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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동학농민 운동 평가B괜찮아요
    제 10장의기를 들고 보국안민하자1. 동학의 발전과 교조신원운동(1) 동학 교단의 발전동학은 양반계급의 수탈로 억눌려 있던 농민들에게 인간중심, 평등사상으로 다가감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외세 배격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종교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의 교리는 조선 정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조선왕조는 동학을 사교로 단정하고 교주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했다. 교주의 처형이후 동학의 교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특히 2대교주는 최시형 때에는 교단의 재건을 위한 계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매년 두 번의 제사를 정례화 함으로써 기틀을 잡아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1870년 이필제와 교조신원운동을 펼쳤는데 실패하여 결과적으로는 교단조직의 붕괴에 계기가 되었다. 최시형은 다시 교단을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래서 수운의 기제와 탄신제를 직접 맡아 교단체제를 일원화하고 새로운 치제의식을 제정하여 행하는 등 최시형 중심의 지도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경전을 편찬하고 강원도 지방과 호남지방에 교세를 확장하여 손병희와 같이 후에 갑오 농민전쟁에서 활약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 같은 발전을 토대로 1890년대에는 수동적인 지하포교방식에서 벗어나 포교의 자유와 봉건적 수탈의 금지를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2) 교조신원운동조선왕조가 개항을 한 후, 국내외의 사정이 변하자 지하에 숨어있던 동학도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 1890년대에 있었던 교조신원운동은 교주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호소였으며 동시에 동학의 합법성을 인정받으려는 시도였기도 하다. 동학은 공주집회, 삼례집회를 통하여 교조의 신원과 동학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호소했는데 이 가운데서 동학은 자신은 일본에 맞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차원에서 나온 것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별다른 응답이 없었고 탄압도 계속되었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는데 이에 고종은 시행하겠다는 비답을 내려 이들은 내려보냈다. 이 때 상경한 동학교도가 상소를 마친 날부터 서울지역 공사관과 교회에는 `왜놈과 오랑캐는 물러가라`라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 호남에서도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을 선언했다. 이로써 교도들의 움직임은 종교적인 운동에서 정치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마침내 교주 최시형은 충청도 보은군에 교도들을 집결케 하였는데, 그 때 모인 인원이 2만을 넘었다 한다. 이것이 이른바 `보은집회`인데 이를 시점으로 동학은 민족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배외주의를 내걸고 현실에 대한 불만 속에 정치적 항거의 성격이 나타나 있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탐관의 응징을 약속하고 해산을 종용하는데 교조신원운동을 종교에 한정시키려는 동학상층간부들의 뜻에 의해 해산되었다. 보은집회에서는 상층간부들과 동학을 통하여 사회변혁을 꾀한 일반 농민들의 입장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2. 동학농민의 제 1차 봉기(1) 고부민란고부민란은 제 1차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고부지방은 조선제일의 도작지대로서 개항이후에 농민수탈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민란이 일어났던 1892년 고부에는 조병갑이 부임해왔는데 조병갑의 농민을 수탈하는 행위가 도를 넘어 마침내 1894년 고부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즉시 조병갑을 서울 압송하고 고부지방에 이용태를 내려보냈지만 이용태는 일체의 죄를 동학교도들에서 돌리고 체포하려하자 농민들은 이에 참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이가 바로 제 1차 동학농민운동이었다.(2) 동학농민군의 제 1차 봉기전봉준의 격문으로 일어난 1만여 명의 농민들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죽창과 총포, 군량을 마련하고 창의문을 발표하고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거의하였다. 그들은 진격하는데 농민들을 상하지 않게 할 것을 주의시켰는데 이것은 정부군과는 대조적인 것이어서 동학군의 거처에는 언제나 식량을 바치는 농민들로 붐비었다. 이렇게 민중의 지지를 받은 동학군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는데 전주성마저 함락되자 민씨 정권은 청국에 원군을 요청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한다. 청군이 들어오려 하자 일본군마저 인천에 상륙한다. 이 같은 사정에 조선왕조는 관찰사를 보내 동학군과 급히 화약을 맺는다. 이것이 전주화약이다. 이것은 여러 차례 공방전으로 수세에 몰리고 농번기의 농민층의 입장을 고려한 농민군 지도부의 입장과 청병과 일군의 상륙으로 위기에 몰린 정부측의 입장이 일치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3)집강소의 설치를 통한 농민들의 반봉건항쟁전주화약의 조건은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는 대신 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의 시행과 농민군의 신변보장으로 요약되는데, 농민군은 전라감사와 수 차례 협의하여 집강소를 설치한다. 그러나 이때의 집강소의 기능은 무장 해제한 농민군의 사후책과 치안유지 등에 있었으므로 농민군은 집강소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동학군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고을에는 집강소를 중심으로 한 폐정개혁안이 강하게 실시되었는데, 그 내용은 부패한 봉건정부와 양반 등의 탄압과 수탈금지, 신분적 차별대우 폐지, 무명 잡세의 혁파, 고리채의 무효화 등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안은 봉건양반들에게 크게 불만을 사게되었고, 그들은 마침내 전라감사의 지시를 어기고 농민군을 직접 토벌하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농민군도 전봉준의 온건노선과 농민군 일반의 강경노선의 대립도 계속되었다. 전자는 합법적인 개혁의 여지를 줄 수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일본의 내정간섭과 청일전쟁수행에 좋은 여건을 마련해주었다고 비판할 수 있다. 후자 또한 타협을 거부하고 직접적인 투쟁만을 종용함으로써 대안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으나 폭넓은 농민층의 지지를 받았다.3. 청·일 전쟁민씨 정권이 농민군의 진압을 위해 청군을 요청하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대거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은 이때, “동학란을 계기로 병력으로써 조선국 정부의 개조를 단행하고 갑신정변 이후 부진한 일본세력을 회복해야 된다.”는 야욕으로 조선에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이들은 난이 진압되면 떠나겠다는 약속을 무시한 채 전주화약이 성립된 이후에 더 많은 병력을 들여와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청했고 이것이 거부되자 경복궁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원군에게 신 정권을 수립하게 한다. 그리고 청군함대에게 포격을 가하고 7월 정식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이 개전 되었다. 계속되는 일본군의 승리로 전세는 일본에게 유리했고 서구열강들도 일본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을 저지할 세력은 없었다.4. 동학농민의 봉기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집강소 활동을 하던 농민들이 다시 재무장하여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이 같은 봉기를 만류했으나 마침내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봉기했다. 이에 일본은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개화정권은 이를 수락했다.동학농민군은 공주성에서 일본군, 정부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하게 되는데 결국에 가서는 무기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일만여명 중 500명정도의 생존자를 낼만큼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 밖에도 일본의 무력 앞에 계속되는 참패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은 의병, 영학당, 남학당, 활빈당 등을 비롯한 농민조직을 통하여 지속적인 농민항쟁을 계속해 나갔다.5.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동학농민운동의 실패원인은 4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첫째, 주체세력이 북접, 남접으로 단결이 결여되어있었다는 점이다.둘째, 지도자의 정치적 식견과 통찰이 결여되어있었다.셋째, 군사적인 전략전술과 기초훈련이 부족했다.넷째, 일본군의 무력이었다.동학농민군은 비록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왕조 유교질서에 대한 반봉건적 저항이었으며 일제침략에 대한 최초의 민족적 무력항쟁이었다. 결과적으로 근대적인 사회개혁운동의 첫 단계인 동시에 근대민족주의에 자각한 독립운동의 선구였던 것이다.제 11장양반·상놈이 없어지다1. 군국기무처의 설립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빌미 삼아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에 내정개혁안을 조선에 제시하는 등 내정간섭을 실시하는데 조선정부가 이에 강하게 반발하자 위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에 고종은 폐정을 자진해서 개혁한다는 의미에서 교정청을 설치키로 작정한다. ks편, 일본의 기한부개혁 요구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철수와 개혁안 철회를 골자로 답변을 보내는데 이 같은 거부에 직면한 일본은 마침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4대문까지 점령하는 등의 갑오변란을 일으킨 것이다. 갑오변란은 민씨척족 정권이 무너지고 대원군을 앞세운 친일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는 변화를 초래하게된다. 그리고 조선정부에 그들이 만족할 만한 내정개혁을 단행시키기 위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김홍집을 회의총재로 임명되었다.2. 갑오개혁의 내용(1) 제 1차 갑오개혁갑오개혁은 1894년 6월부터 1896년 2월까지의 조선왕조에서 개혁했던 일련의 근대화운동을 일컫는다. 그 중 1차 갑오개혁은 1894년 6월 25일부터 11월 21일까지 군국기무처에서 추진한 개혁을 말한다. 제1차 갑오개혁을 정치, 경제, 사회부분의 개혁으로 나눌수 있는데, 첫 번째로 정치부분에서 의정부관제는 근대국가의 내각을 모방하여 총리대신 아래에 내각 관방과 사무처 등의 기구를 설치하고 육조를 개편하여 8아문을 설치하고 판서를 장관의 역인 대신으로 참판을 협판으로 개칭하였다. 둘째, 경제부분에서 세 가지 안건을 마련했는데 가 그 내용이다. 세 번째로 사회적으로 신분차별이 타파되었고, 연좌제가 사라졌으며 과부의 재가를 허용해고 천민대우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4.12.20| 5페이지| 1,000원| 조회(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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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신라지식인의 해외진출
    혜초는 천축에서 아랍, 중앙아시아, 중국을 여행하고 그 여정을 『왕오천축국전』으로 남긴 한국의 첫 세계인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한국인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정도이다. 하여 많은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왕오천축국전』의 원본이 실존하지 않는 현실에서 정확히 밝혀진 것은 많지 않은 실정이다.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은 잔간으로 발견되면서 그 성격이 분권본인가 아니면 단행본인가와 절략본인가 아니면 사록본인가 하는 논란이 일게 된다. 결국 이 여행기의 원본은 3권으로 된 분권서임과 잔본은 절략본임이 증명되었다. 이 같이 『왕오천축국전』은 절략 잔간으로서 불완전하지만,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의 행적이 잔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노정만큼은 명백히 밝혀 낼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과연 혜초가 서쪽 어디까지 다녀왔냐는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의 노정을 살피려면 우선, 혜초가 직접 다녀온 답다지와 가지는 않고 전해들은 곳인 전문지를 가려내야 한다. 이 둘을 가려내는 방법은 본문의 도식화된 시문구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답다지: ‘어디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렀다.’‘徒(又徒, 卽徒)....(東· 西·南·北) 行(入·隔)....日(月·程)....至’‘又徒此北行十五日入山 至迦羅國....’전문지: ‘어디의 어느 방향에 어떤 곳이 있다.’‘徒(又徒)....已(東· 西·南·北)....是(卽, 有)’‘又徒大寔國已東 是胡國 卽是安國普國...’다음으로 의견이 분분한 것은 여정의 서단 문제이다. 혜초가 실제로 페르시아와 아랍, 그리고 동로마까지 여행하였는가 하는 문제인데, 학계 대부분의 견해는 혜초가 토화라(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위의 나라들을 전해 듣고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혜초가 여정을 떠난 이유가 구법목적이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굳이 이교도인 회교와 기독교가 지배하는 지역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혜초의 여행 목적을 구법에 제한시켰을 때를 말한 것이다. 혜초의 세계여행 목적은 구법의 목적보다는 순방성이 다분함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혜초는 종교적인 아집으로 이교도의 지역을 배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러한 반론으로 『왕오천축국전』의 서단은 토화라가 아닌 대식(아랍)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근거로, 본문중의‘다시 토화라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又徒土火羅國西行一月 至波斯國)’나, ‘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에 이른다(又徒波斯國北行十日入山 至大寔國)’에는 문명상에서 분명히 직접 답사했음을 입증해주는 관용 시문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위의 여러 반론들은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 것이고, 조금 더 포괄적으로 『왕오천축국전』이 갖는 문명사적 의미를 살펴보자.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서 그 기록은 커다란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왕오천축국전』은 세계 문명 교류사에서 개척자적·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없었으며,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이 또한 없었다.
    인문/어학| 2004.12.20| 2페이지| 1,000원| 조회(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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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리엄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셰익스피어의 생애1564년 영국의 워릭셔 지방의 조그마한 마을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본(Stratford-Upon-Avon)에서 출생날짜는 확인이 되지 않으나 무덤이 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 교적부의 세례기록이 1564년 4월 26일자로 되어 있기에, 출생 후 3일이 지난 다음에 세례를 받는 당시의 관행으로 미루어 그 의 출생일을 4월 23일로 추정한다. 부친 존 셰익스피어(장갑 장수, 후에 읍장)와 모친 메리 아 든 사이에서 8명의 자식 중 셋째로 태어났다.(그러나 먼저 태어난 누이 2명은 사망하였다.)태어 날 때 역병이 돌았다고 한다. 이후 셰익스피어의 결혼까지의 기록은 없고, 스트랫포드 문법학교 에 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주로 라틴어와 문학을 배웠는데 라틴어를 꽤 잘했다고 한다. 대학교 육은 받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젊은 시절 시골에서 학교선생을 한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1582년 8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11월 28일 결혼 허가증이 발행됨)18살의 나이(법적 미성년자)에 앤을 임신시키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게되었다.(앤의 거주지를 그래프턴 사원-교구바깥에 위치한 정착 촌-으로 옮긴 후 결혼) 종교적인 문제로 반대 가 심각했지만, 앤의 집안이 좋은 것을 보고 존과 메리가 적극 찬성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자 녀는 1남2녀(수잔나, 햄넷, 주디스)를 두었고, 이후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나타나는 시기까지의 약 7년간의 기록은 없다. 1580년대 중반, 사업 확장 중이던 지방 극장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런 던으로 떠난 것으로 추측, 페르디난도와 스트레인지 경(최초의 공공극장인 씨어터극장을 세운 이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역시 추측된다..(스트랫퍼드는 지방극단들이 많이 오던 곳. 연극 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음) 또는 루시경의 장원에 사슴을 잡으러 몰래 들어갔다가 들켜서 런던으로 가게되었다는 설도 있다.1592년 당시의 극작가인 로버트 그린의 『수백만 번의 후회로 얻어진 서푼짜리 기지』에았다고 한다.(로버트 그린-우리의 깃털로 아름답게 꾸미고 벼락 출세한 까마귀 같은 작자). 이 당시 극 작가란 대학에서 공부한 인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1660년-1730년까지 셰 익스피어 작품은 그 평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유인 즉, 그의 변변찮은 배움, 거친 시어 법 등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에 대한 참신한 탐구가 없었다.1595년 당시 인기가 높았던 ‘챔벌린 극단(Lord Chamberlain's Men)’의 배우, 극작가 겸 주주가 됨여왕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또, 1596년 부친이 문장을 받게 되어 셰익스피어 가문이 신사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돈으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결코 등 한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수지 타산이 맞는 사업을 가려내는 안목도 있었고, 돈을 안 갚는 경우 독촉하고, 소송도 벌였다고 한다.1599년 템스강 남쪽에 글로브(The Globe) 극장 개관. 글로브 극장 공동 경영인의 한 사람이 됨.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대학이나 귀족 저택의 커다란 홀을 이용한 무대와 여관 마 당을 이용한 무대, 사설 극장과 야외 공공 극장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셰익스피어의 대부분의 작품은 공공 극장을 위해 씌어졌으며, 특히 글로브 극장을 위해 씌어졌다. 글로브 극장은 둥근 형태를 한 목조 건물로 지붕은 없고 3층으로 된 관람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1603년 제임스 1세가 ‘챔벌린 극단’을 ‘국왕 극단(The King's Men)’으로 승인함1610년 런던에서 스트랫퍼드로 귀향1597년 고향에 뉴플레이스 저택구입(2번째로 큰 집) 현재 기초만 남아있다. 1759년 셰익스피 어의 뽕나무를 보러오는 방문객들 때문에 주인이 집을 무너뜨려 버렸다고 한다.1613년 마지막 작품 『헨리 8세』공연 중 글로브 극장이 화재로 소실됨공연 동안 대포를 발사하였을 때 그 불이 짚으로 엮어만든 지붕에 붙어 전소하였음. 최근 런 던의 템즈 강변 글로브 극장의 옛 자리 일화. 최근의 한 독일 의학자는 셰익스피어의 데드 마스크 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가지고 DNA를 분석하여 그가 안암으로 죽었다고 진단.1623년 아내 앤 해서웨이 사망. 셰익스피어의 첫 번째 2절판 전집 출간그의 작품전집은 사후에 처음으로 폴리오 판으로 출판. 동료인 존 헤밍스와 헨리 콘델이 그 의 작품을 모아 전집을 간행..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 및 특징-총 37개의 희곡, 154개의 소네트, 2편의 장시(『비너스』,『 아도니스』,『루크리스의 겁탈』)-특징1보편성- 어느 시대에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작품으로 인정.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당대에는 잘 알려진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것임. 친숙한 이야기를 주제와 형식면에서 다각도로 실험하 여 심오한 작품으로 만들어냄.2실험성- 지적인 면에서 막대한 변화를 경험하던 당대의 실험정신을 주제 면과 형식면에서 충분히 반영 하여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작가. 형식적 측면에서 다양하고 다층 적인 세계를 작품으로 재현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셰익스피어는 단순한 플롯 진행이 아니라 동일한 주제를 담고 있는 몇 가지의 줄거리를 병행하며 서로 뒤얽히게 만듦. 예를 들어 『리어왕』의 경우 리어왕을 중심 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와 글로스터 집안의 이야기가 나란히 진행되면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와 효와 배은 망덕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얻음.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든 작품들이 문제극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특정한 한 장르를 구성하는 속성이 나 제한적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3양면성 및 포용성- 셰익스피어는 인간본성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을 감행하는 동시에 시종일관 인간에 대한 따듯 한 시선을 견지하고 포용적인 시각을 발휘한 작가이기도 함. 다양한 인간형을 담아 냄으로써 인간의 내면의 다양한 심연을 뒤집어 내어 보여준 작가이다. 선악을 그 속에 함께 품고 있는 인간의 양극단으로의 가능성의 문제를 최대한 보여준 작가.(『폭풍』프로스페로와 칼리반) 그리고 악한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고 있다.『햄한 악마저 포용하게 된다.4역설성- 그의 작품에서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가 가장 부자이고, 사회에서 바보로 인식되는 광대가 왕보다 더욱 현명한 존재이다.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고 만인의 숭상을 받는 최고 권력자가 결 국 거리의 도둑과 같은 범죄인임을 보여주고, 화려한 왕궁의 속성이 가장 미천한 밑바닥의 세 계에 속하는 거리의 야바위꾼과 협잡꾼의 소굴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또 가장 중요한 것 을 상실했을 때에야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얻는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왕관을 잃고 서야 인간 으로서의 자신을 찾음『리차드 2세』작품세계제 1기 사극의 시기-『리차드 2세』,『헨리 4세』,『헨리 5세』등- 영국사를 소재로 한 10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진다. 이 10개의 작품은 영국역사에서 봉건주의에 서 근세로 이행하는 100년의 시기인 장미 전쟁의 시기를 다루면서 절대 군주제 확립의 전초 가 된 시기를 보여주며 튜더왕조의 절대 권력을 옹호하는 튜더 신화를 담고 있다. 장미전쟁의 원인을 태동한 리처드 2세와 그를 죽인 헨리 4세, 헨리 5세 그리고 랑카스터와 요크간의 장미 전쟁이 발발한 헨리 6세 시기 후 헨리 7세가 통합할 때까지 끊임없이 내분에 시달리게 된 영 국의 이야기를 담는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은 찬탈과 반역으로 어우러진 영국의 역사가 무질서 와 혼돈의 정국이었음을 보여주며 질서의 중요성을 보여줌. 왕권신수설을 옹호한 왕당파 작가 였는가? 아니면 진보적인 사상을 표현한 작가였는가? 영국의 민족주의 와 국가주의 의식을 함 양하고자 하는 목적은 엿보이나 찬탈 당하고 시해되는 왕의 모습과 민중봉기의 반란 역시 담 고 있어서 왕권수호만을 주장하는 선전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튜더 왕조의 정통성에 도전하 는 의도를 지니고 창작된 것으로 본다제 2기 희극의 시기-『한 여름밤의 꿈』,『베니스의 상인』,『말괄량이 길들이기』,『뜻대로 하세요』등- 영국전통과 로마 희극 작가들의 희극작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희극 작가들의 요소를 혼합하 여 이루어졌다. 동시대 희극작가인 벤 존슨과 다름기 짝 을 찾아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이다. 그의 희극은 크게 초기 희극, 중기 희극, 말기 희극으로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는 낭만희극으로 불리며 젊은 남 녀의 사랑과 결혼이 주요 주제이다.(한여름 밤의 꿈) 중기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결말에 이 르는 완벽한 희극에 세계로 끝나지 않음.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행복한 결말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주인공들과 갈등관계에 있던 인물가운데 복수를 약속하며 나가는 인물 등이 불안한 여 운을 주며 끝남.(십이야, 베니스의 상인) 말기는 암울해져 문제 희극이라 불리운다. 현실이 더 이상 행복한 희극적 결말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강조. 형식적으로나마 희극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복한 결말의 마무리는 되고 있으나 억지로 강요된 희극적 결말 로 인해 오히려 해결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함.(『끝이 좋으면 다 좋다.』,『 자에는 자 로』,『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적극적인 여성상제 3기 비극의 시기-『햄릿』,『맥베스』,『오델로』,『리어왕』,『로미오와 줄리엣』등- 1601-1607에 창작.(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제외)엘리자베스 영왕의 죽음과 제임스 왕의 등극으 로 왕조가 바뀐 시기. 왜 비극을 쓰게 되었나? 개인적인 여러 사건들이 원인. 아들 햄넷(11 살)과 부친의 죽음으로 침울한 시기를 만데 되었으리라고 추측, 또 후계자 없이 독신으로 지 낸 엘리자베스 여왕 말년의 불안한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로 인해 비관주의와 염세주의가 지배 적 분위기였던 시대적 상황 탓으로 설명. 도덕적 정의감이나 사회적 정의감에 위배되는 세계 를 보여준다. 소위 권선징악이 실현되지 않는 세계를 담고있는 것이 비극. 그의 비극의 세계 는 주인공이 지닌 성격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결국비극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여줌. 결국 비극을 가져오는 것은 주인공이 선택한 그의 행동. 비극은 한가지 성품 이 과도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담으며 파괴와 혼돈을 자초하고 자멸을 맞게 될 정도의 크기를 룸.
    인문/어학| 2004.12.20| 5페이지| 1,000원| 조회(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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