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 현상의 진단 및 향후 추이1. 분단 배경2. 남북분단의 과정3. 남북분단이 갖는 타국들과는 다른 의미4. 남북의 분단이후 통일에 대한 동상이몽(同床異夢)5. 남북통일의 장애요인과 극복방안6. 나의 생각1. 분단 배경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의 한 부산물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패전국 독일의 분할과 다르고,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 분할과도 차이를 가지고 있다.제2차 세계대전 처리 과정에서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적군 지역으로서는 한반도와 독일을 들 수 있다. 독일은 전쟁 도발국가였으므로 분할을 이해한다지만, 일제의 식민지로 피해자였던 한국의 분단이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합국들은 독일이 다시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독일의 힘을 분산하기 위해, ‘독일분할안’이나 ‘독일중립안’을 독일 항복 전에 구상하다가, 항복 뒤 45년 7월 26일 독일과 베를린 시는 각각 4개의 점령지대와 점령지구로 분할했다.베트남은 오랜 세월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받아 오다가, 2차 대전으로 일본이 침략해 들어왔다. 2차 대전 끝난 뒤 프랑스는 일본의 베트남 식민지 자리를 다시 빼앗고 분할통치하려 했다. (프랑스는 1950년대 중반 베트남의 무장독립항쟁에서 손을 땠고, 대신 미국이 식민지 대리통치자로 들어와 고딘 디엠을 남베트남에 앉혔다. 어쩌면 해방 당시 한국과 베트남은 비슷한 처지로 강대국에게 끊임없이 분할 점령 위기에 있었다.)세계대전 중 1942년 후반에 미국의 반격으로 연합국 전세가 호전되자, 1943년 초부터 전후의 평화와 안전보장 기구의 문제가 연합국 사이에 논의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연합국 중 미국은 일제의 점령 아래 있던 아시아 식민지역의 전후 처리에 관심하면서, 한국의 미래에도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대전을 치른 후 강대국들은 제국주의 본질을 보였는데, 그게 바로 전후 식민지 민족과 국가를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려고 치밀한 계산을 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한반도 분단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한반도 신탁통치안은 해방된 아시아 식민지 인민들을, 강대국의 후견 아래 민주 제도 속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지론을 반영한 것으로서, 1943년 3월 루즈벨트는 미영의 전후 처리회담에서, 만주와 대만을 장개석의 중국에 반환하되 베트남과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그 해 11월 20일 미중영의 카이로 공동선언에서 한반도를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여 자주독립을 잠정으로 유보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11월 28일 테헤란의 미·영·소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간의 수습기간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자, 스탈린은 이에 대한 동의를 표시했다.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의 사망 뒤 미국과 소련은, 미·소·영·중의 ‘단기간 신탁통치’가 한국에게 독립국가로서 최선의 출발이며 장래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다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아래 과도정부의 성격과 한국의 군사점령 및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얻는 시기 등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음으로써, 뒷날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7월 26일 연합국은 마지막 회의였던 포츠담 회담에서조차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 정도에 그치고, 한반도의 장래에 관해 아무런 분명한 설계를 마련하지 않은 채, 일제의 항복으로 한민족은 해방을 맞는다.결국 한반도에 대한 국제합의가 없었던 관계로, 맥아더는 9월 2일 일본 항복의 공식서명과 함께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를 포고하며, 한반도 38도선 이북의 일본군 항복을 소련이 담당하고 이남의 일본군 항복을 미국이 접수한다고 규정했다.해방 한국에 대한 미국 등 연합국의 시나리오의 주제는 ‘신탁통치’였다. 소련은 북한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로 김일성을 중심한 임시정부수립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에 반해, 남한 미군정은 일본 총독부의 모든 기관과 협력하여 식민지 체제를 그대로 현상유지하고 점령정책을 펴면서, 미소공위를 통해 한국 통치안을 협상하고 있었다.미군정은 남한 진주를 하며 군정 천명과 함께 일제의 행정관리의 계속 집무를 명령했다. 해방된 한국에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합법화하되, 오히려 3.1 운동 이래 사실상 임시망명정부의 역할을 수행해 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국내의 건국준비위원회를 변형한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하지 않았다.이러한 미국의 점령정책은 한민족의 구심점을 약화하여 임시정부의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을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했다. 그리고 미국은 해방 후 한민족의 정치 결집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세력을 약화하는 바람에, 부일세력 친일파 반민족주의자들이 정치 공백기에서 민족에게 심판을 받지 않고, 기득권을 되찾도록 해 주었으며, 결국 재빠르게 신생 조국의 주도권 잡도록 도왔다.2. 남북분단의 과정1) 광복 직후 - 미·소의 군정 실시· 38도선 남쪽 : 미군 진주,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 체제 도입· 38도선 북쪽 :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 도입2)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5년간의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결정(1945.12)· 반탁 운동 전개 : 신탁 통치는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과 독립 의지를 무시하는 결정· 찬탁 운동 : 북한 측도 처음에는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아 찬탁 운동으로 급변→이는 민족의 이익보다 계급과 당의 이익을 우선하는 행위→ 결과 : 자주 독립의 영향 약화, 강대국들의 한반도 문제 개입 명분 제공, 분단 고착화의 원인3) 미·소 간의 냉전· 1,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반탁 세력과 찬탁 세력을 자신들 나라에 유리하게 이용하려 하였음4)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 상정· 북한의 공산당 정권 수립 추진· 1946년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라는 공산당 정권 수립에 미군정이 자극을 받음·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 유엔 총회의 결정(1947.9)·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구성, 위원단 감시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남북한 자유 총선거 실시하여 통일 정부 구성할 것 결정· 38선 이북 지역에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입북을 거부· 위원단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유엔 소총회)5) 김구, 김규식의 민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남북 협상을 위하여 입북 하였으나 김일성의 정치 선전에 이용되어 실패함6) 남북한 각각의 정부 수립 - 남북한의 정치적 분단· 남한총선거 실시(1948.5.10) : 제헌 국회의원 선출헌법 제정 공포(1948.7.7)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1948.8.15)유엔 총회에서 합법 정부 승인(1948.12) : 유엔 3차 총회· 북한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1946.2) : 실질적인 북한 공산정권임선거 실시, 최고인민회의 구성(입법위원 선출)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 선포(1948.9)7) 6.25 전쟁(1950.6.25)·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됨· 분단의 고착화와 적대 관계3. 남북분단이 갖는 타국들과는 다른 의미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한반도, 독일, 중국, 예멘, 베트남이 분단국가가 되었으나, 월남(1975년), 독일(1990년), 예멘(1991년)이 정치적 통일을 이룸으로써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한반도와 중국만이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여타 분단국가들의 경우와는 몇 가지 상이점을 지니고 있다.첫째, 독일의 분단 과정은 국민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2차 대전 이후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분단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분단 이후 동족상잔이라는 전쟁을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동족 간의 불신. 적대감이 없이 민족 공동체 의식을 어느 정도 유지한 반면, 남북한은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치룬 결과 동족 간의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극에 달해 민족 이질화 경향이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둘째, 한반도와 중국은 이념을 달리하는 대립되는 두 개의 체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전을 거쳐 극단적인 민족 분단을 체험하였고, 따라서 민족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싸움이 치열하였으며 통일 문제를 둘러싼 선전과 역공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국내의 정치 세력들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국토가 분단되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경우와는 다르다.셋째,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한반도는 베트남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의 경우는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룬 월맹 쪽의 민족사적 정통성 주장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가졌으나 한반도의 경우는 처음부터 민족사적 정통성이 남한 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정이 달랐다. 이런 점에서 남북통일의 의미는 단순히 분단 국토의 통일이라는 차원에서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4. 남북의 분단이후 통일에 대한 동상이몽(同床異夢)(1) 남한에 있어서의 통일-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 → 통일 문제는 '같은 민족은 마땅히 함께 살아야 한다'는 당위론적 문제- 남한 통일 정책의 특징 - 평화·민주·자주의 원칙(2) 공화국별 통일정책1) 제 1 공화국의 통일 정책 (1948∼1960)UN 감시 하에 자유 총선거 실시북한 정권 수립과 6·25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2) 제 2 공화국 (1960∼1961)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통일 논의 활발군부 쿠데타 세력- 반공을 국시로 하고, 통일을 위한 실력 배양을 내세 움3) 제 3 공화국 (1963∼1972)평화 통일 구상 선언 (1970. 8. 15) - '선의의 경쟁' 강조7·4 남북 공동 성명(1972)4) 제 4 공화국 (1972∼1979)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평화 통일의 3대 기본 원칙 수립5) 제 5 공화국 (1980∼1988)'남북한 당국 최고 책임자간 직접 회담' 제의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6) 제 6공화국 (1988∼1993)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7.7 선언)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 통일의 기본 원칙 (자주, 평화, 민주)7) 문민 정부 (1993∼1998)3단계 3기조 통일 정책- 3단계 (화해, 협력→ 남북 연합→ 통일 국가)
서울대공원 동물원의문제점과 개선방안얼마전에 가본 서울대공원의 동물원은 7년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아 친근감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7년전이나 지금이나 동물원은 무엇하나 개선되지 않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에게는 살아가기 위해 적합한 환경이라는 것이 있으며 인간이 살아가는데 최소한 1인당 7평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듯이 동물들에게도 적합한 생활환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물원의 동물들에게 적합한 환경은 무엇일까요? 물론 동물들에게는 본래의 야생에서 사는 것이 최고의 환경일 것입니다. 하지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동물원에서 사는 동물들에게는 야생과 같을 수는 없지만 야생과 비슷한 생활환경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아닐까 합니다.1. 서울대공원 동물사육환경의 문제점동물원의 동물사육에는 사육장의 크기와 주변환경이 중요합니다. 주변환경이란 동물이 생활하는 사육장의 바닥, 사육장내의 시설과 식생, 사육장의 온도와 채광 등으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1) 사육장의 크기서울 대공원에 가보신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처음 동물원입구에 들어서면 동물원이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사는 동물의 밀도입니다. 동물의 수가 많다면 그에 맞는 사육장의 크기를 갖춰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들은 자신이 생활하던 환경과 달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이상행동을 보이거나 수명이 짧아지는 등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코끼리입니다. 야생의 코끼리는 열대 기후에서 살고 있으며, 하루 중 상당 시간을 먹이를 먹으며 보내는데 물과 먹이를 찾아 하루 평균 17㎞를 이동합니다. 그런데 동물원의 코끼리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난 풀을 뜯어먹을 수 없습니다. 유럽동물원의 조사에 의하면 동물원의 코끼리는 스트레스로 인해 암컷 코끼리의 35%가 새끼를 낳지 못하며, 아시아코끼리의 20% 가량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고, 어미가 새끼의 6-18%를 돌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야생에 있을살지 못하는데, 동물원에서 살고있는 아시아코끼리 수명은 벌목에 이용되는 코끼리 수명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벌목에 이용되는 아시아코끼리 가운데에는 79살까지 살았던 기록이 있으나, 유럽 동물원에서의 평균 수명은 15살밖에 되지 않는다고하는데, 코끼리수컷이 10-15살을 전후하여 성적으로 성숙하면 무리를 떠난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평균수명 15년은 엄청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코끼리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는 코끼리가 아무 이유 없이 제자리에서 앞뒤로 왔다갔다하거나 머리를 늘어뜨리는 행동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서울 대공원의 코끼리 뿐 아니라, 전 세계 동물원의 코끼리의 40%가량이 이러한 이상행동을 보인다고 합니다.(2) 동물이 생활하는 사육장의 바닥사육장의 바닥은 동물이 서식하는 자연 환경과는 전혀 다르게 대부분 콘크리트이거나 척박한 흙바닥입니다. 흙바닥인 경우 표면을 덮고 있는 식물이 없어 토양이 심각하게 유실되거나 침식되어 있습니다. 코끼리와 같이 진흙에서 목욕하기를좋아하는 동물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얼룩말, 코뿔소, 사슴과 같은 초식동물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바닥에 풀한 포기 없다. 콘크리트 바닥의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흙을 밟으면서 숲에서 사는 로랜드고릴라는 두발의 엄지와 검지 발가락을 이미 잃은 상태이며, 거친 바닥에 의해 상처가 쉽게 생기고 곪은 상처 부위가 계속 콘크리트 바닥에 닿게 됨으로써 악화된다고 합니다. 유인원, 곰, 물개류 사육장도 모두 콘크리트 바닥인데, 한여름 땡볕에 달아올라 엄청난 열기가 발생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내 사육장은 전부 콘크리트 바닥으로 되어있고 약간의 건초를 깔아주기는 하지만 너무 적은 양이기 때문에 거친 바닥을 푹신하게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파리의 한 동물원의 유인원관 바닥이 두껍고 푹신한 재질로 덮여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독일 베를린동물원의 아시아코끼리)(3) 동물을 위한 시설 및 식생동물의 습성과는 것은 동물이 본래의 습성을 잃지 않고 동물원에서 살아가는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사육장은 모두 획일화된 콘크리트 구조로 이를 배려한 시설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지능이 높고 활동적인 유인원을 위한 놀이 기구나 시설은 매우 중요하지만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설치된 철봉을 비롯한 놀이 기구는 너무 조악하며, 유인원의 습성과 생태 환경을 고려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그리고 동물사육장의 배치의 문제도 있습니다. 엘런드를 비롯한 초식 동물의 사육장은 사자와 치타 사육장 바로 앞에 있는데, 자연 환경에서 포식자와 피포식자로 항상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물들의 사육장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초식 동물의 사육장에서는 실제 사자와 치타가 보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사자의 울음 소리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싱가포르 동물원의 침팬지)(4) 온도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자랑이기도 한 세계 곳곳에서 온 동물들이 전시되어있다는 것은 온도의 면에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서울대공원의 시설은 동물들에게 자연 서식지와 유사한 환경은 마련해주지도 않고 다양한 동물이 모두 우리 나라의 기후에 적응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북극곰을 비롯한 추운 지방에서 온 동물은 겨울 이외에는 우리나라의 더운 날씨를 대책없이 견딜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동물의 사육장은 냉방기를 사용해서 항상 적정한 저온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리가 부담스럽거나 실현하기 힘들면, 적절한 서식환경을 조성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북극곰의 도입을 포기한 대만의 경우처럼 이런 동물을 들여오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따뜻한 지방에서 온 오랑우탄, 고릴라, 코끼리와 같은 동물들은 자칫 감기에 걸릴 위험에 처해 있는데, 실제 올해 봄 코끼리가 환절기 감기에 걸려서 죽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5) 채광야행성 동물관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채광의 관리가 세심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곳인데 올빼미, 부엉이, 박쥐 등 야행성 동물의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처럼 어둡게 하고 밤에는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둡게 채광이 유지되어야 할 낮 시간에 실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사육장의 환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통로의 문을 열어둘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밤낮 빛이 들어오는 사육장에서 야행성 동물은 24시간 내내 편안히 쉴 수 없습니다.2. 외국의 동물원(1) 싱가포르 동물원세계에서 가장 볼거리가 풍부한 동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천, 암벽, 식물군과 같은 자연 장벽을 관광객과 동물들을 분리시키는데 이용함으로써 열린 동물원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40종을 포함하여 240여종의 2,000여마리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동물원의 오랑우탄 보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멸종 위기에 처한 이 동물은 큰 집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 동물원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오랑우탄과 함께 차를 마시고 아침식사를 즐길 수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보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열대지방에서 최초로 북극 곰이 탄생하였으며, 말레이 호랑이, 황금 타마린 원숭이(golden tamarin), 치타, 실론등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동물원의 침팬지와 서로다른 초식동물)(2)영국의 동물원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명한 동물원 가운데 하나인 영국의 런던동물원에는 코끼리가 없습니다. 지난해 12월 4일, 런던동물원에 있던 세 마리의 암컷 아시아코끼리를 더 넓은 곳으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에딘버러동물원에도 코끼리가 없습니다. 대신 커다란 코끼리 석상이 하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동물원에서는 코끼리에게 필요한 여러 환경을 조성해 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코끼리를 사육하지 않는 동물원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3)프랑스의 사파리식 동물원이 동물원에서는 넓은 공간의 사육장을 갖추고 자유로이 누비는 동물들, 특히 초식 동물이 활발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리의 또다른 동물원에서는 관객이 사육장 안을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정 이 특정 지점을 제외하고는 사육장 주변이 나무나 키가 큰 덤불로 둘러싸여 있어서 동물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동물의 식생을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3. 서울대공원의 노력2005년 서울대공원은 콘크리트 바닥의 열악한 유인원관 야외방사장을 비롯해 레서팬더, 사자사 등의 온돌방석 설치, 들소사 내의 번식장 조성공사 실시 등 모든 열악한 동물사 환경을 생태계에 가까운 전시관을 조성하는 등 친환경적인 리뉴얼사업 추진으로 생태형 동물원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존 관람객들의 동물원 단순관람 운영 시스템을 각 동물사마다 사육사와 함께 먹이도 직접 주는 등 만져보고, 안아보고,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는 다양한 사육체험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했으며 기존의 동식물 및 곤충교실 등 관람객 참여프로그램을 확대 실시하여 관람객 참여도를 넓히는데 노력했습니다.4. 동물원의 발전방안동물원이 7년전과 비교해 사육환경면에서 개선되지 않은 것은 많은 부분 경제적인 문제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동물원은 서울시의 지원에만 기댈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입장료의 인상이나 프로그램의 다양화를 통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동물원을 생태적으로 바꾸어 운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1) 입장료의 인상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입장료는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입장료가 3000원(성인 기준)인데 반해 호주 시월드의 자유이용권은 65달러(호주달러)로 약 5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동물원 입장료가 얼마인지 모르고 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동물원 입장료가 너무 저렴하여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입장해서 사육시설이나 동물원의 편의 시설을 보면 입장료가 저렴한 이유를 알 것입니다. 사람들은 효용에 맞는 가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물원에서 얻어가는 효용에 비하면 동물원 입장료 3000원은 너무나도 저렴해서 무료와 다름없합니다.
북핵관련 주변 강대국들의 입장1. 미국의 입장2. 중국의 입장3. 일본의 입장4. 러시아의 입장5. 한국의 입장6. 나의 생각1. 미국의 입장1) 미국은 북핵문제를 본질상 국제안보의 문제로 보며, 9 11 이후 현실화된 대량살상무기 반확산 조치의 핵심 사안으로 간주.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입장이며,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물질적으로 보상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 미국이 인식하고 있는 북한의 입장과 기대는 안전보장이 단순한 법적담보가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라는 군사적 담보와 한미군사 동맹의 해체를 겨냥하고 있다고 봄. 6자회담 이전까지 북핵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기본입장은 북미 직접 대화 불가, 핵 포기에 대한 물질적 보상 불가, 대량살상무기 확산불용 등이었음.- 북한의 핵폐기 이행시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미·북 관계 정상화를 목표로 하여 미사일, 재래식 군사력 등 여타 북한관련 주요사안해결을 추진한다는 개략적 방안 제시. 미국의 대북핵외교의 기본원칙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CVID)와 다자회담의 틀을 통한 대화임.- CVID원칙은 북한의 플루토늄프로그램,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그리고 현존하는 핵무기들을 포함하는 모든 핵 프로그램들을 최근의 리비아의 경우와 같이 검증 가능하고, 다시 재구성할 수 없도록 폐기해야 함을 의미.- 국제사찰단의 입국 및 감시활동 허용, 1994년 이전 핵에 대한 설명과IAEA의 규범 준수, 플루토늄 및 우라늄 방식의 핵 폐기, NPT로의 복귀 등을 요구.2. 중국의 입장1) 중국은 북핵문제가 대두된 2002년 10월 이후 북핵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평화적인 해결, 양자간 대화에서 다자간 대화에 이르기까지 대화를 통한 해결, 북한 안보상의 우려에 대한 고려 등을 기본 입장으로 취해옴.- 중국은 북미간의 직접적인 대화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다자형태의 틀 속에서 양자간 대화를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여6자회담을 성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 밖과 위상의 제고를 추구하는 것임. 동북아 전략상의 고려가 중국의 기본 입장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할 필요.- 중국은 2002년 국내 정치 이양 기간 동안 북미간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해왔음. 중국의 최우선 관심은 조중 국경의 안정과 평화라는 것이 중국 지도부의 일반적인 견해임.2) 2003년부터 북미 양쪽에 같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결정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서 50회 이상의 메시지를 양측에 전달. 중국 정부는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이견 해소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함.- 중국 정부는 북미 양쪽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미국에 대한 자극적인 행동을 중단할 것을 북한에 경고하면서 이 경고를 뒷받침하는 조치로 2003년 2월말 사흘 동안 대북 송유관을 폐쇄했었음.- 이와 동시에 중국은 미국이 유엔 안보리를 통해 북한의 NPT 탈퇴에 대해 견책하려는 것을 막고, 김정일에 대한 제재 조치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힘.- 이런 일이 있은 직후 북한은 베이징에서 제임스 켈리 부차관보를 만나기로 동의.3) 중국은 2003년 7월에 개최된 한중 정상회담이후 북한과 미러일 등 다른 참가국들 사이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다자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평양을 방문해 다자회담의 수용을 타진하고 워싱턴을 방문해서 북한의입장인 북미 양자간의 대화를 통해 북한의 안보우려를 해소할 방안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와 일본도 방문.4) 중국은 일본의 다자회담 참여에 소극적이던 태도를 적극적인 자세로 바꾸어 일본의 입장을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역할을 함.- 북일간의 양자회담에서 납치문제가 거론될 것임을 알고서도 북한이 양자회담에 동의하게 된 것도 중국의 중재 역할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음.중국이 이렇듯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공산당 내의 고위 관리들이 베이징이 북 핵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았다가는 중국 안보에 필수적인 동북아에서의 지역 내 영향력을 잃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인 군사적 위협의 원천으로서, 대북 외교도 포용과 봉쇄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음. 국교정상화를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2002년 10월 교섭을 재개했으나 납치사건과 핵문제로 대립하여 이후 중단.- 일본은 2002년 9월 17일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자주적인 이니셔티브에 의해 대북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경주한 바 있음.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 이후, 예상외로 불거진 납치자 문제에 대한 일본 국민의 부정적 여론 확산이 국교정상화 교섭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함.2) 일본에게 있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는 전후 외교숙제의 하나로 남아있는 동시에, 군사적 위협의 원천으로서 이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는 이중적 요구에 직면해 있음. 따라서 일본의 대북 외교도 관여(engagement)와 봉쇄(containment)라는 양면성을 띄고 있음.-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적대관계를 청산함으로써 군사적위협을 원천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북한의 군사적 위협현실을 인정하고 대북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양면적인 접근을 시도한것으로 볼 수 있음.3) 일본의 북한 핵에 대한 입장은 그 기본에서 미국과 거의 차이가 없음.- 일본도 CVID를 주장.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주임 연구관인 다케사다(武貞秀士)는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경우의 위험을 국제테러리즘과의 연계, 핵확산 문제 등을 언급하며 북한이 핵을 만들고자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을 통일하려는 것 이며 이를 위해 미국과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서 주한 미군을 철수 시켜야만 하며, 유사시 미국이 또 다시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무기들 대량 파기무기를 보유하야만 한다” 고 주장.4) 일본은 6자회담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 핵무기의 개발 보유 이전 절대 불용, 기존의 모든 국제합의 준수, 북한 핵 프로그램의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형태로 속히 폐기할 것 등을 주장. 일본은 북한이 핵폐기를 향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경우 에너지 지원도적절한 시기에 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핵, 탄도미사일, 핵화 지지하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 특히 러시아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불가피하게 일본 등 역내 국가들의 핵무장 등 군비 증강을 촉진시킬 것이며, 또한 여타 지역, 특히 러시아 남부 이슬람권 국가들로 이들 대량살상무기 및 이의 운반수단이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음.- 러시아는 소련 시대부터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및 이의 운반 수단의 확산을 저지 또는 축소시키기 위한 국제적 노력(예: NPT, CTBT,MTCR, CWC, BWC 등) 또는 미국과의 양자 노력(예: START I, SORT 등)에 적극 동참해 왔으며, 이러한 정책은 러시아의 공식적인외교·안보 문건들(예: 국가안보개념, 군사독트린, 외교정책개념 등)에 명시되었음.2) 이바노프 외무장관은 2003년 2월 20일 북핵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미·북 직접 대화가 필요하다면서 이를 중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힘.- 러시아는 중국과 공동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핵 개발을 포기하도록 설득시키는 대북 설득 작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미국에게도 대북 직접 대화를 촉구하는 양국 외무장관 명의의 공동성명(2003. 2. 26)을 발표하기도 하였음.3) 北核문제의 해결을 위해 러시아는 ‘일괄 타결’(package deal) 방안을 제의하였음.- 한반도 비핵화 및 제네바 합의 등 국제적 의무 준수, 양자 및 다자 차원의 대화 재개 및 이를 통한 대북 안전 보장 제공, 대북 인도적·경제적 지원 재개 등을 포함하고 있음.- 2003년 1월 18~20일 로슈코프 외무차관을 대통령 특사로 북한에 파견,김정일 등 북한 고위 인사들과 면담케 하였음. 로슈코프 특사는 북한의 의견 청취 및 국제 사회의 우려 전달 등을 수행하면서 러시아가 마련한 ‘일괄 타결’ 및 ‘다자 안전 보장’ 방안을 제의하였음.4) 러시아는 미·북간 불가침 조약 체결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 주자고 주장함.- ‘다자 안전 보장’ 방안은 미·북간 불가침 조약 체결이 미·북간 불가침 조약의 체결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북한 외에 한반도 주변국들은 물론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 또는 보유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북한 또한 어떤 형태로든확실한 안전 보장이 제공될 경우, 경제 이익을 위하여 핵무기 개발을포기할 것이라는 인식에 기인함.러시아는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은 로슈코프 특사의 방북시 제시한 포괄적 구상에 포함된 일괄 타결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5. 한국의 입장1) 한국은 2003년 8월말 베이징 1차 6자회담에서 북한핵문제 해결방안으로서 3단계 상호 병행조치를 제안.- 1단계 : 문제 해결 의지 표명- 2단계 : 핵폐기 이행과 이에 상응하는 관련국 조치- 3단계 : 핵문제의 관심사항이 해결되면 참여국간 포괄적 관계 개선2) 한국은 2004년 2월말 베이징 2차 6자회담에서 북한의 ‘핵동결 대 대응조치’제안에 대해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핵활동, 핵물질 및관련시설을 동결하고, 이를 검증하며, 핵폐기안 마련을 위한 단기간의동결을 제의하고, 북한이 이를 수용할 경우 동결기간동안 잠정적으로에너지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제의.- 한국은 동시에 3단계 대북 안전보장을 제안. 1단계로 북한이 핵폐기의사를 표명하고 나머지 참가국들의 다자 안전보장을 문서화하고, 2단계로 대북안전보장 공동선언을 통해 잠정적으로 북한에게 실효적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3단계로 북한의 핵폐기 마무리 단계에서 항구적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것임.- 한국은 6월말 베이징 3차 6자회담에서 다음과 같이 요구첫째, 북한이 모든 핵프로그램을 국제적 검증하에 투명하고 철저하게폐기할 것을 요구둘째, 북한이 모든 핵프로그램을 일정기간 내에 신고할 것을 제안셋째, 동결기간중 중유지원, 북한의 에너지 수요 연구사업 개시, 잠정적 안전보장 제공,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및 제재 완화를 위한 대화개시를 제안하고,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관계 정상화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 하며, 북한의 국제사회와의 경제협력
냉전/탈냉전/화해협력 시대의남북한 관계1. 용어정리2. 냉전시대의 남북관계3. 탈냉전시대의 남북관계4. 화해협력시대의 남북한 관계(문화적 측면 위주)5. 나의 생각1. 용어정리[냉전(冷戰, cold war)]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전쟁으로, 열전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냉전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평론가 W.리프먼이 저술한 (1947)이라는 논문에서 비롯되었고, 미국의 재정전문가이며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버나드 바루크가 1947년 의회토론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보통 1945년부터 1991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때까지를 냉전시대라고 본다.2. 냉전시대의 남북관계1) 냉전기의 남북관계 연표연 도 별 발 생 사 건1945.08.151945.09.021948.08.15 - 09.091950.06.251953.07.271968.01.211971.09.201972.07.041976.08.181983.10.091986.09.20 - 231991.12.10 - 13일제의 35년간 식민통치에서 해방연합군 최고사령부, 북위 38도선 경계, 미소 양군의 한국 분할 점령책 발표남-대한민국 수립, 북-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북한 남침, 6.25발발휴전협정 조인북한, 무장공비 31명 남파, 박대통령 암살 시도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제1차 예비회담7.4 남북공동 성명 발표북한군,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서 집단 도끼 만행한 테러범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발생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 상호 교환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독일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분단도 냉전으로 인한 것이다. 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미 ·소 양국은 카이로회담의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 위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남한과 북한을 점령하였다. 이들의 점령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사회질서유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38선을 경계로 북한은 소련에 의해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섰고, 남한은 미국에 의해 자본주의체제가 수립되어 양체제의 대결이 첨예화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5관계는 여전히 소원하였다.남북대화의 추진. 남북관계의 개선과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미·소의 양국적 냉전구조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1970년대 이전까지는 남북간에 실질적인 대화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소간에 평화공존이 모색되는 등 한반도 주변정세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남북한은 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평화통일구상」을 선언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1971년 8월 20일 남북 간의 최초의 대화인 적십자회담이 성사되었고 이어 남북 당국간의 비밀접촉을 통해「7·4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운영되었다. 그러나 남북 간에 대화통로가 트였다는 역사적 의의는 있었지만 구체적 진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다.1980년대에는 남북총리회담을 위한 실무접촉, LA올림픽경기대회 남북단일팀 구성·참가를 위한 남북체육회담, 로잔느 체육회담, 1984년 수재물자 인도·인수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남북경제회담, 남북 국회회담예비·준비접촉,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등 남북 간에 다양한 접촉과 대화가 이루어졌다.그 중에는 1985년 9월 20일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50명)과 예술공연단(50명)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국제경기대회 남북단일팀 구성·참가를 위한 남북 체육회담을 계기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으로 참가하였다. 특히,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8차례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발효시키고, 3개분과위원회(정치, 군사, 교류·협력)를 구성·운영하였으며, 5개 공동위원회(화해, 군사, 경제교류·협력, 사회문화교류·협력, 핵통제)를 설치키로 합의함과 아울러「화 부속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발효시켰다.이로써 남북이 화해와 협력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 틀을 마련, 교류·협력시대로 진입해 가는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국민의 정부」는 1998년 출범이래 남북한 문제는 남북당국간 직접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실천에 역점을 두었다. 이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실천이 무엇보다 시급하며, 남북기본합의서가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정상화시키는 기본틀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국민의 정부」는 한·미 공조체제 유지와 중국의 협조를 바탕으로 4자회담을 병행 추진하여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했다.3. 탈냉전시대의 남북관계1) 탈냉전기의 남북관계 연표연 도 별 발 생 사 건2000.03.092000.06.13 - 152001.11.092001.022002.04,092003.02,07,08김대중 대통령 [베를린 선언]김대중 대통령 방북, 남북정상회담(06.14), 6·15남북공동선언제6차 남북 장관급회담(~14, 금강산)제3차 이산가족 상봉제4,5차 이산가족 상봉제6,7,8차 이산가족상봉북한은 1999년부터 주변 4강과의 관계 재정립 시도를 비롯해서 전방위적으로 대외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남북관계 개선도 추구해 왔다. 북한의 대남노선이 전방위적인 대외관계 개선과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대남전략에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북한은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남전략을 공산화 혁명전략의 틀 속에서 구사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내부자원 고갈, 외교적 고립 심화라는 심각한 도전에 부딪히면서 대남전략면에서 과거와 같은 강경일변도의 혁명전략적 성격이 보다 더 유연해졌다. 즉, 북한은 군사적으로는 남한과 대치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남한의 지원을 받는 양면적 접근을 통해 체제유지를 위한 생존 전략적 측면이 크게 두드러지고 있다. 물론 북한으로 하여금 대남전략을큰 요인은 심각한 경제난이다.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은 이러한 북한의 변화된 대남전략 구도를 잘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지난 몇 년간 외부 경제지원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당장 크게 도와줄 나라가 남한밖에 없다는 현실을 절실히 느껴왔다. 여기에 1999년부터 지도부가 국가기능의 정상화에 적극 나섰기 때문에, 식량 외에도 산업자원 조달을 위해서 외부지원이 더욱 필요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북한은 그 동안 의구심을 풀지 못했던 남한의 포용정책이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음모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대화의 가능성을 열기 시작했다.북한 지도부의 체제 안정감 회복도 대남관계 개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북한체제는 1998년 하반기부터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되찾기 시작하였다.한편 북한은 2000년부터 대외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면서 국제사회로부터 남북대화 요구를 줄기차게 받아왔다. 전통적 우방인 중국의 장쩌민 주석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공식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요구했으며, 갓 수교를 한 이탈리아 외무장관조차도 평양을 방문하여 같은 주문을 하였다. 미·일도 협상 과정에서 남북대화를 요구했으며, 대부분의 서방 기업이나 경제기관들은 대북 진출을 유보하며 남북관계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 지도부에게 남북관계 개선이 없는 한 그들의 대외관계 확장전략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깨닫도록 했을 것이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갑도 정상회담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02년 2월 16일 김정일 생일 60회를 맞이하여 그의 지도영역을 통일분야까지 확장하고, 나아가 강성대국 건설을 선언하거나 그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천명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상회담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보았을 것이다.이처럼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하게 된 배경은 그들의 대남전략이 과거의 혁명전략에서 생존전략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그들의 전방위적인 대외관계 개선전략도 남북관계 개선과 연계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여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해 오고 또한 남한과 함께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에 대해 생존을 위한 전략적 변화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그 동안 북한이 취해온 행태의 연장선에서 여전히 전술적 변화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의 태도를 전략적 변화로 파악하든 아니면 전술적 또는 정책적 변화로 이해하든, 이제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는 점이다.즉, 북한의 대남전략이 냉전시대의 혁명 전략으로부터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유지발전이라는 생존전략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북한이 통일방안에 대한 입장변화를 보인 것도 이러한 북한지도부의 인식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6·15 공동선언이 채택된 이후 남북관계 특히 북한에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북한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상으로는 실리가 중시되고 있고, 남한과 교류·협력 사업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 비난 자제 등 대남 보도 논조가 변화됐고, 국제무대에 활발히 나서고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2001년 초부터 북한내에서 '쇄신', '변혁', '혁신' 등으로 일컬어지는 '신사고'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전개되면서 각종 변화가 눈에 띄기 시작했지만 여기에는 남한 당국의 일관된 대북 화해·협력정책과 유관국들의 지지협조가 주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4. 화해협력시대의 남북한 관계(문화적 측면 위주)(1) 문제점1) 제도적 문제①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의 법리적 충돌하고 있다는 일부주장② 저작권법: 북한과의 협의가 필요, 북한의 국제적인 협약의 미가입으로 남한의 일방적 권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저작물을 무단 복제하는 실정③ 정부 부처의 정비 미비: 관련 부서와 통일부의 이중적 관계④ 영리적 목적의 교류⑤ 교류협력기금 제공의 미비: 자본력이 있는 기관이나 단체만이 교류 추진⑥ 기초자료의 부실: 교류 단체나 기관 등에보 부족
1. 통화지표의 종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금융자산중에서 어디까지를 통화(돈)로 보느냐에 따라 협의통화(M1), 광의통화(M2), M3 등으로 통화지표를 구분.편제하여 정책지표로 이용 우리나라의 통화지표통화지표포 괄 범 위대상 금융기관M1(협의통화)현금통화와 요구불예금(당좌예금, 보통예금 등),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저축예금, MMDA, MMF 등)예금취급기관(중앙은행, 일반은행, 특수은행, 수출입은행, 종금사, 투신운용사, 은행신탁, 상호저축은행, 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상호금융, 우체국예금)M2(광의통화)M1과 기간물 예?적금 및 부금, 시장형금융상품(CD, RP, 표지어음 등), 실적배당형상품(금전신탁, 수익증권 등), 금융채, 기타 수신(신탁형증권저축, 종합금융회사 발행어음 등)의 합계단, 장기(계약만기 2년 이상) 금융상품 제외M3현금통화, 은행 및 비은행금융기관 예수금, 금융채, CD, RP, 표지어음의 합계예금취급기관, 증권금융 및 생명보험회사 통화지표별 구성내역(2005. 6월말) (단위 : 십억원)M3(p1,332,641)M2(광의통화)(983,893)예금은행 및 비은행금융기관 기타 예수금 등(p348,748)M1(협의통화)(338,166)준결제성예금(645,727)(좌 동)현금통화(18,015)결제성예금(320,151)(좌 동)(좌 동)민간의화폐보유액(18,015)(좌 동)(좌 동)(좌 동)2. 통화지표의 편제절차통화당국(한국은행,외평기금)의 대차대조표를 전산자료로 입력각 금융기관의 통화통계조사표를 ECOS를 통해 입수(통화통계작성에 이용) 입수한 보고서의 오류를 수정 (대조계정간의 일치, 상하위 항목간의 일치, 급작스런 변화 체크 등)다른 경로로 입수한 보고서(지역별 예금대출금, 산업별 대출금 보고서)와 상호 체크개별금융기관 자료를 경제주체별, 계정과목별로 합산한 집계표 작성대조계정, 상호거래를 제거하고 자산, 부채를 경제주체별, 유동성 순으로 구분한 예금취급기관 개관표를 작성하고 수치 확정3. 통화의 공급경로가. 본원통화의 공급― 화폐발행권한을 가진 한국은행이 금융기관에 대출하거나, 외국돈을 우리 돈으로 바꾸어 주거나 정부의 예금을 지급함으로써 통화를 공급* 본원통화 = 화폐발행액(민간보유 현금통화+은행시재금)+은행의 지급준비예치금= 민간보유 현금통화+은행의 지급준비금총액(지급준비예치금+시재금)나. 파생통화의 공급― 예금취급기관이 한국은행이 공급한 본원통화를 바탕으로 몇 갑절(통화승수)에 해당하는 파생통화를 창출< 파생통화 창출과정 >- 본원통화중 일부는 민간이 현금으로 보유하고 나머지는 예금취급기관에 예금됨- 예금취급기관은 예금중 일정비율을 한국은행에 예치하거나 현금으로 보유하고 나머지는 민간에 대출- 민간에 대출된 자금은 일부가 예금취급기관에 다시 예금으로 돌아오고 이중 지급준비금이나 현금보유액을 제외한 나머지는 또다시 민간에 대출─▶ 이와 같은 과정이 되풀이됨으로써 예금취급기관은 본원통화의 몇갑절(통화승수)에 해당하는 통화를 공급다. 통화의 부문별 공급경로― 통화공급(또는 환수)은 실제 경제활동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경로(정부, 민간, 국외 및 기타부문)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며 부문별 통화 공급내역은 금융기관 대차대조표를 적절히 변형하여 작성한 통화개관표를 통해 파악됨? 정부부문 : 정부의 세출과 세입에 따라 발생=> 재정수지가 공급규모 결정? 민간부문 : 은행대출, 민간기업발행 유가증권의 매입 등에 의해 이루어짐? 해외부문 : 외국과의 거래에 따라 우리 돈과 외국돈을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 수출(수입)이 수입(수출)을 초과하여 경상수지가 흑자(적자)를 기록하면 통화도 그만큼 증가(감소)? 기타부문 : 한국은행이 통화안정증권을 민간에 팔면 통화량이 감소하고 이미 발행한 통화안정증권을 한국은행이 상환하면 통화량 증가또한 은행 등 예금취급기관이 유상증자를 하는 경우에도 시중의 통화가 환수(그러나 은행 등이 증자자금으로 대출을 늘리면 시중의 통화가 다시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