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한국의 경제위기』▣서론최근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며 세계적 금융위기가 최대 이슈로 떠올랐고, 각국의 정상들은 서로 연계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 역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과 근접한 일본과 중국은 금융위기로 인한 여파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비해 심각하다고는 볼 수 없다. 일본은 계속 경제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전년도에 비할 수는 없지만 꾸준한 경제성장율을 나타내고 있다. 근접해 있으면서도 왜 한국은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에 심각한 수준의 타격을 받을까?한국의 산업화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으나, 이 성장과정에 있어서 야기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또한 국가주도의 경제성장과 재벌위주의 성장 등의 구조적 문제가 현 금융위기의 더 심각하게 한 원인이라고 본다.여기에서는 광복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었고, 지금 떠안고 있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본론한국의 경제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세 가지 시기를 들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도입기, 산업화, IMF사태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시기에서 어떤 경제정책이 펼쳐졌으며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한국경제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으며, 대처방안 또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1.한국 경제의 전환점(1)자본주의 경제의 도입기1945년 일제식민지 하에서 벗어나 조국 광복을 찾기는 하였으나, 식민지 하 통제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은 스스로의 국가경영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상적 대립으로 분단을 겪어야 했고, 남한에서는 미국, 북한에서는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런 결과는 당시 냉전이라는 국제정세도 작용하였다. 이로서 남한은 당연히 미국의 체제를 따라갔고, 자본주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국가를 경영하기에 미흡했던 한국은 미국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전국이 폐허가 된 한국은 미국의 원조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2)한국의 산업화한국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한국은 어떻게든 경제성장을 이루어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고, 이 시기에 박정희가 나타난다.박정희는 쿠데타로서 정권을 무너뜨리고, 박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성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가 내건 경제성장의 길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내 한국의 산업화를 일구어 냈다. 한국의 산업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첫째,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이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자본의 부족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일협정을 체결과 베트남 전쟁 참가를 통해 자본을 확보하고, 부족한 자본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은행을 국유화하여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에만 국가가 주도하여 지원하였다. 그러나 자본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한일협정과 베트남 전쟁은 국민들의 반발을 야기하게 된다. 한일협정은 국민들의 권리를 국가가 뺏어간 것이며, 베트남 전쟁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겪은 후 10여 년이 지나 또다시 전쟁이라는 위험 속에 국민들을 빠뜨리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을 박정희는 무력을 이용 강제적으로 제압함으로서 국민들의 불만을 완화시키지 못하였다.둘째, 저임금과 풍부한 노동력이다. 한국은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기술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노동력 밖에 없었다. 이러한 노동력을 국가는 이용하였고, 한국사람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장시간 노동이 가능했다. 이것은 바로 ‘한강의 기적’의 근간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노동자들은 노동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이 받아야 할 보상은 다시 재투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저임금과 더불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건강조차 돌보지 못하고 병들어 갔고, 이러한 노동자의 희생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 재투자로 이어졌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의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이다.셋째, 수출주도형 산업이다. 산업화를 더 진행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확보가 계속적으로 필요했고, 자본의 확보는 수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수출을 함에 있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상품의 질이 우수하거나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은 기술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출전력은 성공적이었고,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저임금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출로 인한 이윤은 노동자들에게로 환원되지 않고, 자본가에게만 그 이윤이 돌아갔다.넷째, 재벌위주의 경제성장이다. 자본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가는 몇몇 기업에게만 자본을 지원해주어 산업을 주도하였고, 이 과정에서의 몇몇 기업들은 대기업으로 성장하였고, 오늘날의 대기업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기업의 이윤은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갔고, 그들은 재벌로서 성장하게 된다. 노동력 착취로 인하여 재벌들은 더욱 자신들의 살을 찌웠고, 재벌에게로 돌아가는 이윤을 사회로 환원하기에는 재벌들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리게 되어 대기업의 횡포는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3)IMF1987년 한국정권이 독재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이양되고,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유주의 시장경제로서 한국 경제는 변화된다. 이 시기에 무수한 기업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기업의 생성과 운영은 자기 자본이 아닌 외국자본을 빌려 쓴 것이다. 결국 한국의 기업은 외국에게 채무가 있게 되는 것인데, 1997년에 이 채무를 갚지 못하여 한국 기업은 줄줄이 도산하게 되어 국민경제에 큰 위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한국은 IMF에 구제를 요청하게 되고 IMF는 구제금융을 해주면서 한국 기업에게 조건을 제시하게 되는데, 제시사항 중 하나가 바로 ‘고용의 유연화’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행하는 것이며 이는 비정규직의 등장을 야기하였다.2.대처방안 - 내수경제의 성장 -이상으로 한국 경제의 중요 전환점과 그 전환점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한국 경제 성장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배제, 지나친 수출의존도, 재벌 중심의 성장, 몸집 불리기 기업의 거품경제 등 이러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결국 현 금융위기의 여파를 더 심하게 받는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각국의 정상들과 경제전문가들이 여러모로 노력해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는 듯 하다. 그들의 말 중 가장 신뢰가 가는 말이 있다면 바로 장기적으로 극복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현 시점에서 한국이 모색해야 할 것은 바로 내수경제 성장에 힘쓰는 것이라 생각된다. 경제성장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창출되는 이윤을 노동자를 배제하고 자본가들이 독식하였기에 임금이 부족한 노동자들은 국내소비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수출중심으로 성장하던 한국은 현재 몇몇 IT산업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가격경쟁력에 밀려 과거처럼 수출로서 큰 흑자를 보기 힘들다. 재벌 중심의 성장으로 IMF 이후 중소기업들이 도산하여 중산층이 사라져 부자와 가난한 자만 남는 사회양극화 현상이 야기되었다. 내수경제를 등한시 한 결과로 현 세계적 금융위기가 큰 위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 GM 대우 비정규직 투쟁 사례를 통한 인간, 노동, 사회정의에 대한 고찰 --목차-Ⅰ.서론Ⅱ.본론1.GM 대우 비정규직 투쟁 사례2.비정규직 투쟁을 통한 인간에 대한 고찰3.비정규직 투쟁을 통한 노동에 대한 고찰4.비정규직 투쟁을 통한 사회정의에 대한 고찰Ⅲ.결론Ⅰ.서론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인간이 제일 먼저 행해야 할 것은 주어진 환경에 대하여 살아남는 것이었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고 또한 환경을 개척하였으며 이러한 행위는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원시시대의 인간들은 의?식?주의 해결, 즉 아주 생존의 기본이 되는 노동만을 행하였으나 호모사피엔스로 변화하면서 인간은 의?식?주만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을 행하였다. 생존을 위한 단순 노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의 내면을 노동을 통해 표출하였고, 이러한 행위가 지금의 현대사회를 만들어 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원시시대, 중세, 근대, 현대 사회 모두 노동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시대별 노동의 의미는 같지 않고 변화되어 왔다. 특히 산업화 이후 인간의 노동에 대한 사회학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산업화의 이념체제인 자본주의가 노동의 본래적 의미를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노동이 더 이상 인간의 내면화를 실체화 시키는 과정이 아닌 단순히 재화를 축적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한다.우리나라 역시 자본주의 체제 아래 1998년 IMF사태를 겪으면서 금융위기를 맞았고, IMF에서 제시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받아들이며 대규모 정리해고가 이루어졌으며 비정규직이라는 계층을 만들어 냈다. 현재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에 속한 사람들은 자본가의 이익창출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인식하고 비정규직 제도에 대해 투쟁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GM 대우 비정규직 투쟁’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GM 대우 비정규직 투쟁은 그들만의 투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앞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역시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Ⅱ.본론1.GM 대우 비정규직 투쟁 사례)한겨울 찬바람에 대비해 가지고 올라간 두터운 점퍼와 담요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됐다. 공장 담벼락 옆 폐쇄회로(CC)TV 철탑에서 내려다 본 GM대우 부평공장에도 조금씩 봄기운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27일 시작한 GM대우 부평공장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공 농성이 4일로 100일이 됐다.12월 27일 처음 20m 상공으로 올라갔던 박현상 GM대우비정규직지회 조직부장이 지난 29일 건강 문제로 내려온 뒤 이대우 GM대우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이 이날로 35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저 위가 어떤 공간인지 너무 잘 알아서, 시간이 지나면서 느낄 수밖에 없는 고립감도 너무 잘 알아서 가슴이 참 아픕니다."4일 과의 전화통에서 박현상 조직부장은 '100일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두 달 하고도 꼬박 보름을 있고도 아무 성과도 쥐지 못한 채 한 '동지'가 내려오고, 바로 연달아 다른 '동지'를 올려 보낼 수밖에 없어서 마음이 "답답하다"고 했다.두 사람이 이어 온 100일의 농성, 노동자의 요구는 거창하지 않았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 설립'을 하려다 줄줄이 해고된 35명 조합원의 원직복직과 노동조합 인정 요구가 전부였다.그 요구를 위해 노조는 원청인 GM대우와 하청업체들을 상대로 18차례나 교섭을 요청했지만 원청과 하청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원청인 GM대우는 "법적으로 우리는 사용자가 아니다"라며, 하청업체들은 "우리 회사엔 조합원이 1명 뿐이다", "우리는 아예 폐업을 했으니 모르는 일"이라는 등의 다양한 핑계를 대며 '모르쇠'로 일관했다.방관은 노동부도 마찬가지였다. 박현상 부장은 "처음 해고가 시작될 때부터 지속적으로 경인노동청 북부지청을 상대로 특별근로감독도 요청하고 근로감독관과 동행 조사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며 "노동부 주선으로 하청업체들과 면담 자리를 한 번 갖긴 했지만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만든 자리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설명했다.2.비정규직 투쟁을 통한 인간에 대한 고찰GM 대우 고공 농성 투쟁을 인간으로서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 개념이어서 구체적으로 답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각각의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삶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 또한 노력한다.박현상 씨는 지금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GM 대우 측에 자신의 요구를 표명하였으나, GM 대우는 해고로서 대응하였다. 이는 단순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의미보다 앞으로의 한 인간으로서의 생존, 즉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마저 위협받는 것이다. 박현상 씨와 비정규직 조직지회 사람들은 부당하게 생존권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지는 사회성 - 일터에서의 동료가 될 수 있고, 가족이 될 수 있다. - 또한 단절 시켰다. 과거 봉건시대 때부터 인간으로서 불평등한 사회제도 아래서 하위계층 사람들은 상위계층 사람들의 노예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투쟁해왔고, 그 투쟁들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였으며, 그 투쟁의 연속선상에 지금의 시대가 있다. GM 대우 투쟁은 그들이 타인에 의해 잃어버린 생존권, 사회성을 다시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다.3.비정규직 투쟁을 통한 노동에 대한 고찰칼 맑스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은 인간과 물질자연 사이의 소통을 실현하는 수단 방법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내면을 표출시켰다.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그러한 노동의 결과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노동의 본질적인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하나 노동을 통해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으며, 의식적인 목적활동인 노동이야 말로 동물과의 차이이다.자기의 성찰과 자아의 실현뿐만 아니라 노동은 또한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분업과 협업을 통해 인간은 다른 이들과 소통하여 그들의 노동의 결과를 생성해낸다.현대사회에서 문제시 되는 것이 ‘과연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이다. 자기성찰과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노동에 대한 보상이 높은 일만을 찾는다는 것이다. 모두 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사회구조적 문제로 봐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개인이 하고 싶지만 사회의 제도 앞에서 그 이상이 차단당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원하든 일이든 원하지 않는 일이든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생존을 하고 그들이 맺은 사회관계를 이어간다. 자급자족 시대에서의 노동이 아닌 다른 사회구성원과 분업과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족 속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의미 역시 다양하게 해석 되어야 하며 단순히 자아성찰과 자아실현의 의미만을 부여할 수는 없다.GM 대우 비정규직 투쟁은 투쟁하는 이들이 GM 대우에서 일을 하는 것이 원하는 일이든 원하지 않던 일이든 그들에게는 노동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가 자아실현이 되었든 생존수단이든 구성원과의 관계 형성이든 그들은 노동을 통해 그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투쟁은 자본가에 의해 부당하게 박탈당한 그들의 노동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행위이다.4.비정규직 투쟁을 통한 사회정의에 대한 고찰사회정의는 그 사회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수용하는 추상적인 것이며 구체적으로 법제화 하고 있다. 그것은 각 사회마다 차이를 나타내기에 한 사회집단의 정의가 다른 사회집단의 정의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노동 역시 현대사회로 발전해 오면서 많은 부분이 만들어지고 개정되어졌으며 이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목차?온실효과?지구 온난화?기후 변화의 요인1. 자연적 변동요인2. 인위적 변동요인?지구 온난화의 영향1. 생태계의 혼란2. 농작물 수확에의 영향3. 인간 질병에의 영향4. 산업에의 영향5. 해수위의 상승?지구 온난화의 대책과 전망--------------------------------------------------------? 온실효과- 지구 전체의 평균 기온은 약 15˚C로 인간이나 생물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이 기온은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받고 있는 일사에너지와 지구가 적외선으로 방출하고 있는 에너지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이 균형에는 대기 중의 CO₂, 수증기 등의 적외선을 흡수하는 기체, 즉 온실효과 기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온실효과가 전혀 없다면 지구는 지금보다 30˚C 이상 저온의 세계가 된다. 반대로 온실효과 기체가 증가하면 대류권의 기온은 상승한다.? 지구 온난화- 화석연료 자원의 대부분은 연료로 사용되어 탄소의 대부분이 CO₂로 대기 중에 배출된다. CO₂는 적외선부의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물질로 지표면에서 복사되는 에너지(적외선)을 흡수하고 일부는 다시 지표면으로 방출된다. 이것은 온실효과로 CO₂농도의 증가는 온실효과를 높여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게 된다.- 대기 중의 CO₂농도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280ppm 정도였으나 그 후 상승하여 현재의 농도는 약 350ppm으로 과거 100년간 약 20% 정도 증가하였다. CO₂농도의 변화는 화석연료 소비량의 변화와 거의 일치한다.? 기후 변화의 원인(1)자연적 변동 요인- 판구조론 : 지구 표면은 과거 지질학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지구의 지각은 마치 조각그림 맞추기처럼 몇 개의 거대한 판(plates)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판들은 일 년에 수cm 정도의 대단히 느린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 이 판들은 대륙과 대양의 일부를 포함할 정도로 대단히 크다. 이 판들의 이동이 수 억 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어 육지와 해양의 분포를 바꾸어 놓았고 또 기후를 바 폭이 수세기에 걸쳐서 1%의 몇 분의 1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근 기상위성에 적재된 정교한 복사계의 측정에 의하면 복사량이 생각보다 크게 변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복사량세기는 태양흑점의 변화에 따라 약간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양흑점(sunspots)이란 태양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자기 폭풍으로 인해 태양표면에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영역(어두운 부분)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흑점의 수와 크기가 주기적으로 매 11년마다 최고에 달하며 변하기 때문에 흑점의 주기는 11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흑점이 갖고 있는 자장이 11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자장을 기준으로 한다면 태양흑점의 주기는 22년이 된다. 흑점 최대기의 일사량은 최소기에 비해 약 0.1% 많다.유럽과 북미의 특정 지역에서의 기온변화에 관한 연구 자료에 의하면 흑점이 적게 나타난 기간은 온도가 높았고 흑점이 많이 나타난 기간에는 온도가 낮았다. 최근에는 북반구의 일기패턴과 흑점의 11년 주기 기간에는 높은 상관성이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또 북미의 나무 나이테를 통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미국대평원의 22년 가뭄주기가 태양의 자기활동주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사량의 작은 변화가 기후에 얼마만한 변화를 초래할 것인지 입증된 이론은 아직 하나도 없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다.-화산폭발 : 화산폭발의 규모가 충분히 클 경우에는 대기의 성층권까지 엄청난 양의 가스와 먼지와 화산재가 분출된다. 화산분출가스의 성분은 대략 1%의 질소, 80%의 수증기, 12%의 이산화탄소, 7%의 아황산가스와 기타 기체로 되어 있다.화산폭발시의 분출물 중에서 기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황산가스라는 것이 최근 밝혀지고 있다. 20세기에 발생한 화산폭발 중 황 분출량을 기준으로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1982년 4월에 폭발한 멕시코의 엘치촌 화산과 1991년 6월에 폭발한 필리핀의 피나투보 화산이다.피나투보 화산은 성층권에 2천만 톤의 아황산가스(엘치촌의 2배 이상, 1980년의 St. 활동들에 의해서 온실기체들과 에어로졸이 발생되었고, 이들은 대기 구성성분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복사강제력을 변화시킨다. 또 염화불화탄소 CFCS와 기타 염소와 브롬화합물의 방출은 복사강제력에 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층권 오존층 파괴로도 이어졌다.- 도시화 및 임업과 농업 용도에 기인한 토지이용 변화에 의해서는 지표의 물리적(지면 반사율의 변경)이고 생물적(식생의 변화)인 특성 변화를 초래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인위적 요인들에 의한 영향은 복사강제력 또는 기후강제력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지역적 및 지구 규모의 기후에도 잠재적인 충격을 줄 것이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1. 생태계의 혼란(난대성 식물 증가, 온대성 식물 감소)- 생물종의 멸종 : 생물종은 여러 가지 환경요인에 대해서 각기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 따라서 어떤 지역에서는 기후 온난화가 어떤 특정 종에 대해서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종은 종래 그 지역에 있었던 우세종을 대신하여 생태계 구조 자체를 바꾸어 버린다. 그때까지 여기에 있던 종들은 온난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온도가 낮은 고위도나 표고가 높은 고지대로 이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육할 수 있는 마땅한 서식장소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종은 멸종하게 될 것이다.※한겨울, 때 아닌 ‘모기 소탕작전’ [문화일보 ? 2006-11-29 15:07:29]?(::서초구, 따뜻한 아파트 탓 ‘기승’에 소독 나서::)영하로 내려간 날씨에도 극성을 떠는 모기 때문에 서울 서초구가 때아닌 ‘모기 소탕작전’에 나섰다.서초구(구청장 박성중) 보건소는 29일부터 내년 1월17일까지 약2개월 동안 매주 수요일을 ‘동절기 모기 특별방역의 날’로 정했다. 이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온 상승과 주거환경 고급화로 인해 철모르는 모기들이 극성을 떠는 바람에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칠수 서초구 보건행정과장은 “겨울에도 따뜻한 아파트 보일러실 등이 모기들의 집단 서식처”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 아파트까지 올라간 모기가 구제 소독을 실시할 방침이다.2. 농작물 수확에의 영향- 토지의 생산력 저하 : 지구 온난화가 계속되어 전반적으로 온도가 올라간다면, 토양 내의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이는 곧 토양내의 유기물의 분해를 초래하며, 유기물이 분해된 토양에서는 생산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강우량의 변화 : 농업에 있어서 기후변화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바로 강우량의 변화이다. 기온의 상승은 강우량의 증가를 가져오기도 하나, 이와는 반대로 수분의 증발도 그만큼 빨리 이루어진다. 수분의 증발이 가속화됨에 따라 비는 집중호우의 성격을 띠게 되며 이는 농작물의 침수, 또는 가뭄의 결과를 초래한다.- 경작지의 침수 : 세계적으로 농업지대는 큰 하천의 충적지나 삼각주 근처에 위치한다. 이러한 지역은 생산력이 높으므로 사람들은 주로 이 지대에서 경작을 시작해왔다. 지구의 온난화는 해면수위를 상승시키고 이 지대의 경작지는 물론 삶의 터전으로 하고 있는 토지까지 침수될 위기에 처해있다.3. 인간의 질병에의 영향- 열사병 : 사람 체온은 36.5˚C로 유지되고 있지만, 체표면 온도는 주변 기상조건이나 의복의 유무에 따라 예민하게 변한다. 체표면 온도가 29˚C 이하로 되면 으스스 춥고, 34˚C ~ 36˚C로 되면 상당히 덥게 느껴진다고 한다.주변 기온이 33˚C 이상으로 되면 체온 조절작용의 기능이 원활하지 않기 시작해 고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나 체온 조절작용이 약한 환자, 고령자, 유아들은 몸의 부조를 초래해 발병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수일간 고온조건에 내버려두면 죽음에 이르는 수도 있다. 높은 기온에 의해 생기는 이와 같은 병세는 열사병/일사병 이라 불리며 기상병 중의 하나이다.- 열파 : 미국 연구 자료에 의하면 일 최고기온 35˚C 이상의 날이 연속 5일 이상 계속되는 기간을 ‘열파’라고 불린다. 이러한 열파가 작물의 이삭이 피는 개화기에 발생하면 곡물 수확량의 감수로 이어지고 또 가축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보건 위생만이 아니라 농업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우리나라에서 나난화에 의한 열파 발생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감염저항성도 저하되고 열대성 전염병의 확산과 함께 전염병이 많이 초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4. 산업에의 영향- 기후에 영향을 받기 쉬운 자원에 의존하는 산업에 있어서 장기적인 투자경우에 기후변화의 요소를 충분히 고려해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에서의 추산에 의하면 산업수익 중에 매넌 기후조건에 영향을 받는 비율은 농업 30%, 교통ㆍ통신 20%, 건설업 15%, 에너지산업 10%, 최종제품 7%, 소매업 5 ~ 9% 정도로 나타내고 있다.- 기후의존형 산업으로서는 전력소비, 에어컨 등의 전기제품, 음료, 의류, 의약품 등을 들 수 있다. 산업에 미치는 기후영향의 한 예로서 캐나다 북빙양의 근해석유가스전의 개발에서 추운기후기간 1984 ~ 1985년에는 굴삭시간이 9000시간이나 줄어 4천만$의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지역의 특정자원에 의존하는 산업은 기후변동에 의해 옮길 필요성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종이 등의 임산품, 포도주 등의 농산품, 값싼 수력에 의존하는 알루미늄 등이 있다. 미국 5대호 지방에서는 내수면어업이 활발하게 보이는 한편으로는 해류변화에 의한 어업자원분포의 변화(예컨대, 우리나라의 동해안)도 예상되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어느 지역에서는 온난화에 의해 스키장의 이용객이 줄어 연간 3700만$의 수입 감소가 예상되고 있다.5. 해수위의 상승- 약 12 ~ 3만 년 전의 최종 간빙기에는 해수위가 지금보다 5 ~ 6m 높았고 비슷하게 약 6천 년 전의 기후 최적기에는 지금보다 3m 정도 높았다고 한다. 또 약 2만 년 전의 최종 빙기의 전성기에는 해수위가 지금보다 약 100m나 낮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해수위가 상승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해수위의 큰 폭의 상하운동은 주로 북반구 고위도 대륙상에 거대한 빙하가 발달하여 막대한 물이 바다로부터 육상으로 이동한 것, 또는 빙하가 녹아 다량의 물이 바다로 유입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얼음과 눈이 모두 녹는다면?달했다.
『핵 폐기장 뒤집어보기』◎들어가면서핵에너지는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앞으로 대체자원으로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핵에너지를 이용함에 있어서 그에 따르는 핵폐기물 처리 시설이 부족하고 설립하기에도 많은 지역 공동체의 반발에 부딪치기 일쑤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꼭 핵에너지의 활용은 필요하다. “핵 폐기장 뒤집어보기”에서는 우리나라 핵 폐기장 건설의 부진이 왜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나침반 역할을 해주고 있다.◎핵 폐기장 뒤집어보기1.실태우리는 20여 년 동안 핵 폐기장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해왔다. 그러나 수많은 출혈과 분열을 감수하면서 쏟아 부었던 이 에너지는 낭비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핵 폐기장의 논의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에만 두었지 장작 중요한 어떻게 하면 핵 폐기장을 ‘덜 위험하게’, ‘보다 안전하게’ 만들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까운 돈과 시간을 핵 폐기장을 대상으로 한 엉뚱한 흥정에 허비하고 만 것이다.핵 폐기장 정책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 핵 폐기장이 부지될 지역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핵 폐기장의 설립목적과 필요성에 대해 이해를 시키고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를 설정하고 지역주민에게 통보를 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 했으니, 지역단체의 반발에 부딪히지 않을 리 만무하다. 결국 반발에 부딪혀 정부는 계획을 철회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핵 폐기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논의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논의의 틀을 다시 세워야 한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기반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또한 반드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핵 폐기장 문제는 가끔 시간 날 때 뒷짐 지고 구경해도 되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2.핵 폐기장 건설 - 우리의 일이다.1) 핵폐기물의 개념- ‘핵폐기물’이란 용어 더 부정적 이미지로 다가갔다고 산업자원부에서 진단.- ‘원전수거물’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으나, 반핵단체의 ‘얕은 꾀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란 이의 제기.? ‘핵폐기물’이란 용어를 선택한 이유는 다른 용어들에 비해 일반인이 더 낯설게 느낀다. 중요한 것은 바뀌지 않는 본질을 확실히 이해해야만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틀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이다.2)핵폐기물의 이해핵폐기물은 방사능을 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방사능은 우리가 매일 밟고 사는 땅이나 호흡하는 공기에서도 나온다. 핵폐기물은 핵사용 후 연료로서 이것의 처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밀폐하여 드럼통에 넣고 땅이나 동굴에 묻는다 해도 방사능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사람들이 생각하는 핵 폐기장에 대한 첫 번째로 손꼽히는 이미지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또 죽음, 질병의 이미지와 나쁘다, 두렵다, 흉하다, 싫다 등의 부정적 이미지, 공해, 전쟁 방사선, 무시무시함, 가능하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시설 등의 이미지가 각각 그 다음 순위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핵 폐기장 위험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기술공학적인 측면에서만 접근되어 ‘안전하다’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가치체계를 포함한 사회문화적 요인을 감안하여 이루어져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3.핵 폐기장 정책 되돌아보기1) 핵 폐기장을 향한 걸음마(1986~1989년)- 비공개로 핵폐기물 처리 시설에 착수 했으나, 지역주민의 반발로 중단.- 핵 폐기장의 부정적 이미지 부각2) 원자력 제2연구소 부지 개념으로 등장한 안면도(1990~1991년)- 충청남도와 협의하여 안면도에 서해과학 연구 단지를 건설하기로 하였으나 구체적인 공표직전 언론의 보도로 지역주민 반발에 부딪힘.- 안면도 지역주민은 생존권을 위한 몸부림으로 정부 정책 철회시킴.3) 후보 지역 선정 관련 용역 시행과 첫 부지 공모(1991~1992년)- 핵 폐기장 건설을 위해 지역주민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느낀 정부는 핵 폐기장 후보 지역 선정을 위한 용역 반발에 중단.4) 새로운 지원 계획과 자율적 유치 활동(1993~1994년)- 몇몇의 지역에서 유치 신청이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지역 주민 찬반 충돌로 흐지부지됨.- 핵 폐기장 우선 홍보의 중요성을 정부가 인식하게 됨.5) 굴업도의 진보와 후퇴(1994~1995년)- 반핵단체와의 토론회, 공청회, 설명회, 협조 당부 등 이전과는 다소 구별되는 지역주민 신뢰 얻기 방법으로 굴업도를 핵 폐기장 부지로 선정 착수.- 굴업도 인근 해저에서 활성단층 징후가 발견되어 설립 타당성을 얻지 못해 중단.6) 정책 추진을 둘러싼 변화들(1996~1998년)- 굴업도의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기술공학적 안전성, 전문성, 신뢰, 참여 등에 강조점을 두게 된 정부는 1996년 6월에 핵폐기물 정책 추진 체계를 다시 세움.- 정책 추진 주체만 바뀌고 과거 정책 실패에 대한 분석과 복기를 통해 대응책을 마련한 듯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지도 않음. 과거의 문제와 똑같은 전철을 밟음.7) 또 한 번의 유치공모(2000~2001년)- 지역 발전에 대한 희망과 맞닿으면서 몇 개 지역 유치 신청.- 돈다발을 흔들며 지역주민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식의 정책으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않음.8)사업자 주도 방식으로의 전환(2001~2003년)- 핵 폐기장 건설 사업의 시급성을 내세워 사업자 주도 방식으로의 전환 요청하고 승인 얻음.- 지역 주민과 연계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반핵 단체의 시위 속에 진전하지 못함.9)첨단기술 개발 사업과의 연계 그리고 위도(2003~2004년)- 정부는 핵 폐기장 및 양성자기반공학 기술개발사업 부지 유치 공모를 시작.- 반핵 단체와 정부의 낙관주의적 대응으로 인해 중단.10)핵 폐기장 부지 확보를 위한 또 다른 시도(2004~2005년 2월)- 바뀌지 않는 핵 폐기장 정책 계획으로 다시 유치 시도.- 핵폐기물에 관한 관리ㆍ감독 주체, 관련 법규, 재원ㆍ연구기술이 미비한 상황에서 정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핵 단체에 비난받음.4.핵 폐기한 차이가 있다. 집행주체는 핵 폐기장 건설에 대해 찬성이 대부분인 반면, 수용주체는 핵 폐기장 건설 반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수용주체인 지역주민들은 무조건 적인 반대가 아니라 조건부 수용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역주민이 내세운 ‘조건’은 1순위가 ‘시설의 안전보장’, 2순위는 ‘지역주민의 우선고용’이다. 핵 폐기장 정책의 핵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짐작케 해준다.그렇다면 지역주민이 핵 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원자력에 대한 이해 부족’을 꼽는다. 두 번째는 ‘위험에 대한 불안’이다. 그 다음으로 ‘건강에 대한 피해’와 ‘비밀스런 정책 추진’을 반대 이유로 꼽고 있다. 정부의 정책 추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확인 할 수 있다.정부 역시 지역 주민의 반대가 원자력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생각을 같이한다. 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지역 주민은 정부가 정보 공개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고, 정부는 지역 주민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게 문제라며 볼멘소리다. 정부는 또 지역 주민이 위험에 대한 불안이나 비밀스러운 정책 추진 때문에 반대한다기보다는 ‘보상에 대한 욕구’와 ‘반핵단체의 영향’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지역 주민은 정부의 탓으로, 정부는 지역 주민과 반핵단체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5.스티그마와 도마가 또 위험을 만들다.핵 폐기장 논의의 중심에는 ‘수용성’이 있다. 모든 국가의 정책에서 수용성은 그 성공적 추진을 위해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핵 폐기장이 지난 20년간 그 자리에 갇혀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수용성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의 핵 폐기장에 대한 위험성의 생각이 수용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다마시오(Damasio)에 따르면, 일반시민의 위험인식은 그 원인보다는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듯 주관적이고 가치판단적인 위험에 대해, 기술공학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와 그렇지 않은 일반시민 간대로만 가늠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위험은 과학 기술의 울타리를 넘어 이를 둘러싼 사회, 정치, 문화적 배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다. 여기에 바로 스티그마 효과가 포함되어 있다. 스티그마란 사람, 장소, 기술 혹은 지역 생산물에 대한 특정한 속성, 즉 비정상적이고 흠이 있는 부정적인 속성과 관련된 표시라 할 수 있다. 스티그마의 역할은 왜곡된 인식으로 아예 사람이나 지역의 정체성을 바꿔 놓기도 한다.핵 폐기장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이해가 시설 설립의 방해요소가 된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홍보로서 핵 폐기장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만 한다. 나쁜 건 언급하지 않고, 좋은 것만 과장해 주입하려는 홍보가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6.문제 해결을 위한 채비1)부담과 편익의 분배구조 바꾸기핵 폐기장에 대한 주민들의 등 돌리기는 님비가 아니라 당연한 이치다. 지역주민에게 돌아가는 편익보다 부담이 더 크기 때문이다. 연구를 통해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부담을 줄이는 분배구조를 모색해야 한다.2)자기 역할- 정부 : 국가적인 정책을 결정하는 데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비난의 화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국가 차원에서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정당성을 갖추었고 국민 앞에서 떳떳하다면,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고 이해와 지지를 구해야 한다.- 지역주민 : 핵 폐기장 유치에 대한 결정권은 지역주민에게 있다. 지역주민은 핵 폐기장 건설에 따른 대가에 대해 시시콜콜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 정부가 충분히 여론을 수렴하고 궁리하고, 가계각층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만들어 놓은 안(案)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고 굴려보고 얘기해 본 후 수용 여부만 결정하면 된다.- 반핵단체 :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여 핵 폐기장으로 인해 부과되는 부담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를 구할 수 있다. 지역주민들이 핵 폐기장 유치로 인한 부담은 읽지 못한 채 따라오는 부록에 현혹되어 후회할 판단을 하지 않도록 운동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이 지역엔 절대 핵 폐된다.
『3공화국 전기 ~ 3공화국 후기』◎제 3공화국 전기1.제 3공화국 수립 과정쿠데타 세력들은 1963년 12월의 민정이양에 이르기까지 행정과 입법의 권한을 모두 장악하는 초헌법적인 통치 기구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또 1961년 6월 21일에는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을 공포하고 4ㆍ19 혁명 이후 활동한 혁신 세력들과 구정치인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그 후에도 쿠데타 세력들은 ‘특수범죄처벌특별법’과 ‘반공법’ 등을 공포하였다. 모든 정치인들의 활동은 금지되고, 혁신적인 성향을 보였던 단체들은 반국가 단체로 몰렸으며 그 중심인물들은 체포ㆍ처형당하기도 하였다.애초 혁명공약에서 2년 뒤에 정권을 민간정부에 넘기겠다고 약속했던 쿠데타 세력들은 1962년 12월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1963년 1월부터는 정치인들이 활동을 재개하도록 허용하였다. 아울러 쿠데타 세력들도 민정 이양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정당 조직에 나서, 1963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1963년 10월에 실시되도록 정해지자,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는 이미 공약한 원대복귀 결정을 미루며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다 결국 원래의 약속을 저버리고 군복을 벗었다. 민주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는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당선 되었다.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제 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그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군정을 펴왔던 쿠데타 세력들은 민정으로 틀만 바꾸어 계속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다.2.박정희 정권 : 정당성 확보1)불안한 사회체제- 지금 시기의 한국의 체제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극도로 민감하고 불안.- 만연해 있는 사회ㆍ정치ㆍ경제적 혼란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는 북한 공산주의의 위협을 제거.- 박정희는 자신의 ?혁명 과업?은 “부패를 척결하고 다른 사회적 죄악을 일소하며, 국민들에게 새롭고 건전한 도덕적ㆍ정신적 태도를 확립시키는 피자들이었고, 200명은 축첩(蓄妾한) 사람들이었다.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로 설치되고 김종필이 지휘한 중앙정보부는 추가로 1,863명의 공무원을 고발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안보까지 책임졌던 중앙정보부는 주요 공무원 및 공 기관 직원 4만 1,712명을 조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박정희가 주장한 한국의 전면 개혁은 주로 구정치인들을 몰아내고 젊은 세대의 새로운 엘리트를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정치 세력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2)박정희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 군사정권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는 관료 개혁이었다. 공무원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군사정권에 새롭게 유입된 엘리트 관료들이 박정희의 강력한 정부의 기반이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특히 경제 및 공업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기 위해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영입된 민간 분야의 인사 대다수가 주도적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가 되었는데 김정렴과 오원철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1961년 5ㆍ16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상공부(현 산업자원부)의 주요 직위는 행정 직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기술 전문가들은 제도적으로 밀려나거나 퇴출되는 상황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 육사 출신 육군 중장 정래혁이 1961년 5월 혁명정부의 상공부 장관으로 취임한다. 그는 상공부의 개혁을 주도하면서 많은 선임 관료들을 해고했다. 이 숙청은 혁명 공약 6조에 따라 착수한 것으로, ‘구악 일소’라는 슬로건 하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가 상공부의 철저한 구조 개혁이었다.- 박정희에 의해 새로 형성된 테크노크라시는 두 ‘신세대’ 엘리트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즉 첫째는 테크노크라트 집단, 둘째는 퇴역 장성, 기업 경영인, 전문 행정 관료가 뒤섞인 집단이었다. 전체적으로 이들 엘리트 집단들은 세 가지의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첫째, 그들은 고도의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로 강한 자제력을 지녔고, 효율성과 목적 달성에 중점을 두었다.둘째, 그들은 자신들의 관료적 행정에 대한 ‘행정적 통제’의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체포되었던 주요 기업인들은 6월 30일 “정부가 국가 건설을 위해 요구할 시에는 재산 전부를 기부 하겠다”라는 동의서를 쓰고 난 뒤에야 풀려났다. 한국 최고의 재벌기업인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은 당시 도쿄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위 내용의 각서를 보내왔다고 한다. 사실상 대부분의 기업인들은 가석방 상태였다. 기업인들의 자유는 그들의 기업 활동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대한 협조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고, 이는 박정희의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개념과 일치해야 했다.4.박정희 정권의 위기1)혁명정부의 내부 갈등- 1962년 12월 27일, 박정희는 1963년 8월에 선거로 수립된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할 것이며, 대선과 총선이 각각 1963년 4월과 5월에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박정희가 새로 개정된 헌법을 공포한 바로 다음날에 이루어졌다. 그때에는 이미 박정희와 그의 군사혁명 동지들, 특히 젊은 영관급 장교들은 미래의 ‘민간’ 정부 역시 주도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박정희는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해야만 했다.? 내부적 갈등 -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젊고 진보적인 영관급 장교 세력과 최고회 의의 온건파들 간의 세력다툼? 외부적 갈등 - 민간 정부를 회복시키고 변화하는 미국의 원조 정책에 응하라는 미국의 정책 고문들로부터의 압력- 혁명정부 안에서 재개된 갈등은 주로 민주 공화당의 기본 조직과 운영에 대한 통제권 다툼이었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그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휘청거렸다. 박정희는 자신의 지도적 위치를 강화하는 데 있어 김종필에게 의지하는 위험하지만 고도로 계산된 선택을 했는데, 이는 특히 1961년 7월 혁명 초기에 명목상 지도자였던 장도영 장군과 그 추종자들을 제거한 후에 두드러졌다. 그때 박정희는 기밀을 요하는 대부분의 개혁 업무와 협상을 가장 믿을 만하고 기민한 협상가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을 통해서 추진하고 있었다. 박 미국의 원조 없이는 식량 부족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박정희는 1963년 4월 8일 성명을 철회하고 선거 날짜를 9월까지 연기했다.5.제 3공화국 출범- 선거가 끝나고 제 3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는 자신의 정통성이 확립되자 지체 없이 가장 시급한 두 가지 과제, 즉 대일 외교 관계의 방향 전환과 한국의 방위력 증강에 착수했다.1)한ㆍ일 국교 정상화와 한ㆍ일 협정 체결 반대 운동- 한ㆍ일 간의 국교 정상화는 한국과 일본이 잘못된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를 수립한다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청산, 특히 그동안 일본이 한국 민족에게 자행한 범죄 행위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진정한 사과, 그리고 엄청난 정신적ㆍ물리적 피해에 대한 적절한 배상 등은 마땅히 선결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처럼 중대한 역사적 과제를 졸속으로 처리하여, 엄청난 국민적 저항과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과오를 자초하였다.-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에 골몰하던 박정희 정부는 1964년부터 일본과 교섭을 시작하였는데, 애초부터 차관 도입에 급급하여 당당한 자세를 보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회담이 굴욕적으로 전개되는 데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거족적인 궐기로 번져나갔다. 이해 3월 9일, 야당과 각계의 대표 200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 유세에 들어갔다.- 전국에서 시위가 번져나가자 박정희 정부는 수도권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5월 20일에는 서울 시내의 9개 대학교 2천여 명의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학생과 경찰 사이의 충돌로 65명이 부상하고 182명이 연행되었다. 전국 곳곳에서는 연일 ‘난국타개 학생 궐기대회’가 벌어졌다. 5월 27일에는 서울 대학교교수들이 긴급총회를 열고 6개항의 시국수습 결의문을 채택하고 정부가 이성을 회복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하였다.2)6ㆍ3 사태- 1964년 6것이었다. 한국이 당시 거의 재정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다는 점과 새로운 원조정책을 수용하라고 박정희에게 압력을 가하던 미국 정치인들과 박정희 사이의 격렬한 투쟁을 고려하면 일본 자본에 대한 박정희의 강렬한 관심을 알 수 있다.2)베트남 파병-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요구되는 자금을 마련하고 주한 미군의 베트남 파병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가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국군의 현대화, 일부 군수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기로 약속하였다. 또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 및 한국 상품의 수출을 지원하였다.- 베트남 파병은 의심할 여지없이 박정희의 주요한 전략 중의 하나였다.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됨으로써 발생한 전쟁특수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연평균 12%의 성장을 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 시각으로 나뉜다.①긍정적인 면- 자신의 정권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확보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특히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냉전 정책에 맞추어 한국의 목표를 최대화 하려 는 시도였다.-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원조가 삭감되는 것을 연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한국군 을 현대화하는 업무에 착수하게 만들 수 있었다.②부정적인 면- 수많은 전투 병력이 파병되어 직접 전쟁에 참가하게 됨으로써 5천여 명의 병사들이 뚜 렷한 명분도 없이 죽거나 부상을 입는 등 많은 불상사가 초래되었다.- 최근에는 고엽제 피해자 문제, 베트남의 한국인 2세 문제, 민간인 살상 문제 등과 같은 결과가 드러나고 있다.◎장기 집권의 야망과 3공화국 후기 정책1.3선 개헌과 민주화 운동-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유효투표의 51%를 얻어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재선되었다.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한 농공병진 정책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을 역설하였다.1)3선 개헌-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