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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량경제](계량경제학)영화흥행요소 다중회귀분석
    회귀분석을 이용한 영화 산업의 수요함수 추정계량경제학상경학부 경제학전공Ⅰ. 서론1. 분석동기 및 목적2. 보고서 작성 중심사항Ⅱ. 영화 산업의 수요함수에 대한 실증분석1. 모형제시와 가설설정2. 자료수집3. 각 변수의 기초 통계량과 분포4. 회귀분석(1) 추정결과와 회귀진단(2) 회귀 가정에 대한 모형의 적합성 검토1). 오차항의 정규성 검토2). 다중 공 선성 검토3). 동분산성 검토4). 독립성 검토(자기상관 탐지)Ⅲ.결론Ⅰ. 서론1. 분석동기 및 목적과거에 비해 국민들의 여가수준과 소득이 높아지면서 문화 활동이 우리의 삶에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인 사회 환경이 좋아지면서 여가, 문화의 소비가 어떻게 변화 했는지, 무엇에 따라 수요가 변하는지, 그 궁금증을 시작으로 주제 설정을 하게 되었다. 문화 활동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한 예로, 그 수요에 어떤 변수들이 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모형을 통해 알아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2. 보고서 작성 중심사항본인이 평소에 관심 있었던 경제 사건들 중 하나를 선택해 회귀분석의 순서에 따라 분석해보고, 시계열 자료의 분석에 회귀분석 모형을 이용했을 때 발생하는 모형내의 여러 문제점을 탐지하는 과정을 수행해 본다.Ⅱ. 영화 산업의 수요함수에 대한 실증분석1. 모형제시와 가설설정모형: Yi= β?+ β₁?X1i + β₂?X2i + β₃?X3i + εiY = 영화수요 (관객 수)X1 = 1인당 국민소득X2 = 평균관람 요금X3 = 국내 스크린 수영화 수요(Y)가 1인당 국민소득과 비용, 국내 스크린 수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고 모형을 설정한다. 이에 영화의 수요는 소득과 국내 스크린수가 증가할수록 늘어날 것으로 가정하고, 비용은 증가할수록 부의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한다. 문예진흥기금은 영화소비 할 때 부가되는 세금인데, 이는 2004년부터 폐지되고 그 수치가 정확치 않는 걸로 조사 되었습니다. 이에 부가되는 세금은 10%의 부가세뿐인데 이는 평균관람요금에 종속되는 항목으로스크린 수 는 영화진흥위원회(http://www.kofic.or.kr/)에서 수집해 사용하였으며, 1인당 GNI는 통계청(http://www.nso.go.kr/)에서 수집해 사용하였다.항 목총 관객 수(만명)1인당 GNI($)평균관람요금(원)스크린 수197016,63525473690197114,630*************1,*************7311,*************749,73*************57,*************9766,*************9776,4931,*************7,3991,43138948819796,5521,*************5,3771,64595744719814,4441,8001,09742319824,2741,8931,30040419834,4042,0761,32645019844,3902,2571,53253419854,8102,3091,43256119864,7302,6431,53364019874,8603,3211,63767319885,2204,4351,84769619895,5305,4182,27177219905,3506,1472,60278919915,2207,1053,03476219924,7117,5273,47171219934,8238,1773,71166919944,8359,4593,89562919954,513114324,26857719964,220121974,82851119974,752111765,01749719985,01873555,15050719995,47294385,23058820006,462108415,35572020018,936101605,860818200210,513114996,035977200311,947127206,0021,132200413,517141626,2871,451자료출처 : 영화진흥위원회(http://www.kofic.or.kr/),통계청(http://www.nso.go.kr/)3. 각 변수의 기초 통계량과 분포4. 회귀분석(1) 추정결과와 회귀진단-회귀분석Yi= β?+ β₁하므로, 귀무가설을 채택하게 된다. 따라서 독립변수 β₂는 모형에서 제외한다. 이 회귀모형의 AIC값은 15.29641, SIC값은 15.43109 이다.-수정 후 회귀분석β₂의 변수를 제외하고 회귀분석을 한 결과, 결정계수와 조정된 결정계수의 값이 높아 졌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AIC값은 15.2397, SIC값은 15.3295 값으로 이전의 회귀분석보다 그 값이 작아졌음을 볼 수 있다.수정된 모형 Yi= β?+ β₁?X1i + β₃?X3i + εi1) T-검정①의 통계적 유의 성/의 T-통계량은 -3.3850이고 P-값은 0.00194이다. 유의수준 95%에서 이 통계값이 유의하지 않음으로 귀무가설을 기각할 수 있다. 따라서 통계적으로 유의수준 95%에서은 유의하다. 그리고 1인당 소득의 증가는 영화 수요증가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②의 통계적 유의 성/의 T-통계량은 6.33138이고 P-value는이다. 유의수준 95%에서 이 통계값이 유의하지 않음으로 귀무가설을 기각할 수 있다. 따라서 통계적으로 유의수준 95%에서은 유의하다. 그리고 영화관의 스크린수 는 영화수요 증가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2) F-검정/: 모든 회귀계수는 동시에 0이 아니다.F-통계량은 20.0453 이고 P-value는이다. 유의수준 95%에서 이 통계값이 유의하지 않으므로 귀무가설을 기각한다. 따라서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설명되는 부분이 유의 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3) 조정된 결정계수결정계수는 총변동중 회귀모형에 설명되는 비율인데 , 1에 가까울수록 모형의 적합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모형에서 결정계수는 0.56393 이고, 조정된 결정계수는 0.53580 로 어느 정도 적합도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최종 모형은 Y= 165.9249 -0.31499X1 +12.6727X3 + εi 으로 , 나타낼 수 있다.(2) 회귀 가정에 대한 모형의 적합성 검토1). 오차항의 비정규분포오차항 εi가 정규분포 하지 않는 경우에도 최소제곱추정량은 바람직한차항의 히스토그램으로 판정할 수 있다.위에서처럼 오차항의 분포를 히스토그램으로 나타 냈을때, 어느 정도는 정규분포를 한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정확성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이Bera-Jarque의 검정통계량에 의해 정규성을 탐지할 수 있다.우선 엑셀함수 CHIINV를 이용하여 임계값 5.99146를 얻어낼수 있으며, B-J검정통계량의 추정값이 1.29628로 계산된다.검정통계량의 추정값이 임계값보다 작으므로 5% 유의수준에서 Cobb-Douglas 생산함수 모형의 오차항이 정규분포 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2). 다중 공 선성 검토회귀분석을 위한 기본가정 중에서 독립변수들 간에 완전한 선형관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다중공선성이 전혀 없는 경우는 불가능 하지만, 독립변수들 간에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가 존재하는지를 계산해야 한다.독립변수간의 상관계수 추정값이 큰 경우 다중공선성의 존재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는데, 독립변수간의 분석결과 다중 상관관계는 0.5433로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독립변수들의 상관행렬에 의하면 분산 팽창 인자(VIF)는 계수의 완전한 분산에 대한 계수의 실제 분산 비율로 정의되며, 이 값으로 다중 공선성의 심각성을 추측할 수 있다.VIF값을 계산하면 약 2의 값으로 다중공선성이 심각하게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여기서값이 1에 가까울수록 VIF의 값은 커지게 되며 다중공선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3). 이분산성 검토이분산의 존재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잔차의 산포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동분산이 충족되면 잔차들은 일정한 범위 내에 동일하게 분포되나, 이분산이 존재하는 경우 잔차들의 퍼짐이 증가 혹은 감소 추세를 나타내게 된다.잔차의 산포도를 그려본 결과 좌측 상단의 특이점을 제하고, 어느 정도 random 하게 퍼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다 정확한 이분산성을 탐지하기 위해 Breusch-Pagan-Godfrey 통계량을 구PG의 값은 0.1955*34 로 6.65의 값이 얻어진다. 임계값이 5.99 이므로, 이분산성이 약간 존재함을 알 수 있다.4). 독립성 검토(자기상관 탐지)자기상관은 시계열자료가 가지는 관성 혹 느린 조정과정, 거미줄 현상, 모형설정의 잘못 등에 의해서 발생하게 된다. 자기상관이 존재하는 경우 불편추정량이긴 하지만 최소분산을 갖지 못하여 더 이상 효율적 추정량이 아니다. 자기상관을 탐지하기 위해서 엑셀함수를 이용해 Durbin-Watwon 통계량을 구하면 0.22970이 구해진다. 이 경우 유의수준 0.05에서과는 각각 1.33, 1.58임을 D-W 통계표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0.229) < (=1.35) 로써, 이번 회귀분석의 결과는 정의 자기상관 관계를 갖는다.Ⅲ.결론1.모형에 대한 평가Yi= 137.0115 - 0.39578X1 +0.173655X2 + 12.70069X3 +εi 로 최초 모형이 설정되었으나, X2의 유의성이 낮아 평균관람요금 은 모형에서 제외하였다.최종모형으로 Yi= 137.0115 - 0.39578X1 + 12.70069X3 +εi 이 설정 되었다.-이 모형에서 유의성 검정은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오차항이 정규분포함을Bera-Jarque의 검정통계량과 오차항의 분포를 통해 알 수 있었다.-또한 다중공선성에 대한 검정에서는 VIF의 값을 계산함으로써 심각한 다중공선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BPG검정통계량과 잔차의 산포도를 통해 오차항의 이분산성이 약간 존재함을 알 수 있다.-자기상관관계의 검정에서는 Durbin-Watson 의 d 통계량을 계산하여 변수들간에 자기상관관계가 존재함을 확인 할 수 있다.2.결론1970년대부터 2000년 까지의 영화산업과 그 수요에 대한 자료의 회귀모형을 설정하여 회귀분석 함으로써 분석결과들의 유의성과, 기본가정에 위배되지 않는지를 탐지해 보았다. 처음 영화 수요에 영향을 미칠것으로 생각하여 본인이 설정한 독립변수에 1인당 국민소득과, 평균영화관람요금, 스크린수에서 유의였다.
    경영/경제| 2006.07.27| 12페이지| 3,500원| 조회(2,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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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가연구]유한양행의 유일한의 삶과 기업정신 연구
    유 일 한 ,그의 삶과 기업정신차 례Ⅰ 서 론제1절 연구의 목적과 의의1. 연구의 목적2. 연구의 의의제2절 연구의 방법제3절 연구의 구성Ⅱ 본 론제1절 출생의 시대적 배경제2절 유일한의 삶1. 유년시절2. 미국에서의 청소년기3. 대학시절4.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대회와 3.1운동5. 귀국 후 조국에서의 출발6. 유한양행의 창립과, 그 후제3절 유일한의 인생철학1. 삶의 철학과 기업이념2. 유언의 배경과 실천Ⅲ 결 론제1절 연구내용의 요약제2절 결론Ⅰ. 서 론제 1 절 연구의 목적 및 의의1. 연구의 목적이 연구는 유한양행의 창시자인 유일한 (柳 一 韓 ,1895-1971)박사의 기업정신과 인생철학, 이념을 삶의 배경과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참기업인으로 손꼽히는 유일한 박사의 삶을 중점으로 그의 업적과 이념을 연구하겠다.2. 연구의 의의먼저 수많은 훌륭한 기업가들 가운데 유일한 박사를 선택한 동기부터 설명하도록 하겠다. 작년 경제사 수업을 들으면서 여러 기업인들의 창립 과정과 그 기업의 몰락과 성공에 관한 강의를 들으며, 개인적으로 유한양행의 창시자인 유일한의 이야기가 가슴에 뜨겁게 와 닿았다. 사실 유한양행에 대한 자세한 설립과정이나 창시자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몰랐었지만, 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는 강의 중 간간히 듣곤 하였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기업가 흔히 말하는 재벌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추앙받고 있는 애국적 민족기업가였던 유일한. 이 것만으로도 본인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히 매력적인 기업가였다. 이 연구에서는 그가 이룬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유한양행이란 기업보다는 그 기업의 창시자가 살아온 생애, 그의 기업이념, 사상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그의 업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아는 데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제 2 절 연구의 방법기업가 유일한의 이론과 사상에 관한 연구를 사상의 내용에 주된 관심을 두고, 그 내용을 이해, 평가 한다. 연구는 유일한 박사보다 기독교세가 강했고 유일한도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게 되었다.제2절 유일한의 삶1. 유년시절한국 기업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를 남긴 유일한에 대한 유년시절에 대해 남 아있는 기록은 불행히도 거의 드물다. 어린나이로 미국유학을 떠난 관계로 유년시절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전무하고, 기록 이나 증언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불 완전 하다. 불완전하나마 확인될 수 있는 몇 가지 기록을 참고로 유년시절 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하겠다.주위 사람들에게 남긴 유일한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그의 아버지 유기연은 자식들에게 무척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기연의 자식 공부에 대한 깊은 열의와, 훗날 유일한이 한글은 생활에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음을 미루어 보아 초보적인 서당식 교육은 받지 않았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린나이에 유학을 간 이후로 한국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지만, 그가 한국식 삶의 방식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은 유년시절에 받았던 교육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숱한 어려움 끝에 이룩한 기업을 청산하고 귀국해 유한양행을 경영하면서도 부모와 형제들을 돌보아야 하는 장남으로서의 역할 또한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독실한 크리스찬 이었던 것으로 봐서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기독교와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유기연은 교회를 통해 발달된 서양문물을 배우며 변해 가는 세상을 읽었다. 그 당시 교회는 개화파 지식인들의 집결지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승만, 정순만, 박용만 등 개화파 지식인들은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강연을 펼치며, 이에 감명받은 유기연은 자신의 맏아들인 그곳에서 상과를 졸업했다. 유일한이 그의 평생의 반려자인 중국계 호미리양과 사귀게 된 것은 이 대학에서였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택한 아르바이트는 남의 회사일이 아니고 자기가 직접 상업에 나서기로 한 것 이였다. 유일한의 상업적 재능은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일한이 이때 시작한 일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비단, 손수건, 카페트 등 동양 특산물을 갖고 다니며 판매하는 일이였으며, 그는 장사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꽤 짭짤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상학을 전공하면서 자본주의 이론을 배웠고 대학 졸업 후에는 한동안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에서 회계업무를 맡으며 실무를 익혔다. 그러다가 그는 이 회사에서 나와 자업을 경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 자업이란 숙주나물 장사를 하는 것 이였다. 그는 이윤이 남는 일이라면 귀천을 따지지 않았으며 이 숙주나물 장사는 크게 성공했다. 당시 미국에는 많은 중국요리점이 있었고 중국 만두는 반드시 숙주나물이 필요했으며 미국인들도 이를 즐겨 찾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는 이를 생산하는 곳이 없었으며, 그가 이 식료품장사에서 신선도를 해치지 않고 숙주나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열처리법을 개발하면서부터 사업은 더욱 크게 번창하였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그의 대학 동창인 윌레스 스미스와 동업으로 1922년에 생산공장을 건설하면서 식품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라초이”회사가 바로 그것이며 이때 유일한 나이 27세 되던 해였다. 라초이 식품회사는 날로 번창했다.유일한은 이렇게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는 기업인이 되었다. 자본주의란 쉽게 말해 자기의 능력에 따라 할 일을 찾아 일하면서 자기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정직하고 신용을 지킨다는 것을 생활로 실천하며 살았고 또 기업운영의 사시로 삼았던 것이다.4.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대회와 3.1운동유일한이 조국이나 민족을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고 세계정서에 대해 눈이 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기가 선진문화를 배워야 하는작한 것은 1926년 이였다. 유일한 사장의 아버지와 당시 세브란스 병원의 책임을 맡고 있던 에비슨 박사도 유 사장에게 한국민중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충언을 했고 이 조언은 그에게 와 닿는 것이 컸다고 한다. 특히 유일한 사장이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 실정을 보고 만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첫째로 교육의 보급, 둘째 민족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셋째로는 국민의 보건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고 그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문제는 그가 1919년 4월에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때의 선언문에서도 강조하고 있던 사항이기도 하다.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는 교육기관을 많이 설립하고 올바른 가르침이 있어야 하며 국민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경제건설문제는 더욱 시급했다. 이러한 실태를 세밀히 조사해 유일한은 귀국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것이었다.유일한 사장은 미국에 와서 미시간대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있던 호미리 양과 1925년에 결혼했고 1926년에 부인과 함께 고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된 것이다.6.유한양행의 창립과, 그 후유일한 사장은 조국에서 기업을 설립하겠다는 결심은 이미 미국 출발전에 굳힌 것 같았다. 그는 라초이 식품회사에서 받은 25만 달러로 의약품을 구입했다. 귀국해서 약 종류를 주종으로 하는 무역회사를 설립할 목적에서였다. 그리하여 유 사장은 고국에 돌아온 그 해 즉 1926년 12월 10일에 유한양행을 창립하게 된 것이다. 이 회사는 당초 국민보건을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니 약품이외의 각종 위생용품도 수입 판매하였으며, 해외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수입만 할 것이 아니라 국내 생산물도 수출해야 한다고 생각해 농촌의 특산물을 수출하면서 4, 5년 동안 탄탄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성장하여 1936년 6월에는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게 되었다. 유일한 사장의 꿈은 국내의 우수한 약품을 제조하여 수출하는 데까지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약품제조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유한양행의 소사 제약 공장이다. 출을 보다 확대해 나가는 일이고, 또 한가지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제철업과 그와 관련시켜 자동차 공업을 일으켜 보자는 것이었다. 1946년 7월에 유일한 사장은 서울에 돌아와 다시 사장직에 복귀 하지만, 그해 12월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 스탠포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그곳 도서관에서 세계자본주의가 걸어온길, 세계 기업인 열전도 관심을 갖고 독서와 새로운 기업구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로부터 몇 년 후인 1950년 6월에 북한 공산군의 남한 침공이 시작되며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유일한은 동경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태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전쟁피난 속에서도 유한양행의 제약 업무는 계속되었고, 수많은 어려움의 연속 이었지만, 수많은 실패 끝에 간유에서 비타민을 추출하여 정제를 만드는 일을 성공 시킬 수 있었다. 유한양행은 이로 점차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1957년엔 국내에서는 최초로 항생물질제품을 생산해 냈으며, 유일한은 회사에 농축부를 두고 가축약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최신기술과 최고의 시설을 갖춘 국내 제일의 제약 회사로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제약업계로 웅비한다는 것이 그 의 꿈이었다. 또한 유일한은 사원지주제를 도입하여 유한양행에서 발행하는 신주를 사원들에게 분배하여 기업성공의 혜택을 받도록 하면 회사사원들도 회사와 함께하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후로 유한양행은 날로 발전하였고 끊임없는 기술 혁신으로 1965년에는 PAS 원료생산을 개시하고, 68년에는 국내에서 최초로 IBM전자자료처리실을 설치했다. 69년에는 영등포 공장을 준공시켰으며, 다음해에는 미국킴벌리 클라크회사와 합작하여 유한 킴벌리 주식회사를 설립 하였다. 이와 같이 유한양행은 세계 제약업계와 어깨를 겨루는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유일한 회장은 교육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어, 1952년에 소사공장 내에 임시교실을 만들고 청소년들을 모집하여 학비와 숙식비를 제공하면서 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고려공과기술학교”의 시초였다. 196.
    경영/경제| 2006.05.28| 12페이지| 2,000원| 조회(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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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학자]경제학자 슘페터의 삶과 경제학 평가D별로예요
    Joseph Alois Schumpeter,그의 삶과 경제학차 례Ⅰ 서 론제1절 연구의 목적과 의의1. 연구의 목적2. 연구의 의의제2절 연구의 방법제3절 연구의 구성Ⅱ 본 론제1절 이론적 시대적 배경제2절 슘페터의 삶1. 유소년 시절2. 대학 시절3. 초기의 학문 활동4. 정치, 사회 활동5. 본에서의 학문 활동6. 하버드에서의 학문 활동제3절 슘페터의 삶의 특징제4절 슘페터의 경제학1. 경제학 방법론2. 경제변화에 대한 이론3. 경쟁에 관한 새로운 접근4. 경제학의 역사Ⅲ 결 론제1절 연구내용의 요약제2절 결론Ⅰ. 서 론제 1 절 연구의 목적 및 의의1. 연구의 목적이 연구는 20세기의 경제학자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의 경제이론과 사상, 업적을 삶의 배경과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슘페터의 이론적 행동을 주변 환경과 구체적인 삶을 파악함으로써 그의 사고 핵심과 행동배경을 알아보자.2. 연구의 의의먼저 수많은 경제학자들 가운데 슘페터를 선택한 동기부터 설명하도록 하겠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슘페터를 언급할 때 케인즈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한 경제학자라 일컫는다. 경제학자 케인즈를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슘페터는 그의 업적과 실력에 걸 맞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슘페터가 편력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며, 독단적이고 거만하지만 그의 학설은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본질이 무엇이며, 자본주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은 슘페터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경제학의 주제였다. 시대의 경제학자였던 슘페터. 끊임없이 연구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훌륭한 경제학자들을 배출한 우울한 천재 경제학자 슘페터, 이 것만으로도 본인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히 매력적인 경제학자 이다. 이 연구에서는 그의 논문과 업적 보다는 그가 살아온 생애를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그의 학문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루어졌다. 영국의 경우 17세기 이래로 1세기에 가까운 장기간에 걸쳐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업국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반해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 절대 군주제와 중앙집권적 국가관료제는 존속 ,강화 되었기 때문에 1830년대야 비로소 산업혁명에 들어갔다. 또한 독일의 경우 1840년대 영국에서의 기계과 기술의 수입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는데 철도건설이 주요 기반을 제공했다. 독일의 산업혁명은 짧은 기간 철저하게 이루어져 1870년대 초반까지 완료된다. 이처럼 19세기 이래 진행되어 온 산업혁명과 본격화된 산업화가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의 범위를 넘어 점차 유럽대륙으로 확장되면서 점차 세계화 되었고, 유럽은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대불황과 제 2차 산업혁명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보호무역주의의 등장과 함께 제국주의 정치학의 시대는 종래의 자유주의 세계의 기초를 붕괴시키는 한편, 본격적인 산업화의 결과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가치의 위기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위기는 지적 영역에서 실증주의에 대한 반란 으로 표출되었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 유럽의 지적 상황의 특징은 19세기 유럽의 유산에 대한 재평가 특히 과학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재검토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성에 대한 무한정한 신뢰, 과학의 발전을 통한 인류의 진보, 외적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재검토 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과학과 학문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전제와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즉 인간은 이제 형이상학을 상실한 채 믿음없는 주관적인 존재를 부여안고 세계와 과학의 영역에 홀로 의연히 서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과학이란 이제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체계를 지향하게 되었고 과학자는 영원한 젊음을 지닌 과학을 스스로 실행하는 창조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한편 실증주의에 대한 반란은 중유럽의 전통적인 관념론을 부활시켰지만 그에 대한 자기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중유럽의 사상적 재검토는 1경제학 강의뿐만 아니라 법학과 정치학 강의도 수강해야 했으며 통계학과 수학 분야의 강의와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슘페터는 본격적으로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여러 분야의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또한 슘페터는 통계학과 수학에 대해서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경제학 교과과정에는 수학을 취급하는 강좌가 전혀 없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슘페터가 수학이나 통계학 강의를 수강한 것은 경제학을 바라보는 슘페터만의 독자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비엔나 대학의 경제학계는 카를 멩(Carl Menger) 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다. 그는 이른바 한계효용학파의 혁명{ 한계효용 학파의 혁명이란 1870년대에 카를 맹거, 스탠리 제번스, 레온 왈라스 이 세명의 경제학자들이 추죽이 되어 고전파 경제학의 가치이론을 뒤엎고 개인의 한계효용에서 출발하여 미분이라는 수학적 테크닉을 이용하는 연역추리를 통해 전체 미시경제이론 체계를 재구성한 경제학사의 일대사건을 지칭하는 이름이다.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슘페터가 비엔나 대학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 멩거는 교수직에 사실상 은퇴한 상태여서 슘페터는 멩거를 한두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그가 멩거의 저작을 높이 평가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학시절 슘페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그리고 슘페터 자신이 가장 친근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바로 뵘-바버크 였다. 뵘-바버크의 세미나에 슘페터가 참여해 종종 논쟁을 벌이곤 했다. 당시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슘페터는 냉정하고 과학적인 초연함 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고 한다. 그는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저술을 모두 원전으로 읽었으며, 이를 통해 새롭고 흥미로운 사상의 보고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법제사화 사회사에 대한 최초의 관심에서 급선회해 멩거식의 이론경제학에 대한 연구로 빠져들었다. 그는 왈라스, 파레토, 에즈워드 등과 같은 선구적 수리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한 후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노선으로 방향전환을게 된다. 이 무렵 슘페터는 자신의 두 번 째 저서인 『경제발전의이론』을 출간 함으로써 (1912년) 자신의 학문적 경력에 또하나의 업적을 덧붙인다. 그러나 당시 그라츠 대학에서는 역사학파 신봉자가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슘페터 같은 반역사학파 이론경제학자가 교수직임을 받는 것을 결사 반대했으며, 힘들게 교수직을 얻고 나서도 다른교수들과의 마찰이 심했다. 또한 처음 학생들은 슘페터에게 적대적이였으며 수업거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은 곧 슘페터의 진가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라츠 대학은 슘페터에게 과도한 강의부담을 지웠다. 심지어 주당 강의시간이 14-16시간에 달하기도 했기 때문에 슘페터는 기회만 있으면 그라츠를 떠나려 했다. 그러던 중 1913년에 오랜기간 그라츠를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1913년에서 14년 까지 그는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게 된 것이다. 그는 미국의 유수한 여러 대학에서 강연을 했으며,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 미국에서의 1년간 생활을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 1914년, 그라츠에 돌아온 슘페터는 자신의 세 번째 저서 『경제학의 원리와 방법』을 출판하였다. 슘페터가 대학을 졸업한 1906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은 그의 학자인생의 첫 출발을 알리는 시기이자 20대를 지나 30세를 갓 넘어선, 한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젊고 왕성하고 활기찬 시기였다. 이 시기에 슘페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연구업적을 쏟아냈다. 그는 경제학 이론 분야에서 수많은 논문들을 써냈을 뿐만 아니라 경제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세권의 저서를 출간했다.4. 정치, 사회 활동{30대 초반, 걸출한 세 권의 저작으로 경제학계의 떠오르는 별이 된 슘페터는 , 불과 수년 만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연소 경제학 정교수가 됨으로써 학자로서의 경력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되자 이번에는 정치에 입문하여 새로운 경력을 쌓고 싶어 했다. 그는 다른 분야 보다도 특히 재정(public finance)분야에 관심이 있었다.보내다가 1930년대 초 명문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일하고 싶어 하지만 전부 거절당하고, 결국 수년 전부터 자신을 초빙하기 위해 애써왔던 하버드 경제학과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1932년 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향한다.6. 하버드 시절의 학문 활동안나의 죽음이후 일이야 말로 그를 현실에 묶어두는 유일한 닻이었다. 슘페터는 미국으로 온 다음부터는 정말 죽을 만큼 연구하고 또 연구에 몰두하였다. 1차대전 이전에 닦아두었던 기초 위에 서서 그 시기에 내렸던 결론들을 검증하고, 역사적 통계적 연구에 비추어 그것들을 수정하는 것이 그가 미국에서 남은 여생동안 하고자 했던 일의 전부였다고 한다. 또한 슘페터는 곧 학생들 사이에 인기 있는 교수가 되었다. 그에게 슘피(Schumpy)라는 애칭을 지어주며 그를 따랐다. 슘페터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친절했으며, 토론을 자주하며, 후한 학점으로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슘페터는 이때 노벨 경제학상을 받거나 경제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폴사뮤엘슨, 제임스 토빈, 리처드 무스그레이브 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또한 슘페터는 경제수학을 가르치며, 도입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33년 가을 학기부터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에 경제수학 과목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1939년 『경기순환론』을 출판하였다. 그러던 중 슘페터는 래드 클리프 대학의 경제학자인 엘리자베스 부디(Elizabeth Boody Firuski)라는 여성을 만나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가 1937년 8월 16일 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슘페터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내조를 했다.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슘페터는 마침내 가정을 갖게 되고 그녀를 통해서 모든 현실적 필요들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결혼 후에도 안나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1940년대가 되면 슘페터의 정신상태는 급속하게 악화된다. 엘리자베스의 극진한 보살핌조차 그를 우울증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은 슘페터를 형언할 수 없는 개인적 위기로 내몰4 참조
    경영/경제| 2005.12.18| 15페이지| 2,500원| 조회(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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