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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산윤선도의 어부사시사 분석
    2010.1 한국고전시가론고산의 분석-고산의 삶과 자연관 중심으로-Ⅰ. 서론Ⅱ. 윤선도의 삶1. 시대상황 및 생애2. 유배와 은거생활Ⅲ. 윤선도의 자연관1. 순수 자연관2. 유가적 자연관3. 도가적 자연관Ⅳ. 작품론1. 창작배경2. 분석3. 의 자연관4. 후대수용양상 및 갈래 논란Ⅴ. 결론* 참고문헌* 부록 전편Ⅰ. 서론고산 윤선도(1587(선조20)∼1671(현종12))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시인으로서 시조75수, 한시 240~260수를 창작 할 만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의 쌍벽을 이루며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학은 우리말 사용의 아름다움, 뛰어난 서정성 등으로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에 비해 그의 현실의 삶은 많은 비판을 받는데, 노비와 백성을 동원하여 보길도에 인공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놓고 자연을 벗 삼아 기생들과 함께 풍악을 노래하고 보냈으니 이것이 그가 ‘타락한 자연시인’이라고 불리는 주요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고산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윤선도의 삶과 문학에 드러난 사상과 자연관을 통해 그의 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알아보고, 고산의 작품세계가 가장 잘 녹아있는 의 표현과 구조, 자연관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윤선도의 삶1. 시대상황 및 생애고산 윤선도(尹善道)는 1587년(선조 20)에 서울의 연화방(蓮花坊)(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 중에 주목되는 이로는 고조 효정(孝貞)으로 그가 바로 해남 윤씨(海南 尹氏)가의 거대한 물적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고산의 생애 혹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실 중의 하나가 그가 누린 거대한 물적 기반이다. 고산은 8세 때 친부모의 곁을 떠나 숙부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장자상속을 통한 부의 집중과 증식을 통해 고산대에 이르면 윤씨 가문은 국부(國富)로 불릴 정도화되는 관념적인 삶을 노래했다.Ⅲ. 윤선도의 사상과 자연관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사상적 배경은 그들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자연인식 문제에 영향을 주며, 그들의 자연인식 문제는 세계인식 문제와 직접 맞닿아 있다. 지금까지 고산의 사상과 자연관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유불도 각각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다. 그 결과 그의 문학은 다양한 사상적 성을 고루 반영하는 포용성을 지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문인의 정신세계가 뚜렷한 하나의 주관도 없이 복합적인 양상을 띠지는 않을 것이며, 그의 사상은 생애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유가 사상을 중심으로 고산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고 윤선도 시가문학의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1. 순수자연관 - 흥취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순수자연관은 고산의 문학 전반에 이념과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서정이 나타나 있다는 관점으로, 고산의 자연관을 사상이 개입하지 않는 흥취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자연관이다. 조윤제, 조동일 등이 이를 주장했으며 연구사적으로 초기에 해당한다.조동일의 견해를 소개하자면, 그는 고산이 자연미에 완전히 빠져 버린 것으로 보고 고산의 자연관을 현실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도취적 자연관으로 보았다.“모두 75수나 되는 시조를 지으면서 관심을 현실에서 강호로 돌렸다. 전라도 해남의 자기 마을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바다 건너 보길도에다 호화로운 정원을 꾸며놓기까지 하고, 예사 사대부로서는 바랄 수 없는 풍류를 마음껏 즐기면서 - 경치를 그리고 이치를 찾는 데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흥취를 최대한 확대시킨 특징이 있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를 찾는다든가 살아가는 괴로움을 토로한다든가 하는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극도로 세련된 풍류의 세계를 미묘하게 표현하기만 하는, 후대에 순수시라고 하는 것과 일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이러한 견해는 그의 자연관을 탈이념적인 순수한 자연관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윤선 멀리는 산천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우주 사이에 가득한 만물 만사에는 각각에 따른 단연의 법칙과 지선의 궁극적 원리가 있지 않음이 없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천하의 모든 사물에 나아가 미루어 궁구하고 체득하여서 그 정미한 심층까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법칙과 궁극적 원리에 나의 진정한 앎과 봄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면, 이것이 이른바 격물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만물이 지닌 법칙과 원리가 낱낱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게 되니, (중략)그리하여 스스로 그러리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 이것이 이른바 격물이다.우주와 개체, 천지자연과 인간, 혹은 물과 나를 질적으로 완전히 같은 연속된 하나로 관념하는 존재론적 인식은 천인합일의 이상을 이론화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로서 의미를 지닐 뿐이다. 유가의 천인합일 사상은 오히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천인합일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야 할 주체로서의 인간적 실천의 문제가 중심을 이룬다. 인간의 완성이 궁극적으로 전일적 우주(天)의 완전성과 하나 됨에 있다는 명제의 실천론으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을 다함으로써 우주와의 조화로운 전체성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밝히는 것이 그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고산이 73세 때 서울 근교의 고산에 체류하면서 쓴 글로, 여기서도 실재하는 사물들을 연속적으로 인식하는 관점이 드러난다. 여기서 세계는 사물, 우주, 자연, 사회 사이에 경계가 없이 하나로 연속된 동시적 존재로서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윤선도가 궁극적으로 합일하고자 한 지향세계는 자연만도 아니고 사회만도 아닌 그 이상의 범주, 즉 우주적 자연(天)이다. 이러한 세계와의 조화를 획득하는 것이 자아 완성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여기서는 천인합일이라는 개념을 존재론, 인식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인성론에 가깝다는 말을 하고 있다. 단순히 이념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우주적 자연과 합일하기 위하여 구체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산 윤선도의 자연 은거의 문학을 상대적으로 현실에 문형으로 많이 나타냈다. 이처럼 강호의 한적한 삶과 자연과의 물아일체를 나타내는데 의문형을 사용함으로써 독자가 상상력을 펼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강조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고산은 1.1.에서 언급한 대구법과 의문형의 수법을 사용하여 긴 연장체(連章體) 시가의 내용상의 단절을 막고 시상의 연속성을 도모할 수 있었다.무심(無心)한 백구(白駒)는 내 좃는가 제 좃는가 홍슈(紅樹) 쳥강(淸江)이 슬믜디도 아니한다 흰 이슬 빋견는데 발근 달 도다온다 ㄷ. 색감(色感)의 이미지 사용고산은 또 색감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내용 전달에 큰 상승적 효과를 창출하기도 했다. 무심한 백구를 통해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상태의 어부의 순수한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붉은 색으로 물들인 나무와 맑은 가을의 강물을 통해 풍류생활을 흥미진진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홍(紅)-청(淸)의 색감 대비를 통해 신선경(神仙景)같은 모습을 그리고 있고, 흰 이슬과 붉은 달의 색의 대비를 통해 순결함과 화려함의 복합적 요소를 형상화하여 회화적 여백미를 느끼게 하고 내용적으로는 희망차고 활기 있는 강호생활을 그렸다.2.1.2. 우리말 사용농암의 어부가는 후렴구와 '…라'라는 우리말 토씨를 제외하면 한시(漢詩)의 칠언절구(七言絶句) 그대로이지만, 고산의 어부사시사에서는 순우리말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여튼 갣 고기들히 먼 소해 다 갇나니돋다라라 돋다라라져근덛(잠깐동안) 날 됴흔 제 바탕의 나가보쟈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밋기 곧다오면(미끼가 좋으면) 굴근 고기 믄다 한다 이러한 국어의 사용은 시가 포함하고 있는 뜻을 구체화하는 기능을 가진다.물외(物外)예 조흔 일이 어부 생애(漁夫生涯) 아니러냐배떠라 배떠라어옹(漁翁)을 욷디 마라 그림마다 그렷더라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사시흥(四時興)이 한가지나 츄강(秋江)이 읃듬이라내일(來日)이 또 업스랴 봄밤이 몃덛새리배브텨라 배브텨라낫대로 막대삼고 시비(柴扉)를 차자보쟈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어부 생애(漁父生涯)는 이렁구러 디낼로다'그림마다 그렷더라'라고면서 해가 돋아서 자연의 경물이 드러나는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춘사의 첫째 편에서 하루의 시작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음으로 자연의 여러 모습들을 묘사하면서 하루라는 순환성을 마무리한다. 마지막 편에서는 봄날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노래함으로써 영원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시간적 질서는 하사, 추사, 동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현된다.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어부의 동작을 지시하는 여음구도 시간적 순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출항을 위해 포구에 배를 띄우고 바다에서 운항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포구로 돌아와 정박하기까지의 과정이 하루라는 시간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에 쓰인 여음구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시간의 진행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어서 작품이 영원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똑같이 반복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이와 같이 는 순환적 시간의 구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의미를 확장하여 영원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3. 의 자연관봄에서 겨울에 이르는 네 편의 노래가 전체적으로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공간구조에서도 드러나듯 뱃놀이의 절정을 지나 귀로에 올라 육지와 가까워지면서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의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고산에게 이러한 부정적인 현실은 당연히 버리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그러나 겨울 노래인 동사에서는 혼란한 사회가 안정되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는데, 자연의 바깥에 놓인 인간사회를 생각하고 나아가 부정적 현실을 의식하면서 점층적으로 다져나간 자연과의 합일감을, 끝내는 이상으로서의 사회와 화합하려는 소망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연 속에서 획득된 개인과 자연과의 조화가 자연의 바깥에 놓여 있는 사회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회 지향의식 발현의 결과인 것이다.그러나 고산이 바란 이상은 현실사회와 더불어 자연에서도 실현될였다.)
    인문/어학| 2010.11.24| 9페이지| 2,000원| 조회(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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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로와 이규보의 한시 창작론
    2010.2학기 한국고전문학사 REPORT전통의 계승인가, 개혁인가- 이인로와 이규보의 ‘한시 창작방법론’을 중심으로 -《 목 차 》1. 들어가며2. 문학세계의 형성 배경§ 2.1 시대적 배경§ 2.2 죽림고회와의 만남3. 한시의 창작방법론§ 3.1 新意의 創出 - 用事와 創新§ 3.2 心物論 - 託物寓意와 寓興觸物4. 두 문인의 창작방법론의 현대적 해석5. 나오며§ 5.1 결론§ 5.2 앞으로의 과제 및 전망* 참고문헌1. 들어가며이인로(李仁老, 1152-1220)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학이론과 작품세계를 논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한국고전문학사라는 통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두 문인의 자격으로 논할 수 있고, 공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무신집권기에 살았던 그들이 당시의 주류 문풍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행로를 걸었는지 논의할 수 있겠다. 또한 거시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문학 작품과 저서를 아우르는 논의를, 미시적으로는 두 인물의 비교ㆍ분석 항목으로써 세계관, 창작방법론, 작품 갈래 등을 설정하여 볼 수 있다.이렇듯 다양한 접근 방법을 열어 두고, 어떻게 하면 이번 과제를 보다 더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무신집권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인로와 이규보의 한시 창작방법론을 비교ㆍ분석하기로 결정하였다.논의 대상을 이렇게 한정적으로 정한 연유에 대하여 미리 밝히고자 한다. 이번 과제는 그 성격상 이인로와 이규보를 라이벌 관계로 보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라이벌이 하나의 대상에 관하여 어떻게 다른 생각을 가졌는가를 비교하는 것이 진정한 맞수의 대결이라 판단하였다. 이인로와 이규보는 한시의 창작방법론에 있어서 그 이르고자 하는 목적은 같지만 그 곳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것이 ‘한시의 창작방법론’ 이라는 다소 한정적인 논의 주제를 정하게 된 이유이다. 물론 이인로와 이규보는 고려 시대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그안의 봄에 자빠졌네未識七賢內 아직 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誰爲鑽核人 누가 자두 씨를 뚫는 분(왕융)이신지- 李奎報,『東國李相國集』, 中대나무 아래로 이규보를 초대한 저들은 무신난으로 몰락한 구(舊)귀족의 후예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이다. 그들은 서로 의를 맺어 망년지우(忘年之友)를 삼고 시와 술을 즐겼는데 이인로를 중심인물로 한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의 일곱을 말한다. 반면, 이규보는 새로 서울에 올라온 관료집안의 후예로서 기존의 문벌귀족들에 대해 적대의식을 가지고 있던 신흥사대부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이규보는 이인로와 그 무리들에 비해 한참 어린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풍자로서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이규보의 태도를 단지 젊은 혈기의 반항의식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는 무신난을 기점으로 물러나게 된 무리와 새로이 급부상하게 된 무리의 사회적 지위와 연관되는 것이다. 청년 이규보는 죽림고회에 대하여 ‘탈속을 표방하면서도 호시탐탐 벼슬의 길을 엿보고 잇거나 이미 붙어 있는 무리들’ 이라며 이중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무신정권에 들어가 복무하게 될지라도 사(士)로서 소임을 다하고 그러한 이중적 태도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이인로와 이규보는 사회적 지위, 시대적 배경,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 나이 등 문학세계의 형성 배경이 될 만한 많은 면들에 있어서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것들이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그들의 문학세계에 있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게 된다.3. 한시의 창작방법론이 장에서는 이인로와 이규보의 ‘창작방법론’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에서는 이인로와 이규보를 라이벌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용사’와 ‘신의’를 배타적인 관계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 중에 일차적으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의 문제이며, 그 둘을 대립관계로 놓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창작 방법의 위계를 올바르게 설정할 필요성을 느꼈고, 우리는 용사(用事 그러나 이 반월성에서는 반대로 이제 고려가 망하게 될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되고 있다. 다섯째, 여섯째 행에서는 한(漢)나라 유향(劉向)과 진(陳)나라 조고(趙高)의 고사를 인용한 괴철(?徹)의 말이 인용되고 있다. 먼저 다섯째 행에서 태아(太阿)는 보검(寶劍)의 이름인데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상소에, “태아를 거꾸로 쥐고서 칼 한 자루를 남의 손에 쥐어 주었다.”하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임금이 정권을 남에게 맡긴데 비유한 말이다. 또한 여섯째 행은 진(陳)나라 간신 조고(趙高)가 임금에게 사슴을 몰고 와서 말이라 속였는데, 그 뒤에 괴철(?徹)이, “진나라가 사슴을 놓쳤으매 여러 사람들이 쫓는데 발이 날랜 자가 먼저 얻는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조고의 사슴에 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진나라가 나라를 잃은 데에 비유한 것이다. 결국, 다섯째, 여섯째 행은 한나라와 진나라의 일화에 관련된 고사를 괴철이라는 자가 인용하여 쓴 글을, 이인로가 또다시 용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일곱째 행은 진나라가 망할 때에 후주(後主)가 밤낮으로 술과 여색에 미혹하여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음란한 곡조를 불렀다는 이야기와 관련된다. 이후, 당나라의 시인 두목지(杜牧之)가 그의 고도(故都)를 지나다가, “장사치 계집들은 나라 망한 한도 모르고, 강가에서 아직도 후정화를 부른다.”(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시를 인용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덟째 행은 수양제(隋煬帝)가 변하(卞河)에 행궁(行宮)을 짓고 강 언덕에 버들을 많이 심어서 음란하게 놀아, 나라가 망한 뒤에 버들만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 고사를 인용하여 장차 고려 왕조의 운명이 위태로움을 말하고 있다.)이와 같이 그는 반월성이라는 시에서 첫째, 둘째 행만 제외하고는 모든 연에서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사를 인용하여 그 시가 난잡하게 되었다거나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고사를 인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내고자 한 의미가 더욱 깊어품인 것이다.이처럼 이인로와 이규보의 서로 다른 행보는 당시 동파 따르기에 급급한 문풍에 대한 대처 방식과 연관시켜 살펴보아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규보는 당시의 시인들이 詩作에 있어서 지나치게 송시풍에 경도된 모습을 보고 시인 자신의 독창성, 참신성을 찾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대의 문인들은 소동파를 추숭하면서도 그의 말과 뜻, 정절한 용사를 본받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단지 용사의 도구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보니 표절과 답습이 난무한 것이고 표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규보는 그런 세태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새로운 말과 뜻으로서 시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고, 표현이 생경하고 난삽하다는 당대 문인들의 비난을 무릅쓰면서도 다른 길을 가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용사를 할 것인가 창신을 할 것인가의 논쟁은 그들의 삶의 태도ㆍ현실 인식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3.2 心物論 - 託物寓意와 寓興觸物두 사람의 차이를 드러내는 또 다른 창작방법론으로 ‘탁물우의’와 ‘우흥촉물’이 있다.탁물우의(託物寓意)의 한자를 살펴보면, 託(부탁할 탁)物(물건 물)寓(부칠 우)意(뜻 의)인데, 사물이나 현상에 의탁하여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뜻한다. 이인로는『파한집』에서 백운자(白雲子, 신준)와 임춘이 각각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읊은 시를 비교할 때 탁물우의의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고금의 시인의 탁물우의가 대부분 이와 같다. 두 작품은 처음에 서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토한 사연이 처절하고 원망스러워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재주가 있지만 쓰이지 못해 멀리 떨어져 나가 나그네로 떠도는 모습이 몇 자 사이에 또렷이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시는 마음에 근원을 둔다는 말을 믿을 수 있다.’- 李仁老,『破閑集』이인로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쓴 시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치 한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은 것에 주목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느낀 것은 두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기껏 올라가 스님을 찾으나 스님이 계시지 않는다. 쓸쓸함이 더욱 커져버린 이인로는 집으로 바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절간에 잠시 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수풀 밖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상심하고 있던 이인로가 듣기에 그 울음소리는 마치 ‘提壺’하는 술을 권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여기서 ‘提壺’는 새의 울음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인 동시에 글자의 뜻을 풀이하면 ‘술을 들다’의 뜻으로 중의적인 표현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 돋보이는 시이다.)위에서 탁물우의란 물에 기대어 의를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창작방법론을 즐겨 사용한 이인로는 중요한 것은 마음이요 물은 그것을 드러내는데 쓰이는 부차적인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인로의 인식은「書天壽僧院壁」에서도 드러난다. 바로 새의 울음소리를 ‘提壺’라고 표현한 지점이다. 사실 새의 울음소리는 ‘提壺’를 발음했을 때 나는 소리와 전연 딴판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인로는 새의 울음소리를 ‘提壺’라고 했을까? 그것은 이 시를 지을 때의 이인로의 마음가짐에 기인한다. 기다리는 벗은 오지 않고 벗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스님을 만나러 천수사까지 올라갔으나 스님도 없다. 그야말로 외롭고 쓸쓸한 심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이인로에게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술이다. 쓸쓸하고 공허한 심사를 달래줄 만한 무언가가 이인로에게는 필요했을 것이고 마침 술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런데 숲 속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 이인로는 자신의 심사에 비추어 그 소리가 마치 ‘提壺’하는 술을 권하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따라서 이인로는 외롭고 공허해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새의 울음소리에 기대어 드러낸 것이다.다음으로 이규보의 시「蓼花白鷺」에 대해 살펴보자.蓼花白鷺 (여귀꽃과 백로)前灘富魚蝦 앞 여울에는 고기도 새우도 많아有意劈波入 물결을 가르고 들어가려 하다가見人忽驚起 사람을 보고 놀라 일어나서는蓼岸還飛集 여귀꽃 핀 언덕으로 도로 날아 모것이다.
    인문/어학| 2010.11.24| 16페이지| 2,000원| 조회(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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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백두산 기행가사 분석
    < 한국고전시가론 >- 금강산 · 백두산 기행가사 분석-< 목차 >Ⅰ. 기행가사1. 기행가사의 정의2. 기행가사의 일반적 특성3. 기행가사의 유형(1). 관유기행가사(觀遊紀行歌辭)(2). 유배기행가사(流配紀行歌辭)(3). 사행기행가사(使行紀行歌辭)(4). 표류기행가사(漂流紀行歌辭)Ⅱ. 금강산 기행가사1. 금강산 기행가사의 출현2. 기행가사에서 금강산의 위치3. 조선전기 금강산 기행가사(1).「관동별곡(關東別曲)」(2).「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4. 조선후기 금강산 기행가사(1).「명촌금강별곡(明村金剛別曲)」(2).「어당금강별곡(?堂金剛別曲)」(3).「동유금강녹(東遊金剛錄)」5. 근대 금강산 기행가사(1).「금강유람가(金剛遊覽歌)」Ⅲ. 백두산 기행문학1. 백두산 기행문학의 출현2. 기행가사에서 백두산의 위치3. 조선시대 백두산 기행문학(1)「북정록(北征錄)」(2)「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4. 근대 백두산 기행문학(1)「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Ⅳ. 우리민족에게 금강산과 백두산이 지니는 의미Ⅰ. 기행가사1. 기행가사의 정의기행가사는 ‘여행’을 내용 요소로, ‘가사’를 형식 요소로 한다. 즉 기행가사는 여행을 통해 얻은 그 모든 것을 내용으로 하여 가사의 형식을 빌어 형상화 한 작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행가사의 개념을 확정하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기행가사의 형식 요소인 ‘가사’는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하여도, 내용 요소인 ‘여행’에 대한 정의는 기행가사의 개념을 확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여행’의 개념을 넓은 뜻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좁은 뜻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행가사의 개념과 연구대상 작품도 그 범위를 결정할 수 있다.여행을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고전문학 작품 속의 여행 종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일부 종교가사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노정을 가진 여행. ②몽유가사에 나타난 꿈 속 여행. ③역사계 가사에서 볼 수 있는 시간 여행. ④현실적인 시·공간적 이동을 노정으로 한 실제 여행이 그것이다. 하지만행가사와 거의 문학사적 전개를 같이하는 시조, 고전소설이 있다. 물론 경기체가를 제외하고는 금강산 기행가사보다 선행하는 설화, 한시, 기행문 등도 금강산 기행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후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이 양산되고 있다. 이는 하나의 유행과 같아서 제 장르가 상호 자극하고 보완하며 작품의 산출을 부추긴 결과에 말미암은 것이다.2. 기행가사에서 금강산의 위치금강산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명산 중의 명산으로 여겨진다. 특히 그 빼어난 풍치로 인해 더욱 유명했다. 계절에 따라 산 전체의 풍경이 변하기 때문에 금강산,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으로 불린다. 게다가 그 장엄한 기암절벽은 가히 한반도에서 으뜸이라고 볼 수 있다.금강산은 고려시대에는 도선적ㆍ불교적 낙토로 여겨졌는데, 특히 불교세력에게 선점되어 불국토의 이상으로 숭배되었다. 금강산으로 명명된 이래 누구나 그것이 화엄경 에 언급되는 ‘금강산’과 같은 곳으로 여기게 되었다. 곳곳에 대찰이 세워지고 봉우리마다 대부분 불교식 명칭이 부여됨으로써 금강산은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불교의 상징적인 터전으로 고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이에 반해 조선시대에는 유가적 낙토로까지 여겨졌다. 금강산에 얽힌 신이한 의미를 걷어내 탈신화화를 꾀하고 경치를 경치 그 자체로 보자는 것이 조선시대 정통 문인들의 공통적인 취향이었으면서도 단순히 경치를 경치로만 묘사하는 데 그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금강산을 대상으로 다양한 글들이 등장한 것도 그에 대하여 경치 이상의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고 본 데서 나타난 결과였다. 물론 민족의 대명산인 백두산도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북쪽에 있어서 길이 험하고 멀었기 때문에,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백두산을 찾아가는 일이 드물었다. 반면 금강산은 다른 산에 비해 한양에서 멀지 않았고, 근처에 강원감영도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찾아갈 수 있었다.3. 조선전기 금강산 기행가사조선 전기는 가사문학의 효시로 의견이 분분한 나옹의 「서왕가」와 정극인의 「국권간)이火湯(화탕) 地獄(디옥)에/ 며치나 드런?고작자의식을 살펴보자. 동양의 유토피아는 크게 산해경형, 무릉도원형, 삼신산형, 대동사회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관동속별곡」은 각종 선어와 선계 인물에 관련된 고사 등을 활용하여 삼신산형 유토피아로서 형상화되어 있다. 이로써 작자는 도가사상에 심히 경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속세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혼탁한 정국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등 현세에 대한 작자의 관심도 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조선후기 금강산 기행가사조선후기는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관념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던 주자학적 분위기가 점차 사라져 가고, 실학의 영향으로 비판적·현실적·경험적 가치를 동시에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민(民)을 주체로 하는 정치체제의 확립, 생산성을 지향하는 경제체제의 수립, 신분질서의 개선 및 타파를 지향하는 평등적 사회관의 정립, 주체적 학문의식의 확립을 목표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실학의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다.이러한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던 문인들은 서사 장르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는 불교계 국문소설과 한문 전기소설이 형성되었고, 각종 국·한문 소설이 성행하였고, 서정장르인 시조에서 파생한 장형시조가 등장·성행하였다. 가사 또한 조선전기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었던 서정가사의 명맥을 계속 유지하여 단형 서정가사가 계속 나타나면서도 서사화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금강산 기행가사의 경우도 조선후기에 오면, 조선전기의 전통을 계승한 단형가사로 더불어 산문 정신의 발흥에 영향을 받아 장편화 되고 서사화 된 가사작품이 많이 산출되고 있다. 조선후기의 단형 금강산 기행가사를 대표하는「명촌금강별곡」, 장편 금강산 기행가사에서 주목할 만한「어당금강별곡」, 「동유금강녹」을 살펴보자.(1)「명촌금강별곡(明村金剛別曲)」 -박순우-世上(세상) 功名(공명)의/ 妄靈(망령)도이 뜻을 두어書籍(서적)의 汨沒(골몰)?고/ 場屋(장옥)의 奔走(분국고사는 한 곳에서만 비판적인 안목으로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일반적으로 조선전기의 가사가 중국 인명이나 지명을 끌어들이는 용사법을 즐겨 활용하였음을 고려할 때, 이는 곧 어당의 탈중화적인 자주의식이 발현된 결과로 평가된다.회양 철녕 고든 ?이/ 관동으로 나려와서 // 쳔 리 장산이/ 사방의 막앗스니그즁 금강산이/ 일국의 졔일이라 // 일만 이쳔봉이/ 년화숑이 모양이요쳔지 ?벽쵸의/ 영긔를 모라다가 // 문명? 죠션국의/ ?죠를 부렷고나작품 중에는 풍수설이 많이 수용되어 있다. 그 단서는 우선 작품 전편에 걸쳐 나타나는 맥, 내룡, 명당과 같은 풍수 용어의 구사에서 찾을 수 있다. 풍수설은 비록 중국에서 생성된 이론이기는 하나,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중국에서보다 더 일반 백성에게 숭신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수그러들지 않고 우리 민족과 밀착된 이론임을 고려할 때, 어당이 그의 「어당금강별곡」에서 풍수설을 수용함은 이 역시 자국문화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자 정신의 한 반영으로도 해석된다.(3)「동유금강녹(東遊金剛錄)」 -권숙-동유금강녹의 작자는 권숙(1846~1896)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경순(景淳), 호는 건암(健庵)이다. 가계를 보면, 그는 삼족이 모두 쟁쟁한 가문 출신이다. 벼슬은 이조정랑에 이르렀고, 증직은 부제학이다. 창작 연대는 작품의 내용으로 미루어 1868년에 창작된 것으로 추측된다.「동유금강녹」은 작자가 대과에 낙방한 후 심한 자괴지심에서 인생무상을 느끼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 그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는 2율격 1구로 헤아려 총 1485구로 된 장편 금강산 기행가사이다. 그 구성은 ‘출발 - 노정 - 목적지 - 회정’의 4단계 구조로서, 작품 전편은 4대단 39소단으로 세분된다. 이 기행가사는 작자가 현지를 유람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전언하면서 감각적 인상을 재현하고 있다. 기술 방식은 주로 단순한 설명이나 설명적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작품 전편은 4율(定界碑)를 세울 때 직접 백두산을 답사했거나 간접적으로 답사 체험을 듣고 답사기를 남긴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성지인 만큼 직접 답사하여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답사기를 남기게 된 것이다.김지남(金指南)의「북정록」, 홍세태(洪世泰)의「백두산기」, 박권(朴權)의「북정일기」, 이의철(李宜哲)의「백두산기」, 박종(朴琮)의「백두산유록」, 서명응(徐命膺)의「유백두산기」등의 백두산 답사기는 조선 왕조 숙종(1674-1720), 영조(1725-1776) 때 쓰여졌다. 한문(漢文)으로 쓰여진 이들 백두산 답사기는 국토를 사랑하고 국토를 지켜야 한다는 국토와 자연의식을 또한 담고 있다.2. 기행가사에서 백두산의 위치都南(도남)을 너머드러 배고개 올나안자설한재 뒤에 두고 長白山(장백산) 구버보니重岡複關(중강복관)은 갈쇼록 어렵도다百二(백이) 重關(중관)과 千里(천리) 劍閣(검각)도 이럿텃 하던고금강산에 대한 기행가사가 그 종류가 상당히 많고 또한 한 원류를 이루고 있는 것에 비해 백두산의 경우 기행가사 작품이 전혀 없고, 다만 「관서별곡」에서 그 일부가 드러나 있다.이러한 백두산이 등장하는 작품을 찾기 위해서 다른 기록에 언급된 백두산의 다른 이름들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백두산은 불함산(不咸山), 개마대산(蓋馬大山), 도태산(徒太山), 종태산(從太山), 태백산(太白山),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러한 이름들도 확실히 그것이 백두산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조선시대의 백두산은 변경지역으로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나 각 지역 산의 근원 또는 시점이 되는 산으로 부각되고) 또한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이후 그 중요성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민족의 조종산으로써 오랫동안 숭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작품의 소재에 제외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북쪽 끝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의 경계지역에 있는 지형적 위치와 산이 높고 험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한편 조선후기 18세기에는 가사는 지어지지 못했으나 기행문들이 그나마 집
    인문/어학| 2010.11.24| 18페이지| 2,000원| 조회(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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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조가단의 형성과 역할
    시조가단의 형성과 역할2010학년도 1학기고전시가론Ⅰ. 시조가단의 이해Ⅱ. 시조가단의 형성(1) 시조의 향유층 확대와 전문가단의 결성(2) 가단 활동자Ⅲ. 시조가단의 역할1. 시대적 측면에서 바라본 가단의 역할2. 문화 공유적 측면에서 본 시조가단의 역할3. 음악적 측면에서 본 시조가단의 역할1) 가창자들의 음악적 욕구에 부흥한 가집 편찬2) 상업적 대중음악 장르로 인식Ⅳ. 가단의 갈래1. 사대부 가단1) 영남가단(嶺南歌壇)2) 호남가단(湖南歌壇)2. 평민 가단1)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2) 노가재가단(老歌齋歌壇)3) 이세춘 가단(李世春 歌壇)4) 승평계(昇平契)와 노인계(老人契)Ⅴ. 결론Ⅰ. 시조가단의 이해17세기 말을 고비로 중세 해체의 징후가 드러나면서, 각 부분의 변화가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특히 상업의 발달로 경제적 부가 예술 분야로 투입되고, 도시공간이 확대되면서 도시의 유흥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전대의 사대부 예술과는 구분되는 여항예술이 다양하게 부상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여항예술의 발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이 몇몇 개인의 뛰어난 능력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호인 활동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한시를 창작했던 시사와 시조의 창작과 전승에 주력했던 전문가단은 예술을 통한 신분적 자의식의 표출이라는 여항예술의 성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중 예술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전문가단의 결성과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시조의 변이와 사설시조의 부상, 가집의 편찬 등 시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련의 흐름을 주도한 층이 바로 전문가단이기 때문이다.가객들이 전문가단을 결성하여 시조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시조의 사대부와 그 주변인들의 향유라는 폐쇄적 영역에서 벗어나, 여항예술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아울러 시조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인정과 물상 세태를 다양하게 그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문가단의 활동과 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문학관은 시조 연구 초창기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가담함으로써 제반 문학활동을 둘러싼 완강한 신분의 벽은 점차 해소되기에 이른다. 이들 중 한시를 지을 만한 교양을 갖춘 기술직 중인은 시사를 결성하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시를 지을 만큼의 교양을 갖추지 못한 서리층들은 시조 창작에 몰두하여 가단결성, 시조집 편찬, 시조의 창작에 이르는 일련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은 경제적 부가 문화 분야에 투입됨으로써 지배세력의 독점적 지배력이 상실되고 문화의 수용층을 넓혀 가는 평준화 현상을 초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문학이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 전문예인의 영역에 포섭됨으로써 완고한 이념의 외피를 벗고 다양화?전문화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전문가단의 결성은 동질적인 의식을 가진 예인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했음을 알리는 유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문학사의 전면에 드러나는 최초의 가단은 김천택이 중심이 된 ‘경정산가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김천택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대부적 취향과 그의 고고한 일면을 들어 경정산가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있으나, 그가 동료악공, 가객, 여항시인과 강한 연대의식을 지닌 채 활동하였으며, 그 결과물이 가집 『청구영언』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전문가객은 가단을 결성하여 시조의 창작과 가창, 이론화에 종사하여 사대부의 여가에 불과하였단 시조의 지위를 격상시켰고 결과적으로 우리 시가문학사를 풍부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특히 이들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 사설시조의 창작과 수용은 시조의 질적 변모를 일으킨 직접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심대하다 할 수 있다.(2) 가단 활동자여항인은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어떤 특정 집단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에 상대되는 피지배계층, 즉 중서평민층을 두루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들 여항인은 ‘서울의 일정한 지식을 소유한 여정사람’으로서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여항예술을 창출하는 주체라는 의미를 강하게 지니게 된다. 이 여항인들의 흥 기회가 많아지고 예술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이를 대신할 가객들이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게 된 것이다. 또한 평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변화에 빨리 적응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후견인이 되어 자신들만의 고유한 공간과 영역을 확보함에 따라 사설시조가 많이 창작되고 놀이 공간에서 활발히 연행될 수 있었다.)2. 문화 공유적 측면에서 본 시조가단의 역할시조는 정치와 문화의 주도 세력인 사대부들이 창작하고 향유하는 형태로 존재해왔다. 그에 따라 시조 작품의 세계 또한 사대부들의 사상적 지향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17세기 말부터 조선의 각 부분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시조 문학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상업의 발달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면서 사대부들의 전유물이던 상층문화를 수용하고 상층에 인정받고픈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력권을 이루는 집단이 여항인이고 그들은 각 종 예술분야에 영향을 주면서 그 중 가객도 포함되어있다. 여항시인은 대부분 중인이지만 그 중에서 한시를 지을 만한 일정한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모임은 시사였고 여항인 중에서도 지체가 낮고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객을 이루었다. 이들이 한시 창작과 시조 창작으로 나뉘었어도 그들의 공통점은 사회 경제적 발달에 힘입어 문화에 대한 욕구도 자연히 발달하여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시조, 한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사대부들과 그 주변인인 기생과 악공 중심으로만 제한되어 있었지만 특히 가객의 모임인 가단을 통해 그 향유층은 넓어지고 신분적 한계를 문학과 예술 창작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이세춘 가단에서는 이들이 애매한 신분상승 의지에 사로잡히는 대신 기생들을 단원으로 맞아들여 스스로 기생과 동질적인 가창 예인임을 분명히 하여 각종 연회에 불려다녔다고 한다. 또한 김천택이 동료악공, 가객, 여항시인들과 강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는 등 이러한 점들에 의해서 시조에 대한 지배세력들만의 지배권이 사라지고 문화의 수용층이 넓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수용층이 넓어짐에 따라 창의 연주법이 긴요했던 만큼 작품보다 악보가 더 중요하게 취급받았다. 그러나 가창자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곡에 맞추어 부를 노랫말이 더욱 필요했기 때문에 각 곡조에 맞추어 부를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 확보가 요구되었다. 가창자들은 악보와 함께 작품도 담고 있는 가사집이 필요했고 대부분 가창자였던 가집 편찬자들은 이런 현실적 요구에서 출발해서 가집을 엮기 시작했다.김천택이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청구영언』을 편찬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의 등장으로 악보인 금보로 연주할 수 있는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여항 가창자 들에게 시조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의 표현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악보에 맞추어 노래할 수 있는 작품은 매우 중요하였고 가집의 형성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 시켜 주었다. 가집은 단순히 작품집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창자들의 음악적 고려를 잘 수용했다는 점, 즉 시조의 연행을 보다 다양화 할 수 있게 했던 요인이다.)이러한 영향은 가집에 의한 직접적인 영향이나 조선 후기 가단은 여항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경정산가단의 김천택은 그것을 수용하여 청구영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단이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2) 상업적 대중음악 장르로 인식조선시대 후기 시조의 음악적 발달은 많이 발전 되고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시조가 상업적 대중음악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세춘 가단에 관한 문헌에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생들을 단원으로 맞아들여 가창 예인임을 분명히 했다고 말한다. 이세춘가단은 그 구성원들이 가객과 금객 그리고 기생 등 이였고 가객으로는 희귀하게 예인전에 입전되는 명창 송실솔을 배출하였다. 그의 가단에서는 비록 가집 편찬의 업적은 없지만 이러한 이유로 역사의 기록에 남은 듯 하다. 이세춘 대에 이르면 시조음악 전문가창자로서의 전문성 제고가 목표이고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상업적 대중음악가로서의 활동에만 집중한다. 이렇게 이세춘 가단을 통해 시조가 18세기 후반에 상업적 구매의욕을 유발시킬 정도거둘 수 있게 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작품 에는 그가 주장하는 바가 잘 나타나고 있다.2) 호남가단(湖南歌壇)호남가단은 영남가단과는 달리 작품을 통해 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도학적 정서보다는 풍류를 자랑하는 쪽이었다. 호남가단의 작품은 풍치 좋은 명승지나 그곳에 세워진 정각을 무대로 한 것이 많은데, 이는 당대 문인들의 자연애호 사상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전통적인 풍류 사상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호남지역에는 유명한 면앙정(?仰亭)을 비롯해 다수의 정각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호남을 예향이라 부르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호남가단의 이 같은 창작 기풍을 처음으로 마련한 사람이 송순(宋純, 1493-1583)이다. 그의 작품은 한역한 작품이 아닌 원문을 찾기는 어렵고, 일곱 수와, 다섯 수를 위시하여 20수쯤 되는 시조를 지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 찾아낼 수 있는 작품이 10수 가량이다. 그것마저도 작자가 엇갈린다. 이는 스스로 작품에 대한 의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송순은 음악에 조예가 있어 거문고 같은 악기에도 능하고, 일생 동안 시가를 노래하며 풍류를 누린 희대의 멋쟁이였다.)이후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성산 고을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자 여러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이 모임을 흔히 성산가단이라고 한다. 성산가단에 참여한 시인들의 작품세계는 을 지은 정철(鄭澈, 1536-1593)에 와서 풍부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났으며, 전에 볼 수 없었던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성산가단의 주요 인사들은 당시 호남의 대표적 문사들이었고, 성산을 무대로 하여 그들이 창작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한시문(漢詩文)이지만 이 작품들의 주제적 공통항은 또한 자연미의 형상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국문과 한문이라는 표현 매체의 상이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사에 도도히 흘러온 국학정신의 맥이 성산가단이라는 하나의 여울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어우러진 아름다움으로 꽃피운 현상이라 보아도 좋을 것다.
    인문/어학| 2010.11.24| 6페이지| 2,000원| 조회(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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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화가사에 대한 분석
    《 개화가사 분석 》- 시대적 상황과 그 반영 양상을 중심으로 -1. 개화가사의 정의2. 시대 상황과 개화가사의 형성배경3. 개화가사의 형식 및 내용 특성3.1. 개화가사의 형식3.2. 개화가사의 내용4. 개화가사의 작품양상4.1. 당대 사회의 부조리 비판4.2. 개화의 필요성 역설4.3. 개화의 구체적 실천의식5. 개화가사의 의의와 한계※ 참고문헌※ 참고자료1. 개화가사의 정의19세기 말,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시작으로 하여 다양한 신문과 잡지들이 발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신문매체들은 독자들에게 당시의 격변(激變)하는 시대상황을 알리고 국민 계몽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개화가사(開化歌辭)는 바로 이렇게 개화기의 새로운 사상을 담아 신문과 잡지에 게재되었던 가사들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개화 가사는 개항 전후에 창작된 동학가사, 의병가사를 비롯하여 , 등에 실린 가사 작품들과 1910년대 신문과 잡지에 실린 작품들까지 모두 포함한다. 하지만 개화가사를 당시 시대적 문제의식을 반영한 작품만으로 한정한다면 에 수록된 작품들로만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개화가사의 개념을 다시 정리한다면, 개화가사란 1900년대 초 자주독립 과 계몽사상 등 개화기 시대정신을 전통적인 가사형식에 담아 표현한 것으로, 에 실렸던 600여 편의 가사작품을 뜻한다. 여기서 전통적인 가사형식은 가창적(歌唱的)요소보다는 문학적(文學的) 요소가 강한, 4?4조의 율격(律格)을 가진 가사형식을 뜻한다. 이는 이 시기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한 시가 장르인 창가(唱歌)가 7?5조의 율격)과 분절체(分節體) 형식), 합가(合歌)), 후렴 등의 음악적 요소를 가지고, 서양식 악곡에 얹어 불리는 가창을 전제로 한 시가장르라는 점에서 창가와 뚜렷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겠다.2. 시대 상황과 개화가사의 형성배경일반적으로 개화(開化)는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받아들여 문명을 계발(啓發)한다는 보편적 의미로 통용된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에서 개화라는 것은, 몇몇으로 나뉜 주요 집단 정도에 따라서 동도서기론(東道西技論))을 주장한 온건파와 변법자강론(變法自强論))을 주장한 급진파로 양분된다.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 조선 사회 내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은 자주독립이었다. 자주독립이 시대의 정신으로 조형되는 데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 강화 과정에 따른 반발 작용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서구의 강대국인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은 조선사회의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에 대한 충격에서 오는 위기감은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에 반영되었고 애국계몽과 자주독립이 조선의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 이후 일본은 고문정치를 시작하였고, 차차 조선의 외교권과 경제권을 장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맺으면서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하였으며, 차관정치를 실행하고 조선 황실의 내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흐름은 당시 조선 사회의 근대화와 개화의 첫 번째 과제로 부국강병과 애국계몽을 삼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애국계몽과 자주독립에 대한 염원은 결사(結社), 신교육, 언론 활동이라는 실체적인 움직임을 낳았고, 이 가운데 언론활동은 범위가 가장 넓은 민중운동으로서 그 역할이 가장 중요하고 무거운 것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 신문의 주된 기능은 계몽성이었고, 민중계몽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식보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하여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는 양식으로 문학이 선택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사(歌辭)가 선택되었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서 언론매체는 가사 작품을 다수 실었다. 대표적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에서 개화가사(開化歌辭)를 많이 다루었다.이처럼 개화가사의 형성은 애국계몽이라는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화기 가운데서도 특히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시기는 문학에서의 사회적 문제의 쟁점화와 해결이라는 책임이 강조되었다. 개화기에 문학은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존재의 목적이 있었다.정리하자면, 일본과 맺은 1876년 강화도조상대적으로 짧은 단형(100구 정도)의 형식이었다면, 양난 이후 조선 후기의 가사는 4.4.조의 율격으로 정형화되어 형식이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후기로 가면 정형화된 형식이 깨어져서 길이가 장형화되고 분연의 형태의 가사가 등장하는 등 형식의 파격이 일어나게 된다.개화가사의 형식은 이러한 조선 후기 가사 형식의 변화 양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개화가사는 3·4조, 4·4조의 율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량이 긴 연형체시가의 형태를 보였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들어서서 신문과 같은 매체의 발달로 이전에 가집형식으로 간행되던 가사들이 개화기에 대중전달매체인 신문과 잡지에 가사작품이 게재됨으로써 지면의 구성, 고정난의 설치 등 편집 방식에 따라서 작품형식에 제한과 규격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발맞춰 개화가사는 점차 쉽게 부를 수 있도록 길이가 매우 짧아졌으며, 이후에는 분련 형식으로 후렴구가 사용되는 등 창가화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3.2 개화가사의 내용개화가사는 이전 가사와는 내용상에서 많이 다른 점을 지니고 있다. 이전 가사들이 우국충정, 임금에 대한 사랑, 자연경관을 내용으로 다루었다면, 개화가사는 계몽, 교육, 서구문물, 문명, 애국, 자주독립을 소재로 한 내용이 많다. 또한 개화가사는 문학적 수사에 비해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특징을 가진다. 사회적 격동기를 맞이하면서 가사의 내용은 점점 더 교술적(敎述的)으로 변해 가는데, 이는 혼란스러운 사회 내에서 집단정서를 형성하기 위해 목적의식이 문학 작품 속에 강하게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20세기에 들어 신문, 잡지와 같은 매체가 가사와 결합하게 되면서 개화가사는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에 실린 개화가사는 거의 모든 주제 영역에 걸쳐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을 보였다. 민족개념을 기초에 두고 국권회복운동의 한 과정으로 창작되었기 때문에 민족과 민중을 가치의 핵심에 두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사회적 지도계층에 대해서는 그 소임에 따라 철저히 비판하였으며, 민중의 습속에 대운 정신을 깊이 봉하여, 아주 먼 옛날의 아름다운 일과 도리를 설명하며 개명하는 일을 비방하고, 넓지 못한 견문을 완고히 지키며 자신의 의견만 옳게 여기고 세상사를 반성하지 아니하고 예전의 진리를 능히 바꾸지 아니하니 수구종자가 아닌가.창기집에 꽃구경하고 여러 가지 노름판에 돈을 걸어 밤낮 구분 없이 어지럽게 빠져들며 번화의 꿈을 깨지 못하고 돈을 물과 같이 하던 날에 몸은 집을 잊고 재산은 생각하지 아니하니 방탕종자가 아닌가아무아무 대관 유력가에 매우 급한 손님을 핑계로 하여,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을 달게 꾀어내며, 역둔토계급의 재무관을 임의로 꾀하여 손에 넣어 상담하고, 많은 재물을 탐하여 취하니 협잡종자 아닌가▶ 는 국가와 민족을 좀 먹는 무리들을 봉건제도 아래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보수만을 추구하는 수구, 향원, 토호 세력 등으로 나누어, 이와 같은 세력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가사와 달리 미신만을 믿는 백성과 이러한 백성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감여 등과 함께, 개화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나타난 협잡배, 방탕세력과 같은 신흥세력을 날카롭게 주시하여, 당대 사회의 부조리함을 밝히고 있는 비판과 풍자의 면모를 한층 더 드러낸다.이는 개화는 물론, 그 이전에 더 근본적인 과제가 놓여 있음을 자각한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각성의 필요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일러 주려 한 것이다.4.2. 개화의 필요성 역설 : ) 대한매일신보 소재의 개화가사로서, 작자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개화기의 지식인에 의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國政으로말하여도變易하지아니하면不成富强이아닌가腐敗習俗改革하고亂暴政令除去하여全國人民모러다가精修甲兵한然後에爭衡天下하려니와舊習들만직히며는富强키는姑舍하고人種까지亡할지니變치않코못되리라天地萬物勿論하고窮하거던變할지며變하며는通하나니國家이나人民이나天地間의一物이라危亡之時當하여서變革할줄모르며는永久維持못할뿐에他人에게빼낄지니變而爲興좋을손가不變爲亡좋을손가請自擇焉할지어다)국정으로 말하여도 恨歎?며痛哭키로지?들이感動?야義捐金을募集後에學校?지設立?고열심으로敎授?니經世鐘이?겻고나)삼화항의 지사들이 교육을 열심히 하기로 해서 상제께서 시험하고자 풍우를 크게 만들어서 삼흥학교를 열었더니 여러 지사들이 힘을 합하여 의연금을 또 내어서 잃어버리지 않는 성지를 거듭 수리하니 경세를 울리는 종이 생겼구나인천의 화도 초동들은 문명할 이 시대에 교육받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통곡하니 지사들이 감동해서 의연금을 모집한 후에 학교까지 설립하고 열심히 교수하니 경세를 울리는 종이 생겼구나.▶ 앞의 연에서는 지사들이 자연 재해나 악조건을 의지로 극복하면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열의를 칭송하였으며, 뒤의 연에서는 가장 하층민인 초동들이 향학열에 불타고 지사들이 교수에 열중하는 모습을 감격적인 어조로 묘사하였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농민이나 노동자 등 새로운 교육의 수혜자를 강조하면서 개화시기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해야 하는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5. 개화가사의 의의와 한계앞서 본고에서는, 열강에 의해 문호개방이 이루어지고 근대적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에서 문학 작품, 특히 가사작품에 개화기 당시의 시대의식이 반영된 양상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다. 개화가사는 주로 신문을 매체로 해서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그들의 계몽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개화가사 작품은 비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됨과 동시에, 문학작품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여 민중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며, 또한 호소력 있게 당대의 시대의식과 계몽에 대한 혁명적 민중의지를 역설했다. 이 점에서 개화가사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당시 사회의 모습과 당시 민중들이 가졌던 의식과 사상이 지향하는 방향을 잘 알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진다. 개화가사는 당대 사회에서 민중 계몽의 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한 점에서 계몽적이고, 나아가 교육 등 구체적인 개화사상의 실천 양상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다.그러나 개화사상의 형성과 내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민중과의 문제일가
    인문/어학| 2010.11.24| 12페이지| 2,0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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