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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역사]청말 아편전쟁과 광동무역체제
    ================================ 차례 ===============================序 論-------------------------- 02本 論1. 서양 세력의 진출 과정 -------------------------- 031)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의 진출2) 영국자본의 진출2. 淸朝社會의 變化------------------------ 073. 廣東貿易體制-------------------------- 091) 解禁解制와 광동무역체제의 시작2) 광동으로 무역항 한정3) 광동무역체제의 내용4) 광동 무역 체제를 통한 청조의 목적4.阿片戰爭의勃發과結果-------------------------- 151) 아편무역의 시작2) 청의 아편정책3) 전쟁의 발발 계기4) 전쟁의 경과5) 중국의 패전과 남경조약의 체결6) 아편전쟁의 영향結 論-------------------------- 24* 참고문헌 *序 論16세기를 넘어서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아시아와 유럽의 세력균형의 추는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기존에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부강한 중국대륙은 서서히 그 안정감에 젖어들면서 스스로의 현실인식에 대한 대응이 안일해 지기 시작했다. 한편 서양은 이시기에 동쪽으로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과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과의 대립으로 인해 위기감이 형성되면서 위기감을 돌파하고자 하는 시도를 실시 하기에 이르렀다. 대항해 시대를 통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함은 물론이요. 나침반과 화약의 활용에 있어 이것을 탄생시킨 중국대륙을 능가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그리하여 유럽의 각국은 발전된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경쟁하듯 식민지를 경영하게 되어 점차 세계 시장이 형성되게 된 거이다. 이때부터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가속화되었고, 신대륙과 아프리카 등을 식민지로 만든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시아로 눈을 돌리게 된다. 아시아로 많은 유럽의 모험가?상인?선교사들이 아시아로 몰려들게 되면서 그들은 각지에서 침략 활동을 전개하게 되三行)’이라 불리는 공행상인들에게 외국무역독점권을 부여하는 대신 해관의 지도, 감독 하에 외국상인들로 하여금 관세를 정부에 납부하도록 하는 책임을 맡겼다. 이러한 무역기구는 조직이 형성되어 확립?변화되어 감에 따라서 그 기능 및 성격도 조금씩 달라졌다.① 공행(公行)광주항에서 외국 상인과 무역을 담당한 상인으로는 명대에 공박무역(貢舶貿易)과 시박무역(市舶貿易)을 청부맡은 아행상인(牙行商人: 광동 36행)이 있었고 청대에는 광동 13행 상인이 있었다. 광동 13행은 상인길드에 의한 상거래, 대외무역의 독점 확보책으로 공행을 성립했다. 차, 견직물 등 무역대상품은 모두 공행상인들에게 독점되었다. 정부와 해관(海關)을 대신하여 외국상인들의 수출입사무를 맡았다.공행은 일종의 특허상인의 조합으로서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첫 번째는 무역을 독점하는 것으로 외국상인을 대신하여 상품을 매매하였다.두 번째는 관세납부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외국상인이 납부해야 할 수출입세는 외상(外商)이 직접 해관에 납부할 수 없었다. 모두 행상이 보증인이 되어(保商) 이를 납부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외상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며, 청 정부의 명령을 외상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외상이 중국에 도착한 후의 일체의 행동은 모두 행상이 단속하였다. 만약 외상이 일을 저지르거나, 단지 중국인과 결탁하여 문제를 일으키면 다만 행상만 문제삼았다. 동시에 중국관청이 외상에게 문서를 전달하거나 외국인이 중국정부에 어떤 요구를 할 때에는 외상이 청의 관료와 직접 접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행상을 통해야만 했다. 따라서 행상은 중국 대외무역의 기구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청조의 외교사무를 처리하는 대행기구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공행이 성립된 후 행상들은 유리한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외국상인들에 대한 횡포를 자행하였다. 또한 월해관감독 이하 관료들은 행상소집, 가격, 세제 등 무역에 대하여 절대적 세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부정을 행하였으며 서구 세력에 대하여 차별대우주의, 연대책임하여도 금지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였다. 도광 원년(1821)에 우선 광주 행상에 대하여 금령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강화의 내용이 모든 서양 상선은 광동에 도착하면 먼저 행상이 황포로 가 아편이 없다는 확인을 받은 다음에 화물을 하역하게 하고 이후에 발각되면 중벌에 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편 단속의 책임을 행상에게 전가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상품에는 아편이 없었으나 아편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막대한 이익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밀수에 의하여 그 양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갔다.②통제론과 엄금론청조가 아편중독의 만연과 은의 유출로 인한 정치?사회?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조정 내부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두 가지 아편 대책이 제시되고 있었다, 첫 번째가 태상시소경 허내제(許乃濟)의 통제론(統制論=弛禁論))이었다. 이와 같은 허내제의 주장에 대하여 일반 아편판매업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철저하게 아편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이때에 홍려시경 황작자가 )의 상주를 올렸다. 그는 은가가 상승하게 된 것은 은이 국내에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유출되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은의 부족으로 동전을 은으로 바꾸는데 어려움은 지적하고, 은이 유출되는 원인은 아편의 판매가 성행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흡식자가 많기 때문이므로 흡식자가 없으면 아편의 판매가 성행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 외국상인들도 아편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흡식자를 중죄로 다스려야 하며 기한을 정하고 그때도 끊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다. 황작자의 상소는 조리가 있고 방법이 구체적이어서 도광제의 마음을 금연쪽으로 굳히게 만들었으며 이를 집행하기 위하여 당시 아편을 피고 있던 황실의 장친왕 혁뇌. 보국공 부회, 백작 황명 등의 작위를 몰수하는 등 조취를 취했다. 이를 계기로 각 성의 독무들은 아편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엄격하게 금연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기영, 이리포 등이 남경의 정해사에 머물렀고, 영국측은 포틴저가 대표로 영국함정 콘윌리스호에 머물면서 실무자들 사이에 8월 8일부터 19일까지 예비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20일부터 본 회담에 돌입하여 세부적인 내용을 합의보고, 29일에 콘윌리스호에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를 남경조약(南京條約), 또는 강녕조약(江寧條約)이라 한다.5) 중국의 패전과 남경조약의 체결①중국의 패전원인중국이 이처럼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구조의 모순과 부패, 경제상의 낙후와 군사적인 군비의 헤이 등에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군사적인 이유를 세분하면 첫째, 청 정부는 영국군의 침략목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즉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초기 임칙서로부터 영국군이 직접 천진으로 북상할지 모르겠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에도 도광제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둘째 군사작전에도 명확한 지휘방략이 없었다. 전쟁초기에 중국은 영국이 수전에는 능하여도 육전에는 약하여 적어도 중국군이 해전보다 육상전에서 유리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수군을 동원하지 않고 해안에다 포대를 설치하여 영국군을 막으려 하였다. 여기에 일선 지휘관들도 작전에 비협조적이었다. 자기 관할구역이 무사하면 그만이어서 서로 협조하는 작전이 불가능하였다.셋째, 중국군대의 소질과 능력이 영국군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많은 애국 장군들이 있었으나 반면에 적지 않은 장군들이 영국군을 무서워하였다. 고급지휘관에서부터 중, 하급 지휘관을 비롯하여 지방관리들도 성을 포기하고 도망가기 일수였다.넷째, 민중의 역할에 대하여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전쟁기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민중에 의지하여 적을 막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민중 가운데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고 향용 가운데에도 좋은 사람, 좋지 못한 사람이 있어 오히려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민중의 힘을 작전에 배합시키지 못하였다.다섯째. 무기의 열세였다. 당시 영국군은 보병에동무역체제는 서양 즉 영국의 자국중심의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고 청나라는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해 더 이상은 빗장을 걸어 잠그지 못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동양사연구실 편, Ⅴ, 지식산업사, 1989.?신승하, 上, 대명출판사, 2004박기수. . 9집. 명청사학회, 1998.윤화숙.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9.임계순. . 서울; 신서원, 2000.정성일. . 경북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5.) 어린 시절에 대하여서는 에보라에서 수학과 항해술을 배웠다는 것 외에는 분명하지 않다. 마누엘 1세의 인정을 받아, B.디아스의 희망봉(喜望蜂) 발견 후로 숙원이던 인도항로 개척의 원정대장이 되었다. 1497년 7월 4척의 선대(船隊)를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범하였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航法)을 써서(약 6,400 km), 11월 희망봉을 돌아 대륙 동해안을 북상(北上)하여 모잠비크 ·몸바사를 통과, 14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 방해로 시달림을 받았으나, 우호적인 마린디에서는 이슬람의 수로(水路) 안내인 이븐 마지드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횡단하였다. 5월 22일 캘리컷에 도착,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와, 무력(武力)에 대한 지방 영주(領主)들의 경계심 때문에 정식 통상교섭은 난항을 거듭, 3개월 만에 겨우 약간의 향료를 입수하였다. 10월 다시 인도양을 횡단하여 올 때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항해하나, 괴혈병(壞血病) ·열병 등으로 선원의 반 이상을 잃었다. 1499년 9월 가까스로 리스본에 귀환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귀족이 되어 연금(年金)을 받았다. 그 뒤로 인도무역은 해마다 확대되었으나 현지인과의 마찰이 점차 격화되어, 1502년 다시 15척의 대함대(大艦隊)를 인솔하고 인도에 건너갔을 때에는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인문/어학| 2006.07.23| 24페이지| 2,000원| 조회(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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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사]동북공정에 관하여
    REPORT역사전쟁,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동북공정문제과목 : 한중일관계사교수 : 육정임 교수님제출자: 60010260 김소영60010284 조은선60000282 오시웅60000267 백완종역사전쟁,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한국사와 역사인식서론본론 1) 세계문화유산을 둘러싼 전쟁2) 중국의 입장3) 한국의 입장4) 설문조사결론서론중국 공산당의 기관지인 광명일보에 지난 6월 24일 역사면에 「고구려 역사연구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신문의 한면을 통째로 차치하고 있는 이 기사의 내용은 놀랍게도, "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다." 라는 것이다. 광명일보는 인민일보, 해방일보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대표적인 당보(黨報)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구려 관련 기사를 그냥 보아넘기기 어려운 이유이다.또한 집안과 환인지역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공사는 북한과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두고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고구려’에 대한 중국과 한국의 입장을 알아보며 이런 역사전쟁을,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문조사의 내용으로 현재 우리의 역사인식에 대해 살펴보자.본론1) 세계문화유산을 둘러싼 전쟁① 세계문화유산 선정기준과 과정세계문화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문화와 자연이 어울어진 복합유산이 있다. 그중 문화유산의 등록기준은 독특한 예술적 혹은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 할 것.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것.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중요하고 전통적인 건축양식, 건설방식 또는 인간주거의 특징적인 사례로서 자연에 의해 파괴되기 쉽거나 역행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 혹은 경제적 변혁의 영르지만 장기적으로 이 지역 관광수입을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입장료뿐 아니라 이런 벽화들을 다보려면 적어도 하루 이상 집안에 더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5) 광개토태왕비와 광개토태왕릉두 유적을 합쳐 하나의 유적권으로 만들었다. 국가에서는 이번 유적정화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집안시에만 3억 위앤 또는 3억 9천만 위앤의 예산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하면 4백50억~5백84억원이 되는데 두 나라의 소득 차이나 물가를 생각하면 우리 돈으로 5천억에 가까운 돈을 퍼부은 것이다.광개토태왕 유적은 태왕비 쪽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선 태왕비는 지난날의 비각을 그대로 살렸으나 투명한 유리(아크릴?)로 4면을 모두 막아버려 가까이서 관찰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훼손되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지난날처럼 태왕비를 자세히 관찰하고, 사진을 찍고 하는 작업은 불가능해졌다. 태왕릉은 많은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크게 복원은 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큰 차는 들어갈 수도 없을 정도로 주변에 집과 공장이 꽉 들어차고 길도 좁았는데 이제는 태왕릉이 태왕비를 바로 내려다보고 있다. 전에는 태왕릉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주위에 옹색하게 담을 쌓아 능 전체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옆으로 지나가는 길에서도 전체를 찍을 수 있게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③ 세계문화유산을 둘러싼 투쟁중국정부는 집안시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을 하려고 대대적인 공사를 하였다. 집안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곳으로 많은 고구려 유적이 있는데 특히, 만 3000개 이상의 고분군이 주목을 받는 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덤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자신들의 생각이나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어하였다. 그런 생각이 무덤의 벽이나 천장에 그림의 형태로 그대로 남아있다. 춤이나 사냥, 씨름과 같은 일상생활의 모습이 남아있으며,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집안 구조, 입었던 옷차림, 먹었던 음식을 생생하게 을 쌓고, 고구려의 북진 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용담산성에는 지금도, 성벽이며 양식을 저장해두던 창고인 한뢰 등 고구려성 특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런데 성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용담산성을 쌓은 광개토왕과 당시에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 나라,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주장이 중국에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80년대부터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해왔는데, 주장의 논거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1)고구려인의 뿌리는 고대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민족기원은 예맥설과 부여설, 고이설(高夷), 商人(상=은나라 사람)설, 염제설 등이 있는데, 사실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 등은 예맥족에서 분화돼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이 역사의 흐름은 전부가 예맥족의 역사이고 그이후 삼국 이후에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루고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인을 예맥족으로 인정하면 고조선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기원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중국 산동지방에 살던 염제족이 이동해 세운 나라라는 것이 그 하나다. 또 중국 고대 사서에 나오는 ?고이?란 인물을 고구려의 선조로 내세우면서, 그를 전설상의 존재인 전욱 고양씨의 후예로 보는 주장도 있다.이와 함께 고구려 민족이 주(周)나라, 진(秦)나라 때에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동북 지역은 주나라가 상(商)나라를 점령한 후 다스렸던 지역이며,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신석기 말, 청동기 문하의 위층은 한(漢) 대 문화이고, 그 위층은 고구려 문화이므로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국가였다.(2)고구려 건국 지역 및 기본 관할범위가 중국 경내손진기-고구려민족은 중국의 영토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고 서기 4,5세기 이후에 비로소 한반도로 이동했다. 그 뒤 2-300년 뒤에 멸망했다. 전체적인 역사적 사실로 봐서 중국 영토에서 활동한 시기가 훨씬더 길다. 고구려민족이 멸망한 14) 《淸代邊疆城鎭硏究》, 李治亭, 길림성사회과학원15) 《長白山地區歷史 文化及其歸屬問題硏究》, 劉厚生, 동북사범대학16) 《東北漢族人口史硏究課題》, 孟廣耀, 흑룡강성사회과학원17) 《中國歷代治理東北邊疆思想硏究》, 劉信君, 길림성사회과학원18) 《渤海移民的治理 歸屬問題》, 武玉環, 길림대학19) 《淸代鴨綠江流域的封禁 開發硏究》, 張杰, 요녕대학20) 《鴨綠江以南的高句麗遺跡調査硏究》, 徐日范, 연변대학21) 《東北邊疆多民族文化交流 融合硏究》, 正, 길림성사회과학원22) 《僞滿時期東北邊界衝突 界務交涉硏究》, 王慶祥, 길림성사회과학원23) 《中國東北 俄國經濟關係史》, 張鳳鳴, 흑룡강성사회과학원24) 《俄國東部移民開發問題硏究》, 王曉菊, 흑룡강성사회과학원25) 《?三國史記?詳注及硏究》, 劉子敏, 朴燦奎, 연변대학26) 《俄羅斯遠東地區的中國人》, 張宗海, 흑룡강성사회과학원그렇다면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학자들에게 요구하는 정치의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동북변경지역의 역사, 그러니까 지역사연구이고 둘째 동북변경지역 민족역사에 대한 연구로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민족이 동북에서 어떻게 발전했고 어떻게 융합됐는지에 관한 연구사다. 셋째는 동북변경지역 국경의 발전사로 동북의 변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국경이 만들어졌는가를 연구한다.국경 문제에 대한 중국의 특별한 관심, 그것은 중국이 다민족 국가라는 데서 출발한다. 중국이 현재와 같은 영토를 차지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과 하나의 국가연합체를 이루게 된 것은 약 50년 전-그러나 이후로 중국은 끊임없이 티벳과 신장 등 소수민족들의 독립분쟁에 시달려야 했다. 소수민족들이라고 소위 이야기하고 있는 티벳 이라든가 동북지방, 몽고를 빼고 나면 전체 국토의 절반도 안 된다. 그리고 하나의 소수민족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이 문제는 국가의 정책상 중요한 과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특히 중국에서 최근에 가장 주목하는 지역은 연변 조선족 자치구다. 조선족은 전체 소수민족의 트이다. 동북공정은 고대 중국 동북변방의 역사에 관한 연구의 통칭으로, 5년 동안 연구비만 200억 위안(약 3조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려 역사의 재해석은 물론, 심지어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 사까지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해석하는 견해는 1980년대 지린[吉林]성 집안(集安)과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중원(中原)문화의 영향이 부각되면서부터 있어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고구려를 동이(東夷) 가운데 가장 강대한 민족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중국은 90년대 들어와 고구려와 중원 왕조는 기본적으로 화평관계를 유지했고 대립기간은 극히 짧았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귀속시키려 하고 있다. 고구려가 수(隋)와 전쟁한 기간은 불과 5년, 당(唐)과 전쟁한 기간은 12년으로 전쟁기간은 극히 짧았으며 대부분의 기간은 수당에 신복(臣服)했다는 주장이다. 반면 백제나 신라와의 관계는 대부분 전쟁기간이었다고 파악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래 민족(고구려)이 한반도(조선반도)를 통치하는 것을 끝내고 수백년 이어진 전쟁을 종식시켜 한반도 민족통일국가의 건립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또한 고구려의 판도가 기본적으로 중국 영역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427년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가 논란이 되자 이번에는 평양 천도 이후에도 중원 왕조와 예속 관계를 유지하며 중원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중국은 고구려는 중국 고대 동북변강지구의 소수민족 지방할거정권이라고 규정한 다음, 왜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증거로 5호16국과 요(遼), 금(金), 원(元), 청(淸) 등 다른 소위 '변강 소수민족 정권'도 일단 황허 유역을 점령한 다음에는 스스로는 '중국'(中國)이라 일컬은 점을 지적하고 나아가 중국 고대제왕들은 이러한 천하관을 발판으로 천하의 토지를 자기의 토지로, 천하의 백성을 이다.
    인문/어학| 2005.07.02| 14페이지| 1,000원| 조회(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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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이집트사]이집트 미이라와 매장의식 평가A좋아요
    《차례》序論(이집트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란 무엇인가?)본론1.2.1)세케르2)셀케트3)메르트세거4)호루스의 네 아들5)죽은자의 왕 오시리스3.1)심장의 무게달기 의식2)입 열기 의식決論【참고문헌】그림 뭉크 [저승에서 자화상]序 論현재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단어는 엄숙하기만 한 느낌을 가진다. 인류의 문명이 최초로 시작한 시점에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의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중에 미라의 제작과 피라미드 건설등 사후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집트인의 의식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은 시체를 영구히 보존하려고 했는지..생명을 잃고 바싹 마른 몸만 남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오늘날 우리의 사후세계관과는 다른 무엇을 전달하는지에 대해 왕릉속의 석관을 열고 그 안에 누워 있는 미라를 통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1.죽음의 의미죽음의 사전적 의미는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생물의 상태’를 일컫는다. 그러나 현대의 이러한 사전적 의미가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도 적용될지는 의문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모든 생물이 물질적 구조,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육체에 영혼 혹은 인성에 해당하는 ‘바(Ba)' 와 생명력에 해당하는 ’카(Ka)'등 빗물질적인 요소가 부가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이들 요소의 분리를 의미했다.“그대의 다리는 영원의 거처로 안내하고, 그대의 손은 무한히 지속되는 장소로 인도해 주리니”두 번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육체는 육체에 생기(生氣)를 준 정신적 요소와 재결합해야 한다. 이것은 육신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야만 재결합이 가능함을 말하며, 미라 처리 과정에서 사제들이 외우는 마법의 주문은 사자에게 그의 육신이 잘 보존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깨워 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육체는 절대로 훼손돼서는 안 된다. 만약 육체가 훼손되면, 죽음 때문에 흩어진 정신과 다시 결합할수 없고 결과적으산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셀케트는 지하의 대양인 지하 세계에서 나오는 출구와 맺은 이러한 관계 때문에 점차 죽은 자의 왕국인 지하 세계로 지위가 떨어졌다. 아펩이 라의 방어자들에게 패한 후 묶여서 지하 세계에 갇혔을 때, 셀케트는 그곳에서 아펩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셀케트는 인간의 팔다리를 가진 뱀-신 네케브카우를 배우자로 맞이 했으며, 네케브카우는 때로 지하 세계에 거주하는 괴물로 생각되기도 했다. 셀케트는 그때 쇠사슬로 죽은 자를 묶었다고 한다.)셀케트는 오시리스를 위해 장례식을 거행하는 이시스를 도와 주는 모습과 이시스가 유아 호루스를 찾는 것을 도와 주는 모습으로 가장 많이 묘사되었다. 셀케트는 관의 발 밑에 이시스와 함께 서 있었으며, 카노푸스 단지의 수호신이었다.셀케트는 머리에 전갈이 있는 여인의 모습 또는 여인의 머리를 한 전갈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때로는 이시스처럼 날개가 달린 팔로 죽은자를 보호 했다.3)메르트세거메르트세거)는 죽은 자의 왕국이면서 태양이 지는 나라인 서방의 여주인으로 불렷다. 메르트세거는 왕가의 계곡 위로 높이 솟아오른 가파른 산악 지역에서 살았고, 신왕국의 파라오들이 그곳의 바위 무덤에 묻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메르트세거의 다른 칭호는 서방의 정점이었다. 메르트세거는 맹렬하게 죄를 추적하면서 질병을 응징하고 궁극적으로는 당연히 치러야 할 경의를 표하지 않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벌했기 때문에, 정상의 사자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라들에게는 자비로운 신이었으며, 특히 뱀의 공격으로부터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신이었다. 메르트세거는 아마도 정의로운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맹렬한 우라에우스 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는 파라오를 위한 죽음의 도구였다. 메르트세거는 때로 코브라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코브라의 머리를 한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4)호루스의 네 아들호루스)는 부인과 자손이 많았지만, 그의 ‘네 아들’로 분류된 아들들은 일반적으로 이시스)가 낳은 자손으로 알려졌다. 네 아들계에서도 최고의 권력을 갖지 못했다. 오시리스는 매일 밤 죽은 태양 아우프의 모습으로 지하세계의 12개 속주를 여행하면서 죽은 자들의 영혼과 얘기했으며, 그중에서 악한 자들의 영혼에게 훈계하면서 착한 영혼들에게 빛과 용기를 주었다. 또한 착한 영혼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의 슬픔을 몰아냈다. 죽은 자의 왕국에는 공기나 바람이 없었기 때문에, 오시리스는 착한 영혼들의 콧구멍을 열어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지상에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하 세계에도 착한 영혼과 나쁜 영혼이 있었다. 선의를 가진 장례의 신이 있는가 하면, 악의를 가진 장례의 신도 있었다. 라 또는 아우프는 괴물 같은 뱀의 모습을 한 악령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를 받아야 했지만, 새로운 날이 밝으면 항상 소생하였다. 지하 세계의 영혼들은 라에게 호의적이도 하고 때로는 라의 위협이 되기도 했으며, 초기에는 오시리스를 그러한 영혼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원시 시대 이후로 죽은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려면 반드시 시신을 보존해야 했다. 그래서 오시리스 전설이 태양 종교에 흡수된 초기부터 시체를 방부 처리하는 관습이 생겼다. 음식의 공급과 노예, 악령을 물리칠 수 있는 주문의 수집물과 함께, 이렇게 시체를 방부 처리해서 미이라로 만들면 죽은 영혼이 지하 세계의 열두 개 속주를 안전하게 통과해 영생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파라오에 대한 신앙에는 미이라의 모습으로 표현된 태양에 대한 신앙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파라오의 매장의식은 이제 매일 떠오른 태양 및 한때는 지상의 왕이었던 오시리스가 내세의 왕으로 부활하는 것과 결합되었다. 오시리스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 호루스가 왕위를 확립해야 했다.)이러한 오시리스 숭배가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6왕조 말(기원전 2258)에 중앙 집권 정부가 붕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앙 정부가 붕괴된 이후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지적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그때까지 믿고 있던심판관의 뒤에 서서 두려움이 없음을 상징하는 무드라(Mudra)의 자세로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이는 후네페르를 안심시키고 공적으로 그를 환영함을 뜻한다. 후네페르는 헬리오폴리탄의 아홉신(세트를 제외함)에게 경의를 표한다. 진리의 전당 입구와 출구에는 자칼 머리의 아누비스와 코브라 모양의 와제트가 지키고 있다.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은 시대가 지나면서 단순해졌으며, 그것은 내세 신앙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게 된 결과였다. 왕실밖에서는 과정이 복잡한 전통적인 매장 방법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신왕국에서는 더 이상 시체에서 내장을 제거하지 않았다. 카노푸스 단지는 형식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되었으며, 나중에 가서는 무덤에 단지를 아예 두지 않았다. 따라서 옆에 호루스의 네 아들의 인물상의 미이라를 두는 관습만 그대로 남게 되었다.시신을 방부 처리해 미이라를 만드는 장인들은 이시스가 오시리스를 미이라로 만드는 것을 도와 주는 신들의 역할을 했다. 이 신들을 인도한 것은 ‘아누비스’였으며, 호루스와 켄테크타이의 아들과 이 신들을 동일한 존재로 생각했다. 여자애도자들은 대개 죽은 자의 아내와 여자 친척들이었지만. 때로는 이시스와 네프티스)의 흉내를 내기도 했으며, 시체를 매장할때까지 돌봐 주었다. 원래의 오시리스 전설에 따르면 오시리스는 죽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시스는 호루스가 왕위를 되찾을 때까지 자신의 남편을 돌봐야 했다. 오시리스는 호루스가 자신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부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죽은 자의 친척들은 특별히 미리 정해진 의식의 모든 순서에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미리 정해진 애도 순서가 끝나면, 애도자들은 관을 들어서 무덤으로 옮겼다. 배에 실어 이끄는 썰매에 놓여 있는 관이 긴 행렬의 선두를 이끌었으며, 사람과 황소가 이끄는 썰매가 관을 실은 배를 끌었다. 관의 한쪽 끝에는 두 사람의 여자 애도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 여자 애도자들은 이시스와 네프티스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때로는 두 여신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에 뿔은 생식과 재생을 의미하며 두개의 깃털은 마트(진실)와 두땅(상·하 이집트, 즉 고귀하고 저급한 자아)의 통합을 의미한다. 곧게 선 코브라는 신체 내부의 두 힘 쿤달리니와 기에 대한 지배를 상징하며, 세 개의 태양 원반은 삼위 일체를 나타낸다. 세티와 토트 사이에는 두개의 용기가 놓여 있는데, 이 용기에는 정화를 위한 물이 담겨 있다. 그 위로 피어난 연꽃이 달린 식물은 재생을 상징 한다. 토트는 주제사장의 신분을 나타내는 흰색의 장식 띠를 가슴에 두르고 있으며, 상·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흰색과 빨간색 왕관을 각각 쓴 코브라가 감고 있는 두개의 장대를 들고 있다. 이 장대는 토트에서 비롯된 의학적 지식과 연관된 상징 카두세우스(caduceus))를 나타낸다. 또한 두개의 장대와 코브라는 쿤달리니와 기의 상승뿐 아니라 두 따의 통합을 나타내기도 한다. 토트는 앙크로 파라오의 입술을 건드려 파라오의 입을 열려고 한다.이러한 과정은 전수자의 몸 전체로 흐르는 우주의 호흡, 즉 신의 호흡을 생성한다. 신이 숨을 내쉬면 전수자가 숨을 들이마시고 전수자가 내쉬면 신이 들이마신다. 신성한 호흡 혹은‘바람’은 자발적인 소리(신의 발화 혹은 말)을 생성하고, 이는 다시 물질이나 형태로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전수가 완료되고 입이 열리면 전수자는 신과 더불어 창조자로서 신의 무리에 참여하게 된다. 마침내 라(Ra)가 승천하는것이다.에 나오는 입 열기 준문 23장은 다음과 같다.프타에 의해 내 입이 열리고 내 입에 걸려 있던 것이 신에 의해 풀려나도다. 실로 마법으로 가득 차고 무장된 토트가 나타나 내 입을 막고 있던 사슬들이 풀리도다. 아툼이 그들을 막고 세트의 억압을 풀어 놓았도다. 내 입이 열리도다. 슈가 신들의 입을 쪼개어 열었던 쇠작살로 나의 입을 쪼개어 열었도다. 나는 세크메트) 나는 하늘의 위대한 바람 속에 있는 ‘그녀’ 곁에 앉도다. 나는 헬리오폴리스의 영혼들과 함께사는 위대한 오리온이다. 나에게 반대하는 어떠한 마법의 주문이나 말도 신들이 일어나 막을 것이다.
    인문/어학| 2005.07.02| 14페이지| 1,000원| 조회(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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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역사]다빈치코드와 관련된 예수그리스도 논쟁
    목 차서 론1. 구세주ⅰ. 구세주의 기원과 등장 배경ⅱ. 구세주의 출현과 교훈2. 예수 그리스도ⅰ.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ⅱ.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ⅲ.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의문들결 론서 론다빈치 코드라는 현대의 소설안에서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들이 많이 깨어져 나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혹시 이것 역시 거짓임을 우리는 아직도 진실이라 믿고 있었는가?” 와 같이 기존에 존재하던 관념들에 대해 붕괴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심지어는 지금까지 2000여년 이상의 시간을 지배해 오던 종교인 가톨릭교의 모습에 대해서도 의문을 머금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관념이 무너지는 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다 빈치 코드’ 라는 책을 읽으면서 사물의 어떠한 것도 절대적 진실일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절대적 진실의 책이라 믿었던 성경조차도 책을 읽고 내려 놓는 순간 “성서 역시 어떤 세력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쓰여 진 책일 가능성이 있을 거야.” 라는 기존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생각들이 서슴없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든 의심의 눈초리를 들게 만든 다 빈치 코드 안에서, 역사의 시작이자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아에 대해서 알아보게 됨으로써 책의 내용이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먼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구세주’라는 관념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세주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이 형성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세주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역사적 상황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통해 오늘날 다 빈치 코드를 읽으면서 생겨난 물음에 대한 답을 해 나가고자 한다.1. 구세주ⅰ. 구세주의 기원과 등장 배경메시아) 사상의 기원을 찾는데 에는 초기 기독교의 모습에 대해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은 유태인들의패망의 원인이었던 것이다.이러한 유태인들이 다른 민족에게 착취당하고 그들 스스로의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을때 메시아 사상은 정치·경제적 억압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잡기 위해 이민족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겨났고,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던 것이었다.)ⅱ. 구세주의 출현과 교훈예수의 구세주의 모습에 대한 서술은 뒤에 예수그리스도에서 다루겠지만 유태 역사에 있어서 B.C.40년에서 A.D73년 사이에 출현한 유태 메시아들은 예수와 세례요한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5명에 이른다고 요세푸스)는 기술하고 있다. 즉 그들 가운데는 아트론가에우스, 테우다스, 펠릭스에게 처형된 익명의 ‘악당’, 유태계 이집트인 ‘거짓 예언자’ 마나헴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외 이름을 밝히거나 구체적인 묘사는 없지만 이들 이외에 다른 메시아들이나 메시아적 예언자들이 있었다고 요세푸스는 그의 글)에서 시사하고 있다. 이후 유태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적인 인물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바보 바르 코흐바(Bar Kohva:별의 아들)이다. A.D.132년 바르 코흐바가 20만군대를 조직하여 유태 독립국가를 수립했는데 이 국가는 3년 동안 존속되었다. 코흐바의 기적적인 승리를 목격하고 예루살렘의 랍비장인 아키바(Akiba)는 그를 메시아라고 찬양했다. 사람들은 바흐 코흐바가 사자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코흐바는 로마의 압제 상황에 있던 유태인들의 희망이자 메시아적 존재였다. 그는 유태 해방전쟁 사상 가장 용맹스럽게 투쟁했고, 가장 위험한 시대에 투쟁을 했다. 1개 로마 군단이 완전히 궤멸되는 희생을 겪고야 바르 코흐바를 진압시킬 수 있었다. 로마군은 1천여 유태인 부락을 뒤덮었고 50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했으며 수천명 이상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 후유증은 몇 세대에 걸쳐 남아 있었고, 그 쓰라린 고통을 당한 유태 학자들은 바르 코흐바를 원망하며, 자기들을 속여 조국을 잃게 한 ‘거짓의 아들(Son of a Lie)이라고 불렀다. 이런 점이 참 역사의 아이러니라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스가랴가 예언한 바로 그분입니다.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13:6]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 벌써 십자가를 의론하신 분이십니다.슥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요한이 증명한 그분이 예수십니다.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바울이 외친 바로 그분은 하나님 이십니다.히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 니라당신이 주장하신 대로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요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마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그분께서 다시 오십니다.[계1:7]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 옵소서ⅱ.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①.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에비온파와 알로기파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하나로 혼합된 제3의 성(性)이 되었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전과 같지 않다고 보았다. 그의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부정한 것이다.⑦.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일의설(一意說)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意志)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 제3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性, 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한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질(신성과 인성)과 두 의지를 고백한 것이었다.⑧. 양자설(養子說)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주후 2세기)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이며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818년 사망)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⑨. 속성 전달설다메섹의 요한(675-745년경)이나 루터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①?. 인성 중심의 기독론칸트(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인 윤리적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tin Martyr:약 150년경):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한 독생자, 하나님”*이레니우스(약185년경): “우리의 주, 하나님, 구세주, 왕”*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약200년경): “참으로 가장 분명한 하나님, 온 우주와 동등한분”②.예수의 반려자. 빌립 복음서는 “구세주의 반려자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다. 모든 제자들보다 그녀를 더 사랑한 그리스도는 그녀의 입에 종종 키스하곤 했다. 나머지 제자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그에게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들은 예수께 ”당신은 왜 우리들보다 그녀를 더 사랑합니까?“라고 말했다... 모든 아람 학자들은 당신에게 동료라는 단어가 그 당시에는 정확히 배우자라는 뜻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것이다.”(다 빈치 코드 2권 15-16p)-빌립복음서는 결코 아람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이 복음서는 이집트어의 후대 형태인 콥트어로 쓰여졌다. 그리고 이것조차도 아람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여진 초기 문서의 번역이다. 또한, 덴버 신학교의 그레그 블롬버그 교수에 따르면, “표준적으로 ‘동료’가 배우자를 의미하는 아람어나 히브리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카고 신학교에서 초기 교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교수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미첼에 따르면, 다 빈치 코드가 “일반적으로 친구 또는 동료로 번역되는” 그 단어를 “잘못 번역” 하고 있다고 한다.) ③.결혼에 대한 유대교의 견해. 예수가 결혼 남자였다는 것이 “예수를 성경의 관례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 보다 훨씬 이치에 맞는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유대인으로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다 빈치 코드 2권 14-15p)구약 시대의 남자들은 결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시대에 이르러 유대교는 결혼에 대해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일례로, 세례 요한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독신으로 믿음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나도다.
    인문/어학| 2005.07.01| 11페이지| 2,000원| 조회(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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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중세사]마녀 사냥 평가B괜찮아요
    《차례》-序 論-本 論1.2.①메시아니즘적인 입장에서의 접근②가톨릭 이론의 발전에 의한 원인과 단계 구분3.4.-決 論【참고문헌】序 論역사가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고 종교가 생겨나면서 여성의 위치는 점차 줄어들고 남성의 하위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것은 비단 가톨릭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여성들 역시 그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세에 대한 떠오르는 단어에 대해 하나 말하라고 한다면 대부분이 종교 즉 가톨릭을 말한다. 거기서 좀 더 자세히 종교의 어떤 부분이 기억이 남느냐고 물어본다면 십자군 원정과 마녀 사냥을 떠올린다. 그렇다. 마녀사냥.. 중세에 과연 무엇이 마녀를 만들었고 과연 중세는 어떤 세상이었기에 기독교에서 설명하는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마녀’라는 것이 존재하는 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들은 과연 정말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일반 사람들을 개·돼지로 변신시키고 일반 대중들을 미혹(迷惑)시켜서 그들의 군주인 사탄의 품으로 데리고 가는 전도사인지에 대해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마녀’라는 것이 중세의 암흑의 시기에 나온 특수한 존재들이었는지, 아니면 중세의 교회가 종교적 차원에서 그들의 권위를 보존하고자 만든 희생양이었는지에 대해서 본 논고를 통해 알아보고 중세의 거룩하고 종교적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완고했던 이 시기에 등장한 돌연변이이자 중세 교회의 이단아였으며 또한, 한편으로는 암흑의 시대에 등장한 빛이자 여성의 대표자라는 두 가지의 다른 평가 안에서 마녀사냥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本 論1.마녀사냥의 역사적 배경마녀사냥이 전개되던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진입이 이루어지던 유럽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전후(前後)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되어 나타난 마녀사냥의 역사는 대체로 15세기 초엽에서 18세기 말엽까지 약 4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간주한다.) 후기 중세에서 근세 초기에 걸쳐 일어난 마녀재판과 마녀사냥은 우발적이거나 돌연히 나타난 사건이 한 시기였다. 또한 이시기에 신학자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증오 그리고 오류의 대상으로만 여성을 바라 보게 되었고 이러한 사상은 중세초기부터 형성되어 중세의 전통적인 논리를 형성해서 여성은 단지 결함을 가진 비논리적인 존재로 간주했다. 여성의 역할에 있어서도 결혼을 통한 종족 보존이상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성의 무기력이나 불완전성에 대해 남성들이 묵인하고 관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여성을 열등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두 번째 단계는 15세기 말경에 나온 마녀 환상과 학설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로마 교황 인노첸트 8세(Innozens Ⅷ)가 1484년에 이라고 불리는 칙령 ‘줌미스 데시더란테스 아펙티부스’(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를 선포했다. 이 칙령이 내려질 때의 역사적인 상황은 근대로 전이되기 직전으로, 가톨릭이 타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혼란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패권에 도전하는 종교개혁은 이후로 20여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 의 특징은 본격적으로 마녀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에 이런 행위는 이단적인 것으로 정의되어 마녀는 이단의 죄목을 띄게 되었다. 이 문건은 처음부터 마녀 칙령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마녀에 관한 범죄행위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의 내용을 보면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단의 창궐에 대해서 경계하면서 유일한 가톨릭으로 통일되기를 염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이 추구하는 신앙의 통일과 사마리안 땅 끝까지를 전도해야 한다는 사명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지원과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모든 집단이나 종파를 제거해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이 선포된 1484년이라는 시점은 이단의 대부분이었던 카타러르와 발덴져 그룹이 제거 되었던 시기이다. 여기에서 마녀가 ‘새로운 이단적인 종파’)로 묘사된 것을 과 법원등에 있는 인퀴비지치온(Inquisition:수사,조사))의 재판방식을 따르게 된 근거가 되는 것이다.무엇보다도 국법으로 선포된 이 가 마녀사냥에 대해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을수 있었던 근거는 이 법전이 세속법전으로서 마녀사냥을 주도했다는 것, 그리고 마녀사냥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 요소였던 고문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고문을 법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마녀사냥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마녀사냥을 정당화시키게 되면서 그로인한 부작용이 적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마녀에게는 고문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독일에서 만들어진 이 법전이 마녀사냥에 끼친 중요한 영향은 마녀, 마술 등의 실체와 형벌을 법적으로 규정하여, 마녀사냥이 법전선포와 함께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3. 마녀의 기준과 대상앞에서 언급한 것 과 같이 성경과 유럽사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멸시를 당했고 여성에 대한 편견과 증오가 어떤 역사적 배경과 근거 그리고 논리를 가지고 형성되었는지를 보았다. 마녀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증오의 산물이다. 즉, 여성에 대한 편견과 증오가 사회적 위기에 대한 속죄양으로 바쳐진 것이 마녀이다. 사회적 위기의 전환용으로 마녀라는 ‘물건’이 불태워진 것이다. 여성은 곧 마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흔히 마녀로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는 무당, 박수무당, 산파, 요리사와하녀), 민간요법의사) 등이었고 일반인인 경우는 이혼녀, 나이 많은 미혼녀, 나이 많은 미망인 등 늙은 여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마녀의 많은 수가 50세가 넘은 여성이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젊은 여성도 사랑을 갈구하기에 마귀와 섹스를 하는 마녀가 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마녀로 몰기도 했다. 또한 다른 지방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남자의 부인 또는 감옥에 갇혀 있거나 자살을 한 남편의 부인들이 마녀로 몰려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녀의 특징이라고 간주되었던 외형적인 신체 조건으로는, 농루안(눈곱이 많이 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마녀사냥제도의 주된 결과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은 영주나 교황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단지 자기들이 마녀들이나 악마들의 희생양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러한 상황 안에서 당시의 일반 하층민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架空)의 적들을 상대로 국가와 교회의 종용 안에 힘찬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마녀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와 국가는 그 ‘마녀’들을 격퇴하려고 아낌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그 전투에 보여진 국가와 교회의 정열과 용감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마녀사냥의 지닌 실제적인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교회와 국가로부터,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假像)의 괴물들에게 전가시켰다는데 있다. 이 괴물들의 환상적인 행위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소외되고 영세화된 대중들은 부패한 성직자들이나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미쳐 날뛰는 마녀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교회나 국가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대중과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들이 되었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도처에 흩어져 있지만 간파해내기 힘든 적들로부터 인류를 보호해주는 위대한 보호자로 등장했다.그렇다면 당시에 문헌상에 등장하는 과연 마녀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유럽의 마녀 연구 역사가인 챨스 헨리 리어(Charles Henry Lea)가 수집한 수백 개의 기록들 가운데 전형적인 사례를 살펴보면서 설명하겠다).독일의 오펜버그(Offenburg)에서 1601년에 있었던 일이다. 방랑 여인 두 사람이 고문에 못이겨 자기들이 마녀라고 자백한 사건이다. 악마의 연회에서 본 사람을 대라는 협박에 그들은 빵 제조업자의 아내 엘제 그빈너의 이름을 불었다. 엘제 그빈너는 1601년 10월31일, 수사관들 앞에 끌려 갔지만 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불필요한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세계는 여전히 상흔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15세기의 유럽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수 차례의 반란을 경험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자의식은 커졌고, 경제는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으며 도시는 한층 더 활기를 띄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은 성직자들과 그들의 왕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마녀사냥’이었다. 마녀사냥은 생산력이나 노동력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 지배자들의 이익과 탐욕에 의한 산물로서 사회가 부양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정신이상자들을 주 대상으로 마치 쓰레기를 청소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로마의 고대 관습에 따르면 노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동일시 했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노예가 병이 들거나 더 이상 노동을 시킬 수 없을 만큼 늙어 버리면 그 노예는 산이나 길에다 갖다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노예를 사오거나 잡아오면 되었다. 또한 노예에게 결혼을 금지시켰던 것도 노동력을 잃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유럽에까지 전해졌고 노동력이 있는 가, 없는 가로 사람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버렸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노동력을 얻을 수 없는 늙고 병들고 힘없는 여자들과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을 마녀로 처형해 버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마녀’라는 본보기들을 통해 사람들을 좀더 수월하게 교회와 국가의 발 아래 두고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마녀사냥’에 관한 역사는 비단 유럽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 속 에서도 ‘마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체제유지와 정부의 집단적인 권력 앞에 희생양으로 사라진 많은 ‘빨갱이’들이 존재한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일반 사람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갈 때 마다 등장하는 이러한 역사 속 희생양들이 더 이상은 생겨나지 않았으면 한다.【참고문헌】오성근 저, 『마다.
    인문/어학| 2005.07.01| 11페이지| 1,000원| 조회(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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