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민족운동사-안중근-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우리 역사 중에서 가장 암울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도 끊임없이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억압에 대한 투쟁은 계속되어져 왔고, 민족적인 항쟁은 계속되어져 왔다. 조선을 독립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도마 안중근에 대해서 그의 인물 됨됨이를 중심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안중근에 관련된 연구 논문도 많고 전기 형식의 각종 기록, 관련 웹 사이트도 매우 많은 것을 보면 안중근이란 인물이 일제 침략으로 더럽혀지고 있던 당시의 우리 역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칠만할 의거를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 안중근에 대해서 책을 읽고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그의 비범한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도중에도 그의 평소 행동들을 보며 역시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제를 하기 전에 인물을 선정하고 ‘도마 안중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처음에 영화를 볼 땐 안중근의 업적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되고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 이였다. 약간 현실성은 벗어난 영화였지만 그의 의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는 영화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였는데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인물을 조사함으로서 그냥 스쳐갔던 장면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떠올랐다. 안중근의 성장과정과 그의 삶, 그의 전기에 초점을 맞추어 느낀 바를 적어보려고 한다.안중근은 1879년 7월 16일(음력)에 해주 동부동에서 출생하였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이며 아버지인 진사 태훈과 어머니 조씨 사이의 3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등에 북두칠성과 같은 점 일곱 개가 있어 이름을 응칠이라 불렀는데 응칠은 자이고 보명은 중근이다. 해외 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여 자가 되었다고 한다.6~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생각해 본다. 반면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여 선생님과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당하고는 했고 친구들도 학문에 힘써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옛날에 초나라 패왕이었던 항우가 말하기를 대장부는 이름 정도만 쓸 수 있는 학문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만고영웅 항우의 이름은 영구히 남아 있어 사라지는 일이 없지 않은가? 나는 학문으로 출세할 생각은 없네. 항우가 대장부면 나도 대장부일세.” 라며 말했다. 일찍이 안중근은 학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한 일화가 아닐까 한다.한편 장성함에 따라 16세 때는 김홍섭의 딸 김아려를 맞이하여 결혼함으로써 성인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1894년에 안중근이 16세가 되던 해에 동학 혁명이 일어났다. 군주 조병갑의 횡포로 많은 농민들이 각종 폭정에 시달렸고 이는 청일군대가 개입하여 청일전쟁이 배경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의 진압에 나서자 어려서부터 정의롭고 용감한 안중근은 여기에 적극 참가하여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학도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마을 일대에 들어와 행패를 부렸는데 아버지를 도와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단지 16세의 나이에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모습이다.1897년, 안중근을 이해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변화가 생기는데 그것은 그의 천주교 입교이다. 안중근은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얻었는데 한때는 교회의 총대를 맡아서 많은 일을 하다가 그 뒤에 만인계의 채표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뒤로 교회의 신자들과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도 안중근은 수년간 천주교 전파에 힘을 쏟았으며 평생 동안 천주교의 신앙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안중근이 상해에서 장사하는 교포들에게 지원을 호소했지만 상인들은 모두 냉담했다. 그 때 곽신부는 안중근에게 교육진흥, 사회의 충실, 민심의 단결, 실력배양에 대해서 충고했다. 얼마 후 안중근은 재산을 처분하여 학교를 세웠다국의 참상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고종의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나고 황제직에서 퇴위 하기에 이르었다.안중근의 일화들을 읽고 그의 온화한 성품과 상황 대응력에 찬사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친구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마부가 “이제 외국 사람이 전보를 설치한 뒤로는 공중에 있는 전기를 몽땅 거두어다가 전보통 속에 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공중에 전기가 전혀 없어져 비가 안 와서 이렇게 흉년이 든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어찌 그럴 리가 있냐며 웃으며 타일러 말하는데 그 마부가 말채찍으로 안중근의 머리를 때리며 욕을 퍼부었다. 안중근은 그 상황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이 상황을 물어보고 분노해 법관에게 잡아 징벌하도록 하자 했지만 안중근은 제 정신을 잃어버린 미친 사람이니 손 댈 것 없이 돌려보내자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유가 없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참는 것도 훌륭한 인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모를 볼 때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이기주의에 치우쳐 자기들은 손해를 보려하지 않는 그런 현대 사회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일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저러한 아량을 보여줄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나 자신 또한 이러한 반성에서 제외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또한 안중근의 어머니에 대해서 빼놓을 수 없다. 안중근은 사형판결에 대해서 공소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충고 때문이었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사형이 구형되자 안중근에게 이렇게 전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네가 공소한 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된다. 네가 국가를 위해 이에 이르었으니 죽는 것은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할 수 없는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꾸짖으며 하신 말이 ‘열 달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인데...’ 이런 말씀이였다. 겉으로 애정표현을 안 하시는 어머니가 나에게 한 최초의 애정 표현인 것 같다. 그 후로는 그 말이 나에게 어머니의 커다란 사랑으로 다가온다. 조국을 위해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그런 어머니의 심정이란.... 이러한 가정교육 또한 안중근의 인품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데는 우선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재판관 마나베의 취조 과정에서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집을 나올 때까지의 부모의 재산으로 편하게 생활했습니다. 지을 나설 때 다소의 돈을 가지고 나왔습니다만, 그 후 성금 따윈 받은 적이 없이 친구들의 보조로 살아왔습니다. 집을 나온 목적은 외국에 있는 동포의 교육에 뜻한 바 있었고, 또 의명으로서 한국의 국사에 헌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교육과 의병활동은 수년 전부터 계획한 것이었으나, 그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것은 러일전쟁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5년 전에 5개조, 그리고 3년 전에 7개조의 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안중근이 말하는 5년 전에 5개조란 1905년 11월 제 2차 한일협약을 의미한다. 전문에 ‘한국의 부강을 인정할 수 있을 때 까지’로 기한을 정하고 있으나. 직접 교섭을 맡은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외교권마저 박탈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병합을 시도하려는 첫 번째의 조약이다. 그해 12월에는 이 조약의 실천 기관으로서 한국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수도 서울에 입성한 사건을 말한다.또 3년 전에 7개조란 1907년 7월의 제 3차 한일협약을 말한다. 통감이 한국 정부를 지도한다고 명기해 한국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조약으로 그래 6월에 일어난 고종의 헤이그 밀사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 4일 전 고종은 황제직에서 퇴위 당했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조선군마저 해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일본은 결국 조선 작한 안중근에게 의병활동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1909년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렀을 때 이토 히로부미가 그 곳에 온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근일에 하얼빈에 온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안중근은 내심 기뻐하였다. 일본이나 한국까지 가지 않아도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 때 안중근은 이렇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결심을 하였다. 이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얼빈 의거’이다.안중근의 이 거사의 의미를 단순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에 두게 된다면 간과하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안중근의 의거는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을 세계에 폭로하고 규탄함으로써 독립을 추구하여 싸우고 있는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이후 안중근의 재판 과정에서 그의 진술과 높은 기개를 통하여서도 잘 나타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를 15개 조목으로 역사적인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을 꼬집었고 재판관의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재판은 일본이 조약을 이유로 일본인들만을 참여 시킨 매우 불리한 재판이였다. 국내외에서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에 도착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와 가마타의 변호조차 허가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재판관 마나베도 안중근에서 호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후에 돌변했는데 이는 일본 정부의 압력 때문 이였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에 공정한 재판을 기하게 되면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정당화 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이로 인해서 앞으로 더욱더 많은 조선인이 독립운동에 참여 할 지도 모르는 다는 그들의 우려였다. 그들이 이렇게 억압 하는 데는 그들의 통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날이 갈수록 고취되었고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