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협상 비준 동의안 통과’목차1. 발생배경2. 주요내용3. 결과와 대응4. 관련된 문제5. 정리와 생각1. 발생 배경2005년 7월 경 정부의 쌀협상 비준동의안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그 후 4개월 여 만에 국회 상임위를 통과, 11월 23일 비준동의안이 통과되었다. WTO의 계속적인 시장개방 압박과 다른 수출계통의 타격, 의무 수입량 규정,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등으로 이의 불이행시 우리나라에 있을 무역보복 때문에 끝내 통과되었다.95년도 우루과이 라운드 당시 우리나라 일본 대만 필리핀은 쌀에 대해 특별 보호품목으로 시장 개방에서 예외되었다. 즉 10년 동안 특혜를 받은 셈이다. 그 10년이 지나고 작년 다시 협상 대상국 10개국을 상대로 협상을 하고 다시 WTO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쌀협상 내용, 즉 비준안 내용을 보면 다시 10년 동안 쌀 관세화 대신 관세화 유예를 선택하며 시장접근 물량으로 의무수입물량의 4%를 올해 안에 시장에 풀어야 한다.이번 비준안 처리가 문제가 된 것은 비준안을 연기나 거부했을때 우리나라의 시장변화인데 정부는 비준안 거부 시 관세화(개방)으로 전환되며 무역보복 WTO에 제소 당하는 등, 농민 더 나아가 국익에 도움 되지 않는다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통과를 시킨 것이다. 반면 전농연과 민주노동당은 비준안 거부 시 과거 10년 동안 유지되었던 관세화 유예가 연장되며 작년 협상이 불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내년에 열리는 DDA협상 결과를 보고 비준안을 처리하자는 것입니다. 비준안 처리가 곧 쌀시장 개방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비준안 거부시 관세화로 돌렸을 경우가 완전 개방을 의미한다.2. 주요내용정식명칭 : 세계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마라케쉬 협정 부속서 1가 중 1994년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대한 마라케쉬 의정서에 부속된 대한민국 양허표 일부개정 비준동의안.양허표 LX-대한민국제1부 : 최혜국대우 관세제1절 : 농산물제1-B절 : 관세할당1. 제3열 및 제4열에 명시된 2005년부터 2014년까지의 최소시장접근 물량은대우의 이행기간(2005년부터 2014년까지) 중에는 각 연도의 개시시기에 특별대우의 적용을 중단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해당 농산물에 대하여는「농업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반관세가 적용된다.4.2 「농업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지침에 따라 계산되는 관세상당치를 기초로 설정된 2005년도 관세율이 도하개발아젠다 협상의 결과가 발효할 때까지 적용된다. 도하개발아젠다협상의 결과가 발효한 이후에 특별대우의 적용이 중단되는 경우, 관세율은 그 협상 결과를 반영하여 조정된다.4.3 특별대우가 중단된 이후에 대한민국은 그 시점에서 유효한 최소시장접근 물량수준을 유지한다. 그러한 물량수준이 도하개발아젠다협상의 결과에 따라 결정된 물량수준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경우, 둘 중 더 높은 수준의 물량이 적용된다.5. 수입부과금대한민국은 우루과이라운드 양허표 ‘*주석 4’에 따라 수입부과금을 부과할 수 있다.6. 수입쌀의 이용6.1 상기 규정에 따라 수입된 쌀이 밥쌀용 및 그 외의 용도로 국내 유통경로에 접근하는 것이 보장된다.6.2 밥쌀용으로 한국의 시장에 유통되는 수입쌀(밥쌀용쌀)의 물량은 이행기간의 제6년차까지 6년 동안 총 최소시장접근 물량의 10퍼센트보다 적지 아니한 물량으로부터 30퍼센트보다 적지 아니한 물량으로 단계적으로 균등하게 증가한다. 고품질쌀을 포함하여 밥쌀용쌀은 통상의 유통경로, 도매상, 유통업자, 그리고 최종수요자에게 접근이 허용된다. 밥쌀용쌀은 저장기간으로 인하여 밥쌀용쌀로서의 품질이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아니하도록 적절한 시간내에 유통된다.6.3 상기 규정된 밥쌀용쌀의 이용과는 별도로 그리고 추가적으로, 한국의 시장에서 밥쌀용 외의 목적으로 유통되는 수입쌀 물량은 최근의 유통형태를 반영한다.3. 결과와 대응1. 쌀협상, 무엇이 문제인가?우리나라가 쌀 협상 대상국(미국, 중국, 태국 등)으로부터 쌀 개방 유예를 허락받으며 추가로 얻게 된 핸디캡 중 하나가 MMA의 증대인데, MMA란 'Minimum Market Access',다시 말해 최소시장접근이라고 해 나올 전망이다. 국회의 쌀비준안 처리는 '한국의 국제신인도 하락과 쌀 관세화 조치를 막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인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 쌀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농-정간의 갈등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입 쌀의 국내 시판으로 쌀 농업기반이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비준안 통과 후 절차는? 수입쌀 이르면 내년 3월 시판.쌀협상 비준안이 통과됨에 따라 정부는 먼저 의무 수입쌀 물량을 확정짓기 위한 법령 정비에 나선다. 이후 미국, 중국, 태국, 호주 등 쌀 수출국별로 수입입찰공고를 내고, 입찰과 낙찰, 계약체결과 수송 등을 절차를 거치게 된다.농림부는 입찰, 현지가공, 통관 등에 걸리는 시간은 3~4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이르면 내년 3월부터 수입쌀이 시판될 전망이다.우리나라의 의무 수입물량은 첫해인 올해 22만5575톤(국내 쌀 소비량의 4.40%)을 시작으로 2014년에는 40만8700톤(국내 쌀 소비량의 7.96%)까지 확대된다.하지만 올해는 현실적으로 쌀수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년에 올해분과 내년분 45만톤이 단계적으로 수입될 것으로 보인다.관세화 유예를 받는 대신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수입쌀이 국내 시장에 직접 시판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수입쌀을 가공용으로 돌려 시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했지만 앞으로는 의무수입 물량 중 일부를 반드시 시판해야 한다.밥쌀용 시판물량은 첫해는 수입물량의 10%이고, 2010년까지 30%로 확대된다. 즉 첫해인 올해의 경우 수입물량 22만5575톤의 10%인 2만2500톤을 시판해야 한다는 것. 수입쌀 시판이 내년 3월이후로 늦춰졌기 때문에 결국 내년에 올해와 내년분 의무수입물량의 10%인 약 4만5000톤이 국내 소비시장에 나오게 된다.◆수입쌀 시판 영향은? 농·정 갈등 심화 될 듯.농민 단체들은 수입쌀이 시판될 경우 국내 쌀값 하락과 함께 쌀 농업기반이 잠식될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로 했다.하지만 이같은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국회가 이날 비준안을 통과함에 따라 앞으로 농민들의 반발은 더 거세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와 관련 전농은 이미 정권퇴진운동까지 벌이겠다고 밝힌 상태다.3. 정부의 대책농림부가 쌀 협상 국회 비준과 관련해 농가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농림부는 내년에 만기가 되는 5조 9천억원 규모의 농가대출금을 3년이나 5년 동안 나눠서 갚을 수 있도록 했다. 현재 4∼5.5%인 농민에 대한 정책자금 금리도 3∼4%로 내린다.쌀 농가의 영농 규모화로 우리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농지구입 자금금리도 3%에서 2%로 내린다. 쌀시장을 조기에 안정시키기 위해서 올해 공공비축 매입물양 400만석과는 별도로 100만석을 추가로 매입할 방침이다. 또 시장의 수급 상황에 따라 필요할 경우 추가 대책도 추진할 계획이다.농림부는 농민 단체들의 요구 사항 가운데서 정부가 받아들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수용했다며 쌀 협상 비준안의 조속한 국회통과도 요청했다.4. 비준안 반대 측 입장이미 우리 농촌은 UR 농산물개방과 농가부채 문제로 농촌은 몸살을 앓고 있으며, 소외되고 후진적인 산업으로 보여 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정부는 2004년 쌀협상을 과정을 농민과 국민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밀실에서 진행했다. 협상안의 내용은 10년뒤 전면 개방과 의무도입량의 증가, 수입쌀의 시중판매, 수입쌀 대북지원을 제외하는 것뿐만 아니라 쌀 이외에 배와 사과를 포함하는 이면합의에 이르기까지 명백히 잘못 돼 있다. 통상전문가인 송기호변호사는 지금의 잘못된 쌀협상안을 국회비준 하느니, 아예 관세화로 가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농업에 유리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만큼 정부의 쌀협상이 잘못된 것이며 우리농업에 미칠 파장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전국의 350만 농민들은 12월의 홍콩 DDA각료회담 이후로 비준을 연기하고 잘못된 쌀협상을 재협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올해 안에 쌀협상 국회비준안이 통과 안되면 관세화로 가고 국가 협상 중에 있는 DDA에서 아직 쌀은 적지않은 관세 품목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 쌀의 관세는 전세계적 협약에 의해 매년 점차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지금의 쌀의 수입 관세와 10년 뒤의 쌀의 수입관세는 차이가 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쌀을 개방한다면 비교적 높은 관세로 인해 쌀 수입을 억제할 수 있겠지만 10년 뒤 훨씬 더 낮아진 관세를 붙이게 된 뒤에는 쌀 수입 억제가 그만큼 힘들어질뿐더러 이미 늘어난 수입량 때문에 일순간에 국내 쌀 시장이 난국을 겪게 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개방을 하는 게 단연 낫다.전문가들도 의무수입물량이 8%대를 넘어선다면 차라리 관세화를 택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내고 있고, 6년간의 개방유예를 받았던 이웃나라 일본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유예기간이 끝나고 쌀의 관세화를 결정했다.무엇보다 MMA의 증대가 문제인데, 우리나라는 지난 첫 번째 쌀 개방 유예 때 받은 약 4%(약 20만여톤)대의 의무수입물량을 이번 10년간의 추가유예와 함께 약 9%(약 40만여톤)대로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가 지금 쌀 시장 개방 유예와 함께 MMA의 양을 증대시킨다면 어차피 매년 일정량의 수입쌀은 계속 들어오게 되고 그 수요자는 국내에만 한정되어 있으므로 자연스레 국내 쌀 생산량은 10년 동안 의무적으로 수입된 수입쌀의 양만큼 줄어들게 되겠죠. 그래서 10년이 지나 쌀이 관세화가 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이미 줄어든 국내의 쌀 생산량만큼, 즉 우리나라의 의무수입량만큼 어차피 수입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인 것이다.또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런 이유로 관세화를 택했고 아직 개방 유예를 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필리핀 밖에 없다.4. 관련된 문제◆ 농민 시위쌀관세화 유예협상 비준동의안을 상정, 처리할 예정인 가운데 농민단체의 반발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한농연과 전농 등 농민단체 회원들은 전국 곳곳에서 나락을 불태우거나 지역구 의원 사무실을 점거하는 등 거세게 저항하고 있다.전국민중연대 등 시민사회단
비만과 운동1. 비만의 정의와 평가사람의 몸은 생명을 유지하고 일상 활동에 필요한 뇌, 내장, 근육, 뼈, 수분 등의 중요한 활성 조직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음식물 형태의 에너지 보급이 중단될 경우에 대비하여 에너지를 저장해두는 체지방으로 구성되어있다. 비만은 단순히 체중이 많이 나가는 과체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체지방이 과잉으로 축적된 상태를 말한다.. 비만의 진단비만을 진단하는 방법에는 총 신체수분을 측정하여 지방을 환산하는 방법, 총 신체열량을 측정하는 법, 신체 비중을 측정하는 법, 피하지방의 두께를 측정하는 법 등이 있다.1) 표준체중에 의한 비만도의 계산법{1. 일차적으로 표준체중을 계산한다.남자의 표준체중(kg) = 신장(m) * 신장(m) * 22여자의 표준체중(kg) = 신장(m) * 신장(m) * 212. 이차적으로 비만도를 계산한다.비만도(%) = [ 자신의 체중(kg) / 표준체중(kg) ] * 1003. 비만도의 표를 비교하여 자신의 비만도를 판정한다.1) 비만도의 판정표80%미만은 심한 체중부족80 - 90%는 체중부족90 - 110%는 정상체중110 - 120%는 과체중120%이상은 비만체중2) 체질량지수에 의한 비만도의 계산법{1. 일차적으로 체질량지수를 계산한다.체질량 지수 = 현재체중(kg) / [신장(m)* 신장(m)]2. 비만도의 표를 비교하여 자신의 비만도를 판정한다.1) 여자의 비만도 판정표 2) 남자의 비만도 판정표18미만은 체중부족 19미만은 체중부족18 - 23은 정상체중 19 - 24는 정상체중23 - 29는 과체중 24 - 30은 과체중29이상은 비만체중 30이상은 비만체중3) 체격에 의한 비만도 판단법자세를 편하게 하여 반듯하게 누운 상태에서 허리둘레와 가슴둘레를 측정하여 허리둘레가 가슴둘레보다 클 경우는 비만으로 판정하고, 허리둘레와 둔부의 둘레 비를 기준으로 남자의 경우 1.0 이상, 여자의 경우 0.9 이상일 때를 비만으로 판정한다.2. 비만의 원인과 분류비만의 발생원인은 유전 체내 에너지 대사에 교감신경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식사습관과 같은 환경적 요인이 비만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체질, 유전, 에너지 소모량 등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의 식사를 하여도 체지방의 증가율이 높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러한 측면에서, 어렸을 때 비만인 사람은 성인기에 비만인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 식사조절을 철저히 하여 비만을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비만한 사람의 섭취열량은 정상적인 사람보다 많지 않거나 오히려 적은 경우도 있어 에너지의 과잉 섭취보다는 아마도 에너지 소비의 부족 현상에 의한 비만이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데 신체의 활동을 통한 소비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신체활동에 참여하는 습관을 길러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건강한 생활을 위한 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내분비 장애에 의한 비만은 전체 비만증의 약 1% 이하로 비교적 적게 발생하는데 내분비 계통이 비정상적이어서 피하에 지방이 필요 이상으로 축적되어 비만이 되는 현상이다.그리고 이러한 비만 이외에 약물에 의한 비만, 임신시에 지방세포의 비대에 의하여 현저한 체지방의 축척으로 인한 비만, 폐경이나 난소 절제술에 의하여 여성호르몬의 부족이 체내 지방조직을 증가하게 함으로써 비만이 되기도 한다.. 비만의 분류비만은 다양한 형태로 분류하는데 성별에 따라서 여성형 비만과 남성형 비만으로 분류하며 체형에 따라서는 상체 비만과 하체 비만으로 분류하고, 연령에 따라서 어려서부터 성인인 되기까지 지속된 비만은 지방 세포수가 증가해 팔, 다리, 배 등에 비만 중세가 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평생 비만과 청소년기를 중심으로 성인기에 접어들면서 생활양식의 변화에 의해 비만이 되는 성인형 비만이 있다.3. 비만이 일으키는 다양한 질병비만한 사람은 활동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기 때문에 심혈관계 계통의 심근경색증, 인슐린 비 의존형의 당뇨병, 심혈관계질환, 지질대사 이상,암 등의 합병증과 상관 수분 약 20%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 1g이 갖는 에너지는 9 칼로리이기 때문에, 체지방 1 kg을 연소시키기 위해서는 9x1,000x0.8 = 7,200 약 7,000 칼로리의 에너지 부족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계산이 된다. 따라서 1일 약 1,000 칼로리의 에너지 부족 상태를 만들면 1 주에 1kg, 1 달에 4 kg의 감량을 할 수 있다.그러나 실제로는 신체에서 감량에 저항하는 적응 현상(adaptation)이 있어 이렇게 단순한 계산만으로 체중 감소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식사 요법을 철저히 실천하고, 운동 요법을 병행하며, 교육을 강화시키는 것이 비만 치료의 기본이 된다. 운동 요법의 병용이 필요한 이유는, 식사 요법만으로 감량 중에 나타나는 정체(적응 현상)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감량 태도본래 올바른 감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식, 이해, 실천이라고 하는 3가지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칼로리 계산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며, 이해하고 있어도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종래의 식사 지도가 섭취 에너지와 영양소의 균형이라고 하는 '양과 질'의 교육을 통한 이론의 이해만 강조되고 실천과의 조화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양과 질을 고려한 식생활의 배려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장기간에 걸쳐 실천 가능한 개인의 특성에 맞는 감량 지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량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식사 및 생활 활동을 조사하여 개인의 생활양식(life style)의 특성을 파악한 후에 개개인에 적합한 다양하고 무리 없는 지도법을 생각해야 한다. 획일적으로 섭취 에너지와 영양소의 배분을 지시하고, 식사 조사표를 토대로 단순하게 영양가를 계산을 하는 방법은 피해야 한다.단기간에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무조건 굶는 사람들이 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당장은 체중이 감소한다. 하지만 섭취열량만을 줄이는 방법으로 1주일에 1㎏ 이상 급속히 감량하게 되면 대부분 체내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이고 된다.하지만 운동은 그 자체가 칼로리를 소모할 뿐 아니라 운동 후 적어도 2-3시간 동안 우리 몸의 대사량을 증가시키므로 섭취열량을 줄인 다이어트와 규칙적인 유산소성 운동을 겸비하면 체지방은 감소하는 반면에 근육의 양은 증가하게 되므로 비만을 해소할 수 있게 되고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을 높여 체중 감소에 따른 부작용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전문가의 조언을 받은 균형 있는 다이어트와 운동을 함께 실시해야 하는데, 걷기나 조깅, 자전거 같이 중간에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낮은 강도의 지구성 운동을 규칙적으로 꾸준히 실시해야한다.5. 비만의 치료 - 식사요법과 운동요법비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인체 내에 축척된 칼로리의 양을 적절히 소비하여 체지방량을 정상 수준까지 낮추어야 하는데 비만의 질병을 완치하는 비율이 5% 이하로 암을 치료하는 비율보다 낮다는 연구로 미루어 볼 때 체중을 감량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체중을 감량한 후 지속적으로 체중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타내는 것이다.비만을 치료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식이요법과 운동요법 등이 있다.1) 식이요법식이요법은 과잉의 칼로리가 섭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정상적인 식사에 있어서 이상적인 영양소 배분은 당질 50%, 단백질 15%, 지방질 35%이지만 비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질과 지방이기 때문에 이것을 줄이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상인의 1일 섭취 칼로리는 보통 남자의 경우 약 2400 - 3000kcal, 여자의 경우 약 1600 - 2200kcal인데 비만인 사람은 섭취 칼로리를 일정량 줄여서 지속적으로 신체를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식이요법을 실시하면 몇 일간은 체중이 감소하게 되다가 점차 체중의 변화가 둔화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주로 인체 내에 있는 수분과 탄수화물이 재보충되기 때문이며, 비만의 주 원인인 지방의 감소는 미미한 정도이다. 식생활을 비만의 치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식사를 하기 전에 물을 두 컵 정도를 마시고 음식을 천천히 적은 양을효과적이다.3 다양한 재료의 사용끓이는 음식을 요리할 때 한 가지 보다 다른 재료를 섞으면 좋은 맛이 야채에 배어 맛있는 음식이 된다. 예를 들어 무와 오징어, 푸른 야채와 낙지 등은 서로 잘 맞는 식품이 된다.4 기름이 많은 요리의 주의 사항튀김 요리에서 기름을 많이 사용하지 많도록 고려하고, 튀긴 후 기름을 빼서 먹도록 한다. 음식을 볶을 때 사용하는 기름의 양은 일반적으로 재료의 5%가 표준이나 감량 중에는 3% 정도로 줄인다.5 혼식의 이용주식을 쌀밥만으로 할 때보다 잡곡을 혼합하면 밥의 양을 줄일 수가 있다. 보리밥이나 잡곡밥은 혈당의 상승이 적으며, 만복감이 크다.6 야채 요리를 자주 먹는다.생야채를 그냥 먹기보다는 버섯이나 해산물을 첨가한 무침요리는 야채 섭취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다. 무침 재료로 식초, 레몬, 깨 등을 이용하여 변화를 준다.7 구이 요리석쇠 구이와 소금구이는 기름을 사용하지 않는 좋은 조리방법이다. 양념장을 발라 구울 때 양념장의 농도를 옅게 한다.. 공복감에 대한 대책비만한 사람은 오랫동안 과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너지를 제한한 식사로 바꾼 후 어느 정도 만복감이 나지 않으면 결국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감량에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무조건 저에너지 식품을 공급으로, 부피를 늘려 공복감을 없애는 것은 과식의 교정에 문제가 있다. 항상 과식하던 사람도 괴로운 것은 처음 1-2주간이기 때문에, 그때를 잘 넘기면 정해진 식사량에 익숙해진다. 감량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식사량을 조절해 가는 단계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한다.1 식단에 국을 넣는다.식사에 국을 집어넣어, 식사 초반에 먹도록 한다. 그렇게 하면 우선 수분이 위를 채우기 때문에 공복감으로 식사를 빨리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특히 야채가 많은 국이 좋다.2 저에너지 식품을 이용한다.해초 (미역, 다시마, 한천, 우무 등), 곤약, 버섯(표고, 송이 등)의 저에너지 식품 (그 외에 당질이 적은 야채, 비지 등)을 사용한 요리를 식단에 넣어 양적인 만족감을 부여.
신해혁명, 중국의 마지막 근대운동이자 새로운 혁명의 시작근대국가를 지향하는 20세기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과 이듬해의 중화민국 수립에 의해서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곧 혁명으로 이어져나갈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은 역시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성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해혁명은 중국 최초의 혁명이었으며, 동양 최초의 시민혁명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신해혁명으로써 중국의 근대화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1840년의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내ㆍ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이루어져왔으나 많은 한계점과 교훈들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신해혁명은 공산화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근현대화과정의 시작점이라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냉철히 판단하였을 때 신해혁명은 실패한 혁명이었다. 신해혁명이 보여준 근대화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신해혁명 전ㆍ후 중국의 상황과 변화를 알고, 신해혁명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 전통사회와 근대사회1) 구체제와 민중의식 그리고 지배논리중국의 전통사회는 왕조교체에 의해 전제왕조체제를 지속하며 중화의식을 고수해왔다. 신해혁명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은 중국사회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근대에 직면한 청나라는 정치면에서는 사회의 최상층에 만주족 출신의 황제가 독재권을 휘두르고 있었고, 관료 계층(사대부)이 그 수족으로 중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관료는 원칙적으로 과거에 의해서 기회균등으로 선발되는데 현실적으로는 지주나 부농이 아니면 응시가 불가능했다. 촌락에는 향시(鄕試, 지방시험)의 응시자격자인 생원(生員, 수재)이나 향시의 합격자인 거인(擧人) 등의 관료예비군과 퇴직관료 등을 중심으로 해서 일종의 특권계층인 향신(鄕紳) 층이 형성되어 있었다.경제면에서는 당시의 세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융성한 상업ㆍ수공업을 보유하 능력이 시험되었다. 그들을 사대부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의 책임자라는 의식(사대부 의식)을 가졌다.한편 농민이나 일반 민중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들은 억압을 당하고 더구나 자연의 맹위에 시달려 기아선상을 헤매는 가운데 민간의 잡신에 대한 신앙과 다양한 미신에서 구원을 찾았다. 민중의 신앙은 살아나가기 위한 현세구복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꾸로 지배층의 일반민중에 대한 교화나 공동체의 제어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일반 민중의 신앙은 도교색이 가장 짙었기 때문에 통속도교 혹은 민중도교라고 불리었는데 전체적으로는 도교ㆍ유교ㆍ불교의 3교 혼재였다. 그 혼재신앙의 서적으로는 선서(善書)와 보권(寶卷)이 있다. 선서는 유교색, 보권은 불교색이 짙은데 그것은 향신과 지주의 중간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체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2) 근대로의 저항중국의 전통적 사회와 구체제는 아편전쟁 이후의 외압과 그것을 전후한 국내정세의 격동으로 크게 뒤흔들렸다. 정치ㆍ군사의 실권은 만주 귀족의 관료 군인으로부터 한족 사대부층의 관료 군인으로 옮겨졌다. 태평천국운동(1851~64)이 일어나자 청조 직속의 정규군이나 한족 지방군은 무력했고, 증국번ㆍ이홍장 등 각각 향토의 지주 향신층이 의용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다. 그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을 이념으로 하여 군사와 산업을 주로 하는 근대화의 시도, 즉 양무운동을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1894)의 패배로 좌절되었다.이어서 강유의 등이 입헌군주제로의 개혁(무술변법)을 단행하지만 실패한다. 청나라의 상류층도 결국에는 입헌군주제를 겨냥해서 과거를 폐지하고(1905) 신식학교를 설립하고, 유학생을 대량 해외에 파견하고, 신형 관료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위안스카이 등은 신식장비의 군인을 육성하였는데, 이들이 신해혁명 때에는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또 한편 구체제에 기반을 둔 농촌에서는 지주ㆍ농민의 대립, 지추층에로의 경지 집중, 상품ㆍ화폐 경리적 정신을 지표로 하는)를 위해서 이후 긴 고투가 이어졌다.2. 근대국가로의 모색 - 경제의 근대화어떻게 하면 예로부터 내려온 지배체제를 바꾸어 근대국가적인 체제로 정비할 수 있을 것인가. 입헌 군주제로의 개혁에 희망을 건 일부의 청나라의 지배계층도, 청의 타도와 공화제의 새로운 국가 수립에 꿈을 건 혁명파의 지식인들도 근대국가체제를 갖추어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발전을 기약한다는 근본적인 모습에 관해서는 일치하였다.1 국제경제로의 편입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중국은 대외무역과 외국의 투자총액은 큰 증가세를 보여 왔다. 시모노세키 조약(1895) 등에 의해서 중국을 둘러싼 국제적 조약 체제에도 외자 도입의 자유화로 이어지는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세계무역의 전반적인 추세를 추적해 볼 때 1890년대 중반을 전환점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국제경제와의 관계가 밀도를 더해가는 과정은 중국경제 그 자체의 새로운 전개과정과 서로 겹쳐서 진전되었다. 이를테면 중국의 철도, 선발, 전신 등 교통전신망이 확충 정비된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내의 상업적 농업이 확대되고 연해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공업 기업을 설립하려는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2 경공업 제품의 국산화이제 막 걸음마를 하고 있던 도시지역의 경공업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하늘의 도움이라고도 할만한 사건이었다. 전쟁의 영향으로 구미에서의 수입이 단절되고 국산품 시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민족산업의 황금기라고도 일컫던 이 시기를 계기로 하여 1920년에서 1930년대에 걸쳐 국산품이 수입품을 대신하여 공업화가 경공업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진전되어 나갔다. 여기에는 역대 중국정부의 경제정책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법, 민법, 회사법, 공장법, 은행법에 이르기까지 경제법제의 정비, 수입 관세의 인상을 비롯한 국내산업 보호정책, 통화제도의 통일과 안정화, 각종 산업정책 등이다.3 경제의 근대화와 민중생활중국의 민중생활도 크게빌려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이에 후난[湖南]·후베이[湖北]·광둥[廣東] 등에서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쓰촨[四川]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쓰촨폭동). 같은 해 10월 초 청조가 쓰촨폭동을 토벌하기 위하여 후베이신군[湖北新軍]을 동원하자, 혁명파는 10월 10일 우창에서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에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12년 1월 1일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南京]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발족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조는 위안스카이[袁世凱]를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하였으나, 영국의 중재로 화평이 제기되었다. 열강측이 압력을 가하고, 혁명파 내부의 대립도 있어서 혁명군은 북벌을 중지하고 대화가 진행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빼앗아,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北京]정부를 조직하였다. 이 때부터 혁명은 급속하게 반혁명으로 반전되었다. 정당이 난립하는 중에 혁명파는 혁명동맹회를 개조하고 소당파(小黨派)를 합쳐서 국민당(國民黨)을 창립, 의회정치의 실현을 희구하였으나,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에게 무력탄압을 가하여 제2혁명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혁명파는 제2(1913.7), 제3(1915.12)의 혁명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정권과 대결하였으나, 반제(反帝) ·반봉건의 과제는 해결되지 않고 5·4운동 이후의 혁명으로 미루어졌다.4. 쑨원, 그리고 중화민국1901년, 보수세력의 대표인물인 이홍장이 죽자 40대의 야심만만한 위안 스카이가 서태후의 총애를 받고 권력자로 등장한다. 그도 이홍장처럼 보수 정치인으로서 외국 세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굳힌 기회주의자였다. 보수 정치가 계속되는 동안 중국에서는 군주 제도를 폐지하고 공화제의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으니 그 중심 인물이 바로 자본가를 멀리하고 돈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과의 차이가 거의 없는 사회를 만드는 민생주의 . 이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로 각계각층의 지지를 모았고 혁명의 기운은 점차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혁명의 열기가 번져 나가던 1908년, 광서제와 섭정 실권자였던 서태후가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황제 광서제는 자손이 없어 아우인 순친왕의 아들 부의 가 황제에 올랐다. 이 때 부의의 나이는 겨우 3세였다. 그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이다. 이제 선통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은 청나라의 통치권을 쥔 섭정이 되었다. 순친왕이 실권을 쥔 청나라 조정은 헌법 대강 을 발표하였으나 혁명 세력은 반발하고 나섰다.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파의 반발은 폭동으로 이어졌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일어난 군인 봉기는 전 중국으로 번져 모든 국민이 휩쓸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이다. 지금도 10월 10일은 쌍십절이라고 하여 중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일로 기념되고 있다.혁명군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외국에 나가있다가 귀국한 쑨 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받들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중국 2000년 역사의 전제 군주제는 신해혁명으로 무너지고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5. 신해혁명의 실패와 청나라의 멸망중국 땅의 반 이상이 중화민국 에 들어가자 청나라 조정은 크게 놀랐다. 섭정 순친왕은 혁명 세력을 누르기 위해 위안 스카이를 불러들였다. 위안 스카이는 쑨 원과 만났고, 신해혁명의 완성을 위해 쑨 원은 총통 직위를 위안 스카이에게 넘겼다. 다만 독재화를 막기 위해 정부를 난징에 둘 것과 임시 헌법을 지킬 것을 다짐해 두었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는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정부를 옮기고 임시 헌법도 지키지 않았다. 이미 기운을 다 한 청나라는 7세의 선통제가 황제에서 물러나고 중국은 중화민국으로 통일되었으며 베이징은 새 공화국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임시 대총통이 된 위안 스카이는 쑨 원이 이끄는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정식으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