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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과 우리의 식문화
    쌀과 우리의 식문화음식이 외모에 영향을 끼친다? 과거 우리 조상님들에 비해 현재의 우리들의 얼굴은 서구식으로 바뀐 식습관으로 인해 눈꼬리는 쳐지고 광대뼈와 턱선은 부드러워졌다. 과거에 비해 1/3로 줄어든 식사량은 턱의 발달을 억제했고 지금의 서양인과 비슷한 이목구비를 지니게 만들었다. 내적으로도 우리의 장은 서구인에 비해 평균 30%가 긴데 이는 육류보다는 곡류를 주로 섭취했기 때문이다. 부패하기가 쉽고 독소가 배출되는 육류는 빨리 내보내야 하지만 곡류에서 영양분을 다 흡수하려면 음식물이 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야 하기 때문에 장의 길이 차이가 생긴 것이다.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던 과거에는 중노동인 농사일을 하기위해 지금보다 많은 열량 (성인 평균 하루 3600~4000kcal)이 필요했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모자란 밥을 채우기 위해 감자나 옥수수 등 각 지역의 산물을 이용해 부족한 열량을 공급받았다.이러한 식량사정은 해방 후 얼마까지도 계속 되었는데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을 무상으로 공급받으면서 우리 식생활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쌀이 귀했던 그 시절에는 혼식과 분식이 장려되었으며 라면의 보급도 이와 시대를 같이한다.역사적으로 쌀의 재배를 살펴보자면 2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서 그 시작을 짐작할 수 있다. 삼한시대 유적지에서 탄화콩, 탄화팥, 탄화보리와 함께 탄화미가 발견되어 벼농사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 벽화에서도 벼농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우리나라에 쌀문화가 들어온 경로는 인도 - 동남아 - 양자강 유역을 거쳐 왔다는 인도설과 중국에서 넘어왔다는 중국설이 있다. 벼농사는 나라의 기후에 영향을 받는데 열대우림 지역인 동남아에서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1년에 2~3번의 경작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노력과 손길이 닿고서도 1년에 한번밖에 추수 하지 못한다.쌀의 종류에는 크게 자포니카와 인디카로 나눌 수 있는데 길고 가느다란 인디카는 주로 동남아에서 재배되며 둥글고 짧은 자포니카는 우리나라에서 주로 재배하는 품종이다. 두 쌀은 맛은 물론 구성성분 또한 다른데 기후와 재배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우리나라에서는 자포니카를 재배하지만 전세계적으로는 인디카가 주로 재배된다. 쌀알에 윤기가 없고 찰기가 적어 쉽게 날리는 인디카와는 달리 찰지고 윤기가 흐르는 자포니카가 우리의 입맛에 잘 맞는다.같은 벼이지만 기후와 짓는 방법의 차이로 먹는 방법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수분이 적고 알알이 흩어지는 인디카의 경우 숟가락 보다는 손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밥을 짓는 도구에 따라 밥의 형태도 차이가 생기는데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와 갈돌은 당시의 밥의 형태가 죽에 가까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흙냄새가 베이는 토기와는 달리 고구려 시대의 시루는 떡과 같은 형태로 흙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천마총에서 발견된 쇠솥은 지금과 같은 밥의 형태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도구도 진화하며 계량된 도구는 밥 짓는 방법에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잘 지은 밥은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우며 향긋한 내음이 난다고 하는데 우리의 질 좋은 쌀과 맛있는 밥은 그 명성이 일본과 중국으로까지 퍼졌다고 한다. 맛있는 밥을 짓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먼저 잘 씻은 쌀을 30분간 불리는 것인데 이는 수분이 쌀 안까지 흡수돼서 안쪽까지 고르게 익은 밥을 짓기 위한 것이다.다음으로는 물의 양을 적당히 조절해야 하는데 햅쌀과 묵은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손을 펴서 바닥에 닿게 했을 때 손등위로 물이 차는 정도로 맞추면 된다.첫불을 세게 때고 은은한 불로 15분간 뜸을 들이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데, 뜸은 적당한 수분과 경도의 부드럽고 찰진 밥을 만들어준다.밥을 지을 때 가마솥을 사용하면 두껍고 둥그런 밑바닥과 넓은 표면적으로 인해 솥 내부에 고르게 열을 가하고 무거운 솥뚜껑은 적당한 압력과 알맞은 온도를 조절해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다.밥은 끼니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고 무슨 음식과도 어울려 영양학적 캔버스라 불리며 최근 그 가치를 다시 한번 입증 받고 있다.
    생활/환경| 2006.09.28| 2페이지| 1,000원| 조회(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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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을 읽고
    을 읽고‘예술작품은 작가의 삶 그 자체이다.’ 라는 말이 있다. 예술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작가의 성장 환경과 시대적 상황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작가의 표현과 이야기이자, 감정과 세계관의 결과물인 예술 작품에는 자연히 작가의 삶과 시대적 배경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그림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시작을 같이 한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의 벽화를 보면 그 의미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만 오천년 전의 유적에서 발견 된 이 그림들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수렵과 채집이 주를 이루던 구석기 시대까지만 해도 사냥은 무척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창이 꽂히고 옆구리가 찢어진 소의 그림은 사냥이 잘되기를 바라며 그렸던 주술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사냥 나간 남편의 무사한 귀환을 바라며 그렸던 그림. 혹은 내일 사냥에서 좀더 용맹하게 많은 수확물을 거두기를 다짐하면서 그렸던 그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투탕카멘은 ‘파라오의 저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집트의 왕이다. 투탕카멘왕의 무덤 발굴에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인데, 왕과 함께 묻혔던 과일이나 야채가 수십 세기를 두고 썩어가면서 만들어진 곰팡이가 그 원인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미스테리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화려하고 찬란했던 이집트 왕조의 시대를 가늠할 수 있었다.한 나라의 민족성과 문화는 그 나라의 지리적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륙으로 이어져있는 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와 사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 일본의 차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지리적 요인이 국민성과 나라의 역사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섬나라인 아일랜드는 대륙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한번도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적이 없었을 뿐더러 게르만족의 침입도 받은 적이 없어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할 수 있었다. 지리상이 고립이 만든 순수의 결정체는 미술작품으로 결실을 맺어 나 장식 삽화 등에서 그 특색을 살펴 볼 수 있다.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과 장식들은 켈트인들 특유의 생활과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중세 시대의 교황의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도 황제권과 교황권의 다툼이 결국 교황의 승리로 돌아간 사건이었다. 눈 내리는 카노사의 성문 밖에서 교황에게 3일간 용서를 빌었던 이 일은 당시 교황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황제는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고, 용서 받은 황제는 독일로 돌아가 결국 로마를 침공해 망명 중이었던 교황을 죽음으로 내몬다.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데 실제로 보았을 때의 감동은 숭고와 경건을 동반할 것 같다.보스의 라는 작품을 보면서는 지옥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가져 보았다. 무지몽매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지옥이라는 공간을 설정해놓고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독점 하려던 일부 성직자들의 탐욕이 얄밉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인간의 무지와 탐욕을 보여주면서 중세 시대 사람들의 시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아마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인을 꼽으라면 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알 듯 말 듯한 표정에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은은한 미소. 영국 BBC 방송에는 모나리자를 똑바로 쳐다보면 신비한 미소가 사라지지만 눈 등 다른 부분을 보면 미소가 뚜렷해진다며 모나리자의 미소가 보는 각도에 따라 사라지는 것은 눈이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 비롯된 것이라는 재미있는 정보를 발표하기도 했다.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은 역시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있다. 신의 피조물로써의 인간이 아닌 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 것이다.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화가이자 조각가, 과학자, 기술자, 철학자이기도 한 다 빈치는 다방면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 하였고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무성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던 전인적 교양과 인격을 갖춘 창조적인 인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자 인재 - 천재 -인 것이다.‘태양왕’ 루이 14세는 그 명성에 걸맞게 절대왕정 시대를 대표하는 전제군주였다. 그 유명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절대주의 시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한 마디이기도 하다. 인부 2만 2천명과 말 3천 마리가 동원되어 50년간 긴 공사를 통해 탄생한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궁전에는 5,000명의 신하가 거주하였으며, 그중에 500명이 왕 한 사람을 위해서만 봉사하였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임을 가늠 할 수 있다. 흰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꼬고 황금 지팡이를 쥐고 서있는 루이 14세의 초상화에서 느끼는 감정은 ‘의외로 볼품없음’ 이었다. 그 때와 지금의 미적 감각이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왕의 위엄과 권위 보다는 빨간 구두를 신고 퍼머한 머리를 한 그저 그런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라니. ‘한 작품을 보고도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혁명은 피를 부른다. 프랑스 혁명에서 기요틴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피와 공포정치로써 혁명은 완성되었다. 이 무시무시한 혁명의 풍경을 길레이는 로 그려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과 내가 알고 있던 짧은 지식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프랑스 혁명에는 많은 의의가 있겠지만 왕과 일부 귀족들에서 부르주아에게로의 권력 이양이라는 성격이 너무 짙은 것 같아 피를 동반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들라크루아의 도 적인지 전우인지 모를 시체들을 넘어 가면서 이룬 혁명이란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인문/어학| 2005.03.01| 3페이지| 1,000원| 조회(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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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선음식 - 식약동원(藥食同源)을 중심으로 - 평가A+최고예요
    1. 약선음식이란?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 세 가지를 꼽아 의식주라고 부른다. 의식주 중에서도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식. 먹는 것이다. 또 우리가 일생 동안 먹는 음식물의 양이 무려 27톤)이나 된다고 하니 먹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얼마 전에 방영했던 MBC 드라마 에서 주인공인 장금은 의녀이기 전에 훌륭한 요리사였다. 당뇨(소갈)를 앓고 있던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소박한 음식으로 병을 치유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는 예로부터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 하여 좋은 음식은 약과 같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먹는 것이 바르지 못하면 병이 생기고, 병이 생겨도 식(食)을 바르게 하면 병이 낫는다.'는 약식동원의 개념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통용되는 것이다.약식동원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약선음식이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중국의 오랜 식문화에서 발생된 한방요리로서 한의학의 이론에 근거하며 생약이나 그 밖의 약용가치가 높은 먹거리를 잘 조합하여 조리한 전통적인 영양식이다.근대 영양학이 식품을 영양소만으로 평가하여 왔으나 전통영양학이라 할 수 있는 약선에서는 영양학 이외에 식품 속에 숨어 있는 커다란 효능, 즉 약용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약선의 학문은 중국에서 약선학(藥膳學)이라든가 식료학(食療學)이라는 학문이 성향하고 있다. 침술이나 도인과 같이 약선은 한의학의 한 분야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약선학이란 중국의 약학의 전통적인 "식료(食料)"를 기초로 하여 이를 발굴, 계승하여 발전시켜 국방법, 약물과 식품의 성질을 연구하여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통 절래 식료와 식양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약선에는 병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식료'와 병을 예방하려는 '식양(食養)'의 두 가지 면이 있다.2. 약선의 효능(1) 먹거리의 약성(藥性) : 몸을 덥게 해 설탕, 땅콩기름 등이 이에 속한다.자연현상으로 가을과 겨울에는 온열성 식품을 많이 먹게 되고 봄과 여름에는 한량성 식품을 즐기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다.(2) 먹거리의 오미(五味) : 맛에 따라 효능이 변한다.음식에는 크게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 가지의 맛이 있다. 식품에 따라서는 몇 가지 맛이 복합된 맛을 지닌 것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전통 영양학에서는 식품의 맛 그 자체에 그 효능을 인정하고 있다.단맛을 가진 식품은 비(脾)에 작용하며 비장을 보양한다. 또 위의 긴장을 완화하여 통증을 없애고 몸이 쇠약한 것을 보양하고 자양강장의 작용을 한다.신맛을 가진 식품은 간에 작용하여 간을 보양한다. 지나치게 나가는 것을 억제하여 근육을 수축하는 작용이 있어 소염, 잘 때 흘리는 땀, 만성설사, 빈노, 유정(遺精)등에 효과적이다. 그러나 이들 식품을 과식하면 그 수축작용으로 인하여 몸 안의 발산을 방해한다.쓴맛의 식품은 심(心)에 작용하여 심을 보양한다. 몸의 열을 없애고 습기를 제거하는 작용이나 강하작용을 하여 몸을 가뿐하게 한다. 그러나 과식하면 양기를 잃게 된다.매운맛의 식품을 폐에 작용하여 폐를 보양한다. 또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기혈(氣血)의 순환을 좋게 하여 멈춰있는 것을 발산시켜 주는 작용이 있어 감기 등에 효력이 있다.짠 식품은 신(腎)에 작용하여 신을 보양한다. 또 응어리를 연화시키는 작용이 있어 변비, 임파선종창에 효력이 있다. 그러나 과식하면 신의 정력이 약해진다.(3) 먹거리의 보성(補性)과 사성(瀉性)"보성"이란 허(虛)한 체질에 대응하여 몸의 생리기능의 쇠퇴나 부족을 보충하는 작용을 한다. 허약한 체질이나 빈혈, 소화불량 등에 선택되는 식품이다."사성"이란 실(實)한 체질에 대응하여 몸의 여분을 제거하는 작용을 한다. 변비, 수분대사, 비만 등에 효과적인 식품이다. 겉껍질이 단단한 곡물, 섬유질이나 수분이 많은 야채나 과일, 버섯류, 해조류, 차, 커피, 소금, 간장, 식초 등은 사성이 강한 식품이다.3. 약선의 장 오래된 약선의 전문서적은 당(唐)나라 때 손사막(孫思邈)이라는 명의가 쓴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이다. 그 중에는 이미 "식치(食治)"라는 전문 편(篇)이 있다. 손사막의 제자인 맹선(孟詵)은 '천금식치(千金食治)'를 기초로 하여 거기에 약이 되는 식품을 214종이나 더하여 약선의 처방만 138종이나 실은 '보양방(補養方)' 이란 책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맹선의 제자 장정인(張鼎人)은 다시 이 '보양방'을 증보개편하여 '식료본초(食料本草)'라는 결정판을 내놓았다.당조(唐朝)시대의 구은(咎殷)은 '식의심경(食醫心鏡)'을 남당(南唐)시대의 진사량(陳士良)은 '식성본초(食性本草)'를 썼는데 먹거리의 성미(性味), 효능, 용법, 용량까지 비교적 자세히 적어 약선에 의한 치료방법을 발전 시켰다 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송조(宋朝)시대에는 왕회은(王懷隱)이 이론과 처방을 함께 쓴 전문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을 저술했는데 그 중 "식치문(食治文)" 부문에선 28종류의 병에 관한 약선을 통한 치료방법이 실려 있다. 이를테면 잉어죽과 검은 콩죽으로 부종을 치료하고 우유로 당뇨병을 치료한다는 것 등이다.그리고 현존하는 약선에 의한 노인병 치료의 가장 오래 된 전문서는 진직(陳直)이 쓴 '양노봉친서(養老奉親書)'이다. 약선의 처방을 160여 가지나 들었으며 "노인의 병은 먼저 먹거리로 치료할 일이며 먹거리로 고치지 못했을 때 약을 쓴다." 고 지적했다. 이 때부터 노인병의 예방과 치료는 약선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4. 약선의 특징약선은 '약식동원(藥食同源)'의 기본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唐)나라 때 고종(高宗)의 명을 받고 양상선(楊上善)이 편찬한 '황제내경태소(黃帝內徑太素)'에는 "오곡(五穀), 오과(五果), 오축(五畜), 오채(五菜)를 사용하여 굶주림에 충당할 때는 이것을 식(食)이라 하고 이것으로 병을 고칠 때는 약이라 한다." 는 구절이 있다.그리고 중국의 가장 오래 된 약물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약선의 바이블 같은 책인데 3활에서 섭취하는 먹거리의 전부가 망라되어 일일이 그 효능이 기록되어 있다.5. 우리나라의 약선음식좁은 의미에서의 약선음식은 한약재 등을 사용한 음식을 뜻하지만 식약동원의 개념으로 먹는 것이 즉 약이 될 수 있다는 넓은 의미로 파악하자면 궁중의 보양음식은 물론 서민들의 밥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김치와 장류 등의 전통 음식들도 포함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약선이 공식적인 한의의 기법에 포함되지 않지만, 여름에 보신용으로 먹는 삼계탕이나 출산 후 산부의 음식에 각종 약초를 쓰는 것은 약선의 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제철에 나는 신선하고 영양가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체질에 맞는 요리법으로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약선음식은 물론 바람직한 식습관의 가장 기본이다.약선음식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음식 신선로, 오곡밥, 청국장 등을 살펴 볼 수 있다.ㄱ) 신선로신선로는 민간에 전해진 궁중음식 중 가장 대표적이고, 자랑할만한 음식이다. 그릇부터 색다른 신선로는 음식을 맛보기도 전에 먼저 분위기에 취하게 된다. 신선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조의 선비 정희량이 산천을 유람하며 쓰던 그릇이라 신선로라 불렀단 이야기가 있고, 새로 만들었다 해서 신선로란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선로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는데, 들어가는 재료도 많고 그릇도 흔하지 않아 궁중에서는 연회때, 일반 서민들은 잔치 때나 만들어 먹었다.신선로는 화통이 가운데 있어 그 속에 숯불을 넣고, 그릇 가장자리에 채소, 고기 등 많은 재료를 돌려 화려하게 담아 호도, 잣, 은행으로 고명을 얹어 장국을 부어서 끓여 먹는 탕의 일종으로 갖은 재료와 정성을 다해 만든 귀한 음식이니 열구자탕이라고도 한다. 곧 입을 즐겁게 해주는 탕이라는 것이니 그 맛의 우수성이 최고이다. 또한 음식 궁합으로 볼 때 육류와 채소의 절묘한 조화로 건강식의 으뜸이다. 고명으로 들어가는 견과류(호두, 잣, 은행 등)는 성인병 예방과 스태미너에 매우 좋기 쉬운 단백질을 공급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각종 효소 작용으로 콩 성분이 분해 되어 소화성이 우수하다. 발효가 일어나면서 대두에 없었던 새로운 물질들이 생긴다. 발효 중에 특히 비타민 B₂의 증가가 현저하여 원료에 비해 5~10배로 증가한다. 청국장의 발효가 끝난 콩을 납두라 하는데, 이것은 혈전증 치료제로 쓰인다. 청국장은 콩 자체보다 소화율에서도 우수하고 영양 효율성도 높다. 그러므로 콩을 가장 효과적으로 먹는 방법인 장류는 우리 조상들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6. 기타 약선음식(1) 약죽한방약과 쌀·조 같은 곡식을 묽게 쑨 죽을 말하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방약죽은 특히 소화기능이 약해진 노인들의 건강식으로 좋다. 약죽에 사용하는 약재는 오랫동안 민간에서 사용하여 안전성이 확인된 것으로 몸에 해로운 자극성이나 독성이 없어, 원기를 왕성하게 하고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또한 한방 약죽은 의사가 처방하는 치료약과는 달리 병을 사전에 예방하는데 목적이 있다.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죽을 먹는 일, 또 노인이 되면 약죽을 먹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왔다. 죽의 종류도 많아서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각각 다른 죽을 먹었다. 봄에는 채소죽, 여름에는 녹두죽, 가을에는 연근죽, 겨울에는 양고기죽을 먹어 건강한 사람은 물론 모두가 약죽을 즐겼다.(2) 약차주로 한약재를 이용한 전차(煎茶)로써 일종의 탕약(湯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약효가 있는 풀이나 나뭇잎, 꽃, 열매, 뿌리, 씨앗 등을 물에 달이거나 담궈 유효성분을 우려낸 후 마시는 차이다. 탕약과 약차를 구별하기는 매우 모호하며 한방에서는 달이는 약을 탕(湯), 전(煎), 음(飮), 차(茶)등으로 처방명에 붙이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그 의미는 같은 것이다.탕약과 약차를 굳이 구분해 본다면 탕약은 치료에 목적이 있고 약차는 건강증진과 예방에 쓰인다. 또한 탕약은 진하게 달여 마신다면 약차는 묽게 달여 마신다.탕약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조제하여 엄격한 .
    자연과학| 2005.03.01| 8페이지| 1,000원| 조회(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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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영향 평가A좋아요
    바우하우스의 어원바우하우스(Bauhaus)란 건축을 위한 집, 건축가들의 집이란 뜻으로 '집을 짓는다.' 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구성하는 단어의 도치하여 만들어졌다.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이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있듯이 바우하우스 역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의 준비기간이 드러나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바우하우스의 창시자 그리피우스의 선언문에는 두 가지의 기본 이념이 표명되어 있다. 그 하나는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미술활동을 종합하여 회화?조각?건축이 일체가 되는 종합예술을 창조한다는 생각이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술의 기초는 손 재주에 있기 때문에 미술가는 모두 수공예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이념을 사상사적으로 본다면 이미 전세기부터 일부 예술가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었기 때문에 별로 새로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19세기 예술의 동향을 요약하면 예술은 그 자체의 자율성과 순수성의 달성을 목표로 해서 전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은 종교나 정치 및 도덕 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세계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래서 예술의 각 분야는 그 자체와 관계없는 외적요소를 추방하고 각기 고유의 표현영역을 탐구했다. 다시 말해, 건축은 회화적?조각적 요소를, 회화는 건축적?회화적 요소를 각각 추방해 버린다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서로 분리되고 전문화 되어서 결국에는 각기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술이 생성하는 토양인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그 결과 실제생활의 토대를 잃고 고립화?비소화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예술가들 사이에 모든 예술을 하나로 통합해서 하나의 대예술을 다시 창조하려는 욕구가 간헐적으로 나타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술활동은 건축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왔다. 말하자면 건축은 각 시대마다 중심문화의 꽃들을 피워 온 것이다. 이와 같은 장엄한 예술의 창조에 대해서 예술가들은 꾸준한 동경을 품어 왔었다. 예를 들면 음악 분야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는 일찍이 ‘종합예술’을 주창하고 음악과 연극 및 미술이 하나가 된 작품을 제작한 바 있었다.그리고 19세기의 미술이 겪었던 커다란 변혁의 원인은 생산기술의 진보에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산업혁명을 고비로 생산기술은 수공기술에서 기계기술로 크게 발전했다. 미술은 본래 미적 형상을 생산하는 기술인데, 그 중에서도 건축이나 공예 같은 실용미술은 그 본질을 생산기술에 두고 있다. 따라서 기술 혁신의 영향을 곧바로 받은 것이 건축과 공예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수공과 기계와의 괴리에 직면하여 건축가 및 공예가가 선택해야 할 길은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두 가지밖에 없었다.즉, 기계기술을 인정하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끝까지 두 번째의 수공 기술을 고집하는 것뿐이었다.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이다. 모리스는 러스킨의 저서를 통해서 그리고 본인이 여행에서 직접 견문한 중세 건축미에 크게 감동했다.13세기 유럽의 직인 노동은 일종의 즐거움이엇다. 그들이 만든 일용품은 모두 많은 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회화?조각?건축?공예 등의 장르별 구별이 없었다. 이에 반해 근대에 이르면 예술지상주의가 풍미하여 공예는 두드러지게 그 지위가 격하 되었고 추악한 기계공업 제품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이러한 현상에 반기를 든 모리스는 훌륭한 수공예품을 제작하기 위해 몇몇 친구들과 공동으로 1861년에 ‘모리스?마샬?포크너 상회’를 설립하여, 이른바 수공예 부흥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바우하우스의 이념이 수공예를 중요시하는 모리스의 이상을 이어받고 있음은 명백하다.바우하우스 생산의 원칙바우하우스는 간단한 가재도구로부터 조립식 주택에 이르기까지의 현대적인 주거 발전에 공헌하였다. 바우하우스는 가옥과 주거의 도구가 서로 유의적인 관계에 있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 형태, 기술, 경제의 영역에 있어서 - 이론과 실제에 의한 시스매틱한 실험작업을 통하여 모든 물품의 형태를 그 기능과 제약으로부터 찾아내었다.물건은 그 본질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의 그릇, 의자, 가옥과 같은 물건을 정말 기능적으로 작용하도록 조형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본질을 탐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물건은 그 목적을 실현해야할 즉, 그 모든 기능을 만족시키며 단단하고 값이 싸며 그리고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본질탐구의 결과, 현대적인 제조방법, 구조, 재료의 전부를 정확하게 고려함으로써 관습에서 탈피한 종종 드물고 의외적인 효과를 초래하는 형태가 생기는 것이었다.이에 대하여 모두를 희생시켜 새로운 형태를 구하는 것은 그것이 내용 자체에서 나오지 않는 한, -창작적이고, 역사적이었거나 - 순수하게 장식 형태의 사용과 같이 부적당하다고 여겼다.왜냐하면 물건을 “아름답게” 조형할 수 있느냐 어떠냐하는 것은 유기체로서의 물품을 구성하고 있는 경제적, 기술적 형식적인 완전한 조건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조형하는 인간이 조형되는 사물의 부피, 소재, 색채등 모든 관계를 질서있게 지키는 방법에 따라 사물에 특징이 있는 용모를 창작할 수가 있었다.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기술, 새로운 재료나 새로운 구조의 발명과 항상 관련을 유지함으로써 비로소, 조형하는 개인은 현대와 전통과의 생생한 관계를 만들어 내며, 거기에서 새로운 일에 대한 신념을 전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바우하우스 공방의 생산이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계와 탈것(교통기관)의 생생한 환경을 단호하게 긍정할 것.* 사물을 현대에 결부시킨 고유한 법칙에서 로맨틱한 미화나 높이가 아니고, 유기적으로조형할 것.* 누구나 알 수 있는 전형적인 기본형태와 기본적 색채에 국한할 것.* 다양성 속의 단순성, 공간, 시간, 비용을 절약할 것.바우하우스의 영향바우하우스는 현재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대량생산과 기술에 의한 무정부상태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고 인간본래의 자세를 회복시킴으로서 인류가 기술에 의해 노예화 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있다. 이것은 공업생산을 위해서 디자인된 제품과 건물을 의미한다.
    예체능| 2005.03.01| 5페이지| 1,000원| 조회(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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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다이즘 평가A좋아요
    다다이즘의 배경1914년을 강타한 중대한 사건은 전쟁이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자진해서 군대에 입대하였으며 부모나 부인들도 기꺼이 그들을 전쟁터로 보냈다. 전쟁이 고무적이며 확신에 찬 애국적 경험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며, 수치스러운 살육의 시기가 날카롭게 비난받기 시작함에 따라 살인적인 전쟁을 자본주의 체제와 이에 근거한 정부 및 사회구조가 실패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났다.전쟁은 인간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류 문명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더욱 편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위치로 전진 해왔지만 전쟁은 이 모든것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파괴해 버렸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후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시달렸던 지구촌 곳곳의 예술세계는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다다는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온 유럽을 급속히 전염 시켰고 결국 현대미술에 흐름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시작 되었건 결국 전쟁을 야기하는 하나의 보조적 가치를 지녔음으로 아주 나쁜 문명이라고 주장 하였고 이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갖도록 한것이다.1914년에서 시작하여 1918년까지 계속되는 전쟁은 이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지적, 문화적, 사회적 체계를 붕괴시키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다는 세계대전의 불안감이 인류의 심리를 지배 하면서 그 이전의 문명과 사회체제를 부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급속도로 발전한 산업과 기계기술의 급성장에 의해 현대 문명이 약속 했던 모든 낙관주의는 바로 그 기계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세계 제1차 대전의 결과가 예술언어의 성격을 변화 시킨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종교, 합리적인 사고,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들은 유럽 문명국들이 앞장선 대량 학살에 의해 절대적으로 부정 되었으며,정치인과 군인 뿐만 아니라 지성인과 예술인까지도 점차 이러, 예술에 대한 반 예술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 상황속에서 맞아 떨어 졌으며 전통적 문명에 대하여 정식적으로 반기를 든 예술에 있어서 거의 혁명적인 사고 였다.다다이즘의 정의다다는 루마니아어로 ‘예,예’이고, 프랑스어로는 ‘흔들목마’이며, 독일어로는 바보 같은 ‘소박함’ 출산의 기쁨이나 유모차에 정신이 팔리는 것 따위를 나타내는 말이다다다는 초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한 서구의 확신을 조롱했고, 현대 삶의 복합성을 중성화하고 안이하게 해 버리는 분류와 범주화를 비난했다. 다다 미술가들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창조적인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예술운동 자체보다는 정신적인 태도에 더 관심을 쏟았다. 창조성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규정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의 활동 자체는 그로 인해 남는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했다.또 다다는 미래주의[futurismo:이태리]와 함께 20세기 초반의 가장 강력한 문예 운동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미래주의가 산업혁명에 따른 과학과 과학기술을 찬양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래주의가 전쟁을 긍정한 반면 다다는 전쟁을 반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행태라고 하며 격렬히 반대했다.다다는 이성과 합리에 대한 다른 의미를 지향 했으며 부정과 파괴, 다시 말해 '반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작업 태도를 보였다. 특유의 유머가 있었고 오브제[object]를 사용하여 기성관념을 부정함으로써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다다이즘의 전개다다이즘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 되었다. 1916년 2월 작가겸 연출가인 H 발이 카페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 트리스탄 짜라 와 장 아르프, 마르셀 앙코, 휄젠벡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 심미안적인 것을 찬미 하였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20년까지 계속되었다.독일에 있어서 다다이즘은 베를린, 하노바, 퀠른 등 세곳에서 진서의 다다는 전쟁이 끝난 18년 부터 33년 까지 계속 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인물은 슈비스터였다. 그는 시와 조형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였고 23-32년까지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할만한 작품은[메르츠 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만든 기중기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쥬의 선구적 예이다. 콜라쥬는 다다의 유력한 무기로서 일찍이 입체주의의 파피에 콜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수 있었다. 특히 슈비스터는 폐품을 이용한 정크 아트를 한 작가이기도 했다. 퀠른에서는 에른스트와 바르겔트가 활약 했다. 바르켈트는 잡지 [선풍기]를 창간 하였고 아상 블라쥬 작업을 했다. 에른스트의 기법은 콜라쥬 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쥬전은 이제까지의 회화 개념을 바꿔 놓았다. 그는 또한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 하였는데 프로타쥬 기법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거의 큰 차이가 없는 종이 한장 차일라고 할수 있었다.한편 파리의 다다는 1919년에 이루어졌다. 요절한 시인 바쉐 외에도 [검은 유모어]의 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자로 빼놓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엘리 아르, 아라공, 페레 등도 동참 한다.뉴욕에서의 다다는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전쟁 전부터 전위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인 아오모리쇼의 영향이 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 오는 누드]는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 작품은 메커니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마치 고속 사진의 한 장면 같이 역동적이고 미래파 작가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그 뒤 뒤샹은 기성품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만 레이의 [선물]이냐, 아니면 뒤샹의 [샘]이냐 할 정도로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 라는 Marcel Duchamp, 1887-1955] 프랑스 출신의 미국 화가로 현대 미술에서 사물과 관념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서민위주의 작업을 하면서 브르조아 딸과의 결혼식을 이벤트화 하여 2주만에 이혼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다다이스트로 평가되고 있으며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린 [L,H,O,O,Q]를 통해 기존의 가치를 조롱하였고 레이드 메이드를 이용한 [샘]을 통하여 일상품과 예술품,그린다는 것의 의미, 장소 등 여러가지 사변적인 미술을 이끌어냈다. 자전거 바퀴를 의자 위에 거꾸로 고정 시켜 관객이 돌릴수 있도록 고안한 작품은 후에 키네틱 아트에 영향을 준다.그의 작품의 원천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미술보다는 문학 작품이었다. 현대 초기의 많은 회화와 조각이 전념 햇던 비해학성 때문에 아마도 뒤샹은 그것을 거부하게 됐을 것이다. 1912년 그는 스스로 고안한 기계적 회화로 전향 하였다. 이중 맨 먼저 나온것이 [날랜 누드가 가로질러간 왕과 왕비]의 여러 변형작이다. 뒤샹은 [처녀],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 [신부], [총각들에 의해 발가 벗겨진 신부] 등의 습작에서 기계적인 환상을 추구 하였다. 많은 작품을 남기진 않았지만 미술의 형태를 변화 시키기 보다는 미술에 대한 개념 자체에 혁신을 가져온 뒤샹은 20세기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가이다.그는 훗날 많은 미술사조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는데 [너는 나를]이란 작품에서도 하드에지 미니멀 아트의 양상을 보였고 옵아트의 기법도 보여졌다.오브제오브제의 대두는 현대 미술에서 다양한 유행으로 나타나 있고 그 개념과 표현 영역이 확대 되어 오고 있다.오브제는 기성품에 내재되어 있는 원래의 의미와 효용을 무시 하고 새로운 시간과 장소 환경에 활용 시켰을때 본래의 의미와 용도와는 생활에서 마치 경험해 보지 못한 또다른 물체성을 발견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브제로 인한 표현 방법의 다양화는 예술 창조 활동을 더욱 숙련된 작품화로 창조 할수 있게 되었다.오브제 미술로서의 작품제시는 반 미술적 미를 통해 그 일상적 기능과 의미를 제거함과 동시에 인간내면의 억제된 감정을 표출시키고 있다.또한 기성의 물질이나 이미지를 주워모아 연합하는 아상 블라쥬(assemblage)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오브제의 결합 양식으로 부터 출발 하게 된다.초현실주의에서 오브제는 조형적 영역은 물론 그 사상에도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게 했는데 즉, 오브제는 예술가의 생활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물건 그자체로 인식되어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2. 한스 아르프 [Han Arp,1887-1966] 스트라스부르 출생(집안은 스위스계)으로 바이마르의 미술학교에서 배움. 뭰휀에서 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 운동에 참가해서 전위적 경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끔 파리를 방문하여 여러 화가를 알게 되었고 병역을 기피해서 스위스에 망명하였으며 곧 후고 발을 통해서 츠아라, 얀코, 세르너,휄젠벡 등과알게 된다. 1920년까지 취리히 다다의 중심의 한 인물이 된다.1920년 그는 쾰른에서 에른스트와 바르겔트와 함께 다다운동의 한 지파를 만들었다. 2년 후부터는 파리에 정주하며 27년엔 쉬르,30년 세르클 에 카레[Cercle et Carret], 31년에는 [추상 창조]의 운동에 참가하는 등 다다와 추상 미술을 결합 하는 특이한 입장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 하였다. 작품도 회화, 콜라쥬, 채색 릴리프, 조각등 폭 넓은 작품을 구사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둥근 타원형의 뉴기적 형태의 조각을 시도 하였으며 아르프는 초상조각이란 말을 싫어해 자기의 작품을 구체 미술 [Art Concret, 아르콩크레]이라고 불렀다.3. 프란시스 피카비아 [Francis Picabia, 1879-1953] 파리 출신으로 부친은 스페인계 뒤샹과 동세대이며 후의 다다이스트 보다도 연장. 그 때문에 20세기 초의 근대파의 운동과 제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새로운 운동과의 과도기를 잇는 존재로 평가된다. 조숙한 화가이며 1900년 부터 인상파풍의 풍경화가로서어느정도의 명성을 얻했다.
    예체능| 2005.03.01| 8페이지| 1,000원| 조회(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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