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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이란 무엇인가?
    Ⅰ. 서론우리는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산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가족을 위해 사는 이도 있고, 사랑을 위해, 명예를 위해, 그리고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산다고도 한다. 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일상의 반복 속에 묻혀 살기도 하고, 하루하루 삶이 고통뿐인 삶을 사는 이도 있다. 이러한 각각의 삶 속에서 우리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속에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심리적으로는 더 많은 갈등과 불안요인으로 둘려 쌓여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되어가고 있고, 서로에게 자의(恣意)로, 아님 무심결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며 스스로 지쳐가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전체가 풍요롭고 안정된 것 같지만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어느 누구도 감히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없는 딜레마의 상태에 빠져있다.여기서 선(禪)은 개인의 정체성을 알려 주며, 이것을 통해서 인간을 참다운 자기로 살게 도와 준다.Ⅱ. 선의 본질선이란 마음의 깨달음을 통해 세계와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다.) 즉 언어로 이루어진 법문, 지식들은 단지 깨달음의 기호일 뿐이다. 보리달마가 마음의 평화를 찾으러 찾아 온 신광이라는 스님에게‘찾을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벌써 그대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느니라.’)라고 말한 것처럼 선은 마음의 깨달음에 관한 수행이며 종교이다. 마음의 깨달음이 없다면 그 웅장한 대장경도 번뇌의 백과사전일 뿐 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념적 분별에 사로 잡힌 눈으로 경전을 보고 언구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불교에서는 ‘불입문자 교외별전’)이라는 상징적인 명제를 쓰고 있다.또한 선에 대한 언어적 이해를 넘어서 직접적 선 맛보기로 나아가는 길로서 조사선에서 개발한 독특한 방편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화두’란 ‘말(言語)’인데 겉으로는 ‘말’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말’을 넘어서 ‘마음’을 직접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화두를 해설할 수는 있으나 화두의 해설을 ‘말’의 의미로서 이해하였다고 하여 화두를 깨친 것은 아니다. 화두를 계기로 하여 ‘마음’을 직접 깨달아 맛볼 때에 비로소 화두를 깨쳤다고 한다. 여기서 화두를 해설할 경우 중요한 것은, 지식적 이해를 저지시키고 직접 체험으로 요령껏 이끌어 주어야 하는 점이다. 선지식의 지도력은 얼어의 금기시에 있는 것이나 체험으로 잘 이끌어 주느냐에 있는 것이지, 흔히 보듯이 무조건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언은 아니다.화두를 비슷한 의미로 공안이 있다. 공안이란 무심(無心)과 견성(見性)을 목표로 삼는 참선수행의 대명제이다.) 선의 수행과 깨달음을 상징하는 공안은 원래 “관청의 공문서(公府案牘)”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절대적인 규범성과 판단의 준칙이 되는 참선수행의 핵심적인 명제를 의미한다. 공안은 옛 선사들의 언행과 깨달음이 해결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완벽한 의문구조이다. 선사들의 업적을 통해 그 사람의 인생과 깨달음에 지극한 관심을 가진 동료들과 후대들에 의해서 계속 점검되어지고 각 개인의 통찰이 투영되면서 하나의 완벽한 의문구조를 가진 선의 명제, 즉 공안이 확립되는 것이다.공안과 화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듯 보이지만 엄밀하게는 다른 용법으로 쓰인다. 공안은 선사와 참선자간의 간단한 문답, 즉 선문답이며 때로는 탁월한 기량을 보이는 선사들의 행동도 하나의 공안이다. 화두란 공안이 이루어지는 선문답에서 선사의 답변이다. 참선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공안 중의 포인트가 바로 화두인 것이다.선종의 양대 수행법으로는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照禪)이 있다. 간화선이란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오도(悟道)의 기연, 즉 화두를 참구하여 견성을 목표로 하는 선이다. 묵조선이란 ‘중생의 마음은 곧 제불의 본원이지만 번뇌의 티끌에 의해서 가리워져 있으므로 오직 좌선하여 망연(妄緣)을 멸하면 그대로 부처의 깨달음’이라고 설하고 좌선을 중시하는 선이다.)그리고 선의 접화(接化)수단으로 할과 방이 있다. 할이란 갈(喝)의 변음으로서 ‘악’ ‘이앗’등과 같은 고성으로, 선사가 제자의 그릇된 견해와 집착을 깨우쳐 주기 위해 고성으로 질타하고 언어와 사려가 미치지 못하는 경지를 보이는 수단이다. 방은 선사가 주장자와 제자를 죽비로 때려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단이다. 깨달음의 경계를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선사들의 할과 방은 사상이나 논리보다도 선의 가장 실존적인 상황, 찰나와 영원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단 일회의 행동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즉 선은 할과 방을 사용하므로서 삶의 진실을 단 한 찰나의 할과 방의 움직임으로 집약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죽음도 단 한 찰나의 할과 방 속에 있다는 이 냉엄한 자기 정리의 방식이 선의 본질인 것이다.Ⅲ. 선과 나의 모습선은 체험의 학문이자 지혜이며 지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을 하기 위해 좌선만으로 선을 하려고 한다. 좌선에만 빠지는 것이 선일까? 아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자체가 선이다. 중국의 백장선사가 썼던 방법)처럼 노동, 그 자체가 종교적 행위이며, 식사하는 그 자체도 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유와 어울어져 우리는 모든 일에 속박당하지 않는다. 즉,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그런데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식사할 때는 식사를 철저히 하고 있는가? 공부 할 때는 그것을 철저히 하고 있는가?그렇치 못하다. 공부 할 때는 다른 생각에 얽매여 집중을 하지 못하고, 놀 때는 공부에 신경을 써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있다. 즉, 어떤 의식을 제어하지 못한 체 다른 의식에 사로 잡히고 있다.또한 황벽희운의 설법)에 말한 것처럼 나는 지각이 불변의 실체라고 오인하고 이에 집착하고 있다. 순간순간 커지는 이기심과 과욕으로 인해 스스로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로 인해 스스로에게 비판하고 자학하지만 그 또한 순간일 뿐일 때가 많다.황벽희운의 설법은 혜능의 무념과도 상통한다. 무념이란 것은 일체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위에 동시에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나는 어떠한가? 무념의 상태를 깨닫지 못한 체 사물과 사람에 대해 나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내세워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의 중요도에 따라 사물과 사람에게 대하는 행동과 방법이 다르다. 이것은 내면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한 체 단순히 외적인 모습과 사견(私見)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들은 미래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그리고 나는 모든 일에 지성을 다해야 한다.)인간이 일에서나 학문에서나 기능에서나 이만하면 됐다는 말은 모순이다. 이만하면 됐다는 처지는 정지나 후퇴를 뜻한다. 평생 동안을 부족하다 부족하도 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느끼면서 그만 죽음을 맞는 것이 인생의 실상이다. 그런데 자기로서는 모자란다고 생각하면서 일평생을 관철한 사람이 걸어온 인생역정을 뒷사람들이 보고, 그것은 일을 훌륭하게 완성시킨 숭고한 모습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자기 반성을 멈추지 않고 정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어떤 일을 하면 최선을 다하고 난뒤에는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자주 해 왔다. 모든 걸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자체가 틀렸다.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생각하는 순간 나는 모든 일에 지성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6.12.23| 5페이지| 1,000원| 조회(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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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광장에서 이명훈의 이상향은?
    이명준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끊임없이 자기자신에게 물음을 던진다. 값진 삶이란 무엇이며 내가 찾고 있는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그는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하여 부단히 헤맨다.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 그는 먼저 현실에서 자신의 삶의 본질을 찾으려 했다. 광장은 없고 밀실만이 존재하는 남한, 윤애와의 밀실, 잿빛 공화국인 북한, 은혜와의 밀실, 전쟁속의 광장, 또 다시 은헤와의 밀실, 그리고 자기만의 광장인 바다. 모든 것들은 그에게 필요충분조건의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는 공간적 ? 심리적 여정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를 깨닫고, 비극적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할 뿐이였다. 그럼그가 원하는 삶의 본질이란 무엇일까?명준은 삶을 통해 삶의 비극적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자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진정한 자아형성인가?아니다. 그가 원하는 삶의 본질이란 바로 사랑이다.모두들 자신의 밀실에서만 살고 있는 남한에서 명준은 남한의 ‘개인주의’체제속의 광장과 사랑의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개인주의’라는 현실의 광장과 명준의 삶의 광장은 자신이 사회에 사랑을 주어야지만 그만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그런 그는 광장에서 윤애와의 밀실로 자신의 사랑을 옮기게 된다. 하지만 윤애와의 사랑은 단지 자기자신에 대한 도피일 뿐, 누구를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체 또 다른 광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월북을 한 후 그는 다시 한번 광장에 대한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랑이 아닌 강요와 억압뿐이였다. 은혜를 만나 자신의 마지막 광장이자 밀실임을 깨닫고 사랑에 빠지지만 은혜 또한 자신의 광장을 향해 도망치듯 떠난다.이명준의 사랑, 즉 삶의 본질을 남녀간의 사랑과 비교해보면, 남녀가 연애를 할 때는 반듯이 사랑이라는 필요조건이 있어야 한다. 어느쪽이든 사랑이라는 정신적, 물리적 매체가 깨어지거나 흐터지게되면 사랑이 아닌 집착, 강요가 되는 것이다. 이명준이 말하는 ‘광장’과 ‘밀실’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회와 자신과의 사랑, 사회구성원과 자기와의 사랑으로 말할 수 있다. 그 사랑속에서 명준은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한 체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원초적 부모인 바다로 몸을 맡긴다.그의 죽음, 바다로 몸을 던지는 행위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자살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바닷물 속에 뛰어드는 것은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행위 이상의 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활성적인 세계에서 비활성적인 세계, 유기체의 세계에서 무기체의 세계로 다시 되돌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주인공에게 있어 바다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곳, 즉 사랑의 출발점인 것이다.그러면 사랑의 원초적(原初的)인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인간의 고독과 연결된다. 본문에 나타나듯,‘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42쪽)괴로움은 즉, 고독이다. 인간은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할 때부터 고독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이고,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자신을 의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자신의 내면적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주인공이 고아와 다름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외로움, 고독함을 한층 더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인간은 모두 사랑의 인연을 통해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며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명준은 이데올로기속에서 철학도로서 사랑을 주고 받을 곳을 찾지 못하여 방황을 한 것이다.김현의 「사랑의 재확인: 개작된『광장』에 대하여」(263~64쪽))에서 김현은 명준의 죽음을 사랑의 재확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를 작품의 의미로 해석하려는 ‘의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 없으면 이데올로기의 풍문만 남을 것이다. 더구나 이 사랑의 주제는 비단 『광장』한 작품에만 그치지 않고 「구운몽」을 비롯한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20세기를 살면서 우리는 가족과 공동 사회가 점차 그 의미를 읽어버리게 되었고, 현대인들은 사랑할 것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소외와 고독 그리고 허무가 이제 그들이 일용할 양식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해야한다. 어느 초월적 존재자를 믿든, 부모님을 믿든, 나 자신을 믿든 사랑을 해야한다.왜냐하면 사랑의 기초로 인해서 우리는 이 삶을 좀 더 의미있고 값지게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한발 더 나아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미하일은 자기가 데려간 그 여자의 쌍둥이 두 딸을 한 착한 부인이 애지중지하며 키워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하느님의 질문의 마지막 답을 알게 된다. 답은 ‘사람은 자신의 계획과 고민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랑으
    인문/어학| 2006.11.21| 3페이지| 1,000원| 조회(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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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5.16군부 한일관계
    5.16군부와 한일관계1. 서론한일간의 역사적 관계는 수천년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 관계는 그러나 서로 죽고받은 선린의 역사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은혜를 전하고 그 대가를 오직 원수로 돌려 받은, 고약한 관계였다. 우리는 임진 ? 정유 양란을 거쳐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와 문제를 남겼다. 그 중 광복 60년이 지난 현재, 친일파 잔재 청산 문제는 지금도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이 문제 중 하나가 박정희정권과 한일협정에 관한 것이다.이제 만주친일파와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 그리고 한일협정에 관한 친일적 요소들에 대해알아보고,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보자.2. 본론1) 만주친일파1931년 대동아공영권의 슬로건을 내건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이듬해 3월 청나라 황족 푸이를 내세워 일제의 첨병 역할을 할 만주국을 건설하였다. 만주는 소련의 남하를 막고 병참기지로 활용가치가 높은 땅이였다. 그리고 만주가 3.1운동이후 무력대일항전(武力對日抗戰)이 활발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독립운동을 근절시키기 위한 적합한 장소였다. 만주국의 권력은 관동군 중심의 일본 군부가 쥐고 있었으며, 1932년 일제는 만주국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민중을 교화하기 위한 만주국 협화회를 우선적으로 결성했다. 만주국 의회 성격인 협화회는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등 5개 민족이 화합하는 이상형의 국가를 주창하고 나섰다. 하지만 협화회는 소위 민중조직이라고 불렸지만, 사실은 비밀공작을 위한 특무조직이였다. 즉, 일반적인 민중조직인 동시에 내부에는 특무가 있는 것이다. 협화회의 선무반, 특별공작반 등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와 같이 독립운동 세력을 토벌하는 것이 그 목적에 있었다. 당시 이 협화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조선인은 윤상필, 최남선(崔南善), 윤극영(尹克榮), 이범익, 이선근(李瑄根) 등이었다.그리고 일제는 전쟁에 대비하여 군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만주국 건립 직후 다민족 친일군인 양성을 위한 만주군관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만주군관학교의 대표적이다.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던 정일권은 만주국 헌병대 소좌로 조선인 출신 중 항일투쟁세력을 색출하는데 원성이 자자했다.해방이 된 후 일제에 협력했던 만주국 인력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다시 주도세력이 되었다. 친일파들이 정치,군사,법조계,경찰등 각 부분에서 힘을 발휘하였고, 이승만이 만주세력을 자신의 측근으로 대거등용하였다.이후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 청산이 시도되었지만 만주의 친일파들에 대한 조사는 흐지부지 끝나게 되고 만주 친일파들은 6.25 동란을 계기로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게 된다. 만주국 헌병대 소좌로 해방을 맞은 정일권은 육군참모총장에,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에 최연소 사성장군(四星將軍), 만주군 군의관을 지냈던 원용덕(元容德)은 최초의 헌병대 사령관, 관동군 벌교대 출신으로 반일항쟁 세력들을 색출하는데 전력했던 김창룡(金昌龍)은 육군 특무대장에 오른다.2) 쿠데타과정 : 친일파의 합류1946년 박정희가 남로당사건 이후 그는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기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가 군부 내 좌익 색출에 협조적인 태도들 보이자 숙군을 직접 담당했던 김창룡과 김안일이 당시 육군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에게 숙군에 협조적인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백선엽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박정희의 구명을 도왔다. 그 밖에도 박정희의 구명에는 정일권, 원용덕 등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후 박정희는 백선엽의 선처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5.16쿠데타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육사 8기생들을 여기서 만난다.당시 쿠데타 주동세력 가운데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김동하는 해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방원철은 장교이며, 이주일은 5.16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희의 소장으로, 그외 박임항은 중장이 되었으며, 백선엽은 1969년 10월 교통부장관을 역임하였고, 정일권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그후 1970년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있을 뿐이었다. 한일교섭에서는 첫째, 양국간의 과거 역사적 관계를 어떻게 평가 ? 청산할 것인가? 둘째, 양국의 과거 관계에서 발생한 손해배상 등의 재산문제를 어떻게 매듭지을 것인가? 셋째,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전후에 새롭게 발생한 어업권을 둘러싼 한일 양국간의 대립을 해소하는 문제 등이 중요한 쟁점이었다.이승만 정권하에서 한일회담은 네 차례 열렸다. 그러나 이때의 모든 회담은 실질적인 의제토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식민통치에 대한 인식차이로 결렬되고 말았다. 이승만의 반일적 성향, 일본의 반성 없는 과거옹호론은 회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하에서 한일 양국은 실질적인 관계의 진전이 없이 감정적인 대립만을 반복하였다.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다. 가난한 후진국에서 정권탈취에 성공한 쿠데타 세력이 국민들의 환심을 사고 정통성 확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보다 ‘큰 빵’의 제공이었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이른바 혁명공약으로 내세운 조국근대화라는 구호는 바로 정치적 자유를 박탈하는 대가로 경제적 환경을 개선시키겠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당시 경제적 형편은 이 구호를 뒷받침할 만한 역량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자본은 고갈된 상황이었고, 과중한 농가부채에 시달리는 농민들로부터 시장구매력이 나올 리도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원상회복과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며 군정연장성명을 발표하면 경제 원조를 보류하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박정희가 심혈을 기울이던 대규모 국가사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거부했고 국제사회에 반대여론을 퍼뜨려 곤경에 빠뜨렸다. 이런 미국이 박정희에게 미더운 상대로 생각될 리 없었다.박정희에게는 명분을 세울 수 있으면서도 정권안정기반 구축에 도움이 될 만한 ‘큰 손’, 단도직입적으로 일본이 필요했다.미국과 일본도 1960년 5월 신안보조약이 통과됨으로써, 이의 강화를 위해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원하였다. 1961년 6월 이케다 수상과 케다면 평화선 문제를 타협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이어 11월 박정희 의장이 방일 시에 이케다 수상과의 회견에서 한일협상을 신속히 마무리 짓는데 합의하였다). 박정권은 대일교섭 과정에서 정규적인 외교채널보다는 변칙적인 정치흥정을 통한 막후교섭을 즐겨 사용하였다. 따라서 한일회담의 중요한 의제들은 공식적인 협상의 장에서보다는 밀실에서 몇몇 인물들의 흥정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의 대표적인 것이 김종필-오히라의 메모)였다.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 간의 비밀회담에서 한일협상의 핵심적인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내용은 ① 10년에 걸쳐 3억 불 무상원조를 일본이 한다. ② 7년 거치 20년 동안 상환되는 조건으로서 연란 3.5%인 일본정부 ODA차관 2억불을 한국에 공급한다. ③ 상업차관의 형태로 1억불 정도 원조한다. ④ 무상원조와 기타 차관내용에 대한 지급방식으로는 일본 국내의 상품과 용역으로 한다 등이었다.이 메모의 내용은 3년 후 한일협정에서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당시 한일협상은 배상이든, 경제협력이든 교섭의 중심적 과제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으로의 경제건설자금의 도입이었다. 따라서 김-오히라 메모에는 자금제공의 명문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며 청구권이라는 구절은 사라져버렸다. 청구권 대신 무상공여, 차관으로 대체되었다. 이를 한국 측은 청구권의 지급이라고 보았던 반면에 일본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독립축하자금으로 해석하였다.당시 이케다 정권은 청구권의 해결방식으로 경제협력방식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경제적 곤란과 개발자금의 부족으로 고뇌하고 있는 한국의 군사정권에 일정액에 해당하는 일본의 자본재와 역무를 유무상의 형태로 제공함으로써 청구권의 주장을 포기하게 하는 방식이었다.청구권 문제에 관한 미국정부의 입장도 한국의 대일청구권은 미군정에 의한 재한 일본재산의 몰수와 상쇄된다는 것과 청구권의 해결과 관련하여 일본의 경제원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의 배상적 색채의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한국의 도를 일관되게 유지하였다.급진전될 것 같던 한일협상은 국내외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면서 상당히 지체되었다. 일본의 ‘돈’을 갈구하던 박정권의 긴급함과는 달리 일본의 이케다 정권은 미국의 아시아 냉전 전략에의 가담을 의미하는 한일협상에는 다소 신중하였다.미국은 1964년 들어오면서 한미일 체제의 강화를 급박하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1964년 1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중국을 승인하였으며, 1964년 10월에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정치경제적 결속에 대한 압력을 넣었다. 일본에서도 이케다 정권에 이어 한일회담 조기 타결론자인 사토 정권이 탄생하면서 일본 내의 신중론을 누르고 조기 타결론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는 국제냉전의 격화에 따라 자민당 내 우파의 입지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케다의 경제 중시형 대미협조 노선을 지지해온 국제적인 조건이 변화하고, 사토의 안전보장 중시형 대미협조 노선이 요청도었다. 결국 한일회담은 기시 수상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최종 마무리되었다. 사실 사토 정권의 한일회담 타결을 위한 결단에는 한일문제의 처리를 통해서 대미신뢰를 획득하고, 오키나와 시정권 반환교섭 등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하였다.1965년 들어서서 한일국교정상화는 급진전되었다. 2월 20일에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으며, 박정희가 방미하고 돌아온 직후인 6월 22일에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13일 공화당 단독국회에서 베트남 파병안이 통과된 다음날 한일협정 비준안이 통과되어 1965년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가 교환되었다.한일기본조약의 내용)은 1.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2.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3.어업에 관한 협정 4.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5.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조약에 의하여 한.일 양국은 외교, 영사 관계를 개설하고 한일 합병이 무효임을 확인
    사회과학| 2006.10.30| 6페이지| 1,000원| 조회(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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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7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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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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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