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그리고 중동 영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전 역사를 통해 항상 외부의 위협과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영토 안에 독자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 교황청과 공존해 오면서 어쩌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감당해가야 할 운명을 가지고 유럽의 역사에 발판을 들여 놓았는지도 모른다.희미하고도 길게, 또 때로는 강렬하게 번져갔던 이탈리아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열정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던 이탈리아 대륙에 깊이 스며들어 마침내, 1861년 3월 17일 헌법의 승인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그 장구한 역사를 통해 오늘날 문화적, 지적으로 세계를 리드해 오고 있는, 수많은 볼거리들이 그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그 깊숙한 곳에 ‘하나의 이탈리아’가 되는 과정에 어떠한 역사적 이야기들이 있었던 걸까. 나폴레옹 시대가 끝이 나면서 비엔나회의로 질서정연하게 재편성되는 유럽역사에서 힘겹고도 끈질겼던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II.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개요리소르지멘토(Resorgimento)라는 이름으로‘부활’을 꿈꾸는 이탈리아의 통일에 대한 움직임은, 유럽 전 지역에 여파가 미쳤던 프랑스 혁명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 물론 이탈리아 민족이 통일을 염원하게 된 것이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직접적인 동기부여 받은 까닭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시민들에게 공통된 민족, 그들만의 국가라는 애국심이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그들의 의식이 다소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제국의 팽창과 더불어 외국인 왕가에 예속되거나 지배하에 들어가 하나의 이탈리아가 아닌 여러 개의 소국들로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경험했던 아픔들은 이탈리아의 민족적 양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나폴레옹 실각으로 그의 시대가 끝이 나면서 이탈리아에는 다시 구체제의 군주들이 복귀해 예전의 군주 국가로 분리되었으나 이탈리아 민족들은 그들의 통일 운동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다.나폴레옹 시대가 막을 내리고 유럽은 비엔나 회의가 개최하였고, 나폴레옹 제국 이전의 유럽의 현상 유지라는 대전제 하에 정통주의와 세력균형의 원칙으로 유럽대륙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곧 유럽협조체제가 시작되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으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 사상의 영향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이나 나폴레옹의 군사적 승리에 묻어나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지켜보면서 이탈리아인들에게 통일에 대한 꺼지지 않을 불씨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미 혁명 사상의 기본 원리가 이탈리아 인들의 양식 속에 뿌리를 내렸으며 그 뿌리는 마소네리아나 카르보나리, 또는 청년 이탈리아당 같은 비밀 혁명단체들의 결성으로 일어나 민중들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프랑스에서 공화국의 성립은 이탈리아에 보급된 자유주의 이념을 더욱 확대시키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소국들에서 입헌을 요구하는 자유주의적 군중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비밀 결사단체였던 카르보나리가 활발한 조국 독립 운동을 펼치면서 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트로부터 헌법 제정과 의회수립의 약속을 얻어내며 아주 잠깐 동안 자유주의적인 개혁의 성공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박해로 인해 카르보나리의 왕성한 자유주의 운동도 맥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탈리아는 다시 통일을 향한 긴 길을 다시 걸어가야만 하게 되었다.III. 이탈리아의 통일 방안, 그리고 마치니와 카부르, 가리발디제노바에서 태어난 주세페 마치니는 비밀 결사 단체 카르보나리당의 실패를 직접 경험한 후, 이탈리아의 민주통일과 자유라는 뚜렷한 사명감을 가지고 억압받는 이탈리아를 구하고자 했다. 그는 카르보나리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요소를 인식하고 새롭게 이탈리아 청년당을 결성하였다. 마치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청년당의 통일 방안은 공화국 수립을 통한 이탈리아 독립이었다. 제노바, 사보이, 칼라브리아, 캄파니아 등지에서 봉기를 일으키거나 나폴리, 로마, 토리노 등지에서 군중 시위를 일으켜 입헌을 요구하는 등 혁명을 일으키고자 시도하면서 공화국을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또 다시 간섭한 외부 세력의 방해와 아직까지 계몽되지 못한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맞물려 이탈리아의 자유에 대한 불씨는 다시 꺼져가게 되었다.마치니의 통일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계획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뛰어난 외교능력으로 국제정치에 이탈리아의 통일 문제를 더 깊게 현실적으로 인식시킨, 사르디니아 왕의 재상이었던 카부르 백작은 프랑스 제3제국과 함께 조성될 새로운 유럽 정세를 통찰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수완을 발휘했다. 1855년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며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간에 크림전쟁이 일어났을 때, 카부르는 피에드몬트 군대를 참전시켜 이탈리아 문제를 외교적 차원에서 다루고자 하면서 이탈리아의 통일을 계획한다. 그의 통일 방안은 사르디니아를 중심으로 계획되어야 하며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지역을 사르디니아 왕국의 영토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크림전쟁 때 피에드몬트 군대를 참전시켜 영국과 프랑스 연합세력에 가담한 것도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기 위한 그의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연합군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에서는 카부르의 계획대로 프랑스와 피에드몬트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롬바르디아는 피에드몬크와 합병을 하게되고,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와 모데나 공국, 에밀리아와 로마의 교황령 등지에서 일어난 혁명적 요소들도 민족이라는 감정 하에 순조롭게 진행되어 사르디니아 왕국에 합병되게 된다.이 무렵, 시칠리아 왁궁의 영토에서도 또 하나의 혁명세력이 있었다. 바로 가리발디 장군이 이끄는 1천 명의 붉은 옷의 지원군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혈통인 부르봉 왕가가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이었는데, 시칠리아 섬에서 부르봉 군대의 저항을 격파하며, 그 여세를 몰아 나폴리까지 진군하여 적을 무찌르게 된다. 그 후, 나폴리 등지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해 피에드몬트와 합병을 하여, 로마와 그 부근, 베네치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성된 이탈리아를 이룩하게 된다.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과 함께 빅토르 엠마뉴엘이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며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함으로 주권재민의 원칙을 실현하게 된다.프로이센과의 동맹으로 1866년 보어전쟁을 일으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후 베네치아를 되었고, 1870년에 이탈리아 군이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의 저항을 제압함으로 전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의 길고 긴 여정이 비로소 마무리되었다.IV. 이탈리아 통일의 역사적 중요성 및 함의이탈리아의 통일은 외부의 지배를 벗어나 단일 이탈리아가 세워졌다는 기쁨과 동시에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루던 그날이 바로 비엔나 회의로부터 출범한 비엔나 체제가 지키고 있는 유럽정치질서가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이 물러가면서 유럽사회를 이끌어온 비엔나 체제는 나폴레옹 이전의 유럽의 현상유지를 외치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을 거슬러 유럽사회를 정리하며 전통적인 정통성의 원칙과 세력균형을 내세워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전통왕조의 정치적인 위상을 재흥시키고 물러났던 군주들이 다시 복귀되었으며 프랑스의 재건을 방지하는 동시에 독립과 통일이라는 민족적 움직임을 억압하였다. 비엔나 체제의 원칙은 이탈리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엔나 회의를 통해 이탈리아는 7개의 군주국들로 분열되었고, 롬바르디아-베네토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판도 안에 있었고 다른 공국들 또한 오스트리아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탈리아 반도가 철저히 유럽 열강들과 전통 왕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의로 분열되어 이탈리아‘민족’이라는 개념이 철저히 짓밟혀버린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서서히 진행된 이탈리아의 통일의 성취는 진정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보수적 국가인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통일에 대한 민족적 움직임이 여러 번 자극받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통일운동 리소르지멘토는 구체제의 억압 속에 넘어지고 일어나길 꿋꿋이 거듭하다 결국 민족주의의 승리로 영광을 보게 되었다. 이는 또한 헌법을 통해 자유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는 것을 통해 자유주의를 거스르는 비엔나 체제를 수정하고 자유주의의 승리를 다시금 쟁취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통일이야 말로 비엔나 회의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시대착오적’정치질서를 해체하는 마지막 단계의 성취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통일이 곧이어 독일 통일의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외교사에 비스마르크 체제라는 또 한 번의 시기를 마련하는 발판의 역할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정치이론성(性)의 역사-앎의 의지by Michel Foucault미셸 푸코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년 10월 15일, 프랑스 푸아티에에서 태어났고 1984년 6월 26일 AIDS로 사망하였다.푸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외과의사로, 푸코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하였다. 푸코의 아버지는 푸코 역시 의사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17살 때 결코 의사가 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였다.푸코는 4살에 누나를 따라 앙리4세 고등학교 부설 유치부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기에는 아직 어린나이였지만 누나와 떨어지기 싫어 떼를 썼기 때문이다. 2년 동안 누나를 따라 교실 뒤편에서 연필을 쥐고 앉아 가끔씩은 선생님 말씀을 듣기도하며 놀았다.그의 나의 13살 때, 그는 생-스타니슬라스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푸코의 고향인 푸아티에는 곧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푸코는 학교 난방을 위해 동기들과 함께 독일 나치군 부대에서 몰래 장작을 훔쳐오기도 했다고 한다.고등학생 시절엔, 푸아티에 고등학교와, 파리에 있는 앙리4세 고등학교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1946년 7월 파리의 명문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erieure)학교의 입학 시험에서 4등으로 합격 하였다. 고등 사범학교에서 그는 학과공부에 열중하였고, 그 후에 입학한 소르본 대학에서 푸코는 헤겔(G. W. Friedrich Hegel)의 『정신현상학』번역자이며 해석자인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 과학사 교수인 조르주 캉킬렘(Georges Canguilhem), gm에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제창자가 되는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강의를 들으며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스물세 살이 되던 해, 푸코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철학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푸코의 대학시절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대학시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게 되는데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시대에 스스로 점점 의기소침해졌던 간들의 모든 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모세혈관과 같이 권력관계는 사회 구석구석까지 망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미시권력이다.푸코는 정치적인 저항은 당위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권력관계는 저항을 통해 변화되기 마련이라는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이러한 푸코의 권력이론은 구조주의 및 후기 구조주의 이론, 페미니즘, 이탈리아 자유주의 운동 등에 다각도로 영향을 끼쳤다. 1968년 이후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푸코가 규정한 자신의 과제는 그의 실천적인 지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우리는 우리를 조용히 혹사하는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전복시켜야 한다.내가 저술 작업에서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푸코의 대표적인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정신병과 심리학』(1954) -앞서 출간했던 『정신병과 인격체』의 일부를 제목을 수정 하여 재출간 한 책.『광기의 역사』(1961)『말과 사물』(1966)『지식의 고고학』(1969)『담론의 질서』(1971)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식 때 행한 연설문을 정리한 책.『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1975)『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6)『성의 역사 - 1. 앎의 의지(1976), 2.쾌락의 활용(1984), 3.자기배려(1984)』『주체의 해석학』(1981-1982)우리,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 우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체제를 오랫동안 감내해 온 것 같고오늘날에도 여전히 짊어지고 있는 듯하다.정숙한 티를 내는 황실여자는우리의 억제되고 말없는 위선적 성)의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닐까“지금 우리의 시대는 섹스에 관해 말하거나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섹스의 표현에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은 듯 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우리는 흔히 근대에 이르러 우아하고 고상한 빅토리아 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섹스를 말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억압되었고, 섹스는 비밀로 지켜야 할 것이며, 겉으로 드러내면 상스럽고 음란하고 추격한 선별의 원칙이 아니라반대로 다형적 성의 확산과 확립이라는 원칙을 따랐다는 것,그리고 앎의 의지가 요지부동의 금기 앞에서 꺾이기는커녕아마 많은 오류를 통해서일 터이지만 오히려 성의 과학을구성하는 데 몰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억압의 가설억압의 가설이 탄생하다오늘날 성이 문제 거리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친 성의 탐닉과 방종이 문제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성도덕의 문란을 경계하는 ‘성위기론’쪽이다. 성위기론은 언제나 가족에 대한 강조와 보수적 가치관을 불러일으키면서 결과적으로 신우익에 실익을 가져다주는 명실상부한 성정치의 지형을 형성하였다.프로이트푸코가 반증하고자 하는 이러한 억압에 관한 쟁점들을 반추하기 위해서는 억압가설을 둘러싼 고전적인 논쟁들을 간단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요인으로서의 ‘성’을 말하며 인간의 심리와 신경증, 나아가 문화까지도 설명하며 성적인 충동을 끌어들이는 프로이트(Freud.A)의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성적 에너지가 과연 인간의 삶 속에서 표출되는 생명의 힘인지, 아니면 문명과 질서를 위해 포기되고 절제되어야 하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충동인지에 대해 다소 모순된 견해를 보여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억압의 가설로 해석할 수 있겠느냐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많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억압의 가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입장들의 교차점에 서 있음은 분명하다.라이히신랄하게 프로이트를 비판했던 라이히(Reigh,W)는 억압가설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성적 충동을 포기하였기에 비로소 문화가 탄생하였다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라이히는 단호하게 비판한다. 초기의 프로이트는 개인과 사회의 병리현상을 성적 충동의 억압으로 설명하였는데, 성을 억압하는 것이 사람들을 병들게 하며 창조적인 문화를 억압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당시 사회의 가정, 종교, 나아가 국가의 질서체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유럽 부르주아들에게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프로이 ‘앎의 의지’가 개인의 은밀한 심층에까지 침투하여 양심이라는 규범적 규제를 작동시켜 성과 관련된 권력-지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세의 고해성사는 하나의 권력 장치인데, 이 장치가 개인으로 하여금 성은 죄악적이고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 인식을 내세워 ‘회개와 자기성찰’을 하도록 넌지시 종용함으로써, 조용하고 은밀하게 고백을 통해 개인의 성에 관한 모든 것이 샅샅이 말해지도록 만든다는 것이고, 그 말해진 것을 통해, 청자로 하여금 권력을 쥘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결국 푸코는 성에 대한 금기를 근본적인 구성요소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함정’이라는 것이다. 억압의 가설에서 부정의 표명을 목적으로 하는 요소들-금지, 거부, 검열, 부인-은 권력의 기술, 앎의 의지와 관련하여 전술적인 역할을 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몇몇 낱말의 금지, 표현의 점잖음, 어휘에 관한 모든 검열은 그 광범위한 복종에 비하면 단지 부차적 장치, 즉 그러한 복종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만하고 기술적으로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일 뿐이었을지 모른다.”“18세기 무렵에 이르면 섹스에 관해 말하라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선동이 일어나는데,그것은 섹스에 관한 일반적 이론의 형태가 아니라 분석, 상세한 결정, 분류, 명시의 형태, 계량적 또는 인과론적 탐구의 형태를 띤다.“이처럼 푸코가 보기에 성에 관한 담론은 억압되거나 금지된 것이라기보다는, 일정한 틀에 따라 생산되고 조절된다. 그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성 장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그래서 제도, 실천, 담론들에서 체제의 핵심에 성을 자리 잡게 하는 권력의 기술을 문제 삼는다. 이것은 침묵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라 놀랄 정도로 수다스럽게 담론을 ‘증식시키고 확대 시킨다’. 그리고는 곧 이러한 다양하게 증식된 성을 권력 장치가 관리한다. 이런 관점으로 성 장치라는 것은 성에 관한 담론과 그 영역들을 조직하면서 성을 일정하게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통치. 다시 말해 엄격한 금지가 아니라 유용하 깊게 분류하여, 그것들을 본능의 ‘전개’와 ‘교란’에 통합시켰으며 관리에 착수했다.중요한 것은 관용의 수준이나 억압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권력의 형식에 있다. 복잡하게 얽힌 잡다한 성적 욕망의 덤불들을 제거하게 하려는 듯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류하여 명명할 때 문제되는 것은 거기에서 행사되는 권력의 기능이다.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성의 과학)과학이 중요시되면서 섹스에 관한 담론도 그 안에서 다양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다양성은 권력 아래에 종속된 점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역사상 성의 진실을 낳기 위한 중요한 두 가지 절차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아르스 에로티카 (성애의 기술)” 와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성의 과학)“이다.먼저 아르스 에로티카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성적인 느낌을 예술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경험에서 얻어지는 쾌락 자체로부터 추출되는 것이다. 반면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성의 과학이란 뜻으로 정신의학으로 나타난 성 담론이며 권력-앎 형태에 의거하는 고백의 방식을 취한다. 이 고백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18세기나 19세기부터 성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다른 발원지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의학은 방탕, 자위, 욕구불만 등을 정신병의 병인론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반하는 성적 행위를 ‘성도착’이라는 질병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이를 통해 환자 아닌 환자들은 보호, 격리, 예방되고, 도처에서 이들에 대한 위험이 알려지고 관심이 촉구되고, 진단이 요청되고, 보고서가 수없이 작성되고, 치료법이 준비된다. 성을 둘러싸고 그것들은 담론을 사방으로 퍼뜨리며, 끊임없는 위험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킨다.이처럼 18세기 이래 성 담론은 그것이 행사되고 있던 바로 거기에서 권력 행사의 수단으로 증가해왔다. 말하게 하려는 선동의 수단들이, 듣고 기록하는 장치들이, 관찰하고 질문하고 정식화하기 위한 장치들이 도처에서 마련되어 왔다. 성은 이제 담론의 존재에 속박 당한다. 경제학, 교육학,이다.
인터넷과 정당정치전 예 진정당은 쇠퇴하는가 ?*정당쇠퇴론: 인터넷의 정치적 활용으로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고, 시민들은 자신의 집이나 직장에서 정치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자투표를 통해 국정에 반영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대의민주주가 도전을 받게 되며 정당을 비롯한 중간조직들의 이익대표의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 즉, 시민들이 더 이상 자신의 의사 결정권을 정치적 대표자에게 위임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정당조직의 도움이 없이도 정치인들은 인터넷의 네트워킹과 쌍방향대화 능력을 활용하여 시민들과 효과적으로 접촉할 수 있기 때문에 ‘정당없는 정치’가 가능하게 된다. 요컨대 ‘정당쇠퇴론’에 의하면 인터넷이 정당조직을 지속적으로 주변화(marginalization)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정당강화론: 인터넷의 활용이 대의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 이 관점은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정치참여, 의사결정,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향상되어 최종적으로 정당으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유권자에게 다가서게 하며, 정당정치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토론의 중심에 서게 한다는 측면을 강조한다. 특히 인터넷 여론조사의 이용은 정당의 유지 및 발전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 인터넷이 정당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느냐는 아직 불확실하며, 인터넷 기술의 어떤 부분이 부각되고 어떤 부분이 활용되느냐에 따라서 정당정치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인터넷이 바꾸는 정당정치*인터넷 정치의 4가지 특성 1) 파편화된 관심과 정보 습득의 편향성2) 감성적인 매체3) 이슈의 연성화4) 의제설정 권력의 민주화*인터넷정치의 특성이 정당정치에 미치는 영향- 인물중심의 결집 / 이슈의 파편화·개인화 / 정치참여동인의 변화:놀이와 재미 / 정당체계의 유동성과 대안적 매체를 통한 참여p. 68 분석표 첨부① 인물 중심의 결집- 쌍방향의 소통이 가능한 인터넷은 정치인들이 정당을 통하지 않고도 지지자나 일반 유권자와 직접 접촉할 수 있게 함. 동시에 다수의 유권자를 당 조직에 의존할 필요 없이 일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 → 개별 정치인이 정당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지지자를 규합하고 결집할 수 있게 하고, 따라서 정당의 약화에 영향을 미침. 이미 여러 나라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정당과는 별도로 자신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개설, 지지자들과 교류.ex) 노사모 - 인터넷을 통해 지지자들이 인물중심의 결집, 팬클럽적 속성의 정치인 지지모임의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사례.⇒ 인터넷을 통한 인물중심의 결집은 자발적인 정치참여의 증대와 정치의 심각성, 형식성을 극복하는 좋은 해결책이 되고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정당정치의 약화와 정치적 책임성 확보의 어려움, 감성정치라는 심각한 문제점도 낳고 있다.⇒ 인터넷이 정치적 의사소통과 집단형성에 효율적인 수단일 뿐 아니라 동시에 매우 감성적 매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인 팬클럽과 같이 인터넷상에서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결집되는 현상은 앞으로도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임.② 이슈의 파편화·개인화: 롱테일의 정치- 인터넷의 등장은 과거에는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거나 표출되기 어려운 소수집단이나 일부의 특수하고 분화된 관심사가 이제는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게 되고, 그만큼 사회적인 소수자, 소수세력의 정치적 영향력도 증대할 수 있게 되었다.- 롱테일의 영역에 놓여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들(예: 동성애집단, 안티사이트)은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과거처럼 제도적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정책결정 등 구체적인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질적 존재가 되었음.⇒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정당의 조직적 대응을 어렵게 하여, 대중정당이 전통적으로 유지해 온 집단적 정체성에 기초하였던 이익표출의 기능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이러한 롱테일 정치는 정당이 수직적인 조직형태보다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허브와 같은 네트워크 중심적인 존재로 변화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제시.③ 정치참여 동인의 변화: 놀이와 정치-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하지만 놀이의 공간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재미를 느꼈다면 오늘날에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다양한 컨텐츠를 즐기는 것을 더 선호 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매체로서의 인터넷이 시각적이고 순간적이며 감각적 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성을 자극하는 감성적 매체인 인터넷 → 감성의 정치를 유발예)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온라인공간상에 활발한 참여와 토론 유도독도 영유권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 민족주의라는 감성을 유도⇒ 매우 감성적이고 즉각적인 대응,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배출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진지한 성찰이나 이성적인 논의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것은 사실.- 감성정치를 불러일으키는 인터넷상의 놀이공간의 사례싸이월드: 사진이나 그래픽 등 이미지 중심으로 배경음악까지 포함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특성을 갖는 감성 중심의 공간.자신의 생각과 활동을 널리 알려야 하는 정치인들로서는 건조한 방식의 홍보보보다 인간적 친근감을 강조할 수 있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기능이 매력적.ex) 박근혜의 미니홈피.- 싸이월드를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한 정치인의 예.- 관음증적인 속성을 지닌 싸이월드가 일반인들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자라 온 왕실공주의 생활을 동경하고 궁금해 하듯, 대통령의 딸이 어떻게성장해왔고 일상생활에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 이는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데 기여.물론, 이 호감이 선거에서 ‘표’로 이어질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특정 정치인에 대한 감성적 접근을 유발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 이러한 인터넷을 통한 정치참여는 감성적인 속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시각적이고 순간적이고 감각적이라는 인터넷 매체의 특성뿐만 아니라 재미와 놀이의 공간으로 인터넷을 활용하는 네티즌들의 행태적 특성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에 대한 접근방식이 과거와는 달리 일상적이고 가볍고 문화적인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그동안 지나친 엄숙주의, 권위적 문화로 인해 정치에 거리감을 느끼게 하였던 반면, 인터넷을 통한 정치참여는 탈권위, 탈엄숙주의, 탈형식주의라는 특성으로 인해 정치에 대한 거리감, 거부감을 줄여주는 긍정적 기능 제공한다.⇒ 동시에 감성적 정치는 인기를 끌기위한 무책임한 포퓰리즘을 유발할 우려가 있다. 인터넷상에서 관심을 받고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게 하는 분열적 이슈나 혹은 민족주의와 같은 예민한 감성적 이슈를 내던짐으로써 인터넷 공간내의 정치참여를 활성화시키고 이를 자신에 대한 지지로 연결시키려는 유혹을 정치인들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정당정치의 제도화 수준이 미약한 상황에서는 개별 정치인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인터넷의 이러한 특성이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④ 정당체계의 유동성과 대안적 매체를 통한 참여- 인터넷은 개별적 정치 행위자의 수준을 넘어 정당체계 전반에도 영향.- 새로운 정치적 결사체의 등장이 용이해지면서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신생정당의 출현가능성과 그로인한 정당체계의 변화도 예상할 수 있게 됨 → 정보화로 인해 정당이나 정치적 결사체의 형성이 사이버 공동체 내에서 매우 ‘저렴하게’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에 과거 오프라인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창당 작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신생정당이 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신생정당이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낸다면 기존 정당체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또한 기존의 정당을 우회하여 정치적 결정과정에 인터넷을 통해 시민사회와 국가가 직접 연결될 가능성 존재 → 전통적으로 이익집약과 이익표출의 제도적 채널링의 역할을 담당해 온 정당의 기능을 대신하여 인터넷이 시민사회와 국가를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연계수단으로 부상하면서 기존 정당의 기능이 크게 약화될 가능성도 존재. 이러한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에 대한 논의와 관련될 것이고, 이는 그만큼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대의민주주의 체제 역시 결과적으로 약화될 수 있을 것.민주화의 진전과 인터넷 정치* 근대 대의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당은 시민사회 내에 존재하는 이익을 결집하고 그 결집된 힘을 통해 권력의 장악을 도모해 왔다. 정당 스스로 정책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제시된 여러 가지 중요한 이슈나 요구를 수용하고 정책화하여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또한 정당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통해 지지자들을 묶어내는 중심적 기구로 기능해 왔다.
I. 서론: 1923년경의 유럽사회유럽 전역을 피로 물들였던 1차 세계대전은 1918년에 종식되었고, 평화조약도 체결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불안감과 이면의 갈등과 대립은 여전히 유럽사회에 팽배하고 있었다. 독일의 무력 공격에 치를 떠는 프랑스는 독일의 재건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패전국 독일에게 부과된 비현실적으로 과도한 배상금을 철저하게 요구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고려하여 독일을 완전히 짓밟기 보다는 그들의 지불능력을 고려하여 배상을 시키자고 주장하며 프랑스와 의견의 불일치를 보였다. 패전 당사국 독일은 그들에게 부과된 1300억 금 마르크를 웃도는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통화를 찍어내는 방법 밖에 없었고 이러한 통화의 남발로 마르크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게 되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파탄 직전의 경제상황의 지경에 놓이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1923년 프랑스는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벨기에와 더불어 루르 지역을 점령)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유럽은 차가운 사회 분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냉랭한 분위기 속 패전국 독일의 돌파구는 무엇이었으며, 유럽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II. 본 론독일 내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로 시작된 베르사유체제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끊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라인란트를 점령했는데, 이 지역을 3등분 하여 한 지역씩 5년 간격으로 철병하기로 하였으나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연합국 군사통제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라 1924년 12월에 있었던 대사회의에서 1925년 1월 10일로 예정된 제 1차 철병을 하지 않기로 결정, 철군하지 않고 있는 것에 독일의 불만이 가득하였다.그러나 독일은 이에 대해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대책이 없었다. 루르 지역을 점령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지시나 규제에 대해 굼뜨고 게으르게 반응하는 정도에 그치는 저항이었다.피동적 저항으로 별다른 해결되는 것 없는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있던 중 1923년 11월 슈트제레만(Stresemann)이 독일 외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현재의 독일이 취하고 있는 수동적 저항 정책은 국제적으로 독일의 입지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베르사유조약을 인정하고 그 내용과 조약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연합국의 호의를 얻어내 독일이 재기 하는 데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베르사유조약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지금으로썬 더더욱 그 조약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그래야 궁극적으로 독일이 그 조약을 수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베르사유조약 이행정책을 내세워 연합국, 더 나아가 프랑스와 적극적인 대화를 모색하는 정책방향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슈트제레만은 한 가지 조약을 제안하게 된다. 이는 1925년 1월, 2월 즈음이었다.II-1. 독일의 제안독일 외상 슈트제레만의 제안은 먼저 연합국이 점령하고 있는 라인란트 지역에 관해서였다. 이는 후의 로카르노 조약 체결 시 ‘라인란트 규약’이라고 불리게 되는 라인란트의 이해당사자들- 즉,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간의 상호보장에 관한 것인데, 라인란트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서로 전쟁에 호소하지 않는 상호 불가침을 보장하자는 내용이었다. 독일로서는 베르사유조약을 인정하고 성실히 잘 이행하는 것을 약속함과 동시에 연합군 철수의 문제를 타협하기 위해 라인란트의 보장을 원했던 것이다.사실 라인란트에 관한 이러한 제안은 1923년에도 제기되었었는데 성립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미국에게 당시의 독일 수상 쿠노(Cuno)가 주미 독일대사를 통해 미국을 보장국으로 하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독일이 국민투표에서 승인이 없다면 서로 전쟁을 하지 말 것을 약속하자고 제안하였지만 프랑스의 수상이 거절하여 이 제안이 좌절된 적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이 시기는 독일의 부흥을 저지하려는 안보정책을 취하던 프랑스가 배상금 불이행 문제로 루르 지역에 군사점령하려고 하던 시기였기에 독일의 제의가 거부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1925년 경 슈트제레만 내각이 베르사유체제를 인정하고 연합국에 협조적인 외교정책을 취하자, 당시 주독 영국대사인 대버넌이 2년 전에 있었던 제안을 다시 수정하여 제출할 것을 권하게 되고, 슈트제레만은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아 로카르노 조약의 제안을 결정하게 된다.이러한 제안의 이면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2국 동맹을 체결할지 모른다는 정보를 독일이 입수하게 된 것 또한 한 몫을 하였다. 실제로 프랑스는 독일의 재기를 우려하여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서로가 상정하는 적대국에 차이가 있었고 동맹조약의 적용범위에서도 이견을 보여 영국과의 동맹교섭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러한 정보가 독일 외무성에 들어가는 바람에 슈트제레만은 영-프의 2국 동맹을 방지하기 위해 그에 앞서 프-독의 불가침 조약을 제의하는 것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것이다.그리하여 독일은 1925년 1월에는 영국에게, 2월에는 프랑스에게 라인란트 이해 당사국간의 불가침의 제안을 하게 된다.II-2. 영국의 반응독일의 제안은 처음부터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영국 내각의 의견 불일치도 있었고 대륙 내의 문제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영국이 제안들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당시의 유럽 현실을 보아서는 영국이 가장 중요시하는 유럽의 세력균형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앞서 언급한 주독 영국대사인 대버넌을 통해 1924년 볼드윈 외상에 취임한 체임벌린을 비롯한 영국 내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버넌 경은 체임벌린에게 현재의 서유럽 현실을 지적하며 만약 독일이 지금 내민 손을 영국이 잡아주지 않는다면 독일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반서유럽 블록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을 지적하며 세력균형의 원칙을 상기시켰다. 또한 1차 대전의 악몽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동맹들 간의 대립을 다시 유발시켜서는 안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프랑스가 원하고 있는 영-프의 2국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될 것을 주장하였다.결국, 세력균형을 통한 유럽의 안정과 평화를 핵심 정책으로 삼고 있던 영국은 당시의 현실을 고려하면 프랑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동시에 독일이 내민 손도 잡아주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어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II-3. 프랑스의 입장독일은 1925년 1월에 영국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제안을 2월에 프랑스에게도 하는데, 6월이 되자 프랑스에는 온건유화정책을 취하는 에리오 내각이 구성되고 브리앙이 외상으로 취임하게 된다.영국-프랑스의 2국 동맹이 좌절되고 영국이 슈트제레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프랑스는 최소한 베르사유조약에서 규정한 라인란트 비무장의 규정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영국의 지원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독일 부흥으로부터 프랑스의 안전을 보장할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런던에서 열린 체임벌린과 브리앙의 회담을 통해 독일이 도발받지 않은 침량행위와 무력사용,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에서의 군사 훈련 등의 경우가 있을 시 영국이 즉각적 군사지원을 실행할 것으로 타협을 하게 된다.II-4. 로카르노 조약의 성립과 그 내용독일이 제안한 내용이 영국과 프랑스, 독일 간에 어느 정도 합의되어지자 이제 라인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 간에 불가침, 중재, 군사협정에 관한 회의가 스위스의 로카르노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7개국 대표들이 참여한 스위스 로카르노에서의 회의는 10월 5일에 시작해 16일에 최종 의정서가 채택되어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된다. 이 로카르노 조약의 주요 내용은 라인란트 규약과, 라인 이해관계국들 간의 중재재판조약, 그리고 프랑스-폴란드,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의 상호보장조약으로 그 내용의 범위를 구분할 수 있다.먼저, ‘라인란트 규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이탈리아 간의 상호보장 조약은 독일이 제안한 로카르노 조약의 핵심이었다. 이 조약을 통해 영국과 이탈리아를 보장국으로 하여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은 현재 국경의 유지를 부장하고 서로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것을 약속하였고 각각 베르사유 조약 제 42조), 43조)의 내용을 확인하였다. 이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한 라인란트 비무장 조항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다음으로 중재 재판에 관한 조약은 프랑스-독일, 벨기에-독일 간에 이루어진 조약이었는데, 중재재판을 통해 이해 당사국 간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규정하며 독일의 서부국경을 보장하였다는 특징을 가진다.또한, 공식적인 최종의정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로카르노 조약 체결과 같은 날에 맺어진 조약으로서 로카르노 조약과 맞물려 로카르노 조약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프랑스-폴란드 간의, 그리고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간의 상호원조조약이 있었다.프랑스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상호원조조약을 통해서 로카르노 조약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독일의 동부 국경에서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체결한 것으로 그 내용은 독일이 도발 받지 않는 전쟁을 감행할 경우 서로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연맹이사회의 만장일치를 전제로 하는 연맹규약이었으며 동시에 독일을 경계하기 위해 독일의 동부국경으로부터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부담을 프랑스가 지게 된 것을 의미했다.II-5. 조약의 의의와 평가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의 성립으로 조약 체결 다음 해인 1926년에 국제 연맹에 가입하게 되고 상임이사국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이라는 영원한 꼬리표를 달고 심각한 경제상황까지 덮쳐 재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독일이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과 국제연맹 가입으로 국제적인 분쟁에 평화적인 자세로 임할 것과 서유럽 질서의 현상유지를 약속하였다.
중국의 시민사회(민간단체)의 발전과 현황정치외교학과4학년 유상인, 전예진1. 신문기사 소개1-1 中시민단체 7년새 2배 늘어 [동아일보] 2008-12-17 18면 총45면 국제·외신 813자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정부가 아닌 시민이 주도해 만든 민간조직이 늘고 있다. 또 올해 들어 대학졸업생 4명 중 한 명은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도시 실업률은 9.4%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중국 사회과학원은 15일 올해의 사회정세를 분석하고 내년도 정세를 예측한 ‘2009년 사회 청서’를 발표했다.이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중국의 민간조직은 사회단체 20만7000개, 비영리기업 17만3000개, 기금회 1361개 등 모두 38만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2001년 21만1000여 개의 2배에 이르는 수치로 민간조직이 7년 만에 2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이다. 이 같은 민간조직 급증은 중국에서도 점차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된다.또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지난해보다 2.4%포인트 하락한 9.5%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내년도엔 8% 정도로 더욱 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사회과학원의 이 같은 예측은 중국의 올해 4분기 경제성장률이 8.3%로 떨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올해 3분기까지의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9.9%였다.또 올해 졸업한 560만 명의 대학생 가운데 150만 명은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도시 실업률은 중국 전체 실업률 4% 선의 2배가 넘는 9.4%로 나타났다.이에 따라 올해 도시지역의 1인당 가처분 소득은 7% 증가에 그쳐 농촌의 순수입 증가 속도와 비슷할 것으로 예상됐다.올해 들어 폭설과 쓰촨(四川)대지진 등으로 1조 위안(약 200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을 보았다고 분석했다.(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이 기사를 보면 중국의 민간단체의 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이는 정부에서 추산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가 인정하는 민간 단체외에도 많은 수의 단체나 조안먼사태 20주년을 앞두고는 반체제 인사에 대해 강제격리, 가택연금 등의 조치가 대대적으로 취해졌다.중국은 세계 최다 사형집행 국가다. 최소한 수백명이 한 해 동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다. 2007년에만 470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중국 정부는 1998년 사형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국제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비준이 미뤄지면서 사형이 남용되고 있다.중국의 인권 및 민주화의 현주소는 지난해 12월10일 발표된 ‘08헌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가 초안한 ‘08헌장’은 중국 사회를 무법, 무질서, 부패, 인권부재, 도덕상실, 사회양극화로 규정한 뒤 공산당 일당독재 종식,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등 19가지 조치를 제안했다. 헌법 개정, 삼권분립 등을 통해 서구식 시민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마오쩌둥은 공산당이 장기집권할 수 있는 열쇠는 다름아닌 ‘민주’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올해 초 후진타오 주석은 공산당 대회 연설에서 ‘민주’라는 단어를 60번 이상 사용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민주는 중국식 사회주의 하에서 허용되는 제한적인 민주다. 올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우방궈 상무위원장은 “서방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따라하거나 절대로 다당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사회불평등과 인권 침해가 심화되는 속에서 아래로부터 솟구치는 시민민주주의의 요구를 외면할 수만도 없는 처지다. 미 남캘리포니아대 아시아센터의 스탠리 로젠 소장은 중국이 중앙권력을 더욱 집중화하면서 하부 조직은 개혁해가는 ‘혼합형 민주주의’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베이징│조운찬 특파원)⇒ 두 번째 기사를 통해서 현재 중국사회에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가는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시민민주주의, 시민사회의 형성에 대한 요구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그래서 첫 번째 기사에서처럼 많은 민간단체가 생겨나는 것 같지만 그것이 대부분은 국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성격의 조직이라는 현실을 인지하고 중국의 시민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원을 받고 조직, 인사, 재정, 운영 등에서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사실상 국가기구와 별 차이가 없는 관변조직, 간접적인 통제를 받는 반관반민 조직이기 때문에 모든 민간조직을 자주적 사회조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양적으로도 관변조직과 반관반민 조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이남주 2007 PP.18~19) 즉 우리가 흔히 NGO라고 생각하는 개념은 국가우위의 구조를 띠고 있는 체제에서 활동하는 중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성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라는 점을 생각해야 하겠다.(2) 중국에서 시민사회의 대두 배경중국에서는 1950년대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면서 공동소유제와 계획경제로의 전환을 통해 사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관리체제가 구축되었다. 이것은 이제 중국 사회가 당을 중심으로 하는 당국가 체제에 종적으로 편입되었고, 사회조직 간의 횡적인 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러다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국가-사회관계 변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경제적 효율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 범위를 축소했고 자원의 횡적 이동을 허용하는 시장의 형성을 용인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국가-사회의 관계도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이러한 변화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고 1989년 6월 천안문 사건 이후 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벗어나며 형성되는 사회의 자주성이 갖는 의미가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게 된다.천안문사태를 전후로 시민사회론이 중국에 적용된 데에는 다음 두 가지 문제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나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비판적 지식인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대중(도시민)의 시위 참여와 학생 활동에 대한 지지, 이러한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한 다양한 조직적 활동 등을 설명하기 위해 시민사회론을 도입한 경우이며 이는 주로와 상호의존이 이루어지는 관계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조합주의적 접근은 중국의 국가-사회관계의 기본 구조를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 국가-사회관계를 변화시킬 주요 동력이 될 수 있는 중국사회의 역동성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2) 시민사회적 접근조합주의적 접근법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연구자들이 시민사회적 접근을 통해 중국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고자 했다. 중국에서 시민사회론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전후로 권위주의적 국가체제에 도전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했던 동력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처음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시민사회론은 기본적으로 리버럴 민주주의 라는 서구적 정치이념과 정치체제를 전제로 하였다. 따라서 서구와 다른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는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웠다. 이에 시민사회론적 접근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시민사회론을 재구성하였는데 이를‘최소주의 시민사회론’이라고 한다.3) 최소주의 시민사회론최소주의 시민사회론은 서구의 시민사회 모델의 모든 특징을 발견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시민사회의 형성에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 기본적 특징, 즉 국가로부터 자주적인 사회공간으로서의 시민사회의 존재 여부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접근은 자주적인 사회공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주적 사회조직, NGO를 중국 시민사회 연구의 주요 분석대상으로 한다. 또한 최소주의 시민사회론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접근을 택하지 않으며 시민사회론과 민주화론과의 관계를 1990년대 초반의 시민사회론처럼 강하게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즉, 현재의 국가-사회 관계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정치, 사회발전과 관련해 국가와 시민사회의 갈등적 측면만이 아니라 협력적 측면이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시민사회의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있어서는 시민사회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요인과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될 수 있제로 중국 정부는 1998년 제정된 사회단체등리조례라는 법으로 NGO 단체들을 관리하고 있는데 그 종류를 보면, 인민단체, 사업단위, 등기면제된 사회단체 등 관변적 성격이 강한 단체들이 대부분이며, 나머지 공상국에 등록하는 NGO들은 상대적 자율성은 가지고 있지만 영리단체를 중심으로 향,촌 단위의 자율적인 농민들의 자치조직으로 일반적 의미의 공익성, 비영리서응ㄹ 중심으로 보는 NGO로 보기는 힘든 조직들이 많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NGO들은 중국내에서 사회단체로서 법적인 승인을 받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중화환경보호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2,768개의 환경보호 관련 NGO 중에서 민정부에 등록한 경우는 23.3%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단체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존공간을 확보하거나, 상대적으로 등록이 용이한 공상국에 영리단체로 등록하였다가 이후 전환하기도 한다.실제로 일반적인 NGO의 조직성, 비정부성, 비영리성, 자치성, 자발성 등의 특징으로 본다면 중국 정부에 등록된 대다수의 관변, 반관변적 성격이 강한 NGO들은 엄밀한 의미로 중국사회의 시민사회 자주성의 성장을 나타내는 조직으로 보기는 힘들다.이런 NGO의 경우 법적, 경제적 제약 속에서도 스스로의 활동성과 자주성을 높이기 위해 협력적 측면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첫째, 국가의 공식이데올로기를 집단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즉, 전체 인민이 이익을 대표한다는 중국의 사회주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민중이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정부는 소위 조화로운 사회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개혁개방에서 소외된 취약계층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주변화된 계층의 이익과 권리 보호를 주요 목표로 삼아 왔던 공익적 NGO활동의 정당성을 강화시킨다. 둘째, NGO활동에 있어 중국정부가 가장 경계하는 사회안정론에 대해서도 중국의 NGO들은 그들의 존재가 사회불안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