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민당 연구.hwp1. 일본 자민당이란.⑴ 자유 민주당설립연도는 1955년으로 55년 체제라고도 한다. 일본 보수정당으로 구분되며 자민당은 문화국가의 완성, 자주독립, 자유주의 경제에 의한 민생안정과 복지국가의 완성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1945년 패전 후 보수정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1955년 11월 15일 거대보수정당인 자유민주당 (자민당)이 결성됨에 따라 그 후 38년간 일본 정치를 규정해 온 55년 체제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결성되었고, 1956년 4월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가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민주주의를 기조로 하는 문화국가의 완성, 자주독립, 자유주의 경제에 의한 민생안정과 복지국가의 완성 등을 강령으로 삼고, 실질적으로는 기업측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친미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1950년대와 1960년대 초 자유민주당은 하토야마,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등의 수상을 배출하여 일본의 경제대국화에 기여하면서 줄곧 총투표수의 약 60%에 이르는 안정된 지지율을 보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엽 당내의 파벌주의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총투표수의 50% 정도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1983년까지 참의원과 중의원에서 과반수를 유지하였으나, 1976년의 록히드사건과 1988년의 리크루트스캔들 등으로 동요가 계속되었다.1980년대 말부터 파벌 및 금권정치로 인하여 당의 분열이 심화되면서 1993년에는 하타 쓰토무[羽田孜] 등이 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 그 해 7월 중의원총선거에서 총 511석 중 223석을 얻는 데 그쳐 과반수 획득에 실패함으로써 자유민주당은 38년간의 장기집권에 종말을 고하였다.⑵ 자민당의 결성미국은 일본을 점령한 후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비무장화와 비군사적 정책을 폈고, 제국헌법을 폐지하여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철저한 민주화 방행으로 정책의 흐름을 잡았다. 즉, 미군정의 천황제파시즘이 해체되면서 새롭리하여 1945년 일본사회당, 일본자유당, 공산당, 일본협동당의 출현이 있었다. 이처럼 일본에서 패전직후의 상황은 우파는 물론 좌파도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어 1955년 보수합동이 형성될 때까지 50개의 정당과 정당의 간찬을 걸었던 결사체만도 300개가 넘었다.일본 자민당 연구.hwp이러한 다당제하에서의 1946년 4월 패전후 최초의 총선의 결과 자유당 139석, 진보당 93석, 사회당 92석, 협동당 14석, 공산당 5석으로 나타나 자유당 내각을 구성, 그해 11월 맥아더 헌법이라 불리는 신헌법에 의해 사회당이 143석을 얻어 제 1당이 되고, 자유당이 131석, 진보당의 후신인 민주당이 121석, 협동당이 25석, 공산당이 4석을 각각 얻었다. 19847년에 가다야마를 수상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의 출범, 1여년 후에 다시 민주자유당의 요시다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그후 5차까지 요시다가 내각을 구성하여 1954년 12월까지 장기에 걸쳐 정권을 담당했다.요시다 내각이 붕괴한 이듬해인 1955년 2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의 사회당 우파 67석, 좌파 89석의 노동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혁신세력이 162석을 차지한 반면 대승을 기대했던 민주당은 185석의 득표에 그치고 말았다. 거기다가 분열되었던 우파 사회당과 좌파 사회당이 자신감을 얻어 그해 10월 사회당으로 통합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보수세력들은 그 양대 지주인 민주당과 자유당을 통합하여 11월 자유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보수지배의 통합된 모체를 형성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장기간에 걸친 일당 우위체제를 이루어졌다.한편 세계정치가 미소대립에 의한 양극체게하에 놓이고, 더욱이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은 일본이 미국을 필요로 하게 되어, 1954년에 자위대를 조직하고 미국이 아시아에서 소련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재무장을 서두르게 되어, 이것은 곧 사회주의 세력보다는 보수주의 세력의 강화를 의미하게 되었다.⑶ 55년 체제의 성립에 있어 보수합동의 배경과 의의① 배경㉮ 보수 정당들간의 대립과 항쟁이 가져온 정국의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새롭게 무장한 자민당의 행로에 일본 국민과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려 있다.① 자민당의 공과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대통합은 보수세력의 안정적 집권체제 구축을 위한 자구책이었다. 좌·우파 사회당의 전격 통합에 따른 보수세력과 재계의 위기감이 자민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자민당의 이념적 출발점은 ‘평화헌법의 틀 안에서 소극적 안전보장을 추구한다’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 노선의 수정이었다. 그 알맹이는 헌법개정과 재군비였다. 그렇지만 1960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미-일 안보조약 개정의 후폭풍으로 물러난 뒤 요시다 노선이 부활했다. 1990년대 냉전 종식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변화, 북핵 위기는 다시금 자민당 우파 세력의 활동공간을 크게 넓혔다. 이들 주도의 자위대 팽창과 헌법개정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자민당의 또다른 축은 이익유도 정치다. 정·관·재계가 이권을 나눠먹는 ‘철의 삼각형’을 형성했다. 고도성장과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등장으로 이권·담합정치는 절정에 이르러, 결국 록히드·리크루트 사건 등 대형 뇌물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는 정치 염증과 함께, 자민당은 부패집단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줬다. 결국 1993년에는 38년에 걸친 자민당 1당 지배가 종식되는 결과를 맞았다. 하지만 지난 9월 선거를 통해 자민당은 화려하게 되살아났다.자민당은 50년 동안 ㉠ 평화주의 국가의 틀 유지 ㉡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 ㉢ 지역 균형발전과 고른 분배 등을 일궈냈다.그러나 동시에 파벌구조와 부패가 일상화한 낡은 정치의 주범이기도 하다.② 기회와 위기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집권 이후 강경 우파가 당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전후 평화주의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연립여당의 의석은 이제 개헌발의선을 넘었다. 자민당은 자위권 명기를 담은 개헌 초안을 내놓았다. 50년 만에 창당 이념의 현실화를 앞두고 있는 셈이다. 역사인식, 교육, 영토 문제 등에서 우익 국가주의 경향이 강화되고 있고, 이는 당내 대립, 주변국과 마찰 격화로 이어질 대해 엄정중립과 국민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해관계의 조정자역을 표명하였다.⑵ 1980년대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① 자민당 정부는 위기적 상황에 직면한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국민에게 인기없는 세출삭감 혹은 증세의 방법을 채용하였다.② 일본의 부가가치세라고 할 수 있는 ‘일반소비세’ 의 도입을 시도하였다.③ 1980년대 전반기에 걸쳐 스즈키 내각과 나카소네 내각은 ‘증세없는 재정재건’의 기치하에 세출신장의 억제, 각종 보조금의 삭감, 3공사의 민영화, 의료 연금제도의 개혁등을 골자로 하는 행재정개혁을 추진하였다.⑶ 1980년대의 재정위기가 55년체제에 미친 영향① 재정위기는 노동계의 분열을 가속화시키고 그 결과 사회당의 지지기반을 더욱 햑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② 재정위기는 자민당 지지집단들간의 이해균열을 촉진시켜 자민당의 지지기반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 자민당의 장기집권⑴ 장기집권의 이유자민당이 55년 체제 이후 38년간 장기집권은 일당 독재가 아닌 정치의 안정화, 정당의 제도화의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 제도화란 헌팅톤이 말하는 조직이나 절차가 가치성과 안정성을 갖는 것이다. 제도화의 측면에서 일당의 장기집권이 정당정치사에 나타난 것은 일본 (자민당), 이탈리아 (기독교 민주당), 서독 (기독교 민주당과 사회동맹의 연합)으로 후발선진국으로 하나같이 2차대전에 패한 나라로 이들 국가들은 강대한 반체제야당에 대항하여 형성된 정당들이다.또 다른 형태는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여 정치적 재편성시 창당한 스웨덴의 사회민주노동당이 일당 우위체제를 형성했고, 미국에서 뉴딜정책을 부르짖고 장기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있었다. 이처럼 장기집권 그 자체가 정치에 위험이나 정치 발전에 저해적인 요인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의 장기집권은 파벌과 금권에 의한 정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파벌이나 금권이라는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한데도 어떻게 일본에서는 자민당에 의한 장기집권이 계속된 이유는 무엇일까?다음은 자만당의 장기 파벌이나 후원회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물과 파벌이 든든하다면, 입후보자가 정당과 관계없이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러한 선거제도는 거대한 우월정당은 물론이고 소수의 3당, 4당, 5당의 존재를 가능케하여 자민당 이외에는 소수당이 연립한다고 하여도 여당이 될 수 없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또한 선거구는 55년 당시의 선거구를 그대로 유지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농촌에 기반을 둔 자민당은 항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였다.③ 야당의 실패1947년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하기도 했지만,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앞두고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앞두고 당이 분열하여 우파의 일부가 이탈하여 민주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일본의 야장은 분열상태인데 비하여 자민당은 비사회주의정당의 대연합으로 성립되었다, 결국 야당의 분열은 자민당의 강화를 의미하고 자민당의 강화는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이다. 야당의 약화는 야당의 수권능력이 약화되고, 자연 일본국민들은 자민당을 택하게 되었다. 특히 1977년을 기점으로 20대 유권자, 사무직 노동자, 산업노동자들은 사회당의 지지경향이 강했지만 오히려 자민당의 지지율이 앞서가게 되었다. 결국 사회당은 자민당의 반대극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야당으로서의 기능을 수행지 않은 채, 혁신수좌의 지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허리와 다리의 강화를 게을리 하여 오늘의 저조를 낳았다.④ 자민당 우위의 정책결정일본 정치구조에서 정책결정의 주도권은 초기에는 자민당에서 행정부에 대폭 이양되어 점차로 자민당과 행정부의 상호의존관계 내지는 정관혼합 형태로 변모하였고, 나중에는 자민당 우위의 입장에서 주요한 정책결정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사항도 행정부의 기구와 맞먹는 정책기구를 두어, 유능한 전문인들이 정책을 결정하면, 그것은 곧 일본의 정책으로 시행되게 되었다. 국민에게 구미에 맞고 유익한 정책을 창출하고, 그로인해 국민경제가 발전되고 국민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일본의 국민들은 이데올로기에 매달려 있는 사회당보다는 자민당을 택하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