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의 역사History of homosexuality요 약유명 연예인이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다던가 점점 규모가 커지는 동성애자 모임, 동성애자에 관한 법안마련등을 보면 동성애자에 대한 관심을 한번쯤 가져보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흔히 동성애는 우리들에게는 사회에서 금기시되며 약간은 협오적이라는 인식이 대다수이며, 이반,레즈라는 표현을 통해 동성애자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동성애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으며 심지어 신성시 되는 시대도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런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동성애의 역사와 인식변화등을 살피고 각나라별로 비교분석도 할것이다. 또 나아가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큰 편견은 무엇이며 우리는 동성애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것인가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키워드 : 동성애, 동성애의 역사. 호모, 이반목 차Ⅰ. 서 론1. 동성애란?21) 동성애의 정의22) 동성애의 어원2Ⅱ. 본 론1. 동성애의 시작32. 국내외 역사속의 동성애31) 국내32) 국외53. 동성애 허용의 역사74. 동성애 억압의 역사85. 동성애 운동의 역사96. 오늘날의 동성애101) 국내102) 국외 11Ⅲ. 결 론- 동성애에 대한 편견12Ⅰ. 서 론동성애, 영어로 호모섹슈얼리티(homosexuality)) 누구나 한번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 이다. 특히 서양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 동성애에 대해 아주 패쇄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런 이유에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법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듯 사회 내에서 밝히길 꺼리고 왠지 음지 속에 묻혀가고 있는 듯 한 이 동성애가 과거에는 어땠을까? 과거에도 수많은 동성애 사례가 있었으며 심지어 로마시대에는 신성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 편견에 사로잡힌 채 막연히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대다수이다. 동성애자에 대해 좋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로 보기 까지 하였다. 도덕적인 윤리 판단 근거가 없었던 인류 초기에는 생식과 분리된 동성애적 성 행위가 비난을 받지 않고 행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이것이 인류 동성애의 시작이다.2. 국내외 역사속의 동성애1) 국내신라시대에의 화랑의 남색풍습은 고대그리스처럼 공공연하게 묵인 내지는 찬양되었다고 한다. 우두머리급인 화랑은 3~4명밖에 없었고 이들은 주요 의식 때 여자처럼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화려한 치장을 하였으며 이 화랑 밑에는 낭도들이 수천 명씩 있었다. 또한 이 낭도들은 화랑을 죽을 때까지 따랐다. 때때로 화랑이 거느린 낭도들의 화랑에 대한 사랑은 존경심을 넘어 사모의 감정에 가깝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화랑과 낭도들은 늘 같이 생활하였고 전국의 강과 산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항상 같이 생활하여 같은 남성들 사이에서 동성애적 행위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씌어져 있다). 또한 서기 785년 원성왕 때의 묘정이란 남성은 용모가 매우 출중해 그 당시 고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남자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첩이 되었다하며 심지어 당나라 황제에게까지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다음으로 같은 신라 시대의 36대왕 혜공왕이 있다. 혜공왕은 어려서부터 여자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며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여자처럼 했다. 왕위에 올라서도 늘 미소년 근위대들과 어울려 놀았다 하여 신하들이 불길하게 여겨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고려 7대왕 목종은 19세 때 즉위하였지만 모후와 김치양의 권력독단으로 정권에서 소외돼 정사를 멀리하고 남색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목종이 가장 총애했던 유행간은 인물이 매우 아름다워 왕의 신임을 받아 정사를 도맡았다. 목종은 항상 유행간에게 정사를 의논하였고 유행간은 권력을 마구잡이로 이용했다. 또한 유행간은 유충정이란 인물을 소개시켜줬는데 유충정 또한 용모가 매우 수려하여 왕이 총애를 받게 되었고 이 두연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동(美童)미남자 등이 주로 춤과 곡예 등을 보이는 가부키가 등장하였고 여기서 이들은 공연과 더불어 남색을 파는 일이 생겨 남색이 유행하였다. 중국에서도 불과 19세기 전까지 동성애는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졌다.①소크라테스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자의 동성애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하나의 통과의례이기도 하였다. 또한 어린 소년과 성인 남자 사이사랑이 진정한 사랑으로 여겨졌으며 일반적으로 행하여졌던 소년애 또는 동성애가 당연히 되었다. 그중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미청년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했던 동성애자였다. 소크라테스는 미소년들을 좋아하였고, 언제나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말하는 것을 즐겼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로 너무도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에로틱한 동성애적 열정을 찬양한 인물이었다. 연상의 남자가 미소년에게 느끼는 에로틱한 열정은 신성한 광기에 속하며, 그것을 통해 아름다운 소년의 성숙한 연인이자 진정한 교사요, 다정한 친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여느 고대 그리스인처럼 남색을 지지했다. 오늘날 남색이란 말은 계간 또는 비역이라고 일컫는 남자끼리의 성행위를 뜻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성인과 사춘기를 지난 소년 사이의 성교를 의미했다. 교육을 마친 미소년이 나이든 남자에게 인계되면, 그 남자는 소년의 도덕적 완성을 위해 사랑으로 그를 돌보는 것이 남색관계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소년들의 연인이었을 뿐 아니라 동성애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 논리를 개발했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동성애자로 손꼽히는데 이것은 그 시대에 동성애의 대한 인식의 영향 덕분이다.②사포고대 그리스에 유명한 여류 시인 사포는 동성인 여성에 대한 사랑의 노래에 대한 많은 시를 남겼으며 현재 여성 동성애자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포는 소녀들을 사랑했다. 그녀의 고향인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된 말이 레즈비언(여성 동성애자)이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는 제자였던 한 소녀와 동성애 끝에 바나 동성애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허용되었던 역사적 시대와 나라가 있었다. 우선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했고 당시에는 플라톤, 소크라테스 등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이 있을 때이다. 이들은 동성애를 인간의 가장 수준 높은 형태의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나이든 남성과 젊은 남성사이의 구조적인 관계에서 동성애는 그 사회에서 당연시 여겨졌고 인정받았다. 나이든 남성은 어린소년애인을 얻어 군사적인 동지와 동시에 함께 잠자리를 하는 일종의 파트너였다. 이 어린소년들은 성장하면서 나이든 남성에게 보고 듣고 배우며 성장한 그 소년은 다시 어린소년을 애인으로 구하는 것을 되풀이 하였다. 그리스 몰락후 로마인들에 의해서도 동성애는 허용된다. 특히 유명한 것으로 테배의 신성동맹이며 이것은 남성 군사 커플들의 에로틱동맹이었는데 사랑하는 사람끼리 뭉쳐진 이 군대의 힘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이 시대에는 이러한 행위 자체는 그 사회를 습득하는 사회성으로 인식되었고 동성애자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남부 수단의 아잔데(Azande) 족의 전사(戰士)들은 성적욕구와 군사 기술의 전수를 위해 남성끼리의 동성애가 이루어졌다고 한다.)암흑의 시기라 불리는 11~12세기 중세유럽에서조차 상류 사회에서만 한해 동성애)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성인간의 동성애 관계는 선호되지 않았고 오직 나이차가 있는 동성애 관계가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그리스와 같은 연장자와 젊은이 사이의 동성애관계가 기원전인 주왕조 때부터 존재하였다고 문헌에 기록 되어 있다. 중국내 유교사회에서 연장자들은 ‘의붓형‘ 또한 젊은이들은 ’의붓동생‘으로 불리면서 남성들 간의 성적인 관계는 흔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동성애 관계에서의 여성역할을 하는 남성들의 성전환적 행동들의 기록은 흔하게 나타나 있으며 명왕조 시대의 문헌을 보면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문화로 규정짓고 있다. 이들에게서 동성애는 남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다른 남성에 대한 욕망이 생기처럼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에이즈의 관련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이 원인 불명의 질환을 동성애를 단죄하기 위해 신이 내린 역병이라고 믿었으며 동성애에 대한 협오감은 늘어만 갔다.5. 동성애 운동의 역사동성애 운동은 19세기 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동성애 모임자체라는 것이 없었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 사회의 동성애자들은 자기들만의 단체를 이루었으며 자신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운동을 해나가고 있다. 동성애 운동이 태동한 시기는 1871년 독일 형법에 동성애 금지조항이 추가되었을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것을 폐지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인근 네덜란드나 오스트리아 등지로 뻗어나갔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이 단체의 운동은 중단되고 만다.유럽 국가 중 영국에서는 1914년 동성애 관련 계몽 운동의 성격을 띤 영국 성심리학 연구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나치의 동성애 탄압은 유럽전체의 동성애 운동을 시들게끔 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미국에서는 동성애 운동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최초의 남성동성애자단체인 마타신 소사이어티와 여성동성애자단체인 빌리티스의 딸들이다. 이러한 동성애 단체들은 차츰 사회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그리고 1969년 6월에 미국에서 일어난 스톤웰 항쟁으로 동성애 운동에서는 가장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운동은 스톤웰(Stonewall)이라는 게이 바에 경찰이 습격해 몇몇의 동성애자들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사회에서는 주변인이었던 동성애자들이 경찰에 적극적으로 맞서서 계속 저항을 했으며 다음날 시위가 재연되어 또다시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것은 동성애 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어 전 세계에서 이 스톤웰 항쟁을 기념해 게이 프라이크라는 동성애 운동을 매년 하고 있다.이 스톤웰 항쟁이후 미국 내에서는 더 많은 동성애 단체가 구성되었으며 동성애자들은 좀 더 자신 있게 사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