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1. 금병매의 시대적 배경금병매의 무대는 송 휘종시대로 가정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작자와 같은 시대인 명대의 만력연간(BC 1573~1620)의 중기 즉 16세기 끝 무렵이다. 명 태조 주원장 이후 강성해진 중국의 국세는 성조 영락연간(1402~1424)에 극에 달한다. 무종 대에 이르러 환관의 득세와 황제의 방탕함으로 인해 국세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데 가정?만력연간에 이르면 왕조의 말기적 징후가 뚜렷해진다.선종 대에 이르러 정책 결정 과정에서 황제와의 대면이 생략되자 황제가 구두로 말하면 이를 기록하여 내각에 전달하는 환관이 자신의 의견을 황제의 지(旨)에 집어넣거나 고쳐 환관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는 형편에 처하게 된다. 대학사는 영락연간 황제의 사적인 고문의 성격을 지닌데 불과하였으며 황자와 황손의 교육을 담당하고 황태자의 보도(補導)를 위해 동궁의 관을 겸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태자가 황제로 등극하여 이들을 중용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명 중기 이후 이러한 환관과 내각의 정치는 황제의 측근집단이라는 특성으로 서로 실권을 강화하여 명대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된다.명말 사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로 상업발달에 따른 대상인 계급의 발호를 들 수 있다. 주로 관의 전매물품을 담당하는 관상(官商)의 성격을 지녔던 이들은 사회 질서의 와해 속에서 사상(私商)으로 변모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가정연간에 이르면 상인계급은 더 이상 천시되는 존재도 아닐뿐더러 부유한자는 더욱더 부유해지고 가난한자는 더욱 가난해 지는 사회모순이 발생하는데, 이들이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종 이권에 개입하였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비단 호사스러움에만 안주하지 않고 관료계급과 왕래하며 문인학사와 교류하였으며 혹은 상적(商籍)에 의해 관리가 되거나 학위 층에 편입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금병매의 서문경의 형상은 이러한 명 ? 후기 가정, 만역연간의 배경을 기저로 하고 있다. 그가 축적된 부를 바탕으인들이 참여하여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면 그 문인들의 문집 속에서 이 작품에 관한 기록(언제 어디서 어떠한 과정 등)의 일부분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러한 증거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작품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주제사상이 여러 사람들의 종합적인 견해라기보다는 어느 한 개인이 어느 한 시대에 갖는 희망적 요구라고 보여지기에 본 작품이 단체에 의한 창작품이라는 설에는 그 한계가 있다고 보여진다.3. 판본《금병매》의 판본도 다른 소설 작품과 마찬가지로 간단하지가 않다. 그것은 작가와 成書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도 큰 이유가 있다하겠다. 이제까지 논의된 《금병매》의 판본(板本)은 세 가지 계통이 있다.1) 사화본(만역본)계통 (詞話本(萬曆本)系統)이 계통의 판본은 제목이 로 으로 칭하는데, 1932년 산동성에서 발견된 판본이다. 그 첫 부분에 해당하는 동오농주객 서에서 “만역정이 년동(1617년)”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이라고도 한다. 노신은 만역 경무 년간(1610년)에 오중(吳中)에서 제일 먼저 각(刻)하였다고 하나, 그 실물이 현존하지 않았기에 그것보다 7年 뒤에 나온 을 가장 빠른 판본으로 보고 있다. 이 판본에는 모두 흔흔자서가 맨 앞에 있고 다음으로 이십공발, 동오농주객서가 있으며 그림은 없다. 제 1회는 [경양강무송타호, 반금련혐부매풍월]이며 초반부 5回는 《수호전》의 고사를 변형시킨 것들이다. 손해제(孫楷第)에 의하면, 이 계통의 판본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 북경도서관장본 (현재 대만의 국립 도서관 소장) : 1932년 산서성에서 발견되었고 모두 10권 20책으로, 정문은 1 페이지당 11 행이며, 1 행은 24자로 되어 있다. 원서 제 52회 두 행이 부족하다. 1933년 ‘’고일소설간행회(古佚小說刊行會) ‘’가 이 판본을 영인하였으며 영인본 매 회마다 두 폭의 그림, 도합 2백 폭을 첨가하였는데 이 그림은 통주 왕효자판본(通州 王孝慈版本)의 숭정본에서 제공받은 것][皐鶴堂批評第一奇書金甁梅]로써 약칭 [第一書本]이라 한다. 이 계통의 판본은 머리에 사신(謝?)의 서(序)가 있으며 ‘강희세이해청명중완태중각천자사신우고학당(康熙歲已亥淸明中浣泰中覺天者謝?于皐鶴堂)’이라고 서(序)가 되어 있다. 청조 260여년간 세간에 20종에 달하는 판본이 성행하였으며, 그중 대다수의 판본 속표지에는 ‘팽성장죽파비평(彭城張竹坡批評)’이라고 제(題)가 되어 있다. 장죽파는 팽성(지금의 강선 서주)人으로 강희 9년(1670)에 태어나 강희 37년(1698)에 사망하였다. 그는 에 근거하여 예어(濊語)나 음사(淫詞)등을 모두 빼 버리고 정문에 진일보한 개정을 하고 대량의 평어를 보태었으니 매회 앞의 총평 이외에도 미평, 방평(旁評) 등이 그것이다. 또한 전서 앞에 부록으로 잡록(잡록소인·서문경가인명수·서문경가인식부·서문경음과부녀·반금련음과인목·서문경방옥(雜錄小引·西門慶家人名數·西門慶家人?婦·西門慶淫過婦女·潘金蓮淫過人目·西門慶房屋)), 죽파한화(竹坡閑話), 냉열금침(冷熱金針), 우의설(寓意說), 고효설(苦孝說), 제일기서비음서론(第一奇書非淫書論), 제일기서금병매취담(第一奇書金甁梅趣談), 비평제일기서금병매두법(批評第一奇書金甁梅讀法) 등을 싣고 있으며, 그는 제목 상하구(上下句)를 압축하여 매 회를 제 1회의 [열결 냉우[熱結 冷遇]]와 같이 네 자로 압축하여 놓고 있다. 이 계통의 판본은① 강희 이해본(康熙 已亥本) : 권수는 나누어져 있지 않고 30책으로 되어 있으며 정문은 1페이지당 11행, 1행은 12자이며, 그림회평은 없고 미평 행측평은 있다. 속 페이지에 ‘강희 이해년(1695)이라고 되어 있으며, 안쪽 오른쪽 위편에 ’이입옹선생저(李笠翁先生著)‘ 중간에 ’제일기서‘ 왼쪽 아래편에 ’임자모춘팽문둔수타박(壬子暮春彭門鈍?打朴)‘이라는 서가 있다.② 자당본(慈堂本) : 강희이해본과 같은 판식으로 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같으나 단지 왼쪽 아래편에 ‘재자당(在慈堂)’이라는 글이 다를 뿐이다.③ 본아장판본(本衙藏板本) : 권수는 나누어져 있지 않으며 3문가에서 일어나는 많은 대소사건에 있어 조정과 화해의 역할을 담당한다. 서문경사후 지현(知縣)의 아들 이위내(李衛內)의 눈에 들어 재가를 하게 된다.5) 손설아孫雪娥서문경의 죽은 부인, 즉 진씨(陳氏)의 하녀로써 진씨가 죽은 후에 그녀의 딸인 서문대저를 모시는 몸종으로 있다가 서문경과 정을 통한 후에 그의 넷째부인이 된다. 인물은 못생겼고, 체구도 왜소했지만 애교가 많았고, 눈치가 빨라서 주방일 등을 보면서 서문경 등의 환심을 샀다. 그런 까닭으로 반금련에게 미움을 받는다. 특히나 춘매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아 서문경사후에 주수비의 정부인이 된 춘매에게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결국은 기루에 팔려 기녀의 신세로 전락한다.6) 반금련潘金蓮금병매 라는 책명에서 보듯이 반금련의 “金”字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자가 반금련에게 갖는 애정과 금병매 전편(全篇)중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중요도를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반금련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라다가 9세 때에 왕초선(王招宣)에게 팔려 탄창(彈唱))을 배운다. 왕초선이 죽고 그녀가 15세되던 해 장대호(張大戶)에게 다시 팔려가 그의 첩이 된다. 장대호 역시 노환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게 되자 장대호의 생전에 반금련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본부인 여씨(余氏)는 그녀를 그 마을에서 제일 못생기고 체구도 작은 무대에게 주어버린다. 반금련은 무대에 만족치 못하고 서문경과 눈이 맞아서 무대를 독살하고 서문경의 다섯째부인이 된다. 서문경의 집에 들어온 후에 그의 총애를 업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는 듯이 마구 행동을 한다. 때문에 전편(全篇)을 거쳐 반금련은 음욕과 질투의 화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과도한 음욕으로 서문경마저도 목숨을 잃게 된다. 서문경의 사후에도 그녀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진경제 등과 밀통을 하다가 결국에는 오월랑에게 발각되어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후에 무송에 의해 죽임을 당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 28세이다.7) 이병아李甁兒원래 동경 채태사(蔡太師)의 사위 양중서(梁中書)서문경과 계속해서 정욕을 불태우던 송혜련도 결국은 자기의 남편이 억울하게 쫓겨나고 그 역시 서문경의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5. 줄거리금병매 라는 작품이 비록 세 여인들의 이름자에서 한 글자씩을 취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나 전편(全篇)의 이야기 중심은 서문경과 그 가정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써 서문경일가의 흥쇠취산(興衰聚散)를 다룬 서문경의 생활사라 하겠다. 그리고 색정적인 탕녀인 반금련의 적나라한 그러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무대라는 만두 장수에겐 늘 불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무대에게는 무송이라는 건장한 동생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 반금련이 이 무송을 유혹 하려다가 실패한다. 무송이 금련의 유혹을 뿌리 치고 출장을 가버리자 금련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편 서문경은 거부에 첩도 줄줄이 거느리고 있는 호색한이었다. 첩도 모자라서 유부녀 까지 희롱하는 작자 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 반금련과 조우하게 된다. 첫눈에 반한 서문경은 왕노파를 구슬려서 반금련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금세 육욕에 타올라 사랑을 나누고 만다.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차츰 소문이 나돌아 금련의 남편인 무대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가게 되고, 화가 난 무대는 그들의 간통 현장을 급습하지만 서문경이 반금련과 밀통하여 그를 독살한다. 금력으로 사건을 간단히 해결한 서문경은 반금련을 첩으로 들린다. 개봉으로 출장을 갔던 무송은 자신의 형이 억울하게 죽은 내막을 알게 되어 복수에 불타지만 서문경의 금력을 이겨낼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결국 무송은 서문경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먼 곳으로 귀향을 가게 되고 이후의 이야기는 서문경과 그의 첩들. 시녀와 시동. 기생. 유부녀 등의 외설스런 사랑 놀음이 당시 관료들의 추악한 부패상과 함께 묘사된다. 그렇게 주지육림)과 탐욕의 나날을 보내던 중 과도한 마약 복용이 원인이 되어 마침내 서문경은 병들어 그만 많은 재산과 아름다운 요부들을 남겨두고 죽는다. 그가 죽자 으레 그렇
왕충(王充)의《논형(論衡)》조비(曹丕)의《전론(典論)》목 차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一 ) 후한(後漢)의 시대적 배경二 ) 생애三 ) 왕충의 사상- 하늘의 인격성에 대한 부정- 성명(性命)의 부정四 )《논형(論衡)》의 내용- 지나친 과장은 경계하라- 작가는 진실한 감정을 담아야 한다.五 ) 왕충의 사상적 의의二.조비(曹丕)의《전론(典論)〈논문(論文)》一 ) 위진시대의 시대적 배경二 ) 생애三 )《전론(典論)》〈논문(論文)〉내용- 문인상경론(文人相輕論)- 문기론(文氣論)- 문장체재론(文章體裁論)- 명성보다는 실상에 주의하라.四 )《전론(典論)》의 사상적 의의왕충(王充)의 《논형(論衡)》특정 시대에 유행하는 지배적인 사상 조류에서 벗어나, 나름의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한 인물들이 있다. 그런 사상가들의 대부분은 지배적인 사상 조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종의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웃사이더들은 지배적인 사상 조류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 취약점이나 비합리성을 간파하는 경우가 많다. 한대에서도 그런 사상가와 만날 수 있다.고대 중국철학사에서 3명의 비판 사상가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공자와 시대적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인물로 생동감 있는 비판을 했던 묵자와, 하늘에 대한 많은 논의를 했던 순자, 마지막으로 신비화된 공자 비판과 참위설의 허망함을 말했던 왕충이 그들이다. 여기서는 후한(後漢)의 사상가로 모든 사상, 특히 한(漢)대에 이르러 종교적?신비적 색채를 띄었던 유교에 대해 여지없이 비판을 가한 왕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一. 후한(後漢)의 시대적 배경전한(前漢) 시대에는 금문학이 유행하여 일반적으로 일경을 묵수(墨守)하였으나, 전한 말에서부터 고문학의 고전이 발견됨에 따라 후한(後漢) 시대에 이르러서는 금고문 논쟁이 있었다. 이들 대립을 절충하고자 장제(章帝)때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경학을 주제로 한 대토론회가 백호관(白虎觀)에서 개최되었다. 경학은 국가 운영의 원리와 이념을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다듬어진 한대적(漢代的) 사상을 타파하고 언론의 자유를 내세우는 위진적(魏晉的) 사조를 만들어 내었다. 사상적 전환기에 선 선구자로서 그가 중국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크다. 대표적 저서에 전통적인 당시의 정치나 학문을 비판한 《논형(論衡)》)(85편)이 있다. 그 밖에 《양생서(養生書)》 《정무서(政務書)》 등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후에 다시 관직에 나가 장제(章帝)의 부름을 받았으나 암살되었다.三. 왕충의 사상왕충은 중국 역사에 빛나는 비판주의자요, 합리주의자요, 과학적 실증주의자이다. 그의 저서인 논형은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대립한 것으로 진보적 사상을 담고 있긴 했지만, 당시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변경의 이름도 없는 사람의 저서라고 하는 것이 주된 이유였겠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이 강했던 한 대의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문제 삼는 일은 관심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왕충의 《논형》은 저술되고부터 약 100년 뒤인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 관심을 끌고 유행했다.一) 하늘의 인격성에 대한 부정왕충은 하늘이 뜻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 반대했다. 왕충은 한대에 유행하던 재이설이나 천인상관설(자연 재해가 하늘이 임금의 부덕에 대한 경고나 벌이라는 생각)을 부정한 셈이다. 왕충에 따르면, 재이 현상은 평소와 다른 자연 현상일 뿐이며, 임금의 부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과 사람의 일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왕충의 이러한 입장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기(氣)에서 비롯되었다는 입장에 바탕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남는다는 견해도 지탱되기 힘들다. 하늘은 마음과 뜻의 작용을 갖지 않은 자연이며 물체에 불과하다. 왜냐면 입이나 눈과 같은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그것을 확인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지만 하늘을 닮은 땅의 상태를 미루어 하늘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땅에는 입이나 눈이 없다. 따라서 하늘에도 입이나가한 비판으로, 《논형(論衡)?예증(藝增)》편에 나온다.“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바는 사실을 말할 때 실질보다 과장하는 일을 걱정하는 것이다. 문장을 짓고 문사를 드리우는데, 문사가 나오면 그 참됨을 덮어버리고, 아름다움을 칭송해 그 좋은 정도를 넘어서며, 악으로 나아가 죄를 없애버린다.”왕충이 말한 문(文)은 광의의 개념으로 학술 저작을 총칭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무학창작도 포함된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참위(讖緯)나 미신적인 학문이 성행해서 학술 저작 속에도 “기괴한 말(奇怪之言)”이나 “허망한 뜻(虛妄之義)”이 “실제 일을 늘려 더하여 아름답고 풍성한 말을 만들며, 붓끝을 놀리는 이는 헛된 문장만 조작해 만들어 허무하고 망령되이 전하는” 폐단이 자못 성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풍을 대면하면서 왕충은 분명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하였다. 그는 “사실을 말하면서 실질보다 과장하고(言事增其實)”,“문사가 나오면 그 참됨을 덮어버리며 아름다움을 칭송하면서 그 좋은 정도를 넘어서서(亂出익其眞 稱美過其善)”,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마음대로 과장하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날조하는 태도는 “본령과 진실을 잃고 떠난(失本亂實)”허망한 말이고, 사물의 참된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결과만 낳는다고 꼬집었다.왕충은 문학 창작상의 과장과 허구의 문제에 대해 다루면서, 창작 속의 예술적 진실과 실생활에서의 진실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이론적으로 논술하였다. 왕충이 말한 증(增)은 증식(增飾) 또는 과식(?飾)으로, “사실을 말하면서 실질을 과장한다(言事增其實).”고 말로 귀결된다.《논형(論衡)》가운데의 3편, 즉 과 , 은 증식에 대해 전문적으로 토론한 장이다. 에서 그는 경서 속의 과식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는 과장된 언어와 묘사는 사실을 비유하고 아름다움을 찬송하며 해악을 풍자하는 데 적극적인 작용을 하여 “멍하게 의혹에 빠진 사람을 두루 살피고 가려 뽑게 하여 마음을 열고 뜻이 통하게 만들며, 분명하게 깨우쳐 각성하게 만든다.”고 인식하였다. 아울러 증(增엇 때문인가?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발하여 세속의 일을 논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다만 옛날 경전을 풍요할 뿐만 아니라 오래된 문장을 잇는 일일뿐이다. 논란은 가슴에서 피어나고, 문장은 손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경전을 말하는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왕충은 문장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5문(五文) 가운데 그는 “마음 속에 담긴 생각을 발하여 세속의 일을 논하고(發胸中之思 論世俗之事)”, “논란을 만들고 이야기를 밝히는 글(造論著說之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글이 제시하는 내용은 바로 작가의 진실된 감정이기 때문이다.왕추은 문장을 논하면서 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강조하면서, “화려하고 거짓된 글(華僞之文)”이나 “허탄하고 망령된 글(虛妄之文)”은 반대했는데, 그가 《논형》을 지은 근본적인 이유도 “허탄하고 망령된 것을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왕충은 《논형?대작(對作)》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때문에 《논형》을 지은 것은 뭇 책을 들어보면 모두 진실을 잃었고, 허탄하고 망령된 말이 참다운 아름다움을 이기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탄하고 거짓된 말이 없어지지 않으면 화려한 문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화려한 문장이 널리 퍼지면 참다운 일이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논형》의 목적은 경중의 말을 조리에 맞춰 설명하고 진위의 공평함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지, 무장을 조율하고 시구를 수사해서 기이하고 웅장한 모습을 갖추려는 것만은 아니다.”왕충은 문학 가운데 형식주의를 반대했고, 특별히 문학 작품이 내용상으로 진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논형?초기(超奇)》편에서 이렇게 말했다.“문장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고, 마음은 문장으로써 겉으로 드러난다.……아래에는 뿌리와 줄기가 있고, 위로는 꽃잎과 잎사귀가 있으며, 내부에는 열매와 씨앗이 있고, 외부로는 가죽과 껍데기가 있다. 문장과 사설은 선비에게 있어서 꽃잎과 잎사귀와 가죽과 껍데기와 같다. 진실한 정성이 가슴속에 있으면 문장은 종이 위에 밝히 드러나는 법이다. 외부와 내부 성격을 폭로했다. 때문에 왕충의 지적인 작업은 유교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충이 뜻한 바였든 그렇지 않든, 왕충은 유교의 한계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인의도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올바르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삶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현세에서의 삶의 모순과 불행에 대해 사후 세계의 영혼이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유교는 인생의 문제,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육조시대에 노장(老莊) 사상이 유교를 압도하고, 나아가서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이 지식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이 결과이다.왕충의 《논형》은 인해 후세 비평가들에게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유협(劉?, 462~520?)이 제시한 “감정을 바탕으로 무낭을 지으라.”하고, “문장을 위해 감정을 꾸미는”태도를 반대한 논의나,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말한 “사람이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 가운데 감정만한 것이 없다.”는 시가이론은 모두 왕충의 문학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논의라고 할 수 있다.조비(曹丕) 의 《전론(典論)》〈논문(論文)〉一. 위진시대의 시대적 배경중국문학사에서 학술 일반과 구별되는 문학의 고유성에 대한 인식이 비롯된 것은 위진시대였다. 물론 이전에도 문학평론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 대한 생각을 적은 글들이 단편적으로 있기는 했지만 그런 글들은 대부분 문학을 독립적인 분야로 보기보다는 학술 일반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위진 시대에 들어서 문학에 대한 의식이 급속히 발전했고 문학 활동의 저변도 확대되었으며 문학작품의 분량도 상당한 정도로 축적되어 본격적인 문학형론이 가능하게 되었다.위진남북조시대는 문학의 고유성과 심미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일어난 시기로서 문학형론에 있어 매우 의의가 깊은 시기이다. 이런 새로운 문학적 상황이 전개된 배경은 매우 복합적이다. 우선 한 대를 거치면서 사대부계층의 저변이 넓어지고 문자 활동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편과
1. 시대에 따른 ‘소설’의 개념책 중의 모든 이야기 황당한 소리 같지만 滿紙荒唐言온통 피눈물로 써낸 것이어늘 一把辛酸淚사람마다 지은이를 미쳤다고 하는데 都云作者癡이 속의 맛을 아는 이 그 누구일런가? 誰解其中味이는 중국 고전소설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의 앞대목에서 이 작품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마감 지으며 내놓은 시이다. 의 작자가 제시한 이 말을 오늘날의 상식적인 정의로 바꿔 풀이하자면 소설이란 "'황당하게 보이는 이야기', 이른바 허구를 통해 작가의 깊은 경험과 생각을 표현하여 독자에게 어떤 깊고 다양한 맛, 즉 감동을 제공하는" 문학 갈래라는 말이다.중국의 소설에 대한 개념은 서양의 Fiction과는 처음부터 다르다. 중국에서 소설이란 말은 시초부터 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용어였다. 소설이란 말을 가장 먼저 쓴 것은 장자(莊子)일 것이다. 중국 고전소설은 고대 신화·전설·우언·사전(史傳) 등 여러 서사 문학의 영향 아래 형성, 발전되었다. 가장 빠른 소설 작품으로서 반고(班固) 에 한대 소설 15종의 목록이 실려 있지만, 작품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실정을 알 수 없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신선·귀신 이야기의 성행과 함께 불교의 광범위한 전파가 이루어져 등 지괴(志怪)소설이 등장했다. 또한, 청담(淸談) 사상의 숭상에 따라 와 같은 지인(志人)소설도 출현하였다.선진(先秦)·양한(兩漢)의 저작 가운데 당시인의 '소설'에 대한 관념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작은 말〔소설〕을 꾸며 고명(高名)이나 명예(名譽)를 구하자는 것은대도와는 또한 먼 짓이다.飾小說以干縣令,其於大達亦遠矣. 자하(子夏)가 말하기를,"비록 소도라 할지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지만원대하게 나아감에 막힘이 있게 될까 염려하여군자는 (이를)하지 않는다."子夏曰:雖小道,必有可觀者焉,致遠恐泥.是以君子弗爲也.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도를 논할 따름이니,소가진설(小家珍說)이 바라는 바는 모두 쇠망하게 된다.故智者論道而已矣, 小家珍說之所願皆衰矣. 소설가는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나 '하층민들의 민심을 파악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것이다. 특히 의 경우, 반고는 '제자 10가에서 볼만한 것은〔소설가를 제외한〕9가 뿐'이라고 그 가치를 경시하면서도, 다른 면에서는 '소도라 할지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선인(先人)의 예를 통해 이를 '엮어 놓아 잊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의를 밝히고 있다. 이처럼 한대에 이르러서도 '소설'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부스러기 말'과 '하찮은 것'으로 경시되었으나, 이와 아울러 그 '효용성'에 대해서도 일부 언급되었음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요컨대, 선진에서 양한까지 '소설'에 대한 당시의 관점은 주로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소설의 형식은 골목길의 이야기를 모은 '단서(短書)'이다. 둘째, 소설의 내용은 부스러기 작은 말을 모아 비유를 취하거나 의론을 제시한 것이다. 셋째, 소설의 가치는 대도와는 결코 병론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개인적 수양이나 집안과 사회를 다스리는 데 도움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한편, 는 제자 출현의 원인을 '왕도(王道)'의 쇠미에 두면서 각 제자의 기원을 왕관(王官)과 관련시켰는데, 소설가의 경우는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패관(稗官)'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반고에 따른다면 소설은 '패관'이 '민간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규정된다. '사서(史書)'의 '목록'에서 제시된 그의 이러한 관점은 후대의 사서는 물론, 대부분의 논자에 지대한 작용을 미치게 되었다.육조에는 지괴(志怪)와 잡록식 필기소설이 흥행했지만 '소설'을 사실을 기록하는 사서의 일종으로 여기는 전대의 관념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곽박(郭璞)은 〈주산해경서(注山海經敍)〉에서 세상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여기는 《山海經》도 그 내용 자체가 기이한 것이 아니라 '희문(希聞)'을 '기(奇)'로 여기는 사람들의 습성 때문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괴소설이 '사실의 기록'임을 강조했던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잘 드러내 주는 예이다.그러나 대략 적고자 하니, 오직 그 참됨을 드러내기 위함일 따름)"이라고 적었고, 심기제(沈旣濟)는 을 통해 "문장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오묘한 정(情)을 전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의 소인(小引)을 보면 전기의 창작 목적을 애정의 '참됨을 드러내거나', '정절을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하여 권계의 효과를 얻고자 했던 점에 둔 것은 기존의 효용론과 같은 맥락이지만, 뛰어난 문장으로 주제를 표현해 낸다는 지적은 소설관의 상당한 변화라 할 수 있다.송·원에서 명초에 이르는 동안, 중국 고전소설은 또 하나의 전기를 맞게 된다. 민간 예술의 흥성 속에서 출현한 '화본(話本)소설'은 여러 면에서 이전의 육조소설이나 당대 전기와 매우 달랐다. 후에 이러한 화본소설은 와 등 장편 장회소설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설화인(說話人)'이 강창(講唱)할 때 쓰던 저본이었던 화본은 장·단편 백화소설의 발전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점에서 중국소설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육조 및 당대 소설관이 주로 문언소설의 흐름 속에서 제시된 것들이라면, 송대의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백화소설 형식이 등장하면서 '소설'이라는 말에는 새로운 의미가 첨가된다. 즉, 송대 이후로 소설이라는 말은 논자의 관점에 따라 첫째, 잡록·필기·전기 등 전통고수적 의미, 둘째, '설화4가(說話四家)'의 하나였던 '소설1가(小說一家)'와 이를 계승한 백화소설로서의 의미, 셋째, 앞 두 관점이 결합된 의미 등으로 복잡하게 쓰이게 된다.송말 원초의 전기·화본소설집인 나엽(羅燁)의 〈설경서인(舌耕敍引)〉 중 〈소설인자(小說引子)〉와 〈소설개벽(小說開闢)〉이라는 두 편의 문장에서는 '소설'의 사회적 의의를 여러 면에서 강조했다. 〈소설인자〉에서는 소설이 "지난 세대의 현인을 말하여 스승으로 삼게 하고, 오늘날의 어리석은 자를 꾸짖어 경계토록 해준다. 그 말이 근거 없다 하더라도 들으면 유익하다.)"는 식으로 그 '권계적' 의의를 강조했고,〈소설개벽〉에서도 "겨우 세 치 혀로써 시비를 포폄(褒 사적을 기술한 것은 혹 사서와 통하며, 지(志)나 전(傳)에 비슷한 것이 있기도 하다. 小說,子書流也.然談說理道,或近於經;又有類注疏者.紀述事迹,或通于史;又有類志傳者.(〈九流緖論·下〉)소설류는 혹 문인묵객들이 장난삼아 지은 것이기도 하고, 기사(奇士)나 견문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것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보고들은 것을 기술함에 거리낄 것이 없고, 이치를 펼쳐 냄에 있어서 그윽하고 심오함을 다하려 했다. 잘 지은 것은 경전 주해의 이동(異同)이나, 사관이 탐구한 핵심을 전하는 등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시속(時俗)에 해로움이 없다. 小說者類,或騷人墨客,游戱筆端;或奇士洽人,蒐蘿字外.紀述見聞,無所回忌;覃硏理道,務極幽深.其善者,足以備經解之異同,存史官之討核,總之有補於世,無害於時.(〈九類緖論·下〉)그는 {한서·예문지·제자략} 에서 제자 10가를 분류했던 방식과 내용을 검토하여 자신의 기준에 의해 9가로 나누고, 소설가를 지괴·전기·잡록·총담(叢談)·변정(辯訂)·잠규(箴規) 등으로 세분했다.내가 새로이 정한 9류는 유가·잡가·병가·농가·술가·예가·설가·도가·석가 등이다.……'설가'는 주로 풍자와 경계를 주로하되, 허황되고 기이한 기록을 덧붙인 것이다.……'설가'는 패관에서 나왔는데, 그 말이 매우 터무니없고 사실적이지 못하지만 시용(時用)에 있어서는 보고들은 바를 가득 담고 있어서 족히 쓸 만한 점이 있다. 余所更定九流:一曰儒,二曰雜,三曰兵,四曰農,五曰術,六曰藝,七曰說,八曰道,九曰釋……說主風刺箴規,而浮誕怪迂之錄附之.……說出稗官,其言淫詭而失實,至時用以洽見聞,有足采也.(〈九流緖論·上〉)이와 같이 호응린의 소설관은 기본적으로 {한서}의 '패관설'에 기초하고 있다. 즉, 소설은 '패관'에서 나왔고, 그 내용은 '허황되고 기이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지만 '경전의 이치'나 '사서의 지전(志傳)'과 비슷하여 '견문에 도움되는 바가 있으니' '볼만한 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소설이 다른 어떤 저술보다 다양하게 전해 오는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자서의 종류로는 대략 10가가거리가 있는 잡술에 속한다는 점에서나, 그 자신 당시 유행하던 ·를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예 소설로 보지 않고 경시했던 태도)등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설화체 소설의 등장과 함께 '소설'이라는 용어는 논자에 따라 전통적 의미와 신흥의 의미로 구분되거나 아예 두 의미가 복합된 상태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래 전통적 소설관에서 소설을 "패관이 민간의 이야기를 기록한 패사"로 보고, 9가에는 끼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효용이 있음을 긍정한 반면, 소설을 완전히 오락적 소일거리로 여기는 관점은 소설의 효용을 아예 '즐거움의 제공'에 두는 점에서 구별된다.소설이나 잡극(雜劇)·희문(戱文)은 허와 실이 반반이면 유희의 삼매에 이를 수 있다. 정경을 지극히 구체적으로 그리면 되는 것이지 그 존재 유무를 따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근래에 등장한 소설이 조금씩 괴탄해지자, 사람들은 즉시 그 불경스러움을 비웃는다. 최근에 나온 {완사(浣紗)}·{청삼(靑衫)}·{의유(義乳)}·{고아(孤兒)} 등 잡극의 경우, 사건마다 정사를 고증하여 연월이나 성명이 다른지를 따진다면 지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식이면 사전(史傳)을 보면 되지 어찌 〔굳이〕희극이라 이름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凡爲小說及雜劇戱文,須是虛實相半,方爲游戱三昧之筆.亦要情景造極而止,不必問其有無也.……近來作小說,稍涉怪誕,人便笑其不經,而新出雜劇,若{浣紗}{靑衫}{義乳}{孤兒}等作,必事事考之正史,年月不合,姓字不同,不敢作也.如此,則看史傳足矣,何名爲戱?사조제가 제시한 '허실상반(虛實相半)'이란 이 명제는 소설 등 서사 작품에서의 허구 정도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관점이었다. '허실상반'이라 했지만, 허구와 사실이 꼭 반반 정도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보다는, 허실이 '섞여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청초에 전반적인 사상문화상의 억압정책에 따라 소설 역시 침체되고 이후로도 내내 금지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이러한 지배층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작품이 끊임없이 출현했다. 특히 청 중엽부터 경제의 회복이 이루어지면서 소설은 .
趙州眞際大師과 목 :교수명:학 과 :학 번 :이 름 :Ⅰ. 들어가는 글조주스님이 학인들을 교화함에 있어서 가장 역정을 두고 강조한 禪要는 무엇보다도 학인들이 말과 생각의 허구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쫓아다니면서 마치 연구 속에 깨달아야 할 어떤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그 점을 打破하는 것이다. 밖으로 구하고 문자 속에서 찾던 학인들의 분별심을 그치게 하고 곧바로 자신을 살펴서 안으로 증득하여 머리가 아닌 의식의 중심으로 체득하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는 空 ?無 ?공무의 연기실상의 일체법을 강조하셨다.먼저 조주선사의 생애를 알아보고 그의 어록과 그에 담긴 선사상을 알아보겠다. 끝으로 조주선과 한국선과의 관련성을 찾아보고자한다.Ⅱ.1. 조주선사의 생애조주스님은 당(唐)나라 말엽의 從?,(778~897) 선사를 가리킨다. 그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趙州에 있는 觀音院에 40년 동안 주석하면서 僧俗을 교화하였기 때문에?조주?라고 불리우게 되었다.조주 스님은 어려서 그가 태어난 고장에 있는 扈通院(혹은 龍興寺)에서 출가하였다. 그때의 승명이 종심이다. 종심의 머리를 깎아준 은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뒷날, 禪의 거장(巨匠)이 된 조주 선사의 은사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라면, 요즘 말로 해서 ?큰스님?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큰스님은 아니지만 그 은사스님에게는 장차 거목(巨木)이 될 제자의 자질을 알아보는 안목(眼目)과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 종심이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 아직 사미(沙彌)로 있을 때였다. 이 무명의 은사스님은 제자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주기 위해서 제자를 데리고 제방(諸方)의 선지식을 찾아 행각(行脚)을 나섰다.이들은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선지식을 찾은 끝에 池州에 이르러 南泉普願 화상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종심의 나이는 14세 가량이었다고 한다.종심 사미와 그 스님이 찾아왔을 때, 남전 화상은 방장(方丈)에 누워서 쉬고 있었다. 누워서 종심 사미의 인사를 받은 남별한 지도를 받으며 사사한 종심이 見性을 한 것은 열여덟 살 때라고 한다. 그 뒤, 스무 살에 구족계를 받은 종심은 고향의 護國院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은사스님을 찾아갔다. 종심이 호국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친족들은 다음 날 호국원으로 종심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였다.그러자 종심은?세속의 번뇌와 사랑의 그물은 다할 날이 없다. 이미 가족의 인연을 버리고 출가하였으니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하고서 그날 밤으로 호국원을 떠나 남전 화상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 남전 화상에게로 돌아온 종심은 남전 화상이 입적할 때까지 40년 동안 옆을 떠나지 않고 시봉하였다. 남전 화상이 입적하였을 때, 종심의 나이는 57세. 3년 상을 치루고 탈상을 했을 때는 60이었다.이 회갑의 나이에 종심은 행각을 나섰다. 행각을 나선 종심은?일곱 살의 어린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그에게서 배울 것이요, 백 살의 老翁이라도 나에게 미치지 못하면 나는 그를 가르칠 것이다.?하였다.남전 화상을 만나기까지 은사스님과 함께한 첫 번째 행각은 스승을 찾는 행각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행각은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구도와 교화의 행각이었다.이 두 번째 행각은 20년에 걸친 긴 행각이었다. 종심의 行狀은 그 20년 동안 그가 지닌 것은 한 개의 물병과 하나의 錫杖뿐이었다고 전한다. 한 개의 물병과 하나의 석장이 가진 것의 전부인 20년의 행각 중에 종심은 중국 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혹독했던 武宗의 불교탄압을 겪어야 했다.이 法難)은 회창년간(會昌年間, 841~847)에 일어났으므로?회창의 파불(跛佛)?또는?회창의 법난?이라고 한다. 회창 2년에 일어나 회창 5년에 끝난 이 법난은?毁佛寺勒僧尼還俗制?즉 사원은 파괴하고 승니는 강제로 환속시키라는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환속한 승니는 26만을 넘고 절은 4천6백이 파괴되었으며 불상은 파괴되어 철(鐵)은 농기구를 만들고 금은(金銀)은 돈을 만들었다. 이 돈을 회창개원전(會昌開元錢)이라고 한다. 만약 이 법령을 어기면 사형이었다. 많은 승니가 변복(관계를 지닌다. 조주의 선풍은 그의 스승인 남전보원과 마조도일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조도일은 평생토록?평상심이 도이다.?라는 것을 주창하였다.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生死心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무엇이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여기에서 언급한 ‘평상심’은 사실상 ‘본래의 면목’이고, ‘본래의 모습’이자 ‘본래의 마음’인 것이다. 조주선사는 마조도일을 대단히 숭상하였다.조주스님이 마조도일의 친구인 백장회해선사가 계신 곳을 찾아가자 백장스님이 물었다.“어디에서 왔는가?”“남전에서 왔습니다.”“남전은 무슨 법문으로 학인들을 가르치던가?”“‘깨닫지 못한 사람도 우뚝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백장스님이 꾸짖자 스님께서는 놀라는 얼굴을 하였다. 그러자 백장스님이 말씀하였다.“훌륭하다. 정녕 우뚝하다.”조주스님은 몸을 돌려 나갔다.‘깨닫지 못한 사람도 우뚝해야한다.’는 것은 남전스님이 상당하여 내보인 말씀이다. 조주가 단지 이 한 마디만을 거론하고, 남전의 “승냥이와 흰소는 오히려 ‘있음’을 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는 등의 기이한 말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는 기실 백장선사에게 남전선사는 평범한 일로 사람을 대할 뿐임을 일러준 것이다.『조주록』 제 520칙과 조주선사의 게송을 통하여 보면, 그는 사람들과 현묘한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기민함을 논하지는 않았으며 방할도 행하지 않았다. 다만 본분의 일과 평상의 언어로 사람들을 대했을 뿐이었다. ‘뜰 앞에 잣나무가 있다.’, ‘개는 불성이 없다.’, ‘차나들게.’ 같은 것처럼 생동감 넘치고 유머러스하면서 의미심장한 禪機를 내포하여 독특한 ‘趙州禪風’을 형성하였다.1) ‘向上一着’과 ‘本分事’로 사람을 대하다‘向上一着’과 ‘本分事’란 사람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주위에 휩쓸리거나 뒤섞이거나 더럽지하겠느냐?”남에게 애지중지하도록 권하는 것은 애초에 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선택이 필요없는 자신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애지중지하는가? 조주선사의 유명한 언급이 있다.“금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며, 진흙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천 사람이고 만 사람이고 모조리 부처를 찾는 놈들뿐이고 도인은 한 명도 찾을 수 없구나.”자기 마음속에서 진짜 부처를 찾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이고 완전하게 맡아야하는 것이다.2) 각고의 수행으로 실증하다만약 평생토록 총림에서 벗어나지 않고, 10년 가운데 5년을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을 벙어리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연후에는 부처도 너를 어찌할 수 없다. 네가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내 머리를 베어 가거라!종문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옷 입고 밥 먹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 본성에 있는 부처는 본래 하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가 되려고 마음먹는다면 거꾸로 부처에게서 천리나 멀어지게 된다. 조주선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행의 필요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수행을 이해하고 난 뒤 수행해야한다는 것이다.3) 감정과 집착을 쓸어버리고 일용을 지키다종문에서는 힘든 수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감정을 씻어내고 집착을 제거하며 日用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속인에게 가장 큰 속박은 ‘감정’이지만, 수행자에게 가장 큰 집착은 ‘佛法’이다.사자문원이 불전에서 예불을 올렸다. 스님께서 이르 f보시더니 주장자로 그를 때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뭘 하느냐?”“예불을 드립니다.”“예불을 드려 무얼하려고?”“예불은 좋은 일입니다.”“좋은 일은 없느니만 못하다.”― 有爲의 선법에 대한 집착을 깨버림.“나는 한줄기 풀을 가지고 열여섯 자 되는 금빛 부처님 몸으로 쓰기도 하고, 열 여섯 자 되는 금빛 부처님 몸을 가지고 한줄기 풀로 쓰기도 하니, 부처 그 자체가 번뇌이며 번뇌 그 자종사는 소수였고, 그들에 의탁하여 만들고 풀이된 文字禪, 그들에 의탁하여 만들고 풀이된 口頭禪, 제멋대로 방탕한 野狐禪이 대단히 유행하였다. 이같은 폐단을 훤히 꿰뚫고 있는 조주선사는 이렇게 말했다.“노승이 80년 전에 마조대사의 문하에서 80여 분의 善知識을 친견하였는데, 모두가 솜씨 좋은 선지식들로서 가지와 넝쿨 위에 또 가지와 넝쿨을 만드는 지금 사람들과는 달랐다 성인 가신 지가 오래되어 한 세대가 다른 것처럼 나날이 다르다. 남전스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異類가운데서 행해야한다.’고 하셨는데,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요즈음은 주둥이가 노란 어린 것들이 네거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법을 설하여 널리 밥을 얻어먹고 절을 받으려 하며 3백 명이고 5백 명이고 대중을 모아 놓고는 ‘나는 선지식이고 너희는 학인이다’라고 하는구나.”그리고 이 같은 게송을 지어 언급하였다.조주의 남쪽, 석교의 북쪽관음원에 미륵불 계시는데조사께서 남긴 신발 한 쪽여태까지도 아직 못 찾았네.조주선사는 계규가 느슨하고 경교가 황량하다는 문제에 대하여 그 폐단을 언급하고 성토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으며 대개 진정한 참선가 깨달음 없이 그저 玄虛함만을 농락하는 맹목적인 死禪과 痲禪을 겨냥하는 것이었다. 또한 종문의 현실에 대한 자신의 불만도 드러내었다.5) 시적 정취가 가득한 선경조주선가는 나이가 많고 덕이 높고 식견이 뛰어나고 깨달음이 깊고 언변이 유창하여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금새 퍼져나가 세상의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선림에서 그를 본보기로 삼는 자들이 대단히 많았다. 조주선사의 평화로움은 방할이라는 격렬한 방법을 사용한 임제선사와 덕산선사의 매서움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조주선사는 주로 사람이 지닌 대력적인 이견과 뛰어난 언어 기교를 근거로 삼았다.한 스님이 물었다.“잣나무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있다.”“언제 성불합니까?”“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언제 떨어집니까?”“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截斷攀緣]한 스님이 물었다.“무엇이 었다.
現代中國의 모습강의명:교수명:학 과 :학 번 :이 름 :#1 북경 9월 6일- 천안문(天安門)천안문은 베이징 중심에 있는 권력의 상징으로 과거 중국 제국 시대에 최고의 권력인 황제 있는 금단의 지역인 고궁(꾸꿍:故宮)을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천안문은 명과 청 왕조시대에 황제의 칙서를 발표하고 국가적인 의식을 하는데 사용되었다. 매년 동지와 하지에 황제는 천단(티엔탄:天壇)과 지단(띠탄:地壇)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천안문을 지나 갔다. 또한 황실의 주요행사와 군대의 출병식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황제는 이 문을 지나갔다. 현대 중국에 있어서 역시 천안문은 권력의 상징 역할을 해 왔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위에서 모택동(마오쩌뚱:毛澤東)은 새로운 중국의 설립을 선포했다. 매년 국경일이 되면 모택동은 천안문 위에 올라서 백만 붉은 군대를 사열하였다. 중국 근대화의 오점이기도 한 “문화 혁명”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1989년 중국 민주화를 위해서 수많은 중국인 피를 흘린 곳이기도 하다. 천안문은 북경이 명 왕조의 수도가 된 1420년 처음 건립되었다. 천안문의 초기 이름은 승천문(청텐먼: 承天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는 문)으로 불렀다. 건축 당시 3층짜리 목조 건물이었으나, 후에 불타 없어지고 청 왕조 순치 8년(1651년) 재건축 되어 천안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졌다.-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천안문광장 서쪽에 있는 인민대회당은 정치적인 활동의 중심지 이다. 중국 정부의 공식 연회 장소로 이용될 뿐 아니라 돈을 받고 연회장소로 빌려 주기도 한다. 인민대회당 내부에는 10,000개의 좌석이 있고, 중국에서 가장 큰 회의회관 이다. 인민대회당 내에는 중국의 각 성(省)을 위한 작은 회의실(홍공과 마카오 포함)이 있다. 인민대회당은 1959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주년 기념을 위해 10개월 만에 만들어 졌다.- 옹화궁雍和宮북경 북동쪽 베이알환루(北二環路)를 지나가다 보면 붉은색 담에 황색 기와가 있는 큰 옛날 건물을 볼 수 있경전을 연구하거나, 천문, 의학 등을 공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옹화궁은 5개의 주요건물과 기타 부속건물로 이루어 졌다. 유리기와의 아치형 문인 소태문(昭泰門), 옹정이 황제가 되기 전에 머물렀던 천왕전(天王殿), 3시대의 불상(과거, 현재, 미래)을 모시고 있는 용화전(永和殿), 라마교의 창시자인 종객바(宗喀巴)의 청동상이 있는 법론전(法輪殿), 이 밖에 만복각(万福閣) 그리고 수성루(綏成樓)가 있다. 옹화궁은 문화대혁명기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궁故宮보통 자금성(紫禁城)으로 알려진 고궁은 과거 청. 명나라 때 황제들이 머물면서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곳으로 고궁 또는 고궁박물관(故宮博物院)이라고도 한다. 고궁은 명나라 영락제(용러:永樂: 1406년)에 의해서 제위 4년째 되던 해부터 건설하며 13년 만에 완공하였다. 고궁은 중국 내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이며 사방이 10m 높이의 담으로 둘러쌓여 있다. 담의 4곳의 모서리에는 3층 높이의 망루가 건설되어 있으며, 담 밖으로 폭 52m의 해자가 담 주변을 따라 건설되어 있다. 고궁에 있는 크고 작은 방의 개수는 9,999개인데 이러한 숫자에 의미는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중요한 건물은 주로 남쪽에 배치하였고, 나머지 건물들은 동쪽과 서쪽에 배치하였다. 남쪽에서 북쪽으로의 중앙선에 있는 중요 건물에는 전문(前門: 고궁으로 들어가는 주문), 중화문(中花門: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천안문(天安門), 단문(端門), 오문, 태화문(太和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건청문(乾淸門), 건청궁(乾淸殿), 곤녕궁(坤寧宮), 어화원(御花園), 흠안전(欽安殿), 신우문(神午門: 꾸꿍의 북문)이 있다.- 이화원燎和園이화원은 북경을 찾는 관광객들이 고궁(꾸꿍: 故宮)과 함께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아마도 북경을 여행하면서 이곳을 가보지 못했다면 북경 여행에서 가장 큰 볼거리 중 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황제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천단공원은 황제에 이러한 의식을 실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 천단이 만들어 졌을 때 황제는 이곳에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지만, 후에 지단(디탄:地壇)이 만들어진 후부터는 이곳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천단공원은 2개의 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북쪽에 있는 벽의 절반은 타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남쪽에 있는 벽의 절반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각각 북쪽에 있는 벽은 하늘을, 남쪽에 있는 벽은 땅을 상징한다. 천단공원의 주요건물들은 남쪽과 북쪽 끝부분에 몰려 있고 이 사이로 높이 2.5m 길이 360m의 길이 연결되어 있다. 이 길을 단폐교(丹陛橋) 또는 신성한 길이라고 한다.-중화민족원中華民族園중화민족원은 중국에 있는 56개 소수 민족의 생활상을 전시해 놓은 공원이다. 북경 4환로 야윈춘(아시아선수촌)근처에 있다. 중화민족원은 크게 남쪽구역과 북쪽구역으로 나뉘어진다. 공원내에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전통 음식과 전시장, 거리, 건물, 공연장 그리고 쇼핑센터가 있다. 이곳에는 소수민족 전통 축제와 의식행사가 관광객들을 위해 펼쳐지기도 한다. 이곳은 중국에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소수민족의 생활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향산공원香山公園향산을 가장 많이 찾는 시기는 가을이다. 이때는 향산 천체에 단풍이 물들어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서 전국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처음 이 지역은 황실의 사냥터와 놀이터로 이용되었다. 후에 1745년 정의원(靜宜園)이라는 이름으로 황실 공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1860년과 1900년에 2번의 외세의 침략으로 파괴되고 현재는 몇 개의 건축물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1949년 공산당이 북경에 진입하기 전에 이곳에 지휘본부가 세워지기도 했다. 동쪽 출입구를 통해서 향산에 입장한 후 오른쪽으로 가면 티벳 스타일의 사당인 소묘(昭廟)가 있다. 이것은 1780년도에 세워진 것으로 티벳의 라마교 .2m의 점토로 만든 12개의 부처의 제자상이 있다. 이 배치는 부처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남기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 이라고 한다. 와불상의 동쪽과 서쪽 벽에는 청나라 시대에 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와불상의 천으로 만든 신발이 있다.- 장성長城우주에서 볼 때 인간이 만든 인공건축물 중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장성은 단지 중국인들에게만 유명한 장소가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유산 중 한곳이다. 많은 관광객이 베이징을 찾고 있고, 대부분 관광객들은 이곳 장성을 찾는다. 실제로 주의 깊게 장성의 지도를 보면 실제 장성의 길이가 약 3,000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나머지 부분은 산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를 다 합해서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장성은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조금씩 만들어진 것이다. 최초 B.C. 7세기 경에 장성은 외적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이후 중국본토를 통일한 제국들이 조금씩 그 길이를 연장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는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던 장성을 하나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사업을 위해서 당시 국가 전체 인구에 1/5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이 공사에 투입된 노동자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민간 전설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람들은 장성에 사용된 벽돌 하나하나를 죽은 사람의 비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성을 만드는데 희생됐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한나라(206 B.C. A.D. 220)때에 쥬췐(酒泉)에서 듄황(敦煌)에 이르는 서쪽으로 약 500km정도를 더 연장하였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은 원 나라를 무너뜨리고 명나라(1368 - 1644)를 세웠다. 그리고 수도를 난찡(南京)으로 하고, 북쪽에 아직 남아있는 몽고족의 잔여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북쪽 지방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이징 북쪽에 새로운 장성을 만들기, 1926년부터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매우 낡고 도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만큼 초라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비디오에서 볼 수 있듯이 김구선생의 두루마기도 전시되어있다.1층에서 짧게 비디오 시청을 하고 나면 2층과 3층의 전시관을 관람 하게 된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또한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 건물 내에 작은 상점을 운영하여 청사 유지비를 마련하고 있는데, 우표,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중경우리 나라가 해방되기 바로 전까지의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곳. 도심 안에 언덕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겨울에는 춥지 않지만, 여름에는 중국 3대 찜통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더운 곳이다.- 중경시 인민대례당명나라의 건축기술을 모방하여 세워진 인민대례당(中慶市人民大禮堂)은 1954년에 완공되었다. 중경시 서부에 위치한 중경시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써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의 자태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을 멈추지 못하게 할 정도다. 이곳은 고대풍격을 모방한 동방건축으로 중국 현대 건축물전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대례당 정문에는 화려한 채색의 비루(牌樓)가 있는데, 기둥 안으로 새로 건설된 규모의 웅대한 인민광장이 들어서 있다. 그곳은 고민족의 건축군으로서, 건축채색과 선의 모양이 전통 건축형식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주랑(柱廊)과 양쪽의 날개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고, 탑의 꼬리부분도 입체적으로 각각 균형있게 짜여 있다. 옥색 유리기와의 대층정, 대홍랑주, 백색의 난간, 휘황찬란 금색의 연출, 웅장한 기세가 장관인 천단은 북경의 천단을 모델로 하여 지어졌다고 하며, "나라가 번성하고 백성이 편안하라(國泰民安)"는 의미가 담겨 있다.- 조천문 朝天門충칭의 동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 창강 삼협으로 가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장소이다. 매표소에서부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