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 여성 취업의 필요성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담장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흰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구름짧은 샤쓰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찬바람 소슬바람 산너머 부는 바람 간밤에 편지한 장 적어 실어 보내고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이 노래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일로 한동안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 노래의 가사를 내가 이해한 것은 훨씬 뒤의 일로, 전까지는 색색의 꽃이 나오는 흥겨운 노래로 생각하며 즐겨 부르며, 친구들 중에는 이 노래를 알고 있는 이가 없었기에 왠지 모를 우쭐한 기분에 자랑스레 가사를 알려주기도 했었다.시간이 지나고 오랜만에 생각난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마침 집에 놀러와 있던 삼촌에게서 뜻밖에 노래의 뜻을 듣고 눈물을 흘렸었다. 그 때의 눈물은 내가 이 노래를 진정으로 이해해서 흘리는 눈물이라기보다는 내가 불렀던 아름다운 노래에 그런 슬픔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데서 오는 반성의 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이 노래의 1절 가사에서 벗어나 온전한 가사를 접했다. 열악한 조건에서 미싱을 돌려가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는 여린 여공들의 모습은 나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고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왠지 모를 처연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얼마 전 이 노래를 힙합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곡을 들은 적이 있다. 밝고 경쾌한 리듬을 덧씌운 노래는 어린 시절 신나게 부르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지만 마냥 좋아하기에는 너무 슬픈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이 노래를 새로 리메이크된 노래로 들으며,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노래 본래의 뜻까지도 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걱정을 덜었다. 모르는 게 약이 될 때가 분명 있긴 하겠지만 절대 몰라서는 안 될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미싱의 추억은 뒤로하고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고 여성의 취업형태도 많이 변화하였다. 사회적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지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변화를 둘러싼 환경과 모순을 이루며 질적 전환을 예고하게 된다. 1990년대 여성노동시장의 변화도 이러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하는 기혼여성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되었고 노동시장의 구조적 특징과 큰 연관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현재 기혼여성의 노동시장에서의 영역과 지위는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성장하여 이들을 고려하지 않고 노동시장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더욱이 향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이들 여성인력의 활용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그동안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와 여성인력 활용문제는 주로 고용차별, 모성보호 등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사안별로 연구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시각만으로는 여성노동시장의 구조적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고 정책대안을 모색하는 데 한계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성인력 활용의 사회경제적 의미가 점차 중요해지고 있음에 비추어 여성노동시장을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2. 여성의 취업 동기여성의 취업 동기는 각 가정의 소득 및 학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구주의 소득이 많은 경우에 여성의 취업률이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기혼 여성이 취업하는 경우에 가정노동부담, 자녀양육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원만히 해결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주부가 취업함으로서 감당해야 할 정신적 경제적 부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감수하면서도 여성이 취업을 하는 경우는 대체로 여성이 취업을 함으로서 소득을 증가시켜 각 운영을 좀 더 나은 수준으로 향상시킬 필요가 있을 때 이다.우리나라에서 산업화 초기에는 노동력 인구가 잉여상태이어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가사조력자를 구할 수 있었으므로 그 비용을 능가하는 보수를 받는 직업을 택할 수 있는 경우에, 기혼여성이 가계소득을 높이기 위해 취업을 하였다. 그러나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노동력의 수요가 많아지고 임금이 높아지므로 가정에서 가사조력자를 구하기는 어려워지고 구한다 해도 그 비용이 높아져서 주부가 그 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취업을 하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다.그러나 최근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대중 소비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의 홍수 속에서 생활의 질을 높이려는 욕구와 경쟁심과 과시욕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혼 여성의 취업은 여러 가지 형태로 증가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동력의 공급의 근원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여성의 교육수준이 행상되고 자녀수의 감소, 가정노동 시간의 축소 등으로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사회에 기여하고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사회생활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취업을 한다. 이는 노동력을 질적으로 향상시켜 인적자본을 축적하여 여성자신의 교육수준과 기술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노동에 대한 대가를 높이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여성의 학력은 남편의 학력 및 직업과 상관관계가 있고 동시에 소득과 관련되므로 학력이 낮은 여성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학력이 취업동기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은 대졸 이상의 여성의 경우 직업을 갖는 동기가 자신의 적성을 살려서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등 자아를 실현하는 데에 있고 고졸 이하의 여성은 가계소득을 증가시키려는 경제적인 동기가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사람이 어떠한 직업 활동을 하던 그 노동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게 되는데 여성의 경우 그 취업동기가 경제적인 것인가 혹은 자아실현을 위한 것인가로 구분되는 것에 다소 다른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동기가 없으면 여성은 직업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여성의 경우 직업은 자신의 선택과 관련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실제로 우리나라나 선진국의 경우 여성이 직업 활동을 할 만한 충분한 능력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업을 갖지 않고 자녀양육, 가정 경영, 남편의 내조, 그리고 자신의 여가생활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이 직업을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은 근원적으로 여성에게는 가정의 책임이 우선이라는 사회적, 가정적 기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3. 여성의 취업형태의 변화산업화 초기에는 여성의 취업이 학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결혼 전에 잠시 사회생활의 경험을 갖겠다거나 여성들이 자신의 결혼자금을 마련하겠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고 결혼과 더불어 가정생활에만 전념하는 것이 사회적인 통념이고 여성자신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여성의 직종이 단순직으로 제한되고 직업적 훈련이나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직장에 입사할 때 여성은 결혼을 하면 사직하겠다는 각서를 쓰는 제도를 택한 경우도 많았다.그러나 최근에 와서 사회적 요구와 개인적 요구 그리고 여성의 직업에 임하는 태도의 변화로 결혼 후에도 계속 사회활동을 하려는 여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계속 할 수 있는 직종을 선호하고 처음에 시작이 어렵더라도 그러한 직종을 택하려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20세 이전의 취업률이 낮아지는 반면에 20대 후반부터 계속 증가한 것은 여성이 교육을 더 많이 받고 결혼 후에도 경제활동을 계속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공무원, 교사, 간호사, 교수 등의 직업은 여성의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계속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은행, 일반기업체에서도 여러 가지 제한 조건을 완화하여 여성들이 은행지점장, 회사이사, 연구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인력활용의 합리적 측면, 인권적 측면 등의 시대적 요청사항으로 남녀고용 평등법이 시행됨으로서 남녀가 연령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 취업에 대한 인식은 사회문화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 실정이므로 지속적인 행정지도와 교육과 홍보활동이 요구된다. 또한 중년 여성은 자녀양육과 가정노동으로 인한 시간적 부담이 적어지므로 사회활동, 경제 활동에 대한 욕구가 크고 따라서 이러한 여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제, 계절제 직종이 선호되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취업기회를 늘일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요구된다.4. 최근 대졸 여성의 실업난 실태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월 대졸여성 실업률은 5.8%로 대졸남성 실업률(3.3%)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특히 대졸남성 실업률은 2002년 3.7%, 2003년 2월 3.5%에 비해 점차 낮아졌지만, 대졸여성 실업률은 2002년 4.3%, 2003년 4.9% 보다 심각해졌다. 이는 청년실업이 곧 여성실업이라는 씁쓸한 농담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점이다. 청년실업의 극복도 중요하지만 정책이 실질적으로 남성의 취업률을 높이고 여성의 실업률을 높이는데서 얻어지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정책이 아닐까 한다.
1. 샤머니즘에 대해얼마 전 TV에서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 가서 내가 예전에 책으로만 접했었던 그곳의 샤머니즘을 체험하는 것을 보았다. 새삼스레 항간에서 설왕설래하는 바이칼 한민족 기원설 이라든지 시베리아 우리 문화 시원론 같은 이야기를 재론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TV로 보고 느낀 샤머니즘 문화는 내 흥미를 자극했다. 그때의 흥미로운 기분은 난 세상의 경계선 위로 몸이 들어올려졌고, 내 발은 하늘 저편을 딛고 다녔다 는 어느 샤먼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샤머니즘을 미신으로 단정한다. 도대체 미신이란 무엇인가? 기성 종교와 현대과학에서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초월적 현상을 좇는 것이라 말한다. 유일신이란 영적 독재자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현대 과학문명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겠다는 속셈이 미신의 정치학 인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종교적 파시즘일지도 모른다.그런데 기성종교와 현대과학은 우리에게 한 가지 금기를 부여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말하거나 따지는 것이다. 당신은 술자리에서 소주잔을 들고 최근의 연예계 소식에서 작금의 시국현황까지 거론하겠지만 여태껏 죽음에 대해 벗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가. 그것도 남 죽은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죽어서 어떻게 될지, 무엇이 될지에 관해서 말이다. 물론 죽어서 천사가 되리란 굳은 신념 아래 어떤 모양의 날개가 자신에게 어울릴지 궁금해 하거나, 영혼 보존의 법칙 같은 건 헛소리고 죽으면 말짱 황이라 믿는 이들은 제외될 것이다.샤머니즘은 죽음의 종교이다. 태곳적 우리 조상들은 이 세상이란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이란 가없이 넓어 어느 구석인가에 죽은 이들을 위한 자리도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병이나 사고로 죽더라도 그걸로 끝나지 않고 혼백이란 게 있어서 육신을 떠나도 우리는 계속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보통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혼백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샤먼의 존재도 믿었다. 샤머니즘은 먼저 죽은 자를 믿고, 미신을 믿는 것이다.샤먼은 철학자라는 이들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죽음에 관해서 깊게 사색했다. 그들은 인간이 걷게 되는 죽음의 길에 대해 생각했고, 그 길이 닿는 저승세계를 그려보았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가진 영적인 능력 때문이었고, 이 능력을 수호신령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 영력으로 죽은 자들은 물론 이름을 알 수 없는 악령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샤먼은, 개인 혼령의 구제라는 명목 아래 민원에만 매달리는 요사이 무당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그들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세계의 근본을 탐구했고, 인류의 운명을 신에게 물었다.위대한 만큼 샤먼이 되기 위한 과정도 남달리 고통스러웠는데 샤먼이 되기 위해서는 유사임종, 즉 큰 병을 앓아야 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무병 인데, 이에 걸린 이는 샤먼이 되지 않으면 더욱더 큰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신 내림을 받은 강신무의 경우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절차이다. 다큐멘터리 에 등장하는 강신무는 내 몸뚱이 갖고 내 마음대로 못한다. 남들은 약 먹으면 낫지만… 하고 자신이 겪은 무병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친다.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현대 한국의 무속까지 공통적으로 발현하는 무병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갈린다. 한 개인의 영적인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현상이라는 것과 개인의 바깥에서 신령들이 아니면 저승에서 내보내는 질병이라는 것. 샤먼은 신 내림을 통하여 새로운 몸을 얻어 이승과 저승을,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오간다. 그런데 저승과 죽은 자를 만나는 일은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데, 산 자의 몸으로 이승에서 가능함은 언급한 대로 유사임종을 겪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다.솔직히 나는 별자리나 사주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위의 친구들이 재미로 사주를 봐주는 사주카페를 가거나 별자리별 수호석을 살 때도 나는 뒷전에서 물러나 있기 일쑤였다. 나에게 무속이나 미신은 심도 있는 학문으로 다가올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 는 색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2. 다큐멘터리 의 무속1) 고등종교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나'의 이야기부모님께서 독실한 기독교인 과계로 나는 상당히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왔다. 한 때 성경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던 기억도 있지만, 언제나 나는 '영성'보다는 '학습'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개신교에 대해 부족함을 느껴 몇 번이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무당은 미신의 영역 혹은 전통 학문의 영역이었다.다행히 진보적인 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불교, 토속종교, 유교 등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이지 않은 종교관을 갖게 되었고, 그런 영향 때문이었는지 나에게는 종교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무당은 종교를 벗어난 전통 혹은 풍습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다.나는 고등종교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개인의 현세구복적인 믿음을 뛰어넘어서 온 인류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자비가 있고, 공존이 있고, 평화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주로 소위 고등종교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등- 의 현재 부패한 모습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한동안 나의 이런 생각은 정당한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이런 생각은 다분히도 현세구복적인 믿음을 주 내용으로 하는 무속 신앙을 '미신'의 영역에 남겨두는 것 또한 정당화했다. 즉, 나는 고등종교 집합을 상정했고, 소위 고등종교들이 그것의 여집합으로 옮겨가려 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이고, 이는 어떤 원소를 애초에 그 여집합에 두는 오류를 낳은 것이다. 어쩌면 무당에 대한 우리(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행위를 허튼 짓으로 여기는가 하면, 그저 위안을 찾기 위한 몸부림 정도로 평가 절하를 하는가 하면, 그나마 조금 나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류학적 관심 이상의 것이 아니다.2) 우연히 를 보다내가 라는 제목을 본 것은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 카탈로그에서였다. 하지만, 내가 를 실제로 본 것은 정말 우연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을 보러 갔던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시간이 맞지를 않아 울며 겨자먹기로 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나는 무당을 다루었다고 하는 이 영화가 고작해야 '거만하게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는 재미없는 사실들만 나열하는 방송용 다큐멘터리' 수준을 아주 조금 넘어서는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쁘게 말하면 "한번 해보시지", 조금 좋게 말하면 인류학적 관심을 가지고 이 영화의 시작을 바라보았다.에서는 당골레 로 불리는 세습무와 점쟁이 라 하는 강신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진도 세습무 자매의 사별과정이 처음과 끝을 이룬 구조는 너무 절묘했다. 임종을 의도했을 리는 없을 터이고 길었던 기록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우연이라고 여기기에는 묘한 느낌이다. 그리고 강신무에 점점 밀려 자취를 감추는 세습무의 모습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한 가닥을 발견한다. 여러 자식이 있건만 아무에게도 굿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에서, 체메후에비 샤먼 차카라가 여섯 자녀에게 일렀다는 말이 생각난다. 난 너희들에게 영력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난 너희가 별 고통을 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기를 원한다.그렇지만 영적인 능력은 물려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동물처럼 조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에도 나오지만 강신무이자 세습무여서 어머니가 모시던 신령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도 있지만 샤머니즘의 유전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게다가 사람의 혼을 다루는 무당은 물건을 다루는 장인도 아니지 않은가. 감독의 세습무에 대한 집착과 애정은, 굿이라는 게 반드시 넋을 달래는 해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학과 놀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1. 들어가는 글서구문화권에 '줄리엣'이 있다면 한국에는 '춘향'이가 있다. 그녀는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여주인공이다. 문학뿐인가? 춘향은 극, 영화, 드라마 등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여주인공으로서 《춘향전》이라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한국 여성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춘향'을 중심으로 우리 문화사에서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여주인공들을 살폈다. 흥미로운 것은 '춘향'을 원형으로 하는 우리의 무수한 여주인공들이 다분히 의도와 조작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그녀가 우리 문화에 출현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한때는 봉건적 신분제에 저항하는 투사로, 한때는 지고지순한 사랑에 몸을 던지는 청순가련형의 여자로, 한때는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키는 봉건제 열녀로서, 물론 그 출현 방식의 빈번함 때문에 '춘향'이가 조명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만큼 우리 문화사에 그녀가 다양한 방식으로 합의하고 있는 의미가 간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혹 때문에 지금, 춘향에 대한 담론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우리 문화사에서 '춘향'이라는 여성이 지니는 이미지는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그래서 흥미롭고 중요하다. 투사이자 열녀, 신분상승에 성공한 하층 여성에 이르기까지 《춘향전》만에도 여러 모습의 춘향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춘향은 점차 시대의 필요와 요청에 따라 어느 한 면만 부각되거나 선택되어왔다.초기에는 '기생' 신분으로서 양반과의 금지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도발적인 모습이 부각되었다면, 근대로 올수록 양가집 규수로서 조신하고 순종적인 이미지로 모아졌다. 이광수 소설 《무정》의 박영채, 조중곤의 번안 소설 《장한몽》의 심순애, 1930년대 최고 히트 극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홍도가 그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우리 사회가 봉건제에서 근대화로 발전해오면서 가부장제와 근대화라는 메커니즘을 정당화하기 위해 '춘향'을 희생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현대에도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는 존재하고 있다. 비록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만큼 복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대 여성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2. 국민국가 형성단계의 여성문제 종속화한국의 근대는 갑오경장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에서의 여성운동이 최초로 시작된 것은 조선 후기 19세기 말엽으로 본다. 개화파와 독립협회의 여자교육론, 기독교 선교사들의 여학교 설립 등에 자극받은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초기 여성운동의 목표는 여성 교육권의 확보, 봉건 구습타파 등 조선사회의 억압적 질서를 바로 잡는 데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의 쇄국정책은 일제의 식민통치로 연결되었다. 국가의 독립을 염원하는 지식인, 종교인, 농민, 토착귀족들은 계급적 특성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의 종식을 위해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일 민족으로의 일체감은 외세의 침입으로 고양되었고, 근대화의 양 지주인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가운데 민족주의의 뿌리가 한층 깊이 내리게 되었다. 조선말엽 실학사상과 천주교, 동학운동 등의 영향으로 자각의식을 일깨우던 여성들은 운동의 목표를 개화로부터 구국으로 전환해야 했다. 개인의 자유와 안녕을 위한 사회운동은 구국적 저항운동에 힘을 보태야만 하였고, 여성만의 독자적인 문제제기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제의 탄압아래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여성들은 여성만의 문제의식을 느낄 겨를을 지니지 못했다 하겠다.3.1운동 등 여성의 저항정신은 남성과 다를 바 없었으며 인구의 절반 몫을 톡톡히 감당하였다. 여성이 독립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시민의식이 고취되고 자발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근대교육을 받은 여학생이 선두에 섰으나, 신분과 직업을 초월한 여성들의 대거참여로 여성들 간의 융화와 민족적 단결이 고무되었다. 그러나 이는 여성으로서의 문제를 의식하고 사회의식을 변혁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피압박민족으로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므로 1920년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띤 여성단체와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여성단체간의 분열도 여성문제를 핵심으로 보았다기보다는 피식민상태를 인지하는 정치적 이념의 격차로 인한 것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의 피식민경험은 여성문제를 제반 사회문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여성들의 독특한 위치와 문제의식은 민감하게 인식되지 못하였다.3. 생산에서 여성노동력의 배제1) 자본주의의 탄생성차별의 기원은 최소한 자본주의의 탄생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력 상품화'가 일반화되고 기계제대공업이 중심이 되는 산업사회로 발전하기 전에는 모든 필요한 물건을 집에서 만들어 물물교환으로 거래하는 자급자족경제로 생산과 소비가 모두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산업사회의 발달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자급자족형태의 가내수공업생산을 쇠퇴시키고 기계제를 중심의 생산을 일반화시켰다. 가정에서 공장으로 주요 생산영역의 이동으로 가정은 생산을 통한 잉여가치의 창출이라는 기능은 상실하고 단순히 소비만 하는 곳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여성들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생산노동에서 분리되어 소비 중심의 가사 역할만 담당하게 되었다. 여성은 가사의 전담자, 남성은 사회적 생산의 전담자란 성별 분업이 고정화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이다. 결국 산업사회는 여성에게 기본적으로 근로자로서의 위치를 부여하면서도 성별분업을 통해 가사의 전담자로 묶어 두어 이중 노동을 부담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가정이 담당하는 노동력재생산을 여성의 '사랑과 희생'이 전제된 가사노동으로 대체시켜 그 비용을 없앴다. 즉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임금에는 재생산 영역인 가정의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그러나 이때 여성을 남성에 기생하는 존재로 규정 내리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여성의 가사노동을 당연시 하는 이데올로기와 가족제도를 구축하여 사회적 생산에 핵심적으로 필요한 노동력 재생산을 각 개별 가정에서 여성이 '사랑과 모성,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보수 봉사 차원으로 전담하도록 강제하였다. 결국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서 여성의 가사노동력 부분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서 임금을 주축으로 한 생산비용을 최소화시켜 이윤의 극대화를 도모하였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제도가 성공적으로 발전하여 사회적인 당위성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2) 자본주의의 발전대량생산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사회의 생산력 증가는 여성노동력의 성별분업 고착화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즉, 생산수단의 발전에 의한 기계의 등장은 더 이상 남성의 근육이 필요하지 않게끔 함으로서 여성에게 생산참가의 기회를 주었고, 세탁기 인스턴트식품 등의 발전은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부담을 덜어주어 생산참가를 촉진했다. 또한 제한된 남성 중심의 노동시장에서 임금의 상승은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여 유휴노동력을 충분하게 만들어 임금 상승을 억제할 유인으로 작용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는 더욱 공고화된다.여성에게 '가사노동의 전담자'라는 지위를 부여하며, 생산현장에서는 남성노동을 돕는 부차적인 존재로 고착화시켜 남녀간에 임금에서의 월등한 차이를 정당화하고, 남성 노동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어, 여성근로자의 해고를 본래의 자리 즉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쯤으로 인식하도록 하여 여성에 대한 자유로운 해고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여타의 이유들로 여성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노동을 하면서도 남성의 임금에 기생하는 피부양자로서의 위치를 갖게 된다. 또한 '여성은 피부양자이므로 가장인 남성에게 복종하며 당연히 사랑과 헌신으로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 무보수로 노동력 재생산 노동을 전담하도록 강요한다.즉 여성은 남편이 '부양' 해주는 대가로 '사랑'이란 미명하에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가사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남녀차별을 제도화하는 기구와 구조, 제요인과 결부되어 생산현장의 여성을 남성의 발밑에 두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4. 출산, 육아의 여성전담우리나라의 남성들은 여성과 비교하여 독특하게 국방의 의무를 진다. 따라서 국가는 국방의 의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일정한 보상의 기회를 준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공무원임용시의 가산점수 제도'였다. 공무원 임용시험이란 것이 총점 1점에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인 것을 보면 가산점수는 사실상 여성에게 임용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 임용시의 가산점수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 국가적 의무 뒤에는 사회 국가적 보상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여성들은?바로 여기가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남성들이 국방의 의무를 질 때 여성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 보자. 현실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탄생과 양육은 여성들의 몫으로 지워진다. 남성들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함으로 인하여 사회에서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그러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2세의 양육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수행함에도 이것이 부가점수로 이어지기는커녕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오죽하면 아기를 가진 동시에 퇴사하는 것이 관례화 되었을까. 또한 어느 조사에서는 경제활동을 희망하는 가정주부의 60%이상이 자녀의 양육문제로 직장을 포기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여성의 양육이 사회화된 것은 출산과 양육의 사회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부여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자녀의 탄생과 양육에서 남성이 여성과 똑같은 양의 무게비중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1. 기녀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기녀는 천인신분이지만 합법적으로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엔터테이너로 자연히 남성사회의 관심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신분사회임에도 특별한 대우를 받아 양반 부녀자와 같이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었고,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와의 교제가 가능하였으며, 벼슬아치의 후실로 들어가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평생 남자들의 노리개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가치가 없게 되면 냉혹하게 버려지는 비운을 감수해야만 했다.그렇지만 개인의 외모와 재주에 따라 일신의 부귀는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의식주에 대해서는 오히려 사치스러웠다. 기녀들은 화려한 옷차림새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기녀의 머리모양은 보통 얹은머리로 크고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리고 기녀는 내외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므로 외출 시 낯을 가리지 않아도 되었고 장옷이나 쓰개치마는 미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사용하였다. 기녀들에게는 비단옷뿐만 아니라, 가죽신과 금, 은, 주, 옥의 각종 장신구 치장도 상류계층과 같이 허용되었다. 기녀는 그들이 상대하는 남성의 신분이 주로 중상류 계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권력을 배경으로 신분을 초월한 화려한 복식을 착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녀는 신분상으로는 천민이나, 다른 천민들의 복식과 달리 매우 화려하고 다양하였다. 기녀의 삶은 일반 부녀자들의 삶보다 분명 자유롭고 사치스러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기녀는 지역별로 특기가 있었는데 안동의 기녀는 유교의 유풍이 강하여 『대학』을 암송하였고, 관동기녀는 『관동별곡』을 잘했는데, 특히 영흥 출신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라고 하여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또한 기녀가 지배층의 오락을 위해 시, 노래, 서예, 그림 등을 잘하였다고 해서 돈에 쉽게 넘어가는 값싼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유명한 송도의 황진이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평양의 계월향과 진주의 논개, 한말의 매국노인 이지용의 거금을 거절한 진주의 산홍 등은 절개와 충정을 갖춘 기녀들이다. 하지만 기녀들에게도 삶은 고단한 것이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기녀의 시작은 돈벌이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나 엄격한 교육을 통해 그들은 문화를 전승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조선시대 관청에서 기녀를 교육하는 제도는 한말 일본의 침략이후 바뀌게 된다. 일제는 기녀들의 조합을 만든 뒤 서울과 평양에 기생학교를 세워 기녀들을 양성했다. 기생조합에서는 화대를 대신 받아주고 세금을 징수하였다. 기생학교에는 15~20세의 처녀들이 입학하여 기녀로서의 소양을 배웠다. 기생학교에서는 주로 가곡, 춤, 서예, 회화 등을 가르쳐 교양인으로서의 자질을 길러주었다. 이들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춤, 노래, 악기연주 등의 전수를 담당했던 예술가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 연예인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기녀들을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전통문화를 후대에 전달해 준 인간문화재인 것이다.2. 홍랑의 일생홍랑은 조선 중기 기생으로 함경도 홍원에서 출생하였다.선조 때 삼당시인 또는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불린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경성에 있을 때 사귀어 함께 살았다. 홍랑이 사랑했던 연인 최경창은 조선 선조 때의 시인으로, 당대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과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대 문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또한 율곡 이이는 최경창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하다고까지 평할 정도였다.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실치 않은 홍랑과 그녀의 시가 조선 중기의 것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빼어난 시인 최경창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왔기 때문이다.최경창이 한양으로 떠나자 함관령(咸關嶺)에서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냈다. 그 뒤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병으로 몸 져 눕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조정에 들어가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다. 때는 명종비의 죽음으로 국상기간, 더욱이 동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자리 잡던 시절이라 이들의 행각이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홍랑의 일로 파직 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이승에서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와 죽음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시작한다.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3.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조선 선조 임금 때 최경창은 호를 고죽이라 했는데, 선조 6년(1573)에 함경도 북도 평사가 되어 경성으로 가서 근무했다. 경성의 관기들은 얼굴이 예쁘고 가무에도 뛰어나 널리 소문이 나 있었는데, 풍류에 달통한 최경창이 그 속에 묻히게 되었으니, 기생들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최경창은 특히 당나라 시풍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삼당시인' 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기생들의 마음을 휘어잡기에 꼭 알맞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최경창은 곧 경성 기생 중에서 특별히 이름이 나 있던 홍랑과 깊은 사랑을 하였고, 홍랑은 최경창에게 기생으로서가 아닌 여인의 깊은 순정을 바치게 되었다.이듬해 따뜻한 봄날, 최경창은 관직이 바뀌어 서울로 돌아오게 되니, 홍낭은 작별을 아쉬워하며 쌍성에까지 따라왔다. 함관령 고개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픈 작별을 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궂은비가 내리고 또한 날도 저물어 어두워지면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홍랑은 최경창에게 안겨 헤어지기 아쉬워 몸부림을 치면서 눈물을 비 오듯 쏟아, 빗물과 눈물이 범벅되어 옷자락과 비단치마를 모두 적셨다. 이때 홍낭은 노래 1장을 지어 애끓는 간장을 실어 설움 겨운 목소리로 불러 드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묏버들 갈 것거......' 하는 시조이다.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손대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쇼셔밤비에 새 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최창경은 홍랑을 이별하고 떠나온 이듬해 봄, 병으로 자리에 누워서 그 해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홍랑은 소식을 들은 바로 그 날 집을 나서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밤낮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닿아 최경창을 만났다.그런데 이때는 함경도와 평안도 기생은 서울로 데리고 들어와 살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또 마침 명종 왕비 인순왕후의 사망으로 국상이 있었던 시기며 국론이 대립하던 시기라 홍랑은 고향인 경성으로 다시 돌려보내지고 최경창은 이 일로 파직 당한다.이때 홍랑은 나라의 법을 한없이 원망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길을 떠났는데, 최경창은 떠나는 홍랑에게 시 두 수를 지어 주었다.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相看脈脈贈幽蘭)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此去天涯幾日還)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하리?(莫唱咸關舊時曲)지금도 궂은비 내려 첩첩 산길 어둡겠지(至今雲雨暗靑山)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최경창은 객사했고, 홍랑은 최경창의 정부인과 가족들 몰래 그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며 무려 9년간이나 시묘를 살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를 챙겨들고 홍원으로 피난을 떠났다. 덕분에 그들의 시가 오늘날에도 전하게 되었고 그 후 그녀가 죽자 완고한 해주 최씨 가문에서 홍랑의 일부종사를 가상히 여겨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4. 여성으로서의 홍랑얼마 전 한 남성작가가 홍랑에 대해 쓴 글을 보았는데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페미니즘이 유행하는 현대에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지 궁금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구절을 보며 지극히 남성적인 입장에서 쓴 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해방을 뜻한다. 사회로부터의 여성해방, 가정으로부터의 여성해방. 그리고 여성자신으로부터의 여성해방이 페미니즘의 주요 골자이다.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여성의 해방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찾고 사회 안에서 권리를 보장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여성이 남성을 경멸하며 상위에 서거나 여성성을 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자신을 해방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히려 여성들은 이중의 혼란을 겪게 된다. 우선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부족은 페미니즘이 곧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며 혐오감과 위기의식을 드러낸다. 그들에게 있어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모여 그저 다다다 쏘아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하지만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홍랑의 삶을 평가하더라도 그녀에게 비판을 가할 여지는 없다. 최경창에 대한 정절과 희생은 홍랑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녀의 신분을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기녀 역시 남성 중심적 사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일반 부녀자들에 비해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남성작가가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홍란이 비난받을 것이라 예상하는 듯한 어조로 글을 마무리한 것은 현대 여성들이 말하는 여성해방을 여성들만의 섬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여성이 여성성을 버리고 가족과 사회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하지 않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히 여성을 배제시키고자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 들어가는 글 - 제한된 여성의 정치참여여성이 세계최초로 선거권을 획득한 나라는 뉴질랜드로 그것은 불과 110여 년 전인 1893년의 일이다. 그만큼 사회에서 여성이 대우받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최고의 민주주의 사회이며 이상적인 사회라 말하는 그리스나 로마도 여성에게는 선거권을 무여하지 않았고 정치적인 면에서 여성들은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이러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아직까지도 남아 여성의 인권이 크게 신장되었다는 지금도 사회저반에서 여성의 힘은 남성에 비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경우일 때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지만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더 지나친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학력과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여성은 남성보다 적은 연봉을 받으며 여성은 실력보다 외모라는 생각이 사회 깊숙이 스며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러한 차별이 당연한 것으로 묵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고 나아가 정치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여성과 정치가 동떨어진 이야기이던 시대는 지났다. 과거 여성의 정치참여는 어떤 형태를 띠었으며 어떤 모습을 발전했는가? 현대의 여성의 정치참여는 어떤 모습일까?2. 고대의 여성의 권력물론 구석기 시대에는 여성을 중심으로 부족이 운영되었으며 그들의 권한이 강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사회가 발달된 형태로 바뀌면서 여성 중심의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로 변했고 한때는 철저히 무시되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힘이 강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일까?문득 여성의 권력이 강했음을 볼 수 있는 제도가 여왕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왕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눈에 띄는 드믄 존재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직 신라시대에만 여왕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 시대의 여왕이 갖는 의미는 당시 여성의 권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고대국가의 것은 영토와 국민을 통합하는 일이다. 이중 후자는 중요하면서 어려운 일인데 국민을 성공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했고 당시 삼국에는 불교, 유교가 전래되었지만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이러한 종교나 문물의 전래가 늦었다. 간단히 말하면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교의 전래가 늦었고 그로 인해 당연히 여성의 권리가 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의 여왕이 통일 이전에만 존재했다는 것에서 증명할 수 있다. 통일 이후 당나라의 문명을 급속히 받아들이면서 신라에 유교가 급속히 수용되었고 여성의 권력이 낮아지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성의 권력은 비대해져 갔다. 신라 여왕의 존재는 그 당시 여성의 권력이 거대한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인 것이다.하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느꼈다. 신라가 선진문물인 유교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낙후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면 선진국가란 여성의 지위가 낮은 국가란 말인가?물론 신라시대의 여왕의 존재는 골품제라는 강력한 신분제사회였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록을 보면 신라시대 여왕의 통치과정에서도 여성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식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나 크게 대두되지 못한 것으로 봐 골품제가 신라 사회 전반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신분제도인지 알 수 있다.3.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까닭한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여왕은 단지 3명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도 몇 명의 여왕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유럽에는 상당수의 여왕이 존재하고 현재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현존하는 여왕이다. 그러나 한국의 왕조에서는 신라 외에는 전혀 여왕이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의 여권이 다른 왕조보다 높아서였을까? 신라 여왕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일반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그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 의한 설명만이 가능한데 이 역시도 다른 왕조에도 이황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신라의 특수한 사정에 맞춰 굳이 여왕의 존재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다. 골품에 의해 생활양식, 관직 진출의 한계, 의복이 규율되는 사회였다. 그러나 골품제 내부의 동족 간 혼인에 의해 우성학적으로 후손이 점차로 소멸해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대를 이을 성골 출신의 남자가 한명도 없는 극단적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이때 나타나는 첫여왕이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아들이 없자 유일한 성골 출신인 그녀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선덕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이 구축한 강력한 왕권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그 뒤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등 신귀족 세력의 뒷받침이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없었다면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왕위를 지키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즉 신라의 여왕은 과도기적인 정치 상황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선덕여왕도 국왕으로써의 전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한 국왕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녀의 주변에는 신귀족 세력으로 대표되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 세력의 후원을 등에 업은 불확실하면서도 과도기적이고 임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선덕 여왕 재위 시절에는 반란이 여러 차례 발생하는데 정통 성골 출신이 도태됨으로써 발생한 권력의 공백 현상을 채우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즉 비담으로 대표되는 구귀족과 김춘추 김유신 중심의 신귀족 세력의 대립이었다. 신귀족은 여왕의 존립을 지키면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구귀족은 여왕의 정부를 타도함으로써 그들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갈등 상황에서 발생한 반란이 비담의 난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에게 유리했던 전세가 김유신에 의해 진압군 쪽에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우연하게도 선덕여왕은 죽음 을 맞이하였다.선덕여왕의 뒤를 이어서 진덕여왕이 즉위했는데, 진덕여왕은 실질적인 통치 행위를 전혀 하지 못했다. 다만 왕으로서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위엄을 빌려주는 역할을 수적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는 실질적 왕권의 쇠퇴기였고 그러한 과도기적 상황을 대체할 고대국가 특유의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왕위는 김춘추(태종무열왕)가 물려받게 되었다. 이로써 성골 출신이 왕위에 오르던 시대가 끝나고 진골 출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즉 무열왕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렇게 무열왕계로 왕계가 바뀌는 과정에서 여왕은 과도기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또 다른 여왕인 진성여왕의 사례를 살펴보자. 진성여왕은 신라말기 어수선한 시기에 왕이 되어 실질적 정사는 각간 위홍이 담당하고 그녀는 국왕이라는 정통성을 위홍에게 실어줌으로써 국왕의 역할을 했을 뿐 실질적으로 정사는 돌보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정신적, 육체적 지주였던 각간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서둘러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효공왕은 먼저 왕위에 올랐던 오빠 헌강왕의 서자였다. 진성여왕에게는 조카가 되는 셈이었다. 진성여왕은 어린 조카를 데려다가 왕실에서 키우면서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조카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여왕으로 있었다. 그리고 조카가 대략 15세 정도가 되어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되자 서둘러 왕위를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즉 그녀는 아버지 경문왕의 가문을 이을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왕위에 있었던 셈이다.당시 신라인들이나 중국대륙에서도 여자가 왕으로 있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무시하는 태도가 자주 나타난다. 결국 여왕은 두 정치 세력이 대립하는 미묘한 시점이나, 다음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시기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선덕여황과 진덕여왕은 무열계로 왕위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진성여왕은 조카 효공왕이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왕위를 지켰다. 여왕이 있었다고 해서 신라를 여자의 지위가 특별히 높았던 사회로 볼 수는 없지만, 왕위 계승에서도 여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현재보다 발달된. 여성정치의 필요성정보사회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미래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의 의식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수직적인 사고보다는 수평적인 사고를, 고정적인 사고보다는 유연한 사고를, 폐쇄적인 행동양식에서 개방적인 행동양식으로, 획일적인 사고에서 다양한 사고로 변화해 가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가 새로운 가치로 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칙보다는 자기결정의 가치로, 복종에서 참여로, 계급적인 위계질서에서 팀 중심으로, 권력중심에서 타협중심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사회적인 능력과 지도 스타일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결국 미래사회의 관리자로서 여성의 리더십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여성의 리더수비의 특징은 명령과 통제보다는 도움을 주는 타입이고, 개방적이고 신의가 있고 이해심이 많다. 남성은 꼭대기에 위치하려는데 비해 여성은 한가운데 위치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리더십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여성 이 남성보다 더 미래사회의 관리자로 적합하다는 것이다.여성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면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여성은 남성보다 불의에 더 민감한 편이다. 정의롭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약자에 대한 보호에 관심이 많다. 모든 여성은 본능적으로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 불쌍한 사람,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강자만이 판치는 세상에 항변을 할 수 있을 것이다.여성은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 대립적이기보다는 협력적인 분위기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여성은 좀더 민주적이고 친밀하며 협력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남성중심의 과격하고 위협적인 정치행태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는 실제 외국의 예를 통해 증명이 되고 있다. 노르웨이, 스웨덴 등 이미 여성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진 북유럽국가에서 이런 여성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국민을 위한 깨끗하고 맑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