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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제이론들에 대한 고찰
    1. 프랑스 혁명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삼은 이유와 방향성.프랑스 문화사 수업을 들으며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았던 부분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근?현대사에서 프랑스 혁명이 갖는 독보적 위치와 상징들을 새로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내게 프랑스 혁명이란 단지 대단한 사건에 불과했으며 그것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프랑스 혁명에 관한 연대기적 서술은 충분히 배웠기에 좀 더 심층적으로 알아보고 싶었다. 혁명에 관한 연구에 있어 여러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업 시간에 소개되었던 역사가들이 혁명에 관한 연구에 있어 큰 의의를 갖는 해석론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혁명에 관한 여러 해석을 공부하면서 특히 퓌레를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을 생각해보고자 하였다.2. 영?미 역사가들의 수정주의 해석.프랑스 혁명사 연구는 크게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으로 나뉜다. 정통주의 해석의 길은 조레스가 열었으며 그 후 마티에즈, 르페브르, 소불, 보벨 등이 정통주의 해석을 따랐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혁명사강좌 개설은 교수들에게 그 분야의 연구를 개척케하는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한 세기 이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혁명사의 과학적 서술 시도한 역사가들의 결과물이 정통적 해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한 세기 이상 프랑스 혁명 연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정통적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혁명을 해석함에 있어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해석하지 않았다.정통적 해석에 대한 공격은 「장기 지속(la longue duree)」에 관한 논문을 썼던 브로델과 「변화 없는 역사」를 썼던 르 로아 라뒤리에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장기 지속의 관점에서 대혁명은 장기 지속적 편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로델과 르 로아 라뒤리의 견해는 서 기인한다. 또한 그는 제헌의회와 국민공회 의원들의 직업을 조사하여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장한다. 한편 미국의 테일러는 구체제 하의 부(富)를 자본주의적인 것과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혁명 전 프랑스 사회의 재산에 대한 선호도에 대한 검토를 통해 토지 등 비자본주의적 부에 속하는 전통적인 재산소유가 80%에 도달한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귀족과 부르주아는 경제적으로는 단일집단을 이루고 있었기에 프랑스 혁명을 사회 혁명이 아닌 정치 혁명에 국한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영?미에는 산업혁명 이후 산업 사회에서 비로소 통용되던 부르주아 개념만이 존재했으며 그들에게 18세기 프랑스에서 통용되는 부르주아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용어의 개념에 있어서의 오류가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 아닌 것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또한 코반의 경우, 그의 대혁명에 대한 해석은 일종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에서 기인했다는 의심을 살만하다.3. 엘리트론.수정주의의 도도한 흐름은 프랑스 내에서도 일어났는데 대표적 인물로서 리셰와 퓌레를 들 수 있다. 이들 역시도 프랑스 대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였고 리셰와 퓌레는 대신 ‘엘리트론’과 ‘일탈론’을 들고 학계에 등장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코반의 그것과 달리,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 계급의 실체를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적 레닌의 견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도의 중심에 있는 ‘엘리트론’과 ‘일탈론’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1969년 리셰는 혁명의 주체세력으로서 자유주의적인 귀족을 중심으로 부유한 제 3신분 즉, 부르주아 상층을 포함한 엘리트가 형성되었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엘리트론’의 출발이었다. 토지재산과 부 그리고 재능을 포섭한 일부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는 계몽사상과 자유주의에 의해 정치적 유대감을 갖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은 이것의 발현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리수 투표와 신분별 투표에 관하여 귀족들이 보인 입장을 명쾌히 설명하진 못하였고 결국 ‘엘리트론’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프랑스 혁명 연구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그 책들의 어느 부분에서도 ‘엘리트론’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적용 가능한 논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내가 읽었던 혁명사에 관한 연구들이 한 세기 이상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누구도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하여 이 ‘엘리트론’을 지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금기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입장에서 감히 대(大)역사가들의 수준 높은 의견이나 논쟁을 비판하는 것은 외람된 행동일지 모르나 일종의 감상적 의견은 피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주의 왕정이 성립되며 귀족은 기존의 정치적 특권을 잃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절대주의의 상징을 공격하여 그들만의 앙시앙 레짐으로의 복귀를 꿈꾸었다. 또한 상층 부르주아 역시도 점점 증대해가는 경제력에 비례하는 정치적 권력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이 둘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절대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권력은 왕에게 귀속되어 있었고 따라서 권력의 탈취는 그 상징적 존재인 왕을 공격함으로서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공유했던 계몽주의 사상 또한 그들을 결속시키는 데 있을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즉, 두 집단의 연대는 상호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동일한 목적과 목표를 갖고 행동하게 된 것이다. 머리수와 신분별 투표에서의 귀족들이 보인 행동으로 인해 치명적 결함을 갖게 된 ‘엘리트론’의 한계는 ‘엘리트론’ 내에서 거론되는 귀족들의 한계 때문이다. 삼부회의에서 성직자와 귀족 집단에서 자유주의적 귀족은 분명 그 집단을 주도한 세력이 아니었다. 성직자와 귀족 집단의 주도 세력은 부르주아와 권력을 나눠 갖을 준비가 되지 않은 그룹이었다. 결국 이론 전개에 있어 명백히 자유주의적 일부 귀족이라고 국한한 ‘엘리트론’이 머리수, 신분별 표결 논란으로 한계를 갖는다는 었다. 자유주의적 귀족들 중에는 대체적으로 몰락 귀족, 달리 표현하자면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이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현 체제 대한 불만이 보다 컸으며 새로운 사상에 좀더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상층 부르주아와 보다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반면 경제적 부를 유지하고 있던 귀족은 앞서 언급한 부류의 귀족과는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쇼시낭-노가레는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반적인 귀족이 상층 부르주아와 유대를 형성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엘리트론’이 더 비판 받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4. 일탈론.나는 ‘엘리트론’보다 ‘일탈론’에 대해 더 흥미를 느꼈으며 또 동감한다. ‘일탈론’의 전제는 1789년의 혁명이 세 가지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통적인 해석 역시도 1789년의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 ‘도시 혁명(다른 말로 파리 혁명)’, ‘농촌 혁명’으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정통주의 역사가들과 수정주의 역사가들의 차이점은 엄연히 존재한다. 정통주의 역사가는 위의 세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테두리 내에서 파악하였고 퓌레는 ‘부르주아 혁명’을 부정하며 이것을 '엘리트론‘에 입각하여 ‘의회 혁명’이라 규정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게 되며 나아가 앞서 언급한 세 혁명은 단일적인 것이 아닌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삼부회의 결렬로 나타난 테니스 코트 선언은 분명히 ‘의회 혁명’이었다. 이에 루이 16세는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네케르를 해임하고 군대를 파리와 바스티유에 주둔케 한다. 하지만 개혁적인 기대와 달리 흘러가는 정국과 상주한 군대에 불안함을 느낀 파리 시민은 ‘파리 혁명’을 일으킨다. 파리 시민들에 의해 힘을 얻는 의회는 이후 권력을 장악한다. 반면 ‘농민 혁명’은 대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퓌레는 이 세 혁명이 각기 독립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 주장에 대해 절대적으로 동조하진 않는다. ‘파리 혁명’의 발발이 무력해진 의회를 되의 위기였고 이를 파리 시민이 좌시하지 않은 측면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회 혁명’과 ‘파리 혁명’은 독립적이지 않았으며 우연한 결합이 아닌 그 토대부터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강했다.1790년의 무난하고 안락한 시기를 거쳐 1791년 왕이 망명을 시도한 바렌 사건이 일어난다. 89년 혁명의 성공을 통해 어느 정도의 질서를 확립하고 개혁을 추구했던 의회는 결국 바렌 사건을 통해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그들에게 있어 왕의 망명 시도는 정치적 명분에 커다란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렌 사건을 계기로 정치는 분열되었고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던 훼이앙파가 일시적으로 정계를 재편한다. 하지만 필리쯔 선언으로 시작된 외부의 반혁명 세력과 아시냐의 가치 폭락으로 발생한 내부적인 소요에 결국 1792년 2차 혁명이 발생한다. 결국 훼이앙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주도권을 자코뱅에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퀼로트 집단이 왕의 퇴위를 요구하며 뛸레르 궁을 습격한 것이다. 퓌레는 여기서 혁명은 일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정통주의 해석보다는 퓌레의 이러한 견해에 더 끌렸다. 1792년 이전에 진행되던 혁명과 이후의 상황은 판이하게 달랐다. 정통적 해석에서 지적하고 퓌레도 수긍한 대내외적 반혁명 세력에 기인한 측면이 매우 강하지만 분명 혁명은 일탈하였다. 1792년 이전의 혁명은 의회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고 그들은 민중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며 그들의 정치?경제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입헌군주제를 통해 다시금 권력을 탈취 혹은 얻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부르주아적 가치를 정립했던 것이다. 하지만 1792년 이후 그들이 제정한 헌법, 법률을 살펴보면 그것은 부르주아-‘엘리트론’에서의-들의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주도 하에 혁명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혁명은 민중의 요구에 휘둘린 것이다. 이를 두고 퓌레는 민중독재라 하였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들은 표현-매우 적합하고도 유려한 표현이라 생각한다-이었다.
    인문/어학| 2006.12.18| 4페이지| 1,000원| 조회(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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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의 소외집단과 섹스
    1. 중세의 시대 상황중세에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온 주제들이 있다. 당국과 일탈세력간의 알력, 공동체와 개인주의간의 갈등, 물질주의와 정신주의간의 대립, 그리고 성애주의와 금욕주의간의 긴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중세는 설명함에 있어 교회 혹은 종교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가 아닌 하나의 권력집단으로 존재했으며 세속인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중세를 관통하는 교회와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이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언제나 같았던 것은 아니다. 사상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앞서 언급한 두 가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사회에 투사된다. 봉건적 유대 관계가 출현하고 문명사회의 가치와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수도원 공동체가 결집하던 중세 초는 기본적으로 공동체 중심의 사회였다. 하지만 경제적 번영을 통해 새롭게 생각하고 실험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의 폭이 넓어졌고 12세기 르네상스는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 개체적 인간을 발견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 기존의 성직자 제도를 우회하여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도는 곧 이단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단은 자체적 공동체 가치와 집단적 가치를 표명했으므로 중앙집권적인 교회 당국에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경제적 번영과 개인주의의 출현은 물질주의와 탐욕, 야망 등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개인주의, 물질주의의 출현은 곧 성애주의와 연결되었으며 반대로 이에 저항하며 청빈한 생활과 개인적 금욕을 통해 천년 왕국에 대한 믿음을 발현했던 세력도 존재하였다. 즉, 12세기 르네상스를 거치며 기존의 질서는 준동하였다. 13세기에 이르면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원칙에 입각한 단일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중앙집권화된 권력체로 발전한 교회와 세속 당국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탈과 무질서를 조직적으로 탄압한다. 일탈 세력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은 이단자, 마녀, 유대인, 창녀, 동성애자, 문둥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탈 세갖고 기독교 처녀들을 탐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이들은 왜 일탈자로 간주되었으며 탄압을 받아야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샌더 L. 질맨의 견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혼돈스런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고, 자아를 규정하고, 공포를 규정하는 한 방법으로 정형을 꼽았다. 따라서 기존 사회 구조나 현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대한 위협은 그 위협을 구체화한 부정적 정형의 창조를 자극한다. 정형은 곧 차이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차이는 질서와 통제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 즉, 중세 사회에서 인종적 소수파인 유대인, 이단자들과 죄악의 질병을 앓는 문둥이, 성적 소수파인 동성애자, 창녀는 기독교도이면서 건강하고 이성애적 사람으로 규정된 자아에 대한 위협물로 인식되었다. 결국 이들에게는 치욕의 배지가 주어지고 사회로부터 단절, 격리 당한다. 더불어 단순한 단절, 격리에서 나아가 어수선한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2. 중세에서의 섹스앞서 언급했듯이 중세의 일탈 세력의 공통분모인 섹스였고, 일탈 세력의 본질과 그들이 받은 대우 등을 말하기 위해서는 중세에서 섹스가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중세에서의 섹스에 대한 관념을 소개하고 섹스가 어떻게 일탈 세력과 연결, 적용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한지에 대해 써보겠다.기독교는 애초부터 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지닌 종교였다. 기독교 사상가에게 섹스는 종족 번식을 위해 필요하지만 영적 완성을 추구라는 인간의 참된 소명을 방해하는 즉, 섹스는 일종의 필요악이었고 이러한 사고는 곧 민중을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섹스에 대한 규제의 기본적 수단으로 교회는 결혼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다. 교회에 있어 결혼은 성욕을 규제하고 간음을 극복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부부간의 섹스에 대해서도 엄격하여 성행위가 가능한 시일이나 기간을 정하였으며 성행위 시 복장 상태 등 몇 가지 지켜야 할 것들과 함께 성교 체위까지도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성욕의 억제와 규제를 이루고자 한. 귀족들은 결혼의 관념을 대부분 수용하였지만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혼의 금지는 쉽게 무시하였으며 농촌에 거주한 중세인들은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있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고 간음을 중죄로 간주하지 않았다. 간음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너무나도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이러한 견해를 이단으로 규정하기까지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교회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중세 세계에서 남자들의 혼전 혼외 성관계는 사회적으로 널리 관용되었다. 이는 자크 로시오가 밝혀낸 디종 시의 독특한 청년 문화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 가택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여성을 밖으로 끌어내 집단 강간을 행하였고 이에 대해 심각한 수준의 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중세인들의 도덕적, 정신적 삶을 지배하는 주요 세력이었던 교회는 결혼을 기본적 수단으로 개인적, 사회적 성행위에 대해 여러 규제 수단을 만들고 참회 등을 통해 실천적 방법도 행하였지만 세속인들이 이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역할은 실로 막대하였으며 섹스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입장-종족 번식의 목적에 위배되고 결혼 제도를 위협하는 성행위 모두 옳지 못하다는-은 후에 설명할 소외 집단이 왜 섹스라는 공통분모를 받게 되며 어떻게 연관되어 탄압 받는지 알아보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3. 이단자중세 이단의 특징은 발도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반기독교적인 성격이 띠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마니교나 카타리파 등도 있지만 대부분 교회와 교황의 권위와 계서제를 거부한 것으로 이단으로 취급당하였다. 평화가 찾아오고 도시가 팽창하고 경제가 부흥에 수반하여 정신적 각성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교회는 타락해 있었다. 이들이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거부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살았던 사도적 삶을 살고자 하는, 그저 교회에 나가거나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입회하는 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복음주의적, 근본주의적, 퓨리턴적 분위기 박해의 수단으로 종교 재판 이외에도 교회는 이단의 악마화 전략도 수행하였다. 즉, 이단자를 성적일탈자 및 방탕자로 낙인을 찍는 선전 전략을 수행한 것이다. 이단은 기독교 세계를 와해시킬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마왕의 소행이었고 이단자들은 본래 위선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 내용과 달리 그들은 성적 방탕에 탐닉해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난잡한 성교며 근친상간, 남색 등을 저지른다고 비난받았다. 정형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타자’의 대표인 마왕과 그의 하수인인 이단자는 곧 음탕한 짓거리로 연결되었다. 일탈적 신앙은 곧 일탈적 관행과 등식 관계가 성립했던 것이다.4. 마녀중세인들은 사탄과 그의 하수인인 악마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을 믿었다. 또한 중세는 해명하기 힘든 현상들을 쉽게 설명했던 마법을 믿었던 사회이다. 서유럽 마법은 앞서 언급한 두 특징이 복합되어 나타난다. 중세인들이 믿었던 마법을 수행하는 마녀는 사탄의 시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법은 후에 이단으로 규정될 만큼 대안적 신앙이었다. 따라서 마녀 역시도 기독교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녀는 영세 의식으로서 마왕과 교접하고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들의 의례에서 무차별적인 성적 향연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가톨릭 지식인과 신학자에 의한 선전과 마왕 숭배적 음모는 결국 16, 17세기의 마녀 사냥으로 이어졌다.5. 유대인배타성과 열렬한 포교활동이라는 유대인의 특징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점이 기독교 세계에서 이들이 배척받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의 성장의 인종적 특수성도 부각시켰다. 더불어 유대인은 하느님의 소유인 시간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고리대금업에 있어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세 초만 해도 이들에 대한 박해는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0, 11세기 경제적 번영과 새로운 종교적 열정의 고조로 인하여 유대인은 점차 이단으로서, ‘타자’로서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또사통한다는 혐의를 받기 용이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의사로서 뛰어났던 유대인은 독극물과 관련된 혐의와 제물로 사람을 살해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민중의 미움을 받기 쉬웠다. 결국 매춘부며 이슬람교도며 문둥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배지의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필립 5세가 유대인의 악명 높은 성적 난잡함을 이유로 배지의 착용을 명령하였듯이 유대인은 음란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유대인 회당은 갈보집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또한 유대 여성은 매춘부와 동일한 표식을 하라는 명령은 그들을 창녀와 연계시키려는 당국의 의도를 보여주며 그럴만한 충분한 사회적 배경이 존재하였다는 근거라 할 수 있다.6. 창녀앞서 언급했듯이 교회의 입장에는 관계없이 중세에는 남자의 혼전 혼외 성관계는 사회적으로 널리 관용되었다. 매춘은 각계각층의 젊은이들이 저질렀던 집단 강간과 간음을 억제하는 방편으로 그리고 동성애를 예방해주는 실제적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남자들이 20대말까지 결혼을 미루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매춘은 더더욱 필요했다. 이러한 매춘 즉, 창녀에 대한 교회와 당국의 입장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은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이를 필요악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경우 매춘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조심스럽게 억제하려 하였다. 창녀에게 치욕의 배지를 착용케 하고 그들에게 갱생을 역설하며 결혼을 촉구하는 방법 등을 통해서 말이다. 당국 역시도 무조건적인 허락이 아닌 공중도덕의 환기와 공중질서의 재정비를 위해 매춘을 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창의 형태로 매춘을 통제하려 하였다.7. 동성애자그리스-로마 사회는 양성애적 사회였다. 즉, 동성애가 널리 행해졌고 이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밝혀줄 만한 실질적인 논거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출산과 관련이 없는 성행위에 부정적이었으며 그것은 자연에 반하는 행위였으므로 규제의 대상이었다. 점차 동성애는 이단, 문둥병, 마왕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인문/어학| 2006.12.18| 5페이지| 1,000원| 조회(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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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의 관점에서 바라본 십자군 전쟁 평가A좋아요
    Ⅰ. 들어가기에 앞서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지중해의 이질적인 양대 세력이 본격적으로 충돌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이슬람교가 창시된 7세기 중엽 이후 무슬림들이 지중해세계에 진출하는 과정에 북아프리카?지중해의 여러 섬들?이베리아반도?남부 프랑스 등지에서 기독교 측과 빈번하게 충돌했지만, 십자군 전쟁은 그러한 국지적?제한적 충돌이 아닌, 전면적 전쟁이었고 일종의 지중해대전이었다. 이러한 십자군 전쟁은 양 진영에 많은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십자군 전쟁 후, 유럽인은 다시 지중해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며 이는 교역을 자극하였고 기타 여러 제반 조건들의 개선으로 중세 유럽은 경제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또한 십자군전쟁은 정치적으로도 봉건 제도를 무너뜨려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를 출현시키는 데에 한 몫을 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봉건 영주들은 장기간 영지를 떠나있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왕권의 강화와 안정에 일정 정도 기여했으며, 십자군전쟁이란 대의는 귀족들에게 징세를 부과할 수 있는 선례를 제공할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도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으로 신장된 교권은 1차 십자군 전쟁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십자군전쟁을 발의한 우르바누스 2세 때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뚜렷하게 어긋나기 시작한 4차 십자군 전쟁부터 교황의 권위는 가시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여 실패로 끝난 십자군전쟁은 교황청에 ‘아비뇽유수’와 ‘대분열’이란 과제를 부여했다. 이베리아반도와 시칠리아 등지를 통해 소개되던 이슬람의 선진 문화는 십자군전쟁을 통해 성곽문화 등 문화적으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전쟁은 이슬람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어떠한 결과를 불러왔나? 앞서 기술하였듯이 십자군전쟁은 정치?경제?종교?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변화를 초래하였고 진보를 자극하였으며, 또한 이전부터 선진 이슬람 문명의 최대 수혜자로서 이러한 기반들을 바탕으로 근세 르네상스기서 서구중심적이란 표현은 역사 고찰, 서술에 있어 서구적 가치와 기준을 투영하여 이슬람 세계를 폄하하려 시도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단 십자군전쟁에서의 대등한 두 세력의 균형적인 조망이 아닌 이슬람을 객체화시켜 그것에 부딪치려 했고, 부딪쳤으며, 그것이 지금의 서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만을 살펴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사실 이번 과제를 통해 이슬람의 관점에서 십자군전쟁을 바라보고자 하였으나 자료의 한계와 이해수준의 미달로 애초의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대신 그나마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던 자료들의 해석과 통합을 통하여 서구중심적 서술의 십자군 전쟁에 이슬람적 이해와 가치기준 등을 접목, 융합시켜 균형적으로 십자군전쟁을 고찰해보기로 하였다. 이러한 균형적인 역사 고찰은 탈서구적이고 친이슬람적인 역사 서술에 있어 한 걸음 내딛는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Ⅱ. 균형적 관점에서 바라본 십자군 전쟁 발발 요인십자군전쟁은 단순히 종교전쟁이 아닌 여러 요인들이 맞물려 빚어진 총체적인 드라마였다. 우선 기독교세계의 요인들을 살펴보겠다.봉건제도가 정착되면서 장자가 아닌 차자 등은 봉토를 물려받을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인클로져 운동으로 인해 양산된 잉여 노동이 산업혁명에 그러했듯이, 스스로 지위를 개척해야만 이들의 존재는 십자군전쟁에 탄력을 더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단순 잉여가 아닌 전투 기술을 갖춘 특수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또한 일부 봉건영주와 군주들은 십자군전쟁을 자신의 권위를 확대할 수 있는 기제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십자군전쟁에 있어 이들의 참여는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종교적 관점에서도 천년 왕국에 대한 믿음과 종말론적 세계관은 유럽인들을 전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였다. 은자 피에르 등과 같은 수도승들은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들었으며, 교황은 십자군에 참가하는 전사들에게 전폭적인 대사면을 베풂으로써 이교도에 대한 살인행위를 정당화시켜주었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무역으로 번성하기 시작그레고리우스 7세의 뒤를 이은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운동을 통해 기독교세계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특히 교황청의 과세권을 기독교세계 전체로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그것을 로마교회와 결별한 그리스정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 아래로 통합하는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결국 사회?정치?종교?경제적인 요소와 교황의 발의 하에 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하는 열의 속에서 십자군전쟁은 시작된 것이다.하지만 십자군 전쟁이 200여년에 걸쳐 지속되고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무엇보다 결정적인 원인은 이슬람 세계의 분열과 혼란에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발현한 투르크족에 의해 압바스 왕조가 폐해지고 투르크족과 이집트의 파티마왕조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수호자로서 서로 대결하였다. 투르크족이 차지하고 있던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파티마왕조가 십자군과 군사적 동맹을 맺은 사실에서 분열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씨족적 질서를 지닌 투르크족의 고질적인 내분은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켰다.Ⅲ. 십자군전쟁 개략.1차 십자군: 여러 번의 십자군 원정 중에 부분적이나마 유일하게 성공하였던 원정이며, 가장 종교적 열정이 높았으나, 가장 무질서하였으며, 가장 잔인하였던 원정이었다. 또한 이슬람 세계의 저항은 조직적이지 못하였으며,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2차, 3차 십자군: 십자군 원정은 여전히 열의가 높았으며, 대규모 연합 세력에 의해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나, 이슬람 세계의 저항도 모술의 아타벡 이마드 알-딘 장기, 누르 알-딘 장기, 그 뒤를 이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알-딘 알-아유비(살라딘) 등에 의해 조직적이 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가는 등 1차 십자군이 이룬 업적의 상당 부분이 무효화되었다. 이런 전세의 역전은 하틴 전투(1187)에서 이루어졌다(Runciman 1985, 488-490).4차 십자군: 이미 십자군을 일으키는 지도적 인물이었던 교황의 한 저항 운동을 주도하던 아유브조가 사라지고,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백인 노예 병사들인 맘룩이 이집트를 지배하자, 신사적이던 아유브조와는 달리 유목민적인 위계를 써 가며 십자군 요새를 하나 씩 점령하여 나갔고, 1291년 아카가 이슬람교도들의 손에 떨어짐으로써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Gabrieli 1989, 346).)Ⅳ. 무슬림이 바라본 십자군전쟁Ⅱ장에서 열거한 십자군전쟁의 요인들을 분석해보면 결국 십자군전쟁은 기독교세계로 인해 발발한 측면이 더 강하다. 전쟁에 있어서 먼저 공격을 감행한 쪽에 더 많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방어를 한 이슬람에게 방어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서구의 많은 사가들이 지적하듯이 십자군전쟁은 그간 축적해온 자신감의 외부적 발산을 통한 자기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누군가를 향해 칼을 뻗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뻗어오는 칼을 막는 데는 언급할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다.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맥락에서 십자군전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비록 서구의 사가들은 여러 제반조건이 성지탈환이라는 대의와 결합한 산물이라 파악하지만 이슬람의 사가들에게 있어 십자군전쟁은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사실, 무슬림에게 있어서 십자군은 ‘프란키(franci)’)였고 그들은 종교가 아닌 민족 내지 인종의 의미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무슬림들은 처음에는 비잔틴제국의 군대와 십자군을 구분하지 못했고, 또한 십자군이 갖는 종교적 성격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를 파악한 후 이러한 사정을 달라졌다. 십자군은 비록 교황의 호소에 의하여 결성되었으나, 일인 지휘 체제가 아닌 다양한 집단의 여러 연합 세력이 뭉쳐 움직였으며, 여러 정치적, 경제적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본래 십자군의 이상에서 일탈되어 가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반면 그 지역의 토착 기독교도의 운명이나 유럽 순례자들의 지위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음에도) 십자군이라는 새롭고 매우 호전적인 그들에게는 침입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도들이, 그러했을리는 없겠지만,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제도를 인정했다면, 유럽인들은 그들의 권한 행사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즉, 무슬림에게는 정치적인 권위 이전에 종교적인 의무가 앞서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토 수복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위뿐만 아니라 종교적 확대를 꾀하였기에 무슬림들에게 있어 그것은 침입이었고 그들은 지하드)를 통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한 것에 불과하다.이슬람교는 꾸르안을 최고의 성서로 간주하고, 기독교와는 달리 예수를 신성과 인성의 복합체가 아닌 완전 인성적 측면에서 파악하기에 기독교와 본질적 차이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기독교가 발생한 지역을 이슬람화 시키면서 엄격한 유일신 사상, 개인의 도덕과 동정심에 대한 강조, 계시에 의해 기록된 성서에의 의존 등 기독교와 믿음의 뿌리를 공유한다. 또한 예루살렘 역시 그들에게 제 3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기독교도에게도 성지임을 인정하였기에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꾸르안에 명시되어 있듯이 이슬람은 자신의 정복지에서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종교적 차이는 오직 과세의 기준이 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오히려 세금의 감소를 위해 개종하려는 이교도들을 막기 위한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독교세력은 자신의 우위 지역에서 타종교를 이단시하여 배척하고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면모는 유일한 성공인 1차 십자군 때에도 나타났다.) 두 종교에서 나타나는 관용성의 차이는 결국 성지탈환이라는 그럴듯한 대의를 지닌 십자군 전쟁의 발발에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Ⅴ. 결론우리는 십자군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성전, 정의, 신념의 위대함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십자군전쟁에서 기독교도들이 다른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개념들이다. 십자군전쟁의 이면에는 세속적 검은 욕망들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현재 그 곳에는 ‘이슬람은 폭력적이다’라는 문장이 대신 자리한다. 십자군전쟁을 발의한 종교적 권위자인 교교였다.
    인문/어학| 2006.12.14| 7페이지| 1,000원| 조회(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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