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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사]1차세계대전이후의 독일경제 평가A좋아요
    -목 차-들어가는 말1.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 경제.....p12. 제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독일.....p23. 바이마르 공화국.....p74.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정책.....p8-경제 재건, 초 인플레이션의 극복, 경제 대공황5. 초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독일 .....p106. 나치스의 등장.....p12-독일 전체주의의 여러 요인7. 나치당의 집권.....p148. 나치당의 경제정책.....p159. 나치 체제에 대한 당시의 평가.....p1810. 아돌프 히틀러.....p20맺음말참고-마르크Mark그림 1> 베르사유 강화 조약 참가국 대표단의 모습p3그림 2>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이 잃은 것에 대해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는 당시 포스터 p4그림 3> 베르사유 협약에서 재편된 독일의 영토 p5그림 4> 1923~24년 초인플레이션 하의 독일 국민 p6그림 5> 바이마르공화국 당시 빵의 가격 변화 p12그림 6> 독일의 실업률 p15표 1> 마르크에 대한 달러화의 시세 p11히틀러의 나라, 라인강의 기적, 노동자의 천국)으로 잘 알려진 독일은 세계 1, 2차 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반세기도 채 안되는 기간에 세계 강국의 반열에 올라선 저력이 있는 나라이다. 또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분열국가의 아픔을 겪었지만 성공적인 통일을 이룬 모범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독일의 반만년 이상의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는 독일 역사상 또한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위기로 손꼽히는 제 1, 2차 세계대전, 그 중심에 서 있었던 독일에 초점을 맞추어 그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을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 1919년 베르사유체제 이래 전쟁의 책임은 독일과 그 동맹국들(오스트리아, 터키, 불가리아)에게 지워졌다. 이것은 후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제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독일은 패전국으로 전락함과 동시에 전쟁 이전 몇몇 산업분야 에서는 영국을 추월하며 미국, 영국과 함께 세계 경제 발전의 주도 세력년이 선전 포스터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이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영토의 20% 인구의 10% 강철생산량의 3분의 1 식량과 감자생산량의 4분의 1 철광석비축분의 5분의 4 그리고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와 무역함대-이것이 독일이 잃어야 할 것들이었다 (출처 새로 쓴 독일역사 -지와 사랑 221p)1920년 이후 3년 동안 독일 정치를 특징지었던 것은, 평화조약을 어떻게 이행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벌인 독일측과 연합국측의 실랑이였다. 이견이 생겼을 때마다 패배한 것은 언제나 독일 정부였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 정부의 위신은 말이 아니었고, 또 이로 말미암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 자체가 그 뿌리부터 흔들렸다. 1921년 초 연합국측이 요구한 배상금액수가 드디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이러한 위기상황은 그 절정에 달했다. 연합국의 배상위원회는 전쟁으로 인해 입은 일체의 손실은 물론이고 그 밖에도 전승국의 전쟁참가자들이 받아야 할 갖가지 보상금까지를 계산한 액수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독일정부는 연합국측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국민들은 이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독일측은 결국 연합국측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금화 1,300억 마르크와 연 6%의 이자를 지불해야만 했던 것이다.그림 > 베르사유 협약에서 재편된 독일의 영토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해외식민지를 잃었다 알자스 로렌은 프랑스에 반환되었고, 자르 탄전 지대에 대한 관리를 15년간 국제연맹에 위임, 단치히는 국제 자유항으로 결정, 서프로이센은 폴란드에 할양 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인구의 10%와 영토의 20%를 잃게 되었다,배상금지불을 두고 연합국측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독일의 시도는, 프랑스의 수상 포왕카레와 그의 정부로 하여금 만약 독일이 자발적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얻어내야 한다는 확신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1923년 1월 11일에 벨기에와 프랑스군이 독일 최대 탄광지역인의 공업지역인 루르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따른 독일 경제의 손실은 너무 컸고, 부족한 부분의 재정은 화폐를 찍어냄으로서 보충했기 때문에 이미 진행 중이던 인플레이션은 이로 인해 더욱 가속화 되었고, 더 이상 소극적인 저항으로는 지탱하기가 어려워졌다.이에 독일은 화폐개혁, 정부지출 감소 및 세금 증가, 전쟁 배상금 경감, 외교적 해결 등의 방법으로 ‘초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내각 중 정책의 일관성을 구현하고 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있었다. 그는 제한된 외교목표를 세워 이를 추진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또 독일 인민당의 당수로서 자신의 지지 세력인 경제계의 민족주의적 그룹이 공화국의 헌법과 정부제도에 충실하도록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1923년 총리에 취임한 슈트레제만은 초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즉, 렌텐마르크라고 불린 신 마르크화를 발행했는데, 1 렌텐마르크를 1조 구 마르크화와 교환하게 했다. 이는 걷잡을 수 없이 하락한 구 마르크화를 1차 대전 당시의 마르크화와 비슷한 가치를 가진 렌텐마르크 화와 교환하게 한 것이었다. 이 화폐개혁으로 독일의 렌텐마르크는 1914년의 독일 마르크화와 비슷한 수준까지 그 가치가 회복되었다.1차 대전 후의 독일에서 초 인플레이션이 진행됐던 이유 중 하나는 정부가 전쟁배상금과 전쟁비용 등으로 계속적인 적자운영을 했고, 그 적자를 매우기 위해서 화폐를 대량 찍어냈기 때문이었다. 즉 화폐의 통화량이 지나치게 많아져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고 초 인플레이션이 진행됐었다. 슈트레제만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의 지출을 줄이는 동시에 세금을 올려서 정부의 적자운영을 어느 정도 해결하였고, 정부가 더 이상 막대한 적자를 떠 안지 않아도 되자, 화폐를 발행해 적자를 매울 필요 또한 없게 되었다. 화폐의 공급이 적어지자, 자연히 화폐가치가 올라가게 되었고, 이로써 독일은 초 인플레이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1925년 슈트레제만은 로카르노 조약를 입은 것은 환자와 유아들이었다. 병원간호의 비용 상승과 의사 수고비 증가는 물가 상승과 기본 식료품 부족으로 광범위한 영양실조를 야기 시켰으며, 연합국 봉쇄의 최악의 기간 중에 질병 재발이 일반적이었던 그 당시에 수백만의 수용량을 초과한 의학적 치료가 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10만 이상 도시들의 사망률은 1921~2년간에 1000명당 12.6명에서 13.4명으로 상승하였으며 기아로 인한 사망과 영양실조로 악화된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다.6. 나치스)의 등장-독일 전체주의의 여러 요인(1) 패전독일에서 전체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전쟁의 패배로 인해 대두한 수치심을 들 수 있다. 1871년에서 1914년 사이에 독일은 정치적, 문화적 명성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독일의 대학, 과학, 철학, 음악 등은 전체계적으로 잘 알려져 평판이 자자했다. 게다가 독일은 놀라운 번영을 구가해 왔고, 1914년 경에는 산업 생산의 몇몇 분야에서 영국과 미국을 능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8년의 패배로 말미암아 독일은 승전국의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로 전락했다.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독일인들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자신들의 막강한 군대가 전투에서 그토록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독일은 정부 내의 사회주의자와 유대인들에 의해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는 악선전의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비난은 사실 무근이었지만 독일 애국자들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하는 데 유용한 것이었다. 희생양을 찾던 사람들은 또한 공화주의적 정권에서 드러난 느슨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했다. 베를린이 파리를 대신해 유럽에서 가장 시시하고 퇴폐적인 도시가 되었다는 한탄의 소리가 커졌다. 독일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인의 존경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그 운동을 주도할 권위주의적인 지도력이라는 인식이 조성되기 시작했다.(2)치욕적인 조약수치심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게 부과된 조항 중 두가지 조항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 1939/40년 통계연감, 371, 389쪽좁은 의미에서의(군수를 논외로 할 경우의) 나치스 고용창출정책의 특징은 투입된 자본이 비교적 소규모였다는 사실과 그 기저에는 경제 정책적 구상보다는 선동적 의미가 깔려 있었다. 또한 비록 대공황의 극복이 1933년부터 군수와 직결되어 있었다는 평가가 전면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나치스는 경기 부양 조치를 시행하더라도 추후의 군수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은 모조리 회피하였다. 나치스 정부가 강력한 소비 촉진을 삼가고 대규모의 장기적인 고용 프로젝트를 도외시함에 따라 실업의 감소라는 것도 1934년 초까지는 대부분 외양에 불과하였다. 물론 그 외양은 정치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또한 기존의 일자리를 재분배하려는 각종의 “사회적” 운동이 부가되어 그것이 외양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 고용관계가 실제로 개선된 경우는 주로 미래의 군수에 긴요한 산업 분야였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은 1934년 초부터 갈수록 군수의 부수 효과로 되어갔다. 1933년에 군수 투자가 15억 마르크였는데 비하여, 1936년에는 그 액수가 110억 마르크에 달하였다. 그에 따라 고용정책의 성격과 속도가 군수 계획에 의하여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군수야말로 자본재 산업 분야에서는 일자리를 급속히 증가시켰던 반면 기타의 산업 분야에서는 느리게 증가시키고, 궁극적으로 대량 실업을 상대적으로-실현 가능성에 견주어 볼 때-늦게 극복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1933년과 1936년 사이의 기간에 동일한 규모의 공공 지출이 군수가 아닌 분야에 투입되고 여신이 군수 이외의 목적에 이용되었더라면, 실업의 극복은 더욱 신속하고 더욱 균질적이며 더욱 일관되게 추진될 수 있었을 것이다.나치당은 정통적인 재정 이론에 집착할 여유가 없었다. 히틀러는 중앙 은행에 경제를 재생하고 재군비를 갖추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앙 은행장 루터는 난색을 보였으며, 이 때문에 그는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후임에 샤흐트가 임명됨과 동시에 후
    경영/경제| 2006.05.13| 24페이지| 3,000원| 조회(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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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과]짐멜의 식사의 사회학
    짐멜의 사회 인식방법에 대한 고찰- 을 통해 살펴 본 짐멜의 사회 유형 도출 과정과 사회형식론의 명암 -머리말1. 짐멜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2. 식사의 사회학3. 짐멜의 방법론의 명암맺음말머리말게오로그 짐멜은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로 간주 된다. 그의 학문의 영역은 단순히 사회학자로 불리기에는 인간의 심리나 사회적 미학, 문학, 철학. 예술 등을 총 망라하나 사회학을 하나의 독립적 개별 분과 과학으로 정립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등 사회학이라는 인식 수단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 인식 방법은 당시 주류 사회학자의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 이었다. 미시적 관찰로 한 사회의 일반성을 꿰뚫어 볼려는 접근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실천적 사회 담론의 논쟁의 장이었던 19세기 사회학의 흐름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그의 참신한 발상의 전환과 독특한 인식논리에 따른 사회현상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이니 당시 19세기에 짐멜이 주류에 속 할 수 없는 주변인 학자였을 뿐이었음은 자명한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인지 최근까지도 짐멜에 대한 평가는 온전치 못했다 본다.짐멜의 사회과학 방법론 중 가장 잘 알려진 갈등 이론이 굵직한 사회 현상을 이야기 했던 동시대 사회학자들 의 논쟁 사이사이에 언급되는 정도였다.그러나 이러한 갈등이론은 짐멜의 사회 인식 방법론 중 극히 일부 일뿐이며 그의 사회과학방법론을 대표 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다양한 사회 형식의 유형중 하나)먼저 이러한 지멜의 학문적 사고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그가 사회를 인식 했던 방법들에 대해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라는 에세이를 내 나름으로 정리하고 필요한 부분에서는 글상자에 생각과 비판을 적었다. 다소 어려운 글이나 짐멜이 어떤 식으로 사회 발생을 설명 하려 했으며 그의 사회 형식 유형들이 어떻게 도출 되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글이었다. 끝으로 을 통해 살펴 본 짐멜식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정리와 그의 이론에 명암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1. 짐멜이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란 결국 개인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 아무리 복잡한 사회 행위라도 각각의 사례를 분석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고유한 구성 방식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사회성의 형식’이라 불렀다. 사회가 고정적인 실체이며 유기적이고 기능적 부분과 구성 요소라고 보기에는 당시 이미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집단, 조직, 상호 작용 그리고 다시 이것들끼리의 다양한 혼합형태가 나타나 사회의 영역이 양적 질적으로 분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짐멜의 생각의 길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비교적 쉽게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고 추론할 수 있는 표상으로서의, 어떠한 모습의 사회이든 그 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을 발견하게 된다.그렇다고 해서 짐멜이 개인보다 더 거시적이고 좀더 고정적인 대상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는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 작용이 객관적 구조물로 실현된 결과물이라 말하고 있다. 사회를 우리 몸에, 사회학자들을 생리학자에 비유하자면 짐멜 이전의 사회학자들은 몸 전체나 각각의 기관의 역할을 살피는 생리학자이다면 짐멜은 생명작용에 원천을 몸 각 부분의 세포들과 그것들 사이의 작용들의 수준에서 찾는 생리학자라 할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짐멜의 사회이론을 논할 때에는 미시적 접근인가 거시적 방법인가 밝히는 것은 그 의미가 없다 볼 수 있다.현미경의 발명의 세포의 발견을 가능케 하여 생물학 연구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시켰듯 짐멜의 패러다임은 사회라는 거대 담론에 묻혀 있던 개인이란 표상을 찾아내어 사회학 연구에 큰 전환을 가져 왔다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짐멜이 뒤르켕이나 베버에 비해 한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무엇보다 눈에 쉽게 띠는 이유로는 짐멜의 사회연구 방법이 이전의 사회학자들의 것 보다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여 전통적 사회학의 영역에서 약간 비겨 서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짐멜의 사회연구의 강점이자 그는 미학에 대해서도 많은 에세이를 남겼으나 잊혀지거나 오래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짐멜의 다중성과 유연성은 곧 그의 사회이론에 또 다른 모습을 가능케 한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점으로 그 당시 사회학자들과는 또 다른 시점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이렇듯 짐멜의 학문의 폭은 다양하였고 가장 미시적이고 유동적이 개인으로부터 가장 거시적이고 고정적인 현상 또는 사회에 이르기 까지 다루는 대상도 심층적이었으나 결국 그의 이러한 다중적이고 광범위한 학문의 정체성 때문에 그는 전 생애 동안 언제나 주변인으로 독일 지성계를 맴돌았다.2.식사의 사회학- 짐멜의사회 인식 방법을 밝혀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그의 원전을 인용할 때는 최대한 그 원래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도록 했으며 그의 사고 과정에 대한 고찰과 비평은 글상자에 실어 구별 되도록 하였다한 집단의 구성원인 개인들의 공통적인 동기나 관심사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 가장 공통적인 것은 먹고 마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이 생각하는 것이나 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먹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없다.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행위야 말로 독특하게 가장 이기적인 것이며, 절대적이고 매우 직접적으로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다.먹는 것과 같은 원초적인 생리학적 사실은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적 사실이기 때문에 공통된 행위로 발전해나간다. 식사의 사회학은 먹는다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탐욕의 행위가 여럿이 자주 함께 모여 식사하는 습관과 결부되면서 생기는 구조다. 심지어 공통 관심사가 없는 사람들도 공동식사에 함께 모일 수 있다. 식사가 지니는 무한한 사회학적 의미는 이런 가능성 - 본질적 관심사가 지니는 원시성과 거기서 연유하는 보편성- 과 연결되어있다.종교와 연결된 고대 의식들에서 성찬을 위해 함께 모여 식사케 하였던 습속을 찾을 수 있다.고대 셈족에게는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아랍인에게는 철천지원수를 친구로 바에 대한 연구 분야는 인류학에 가깝다 본다) 이 글에서 짐멜은 단순히 먹는 행위가 어떻게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며 개인들 사이에 공존 하게 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사진 촬영기법에 비유한다면 개인 행위를 접사하여 찍다 점점 롱샷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하겠다. 즉 사고의 단초는 미시적이었으나 여기서 머물지 않고 요소들의 연관성에 주목 더 큰 고정된 실체의 특징과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짐멜이 미시적 방법론자 이긴 하나 짐멜의 사회학이 미시사회학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공동 식사는 생리학적으로 원초적이고 불가피하였던 보편적인 사건을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과 초개인적인 의미의 영역으로 고양시켰다. 이것이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식탁 공동체의 금지조항들이다. 식사가 사회학적 사건이 됨에 따라 더욱더 양식화되었고 미학적의미를 더하였으며 초개인적으로 규제되기 시작하였다.또한 공동 식사를 하면서 시간적 규칙성이 생겨난다. 이는 먹는 것이 지니는 자연주의(배 고프면 먹는다)를 극복함을 의미한다더불어 변화가 심한 개인의 욕구에 형식적 규범이 가해진다. 즉 개인의 욕구가 미학적 양식화로 고양되는 것이다식탁 매너의 규제와 미학적 원리에 의한 표준화 역시 식사가 사회화된 결과이다. 식사의 단순한 물질적 측면보다는 그 외의 것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상류 계층에서는 특정한 규칙들이 행동거지를 규제하게 된다.도구를 이용해 먹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식사의 미학적 양식의 토대가 주어진다. 손으로 먹는 것은 포크와 나이프로 먹는 것보다 더욱더 개인주의적이다. 이는 개인을 더 직접적으로 물질과 결합시키고 욕구들을 조금도 숨김없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식사도구가 이 욕구들을 일정한 거리 밖으로 멀리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식사 과정은 다수 개인들의 결합을 촉진시키는 공통적인 형식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한다. 교양 있는 사람은 역동적이고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초개인적인 규제를 받는다구체적으로 접시는 개인주의적 형상을 지닌다. 접시에 담긴 음식이 전적으로 생기고 식사방법과 절차에 대한 규정이 생기며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회적 사실에서 짐멜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반복성(종교의식으로서의 습관적 성찬)과 규칙성(허기지면 먹기 보다는 3끼를 먹기게 된 규칙확립) 고정성 (식탁예절 및 도구 사용) 지속성 및 구조성을 갖는 사회적 형식의 한 유형을 찾아낸다. 공동식사라는 구체적 현상에서 이 현상 저변에 깔려있는 개인 상호 작용의 원리와 성질을 발견해 낸 것이다 짐멜이 이렇게 추출한 형식들은 개개인의 개체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으로서 개인의 다양한 행위를 매개로 상호 작용 시 생겨나는 개인과는 또 다른 실체적 의미를 갖는 표상이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사회라 생각하였다. 짐멜은 유기체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무기체와 유기체의 상호작용 에서도 이런 형식들을 찾아내곤 했는데 위의 식탁 위 접시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당연 무기체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런 무기체까지도 개인들 속에서 작용하는 역할이 있다며 이 역시 사회적 의미를 담는 사회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식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사정이 허락하는 데까지 미화시켜지고 세련되게 만들어저야 한다. 이제 더이상 음식의 개별적인 외양은 그것이 소비된다는 목적과 양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식탁 위는 혼합색이나 섬세한 늬앙스를 나타내는 현대적 색채가 아니라 명료하게 밝게 빛나며 매우 원초적인 감수성과 연결된 색채가 어울린다. 그것은 흰색과 은색이다. 세련된 만찬에서 미학적으로 음식을 배열하고 장식을 하는 방식은 다른 곳에서 이미 오래 전에 극복된 원리를 따른다. 대칭성, 매우 어린애다운 색채, 자극 그리고 원시적인 형식 부여와 상징들이 바로 그것이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이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는 반면, 식탁의 세련됨은 우리로 하여금 침범하도록 유혹한다.짐멜의 논리 단계에서 이제 먹는다는 단순한 사회적 내용은 개인들 간의 관계 속에서 미화시켜지고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어 개인에게 이다
    사회과학| 2006.05.11| 6페이지| 1,000원| 조회(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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