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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민족의 저항
    동아시아국가와 민족의 저항-중국-Ⅰ. 서론-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Ⅱ. 본론1.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5.4운동-국민혁명2. 일본의 중국침략의 대한 항일 민족 운동의 고양Ⅲ. 결론Ⅰ.중국의 민족주의 운동1)..5.4운동배경-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원세개 중국 정부는 중립을 선언하였다. 교전국들이 중국의 영토와 영해에서 교전을 하거나 통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중국의 선언은 일본에 의해 묵살되었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 내에서 세력신장을 꾀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일본은 동맹관계인 영국의 원조를 받으면서 바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가졌던 교주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일본군은 산동반도에 있는 청도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여 산동반도를 장악하였다. 일본이 선전포고를 한 이유는 독일이 극동에 설치한 기지를 공격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동 전역을 차지하겠다는 야욕에서 출발하였다. 중국은 일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5년 일본은 원세개에게 "21개조")를 요구하였다..중국은 이러한 일뵨의 요구조건을 다른 열강을 통하여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일본에게 강력한 요청에 의해 21개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 1915년 이러한 사실에 대해 중국 민중은 격노하였고, 중국을 제2의 조선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팽배하여 일본상품의 불매운동, 국산품 장려운동과 같은 반일운동이 전개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중국의 민중은 미국의 윌슨대통령의 14개 원칙)에 큰 기대를 걸었다. 중국은 1917년 단기서 군벌 정부의 대 독일 선전포고로 1차 세계대전에 전승국이 되어 남북정부)의 대표 5명이 미, 영, 일, 프, 이의 5개국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불평등조약의 철폐와 독일이 산동성에서 가지고 있던 권익을 반환하고 21개조 조약 의 무효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이 갖고 있던 산동성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중학이상의 학교로 신속히 파급되었다.이처럼 신문화운동은 1918년 후반기부터 이전의 사상, 문학혁명이라는 문화혁명적인 단계로부터 직접적인 정치행동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진독수, 이대조등은 을 발간해 군벌의 반동성과 제국주의와의 결탁 등을 폴로하고 러시아 10월혁명을 비롯한 세계혁명 사조를 소개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5?4애국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의의- 반제?반봉건에 대항한 격렬한 민주주의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운동으로 최초의 민중 애국운동인 5?4운동은 민중이 승리한 운동이었다. 이전까지 중국 역사상 이렇게 많은 민중이 단결하여 투쟁한 적이 없었고 이후 중국 역사는 이 민중운동을 기반으로 움직이게 된다. 또한 북경의 중앙정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각 지방, 각성의 군벌세력에 대해서도 확대된 운동으로 각 지방에서의 투쟁의 토대가 되었으며 낡은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혁명의 시작이다. 그리고 중국 무산계급의 거대한 혁명역량을 최초로 드러낸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혁명운동의 결합을 촉진시켜 중국공산당의 탄생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5?4운동은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구분하는 지표라 말할 수 있다.영향- 5?4운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표면적으로는 구국이다. 하지만 내면적으로 살펴보게 되면 구국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계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맨 처음에 언급했듯이 그 기간을 5?4사건전후 두달이 아니라 1915년부터 1921년까지 보아야 한다. 젊은 신 지식층들이 전통적 사상, 제도, 관습과 군벌, 관료의 이해관계에 대해 대항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반제국주의적 활동에서 노동자, 상인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유교에 대한 철저한 분쇄는 우상과 권위를 타파하고, 신학문을 발전시켰으며 그로인하여서 이념적 변화가 나타났다. 이념의 변화는 백화문의 채택, 그리고 인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에 입각한 신문학의 창조와 대중교육의 급속한 발달을 가져 왔다. 백화문의 대중화는 그군벌의 1성에 한정된 자치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한편, 1913년의 원세개토벌 전쟁에서 실패한 후 망명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던 손문은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당의 새로운 강령과 선언을 채택한 손문은 여기서 반제국주의와 노동자, 농민 보호, 지주와 소작인의 지위의 점진적 평등을 주장하였다. 국민당은 이미 공산당원들의 개인자격 입당을 허용하고 있었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결국, 제1?2차 광동군정부를 거쳐 1923년 광동에서 진형명을 몰아내고 제3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1924년 1월 국민당을 개조하면서 공산당과의 합작(제1차 국공합작)을 한 손문은 반제국주의, 반군벌의 국민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에서 손문과 연합관계에 있던 봉천파가 승리하고, 정변을 일으켜 봉천파의 승리에 기여한 풍옥상이 손문에게 북상을 요청하자 손문은 이후의 정국 해결방안으로 상회, 교육회 등 9종의 단체 대표로 구성되는 국민회의를 소집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북상하였다. 손문의 북상과 더불어 활성화된 국민회의운동은 그가 1925년 3월 북경에서 사망하면서 활력을 잃었다. 그러나 손문 사후 광동의 근거지를 강화한 국민당은 1926년 북벌을 시작하여 2년 만에 이를 완수함으로써 군벌시대를 종식시켰다.제1차 국공합작- 손문과 그 측근이 5?4운동을 경험하면서 사회주의와 소련에 관심을 가지고 또 국민당을 대중적 정당체제로 발전시켜 가려는 전환을 하고 있을 즈음 소련이 손문에게 접근하였다. 진형명의 정변으로 상해로 쫓겨난 손문은 소련의 지원을 예상하면서 국민당의 당세를 확장하기 위한 개진(改進)작업을 시작하였다. 손문은 개진준비에 착수하기 직전에 소련정부 대표 요페와 공식적인 교섭을 하여 1923년 1월 소련이 중국의 통일과 독립달성을 원조한다고 약속한 손-요페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 이후 광동에 근거지를 만들어 제3차 군정부를 세운 국민당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본격화하면서 국공합작을 위한 준비를 진척시켰다.) 후 대중운동을 통제하는 방침 위에서 4월에 그동안 중지되고 있던 북벌을 재개하였다. 이 당시에는 이미 서북 군벌이던 풍옥상과 산서군벌 염석산도 국민혁명군에 들어와 있었다. 6월에는 북경을 장악하고 있던 봉천파 군벌 장작림이 자신의 근거지인 만주로 퇴각하던 중에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사하자, 국민혁명군은 싸움 없이 북경을 점령하였고 12월에는 장작림의 아들로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장학량이 국민정부에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군벌 지배하의 중국은 국민정부에 의해 통일되었다.국민당이 군사적 정벌이라는 북벌을 완수함으로써 반제반군벌(反帝反軍閥)이라는 국민혁명의 목표를 온전히 달성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단 군벌시대를 종식시키고 통합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으므로 아직 달성하지 못한 나머지 목표는 남경 국민정부의 몫으로 남겨진 셈이었다.2. 일본의 중국침략의 대한 항일 민족 운동의 고양전쟁의 발발과 중국의 대응 - 1937년 7월 7일 밤 북경부근 노구교에서 누군가의 발포를 빌미로 일본군 1개 중대가 중국군을 공격했다(蘆溝嬌事變::1937). 이에 노구교를 수비하고 있던 송철원의 제 29군은 일본군 공격에 격렬히 저항함으로써 이후 8년간의 중일 양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현장에서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7월 11일, 29군 대표 장자충(張自忠)은 일본측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기회로 중일 양국의 ‘현안’을 일시에 해결하고자 사단을 파견한다는 강경조치를 결정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7?7사변으로 전국적인 항일구국의 소리가 고조되는 가운데, 사건 다음날인 7월 8일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자위전쟁(抗日自衛戰爭)을 발동하자고 전국에 통전(通電)했다. 일본군은 7월 28일 제29군에 총공격을 시작하여 7월 30일에는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8월 13일에는 마침내 상해에서도 전투가 시작되어 이제 전쟁은 화북에서 화남(華南)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화북(華北)에서 일본이 총공세를 시작하자 장개석국 확대회의를 열고 이른바 ‘항일구국 10대강령’을 발표하였다. 일본제국주의 타도, 전국 군대 및 전국 인민의 총동원, 정치개혁, 항일외교, 전시 재정경제정책의 실시, 인민의 생활개선, 항일 교육정책 등 ‘전민적(全民的), 전민족적(全民族的) 항전’을 결의했다. 이는 국민정부의 이른바 편면항전과는 달리 )전면항전으로 이후 양자의 대립점으로 작용한다.서안사변 이후 중국공산당은 국민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무장폭동 중지, 철저한 민주제의 시행, 지주에 대한 토지몰수를 정지한다고 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혁명방식을 포기하는, 즉 기존의 소비에트 정부를 ‘중화민국 특구 정부(중화민국의 구성부분으로서의 변구)’로 개칭했다. 일본과 전면전쟁에 들어간 중공의 유격대는 항일근거지를 만들고 1938년부터는 이들 몇 개가 합쳐져 ‘변구(=항일 근거지)’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발전은 1940년말까지 지속되어 중국공산당 6시 6중전회가 열린 1938년 말 팔로군은 항전 전 3만명에서 15만 6천명으로 성장했고, 신사군도 1만 명에서 2만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이러한 발전의 주된 원인은 1938년까지 항일전의 주요 전장은 국민당과의 정면전장이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말이 되면 중공에 대한 일본의 인식도 달라지지만, 아직은 중공의 유격대를 국민군의 )‘잔적(殘敵)’ 내지는 ‘항일비단(抗日匪團)’정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지 형성에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일본과의 전쟁은 ‘지구전’일 수밖에 없다는 발상은 모택동의 유명한 ‘지구전론(持久戰論)’뿐 아니라 그보다 앞서 1934년 장개석도 주장하였다. ‘지구전’의 논리는 두가지 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전략적인 면이다. 즉 군사력, 경제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전쟁은 장기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바탕에 깔려 깔려있다. 이러한 ‘지구전’을 통한 한 세력은 ‘기사회생(起死回生)’으로 엄청나게 실력을 확대시켰고, 다른 한편은 크나였다.
    인문/어학| 2011.12.14| 17페이지| 2,000원| 조회(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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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하의 집단
    은하의 모든 것4. 은하의 집단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은하들이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하나의 작은 항성의 불과 하고, 인류의 삶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태양은 하나의 항성(별)의 불과 하다. 이러한 항성의 집단이 은하이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밤하늘의 은하는 몇 개 안 된다. 가까운 은하들도 보통 수백만 광년 너머에 있어서 맨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어둡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눈이 만약 20등급 정도의 어두운 천체를 볼 수 있다면 별들 너머의 하늘이 온통 은하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빛으로 관측할 수 있는 가시적인 우주 안에는 대략 1000억 개의 은하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많은 은하들은 어떻게 분포할까?은하들도 별들처럼 집단을 이루어 분포한다. 은하의 집단은 수~수십 개의 은하가 모인 은하군과 수백~수천 개의 은하가 모인 은하단으로 구분되며, 은하군과 은하단들이 모여서 더욱 거대한 초은하단을 이루고 있다. 태양이 속해있는 우리 은하계는 국부은하군(Local Group)에 속하며 여기에는 크고 작은 40여 개의 은하들이 수백만 광년 범위에 모여 있다. 이 은하군에서 가장 큰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이고 다음으로 큰 은하는 우리 은하계이다. 다른 은하들은 주로 이 두 은하 주위에 몰려 있다. 국부은하군내의 안드로메다은하와 우리 은하계는 220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지만 서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우리은하가 속한 은하군은 국부은하군(局部銀河群)이다. 국부 은하군에는 우리은하와 두 개의 큰 은하들을 비롯해서 약 30개의 은하들이 포함되어 있다. 두 개의 큰 은하 중 하나는 두 개의 왜소한 동반 은하를 거느리고 우리은하보다 큰 Sb 나선형인 안드로메다 은하(M31)이고, 다른 것은 이 은하보다 작은 Sc 나선형인 M33이다. 이 세 개의 은하들 이외에 국부 은하군에 속한 은하들은 대부분 왜소 타원 은하들이다. 이 은하들은 아주 흐리다. 국부 은하군의 지름은 약 300만 광년이고 전체적인 모습은 원반이다. 우리은하는 국부 은하군의 한쪽 끝 근처에, M31은 다른 쪽 끝 근처에 놓여 있다. 우리은하와 M31이 이 은하집단의 운동을 지배하고 은하들은 중력적으로 묶여 있게 한다. 실제로 은하수와 M31은 서로 궤도 운동을 하고 있다.은하계에 가장 가까운 외부 은하(5만pc)로는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가 있다. 이 두 은하는 은하계 주위를 공전하는 동반은하이다. 대마젤란운은 200억개의 태양 질량에 해당하는 밝고 푸른 별과 30만개의 태양에 해당하는 중성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은하의 지름은 우리 은하의 반 정도이고 질량은 약 10/1이다. 소마젤란운의 별들도 대 마젤란운의 것들과 비슷하게 밝고 푸른 것들이다. 이 은하의 질량은 대마젤란운의 1/4이고 크기는 우리 은하의 1/3 정도이다. 우리 은하 주위에는 이들 말고도 여섯 개의 왜 소 은하들이 있다.은하단들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라도 천구에서 볼 때 퍼져 있는 각이 작아 보이는 별자리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한 별자리 내에 2개 이상의 은하단이 있을 때는 뒤에 로마 숫자 Ⅰ,Ⅱ 등을 붙여서 구별한다. 우리 은하계에서 35억 광년 이내의 거리에 약17개의 은하단이 알려져 있다.① 처녀 자리 은하단약 3,600만 광년의 처녀자리에 있는 외부은하의 대집단으로 은하단 중 가장 가까운 것 하나이다. 지름은 약 12˚(약 1,000만 광년), 은하가 2,500개에 이르는 은하단이다. 중심부에는 타원은하나 렌즈상은하와 같이 밀도가 큰 은하로 이루어져 있고, 둘레는 나선은하와 불규칙 은하도 포함된 다소 밀도가 낮은 외부로 둘러싼 구조이다. 처녀자리 은하단은 국부 은하군과 가깝기 때문에 서로 중력을 미치고 있고 우리 은하도 이 은하단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② 머리털자리 은하단3억 2천 6백만 광년 거리에 있으며 수천 개 이상의 은하로 이루어져 있다. 모양은 구형에 가깝고, 지름은 천만 광년 정도 된다. 중심부에는 거대한 나선은하와 타원은하들이 집중해 있어, 주변보다 3배정도 밀도가 높다. 아마도 이 은하단은 나이가 오래되어 이러한 거대 은하들을 끌어당길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③ 헤라클레스자리 은하단머리털자리 은하단에 비해 다소 덜 밀집되어 있다. 모양은 상당히 불규칙적이며, 모든 종류의 은하들을 포함하고 이으나 나선은하가 주종을 이룬다. 구성원들은 쌍은하계를 이루고 있거나 작은 무리들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은하단은 나선은하들이 많은 가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상대적으로 은하간 가스는 희박한 편이다. 가스는 은하에서 유래되어 우주공간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머리털자리 은하단 보다 나이가 젊은 은하단으로 생각된다.④ 페르세우스자리 은하단2억 3,500만 광년 거리에 있으며, 중심부에 초거대 타원은하를 가지고 있다. 폭발하는 은하의 증거가 되는 많은 전파원과 고에너지의 은하단간 가스를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구성은하들은 서로에 대해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 이 은하단의 나이가 오래 되었음을 말해준다.초은하단은 은하군과 은하단들이 모여 이루는 초대규모의 은하집단이다. 1953년 G.드보쿨뢰르가 천구에서 은하들의 평면적인 분포상태를 조사하고, 각 은하들까지의 거리를 추정해서 공간적인 분포를 구하였다. 그 결과 초은하단의 모습을 밝혀내었다. 은하군과 은하단들은 모여서 더욱 거대한 우주 구조인 초은하단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국부 은하군은 국부 초은하단에 속하는데, 납작한 모습의 이 초은하단에는 작은그림 허블이 본 초은하단처녀자리 은하단을 비롯해서 은하군 수십 개가 포함되어 있다. 코마 은하단(머리털 자리 은하단)은 또 다른 초은하단의 일부이다. 국부 초은하단의 지름은 약 1억 광년이고 전체질량은 태양 질량의
    자연과학| 2011.12.14| 4페이지| 1,000원| 조회(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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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전쟁과 젠더 평가A좋아요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 전쟁과 젠더』를 읽고..는 현대의 가장 큰 위험이 '전쟁'임을 밝히고자 한 책이다. 전쟁은 인간의 본능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라는 전쟁에 대한 통설은 전쟁을 운명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인류가 서로 싸우는 것은 기능 오차이며, 무기의 발명이 인간의 살육과 억제의 균형을 깨뜨렸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무기를 발명하고 서로 죽이는 것을 미덕으로까지 여기게 된 인류의 부자연스러운 사회적ㆍ문화적 상황을 탐구하며,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전쟁이 역사적이고 불가피하고 정당하다는 주장들은 철저히 '가부장제 남성 지배형 국가'의 산물이며, 그 체제에서 벗어나야 전쟁 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젠더 이론'을 제안하고 있다. 남성이 쓴 전쟁 반대론도 무력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적이 없는 젠더인 여성들의 입장에서 전쟁을 다루고자 했다. 젠더 이론을 통해 전쟁은 왜 일어나는지, 전쟁은 왜 그치지 않는지, 전쟁을 유발시키는 것을 무엇인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의 의문을 규명하고 있다.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공격성은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이라는 주장과, ‘특정 사회에서의 남녀의 위치 및 위상, 역할상의 차이 또는 차별은 본질적’이라는 두 가지 잘못된 주장의 구조적 유사성과 둘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문제 삼는다. 저자는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는 결국 가부장제 남성 지배형 국가라 주장한다. 리안 아이슬러는 선사시대 모계제 문화의 유적에는 전쟁의 흔적이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전쟁과 식민주의의 기원은 무엇인가? 가정이라는 사적 세계에서 남성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여성이라는 타자를 지배하고 굴종시키도록 가르치는 시스템이 공적 세계로 확대된 것이 전쟁과 식민주의라 할 수 있다.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라는 것만 보고서는 ‘정말 왜 전쟁을 할까?’라고 궁금했다. 제목옆에 작게 쓰여있는 ‘전쟁과 젠더’라는 단순·명쾌하다. 이 책은 ‘남성 지배형 국가’ 즉, 가부장제가 전쟁을 일으켰음을 밝히기 위해 씌어졌다. 저자는 말한다. 전쟁이란, 마초적인 남성들이 이익을 독점하고 자기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기 위해 조직적인 폭력을 휘둘러 힘을 과시하고, 공포를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남성다움, 마초적인 남성이라는 것은 암컷,수컷을 나누는 생물학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 것이다. 역사적·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된 ‘남성성’을 의미한다. ‘남자다움’이란 역사적으로 사회에서 공적인 일을 맡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육체적·심리적·지적 특징을 일컬어 왔다. 마찬가지로 ‘여자다움’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성, 가사·육아에 적합한 ‘마음씨’, ‘지루한 단순노동을 견디는 인내심’ 등을 말한다.이러한 ‘젠더 이론’은 남성성, 여성성을 결정하여, 본성적으로 예외적인 남·여(여성적인 남자, 남성적인 여자)까지도 남녀의 활동영역과 그 특성까지 사회적으로 조직화 하였다. 더구나 그 조직은 사적영역부터 공적영역까지 남성이 여성을 종속시키는 권력조직의 형태였다. 이 권력조직 형태를 가부장제라고 한다. 모든 면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체제이고, 남성 주류화라고 볼수 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람들은 지금도 그들의 권력과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지지하고 일으키고 있다.역사적으로 전쟁이 없는 사회가 존재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회는 모계사회였다. 모계사회의 전형적인 예는 크레타 문명이다. 크레타에서 권력은 어머니의 책임을 통해 행사되는 것이었다. 훌륭한 예술과 번창하는 부의 사회에서도 전쟁은 없었고 여성의 지위도 낮아지지 않았다. 여신이 지고한 존재였던 크레타에서는 전쟁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모계제 사회에는 ‘성’의 자유가 있고, 생명과 성애가 가장 높은 가치였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자유로운 성애는 공격성을 완화시켰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여성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여성을 생명을 애착 등 마땅히 존중받아야할 것들이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폄하되었다. 심지어, 남성제도가 일으킨 전쟁에서 여성은 강제매춘, 강간, 살해당했다. 여성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였다.지금은 남녀평등의 목소리가 커지고, 가부장제가 흔들리는 추세이다. 인간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평화를 지상에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 전쟁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가부장제를 근절시킬수 있는 여성의 힘이 필요하다.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매우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필체가 매우 거침없고, 직설적이다. 간접적으로 돌려말하지 않고, 자기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하게 적는다. 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고, 저항적이다. 책의 서론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적기도 하였지만, 여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일본여성이라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생각하면 저자의 주장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더욱저자의 주장, 가부장제가 심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수동적이고, 보살핌을 받는 존재라는 것t것이 이해우리나라보다는 심한 것같다. 또, 이 책을 보면, ‘남성성’ ‘남성다움’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는 것t것느껴진다. 나는 여성의 입장이므로, 어느 정도는 수긍되기도 하지만, 어느 부분은 심하다 싶은 부분들도 더러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군인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전쟁의 치어걸...여성들은 전쟁이라는 경기장의 스탠드에서 '남자다운'병사들에게 흥분해서 응원하고 있다는 것...] , [람보의 비극... 베트남에서는 난폭한 남자다움이 필요했지만 평화로워지면 그것은 위험하고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이런 부분을 보면, 크지 않은 일들도 저자가 ‘남성성’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그리고 이 책은 목차의 구성과 내용배치가 독자에게 부담없이 설정되어있는 것 같다. 아주 자연스럽게 구성되어있다. 큰 제목과 작은 부제들의 연결만 보아도 이 책의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있다.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나 예시들이 책을 읽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읽을수록 적응이 되어 큰 문제는 없었다.이 책은 목적과 취지는 확실히 달성했다고 보여진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전쟁의 뿌리를 말하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밝히며, 그로인한 현재의 위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나아가야할지를 밝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필자의 생각과 주장이 충분히 이해되었기 때문에 책의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솔직히, 너무 강한 페미니스트 사상이 이 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이 책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나도 저자와 같은 여성이고,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을 다소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여권을 주장하는 정도까지는 못되지만, 현사회가 남녀차별을 부정하는 추세이고,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사회적인 흐름 속에서 배우고 자라왔기 때문에 가부장제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데에 수긍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예를들어, [성차별 구조는 당연히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혐오, 증오 또는 공포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남성은 다만 우수한 A또는 B라는 것을 평가할 뿐 그것이 수컷인지 암컷인지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 중의 강간은 병사의 성욕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폭발시킨 여성 차별, 식민지 지배 그리고 인종차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이 이 사회를 다시 일으켜야한다', '남성성은 사회의 병폐다‘라는 식의 너무 심한 페미니스트적 발언이나 강한 남성성에 대한 반발심 발언은 나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또한, 분석단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너무 많은 예시는 오히려 논지의 주장을 흐리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시가 많다보니, ‘< >’ ‘《 》’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어떤 페이지를 보면, , ‘우카이 사토시’,, , , 《영화와 국민국가》등 각각의 인용 어구 들까지 펼쳐진 두페이지에유럽부터 아시아까지 남성에 의한 우월성과 여성의 지배가 매우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전쟁으 이유는 민족에 대한 차별, 문화와의 갈등, 인종차별, 계급차별, 국가주의, 자본주의 등 모든 타자에 대한 차별이나 욕구로 원인을 돌려왔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남성지배 사회가 만들어낸 왜곡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본적인 전쟁의 이유는 사회·문화가 만들어낸 남성다움에 있었는데 말이다. 폭력, 공격, 경쟁, 쟁취와 같은 것들을 남성성이라 정의내리고 그러한 체계 속에서 전쟁을 반복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제도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 책이었다. 여권이 신장되고, 남녀평등의 흐름이 거세지고 있는 오늘날, 이 책이 말하는 요점과 주장은 시대적 흐름과 결합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전쟁이 왜 일어나는지, 누가 일으키는지, 전쟁에서 나타나는 여성 학대(를 포함한 성차별),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명료하다. 가부장제 시스템, 저자가 줄곧 주장하는 전쟁의 원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국가적인 여성들의 연대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대책도 던져준다. '혁명은 폭력적이며 그 자체가 가부장제적' 이므로 매일 일상에서 바꿔나가자고 한다. 예전같으면 순진한 이상주의자로군, 아마추어처럼. 생각했겠지만, 이제 이런 이야기가 익숙하게 와닿으니 인식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해결책도 허무맹랑한 건 아닐듯도 하다. 사실 전쟁과 젠더 문제는 많은 여성학자가 다루었다. 전쟁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아동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13회 서울 국제 여성 영화제에 다녀 온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선택한 ‘영화는 그곳에 없었다면’이라는 영화였다. 1990년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아에 내전 당시 사라예보에 살고 있던 젊은 여성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전쟁속에서 여성의 피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시대적 배경이 최근임에도 불구 하고 내전속에서 주인공 여성은 반군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는다.
    인문/어학| 2011.12.14| 5페이지| 2,000원| 조회(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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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도시대의 여행
    에도시대의 여행에도 시대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전국 각지의 가도나 와키오칸)을 끊임없이 오가며 여행했다.중세시대까지 여행은 정치적 혹은 군사적 목적, 상업활동, 종교활동, 정보전달 등을 위한 이른바 업무적인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면서 다섯 가도를 비롯하여 각가도가 정비되고 숙박시설 등도 갖춰지면서 사원 참배나 성지순례를 명목으로 한 유람 여행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각종 고)도 발달하여 일반 서민들도 오락으로서의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어떤 여행이든 그만한 여비가 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여행자의 주머니 사정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에도 시대에는 각 신분 계층에 맞는 숙박시설이나 왕래수단이 있었다.에도 시대의 기본적 여행수단은 도보였으며 일반 여행자가 묵는 여관은 하타고였다. 하타고야라고도 하는 곳이다. 본래 하타고란 여행을 떠날 때 말 여물을 넣어두는 바구니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엔 숙소에서 여행자가 손수 밥을 해먹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대부분의 경우 여행자는 땔감과 식량을 가지고 다녔다. 또한 여행은 임무를 띠고 떠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짐도 많았다. 그래서 말을 끌고 길을 떠났다. 이때 여물을 준비해두고 손님을 기다리는 여관이 바로 하타고)였다.대부분의 히타고야에서 식사를 제공하게 된 것은 겐로쿠에서 교호시기의 일로, 일반 서민들이 여행을 즐기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하타고야에도 등급이 생기고, 서비스의 질에 따라 숙박비에 차이가 났다. 에도 시대 중기부터 서민들의 여행이 성행을 이룬 것은 고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고란 특정 사원에 참배를 하거나 영산을 찾아가기 위해 결성된 단체를 말한다. 에도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고는 근교로는 사가미(지금의 가나가와 현)의 오야마모데우나 시모후사(지금의 치바 현 북부)의 나리타 산 신쇼지 참배를 들고 수 있고, 가장 인기를 누린 것은 후지고와 이세고였다.고에 참가하지 않는 여행일 경우엔 데가타 즉 통행증을 발급받는 일부터 절차가 번거로웠으며 당시엔 여행을 떠나려면 의 향상으로 서민들 가운데는 “일 외의 여행”이 가능한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었다.당시에는 각 번(藩)이 민중의 전국유람이나 지방여행을 가능한 한 억제하기 위해 세키쇼(關所)를 설치하여 엄하게 검문을 했기 때문에 서민들의 “즐기기 위한 여행”은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하지만 의료를 목적으로 한 탕치(湯治))나 신앙을 위해 절이나 신사를 참배하는 사사참배(社寺參拜)는 인정되었기 때문에 점차 이를 구실로 하는 여행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먼 곳으로 가는 유람여행에는 이러한 사사참배라는 명분이 이용되었다.1) 숙박업의 발달이처럼 대중적 여행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였던 하부구조 요인에는 앞서 언급했던 참근교대(參勤交代)로 도로망의 발달과 숙박업소의 발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 가도에는 수십개의 세키쇼(關所)가 설치되었는데 도쿠가와막부의 세키쇼 설치 목적은 에도를 방위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을 통과하려면 여행증명서인 테카타(手形)가 필요했는데 여행목적과 목적지, 얼굴인상과 얼굴에 나있는 점의 위치까지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막부의 정책으로 전국의 인질을 에도에 머물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여행이 상업화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성장산업으로 정착하게 되자 여행객을 통제하던 세키쇼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주변에는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세키쇼 주변은 쉬는 곳, 정보센터, 유락지, 숙박지로 발달하게 되고 음식점이나 찻집이 생기고 매춘업을 통해 여행객을 유치하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그 외 세키쇼에서는 말, 가마 등을 제공하였으며, 수하물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도 있었다고 한다.18세기에는 지역단위로 세키쇼 주변 숙박업자들의 조직이 에도?오사카?교토를 연결하는 여 관조합을 결성하여 여행객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회원업소끼리 연락을 하여 여행객이 이동할 경우 숙박을 보장하였으며, 선박 등과 연결하여 교통편의와 수하물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기능을 하였다.이웃 마을의 고집단들이 하나의 그룹으로 참배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서 한 번에 수 백 명이 함께 하는 여행이기도 하였다. 고의 회원들은 일반적으로 한 집안의 가장인 남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여성들도 특정의 순례집단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에도시대 중엽부터는 여성들만의 고조직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이처럼 여행대중화의 시작은 고를 통해 이루어진 단체여행이었다는 점은 일본의 여행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점이다. 고란 불교전래와 함께 일본에 도래된 것으로 원래는 학승(學僧)이불경을 강론?설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경전을 설법하는 사람과 이를 듣는 사람의회합으로 고아이(講會?講合)로도 불려졌다. 불교가 귀족의 전유물에서 서민에게도 확대되자취락사회에도 고가 보급되게 되고, 신사 가운데도 고를 중심으로 신도를 모집했다. 고는 불교를 강론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포교를 위한 집회(講話?法會)로, 다음에는 고아이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단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후에는 불교에 한정하지 않고 널리 동일한 신앙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조직으로 바뀌게 되었고, 나중에는 종교적 기능이 없어진 단순한 동지적 결사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지역사회주민의 종교적 관심이 공동체내의 대상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경우 그것을 넘어 외부로 향해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신앙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보면 실로 방대한 수의 사사참배를 위한 고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관동지방에서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참배하는 것은 거리상등의 상당한 부담이 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고의 회원 가운데에 대표자를 선출해서 참배하게 하는 방식의 다이산코(代參講)가 출현했다. 그 전형이 바로 이세코(伊勢講)와 콘삐라코(金毘羅講)등이다. 특히 이세신앙)을 전국레벨로 보급시킨 것은 신도를 모집해서 전국을 돌았던 이세온시(伊勢御師)의 활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나. 여행기획과 관광가이드이처럼 전국에서 참배객을 모아 이세참궁(伊勢參宮)을 가능하게 한 것은 현대의 여행업무를 능가하는 폭 넓은 여행관련 제 업무가 행해졌로 참배단이 쿠마노에 도착하면 그곳의 온시들이 현지에서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오늘날의 호텔업?관광업자의 역할을 담당했다.에도시대에 들어 이세참궁이 성행하자 온시가 대활약을 하게 된다. 온시는 원래 기도사(祈禱師)였지만 참배자를 대상으로 폭넓은 여행업무를 겸하였는데, 후기에 들어오면 상업활동에 더욱 힘쓰게 된다.고에 의해 서민층의 이세참궁이 급속하게 증가한 것은 온시에 의해 계획되어 진 경우가 많았다. 이세신궁의 온시들은 정기적으로 지방을 돌며 단가(檀家)를 개척하였고 겨울이나 이른봄에 정기적으로 이들 단가를 방문하여 부적과 선물(농사력이라 할 수 있는 이세달력이나 차나 분 같은 토산물)을 나누어주고 ‘천하태평, 가내안전, 오곡풍양’을 비는 기원을 대행해주었다.온시가 마을을 방문하면 신을 대하듯 정중히 대접했다고 한다. 이처럼 부락민과 온시 사이에사단(師檀)관계가 성립되어 온시는 지역사회의 고의 회원들을 신궁과 맺어주는 중개자 역할을했다. 그러나, 후기에 오면 온시는 이세신궁과는 절연하고 각 지방을 돌며 애초에 기도료를 많이 낸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을 상품화해서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외에 참배객들이 이세에 도착하면 온시의 저택은 숙박장소로 제공되어 수입을 올렸다. 그 외에도 단가의 참배객들은 공양료?가구라(神樂)료 등을 온시에게 봉납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또한, 참배를 위한 적립금을 관리하고 고객을 모집하는 집객에는 지방의 세력 있는 온시에의해 행해졌으며, 점차 자신의 ‘단골고객’을 획득해서 이세고(伊勢講)가 발달하게 되었다. 자신의 고객이 이세참궁여행을 출발하면 온시는 길 안내에서 여관업까지 담당했다. 우선, 온시는 이세에 도착한 참배자를 자신들의 저택인 숙소에 묵게 하고 호화판 요리와 술로 대접했고, 다음날에 무악을 즐기게 하고 부적을 건넨다. 그 다음 외궁(外弓)과 내궁(內宮)을 안내하고 그외 다른 명소를 안내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유곽으로 안내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온시들은 그러한 환대가 그 다음 해의 ‘집객’과 직결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일반인에게까지 확산되어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이코쿠 반도 치치부 100개소 도량 순례', 즉 일본 100곳 순례가 모양새를 갖추었다. 즉 사이코쿠 33곳, 반도(관동지방) 33곳, 치치부 33곳의 관음사원을 모두 순례하면 총 100곳이 된다. 왜 하필 100곳이냐 하면, 관음보살이 33가지 모습으로 자신의 몸을 바꾸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법화경의 설법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가 되자 여행이 붐을 이우면서 33곳 순례 여행도 크게 유행했다. 단 33곳의 순례에 한하여 순례라 일컫는다. 또한 33곳을 '후다쇼'라 부르는 이유는 순례자가 패를 헌납했기 때문이다. 나무나 종이로 만든 패의 한가운데에 '봉순례 사이코쿠 33곳' 이라 쓰고 오른쪽에 날짜를 왼쪽에 주소, 이름 나이 등을 써서 각 도량의 본당 기둥이나 문에 붙이거나 박아두었다. 기록에는 이즈모 지방 어느 마을의 다섯 처녀가 사이코쿠 33곳 순례 여행을 떠나는데 이들의 행적을 간단히 보자.다섯 처녀들은 지이미야 마을이 고향인 농부들의 딸로 같은 동네 친구사이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28살의 도메였는데 병약한 몸이 최근 관음신앙에 귀의하고부터 차도를 보여 그 보답으로 사이코쿠의 관음사원 순례여행을 생각하고 다른 4명의 처녀와 떠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가난한 농사꾼 처녀들로 여비가 없었다. 길목마다 사람들의 인심과 품앗이를 대가로한 약간의 음식을 얻으면서 잠은 헛간이나 마구간에서 자면서 갔다. 사람들이 베푸는 인정을 등불삼아 한 걸음 한 걸음 여행을 계속했던 그녀들은 가난은 이미 애초부터 몸에 베어 있어 처음하는 여행에 나름 신기하고 즐거웠던 여행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정을 시작한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홍역에 걸려 야키이무라에서 모두 몸져 눕게된다. 여행을 떠나면 물과 음식이 바뀌는 등 주변 환경이 크게 변하기 때문에 곧잘 몸이 아픈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들은 여자로서 한달이 넘는 강행군으로 체력도 바닥이 난 상태에서 목욕할 기회도 거의 없고, 비위생
    인문/어학| 2011.12.14| 8페이지| 1,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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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군벌시대와 국공합작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14장 군벌시대와 국공?합작중앙과 지방의 군벌 - 1916년 원세개의 사망으로 북경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은 일본의 지원을 받고 있는 단기서(段祺瑞)의 안휘파와 영국과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 풍국장(馮國璋)의 직예파였다. 그러나 양파는 어느 편도 정국을 주도할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 타협하여 부총통인 여원홍을 대총통으로 풍국장을 부총통으로 단기서를 국무총리로 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문제로 인해 북경정부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결국 단기서는 안휘파의 정객들로 구성된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대해 직예파는 1920년 봉천파의 장작림과 연합하여 안휘파와의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직예파와 봉천파 사이에도 갈등이 빚어져서 이번에는 봉천파가 안휘파, 손문과 반직예파의 삼각동맹을 맺고 1922년 4월 제1차 직봉전쟁을 벌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직예파는 한때 북경정부의 개혁 가능성에 기대가 모아지기도 했지만, 이 내각의 무기력함이 드러나면서 기대가 무산되었다. 직예파와 반직예파 삼각연맹의 맹주인 봉천파 사이에 1924년 9월 다시 제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봉천파의 승리로 돌아가고 단기서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였다.한편 북양군벌이 북경정부를 둘러싼 패권다툼에 골몰하고 있는 동안 지방 각지에는 크고 작은 군벌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할거하였다. 만주에는 일본세력을 등에 업은 장작림, 산서에는 염석산, 운남에는 당계효, 광동에는 진형명 등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 지역군벌도 중앙군벌이나 마찬가지로 잦은 전쟁을 통해 성쇠부침이 심했다. 또 지역군벌이 어떤 성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지배가 전 성에 미치는 것도 아니었다. 성 안에는 다시 소규모 지역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전반적으로 군벌시대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잦은 군벌세력의 교체로 장기적인 전망을 가진 안정된 통치구조를 갖지 못했다.이와 같은 군벌시대의 통치는 중앙정부가 중앙집권적인 행정능력을 갖지 못하고 다. 그러나 省 정치의 개혁은 군벌의 존재기반 자체를 부정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도한 군벌정권과는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남북대립이라는 전국적 상황은 중소군벌의 1성에 한정된 자치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한편, 1913년의 원세개토벌 전쟁에서 실패한 후 망명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던 손문은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당의 새로운 강령과 선언을 채택한 손문은 여기서 반제국주의와 노동자, 농민 보호, 지주와 소작인의 지위의 점진적 평등을 주장하였다. 국민당은 이미 공산당원들의 개인자격 입당을 허용하고 있었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결국, 제1?2차 광동군정부를 거쳐 1923년 광동에서 진형명을 몰아내고 제3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1924년 1월 국민당을 개조하면서 공산당과의 합작(제1차 국공합작)을 한 손문은 반제국주의, 반군벌의 국민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에서 손문과 연합관계에 있던 봉천파가 승리하고, 정변을 일으켜 봉천파의 승리에 기여한 풍옥상이 손문에게 북상을 요청하자 손문은 이후의 정국 해결방안으로 상회, 교육회 등 9종의 단체 대표로 구성되는 국민회의를 소집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북상하였다. 손문의 북상과 더불어 활성화된 국민회의운동은 그가 1925년 3월 북경에서 사망하면서 활력을 잃었다. 그러나 손문 사후 광동의 근거지를 강화한 국민당은 1926년 북벌을 시작하여 2년 만에 이를 완수함으로써 군벌시대를 종식시켰다.제1차 국공합작 - 손문과 그 측근이 5?4운동을 경험하면서 사회주의와 소련에 관심을 가지고 또 국민당을 대중적 정당체제로 발전시켜 가려는 전환을 하고 있을 즈음 소련이 손문에게 접근하였다. 진형명의 정변으로 상해로 쫓겨난 손문은 소련의 지원을 예상하면서 국민당의 당세를 확장하기 위한 개진(改進)작업을 시작하였다. 손문은 개진준비에 착수하기 직전에 소련정부 대표 요페와 공식적인 교섭을 하여 1923년 1월 소련이 중국의 통일과 독 공산당원이 맡았다. 또 이 대회에서는 군관학교 설립안이 통과되어 소련에 시찰을 다녀온 장개석을 교장으로 하는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1924.6). 이로 인해 국민당은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국민당은 이 대회를 계기로 하여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연소용공(聯蘇容共) 정책을 표방하고 국민이 주체가 되는 혁명을 지도하는 대중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하고 독자적인 혁명군 양성을 시작하였다.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국민당의 개조에는 주로 화교출신 당원들을 중심으로 비판세력이 나타났다. 당무에서 소외된 국민당원들도 공산당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손문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용공원칙을 재확인하여 분규를 해소하였으나 개조를 둘러싸고 빚어진 당내의 파벌 분규는 안으로 잠복하여 몇 년 후 결국에는 국공합작의 결렬로 나타나게 되었다.5?30운동 - 손문이 1924년 북상하면서 국민회의운동이 북방으로 확산되어 갔고 이 과정에서 각지의 학생, 노동자, 시민 등의 단체가 결집되어 갔다. 손문이 운동 과정에서 죽은 뒤 이 운동은 구심점을 잃었으나 운동으로 결집된 역량이 있었기에 곧 이어 상해에서 5?30사건이 일어나자 조직적인 반제국주의의 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공산당은 상해의 노동자조직을 중심으로 하여 불평등조약의 철폐와 상해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민당의 근거지인 광주에서도 상해사건에 대한 반향으로 6월 23일 10만명이 참가하였다는 군중 시위운동이 일어났고, 시위대는 영국, 프랑스 양국 군대와 충돌이 일어나 50여 명 사망 170여 명 부상이라는 최대의 희생자를 낳았다. 이 사건 이후 광주, 홍콩에서는 국민당의 지원하에 파업이 일어나 1년 4개월이나 계속되었다. 이는 반제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한 좋은 사례로 역시 공산당이 주도하였다.이와 같이 5?30운동을 통해 노동운동이 반제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공산당의 대중운동에서의 지도역량이 강화되었고, 국민당도 운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당원과 소련 고문을 체포, 연금하는 중산함사건이 일어나고 왕정위가 잠적하는 일이 생기면서 왕?장 연합체제는 붕괴되었다. 이후 군과 당을 실질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른 장개석은 국민혁명군 총사령직에 올라 북방의 군벌을 정벌하는 1926년 7월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북벌은 군벌과의 전쟁 방식과 군벌과의 타협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북벌에 들어가기 전부터 광서성이 국민혁명군에 편입되는 것을 필두로 하여 도처에서 군벌들이 싸움 대신 타협을 택하였다. 북벌의 진척에 따라 국민정부군의 점령지역이 호남, 호북, 강서로 확대되면서 점령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이 당내에서 발생하자, 1927년 12월 13일 반장개석파 국민당 인사와 호남, 호북 군벌 및 공산당원들은 회의를 열어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무한에 두기로 결의하였다.이에 반해 장개석은 1927년 1월 3일 역시 회의를 열어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자신의 근거지인 남창에 두고자 하였다. 양자간의 공방이 오고가던 가운데 3월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장개석이 장악하고 있던 국민혁명군 사령부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에 4월 12일 장개석은 상해에서 반공적 입장을 밝힌 정변을 일으켰다.4.12정변 후 장개석은 18일에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웠다. 무한정부는 장개석의 정변 후에도 한동안 국공합작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할 수가 없었던 무한정부는 북벌과정에서 공산당의 지도하에 급속히 발전한 호남, 호북의 급진적인 노동자, 농민운동으로 인하여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농민운동은 군벌부대의 불만을 샀는데, 그들 자신이 지주였던 이들 군벌 출신 국민혁명군은 급진적 농민운동에 대하여 반공적인 사변을 일으켰다.이와 같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코민테른이 공산당에 보낸 전보가 구실이 되어 공산당은 국민당으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무한의 국민당이 정식으로 공산당과의 합작을 결렬시키기로 결정하였고, 이로써 3년여에 걸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관계가 깨어지게 되었다.리하여 북벌의 목표인 통일은 군벌간의 일정한 연합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한계를 가진 채 이룩되었다. 통일이 이루어지자 이제 남경 국민정부는 각 군벌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중앙정부의 통일적인 권력체계를 확립해야 하는 문제에 당면했고 그 중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북벌로 팽창된 군대의 감축과 군사부문에 대한 중앙행정부의 통제 강화였다. 군대감축 방안에 대해서는 각파 군벌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던 중 편견회의가 정식으로 열리지만 군벌회의 과정에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군벌들의 반발을 사서 반장개석 전쟁을 초래했다. 반장 전쟁은 우선 광서계 군벌군과 중앙군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장개석군이 불리했으나 차츰 전세가 역전되었다. 북벌 이후 내란이 계속되는 한편으로 남경 국민정부는 일찍이 손문에 의해 제시된 건국방량에 따라 훈정의 실시와 오원제 수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체제를 정비해 갔다. 그 결과 훈정기에는 중앙 정치회의의 조직과 권한이 크게 확대된다. 중원대전의 승리를 앞두고 장개석은 훈정의 기초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약법제정을 위한 국민회의를 소집하고자 제안하고 이에 따라 국민정부 주석으로 취임한 장개석은 군사와 재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훈정기 국민정부는 지방분권적이고 민주적인 요소를 제약한 독재적 체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제체제는 장기적으로 보아 국민정부의 단명을 초래했다. 독제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언론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수반했고 이렇게 드러난 남경정부의 비민주적인 성격이 결국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남경 국민정부는 비록 초기의 반장 전쟁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끊임없는 내전으로 국내 건설사업에 많은 차질을 빚었다. 안으로는 공산당의 도전과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직면해 근대화를 추진해 나갈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남경정부는 내전과 외침이라는 제약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했으며 제국주의세력에 빼앗긴 주권의 회수에 노력해 어느 정도 성다.
    인문/어학| 2011.12.14| 8페이지| 1,000원| 조회(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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