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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레니즘시대의 철학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스토아 사상과 에피쿠로스 사상을 중심으로)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윤리 규범 중 하나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덕목이다. 그런 덕목은 개인으로서 행복을 어떻게 누리며 살 것인가 라는 문제와 또한 연관이 깊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생활의 이상은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데 있었다. 변화가 심하여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여 개인의 자유가 행복과 연관된 것으로 인식했고 사람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숙고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한 분파였던 윤리학은 독립된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은 독립된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먼저 고전기보다 더 추상적으로 됬으며 구체적인 사회?정치 문제와는 관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공 문제와는 무관하면서 개인적인 선택을 강조했다.이런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두 가지 경향을 드러냈는데 이 두 경향은 시종 그 문명을 나란히 관류하고 있었다. 그 주요 경향은 바로 스토아 철학(Stocism)과 에피쿠로스 철학(Epicureanism)이다.우선 스토아 학파는 제논(B.C 335~263)이 창시했다. 헬레니즘기에 가장 주도적인 철학이 있다면 바로 이 스토아 철학일 것이다. 제논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학자들은 아테네의 공공건물인 회랑(stoa)에 모여서 활동했기 때문에 스토아 학파라고 불린다. 스토아 학파는 일반적으로 금욕을 주창했기에 스토아적이라는 것은 바로 금욕적인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실제로 창시자인 제논은 절제의 모범을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검약하고 초연한 생활을 했다. 제논과 그의 제자들은 우주란 하나의 질서 잡힌 전체로서 그 안에서 모든 모순은 궁극적으로 선으로 귀착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악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불운은 우주의 궁극적 완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부수적인 사건일 따름이었다.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합리적 목적에 따라 엄격하게 결정된다. 또 어떤 개인도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의 운명은 연속적인 사슬의 한 토막이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점에서만 자유롭다.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이건 저항하던 간에 인간은 운명을 극복할 수는 없다. 그들의 최상의 의무는 우주의 질서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그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를 가능한한 정중히 맡기는 것이다. 그러한 체념을 통해 지고의 행복이 얻어질 것이며 지고의 행복이란 곧 마음의 평정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에 동요가 없어야 하며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apatheia)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합리적 본성에 의해 우주적 목적에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합치시키며 자신의 영혼에서 모든 고통을 털어버리고 자신이 겪는 악운에 대해 투덜거리거나 저항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였다.또한 스토아 학파는 그들의 전반적 철학과 잘 조화되는 윤리?사회적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지고의 선이 마음의 평정이 있다고 믿고 의무와 자제를 주요한 덕성으로 강조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의 은둔을 권면하지 않고 오히려 공공문제에의 참여를 합리적 정신을 지닌 시민의 임무로써 권유했으며 노예제와 전쟁을 비난했지만 결코 이들 죄아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거나 철폐운동을 벌이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또 폭력적 방법에 의한 사회변화에 의해 야기되는 결과가 그들을 치유하고자 한 질병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평등주의, 평화주의, 인도주의 등은 그 시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인간의 모진 운명을 완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스토아 학파의 학자들은 이성을 중시하여 이성이 모든 자유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이성을 지키고 스스로 주인이 되면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고전기 폴리스 시민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자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한다. 이런 주장은 세속의 일을 경멸할 수 있는 자세로 이어지고 어떤 외부세력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신념을 낳는다.이러한 도덕적 자유로 이루어지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며 이 도시는 보편적 원리에 따라 통치된다. 이런 상태의 국가가 스토아 학파가 보았던 이상국가였다. 이 국가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 불리는 세계시민주의이다. 이런 국가관은 자연법 사상을 낳았다. 보편적 세계 질서는 이성의 법을 따르며 이성의 법은 자연법이라고 인식하고 자연법을 발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보았다. 이런 스토아 사상은 파나이티오스(Panaetios)와 포세이도니오스(Poseidonios)가 로마에 전파했고 로마 제정기에 세네카(Seneca), 에픽테투스(Epictet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를 거쳐 계승되었다. 이 스토아 사상은 로마의 법사상과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근대에는 몽테뉴나 홉스에게서 다시 나타난다.다음으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생의 기본 원리를 쾌락에서 찾고자 했으므로 쾌락주의로 알려져 있다. 에피쿠로스(B.C 342~270)는 사모스(Samos)섬에서 태어났으나 추방당하여 가족과 함께 난민으로 생활하다가 아테네에서 공부했다. 불행한 과거생활은 에피쿠로스가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원인이 됬다. 이런 불행한 과거는 대개 에피쿠로스 학파가 공유하는 사항이었다. 이들은 철학적인 논의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감각을 신뢰했다. 즉 지고의 선이 쾌락이라는 이론에 입각해 있었다. 그러나 방종은 진정한 쾌락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른바 육체적 쾌락은 피해야 했다. 모든 지나친 육욕은 그만큼의 고통으로 상쇄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신체적 욕망에 대한 절제된 만족은 허용되었고 그 자체로서 좋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정신적 즐거움, 어떤 것은 취하고 다른 것은 피하는 이유에 대한 건전한 명상 그리고 과거에 누렸던 만족감에 대한 원숙한 성찰 등이었다. 그러나 모든 쾌락 중에서 최고의 쾌락은 정신?육체적 고통이 전혀 없는 가운데 느끼는 영혼의 평정에 있다. 이러한 목표는 두려움의 제거 특히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함으로써 가장 잘 이루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정신적 고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에피쿠로스는 윤리를 설명하면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수용했다. 원자론에 따르면 무수한 원자가 이산집산하면서 갖가지 사물이 생긴다. 이런 세계관은 세계의 기원을 원자와 공간으로 환원하여 어떤 초월적 존재의 가능성을 부인함으로써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신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일부 원자가 수직 궤도에서 벗어남으로써 만물의 결합이 이루어진다는 원자의 사행운동설을 추가했다. 이는 정해진 경로에서 이탈할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함을 입장하려고 고안한 것이었다.이처럼 에피쿠로스 철학의 최종점은 세상의 변화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를 누려 행복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숨어사는 것을 권장했다. 이는 일상과 공공 생활을 불쾌한 현실에서 도피함으로써 마음의 평정(ataraxia)을 가지라는 뜻으로 비쳐지기도 했으나 평화를 가져다 주는 은둔과 고요함의 중요성을 인식한데서 나온 말이다. 이 사상은 로마 공화정 후기에 루크레티우스(Lucretius)에게 전해지고 근대에는 밀(John stuanrt Mill)에 의해서 다시 등장한다.두 사상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나 사회의 복리가 아닌 개인의 선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라는 점, 어떠한 영적 실체의 존재도 부정했다는 점에서 물질주의라는 점, 이세상의 사는 모든 인간은 똑같다고 가르치면서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은 보편주의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등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인문/어학| 2011.06.02| 4페이지| 1,000원| 조회(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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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카르트의 철학방법에 대해
    데카르트의 철학방법1. 데카르트의 철학관에 대해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의 서문에서 그의 철학관을 표명하였는데 이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철학이란 말은 지혜의 탐구를 의미한다. 지혜란 그저 처세를 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활을 해 나아가기 위해서나 건강의 유지 및 모든 기술의 발견을 위서나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 지식이 그런 것이 되려면 그것이 제1원인으로부터 연역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을 획득하려면 이 제1원인들, 즉 원리들의 탐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원리들은 두 가지 조건들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그것들이 아주 명석하고 명증적이어서 인간의 정신이 주의깊게 그것들을 고찰할 때 그것들의 진리성을 의심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사물들의 인식이 이 원리들에 의존하며 따라서 다른 사물들 없이도 이 원리들은 인식될 수 있지만 거꾸로 이 원리들 없이 다른 사물들이 인식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이 말은 철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근본적 견해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데카르트는 철학을 ‘지혜의 탐구’ 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탐구라고 한 것은 정신의 훈련, 활동의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또 이어 “지혜란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 라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데카르트가 철학을 모든 학문의 총체로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철학이 원리들의 탐구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고 이 원리들은 명증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원리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모든 지식 즉, 학문의 체계를 확립하려 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2. 방법적 회의이제 앞서서의 데카르트의 철학관을 바탕으로 그가 제시한 ‘방법적 회의’ 에 대해 알아보려한다. 그는 에서)“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에 아이였으므로 또 우리의 이성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여 우리의 감각에 주어진 사물들에 대해서 갖이었던 것이다.여기서 볼때 데카르트는 시대적 정신인 합리주의의 생각을 따라 세상의 진보에 대하여는 낙관적 견해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아름다운 꿈은 피땀어린 사색과 과학적 탐구에 의하여 과거의 유습과 그릇된 사고 방식을 뿌리채 뽑아 버리고 확실하고 명석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붙이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확립하는 힘겨운 작업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인류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심각한 회의를 밀고 나아가 마침내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근본 원리, 또한 그 위에 인간의 모든 지식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가장 튼튼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그렇다면 데카르트는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의심해 보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 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중 첫째 성찰에서 그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자기가 과거에 가졌던 모든 견해를 모조리 문제삼고 뒤짚어 엎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것을 뒤짚어 없으면 결국 그 모든 것을 전복하게 된다고 하여 그 자신이 과거에 믿던 모든 것이 거기에 의거하는 원리 자체를 전복하는 일에 착수한다.그리하여 그는 먼저 감각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게 되는 지식의 불확실성을 깨닫으며 그것을 맹신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의 습관이 얼마나 짓궂은 것인가를 절감하며 예전에 가졌던 낡은 견해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그저에서부터 의심하고 뿌리채 뒤흔들어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래야만 새롭고 참된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확실한 지식으로만 구성되는 학문의 체계를 세워볼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여기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자로서의 뚜렷한 사명의식을 읽을 수 있었다. 누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이 아닌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에 대하여 오직 진리추구를 위해서 흔들림없는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작업에 몰두한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그리하여 데카르트의 회의 있었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이말에서 데카르트의 회의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니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흔들림없는 토대위에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인 것이다. 곧 방법적 회의(doute methodique)이다.데카르트는 이러한 회의를 통하여 학문을 반석 같은 기초위에 세울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어느 회의론자보다도 더 결연히 회의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되 가장 철저히 의심하였으며 그리고는 인간에게 가능한 회의의 궁극에 이르러 마침내 그 모든 회의를 극복 할 수 있었다.데카르트의 이러한 방법적 회의는 정말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 마지막까지 파고들어 얻어낸 진리이기 때문에 스스로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확신을 줄 수 있는 내용이며 그러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임을 생각해 볼때 정말 대단한 학문의 탐구방법이란 생각 또한 해보게 되었다.3.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두 번째 성찰에 접어들면서 데카르트는 회의에 대해 극복,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한다. 성찰 두 번째 장에서 그는 “...마치 소용돌이치는 심연 속에 갑자기 빠진 것처럼 낭패하여 발을 밑바닥에 댈 수도 없고 또 수면 위에 헤엄쳐 나올 수도 없는 상황에 있었다.” 고 표현한다.하지만 그는 다시 물 위로 떠올라 어제 걸어가던 같은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같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만 무슨 서광이 비쳐 올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잇는 것은 무엇이나 전혀 거짓된 것임을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양 제쳐놓으면서 전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인식할 때까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일은 못 하더라도 적어도 다음의 한가지 것, 즉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인식하는 데 이르기까지 전진할 것을 다짐한다.여기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철학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심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 그렇다고 하면 참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데카르트의 확신이 나온다.“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어떤 신이 있어서 내 속에 그런 생각을 넣어 주는 것은 아닐는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런 생각들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어도 무엇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어떤 감각이나 어떤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 바 있다. 그렇긴 해도 나는 좀 주저한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신체나 감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도록 이것들에 매어 있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세계 안에서 하늘도 정신도 신체도 하여간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내가 무엇을 확신했었냐고 하면 혹은 그저 내가 무엇을 생각하기만이라도 했다고 하면 나는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군지 모르지만 아주 힘 있고 아주 교활한 어떤 기만자가 있어서 온갖 재주를 부려 항상 나를 속이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나를 속인다고 하면 결국 나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마음껏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어떤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무無이게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나서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라고 하는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된 것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즉 모든 것이 의심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걸어가는 상황속에서 의식속의 계속되는 전진을 통해 모든 시행착오를 거친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여 확실하여 누군가 아무리 흔들어 보려 하여도 그럴 수 없음을 인식하고 주저없이 철학의 제1원리로 상정하였다.이것에 관한 과정을 데카르트는 제4부에서 요약하고 있는데든 것이 내 꿈의 환상보다 더 참되지 못하다고 가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금방 그 뒤에 그렇게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동안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가 누구나 고민해봤음직한 심각한 문제, 즉 인간이 과연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한 가지라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위에 우리의 학문을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는 가운데 순전히 자기 혼자의 사색에 의하여 제1성찰을 이끌어낸 데카르트에 대해 새삼 놀라움이 든다는 점이었다. 이 제1원리는새로운 발견이자 현대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4. 데카르트의 인식론에 대해데카르트의 인식론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저서 란 책을 살펴볼 필요가 생긴다. 이 책의 서장에서 그는)“인간 정신의 능력을 넘지 않는 모든 지식은 사실, 아주 놀라운 유대에 의하여 얽혀 있고 또 아주 필연적인 논리 전개에 의하여 한 가지 지식을 다른 지식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으므로 가장 단순한 것들에서 시작하여 점차 높은 것에로 나아갈 줄을 알기만 하면 재능이 많지 않더라도 그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평범한 사람도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올바르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서의 이성에 절대적 신뢰를 두었다. 그리고 이 이성은 만인에게 고루 주어져 있다고 믿었다.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이 데카르트 자신도 자신이 말한 이성을 극히 예리하게 활동시켜서 라는 점이다. 이 원리를 자기의 철학의 제1원리로써 확립한 후 그는 계속하여 이성을 이용하여 신의 현존과 자연의 모든 물질적 사물의 현존을 증명하는 데로 사색을 전진시킨다.그는 철학의 제1원리인 cogito, ergo sum을 확신한 후에 이 명제로부터 ‘나’ 라는 것이 무엇임을 확실히 자각했다. 또한 이러한 ‘나’라는 존재의 자각으로부터 신의 본성과 현존을 확실하게 알게 됨으로 나아간다. .
    인문/어학| 2011.06.02| 7페이지| 1,500원| 조회(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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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미학에 대한 정리
    고대 미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1. 고대미학사상의 발전인류미학사상은 일찍이 고대로부터 발생, 발전하였다. 고대미학사상은 중세미학사상이나 근세미학사상에 비하여 일련의 고유한 특성이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고대 예술의 특성에 의하여 제약된다. 이를테면 고대예술의 고유한 논리성과 객곽적이고 형상적인 특성은 고대 미학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고대 미학의 특성을 제약하였다.이리하여 고대 미학은 예술과 미학의 제문제에 대한 조화로운 논리와 합리적인 태도가 특징적이였다. 이어 고대 미학은 신화와 같이 사유의 비합리적인 형식에로 전환되었을 때에도 그것들이 합리적이였으며 인식의 중요한 수단으로 되었다. 총체적으로 고대미학은 주로 미의 감성적 존재형식의 문제를 논의한 존재론적 성격으로 특징지어진다.고대미학은 고대예술의 역사에서와 같이 뚜렷한 세 시기, 즉 고대초기 미학과 고대성숙기 미학 그리고 헬레니즘시기 미학으로 나누어지는데 이중에서도 고대 성숙기 미학의 두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2. 플라톤의 미학)플라톤(기원전 427~347)은 고대의 유명한 철학가의 한 사람이며 객관관념론의 창시자이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약 34건의 대화형식의 저작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고 있고 있는데 그 안에서 발견되는 미학의 중심적인 내용은 아름다운것에 대한 학설이다. 그 가운데서 다음에 제시될 시피아스와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요구한 궤변적인 시피아스와의 담화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대화과정에 미에 대한 일련의 규정이 제기되었는데 여기서 플라톤의 미학적 견해에 대해 짐작해 볼수 있다.“시피아스는 아름다운것이란 다른것이 아니라 그 무엇의 결합이 사물을 아름다운 것으로 되게 한다고 하였다. 시피아스는 그러한 아름다운것의 증거로서 황금을 예로 들고 있으나 소크라테스는 이 주장을 논박하였다. 그는 피지가 아핀의 눈은 황금으로 만든것이 아니라 상아로 만들었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피지가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몰랐던가 설과 더불어 그의 미학에 특징적이며 그의 철학의 일반원칙으로부터 나오는 예술창조에 관한 견해도 포함되어 있다. 고대 고전가들의 전통을 따르면서 플라톤은 예술을 미메씨스(mimesis)에 의하여 인식한다고 한것이 특징적이다.그는 음악, 시, 연극의 기초가 모방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무씨예술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그의 창작과 관련된 모든 것이 모방이고 재현이라고 하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고 하였다. 그는 회화와 조각은 보다 모방적인 예술이라고도 하였다.이를 통해 플라톤은 앞서 언급한 예술의 『본질』,『이데아』를 모방으로 보았다고 짐작해볼 수 있었다.)그렇지만 모방에 관한 고대이론을 발전시키면서 플라톤은 순수 관념론적인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예술은 감성적인 물체의 세계만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견해를 라는 책에서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진실성에 관한 예술가의 태도를 분석하고 있다.그의 견해에 의하면 첫째, 영원한 이데아 둘째, 그것의 구현 셋째, 이러한 구현의 복사 순서로 모방되는것만큼 예술은 진리의 세 번째 반영으로 되는 모방이다. 이것에 대한 예로 플라톤은 ‘침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침대에 세가지 모양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즉, “첫째, 침대는 신이 만든 유일한 이념이고 둘째, 침대는 이 침대의 이데아를 목수가 모방하여 만든 현실세계의 침대이며 셋째, 침대는 화가가 다시 침대를 모방한 예술세계의 침대이다.” 라고 하였다.여기에서 플라톤은 예술관을 짐작해보자면 감성적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인정하나 그에게 있어서 그 감성적 물질은 다만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런 경우 예술가의 모방은 결국 모방의 모방, 묘사의 묘사이며 그림자의 그림자로 밖에 여겨지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예술은 2차적인 반영으로, 즉 반영된것의 반영으로 그 인식적 가치를 상실하고 있으며 또 예술은 허위적 현실세계에 대한 진리의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플라톤의 모방이론은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는데서만해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가지는 규정을 주었다. 그는 《크기》와《질서》를 미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징표로 보았다. 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는 크기와 배열속에 있다.” 고 하면서 이 징표들은 다면적이고 연관된 그의 모든 형태로 된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활동체나 비활동체건 간에 아름답기 위해서는 능히 눈으로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크기를 가져야 된다고 하며 그와 똑같이 비극의 줄거리도 사람들이 용이하게 기억할 수 있게 일정한 길이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예술뿐아니라 아름다운 것의 모든 형식들은 자연과 사회에서 일정한 크기와 질서를 요구한다고 간주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양과 질서의 통일로 된 국가는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고도 하였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질서》와《양》을 어디에서나 미의 필수불가결의 징표로 보았다.크기, 질서, 양을 중시하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관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에도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어떤 예술작품을 보고 미를 느끼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일정한 크기를 지녀서 쉽게 알아볼 있느냐도 중요한 문제이다. 지나치게 작은 존재는 그것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고 지나치게 큰 사물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을 한꺼번에 관찰할 수 없어 동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될 수 없다. 또한 어떤 사물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즉, 배열이 어떻게 되어있느냐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에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해 느낌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상당한 시간적 거리가 있는 고대의 철학자가 세대를 뛰어넘는 미의 이러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이 들기도 했다.다음으로 어떻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방에 관한 학설에 대해 살펴보겠다. 플라톤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서 모방(mimesis)를 발견하였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설은 플라톤의 모방설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플라톤은 《영 요약할 수 있겠다.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중 비극론앞서서 고대미학중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관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中 ‘비극론’에 대해 간단히 정리한후 몇가지 점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본질을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정의한다.이러한 비극에는 여섯 가지 구성 요소가 있는데 플롯과 성격, 조사와 사상,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그는 이 여섯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라고 보고있다. 예를들어 어떤 시인이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그리고 조사와 사상에 있어서 훌륭하게 손질된 일련의 대사를 차례차례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비극의 진정한 효과를 산출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다소 미비한 점이 있더라도 플롯, 즉 사건의 결합을 구비한 비극의 그 효과를 더욱 훌륭하게 산출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한다.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어 플롯에 대한 언급을 먼저 시작한다. 플롯의 구성에 대해서는 플롯은 시간의 집합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이야기이어야 한다. 또 각 부분의 질서 정연한 원리 이어야하고, 사건의 발전은 선행 원인에서 알맞은 이유로 파생되어야 하며, 필연적인 혹은 개연적인 후속장면에 시작으로 취하여질 수 있어야 한다. 한편 너무나 길어서 끝나기도 전에 시작 부분을 잊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또 이 플롯은 하나의 행동에 대한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단일한 행동을 모방한 것이어야 한다. 그 각각의 부분이 서로 긴밀히 짜여 있어서 그 중 하나라도 자리를 옮기면 전체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비극적 행위는 고의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하며 또는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알지 못하고 행한뒤에 나중에 가서야 친근 관계를 발견하며 아니면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고 무서운 행위를 저지르려고 하였다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상대방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되는 경우여야만 한다. 그는 이것만이 시인들이 소재를 올바르게 취급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다.또한 시인은 플롯을 구성하고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가능한 한 실제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고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해야 하며 작중인물의 제스쳐로 스토리를 실연(實演) 해봐야 한다. 여기서는 시인의 경험의 폭과 깊이, 남다른 재능이나 광기를 필요로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과 같이 여러장에 걸쳐서 플롯의 구성과 플롯은 어떤 한 종류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 그 외의 성격, 사상과, 조사(措辭)의 명료성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첫째, 비극적 등장인물의 성격에 관한 요소는 네 가지 이다. 선량할 것, 성격이 적합해야할 것, 전래의 스토리에 나오는 원형과 유사해야할 것, 일관성을 가질 것등이 그것이며 시인은 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로는 등장인물의 사상인데 이는 그들의 언어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것, 다시 말해 무엇을 증명하려 하거나 반박하려 하거나 감정(연민, 공포, 분노등)을 환기시키려 하거나 과장하려 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그들의 노력속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의 행동이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중요하다거나 개연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바란다면 그들은 행동에 있어서도 언어와 동일한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로 조사에 관하여 말하자면 일상어는 가장 명료하고 의사소통이 분명하지만 저속하다. 그리고 생소한 말(신조어, 단축어, 변형어)은 고상하고 비범하다. 하지만 전부가 이러한 말들로만 된 시는 수수께끼가 될 것이고 방언으로만 되었다면 야만적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어 구성의 중용.
    인문/어학| 2011.06.02| 7페이지| 1,500원| 조회(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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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業)론에 대하여
    업業에 대하여1.업業의 어원업(karma)은 『만들다』(kr)를 어원으로 한 개념이며, 작용을 의미한다. 업에는 3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작용?법식法式?과果 의 분별이다. 작용이라는 것은 어원이 나타내는 것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며, 법식이라는 것은 불교 교단의 구성원이 지키는 작법作法인 것이다. 이 작법의 뜻은 선종禪宗 혹은 밀교)에서 갈마?磨)라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과果의 분별이라고 하는 정의는 불교에서 소위 업론業論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방법이며 행위라고 하면 반드시 고苦와 락樂을 수반한 결과가 생기는 경우의 의지적인 동작일 것이다. 의지를 수반하지 않는 동작은 다만 운동이지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불교에서 중시되는 것은 의지 그 자체와 함께 의지를 수반한 동작이다. 의지 그 자체도 행위라고 생각한다意業. 의지를 수반한 신체적 동작은 물론 신체적 행위身業이며, 말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될 때 구업口業 또는 어업語業이라고 불린다.어떤 동작이 일어난 경우, 불교에서 중요시 되는 것은 동작에 어떠한 의지가 수반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의지를 중요시 하는 의미는 이미 고대에 불교가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은 의지적 동작이며 이것이 인간적 행위의 의미이다. 업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인간적 행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2.업業에 대한 선입견과 의미업業이라고 하는 개념에 의해서 우리의 뇌리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人苦果라고 하는 결과에서 오는 운명론적 느낌일 것이다.보통 선인善因에서 선과善果 또는 악인惡因에서 악과惡果가 생기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불교에서, 선인에서 생기는 것은 낙과樂果이고 악인으로부터는 苦果라고 하는 것이 생긴다. 그러므로 지금 선인락과, 악인고과라고 바르게 표현한 것이다.더불어서 또 하나의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즉, 업사상은 인도에서 일어난 것이고 따라서 인도 및 인도사상권내의 동양만의 사고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일상 생활속에 정착된 것처럼 보이는 업)의 개념을 정리해 보면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즉, 앞서 말한 것처럼 일상 생활속에서 업이 윤리적 의미로서 사용되어 지고 있어 소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불교의 업 사상이 단지 그뿐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유교의 도덕론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불교적 업론業論이라면 불교 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 과제이다.다음으로 업은 동양인에게만 한정된 사상으로 본다면 과연 그것은 민족성을 넘어선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을것인가 또한 복잡한 역사적 현실세계에 과연 대응할 수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장래에 대한 과제이다.3.업業의 특징1)업과 시간의식우리가 업業이라고 말할 때 우선 생각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 구분일 것이다. 과거의 업에 의해서 현재의 결과가 나타났다든지, 현재의 업에 의해 미래의 그 결과가 무르익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상적 이해가 그것이다. 이 일상적 이해는 그대로 업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적 존재(개인이든 또한 사회이든)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변화를 변화로서 의식하는 존재이다. 즉 인간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업을 의식하고 있는 업적業的존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2)업론의 윤리적 의의업론이 윤리적인 의미에서 거론되는 경우는 상대적 방법에 의한 설법으로 여겨진다. 선업善業을 이룩함으로써 받을 결과는 낙樂이고 악업惡業이라면 고苦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말한다면 선업에는 선과善果, 악업에는 악과惡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성만의 강조는 절대적 보편성을 갖고는 있을 것이다. 즉, 절대적 방법에 의한 설법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생활을 보내고 있는 대중에게 있어서는 추상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대중에게 있어서도 또한 생생한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구체적인 체험은 고통과 즐거움이다. 그래서 상대적 방법이 취해졌다. 선과는 낙과가 되고 악과는 고과로서 고락이 있는 생생한 경험으로서 말해졌다.도덕적 선악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든지 또는 이러이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 선악은 당위當爲, 부당위를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선악은 추상적이 되어 고락의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버린다. 뿐만 아니라 당위 부당위에는 명령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서 자재천自在天이든지 신이라고 말하는 절대자를 예상하게 된다. 즉, 신 내지 자재천이 명령하는 법칙에 합치할 때에는 선이고 배치背馳하는 것은 악이 된다.그런데 불교에 있어서의 업사상은 자기 이외에 이러한 절대자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불교에 의하면 자산의 업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신이 정한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며 신의 명력에 의해서도 아니라고 한다. 자기가 만들어낸 업은 자신의 손으로그 과果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된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적 업론의 주체성을 볼 수 있다.3)업과 윤회사상불교에 있어서의 윤회사상은 사후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혹은 동물이 되고 혹은 인간이 되며 불교에서는 6취윤회하여 머무는 곳 없이 무한히 떠돌아 다닌다는 사상이어서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독자성을 갖고 있다. 윤회론은 생명의 무한성에 대한 상징이다. 사후에 동물이 되기도 하고 또한 신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여 멈추는 일이 없는 인간 생명의 무한성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불교는 해석하였다.4)업業의 본질업을 만들어 내는 기능을 신身, 구口, 의意의 3종으로 나누었는데 그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에도 불교만의 철학이 나타나 있다. 불교의 업론에서 신身이라고 할 때는 물리적인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에 있어서의 문제 의식은 실재론적 추구에 한정하지 않고 현실의 모습도 포함한 추구이다.업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 본질이란 업으로서 업을 형성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업이 나타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질은 불교 술어로 『체體』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본연의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추상적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태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업의 본질이라는 것은 신, 어, 의라는 현실태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위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삼업三業 그 자체가 업의 본질을 재현하고 있다. 이 세가지인 신 구 의 삼업이 업을 이야하는데 가장 많이 불리워지고 있다. 또 업에는 그 성질상 선업과 악업과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업의 3업이 있다 그리고 입과 몸으로 지은 업이 외부에 표현되어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표업이 있고 그 반대인 무표업이 있다.
    인문/어학| 2011.06.02| 3페이지| 1,000원| 조회(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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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헐리우드문화 (영화산업을 중심으로)
    헐리우드 문화(영화산업을 중심으로)에 대해헐리우드가 캘리포니아 남부에 자리잡은 세계적인 영화산업의 발생지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헐리우드란 이름은 20세기 대중 영화산업의 트레이드마크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은 시작 초기부터 이미 기술적으로 완벽한 대량 상품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미학과 세련된 스토리를 겸비한 채 소위 할리우드 스타일을 전 세계로 보급한 수많은 영화들을 발표했다. 이후 할리우드는 상대적으로 짧은 영화의 역사를 거치며 끝없이 계속되는 성공 스토리를 추구했다.헐리우드의 기록적성공은 소위 활동사진의 대두 및 영화의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의 황제 아돌프 주커(Adolph Zukor)도 언젠가 말했듯, 오락을 원하는 관객의 기호와 대중의 욕망을 투철한 목표의식으로 착취한 할리우드의 능력에도 그 비결이 있다.헐리우드의 역사는 정치적, 경제적 변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자체의 오류와 결함, 허영과 내부의 권력 투쟁 역시 헐리우드의 역사를 뒤흔든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헐리우드는 늘 변화된 조건에 적응하는 탁월한 유연성을 보였다. 내부 갈등, 경제적 위기, 정치적 격번, 사회적 강제, 경쟁국의 보호 조처에도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은 언제나 위기 상황을 이겨내고 세계 시장의 선도적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이에 이제부터 헐리우드가 현재의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영화산업을 중심으로 그 변천과정과 흐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헐리우드 영화의 태동은 에디슨으로부터 시작됬다고 할 수 있겠다. 1893년 에디슨의 조수 딕슨은 카메라를 개발하여 짧은 35mm 영화를 만들었다. 에디슨은 유성영화를 보여주려고 자신의 축음기와 결합시키려 하였다. 그는 딕슨에게 한 사람씩 영화를 보는 핍쇼 기계, 즉 키네토스코프를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에디슨은 영화가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영화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지 않았다. 그러한 작업에디슨 특허 영화사는 경쟁 관계에 있던 바이오그래프사와 비타그래프사를 합병하고 몇 달 뒤에는 영화용 필름 제작사로 가장 큰 이스트맨의 공장을 비롯해 미국에서 가장 큰 8개의 영화사들이 에디슨 영화사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 영화사들은 에디슨 제국의 일원이 된 것이다.에디슨 기업은 크기와 상관없이 독립영화사로 성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싸움을 걸었다. 이들은 기계 파괴나 법정싸움, 심지어는 폭력과 살인까지 저질렀다. 그런데도 독립영화사들은 서로 연합을 이루면서 1915년까지 에디슨 제국에 맞섰고 마침내 1915년 연방법이 독점 규제법을 승인함으로써 에디슨의 독점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한편 이런 에디슨 기업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독립영화사들은 서부(켈리포니아)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에디슨 기업은 시카고와 뉴욕을 근거지로 함) 로스엔젤레스 외곽의 작은 마을이었던 헐리우드는 수많은 영화제작의 산실이 된다. 영화제작이 연중 가능한 좋은 기후와 현장촬영에 유리한 다양한 자연환경(산, 바다, 사막) 등의 이점과 에디슨 기업의 위협이라는 상황이 맞물려서 헐리우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우선 초기 (1920~1940)년대 헐리우드 상황에 대해 살펴보면 1차 대전 이후 유럽 영화산업이 파산하자 세계 영화시장을 미국영화가 독점하기 시작했다.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영화는 세계 영화시장의 80%를 점유했었다.1910년대와 20년대에 걸쳐 점차적으로 소규모 스튜디오들은 서로 통합하면서 대기업화하여 오늘날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1920년대 말까지 대부분의 메이저영화사들-MGM, 폭스사(1935년 20세기사와 통합), 유니버셜, 파라마운트-이 출현하게 되었다.할리우드는 192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1930년대와 1940년대 중반까지 할리우드는 스튜디오 시대의 황금기를 구가한다. 이처럼 1920~1940년대 초반까지를 할리우드 영화의 고전기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 동안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흥행을 보장하기 위해 스튜디정하면서 제기 되었다. 그 표적의 하나가 영화산업이었다. 1945년 미국정부는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반트러스트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1946년 할리우드는 8개월간의 노동쟁의 끝에 25%의 임금인상을 가져왔고 영국은 외국영화의 수입수익에 대해 75%의 세금을 공표했으며 다른 유럽국가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1946년 높은 수익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산업은 경비절감을 시작했다. 1947년에는 스튜디오들의 제작예산이 50% 가량 감소되었고 주요 스튜디오들이 문을 닫거나 수입이 절감되었으며 유명배우의 계약금이 효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궁전같은 극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1950년대 영화의 TV방영 판권은 보잘 것 없었다. TV를 순간적인 유행품이라고 생각한 영화제작자들은 TV사의 구매제의를 일종의 모욕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MPAA의 회원들은 1948년 이전에 제작된 영화들은 1956년까지 방송에 팔거나 빌려주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TV용 영화제작이 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자 스튜디오들은 시설을 대여하기 시작했다. 1960년경 TV영화들의 대부분은 사실상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할리우드가 극장에 먼저 개봉하기 위한 것보다는 직접 TV에 방영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70년대 초 의 TV판권이 처음 100만불을 돌파한 이래 TV판권 수입은 할리우드의 중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영화산업과 TV산업과의 관계는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1950년대와 1960년대는 ‘청년시장’의 확산으로 영화시장이 세분화되고 다양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전후 세대들이 실소비자가 되면서 관심과 취향이 분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드라이브 인 극장이 생겨나면서 저예산의 ‘십대영화’나 선정영화‘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화들은 반전운동, 시민권, 성해방 등의 대항문화를 반영했다. 그리고 1966년 헐리우드 제작규범의 붕괴와 1968년 새로운 등급체제는 영화관객을 더욱 세분화 했고 따라서 제작자들은 성, 폭65-1969년 불과 4년동안 60%의 감소율을 보였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60년대 후반 스튜디오 합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966년 Para-mount는 Gulf & Western에, 1967년 U. A는 Transamerica에, 1969년 W. B는 Kinney National Services에, 1969년 M. G. M은 부동산 재벌인 Kirtk Kerkornian에 합병되었다. 새 소유주들은 영화산업보다 호텔, 도박, 레저 등의 부대사업에 더 관심을 두었다.하지만 이런 침체기를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영화 한편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라는 영화였다.영화의 마지막에 바다에서의 추적장면은 버디영화와 남성우월주의 이야기로 중류층의 한 가장이자 경찰이 브로디, 상류계층 어류학자인 후퍼, 하류계층의 선장 퀸트가 상어를 처치하기 위해 각자 다른 전략과 남자로서의 영웅적 행동을 취한다.는 사회적, 산업적, 경제적 현상으로서의 영화적 아이디어와 문화적 상품이었다. 그리고 영화산업의 경향과 실제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70년대 영화관람과 상영형태의 뚜렷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대적인 쇼핑센터의 증가에 따라 극장도 점차 복합극장화 되는 추세에 의한 것이었다. 시장형태와 청년문화 개념의 변화로 1970년대 중반은 예술영화 운동의 빠른 퇴조현상을 보였다.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작가 감독을 대신해 수퍼스타 감독으로서 뉴할리우드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이에 이 영화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할리우드를 뉴 할리우드라고 불렀다고 한다.1970년대 중반 영화산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세금 포탈이나 탕감을 위해 독립영화들을 지원했던 투자가들이 그것이 어렵게 되잔 지원을 회피함으로써 혁신적이고 색다른 대안영화들이 감소했다는 것이다.1970년대 중반 뉴 할리우드의 출현에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이 영화와 TV와의 관계였다. 1975년 영화채널인 HBO(Home Box Office)의 출현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할리우드와 TV와의 관계에 루카스가 스필버그와 함께 할리우드의 새로운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했다. 루카스와 스필버그는 1억불을 초과하는 1989년 까지의 역대 흥행작 10편 가운데 8편을 감독했다. 60년대 로 대표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참담한 흥행싶패는 1970년대 중반까지 블로버스처 영화가 제작되는 것을 금기시 했었다. 그러나 1975년 와 1977년 가 흥행기록을 경신하자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이 유행된다. 즉, 많은 제작비의 투입이 많은 이윤을 거둔다는 단순한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1980년대 가속된 세계오락 시장의 급속한 확장과 더불어 미국의 극장과 비디오 시장에서 그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루카와 스필버그의 수퍼 블록버스터들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할리우드의 국내 극장 수익은 1975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유료케이블과 홈 비디오 같은 다양한 ‘2차 시장’에 의해 보다 극적으로 성장했다. 유료 케이블과 홈 비디오 산업의 성장은 할리우드에 극장 시장과 마찬가지로 극영화 수입에 중요한 재정원이 되었다.또한 제작과 선전비용의 증가도 뚜렷한 현상으로 대두된다. 제작비용의 증가는 특수효과 비용과 스타들의 출연료가 상승한 두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히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제작비 상승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TV광고료 증가에 의한 것이었다.극장상영에 따른 또 하나의 중요한 법칙은 부수매체의 다양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가령 은 두장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발매했고 는 3장의 앨범을 냈다. 1990년 70억불이었던 아케이드 시장에 , 는 극장상영과 동시에 비디오 게임으로 출시되었다.또한 세계적인 멀티미디어 시장을 위해 스튜디오들은 프로덕션, 네트워크와 케이블, 음반, 출판, 게임, 장난감, 테마 공원, 전자 제품 공장 등과 공조 체제를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오락산업에 있어 다양한 복합 기업이 출현했다. 1985년 Fox는 호주의 국제적 언론재벌인 루퍼드 머독에, 1989년 Columbia는 Sony에, Warner는 Time Warner로, 1990년 MC
    인문/어학| 2011.06.02| 5페이지| 1,500원| 조회(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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