 불교가 전파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티베트문자의 개정티베트문의 완벽함은 이후 진행된 세 차례의 개정의 문제와 뗄 수 없다.(제1차 개정)은 퇸미에서 시작하여 치쏭데짼까지의 백년동안 제1차 티베트문 개정의 주요한 성취는 종교술어의 번역을 통일한 것으로 체현되었는데, 이것은 불교의 유행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제2차 개정)은 9세기 초에 발생한 불경번역사가 종사한 문자 개정 작업을 가리킨다. 당시는 토번 짼뽀 치데쏭짼(??815) 통치 시기였고, 이 시기는 대외전쟁과 불경번역의 필요로 말미암아 정보전달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짼뽀가 지도하고 감독한 문자 개정 작업이 전개되었다. 많은 불교의 번역어가 이때 출현하였고, 많은 밀교 경전 및 포악한 주술어는 번역이 금지되었다.(제3차 개정)은 대번역가 린첸쌍뽀( 958-1055)가 살아 있을 때 진행되었다. 그를 대표로 하는 번역가들은 전의 두 차례 개정된 기초 위에서 티베트문에 대해 한층 더 규범화하였다.3차의 대규모 개정을 거쳐서, 티베트문은 마침내 완벽해졌다. 티베트문의 형성 발전은 불교의 티베트에서의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티베트문 대장경》《티베트문 대장경》은 티베세기 쏭짼감뽀 집권 시기에 불교는 중원과 인도에서 토번에 전파되었다. 《티베트문 대장경》은 백과전서 성질의 티베트문 옛문헌이고, 불교와 티베트학 연구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자료의 하나이고, 중화민족 문명 보고 중의 보배다.*《게싸르 왕 전기》《게싸르 왕》은 티베트에 수천년동안 유전된 영웅서사시다. 그것은 원래 서장의 민간에 유전된 구전문학인데, 현재 책으로 정리되었다. 전서는 모두 120여 부, 100만여 詩行, 2000여 만자가 있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긴 영웅서사시로, ‘동방의 호머 서사시’라고 칭해진다. 구성은 천당편, 인간편. 지옥편으로, 1부는 영웅탄생의 역사, 2부는 창업단계의 역사, 3부는 요마의 항복을 받는과정, 4부는 천계로 돌아가는 과정이다.(티베트대장경이 티벤문화의 집대성이라고 불리지만 일반민의 생활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반면, 게싸르왕전기는 일반민의 생활을 잘 보여주는 민간 서사시이다.)《게싸르 왕》은 고대 티베트민족 신화, 전설, 시가와 속담 등 민간문학의 기초 위에서 탄생하고 발전되어, 고대 티베트인의 이상과 의지를 대표한다. 그것은 전설속의 게싸르 왕이 강폭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험난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방을 평정하고 요마를 항복시키며,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우며 인민에게 복을 만들어 주는 영웅적 업적을 묘사했으며, 정의의 전쟁으로 사악함을 이기고 광명의 전쟁으로 암흑을 이긴 투쟁을 열정적으로 구가하였다. 이 서사시는 민족 발전의 중대한 역사 단계와 사회의 기본구조 형태를 반영했고, 인민군중의 아름다운 염원과 숭고한 이상을 표현하였으며, 복잡한 민족관계와 점차 통일로 향하는 과정을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고대 티베트 민족의 사회역사, 계급관계, 민족교왕, 도덕관념, 민풍민속, 민간문화 등의 문제를 연구하는 위대한 저작이다.*인쇄사업의 발달명대 중후기에, 게룩파가 점차 흥성한 이후, 티베트불교의 많은 대형 사원들도 계속 건립되고, 조판인쇄업은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조판인쇄술의 출현은, 마침 이들 이전에 수초본으로 나돌적 목적도 일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중국의 보시와 자국내의 불교에 대한 의지로 경전인쇄소가 생기는데 포탈라궁의 인경원보다 나탕인경원이 더 유명했다.)*나탕 인경원청 강희 연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6세 달라이 라마 창양갸초(1683-1706)의 설립 명령에 따라 설치된 것이고, 그 목적은 《티베트문 대장경》의 《깐규르》부분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경원 설립과 판각 인쇄의 거대한 비용 때문에, 인경원은 한번 반신불수 상태에 빠졌다. 섭정 포라내(1689-1747)가 시짱을 통치하던 시기에 이르러서야, 나탕 사원의 인경원은 비로소 회복되어 계속 《티베트문 대장경》을 찍어냈다. 1730~1732에 깐규르를 판각하고, 1741~1742에 뗀규르를 판각했다.(포라내가 집권한 시기에는 티벳이 청에 복속되는 시기와 일부 겹치는데 티베트인은 티베트가 정치적으로는 중국에 복속되었을지라도 종교적으로는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친중적인 포라내는 청정부에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 불경인쇄를 지원하였다. 1912년 이후 사실상 티벳이 독립하고 1950년에 티벳자치구로 독립되는데, 티베트는 중화민국의 정치력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 사실상 독립했다고 생각한다.근현대에 이르러, 13대 달라이 라마 툽땐갸초(, 1876?1933)는 셰아 갸초에게 명하여 라싸판 《티베트문 대장경》을 간행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티베트문 대장경》 판각간행이 가장 흥성하고 번영한 시기이다.-이처럼 청 지배하에서도 경전간행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이런 경전간행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주로 실시되었다.)*데게 인경원데게인경원은 쓰촨 북부 데게의 경경사 내에 위치하는데, 데게 인경원은 장서가 풍부하고 문류가 다 갖춰지고 각 교파 포용과 축적으로 세상에 유명했다. 이것은 이 인경원이 기타 인경원과 달리 독특한 특색을 띠게 하였다.*랍랑 인경원랍랑 사원 인경원은 비록 티베트지역 최대는 아니지만, 암도 지역의 중요한 사원으로서 랍랑 사원은 중요한 종교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인문/어학| 2006.04.30| 7페이지| 1,000원| 조회(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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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중세사]중국 중세_ 위진시대의 시대적 성격 평가D별로예요
    위진시대_중국의 중세청의(淸議)와 일민(逸民)의 귀족제 사회들어가는 말위(魏)?진(晉)시대는 이전의 후한(後漢)과는 다른 귀족적 성격을 가진다. 이 시대의 전반적 사회풍조는 청(淸-청의(淸議))과 일(逸-일민(逸民), 은일(隱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후한 말에 이르러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청의(淸議)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정부비판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평가의 역할을 했던 명사(名士)들이 세력을 얻었고, 정부는 이들에 대해 당고(黨錮)(금고:관직추방, 사관금지)령으로 철저히 탄압했다. 하지만 탄압속에서도 새로운 재야명사가 계속해서 배출되었고, 위진시대는 이렇게 만들어진 청의와 일민의 명사(名士)들이 이끌어간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의 중세를 이끈 귀족제 사회는 이러한 청의와 일민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본론1. 청의와 일민우선 위진시대의 시대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청의와 일민에 대해 알아보자. 청의의 시작은 후한시대에부터 시작된다. 후한정부를 향해 암묵적으로 저항한 반권력적 행동으로 당고(黨錮)(금고:관직추방, 사관금지)의 대상이 되었던 명사(名士)들이 바로 청의의 대표적인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고사건을 계기로 여론은 이런 반권력적 존재인 명사, 즉 ‘은일(隱逸)군자’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일반적 풍조 또한 은일군자의 청정고결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의 ‘일민’ 혹은 ‘은일의 선비’는 반권력적 입장을 취하여 권력자 측에서는 귀족으로서 가문을 버리고, 암묵의 비판자로서 민중 측에 섰으며 붕괴되어 가는 향촌의 지지자로서 오히려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 지식인이었다.2. 호족층 지식인의 등장이러한 시대적 성격은 위진시대의 호족의 성격을 결정했다. 여론이 청빈한 생활태도를 선호하게 되자 호족층 지식인들은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부정하고 공동체 질서에 응하는 유가적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다. 결국 그들은 이런 자기부정을 통해 향론의 지지를 받고 향촌사회에 대한 지도력을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후한말기만큼 일민적 인물이 대량 배출된 적은 없는데, 위진시대에는 완전한 자기부정을 통해 일민적인 귀족이 된 사람만이 새로운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선구자로 가장 높이 평가받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성장한 새로운 지식인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 것이 후한말에 발생한 황건의 난이었다. 황건의 난에 놀란 후한정부는 당고령을 받은 지식인과 황건의 연계를 두려워하여 ‘당고’의 금지령을 해제했고, 탄압대상이던 당인 및 재야 명사들을 조정으로 초빙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결국 황건의 대란은 암묵적 비판자로 머물던 당인이나 명사들을 공공연한 정치활동의 무대에 나설 수 있도록 함은 물론, 그들로 하여금 지식인으로서 사(士)라는 계층을 형성케 한 결과를 가져왔다.그러한 사태는 지방 향촌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건에 의해 초래된 지방의 무질서 상태는 향촌사회 존망의 위기를 앞두고, 서로 대립하던 호족과 지식인의 협동을 촉진했다.그리고 향촌사회는 지식인들을 통해 다양한 권력체들을 상호 연결하여 조조 아래 서열화되면서 상호간의 매듭을 공고히 했다. 권력체 상호간의 매개자로서 연대한 지식인들은 권력체와 향촌사회 양쪽을 견제하면서 연계시켜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실세를 장악하고 ‘사’ 계층을 형성했다. 후에 위공국이 성립했을 때, 위의 중요 관직은 이미 명사가 차지하였다. 이후 6조의 귀족은 후한시대에 탄압을 당했던 재야지식인층에서 배출된다. 명사출신이 관직을 독점하게 된다는 것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3. 위진시대의 특징적 사실(史實)결국 청의와 일민적 성격은 귀족사회에 반영되면서 위진시대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나타난 특징적인 사실(史實)들은 시대적 여론을 반영해 준다. 우선 위나라는 전설적인 성군(聖君)인 요?순이 행했다고 전해지는 선양방식을 취한다. 이는 이전의 왕조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전(前)왕조를 붕괴시킨 것과 대조를 보인다. 또한 향거리선제를 대신하여 실시된 구품중정제도는 지방의 여론을 수렴하여 관리를 뽑았는데, 이것으로 향론(鄕論)이 지지하는 일민적 지식인들이 정계로 진출했다. 위진교체의 혼란기에는 일민적인 죽림7현의 등장했고, 진(晉)에서는 소박함의 미덕이 중시된 호조법이 실시되었다.1) 양보의 미덕- 선양청의와 일민적 성격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 후한에서 위(魏)로의 정권교체 방식인 선양(禪讓)을 들 수 있다. 선양은 현실이 어떻든 간에 적어도 양보를 미덕으로 삼는 중세적 정신의 하나의 표현형식고, 상호 양보의 덕을 재확인해 나갈 필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나라의 조비의 경우, 제후에서 승상, 왕의 단계를 거쳤던 부친 조조 대신 후한의 황제로부터 제위를 양위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이와 같이 어떤 실력자가 스스로 왕조를 세우려는 의도를 이미 품고 있고 또 그럴 만한 세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명목상 이전 왕조를 잠시 떠받들면서 공국을 왕국으로 만들고, 마침내 선양의식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키는 방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선양방식은 5호 16국시대는 물론이고 위진남북조에서 수당오대에 이르는 3세기에서 10세기 중엽까지(약800년) 일어난 수많은 왕조의 교체 방법이었다. 8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선양이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위진시대의 특징이 드러난다.2) 변질된 향론- 구품중정제위제국이 성립하면서 관리등용제도과 효렴을 기본으로 하던 향거리선제에서 구품중정제로 바뀌었다. 구품(九品)이라고 하는 것은 1품에서 9품까지 9개 등급으로 나누어진 위계를 말한다. 구품중정제는 각 군국에서 군국의 향론(鄕論)을 듣고 지역인물에 대해 향품(鄕品)을 매겨 중앙에 상신서를 제출하는 역할인 중정(中正)을 두어 그 상신서에 맞게 인물을 채용하는 방식이다. 향론은 향촌사회에서 현자와 유덕자를 지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제정 당시에는 향론에 나타나는 공동체 원리를 국가사회전체로 관철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대에 추구된 향거리선제의 완전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그러나 민간의 향론 구조는 황건의 난 이후에 상당히 변화되어 있었다. 즉, 향론이 단절되거나 약화된 곳이 많았다. 이러한 기층 향론의 축소는 중정이 인물평가를 할 때 상층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사’계층에서는 한말의 청의운동 이래의 전통을 이어 민물평론이 더욱 활발하기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자 ‘중정’의 인물평가 기준은 권력자층의 평가를 따르는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품중정제도는 당초 “향론의 여운이 남아 있던” 여지를 점차 이탈하여 “명문가 출신인지 아닌지에 따라 품등을 정하는” 방향으로 치우쳐갔다. 그 결과 청의와 은일을 추구하는 향론을 반영하기 보다는 점차 가문의 서열을 만드는 방향, 즉 귀족계층을 고정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구품중정제는 동진에서 남조에 걸쳐 전형적인 귀족제 사회의 제도적 기초 형성에 기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품중정제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정의 인물평가가 중시되었다. 이 담론은 청담(淸談)이라고 불리며 엄격한 비평이 행해졌다. 비록 권력층의 인물평론에 치우쳤다는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중정의 청담은 귀족에게도 단순히 가문에 안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지식과 교양의 취득에 정진케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중정은 위진시대 귀족에게 중국문명의 담당자?유지자라는 자각을 촉구하는 긍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인문/어학| 2006.04.06| 4페이지| 1,000원| 조회(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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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E.H.Carr 역사란 무엇인가 2장 사회와 개인 요약
    사회 또는 개인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에 관한 문제와 같다.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이 우선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그 둘은 서로에게 필수적이고 보완적인 것이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더욱이 개인이 사회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은 사회에 예속된다.본론으로 들어가서,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를 ‘개인에 의해서’ 쓰여진 ‘개인에 관한’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역사를 쓰는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사회에 예속된 개인이기 때문에 역사가는 과거사회의 연관 속에서 행동하며, 사실을 역사로서 만드는 과정을 진행시킨다. 역사의 경로를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할 때 그 행렬 속에서 역사가가 있는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를 파악할 때 그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의 입장(견해)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입장 자체는 어떤 사회적, 정치적 틀 안에서 주조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결국 한 사회가 서술하거나 서술하지 못하는 역사는 그 사회의 성격을 지시해준다. 역사가는 사회의 산물이며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가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는 그 사회를 자신의 연구에 면밀하게 보여주는 것에 목적이 있다. 또한 한사람의 개인으로써 역사가를 파악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의 상황을 최대한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가 보다 나은 역사가이다. 역사가는 개인이면서 또한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역사가의 연구대상은 개인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힘의 작용인가? ‘나쁜 존 왕 역사이론’은 역사를 결정하는 것이 개인의 성격과 행동이라는 견해인데, 개인의 천재성을 역사의 창조력으로 간주하려는 욕망은 역사의식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더욱 복잡한 사회에 대해서는 분명히 들어맞지 않는다. 또한 개인의 무의식적인 의지를 이끄는 외부의 전능한 힘에 의해 역사가 결정된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그런 주장들 대신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현실의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매우 바람직하다.마르크스의 ‘인간’이 모든 일을 행한다는 견해에 대해 기초해야 할 조건이 있다. 첫째로 역사란 상당한 정도까지 수(數)에 의한 문제라는 것이다. ‘거대한 비인격적인 힘‘, ’이름도 없는 비천한 인간들‘이 바로 마르크스의 ’인간‘의 개념이다. 두 번째로, 개인 스스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역사에 남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무의식적인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역사는 분명히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인 위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추종한 대중 덕분이며, 그들은 사회적 현상들로 중요한 것이다. 위인은 한사람의 개인이지만 탁월한 개인이기 때문에 현저히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다. 헤겔은 이에 대해 ’위인은 자신의 시대를 실현한다’고 말했다.
    인문/어학| 2006.04.06| 2페이지| 1,000원| 조회(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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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이론]역사란 무엇인가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 요약 평가B괜찮아요
    E.H.CARR 의 ‘역사란 무엇인가’ > 제 1 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carr는 캠브리지 근대사의 액턴과 조지 클라크 경의 글을 통해서 19세기와 20세기 사람들이 갖는 역사에 대한 생각에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차이점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사회에 관한 견해를 반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19세기는 사실들을 숭배한 시대였다. 액턴은 풍부한 지식을 많이 기록함으로써, 가장 원숙한 결론들을 이뤄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념과 자신감을 표명했다.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 를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누구라도 필자의 명단을 들춰보지 않고서는 누구의 기록인지 말할 수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랑케-액턴)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한 실증주의자들은 사실들을 확인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라고 했다. 이때, 사실은 의식과는 독립해 있고, 수동적으로 수용된다. 상식적 역사관의 이 시기에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관한 사실 모두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역사의 척추를 구성하는 어떤 기초적인 과거 사실이 있다. 역사가는 이런 것들에서 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 그런 기본적인 사실은 대개 역사 그 자체의 범주가 아니라 역사가의 원료라는 범주에 속한다. 즉, 역사에서 사실은 필요조건이지만 역사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둘째로, 과거 사실은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의해 이야기 되어진다: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서열이나 차례는 어떻게 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이다. carr는 키트슨 클라크 박사를 통해 과거에 관한 단순한 사실이 역사의 사실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랜 시간의 마멸과정 통해서 모든 수많은 사실들 중에서 극소수의 선택된 사실만이 살아남아 역사의 사실 전부가 된다. 즉, 고대사나 중세사와 같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현재 알려져 있는 소수의 사실이 역사의 사실 전부이기 때문에 과거에 관한 역사의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 사이의 성가신 구별이 사라진다.그러나 우리가 이 시기에 관한 그림을 그릴 때, 우리의 그림에 결함이 있는 이유는 많은 조각들이 우연히 분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대체로 소수집단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은 그 사실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 의해 이미 선택하고 결정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 중에서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이런 거대한 선별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소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역사의 사실로 전화시켜야 하고 이와 동시에 수많은 하찮은 사실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추려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이와 달리, 사실이란 스스로 말하며 사실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19세기의 사실 숭배는 문서들에 대한 숭배로 이어진다. carr는 슈트레제만의 예를 통하여 문서숭배의 단적인 폐해를 보여준다. 우리가 문서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다면 그 무엇인가는 정말이다. 그러나 그 어떤 문서도 고작 우리에게 그 문서의 작성자가 생각한 것을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 모두는 역사가가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해독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은 문서 안에 있건 없건 역사가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서의 기록은 기록자가 생각한 것, 남기고자 한 것만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는 여전히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되어야만 한다. 사실과 문서들은 역사가에게는 필수적이지만 그것들을 숭배하지는 말아야 한다.자신감과 낙관주의로 가득 찼던 19세기의 랑케는 자기가 사실들을 돌보면,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신의 섭리가 보살펴줄 것이라고 경건하게 믿고 있었다. 이런 역사관은 그 당시 자유방임의 경제학설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역사란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보편적인 조화를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방황과 혼란스러운 20세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의 능력을 믿지 않게 되었다. 역사가 스스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고민하며, 역사철학을 제창하기 시작했다.크로체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평가를 통해서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기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콜링우드는 역사란 역사가가 과거의 행동의 배후에 있었던 사유를 이해?연구하고, 그 사유를 역사가의 정신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역사가의 정신 속에서 과거의 재구성은 경험적인 증거(과거의 사실?)에 의존하며 그 재구성의 과정은 사실들의 선택과 해석을 지배한다: 사실들이 역사적 사실들로 바뀌는 것은 이 때문이다.크로체와 콜링우드의 의견에 carr는 다음의 3가지를 부연 설명한다.첫째,(carr는 둘째로 다룸)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에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는 다루는 대상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공감하진 않더라도 그들에 대한 상상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영어권 국가에서 소련에 관해 쓰여 진, 소련에서 영어권 국가들에 관해 쓰여 진 글들 가운데서 왜곡된 해석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역사가가 자신의 서술 대상인 사람들의 마음과 접촉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둘째, 우리는 해석의 가치를 충실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역사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콜링우드의 말대로 만일 역사가가 자신의 등장인물의 마음속에서 움직인 것을 반드시 그의 생각 속에서 재현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이번에는 독자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반드시 재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들의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역사가를 연구해야 한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사실이라는 고기들 중에서 역사가는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사실들을 낚아 올릴 것이다. 즉, 사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자에 대해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셋째,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역사가가 사용하는 말(용어)들은 그 시대의 함축적인 의미들이 있고, 그는 그 말들을 시대와 분리시킬 수 없다. 역사가가 현재에 시대에 영향을 피하기 위해서 과거 그 당시에 사용했던 낯설거나 쓸모없게 된 단어들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해서 과거로 숨어들어갈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가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언어의 사용은 그가 중립적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가가 살고 있는 사회의 세력이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느냐에 따라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 역사가의 기능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나치게 해석에만 무게중심을 두면, 사실에 관한 올바른 해석의 기준이 현재의 어떤 목적에 대한 그 해석의 적합성이 될 수도 있다. 순전히 실용적인 견해에 빠져서 (위처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한다면 지식이란 어떤 목적을 위한 지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이러한 我田引水의 우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짓밟으면서 오만하게 해석을 내리는 것을 견제해야 한다.지나치게 역사가의 역할만을 부각시키면 역사는 역사가 만드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역사란 ‘어린아이의 글자 맞추기 상자와 같아서 어떤 단어든 원하는 대로 이어 붙일 수 있다’는 회의주의에 이르게 된다. 즉, 역사가가 원하는 부분들만을 모아놓은 ‘가위와 풀의 역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어떤 산이 보는 각도를 달리 할 때마다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 산은 객관적으로 전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무한한 형상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다. 다양한 각도를 통해 본 여러 가지 산의 형상을 통해서 우리는 산의 형상을 완벽히 재현할 수는 없더라도 산의 형상에 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다.
    인문/어학| 2006.04.06| 4페이지| 1,000원| 조회(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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