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천황의 전쟁책임1.서론일본의 현대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테마가 바로 2차대전이다. 이 2차대전으로 수백만의 생명이 사라졌고 천문학적 수치의 피해가 초래되었다. 2차대전을 일으켰던 주범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생을 마감했고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 존재가 있다. 그가 바로 일본의 천황이었던 히로히토였다.칭호는 미치노미야이고 연호는 쇼와, 다이쇼천황의 장자이며 2500년 된 왕조의 124번째 왕이다. 1916년 입태자의 의식, 1919년 성년의 예식을 거쳐 1921년 다이쇼 일본 왕의 섭정이 되었고 1924년 나가코왕녀[良子王女]와 결혼, 1926년 12월 왕위에 올랐다. 63년간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으며 보이지 않는 지휘관 역할을 해왔던 히로히토, 그는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63년간, 왕위에 올라 왕권을 휘두렀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히로히토가 죽자 일본인들이 보였던 행동들과 지금도 히로히토를 추앙하고 히로히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우경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일본수뇌부, 그리고 우경화를 지지하는 일본인, 그 중심에는 히로히토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2. 히로히토의 면책2차대전은 남북 7천키로미터, 동서 1만키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전역에서 전사자 117만명, 부상자 461만명, 일반 시민의 사상자 678만명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고 결국 일본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결국 8월 15일 종전조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하지만 이 종전조서에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패배, 항복이라는 단어가 없는 항복선언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수뇌부는 항복과 패배라는 단어 대신, ‘성단(聖斷)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싸움을 그만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럼 왜 패배라는 대신 ‘성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가,성단이라는 것은 성스러운 결단이다. 왜 성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천황인 히로히토가 악랄한 미국의 원자폭탄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성스러운 결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히로히토는 자애로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군주로서 탈바꿈 된다.이것을 시작으로 일본 수뇌부는 천황제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 히로히토천황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시작한다. 먼저 패전후 설립된 히가시 쿠니내각은 천황을 보좌하지 못해서 천황이 성단을 내리게 했다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GHQ가 들어오기는 9월전에 모든 전쟁관련 문서를 소각한다. 천황으로부터 내려온 명령이나 명령체계를 없애기 위해서였다.1945년 9월 2일 항복조인식이 이뤄지면서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용한다. 그리고 일본에 상륙한 연합군에 의해 맥아더를 주축으로 하는 극동군사재판이 벌어진다. 다른 말로는 동경재판이라고 하는 극동군사재판에서 가장 관심이 모였던 것은 바로 천황의 전범처리문제였다. 1차리스트에서는 히로히토천황도 전범리스트에 들어 포함되어져 있었다. 하지만 최종리스트에는 히로히토는 포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수뇌부의 끊임없는 로비와 조작때문이었다.먼저 천황의 ‘인간선언’이 이뤄진다. 천황이 신이 아니라 국민과 똑같은 인간임을 명시한 것이다. 천황이 인간선언을 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메이지이후의 정치체제는 천황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 체제였다. 때문에 천황이 여전히 신격으로 존립하면 그 명령체계가 존재하고 미국의 입장에서도 처벌의 대상으로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천황이 인간선언을 함으로서 권력이 없고 상징적 의미의 천황임을 명시해 인간으로서 정신적 지주의 천황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또 천황의 인간선언을 통해 천황제를 존립시키는 대신 천황의 힘을 없애 버린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일본에 상륙한 GHQ의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는 천황제의 존립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천황을 처벌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 맥아더는 결국 히로히토의 처벌을 유보하게 되고 이것을 일본 수뇌부에 알린다. 당시 히로히토의 존립을 어떻게든 하려고 하던 일본 수뇌부로서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동경재판이 시작되기전 모든 작업을 마쳐야만 했던 일본 수뇌부는 병석에 누워있던 천황의 음성을 녹취해서 책으로 발간한다. 그 주요 골자는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군부의 결정에 따라야만 했고 만일 자신이 불응했다면 군부의 반란이 있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천황을 전쟁의 피해자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이러한 조작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동경재판이 미국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GHQ가 동경재판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다른 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황은 결국 처벌대상에서 제외된다. 동경재판에서도 다른 나라의 반대를 무마시키기 위해 도조히데아키를 전면에 내세운다. 도조히데아키는 동경재판에서 천황은 아무것도 몰랐고 모든 지시는 자신을 통해 이뤄졌다고 증언한다. 결국 도조히데아키는 처형되지만 주범인 히로히토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또 하나는 동경재판이 서구열강을 주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 피해만 다뤄졌다는 점이다. 정작 일본에 의해 가장 심각한 피해를 받은 것은 동아시아 국가였다. 하지만 동아시아국가는 동경재판에 참가할 자격조차 없었다.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서구열강의 피해규모로 재판을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위안부문제나 731부대 문제, 대학살과 착취등 엄청난 피해는 가려진 채 전후처리를 했던 것은 지금 까지도 동경재판이 비판받고 있는 이유의 하나이다.3. 미국은 왜 면죄부를 주었는가,미국이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2가지 의미가 있다.맥아더는 일본에 상륙했을 당시 엄청난 양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 내용은 천황을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일본인들의 편지였다. 1946년에 이루어진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90% 이상이 히로히토를 좋아한다고 응답하였고 당시 등록된 89개 정당 가운데 4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를 지지하였다. 그의 생일날에는 38만명의 시민이 공개된 궁정의 일부를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당시 상황을 잘 파악하고 맥아더는 국체론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맥아더는 천황을 처벌하면 엄청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결국 맥아더는 미국으로 천황제를 존립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보낸다. 미국측의 반응은 당연히 존립시키자는 쪽으로 기울였다. 왜냐하면 2차대전에서 보여준 일본측의 행동들 때문이었다. 신민화로 무장한 일본군의 무서움과 神風특공대 처럼 목숨을 불사하는 의지, 한마디에 5백만에 이르는 일본군인들의 손에서 무기를 버리게 하는 그 힘의 원천이 바로 천황이었기 때문이다.맥아더가 미국으로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간에 모든 일본인이 이것(히로히토의 처벌)에 대해 저항할 것이다. 그들은 무장해제되었고 훈련받고 장비를 갖춘 군대에 특별한 위협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정부기관은 붕괴될 것이고 문명화된 관행이 중단될 것이다. 산악지대나 변방에서는 게릴라전에 상당하는 지하의 혼란과 무질서가 초래될 것이다. 근대적 민주적 방식을 도입하려는 모든 희망은 사라지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천황의 처벌로 인해 일어나는 반란의 규모는 어마할 것이며 그 여파는 일본을 통제불능의 상태로 만들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천황의 처벌로 인해 미군의 인명피해가 백만명이 나올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다. 때문에 맥아더는 천황에게 면죄부를 준다.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바로 민주주의의 정착이었다. 냉전이 심화되어가던 2차대전후, 미국은 일본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때문에 반란과 폭동은 민주주의정착의 걸림돌이 되고 오히려 미국에 대한 반발은 민주주의의 반발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 민주주의를 퍼트리기 위해 일본을 전초기지로 사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천황에게 면책을 주는 대신 자신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꼭두각시가 필요했다. 때문에 면죄부를 주는 대신 정권을 그대로 두어 친미주의적 성격을 갖도록 해버린 것이다. 즉 냉전시대의 또 다른 부산물이 천황의 면죄부라는 의미이다.4.히로히토의 죄상제국헌법은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천황의 실질적인 승인과 명령없이는 모든 정책이 불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집권의 국가가 통치자의 명령과 승인없이 모든 전쟁수행이 가능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명령체계가 통치자인 천황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2차대전당시의 일본은 천황이 아무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질적 근대적 군대를 창설한것도 히로히토였다. 히로히토는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그 실질적인 예로 먼저 만주파병과 진주만 공습을 예를 들겠다.먼저 중국을 침공하기 위해 천황은 본국 및 조선으로부터 3만5천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중국내 일본인 보호를 명목으로 4번의 파병을 승인한다. 그리고 남만주철도를 폭하고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조선군사령관과 관동군 사령관이 관할구역 밖으로 출동하여 명령을 어겼지만 사후승인을 통해 묵과 하고 오히려 勅語를 내린다. 이것은 장교들을 부추긴 꼴이 되어버려 모두들 점령지역을 넓히는데 혈안이 된다.또한 진주만 침공당시, 육군 참모 총장 스키야마 장군의 일기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공격일을 확인하고, 그날 하와이가 일요일이며 그곳에서는 휴일을 중요시 한다고 충고했고 승인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진주만 침공을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또한 히로히토는 도죠히데아키에게 진주만 공습에 대하여 상세한 질문과 함께 작전의 타당성여부등을 묻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미국과의 전면전을 계획한 어전회의를 주재한 것이 바로 히로히토였다.
손정의(孫正義,손마사요시)(1)서론"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꿈과, 그리고 아무 근거도 없는 자신감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 말은 소프트뱅크의 사장 손정의가 한 말이다. 자신의 꿈을 향한 도전정신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하겠다. 지금은 흔히들 정보화 시대라고 말해진다. 정보화시대, 즉, 정보가 상업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정보화시대의 가장 중요한 매체는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교환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터넷세상을 지배한 사람이 바로 손정의이다. 밴쳐기업인 소프트뱅크를 창업하고 인터넷 시장을 장악한 손정의에게는 분명히 보통사람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재일교포 사업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손정의란 인물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일본의 빌 게이츠」라고도 불리는 손정의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2)본론1, 미국으로 건너간 손정의손정의는 1957년 8월 11일, 사가 현 도스 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1차 대전 이전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치쿠호 탄전에서 광부로 일했다고 한다. 때문에 손정의는 제일교포 3세이다. 손정의의 아버지는 2차대전이후 어려웠던 시기에 맨손으로 사업을 일군 사람이라고 한다. 현대적인 경영과는 거리가 멀지만 독특한 사업 감각이나 추진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다고 하고 손정의 또한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손정의는 15세에 명문인 규슈의 구루메대학 부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해 여름에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6세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유학길에 오른다. 9월에 미국 현지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입한한지 2주만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통과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이 졸업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영어실력이 부족했던 손정의는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교과서가 일본어로 되어있다면 아는 내용인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교장실에 찾아가서 영어실력이 부족할 뿐이지 전부 아는 내용이라고 말하면 월반을 요구했고 이렇게 3학년 게임기를 설치하고 꽤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이 이익금으로 유니손 월드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이처럼 손정의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꽤 뛰어 났다. 냉철한 분석을 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3. 소프트 뱅크의 창립1980년 3월, 6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된다. 유니손 월드를 친구에게 양도 한 후에 말이다. 손정의는 유니손 월드에 대해서 그다지 애착을 갖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사업의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한다. 그래서 귀국후 1년 반정도를 자신이 어떤 사업에 뛰어들 것인가를 고민했다. 즉 1년 반동안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다. 손정의 자신에게는 고민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소위 말하는 백수였던 것이다. 이 당시 손정의는 단순히 놀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사업 아이ㄷ어를 조사하고 자료를 분석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40개의 사업아이디어에 대한 연구를 했다. 10년분의 손익계산서, 대차대조표, 자금운용표등을 만들고 시장조사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심어 나갔다고 한다.-나는 타성으로, 또는 우연히 내 인생을 결정하기는 싫었습니다. 내가 완벽하게 납득한 후에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싶었지요. 물론, 납득할 만한 사업 계획이 만들어지면 바로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손정의는 자신의 진로를 자신이 연구하고 계획한대로 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손정의는 결론을 내렸는데 컴퓨터용 소프트웨어 유통 비즈니스(유통도매업)이었다.손정의는 왜 컴퓨터였나? 라는 질문에 3대 트랜드를 완벽히 간파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1. 앞으로는 정보 산업이 가장 크게 발달할 것이다.2. 정보 산업중 퍼스널 컴퓨터의 비중이 가장 클 것이다.3. 퍼스널 컴퓨터중에서도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 할 것이다.이러한 3대 트랜드를 미리 예상하고 미래의 핵심사업에 뛰어들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드디어각했다. 그래서 이 제의를 일단은 보류하고 다시 한번 광고홍보부장을 찾아가 자신의 설명을 일단은 들어보고 제의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설득시킨다. 광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광고홍보부장은 운영진에게 이 제의를 설명하고 결국 제의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해서 유례없이 퍼스널 컴퓨터 잡지가 TV광고를 타게 된 것이다.이러한 손정의의 전략은 결국 성공을 이뤄낸다. 지면을 쇄신한 후 발행부수를 두부로 늘려 10만부를 찍었는데 사흘만에 매진이 되어 버렸다. 결국 출판 사업은 96년 2월 컴퓨터 관련 출판 회사로는 세계 최대인 미국의 지프 데이비스 출판사을 매수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되다. 출판 사업을 시작으로 사업확장을 시작, 여러 기업들과의 제휴와 M&A를 통해 소프트 뱅크는 거대 기업으로 발전해 간다.5. 투병생활손정의는 1982년에 회사의 건강 검진에서 중증의 B형 만성 감염 판정을 받는다. 당시 B형 감염은 특별한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간경화, 간암으로 진행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손정의 또한 이점을 알고 있었다. 막 창업한 소프트 뱅크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때문에 2년간이란 시간동안 손정의의 투병생활이 계속되었다.손정의는 반년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낙담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을 기회 삼아 책을 읽겠다라는 의지를 굳히고 2년동안 4천권의 책을 독파한다. 이 기간동안 손정의는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역사책부터 성공담, 만화책에 이르기 까지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당시 읽었던 책중에 손자병법과 란체스터의 법칙에 관한 책이 가장 인사에 남는 다고 한다. 둘다 전쟁에 관한 것이지만 기업경영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라는 말은 후에 손정의가 기업경영을 하는 데에 있어서 언제나 염두해 두고 있는 말이 된다. 손정의는 손자병법에 크게 감명받아서 자신의 손자병법을 만드는데 이른바 손X손자병법이다. 이 손X손자병법은 뒤에서 설입했다. 전년 대비 이익 증가분을 팀장 이상 간부들에게 자신소유의 소프트 뱅크 주식을 보상금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이 인센티브제나 스톡옵션제는 소프트 뱅크에서 팀장급이상만이 해당사항이 있다. 하지만 입사 5년차 정도면 팀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평사원들 또한 팀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네 번째, 1만개 노크제손정의는 모든 각도에서 자상의 경영 상태를 분석하여 균형잡힌 경영을 하기 위해 경영 분석 지표 1만개를 준비하고 이것을 [1만개 노크제]라고 하였다.총 매출액, 1인당 경상이익 등 경영 상태를 분석할 수 있는 지표인 셈이다. 소프트 뱅크는 이 1만개 노크를 한달에 다섯 번씩 작성한다. 경영진은 모두 1만개 노크를 이용하여 경영 전체의 균형, 개개의 경영 과제등을 정확하면서도 적시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다섯 번째, 퍼스널 컴퓨터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소프트 뱅크사는 퍼스널 컴퓨터 장비율이 100%인 기업이다. 일일 결산제와 1만개 노크제를 활용하기 위해선 퍼스널 컴퓨터가 아니고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사내 LAN으로 사장부터 평사원까지 연결되어 있어 모든 업무 보고와 결재는 컴퓨터 통신망으로 처리된다. 때문에 시간절약을 할 수 있다.8.왜 정보화 인프라 인가.손정의의 사업은 모든 방향이 정보화 시대를 겨냥한 정보화 인프라 구축이다. 왜 정보화 인프라구축에 이토록 열을 올리는 가.정보화 시대란 말은 정보가 가치를 갖는 것이다. 즉 정보가 상업화 되고 상품이 되는 것이다. 이 정보화 시대의 매개체는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그리고 인프라란 회로 기반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회로 기반을 말하는 것이 아닌 정보가 흐르는 공간을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손정의는 이야기 한다. 자신의 성공은 예정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고 다만 정보가 흐를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기 때문에 물품이 없더라고 사업이 가능하다라는 점이다. 때문에 손정의는 이점을 주목하고 모든 사업의 방향을 정보화 인프라 구축에 힘쓴다. 소프트 뱅크의 사업치는 꼴이 될까바 7할로 정했다고 한다. 또 3할의 리스크는 자신이 회복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7할로 정했다고 한다.풍림화산해(風林火山海)이란 말은 풍림화산이란 말에서 왔다. 풍림화산은 손자의 군쟁편에서 온 말로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인 다케다 신겐이 한 말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최전선에서의 싸움, 지휘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노도같은 싸움이 끝나도 그 싸움이 완결 된 것은 아니고 평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라는 것을 뜻한다. 손자병법에는 풍림화산뒤에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손정의는 평정이란 이미지에 바다를 떠 올렸다고 한다. 삼킬 때는 바다처럼 완벽하게 해야한다라고 말이다.이 다섯 가지 경영 마인드는 손정의가 소프트 뱅크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또 손정의가 M&A를 할 때도 자신의 경영 마인드를 잘 보여준다.싸움에서 어떻게 승리 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것일까? 그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것으로 그가 왜 M&A에 그토록 열을 올렸는가를 보여준다. 손정의는 M&A에도 자신만의 법칙을 만들어 냈다.-디지털 정보 분야에 집중하고 노하우와 기술 축적을 기도한다.-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확보할 자신이 없으면 신규 분야에 진출 하지 않는다.-돈을 버는 기업에만 투자한다.손정의의 경영 마인드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에만 손을 댄다는 점이다. 그러기 우해선 정보가 가장 중요하지만 말이다. M&A는 어떻게 보면 번개불에 콩 구워 먹는 다는 말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 졌다. 그것도 엄청난 금액을 사용해서 말이다. 이것은 손정의이 자신이 경영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손정의는 자신을 신용하는 사람일 것이다.(3)결론1. 손정의의 성공요인손정의가 성공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직감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날 문득 정보 인프라 사업을 해야겠다는 발상이 아니고 철저한 분석과 연이다.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2002년 4월부터 일본의 중학교에서 사용될 역사교과서가 한국사 및 중국사를 왜곡해서 큰 문제가 된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역사교과서를 왜곡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자세한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 교과서가 불러온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2005년은 4년에 한번 있는 역사교과서 채택이 있는 시기이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서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1. 일본의 우경화지금의 일본은 전보다 더욱 보수, 우익적 세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즉 우경화가 심화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메이지 유신이후 일본은 군국주의를 토대로 한 대외 팽창주의를 실현해 간다. 급기야 세계2차대전을 일으키고 만다. 이러한 사건을 일으킨 전범들이 바로 일본 우경화의 핵심이다. 일본의 지배세력은 패전이후 교체가 이뤄 지지 않는다. 왜냐 하면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철저한 반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친미 세력인 권력자들을 남겨놨기 때문이다. 그 권력자들이 만든 자민당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여전히 55년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 함께 보수세력의 군사대국화가 정당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문제는 이러한 보수세력이 사회 어느 곳이나 존재 하고 있다는 점이고 사학계와 교육계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우파세력이 암울한 일본의 역사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설립하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이들은 전후 역사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잊고 일본인의 자랑을 잃게 하게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비판했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통해 일본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 국민의 자부심을 위해 타국민의 문제점과 열등성을 강조하는 논리를 취하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왜곡하게 되통해 교과서 한권을 채택한 후 같은 교육구 안에서는 채택된 교과서 한권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일선 교사들 또한 이 교과서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채택율이 0.039%에 그치고 만 것이다. 문제는 이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보수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채택 방법을 폐지해 버린 것이다. 담당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한채 보수세력인 교육위원회의 일방적 채택이 2005년도에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교과서 문제는 또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3. 왜곡 내용과 우리나라의 수정의견주 제 명교과서내용(원문인용)수정 요구 의견일본의 검토 결과반박(1)임나일본부설○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出兵)…임나라는 곳에 거점을 둔 것○야마토 군세는 백제와 신라를 도와고구려와 …싸웠다○고구려는 …백제와 임나라를 지반(地盤)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으로인해○임나로부터 칠퇴하고,반도정책에실패한 야마토 조정○'임나일본부설'은 한국과 일본의 50여년간의연구결과,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설○명백한 오류-신라의 지원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왜군 격퇴(광개토왕비문)○상설적인 주둔을 전제로 한 내용으로 명백한 오류○점령국인 일본이 피점령지인 임나에서 철수한것을 전제로 기술-주둔,철퇴의 기록이 없으므로 오류이며 삭제 필요○일본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 존재를 지지하고 있지 않으나,가야에 대해 왜(倭)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폭넓게 인정하고 있음.○광개토왕비문에는 신라가 왜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기록돼있지 않고,역으로 신라가 고구려왕에 귀의한 것으로 명기돼 있음.이에 비춰,본 기술은 적절하지 않고,오류로 생각되며 정정할 필요 있음○‘지반으로 했다 ’는 기술이 ‘상설적인 주둔 ’을 의미하지는 않음.○‘임나로부터 철퇴하여 ’라고 표현한 것은 학설 상황에 비춰,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음.○한국학계에서는 가야에 대해 왜의 영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왜에 대해 가야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해석됨.○현재 광개토왕비문은 일본에 의해 수정된 것이 한국 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음.(2)4세기 후반삼국관계○고구본인'이라는 기존의 역사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왜구에 조선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여 기술○왜구의 발생원인에 대해 제도상 기술하도록 요구할 수 없음○일본학계에서는 전기 왜구에 조선인도 포함돼 있다는 점,후기 왜구가 중국인을 주체로한 것이라는 점을 폭 넓게 인정○ 왜구는 순수한 왜구를 뜻하는 것이지 중국인*조선인이 낀 것으로 볼 수 없음.(6)조선국호○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 조선을 건국○'조선'이라는 국호 대신 일제 강점기에 사용되었던 부적절한 용어인 '이씨조선'사용○일본학계에서는 이씨조선 등으로 부르기도 함○ 이씨조선은 한국에서는 욕(7)임진왜란○제목에 '조선 출병'○히데요시는 명을 정복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거대한 꿈에 빠져들어 대군을 조선에 보내었다○출병 결과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생활은 현저히 황폐해졌다○침략을 '출병'으로 기술하여 일방적 침략사실은폐○임진왜란의 원인을 명나라 정복,히데요시의개인적 망상만으로 기술○전쟁기간 중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인적 ·물적피해상 축소○일본학계에서는 ‘조선출병 ’‘조선침략 ’등의 호칭이 폭넓게 인정됨○일본학계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아시아를 정복하는 구상을 갖고 있었음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음○취급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지는 집필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음○ 통과○ 통과○ 수탈사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 함.(8)조선통신사○막부는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장군이 바뀔 때마다 사절이 에도를방문○부산에 '종씨의 왜관'이 설치되어○이에야스의 국교회복 노력에 대한 설명없이 사실만을 기술○통신사의 파견목적,초빙이유 등을 설명하지않고,일본장군 습직(襲職)사절단으로만 기술○조선에서 부산 왜관을 설치해 준 사실을 은폐하고,일본이 외국땅에 마련한 행정기관인 듯이 서술○이에야스의 국교회복 노력에 대해 제도상 기술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음○일본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장군이 바뀔 때마다,승계축하 사절단이 있음을 폭 넓게 인정하고 있음○일본학계에서는 왜관이 무역 등에 종사하고 있었던 점,왜관의 운영은 종씨(宗氏)에 의해 행해진 점을 폭넓게구한 것을 널리 인정하고 있음○결국은 임+진왜란을 인정하는 것임.(12)정한론○1873년,개국 권유를 거절한 조선의태도가 무례하다고 하여 …정한론이 터져나왔다○(사이고는)자신이 조선에 가서 살해당하면 그것을 명목으로 일본이 출병○조선의 조약체결 거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일본입장에서 편파적으로 기술-일본의 기존의 교린체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려 했기 때문임을 설명하지 않음○조선이 사이고를 살해할 가능성 있었던 것처럼 가정○이미 일본 군함이 시위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군대와 교전하였다고 기술돼 있음(13)강화도 사건○일본군함이 조선의 강화도에서 측량하는 등 시위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군대와 교전한 사건○조선의 발포를 유도한 계획적인 군사작전이었다는 사실 등 도발의 주체,목적,경위 은폐○일본학계에서는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 및 사상가들 사이에 구미 열강이 조선반도에 강력한 발판을 확립할 경우 일본은 독립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음을 널리 인정하고 있음(14)강화도 사건한반도 위협설○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한개의 팔뚝이 돌출○조선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국가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어○한반도 위협설을 강조하여 일본 방위 명목으로한국 침략 ·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청 ·일전쟁 및 러 ·일전쟁을 자위전쟁으로 합리화○일본학계에서는 조선 중립화안이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대조선정책 기조의 하나로 존재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음(15)일본정부의 조선중립화안○일본 정부 가운데는...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는 조약을 각국에 체결하도록하고,중립보장을 위해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일본 정부 일각에서 잠깐 거론되었던 것을 일본의 조선 강압정책을 희석하기 위한 의도로 기술○일본의 군비증강이 조선강점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음을 은폐하고,조선 중립을 위한 것으로 왜곡○일본학계에서는 당시 조선반도가 다른 세력하에 들어가는 것이 일본에 위협이 된다는인식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음(16)조선의 근대화와일본과의 관계○조선단순 대응조치인 것처럼 서술○동학농민운동은 농민운동,반란,반항,혁명적 폭동,민란 등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되고 있는 부분도 있음○농민군이 각지에서 정부군을 무찌르고 청일전쟁 개전 후에는 충청도 공주에서 정부군과 싸웠다는 상황을 근거로 하면,‘한성을 위협하는 기세를 보였다 ’는 표현은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음○일본학계에서는 일본군의 조선출병과 청군과의 개전에 대하여 계획적 파병이었다는설과 그렇지 않았다는 설이 있으므로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음(19)러일전쟁○러시아는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건설하였다○러시아의 …극동에 있어서의 군사력은 일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되는 것은 명확 …(일본)정부는 더 늦기전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굳혔다○일본은 한국(조선)의 지배권을 러시아에 인정받았고 …유색인종국 일본이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대국이었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은 세계속의 억압된 민족에게 독립의 한없는 희망을 주었다.○벌목장을 군사기지로 잘못 해석○일본의 먼저 시작한 전쟁을 러시아의 무력이한반도를 장악하여 일본의 안전이 위협 받음으로써 발발된 것으로 기술○만주와 한반도 지배권 확보라는 전쟁의 목적을은폐하고,'인종간의 전쟁'으로 미화○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면서 억압받는 민족에게는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는 식으로 모순되게 기술○일본학계에서는 러시아의 행동을 단순한 삼림벌채사업이 아닌 군사적 시설의 건설 또는그 준비로서 널리 인정하고 있음○일본학계에서는,러시아는 의화단사건 이후 만주를 지배하에 두고 다시 한반도에 대해 세력의 확대를 지향했으며 일본이 위협을 느껴 개전에 이르게 됐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있음○일본학계에서는 일본이 대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이 아시아 인민에게 희망을 준 면이 있다는 것과 이 전쟁결과가 구미에 큰 충격을 준 면이 있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음(20)한국강제병합○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이 일본의 안정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영국,미국,러시아 3국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강화
한류와 과거사문제를 통해 본 한일관계일본과 한국이란 두 나라는 상당히 복잡,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랜 역사동안 두 나라는 서로 공존하면서 현대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서로 얽히며 살아왔다. 현대의 이르러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친밀과 대립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바로 한류와 과거사 문제가 그것이다. 재작년부터 급부상한 ‘후유소나’붐으로부터 출발한 한류붐, 이와 반대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왜곡, 일본군위안부와 원폭피해자 보상 거부 등의 과거사 문제,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두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가깝고도 먼나라의 두 나라를 설명하는 키워드인 셈이다.작년 NHK를 통해 방영된 ‘겨울 연가’ 일명 '冬のソナタ'는 그야 말로 폭풍을 몰고 왔다. 하지만 그 파장은 실로 놀라웠다.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본의 3,40대의 주부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겨울 연가’ 이른바 ‘후유소나’의 주인공인 배용준은 일약 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한류붐은 시작됐다. 배용준은 ‘욘사마’란 이름과 함께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후유소나’가 엄청난 시청률과 함께 욘사마를 낳은 배경에는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일본인들을 설명할 때 本音와 建前로 설명된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고 사람들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것 또한 일본인의 문화적 특성이기 때문에 사랑의 대한 표현방식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당시 ‘후유소나’가 인기몰이를 한 것이 바로 이점이다. 풍부한 사랑에 대한 표현과 애틋한 사랑, 일본과는 전혀 다른 純愛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유소나’는 일본의 3,40대 주부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었다.이에 따른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한류에 열광하는 주 대상이 일본의 주부라는 점, 이것은 구매력을 갖춘 계층이기 때문에 욘사마에 따른 광고효과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실직적인 예로 욘사마가 광고로 이용된 카메라, 자동차, 음료등 욘사마가 광고한 제품은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70%에 달하는 매상고를 올렸다. 또 한 욘사마의 패션에 따른 악세사리와 욘사마가 새겨진 기획상품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겨울연가’의 히트에 이어 한국의 수많은 드라마들이 일본의 공중파 방송을 타기에 이르렀고 무수한 영화들이 개봉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방송도 연이은 뉴스보도와 한국어 강좌의 증설, 한류를 전문으로 소개하는 프로그램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배용준의 뒤를 이어 한국의 스타들의 인기몰이 또한 시작됐다. 이른바 4대천왕으로 불리는 ‘배용준, 이병헌, 장동건, 원빈’이 그들이다.또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한국의 음식 또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인촌이라 할 수 있는 新大久保에서는 한국음식점이 작년에만 약 40퍼센트 증가했고 전국적으로 상당한 숫자의 한국음식점이 생겨났고 한국을 찾는 방문자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JAL에 따르면, 2004년 5월 일본인의 한국로캐지 방문은 전년 같은 기간의 198%를 기록했다. 6월에는 267%, 7월에는 219%로 늘어났다. 한류붐은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높였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따뜻하고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나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한류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두나라의 친밀도를 극대화 시켰다면 정치적 측면, 외교적 측면에서 과거사 문제는 두나라의 대립을 극대화 했다.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롯, 교과서 왜곡문제, 일본군위안부와 원폭피해자 보상 거부 등의 과거사 문제는 한일간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한국과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문제는 상당한 여파를 미치고 있다. 전범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불러 일으키는데 일본의 총리가 참배를 한다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 북한의 입장으로 본다면 기가 찰 수 밖에 없는 것이다.교과서 왜곡문제 또한 더 강도 높은 왜곡으로 다시 붉어졌다. 4년전에 참패에 대한 요인인 채택방식을 바꿔 버리고 기필코 자신들의 극우성향이 가득 담긴 역사교과서를 통과시키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출판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일본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잘못된 역사, 왜곡된 역사를 가르친다면 그 파장은 실로 어마하다. 이 역사 왜곡 교과서의 큰 문제점은 일본의 위대함을 두각시키기 위해 역사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비하시키는데 있다.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해서 잘못된 시각을 갖게 할 우려가 있다.또 일본군위안부문제 또한 아직까지 인정되고 있지 않고 한 술 더 떠 오히려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판이다. 위안부들의 동의하에 군대를 따라다니던 창부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모독이다. 또 교과서에선 기술자체를 삭제해 버렸다. 얼마전 붉어진 창씨개명 문제 또한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강제성보다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성을 바꿨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망언이 터져 나오고 있다.얼마전 터진 다케시마의 날 제정으로 인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고 대일 독트린 마저 발표되었다. 독도 문제의 심각성은 국내 사정을 봐도 심각하다. 연일 이어지는 시위와 분신자살을 하는 이 마저 있다. 영토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대한 사항이고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들끓고 있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나 독도문제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고 한국과 중국, 북한은 이러한 일본의 태도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인해 일본인들이 숨어다녀 할 지경이고 한국 또한 상점가에 일본인 출입금지라는 현수막을 걸고 영업을 하고 있다. 일본과 주변국들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는 것이다.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의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주고 받기 식의 소모전이 되어 있다. 어느 한쪽이 지칠 때 까지 계속되는 지루한 싸움처럼 일본측의 ‘망언’과 한국측의 규탄, 일본측의 ‘발뺌’과 한국측의 ‘탄식’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일본의 정치권은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고 우경화를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펼치고 있었다. 일본의 지도층 전쟁 책임이나 전후 처리 등 역사를 직시하는 정신구조가 결여 되어 있다. 그들이 청산되지 않은 전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해 ‘한’이 얽혀있다. 영토를 유린당하고 수많은 수탈과 학살을 당한 일본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사과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덮어두려는 일본에 대해 한이 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한류붐이 개선시켜줄 것이고 기대 되었지만 과거사 문제가 저해요인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한류로 인해 한국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 일본과는 반대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본의 공동리서치 조사결과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인이 63%, 한국을 싫어하는 일본인이 22%를 나타냈고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일본인을 싫어하는 이유중 97%가 과거사문제를 들고 있다. 이렇듯 과거사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가로막는 저해요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