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沖과 私學2008학년도 2학기 고려시대사Ⅰ. 최충1. 생애 요약2. 역사적 평가Ⅱ. 사학1. 설립2. 운영3. 쟁점- 타 논문과 비교하여Ⅲ. 참고 문헌< 目 次 >Ⅰ. 최충1. 생애 요약최충의 자는 浩然, 호는 惺齋, 月圃, 放敏齋 이다. 私學 12徒의 하나인 文憲公徒를 창시했다. 해주(海州) 의 대령군(大寧郡) 출신으로 목종 8년에 지공거 崔沆의 문하에서 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에 이르기까지 주요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이 되었다. 풍채가 웅위하고 성품과 지조는 견결하고 올곧았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읽었다 한다.)『고려사』열전에 기록된 그의 업적을 몇 개로 요약해 보았는데, 첫째는 『설원(說苑)』)의 「6정 ? 6사」)의 글과 한나라 자사(刺史) 6조의 령)을 여러 관청에 다시 써붙이자는 건의를 왕에게 올린 것이다. 둘째는 영원진(寧遠鎭)), 평로진(平虜鎭)) 등의 진과 보루 열 네 개를 설치한 공이며, 셋째는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되어 율령(律令)과 서산(書算)을 연구하여 제도를 정한 것이다. 넷째는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임명된 후 왕에게 백성들을 위해서 토목공사를 일절 금지하자는 건의를 올린 것이며, 다섯째는 동여진(東女眞)족들의 억류를 풀어 자칫 불행의 싹이 될만한 문제를 잘라낸 점이다.)『고려사』열전 최충조에 기록된 최충의 공적들을 통하여 그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는 일단 훌륭하고 도덕적인 관료였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6정 ? 6사」를 써붙여 기강을 바로 잡은 일화라든지, 토목공사를 없앰으로써 백성들을 살피고 악재에 유연하게 대처한 그의 덕치(德治)를 보면, 정치가로서의 애민정신을 높게 살 수 있겠다. 특히 이 『설원』의 저자인 유향은 경술을 깊이 연구한 한의 유학자이자 관료로서 자주 封事를 올려 時政을 논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다시 쓰자고 했던 최충은 성종대부터 제창되어 오던 유교정치이념이 퇴색되었다고 여겨 새롭게 유교정치이념을 환기시킬 필요를 느꼈던 학자였을 것이다., 47세 太子右諭德덕종원년(1032) 1월, 49세, 右算騎常侍)3년(1034) 7월,51세, 刑部尙書 中樞使정종2년(1036) 1월, 53세, 知貢擧로 金武華 등 4인을 취함3년(1037) 7월, 54세, 參知政事, 修國史로 됨7년(1041) 10월, 58세, 尙書左僕射, 參知政事, 判西北路 兵馬使 內史侍部平章事9년(1043) 2월, 60세, 守司徒 修國史 上柱國문종 원년(1047) 64세, 門下侍中)3년(1049) 2월, 66세, 守太保4년(1050) 1월, 67세, 守太傳9년(1055) 7월, 72세, 內史令으로 致仕, 九齋學堂 설치, 海東孔子로 추앙됨22년(1068) 9월, 85세, 守太師 中書令 致仕, 9월 15일 卒, 시호는 文憲2. 역사적 평가무엇보다 가장 강조되는 최충의 업적은 바로 학당을 세웠던 점이라 하겠다. 현종 이후 전쟁이 겨우 멈추었으나 문치(文治)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는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하여 최충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자 배우려는 무리들이 모여들어 거리를 메우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최충의 교육 사업은 곧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과거 볼 사람은 저마다 먼저 그의 무리 안에 속하기를 원하였으며, 이 무리(徒)를 모방하여 개경에만도 11개, 합하여 12개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게 되었다. 이를 사학 12도라고 일컫는데, 그 중에 최충의 학당이 가장 으뜸이었고, 海東孔子로 칭송받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문종이 최충을 극도로 신임하여 그가 퇴직한 후에도 국가의 대소사를 문의하곤 하였다. 그의 활동과 학문은 『고려사』열전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견주어 설명되고 있고, 심지어 최충 당시의 고려 조정을 舜과 周代의 왕실로, 최충의 역할을 순과 주대의 어진 신하의 역할로 평가하고 있다.그러나 고려 ? 조선조를 거쳐 그는 문묘에도 종사되지 못했고 서원에도 온전히 배향되지 못했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최충이 性理를 말하지 않고 科擧만을 업으로 하였다고 허물삼았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능화(李能和)에 의해 최충에 대한 평가와 공도(弘文公徒:熊川徒)정배걸(鄭倍傑)광헌공도(匡憲公徒)노단(盧旦)남산도(南山徒)김상빈(金尙賓)서원도(西園徒)김무체(金無滯)문충공도(文忠公徒)은정(殷鼎)양신공도(良愼公徒)김의진(金義珍)정경공도(貞敬公徒)황영(黃瑩)충평공도(忠平公徒)유감(柳監)정헌공도(貞憲公徒)문정(文正)서시랑도(徐侍郞徒)서석(徐碩)귀산도(龜山徒)미상어째서 이렇게 많은 徒들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그 배경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게 된다. 『고려사』최충 열전을 보면 ‘현종 이후에 干戈가 겨우 멈추었으나 文敎에는 겨를이 없어)’ 최충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자 배우려는 무리들이 모여들어 거리를 메웠고, 과거에 응시하는 자제는 반드시 먼저 공도에 들어가 공부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현종 때의 거란과의 전쟁 이후 고려사회는 전후 복구사업과 당면한 국가 시무로서 교육에는 크게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자감 교육이 활성화되지 못하였고 이에 최충의 사학이 필연적으로 대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한국사』에 따르면 국자감에서의 교육은 주로 경학 대상이었는데, 당시의 과거 주류는 진사과로서 과목은 시 ? 부 ? 송과 시무책이었다. 따라서 귀족 자제들은 과거와 직접 관계가 없는 경학을 배우기 위하여 국자감에 소속되어 구속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가숙이라든가 독학을 원했을 것이고, 이러한 시대상에서 당시 대대로 儒宗이라고 추앙받던 최충이 사학의 문을 열자 학생들이 운집한 것은 당연한 추세였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또한 관학의 교수보다 사학의 교수진들이 학식과 교양면에서 월등하였고, 사학설립자들이 과거시험관인 지공거 출신이었기 때문에 특히 座主門生)의 특별한 인맥적 관계도 사학의 발달을 가속화 시킨 동력이라 하겠다.)한편, ‘徒’에 관해 살펴보면 徒는 원래 결사단체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申采浩는 신라의 花郞徒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본다면 徒의 성격은, ①조직적이며 계획적인 私設學塾 ②유학의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전통적으로 유지, 계승된 하나의 학벌 것으로, 9개의 앞의 글자 낙, 대, 성, 경, 조, 솔, 진, 태, 대를 동사나 형용사로 보고, 뒷글자 성, 중, 명, 업, 도, 성, 덕, 화, 빙을 명사로 목적어로 볼 수 있겠다. 또 다른 하나는 유학의 경전에서 9재학당의 명칭의 출처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의 분석에 따르면, 9재학당의 이름은 유가의 여러 경전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며, 아무래도 최충이 경학에 밝았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후자의 학설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9재의 명칭을 분석함으로써 교수철학이나 방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아울러 9재는 단계적인 수직관계가 아니고 횡적으로 연결되는 동일 교육수준으로 단지 재명만 달리하여 교육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한편, 사학의 교육방법도 주목할 만하다. 교육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는데, 위에서 잠깐 언급한 하과(夏課), 각촉부시(刻燭賦詩), 신급 제자를 교관으로 등용하는 조교 제도이다. 하과는 사원 승방을 빌어 산수를 노래하는 하기 강습회로, 사찰을 정하여 시부를 짓고 주연을 베풀면서 유생들간의 유대와 학습을 한 것이다. 이는 사찰이 한적한 장소라는 공간적인 이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교문화권의 소산이기도 하다.) 이 명칭은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都會라고도 불리고 있다. 각촉부시는 속성 시짓기 시험으로 모의 과거시험과 같은 성격을 띠었다. 촛불에 금을 그어 시 짓는 내기를 하고 그 시는 차례대로 방(?)을 내어 이름을 부르고 들어가서 종일토록 시 읊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술자리가 베풀어졌다고 한다. 세 번째 방법은 과거에 새로이 합격한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기 전에 학교의 교사로 채용한 것으로, 과거에 필요한 정보들을 학생들이 많이 접할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이상에서 볼 때, 유학교육의 진흥과 관리양성을 주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사학 12도는 유학적 품성과 소양을 갖춘 관료의 배양을 주도하였고 이에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으로 전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3. 쟁점- 타 논문과 비교하며대대로 儒宗으로 존경받았던 최충12도 교육의 성과에 대하여 고려 말의 이제현은 ‘위로는 公卿嫡庶로부터 아래로는 州縣擧者에 이르기까지 모두 九齋籍中에 이름을 걸고 성인의 도를 익혔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점점 과거시험 합격자 양성기관으로 변질되게 되었으니, 오히려 관학에 도전하는 형태로까지 되어 나중에 식자들 사이에는 국자감 무용론까지 대두하게 되는 것을 보면 최충의 사학은 그 목적과는 분명 맞지 않는 방향으로 점차 나아갔던 것 같다.그런데 김일환의『최충 사학의 교학정신에 관한 연구』에서는 이와 다른 입장을 설파하고 있다. 최충의 9재학당 및 12공도의 교육은 과거준비를 위한 예비교육의 성격도 있었지만, 고려유학의 부진을 딛고 초중기 유학의 경향인 經學와 文學儒에 치중함으로써 관학과 더불어 유교적 관념의 생산기관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학 역시 관학과 마찬가지로 시부의 사장학을 주로 한 과거시험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극명한 한계가 아닌가 싶다.최충의 9재학당이 9경3사를 주요 교육내용으로 하면서 詩賦詞章의 學을 겸비하고 있었다는 말은 그 우위가 흔들릴 경우 순수한 초기 목적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전하게 되었다는 말로 들린다. 김일환은 그의 논문에서 ‘사학 12도는 예 ? 인종대의 견제 속에서도 고려유학발전의 도화선 역할을 담당하였고 …’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예 ? 인종의 관학부흥 ? 진흥책의 실시를 ‘견제’라고 치부하는 것은 조금 위험스럽다. 사학이 관학의 목적을 대신하려 든다면 국가의 전반적인 낭비를 초래할 뿐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좌주문생 등 과도한 인맥관계가 자칫 부패와 부정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학은 공양왕 3년(1391)에 고려의 국운과 함께 停廢되고 만다.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최충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현대 교육과의 관계이다. 최충은 9재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에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이 점은 오히려 최충의 사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실 9재에서의 교육은 철학적인 ‘窮理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