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저 불 지난 뒤에흐르는 물로 만나자.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위 텍스트는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제시된 텍스트에서의 ‘불’이라는 시어에 대해 우리는 보편적으로 ‘소멸’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물’이라는 시어를 보았을 때 우리는 ‘정화’를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불’에 대해서 소멸, 재앙 등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고 이와 반대로 ‘물’에 대해서는 태초의 근원, 정화, 생성 등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는 물과 불이라는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단어에서도 나타난다. ‘봄[春]’에 대해서는 ‘만물의 소생’을, ‘겨울[冬]’에 대해서는 ‘만물의 소멸’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문학에서는 원형상징(原形象徵)이라는 용어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면 원형상징에서 말하고 있는 ‘원형(原形)’이란 무엇일까?국어사전에서는 원형에 대해서 본능과 함께 유전적으로 갖추어지며 집단 무의식을 구성하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에 대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엄마!”라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수의 사람들이 모일 때 원을 형성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집단 무의식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인간의 의식의 저변에 존재하고 있는 원형(原形)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문화지리학적 측면에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2. 원형의 정의와 원형의 사례들2.1. 원형이란 무엇인가?임덕순은 원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인간에게는 어떤 형상이나 외관을 구성하게 하는,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속에 존재하는, 본능적으로 추구코자 하는, 이상적인 관념이나 이미지가 근원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원초적인 관념이나 이미지를 원형(archetype)이라고 한다. 이 원형은 시대과정은 유전적인 것이기에 선천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집단에서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폐쇄적으로 갇혀있기 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인류(全人類)가 보편적으로 동일한 원형을 갖고 있다. 임덕순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원형은 ‘원초적인 관념이나 이미지’이다. 즉, 문명 이전의 시기, 소위 원시시대라고 불리는 시기부터 원형에 대한 관념이 생성되었다는 말이다.원시시대부터 인류는 지속적으로 같은 유형의 경험을 반복하는 동안 일정한 정신적 반응을 하게 되고 그것이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특유의 집단적 무의식이 생성되는 것이다. 인류는 불을 잘못 사용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것’이 사라지는 장면을 끊임없이 목격하게 되고 그것이 ‘소멸’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식량, 혹은 거주지 등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이 불에 의해 소멸을 가져다주게 됨으로써 불은 ‘재앙’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인류는 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진다는 경험을 통해 ‘정화’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물을 통해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식량 자원을 얻게 됨으로써 ‘생성’, ‘풍요’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인류가 이러한 관념을 갖게 된 것은 개개인이 강조되기 시작한 문명 이후의 시대가 아닌 공동체를 중요시한 문명 이전의 시대였다. 집단 공동체가 함께 생활하면서 체험한 것들이 모두 관념화된 것이다. 그렇기에 원형은 ‘집단성’을 갖게 된다.그런데 계속 예를 들고 있는 ‘불’이나 ‘물’과 같은 원형적 이미지는 인류가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서 생겨난 관념이다. 그러나 임덕순은 본능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관념이나 이미지를 원형이라고 얘기한다.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 생겨난 관념이나 본능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 관념 모두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부정적인 것은 기피하고 긍정적인 것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2.2 원형의 첫 번째 - 원(圓)막연히 ‘원(圓)’히 빈 것 같지만 오히려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은 영원과 전체(全體)를 상징하기도 한다. 원은 가능한 모든 형상을 그 안에 포함할 수 있는 완전한 도형이요,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도형이라고 나타프는 말한 바 있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음으로 인해 선적으로는 닫힌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선적으로는 닫힌 모습을 갖는 원이 면적으로는 오히려 개방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정방형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정방형 역시 결코 선적으로는 개방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시작과 끝의 지점이 만나는 지점들로 인해서 폐쇄적인 느낌을 갖게 하지만 원은 시작과 끝의 지점이 만나는 지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폐쇄적인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다.인류가 무의식 속에 원(圓)에 대한 동경을 갖는 것은 원 자체가 갖는 이러한 특성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문명 이전의 시기에 존재했던 태양 숭배, 달 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도 있다. 불을 발견하기 이전의 고대인들에게는 ‘빛’이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생존 조건의 하나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 태양은 사라지고 인류는 어둠을 맞이하면서 그들의 ‘적’에게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밤 동안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기억 때문에 빛을 주는 태양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달 또한 유사하였다. 미약하나마 어둠 속에서 빛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양과 달을 보면서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은 점차 경외감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경외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태양과 달을 무의식 속에 하나의 원형으로 자리 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태양과 달을 바라보면서 숭배하게 되고 그 모양을 본 딴 것을 또 다른 상징물로써 숭배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태양과 달의 원형(圓形)이 또 다른 원형(原形)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고대인들의 문화에서 원형(圓形)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위 사진은 전곡리에 있는 구망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2.3 원형의 두 번째 사례 - 정방형(正方形)원형 중에서 원(圓)이 가장 우선적이라면, 정방형은 차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원의 개방성을 이야기하면서 정방형의 폐쇄성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다. 기본적으로 폐쇄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무의식 속에서 하나의 원형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정방형은 원과 달리 처음과 끝이 존재한다. 처음과 끝이 만난 지점들로 인해서 정방형은 그 특유의 폐쇄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처음과 끝이 만나는 지점들이 불규칙하지 않다. 시작점에서 일정한 거리를 지나면 끝이 나오고, 다시 그 점을 시작으로 동일한 거리를 가면 끝이 나온다. 이렇게 이루어진 정방형은 네 변이 모두 동일한 거리를 갖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준다.원형(圓形)이 인간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한 것이라면 차선으로 선택된 정방형은 상대적으로 원형보다 범접하기가 쉬운 공간이다. 원형은 그 자체로서 가득 차있는 완전한 도형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두어야 한다. 그러나 정방형은 가득 차 있지 않는 그 불완전 때문에 오히려 인간들로 하여금 보다 가깝게 느꼈을 수도 있다. 콜럼버스가 ‘지구는 둥글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대인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하늘은 둥글고 끝이 없다’라는 생각은 태양과 달로 인한 원에대한 경외감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가득 차 있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도형이지만 차마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인간들이 살고 있는 땅은 정방형으로 인식을 하였는데, 이는 정방형은 원형(圓形)이 될 수 없으나 원형을 닮고 있는 불완전성 때문에 인류가 사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끝이 존재하는 정방형의 특성 때문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구도 끝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바다로 계속 항해를 하다보면 벼랑이 나오고 벼랑에서 떨어지면 지옥에 역할을 하던 공간이라는 설도 있다. 확실한 것은 없으나 여러 가지 설들의 공통점은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첨성대의 모양을 살펴보면 바닥은 둥글고 하늘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면서 정방형의 모양을 띄게 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의 사상과 다소 반대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천문대의 위쪽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천원지방의 모양이 확연하게 드러난다.첨성대를 구축할 때 쓰인 돌의 개수가 362개라고 하는데 이것은 음력으로 계산한 1년의 날 수와 일치한다. 원주형으로 쌓은 27단에다 맨 위에 井자 모양의 돌까지 28단은 별자리 28숙(宿)을 상징한다. 첨성대 중간의 창 아래위 12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꼭대기의 井자 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 햇빛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비쳤으며 하지와 동지 때는 아랫부분에서 햇빛이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첨성대는 우주를 상징하고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과 원형을 적절히 배합해 안정감 있고 온순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꼭대기의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의 절반으로 된 것도 안정감을 표현하는데 한몫하고 있다.2.4. 원형의 세 번째 사례 - 어머니원형(原形)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의미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동일할 것이다. 물리적, 생물적으로 보았을 때 어머니는 자신을 낳아준 존재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단순히 자신을 낳아준 ‘존재’로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적 인류에게 있어 어머니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집단성을 갖고 있는 원형(原形)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원형으로서의 ‘어머니’는 시, 공간을 뛰어넘어 가장 포괄적인 집단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누구나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엄마’라고 소리치게 된다. 또한 어린이다.
1. 서 론국문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문학의 범위와 갈래를 명확하게 하고,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하는 것이다. 국문학의 범위와 갈래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공시적인 시각에서의 문학연구라고 본다면,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하는 것은 통시적인 시각에서의 문학연구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는 공시적인 관점과 통시적인 관점에서의 연구가 별개로 이루어지지 않고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는 문학의 전반적인 흐름이 운문에서 산문, 즉 서사시에서 소설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국문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국문학에서도 운문에서 산문으로 발전하는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범위에 있어서 한문학이나 구비문학, 그리고 갈래체계에 있어서 중간?혼합갈래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공시적 연구에 있어서 특수성이 존재하는 만큼, 통시적 연구에 있어서도 특수성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문학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이런 특수성을 배제하고 단순히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을 문학사에 적용하는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식의 일원론적 시대구분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원론의 관점에서 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작품군의 변천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작품의 연대순 나열은 지나치게 세분화될 수 있기에, 여기에 좀더 확대하여 갈래의 변천, 그리고 갈래체계의 변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표현론적 관점을 적용시켜 볼 때 문학 담당층의 변천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문학사에서의 시대구분은 다원론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관에 입각해 구분했는가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2. 본 론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은 안확을 시작으로 이명선, 조윤제, 이병기, 장덕순, 조동일 등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1)안확의 시대구분안확은 1922년 『조선문학사』에서 국문학의 시대구분을 해놓았다. 안확의 시대구분은 고대와 근세의 구분이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안확은 上古문학, 中古문학, 近古문학, 근세문학, 최근세 문학 이렇게 다섯가지로 나누었지만 상고와 중고(삼국시대), 근고(고려시대)의 고대문학과, 근세(조선), 최근세(갑오경장)의 근세라는 이분법에 의해 분류가 되었다. 또한 안확의 시대구분은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체계 고조선→삼국→고려→조선의 일원론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안확의 시대구분은 국문학사를 최초로 구분하였고, 또 식민지 하에서 시대구분을 통한 국문학연구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할 것이다.2)이명선의 시대구분이명선은 1948년 『조선문학사』에서 시대구분을 해놓았다. 안확의 시대구분이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면, 이명선은 사회?경제사적인 관점에서 기술해놓았다. 이명선의 이러한 점은 정통마르크시즘에 입각한 유물사관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명선의 시대구분은 단순히 문학사적인 것을 뛰어넘어 당시까지 연구된 사회경제사에 관해서도 통시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이명선은 고대의 원시문학과 중세기의 봉건문학으로 분류를 해놓고 있지만, 태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고대로, 남북국시대의 신라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를 중세기로 분류하고 있다. 이명선은 시대구분함에 있어서 유럽의 문학이론을 많이 적용시켰다고 밝혀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문학을 유럽의 문학사에 예속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유럽문학사에 비추어봄으로써 국문학의 특수성을 부각시켜보자는 의도이다. 이명선의 시대구분은 단순히 문학사의 시대구분에 있어 왕조사와 연결시키려 한다거나 일원론적인 체계에서의 시대구분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국문학을 통시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3)조윤제의 시대구분조윤제는 이명선과 비슷한 시기인 1949년 『국문학사』에서 시대구분을 하였다. 여기서 태동시대(통일신라 이전), 형성시대(통일신라 일대), 위축시대(고려 일대), 소생시대(조선 태조-성종), 육성시대(연산군-선조 임란), 발전시대(선조 임란-경종), 반성시대(영조-갑오경장), 운동시대(갑오경장-3?1운동), 복귀시대(3?1운동 이후)로 구분을 해놓았다가 1962년 『한국문학사』에서 태동시대, 형성시대, 위축시대(무신집권 이전), 잠동시대(무신집권 이후), 소생시대(훈민정음 탄생시기), 육성시대, 발전시대, 반성시대, 운동시대, 유신시대(3?1운동 이후), 재건시대(해방이후)로 다시 구분하였다. 조윤제의 문학사구분은 민족사를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한다는 신민족 사관에 입각하였는데 문학사를 개별로 보지 않고 하나의 큰 유기체로 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4)장덕순의 시대구분장덕순은 1975년 『한국문학사』에서 시대구분을 밝혀놓았다. 구비문학, 고대가요, 향가문학, 고려문학, 조선문학, 근대문학의 순으로 시대구분을 해놓았는데 이는 왕조교체에 의한 문학사를 구분해놓은 것으로 안확의 시대구분과 마찬가지로 일원론적인 관점을 벗어나지못했다. 그러나 장덕순은 자칫 문학사에서 누락될 수 있는 구비문학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5)조동일의 시대구분조동일은 1988년 『한국문학사』에서 시대구분을 하였다. 조동일의 시대구분의 큰 틀은 고대-중세-근대라는 일반적인 역사 시대구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동일은 이 삼분된 시대구분 안에서 원시문학, 고대문학, 중세문학(중세전기문학/중세후기문학),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근대문학으로 더 세분화시켰다. 또한 중세문학과 이행기에는 1기와 2기를 따로 설정함으로써 국문학사를 구분하는데 있어 국문학의 특수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첫째시대인 원시문학에서는 구비문학을 논의하였고, 둘째시대의 고대문학에서는 건국신화의 출현과 한문학의 성립, 향가의 형성에 주목했다. 셋째시대는 중세전기로 제1기는 삼국시대와 발해를 우리 역사로 편입한 남북국 시대로 설정했으며, 제2기는 불교문학과 한문학에 향가가 일정기간 지속되는 고려전기로 제시했다. 넷째 시대는 중세후기로 경기체가의 시작을 기점으로 잡아 제1기에서는 속악가사와 경기체가가 중심을 이루는 고려후기, 제2기는 경기체가에 시조와 가사, 악장이 등장하는 조선 전기로 설정했다. 다섯째 시대는 중세적인 문학과 근대적 문학이 공존하면서 서로 다툰 것을 기본 특징으로 삼았다. 여섯째 시대는 개화기 이후 신문학 운동을 중심으로 한문학이 밀려나고, 문학을 구어문학만인 것으로 성격을 재규명한 노력과 함께 언문일치를 실천한 시기로 잡았다.
1. 서 론서양의 문학사는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전반적인 경향, 즉 문예사조의 흐름을 따라서 문학이 함께 발전해왔다. 이들 문예사조는 근원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서 시작하여 중세 크리스트 문화와 르네상스를 거쳐 고전주의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문예사조가 예술의 전반적인 경향을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의 전반적인 경향이 예술에 반영되었었고, 이들은 앞선 사조에 대해 반대하거나 그 전 사조의 계보를 이어나가는 헤겔의 정반합 논리로 발전적인 전개양상을 보여 왔다. 그러나 동양,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 문예사조 흐름과 같이 앞선 문학 경향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지배층의 영향에 의해 문학이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앞선 문학 경향에 대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전반적으로 서정 갈래에서 서사 갈래로 발전양상이 보인 것은 공통적이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구분이 모호한 성격의 갈래가 나타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고대-중세-근대-현대로 나누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문예사조의 흐름에 따라 나누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상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전에 논의되었던 국문학사 시대 구분에서 조동일 교수와 같이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여 고전을 ‘고대-중세-근대’로 나누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들을 고전 문학사의 한 영역 속에 포함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한국사에서 조선 후기 일본의 식민화로 인해 문학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이 그 전 시대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문물들이 유입된 까닭이다. 그렇기에 한국문학사에서 근대문학의 기점은 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자연히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관계에서도 고찰이 필요한 까닭이다.2. 본 론한국 문학사에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근대문학의 기점뿐만 아니라 관계 규명 그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제의 식민문화가 가장 영향이 크다. 사실상 고전문학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왕조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고전문학의 연구대상은 구전문학과 기록문학 둘 다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구전문학보다는 기록문학의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있는 상태이며 문자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은 민중보다는 지배층이었기 때문이다. 기록문학을 살펴보았을 때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오면서 고전문학사의 흐름은 지배층의 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전문학사의 흐름이 지배층의 변천사와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고 지배층이 바뀌면 그들이 향유했던 문학의 형태도 조금씩 변화했다. 그러나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앞선 문학 형태를 조금씩 수용했기에 한국 문학사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연속성의 개념으로서 한국 문학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문학의 발전에 정체성이 있었는데 이를 단절로 파악하여 전통 단절론이 대두되는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전통단절론과 전통 계승론은 팽팽한 대립을 하며 논의되어왔다.1) 전통단절론 - 임화의 이식문화론을 중심으로개화기 후의 한국문학은 개화기 이전의 한국문학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 이전의 문학은 근대정신이 없는 과거의 문학이며, 그 이후의 문학은 시민정신의 구현에 의한 구라파 장르를 채용한 새로운 문학이다. 그 둘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전통단절론이다.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듯하다. 이러한 전통단절론은 식민사관을 기저에 깔고 있다. 식민사관은 일제 어용학자들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마련한 술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창조성과 능동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그것에 의하면 한국문화는 중국문화나 서양문화 또는 일본문화의 일방적인 영향 하에 존속해 온 주변문화로서, 나름의 고유한 성격(전통)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영향은 과거의 전통단절론을 조장하거나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 단절론은 1950년대에 이식문화의 연장선에서 새롭게 제기되었다. 임화의 이식문화론은 1930년대에 주장, 우리 신문학은 주체성의 몰각 상태에서 외래의 것을 모방, 이식한 문화에 불과하다는 내용이다.신문학이 서구적인 문학 ‘장르’(구체적으로는 자유시와 현대소설)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時期가 외국문학의 刺戟과 影響과 模倣으로 일관되었다 하여 과언이 아닐 만큼 신문학사란 移植文化의 역사다. 그런 만치 신문학의 생성과 발전의 각 시대를 통하여 영향 받은 諸外國文學의 硏究는 어느 나라의 문학사상 그러한 연구보다도 중요성을 띄우는 것으로, 그 길의 緻密한 연구는 곧 신문학의 殆半의 내용을 밝히게 된다.)그리고 이러한 이식 또한 서구의 것을 직접 이식한 것이 아니라 ‘내지(일본)의 명치 대정 문학’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문학의 근간을 알기 위해서는 ‘서구 문학의 직접 연구보다도 내지 문학 내지 명치 대정 문학사의 상세한 연구의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임화는 민족적 정체성이 혼란으로 말미암아 대한제국이나 조선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일한합병’이 문화 이식의 계기가 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신문학의 개념은 그러므로 일체의 구문학과 대립하는 새 시대의 문학을 형용하는 말일 뿐더러 형식과 내용상에 질적으로 다르고 새로운 문학을 의미하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신문학사는 조선에 있어서의 서구적 문화의 이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임화가 문학사를 쓸 무렵의 서양이나 일본의 문학에 비해 우리에겐 근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즉 우리에겐 근대적인 것이 없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왔고, 그때부터 우리의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임화는 완전히 문화가 이식되고, 그 이식된 문화가 주체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임화는 우리 문화에 있어서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 전통으로 인해 근대적 발전이 저해된다고 하였다. 이는 자주성이 미약하고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충분한 내적 준비 없이 개화에 뛰어듦으로써 외세 의존적 근대화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통한 주체적 근대문학의 건설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방과 이식’을 통해 근대문학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임화도 이러한 우리 문화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언젠가는 이식문화를 해체하고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2) 전통 계승론 - 이식문화의 비판과 연속성 상에서의 전통 계승이식 문화론은 한국문학을 단절로 보아 과거의 문학에 있던 전통이 끊기고 현재의 문학은 외래 문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역사 인식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사실상 ‘개화기’라는 명칭 자체도 우리 역사상에서의 전통을 무시하는 이식 문화론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개화기 초의 한국문화의 한심상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서구문화의 채용이라는 문화적 비극을 이식문화론으로 합리화시킨 것이 1930년대라면, 그것을 전통의 단절이라는 비극적 명제로 부각시킨 것이 1950년대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 한 ‘몸부림’이었다. 1930년대에는 일제치하에서 유입된 근대문물이 긍정적으로 수용되기 보다는 일제의 대륙 진출에 유리한 쪽으로 수용되었기에 우리 민족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식민치하에 벗어나기 위한 ‘민족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임화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이식문화론을 통해 한국문학이 근대정신에 투철해질 것을 바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식’과 ‘영향’의 개념에 있어서 혼용하고 있다고 나병철은 말하고 있다). 즉, 신문학기의 외국 문학의 영향을 ‘이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과장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식’이라는 것은 기존의 전통성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매개가 결여된 외래 문학의 이입을 말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문학과 이입된 문학 사이에는 불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즉, 전통문화는 전통문화대로 쇠퇴해버리고 이입된 문화 역시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매개가 없기에 곧 소멸해버린다. 분명 이 시기에는 외래 문학이 범람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밀물져온 외국 문학에 대한 모방이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김소월이나 한용운 같이 주체적 자기 인식을 지닌 작품들이 문학사의 전통을 이어갔다. 우리 전통의 율격이나 소재를 통해서 우리의 전통을 잇는 신문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에서 대변되는 한의 정서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공무도하가’나 ‘황조가’로부터 시작해서 ‘가시리’와 같은 고전 시가에서 그 정신을 계승했기에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정서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소설에 있어서도 로만스적인 고 소설의 패러디를 구성 원리로 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이나 야담의 수법을 차용하고 있는 김동인의 액자소설「배따라기」와 같이 전근대적인 소설의 소재나 형식 등을 채용한 소설이 새로운 신문학의 주체로 나타났음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호주의 인구 형성-호주의 적은 인구와 이민 정책에 대하여 –호주 개관위치 :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면적 : 769만 2208㎢ 인구 : 약 2000만 명(2003) 인구밀도 : 2.6명/㎢(2003) 수도 : 캔버라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영어 통화 : 호주달러(Australian Dollar, A$) 1인당 국민총생산 : 1만 9900$(2003)호주의 인구 구성과 분포원주민Aborigine은 전체의 2%를 차지. 인구의 95%가 유럽-인도계 백인. 나머지는 아시아 이민자들이 차지.호주의 원주민 아보리진라틴어 '태초로부터 ab origine'에서 유래 외부-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최초의 이민자이거나 혹은 처음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 유럽 인구의 유입의 영향 ①자연환경의 훼손으로 인한 식량 자원의 감소 ②유럽인구의 무차별적인 원주민 살상 ③새로운 질병이나 전염병에 의한 인구 감소 →사망률 증가, 출산율 감소하는 역인구전환 발생.건조한 기후와 적은 인구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대륙 내륙 지방의 개척은 개별적, 분산적으로 이루어짐 이민자들은 물을 얻기 쉬운 해안가에 정착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본국으로 되돌아가서 내륙의 개척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음 소나 양을 풀어 기르거나 넓은 평원에 밀을 키우는 조방농업에 의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임금 노동력의 유입을 억제. → 백호주의 형성의 원인 중 하나 cf)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역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저임금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기에 외부 이민자들 외에도 흑인 노예들로 인구 수가 증가할 수 있었다.이민인구의 증가와 배경2차 세계 대전 이전 시기의 이민 영국인과 아일랜드 인 중심의 백인들로 이루어진 죄수들 금광 발견에 의한 골드러쉬 – 영국계, 독일계, 중국계 *중국계 인구유입의 반동으로 백호주의 발생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이민 취약한 국방문제와 고급인력에 의한 경제발전을 위한 연방정부에 의한 이민자 수용. - 동구의 난민들,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등의 경제이민 보트 피플의 이민 베트남전 종료 후 떠도는 난민들을 수용호주의 이민정책인구의 고령화와 젊은 노동력의 급격한 감소로 고급기술로 숙달된 젊은 층의 흡수가 이민정책의 최우선. 전통적으로는 인권옹호를 위한 난민 수용정책, 최근에는 정치적 목적과 여론형성을 위한 기술이민자 확보에 더 치중. 호주 인구의 대다수가 불필요한 인구 유입을 꺼리고 있으며 해외이민자들, 특히 유색인구들의 유입은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고 생각. 연방정부의 이민 정책 젊고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이민자 수용으로 국제 경쟁력 제고 노동력 확충을 위한 호주 국민의 노동참여를 유도 출산율 하락의 심각성 인식과 원인규명을 위한 노력 인구 증가에 따른 환경 훼손을 고려{nameOfApplication=Show}
서 론테라 오스트랄리스(Terra Australis 남쪽의 대륙)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오스트레일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대륙이면서 가장 큰 섬이다. 다른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유럽중심의 세계 지도에 나타난 것은 기나긴 세계 역사에 비교해보면 최근의 일이다.호주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쿡 선장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16세기에 이미 유럽의 탐험가들이 제작했던 지도에 호주의 해안선이 나타나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 특히 포르투갈 선원들은 지구의 남쪽에 황금의 섬이 많다는 소문에 따라 인도네시아 자바의 동쪽과 남쪽을 항해하다가 호주 해안을 발견하고 이를 지도상에 표기해 두었지만 식민지화한다든지 본격적인 탐사가 이루어 진 것은 1606년 스페인과 네덜란드 선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1616년부터 1644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호주탐험과 답사를 하고 대륙의 서부 해안선을 비교적 상세히 지도상에 그려 넣었으며 남단의 태즈메니아 Tasmania 와 뉴질랜드의 서해안까지도 발견하였었다. 그러나 당시 상업적 목적에 의해 탐사가 이루어졌던 국제정세에 비교해볼 때, 호주의 서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건조하고 메마른 불모지는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매력적인 이권을 가질 수 있는 황금시장, 인도나 중국과 비교했을 때 국가적으로나 국민적으로나 그들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때까지만 해도 호주는 단순히 지도상에 미지의 남녘 땅 Terra Australia incogito으로만 표기가 되어있을 뿐 탐험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었었다.호주는 하나의 대륙으로 된 나라이니만큼 러시아, 캐나다, 중국, 미국, 브라질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넓은 나라이지만, 인구수는 2005년 1월 현재 약 2,000만 명으로 1㎢당 2명밖에 살지 않는, 매우 희박한 인구 밀도를 보이고 있다. 더군다나 이들 인구의대부분이 이 지역 원주민이 아닌, 유럽-인도계 백인종인 코카서스 인들이 95%를 차지하고 있다. 호주의 원주민인 아보리진Aborigine은 2% 밖에 되지이 될 것이다.대부분의 인종집단과 마찬가지로 아보리진은 만물이 창조된 과정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며 자신들은 창조주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유럽인들은 이러한 신화를 믿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아보리진에 대해 여러 주장을 하고 있다. 세 가지로 대별되는 주장 중 첫 번째가 바로 아보리진은 호주에 이주한 것이 아니라 호주 내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유럽에서 이주하였다는 주장인데, 처음에는 백인이었다가 호주에 도착하기 전에 검은 피부의 인종과 혼혈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는 아보리진이 아시아로부터 이주하였다는 주장이다. 이중 세 번째 주장이 동남아시아의 몇몇 부족과 아보리진의 신체적 ? 문화적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의 이주시기 즉 거주역사에 대해서도 명확치 않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들의 이주동기이다. 우연에 의한 이주, 예를 들면 고기잡이배가 바람에 날리는 대로의 항해와 같은 이주이면 그것으로 이주 동기는 충분히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보리진의 이주는 부족이나 가족 집단 간 마찰, 과잉 인구, 지역 내 화산활동, 그리고 기후변동에 이은 식량공급의 변동 등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주해 온 시대에는 호주 대륙이 현재보다 습윤하여 기후적으로 인간거주에 적합하였지만 점차 기후가 보다 더 건조해지자 수렵과 채집경제에서 식량공급이 어려워져 인구가 감소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유럽인구가 호주 대륙에 유입되면서 아보리진의 인구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우선 아보리진들은 지속가능한 환경관리를 통해 그들의 식량자원을 유지하였으나, 유럽인들의 생물자연환경의 훼손으로 아보리진의 식량자원 공급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요인은 초기 식민 자들은 서구문화의 우월성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화를 침탈하고 개조하며 왜곡시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원주민 살생이 이루어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유입내륙지방에서의 개간은 일부의 개척을 통해 그 주변으로 확산시켜 넓은 지방으로의 개척이 가능해진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일부를 개척하고, 또 별개로 다른 일부를 개척하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개척지를 연결하는 것은 강이나 포장된 도로이기보다는 거친 황토길 혹은 경비행기였다. 이런 건조한 대륙에서의 개간생활은 극히 일부만을 개척자로 남겨둔 채, 대부분의 개척자들은 -개척을 위해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해안도시에 안주하거나 혹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귀향자가 되었다.건조한 기후는 호주의 인구분포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인구수에도 영향을 미쳤다.미국본토와 비슷한 국토에 불과 1천 5백만 남짓이 살고 있는 호주의 인구문제에 대해서는 한때 앵글로 색슨 계통의 백인으로 하여 ‘인류 평등’이라는 유럽문화를 바탕으로 한 유사 단일 민족 국가를 시도하려고 한 소위 ‘백호주의’에 의해 이민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라고 흔히들 설명한다.)같은 앵글로 색슨이 이룩한 미국이 유색인종을 대량 받아들여 이른바 인종의 ‘멜팅 폿melting pot’을 이룬 것은 미대륙의 풍요함과 대규모 농장plantation때문이었다. 담배, 설탕, 면화 등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에 의한 풍요한 ‘플랜테이션’농업은 많은 단순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영국 본토로부터의 노동조달로써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흑인 노예가 제공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에서의 플랜테이션 농업은 투자하면 할수록, 흑인 노예를 매수하면 할수록 수입을 늘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미국의 인구는 영국을 비롯한 다른 유럽국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 이외에도 플랜테이션 농업에 필요한 ‘흑인 노예’ 수로도 인구를 늘릴 수 있었다.하지만 호주의 플랜테이션은 노예무역상의 배를 불릴 만큼의 호경기는 아니었다. 우선 주요 시장인 영국 본토가 너무 떨어져 있는데다가 사탕의 수익성이 당시엔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농장의 규모 역시 기계의 발명을 배경으로 소수 백인을 고용하는 것으로 족했다. 사탕수수 이외의 농업은에 이미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유배생활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많은 금광들이 발견됨에 따라 수많은 자유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류를 이룬 이민자들은 영국계 ? 독일계 ? 중국계였다. 그 외에도 폴란드나 미국, 헝가리 등의 광부들이 뒤따라 몰려들었다. 이때에 중국인 입국 제한법이 제정되어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성을 가지기 시작하였다.제 2차 세계대전 그 이후 호주의 연방정부는 취약한 국방문제와 고급인력에 의한 경제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60여 개국에서 300만 명 이상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이때 가장 많이 진출한 이민자들은 동구의 난민들과 그리스 ? 터키? 이탈리아 등지의 경제 이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대체로 앵글로 색슨 계통의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 혹은 서부 유럽인들의 이민행렬이 지난 후 동구와 지중해 연안국가의 이민이 이어졌다.그리고 세 번째 이민종족집단은 아시아인들이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종료된 직후부터 보트피플boat people형태의 피난민이나 피난민을 가장한 경제이민들이 대거 호주로 진출하였다.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역할이 커진 호주 정부의 당연한 부담이기도 했다.4. 호주의 이민정책지난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 호주의 인구 증가의 50%는 이민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었는데 이 사이에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1970년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던 백호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부활한 전례가 있었다.현재 호주의 인구 구성을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구의 고령화와 생산력 있는 젊은 노동력의 급격한 감소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1999년 호주 인구의 평균연령은 35세이나 오는 2008년에는 고령인구가 12% 노동가능 인구가 68%인 것을 정점으로 2051년에는 평균 연령은 45세를 넘어서면서 노동가능 인구가 60%로 하락함과 동시에 고령인구가 24%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 호주 정부는 과거 노동당이 가족 재결합 이민쿼터를 증가시켜 이민자 대부분이 고국에 반환되면서 많은 수의 홍콩 고급두뇌가 캐나다를 이민의 목적지로 선택한 경우가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현재 호주는 매년 수만 명의 대학 졸업생들이 영국 및 미국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아 고급 두뇌의 막대한 해외 유출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해외 유학생들을 호주의 새로운 경제 주체 인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호주는 전통적으로 인권 옹호를 위한 난민 수용정책을 펼쳐왔으나, 최근 들어 호주 내 여론 형성 및 정치적 목적에 의해 난민 수용이 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서 난민 이민자보다는 기술 이민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에 더욱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 정부는 난민 수용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같은 수의 기술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다면 이들의 활발한 경제 활동으로 인해 더 많은 조세수입을 거둘 수 있다고 분석한다. 호주의 기술이민쿼터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 급격한 증가를 보인 것은 이러한 분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호주의 이민 정책이 난민수용을 외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면서 외부로부터 이민 정책이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불법 입국자나 밀입국자에 대해서도 강력한 규제방침을 고수할 방침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직도 호주 국민 중 상당수가 과거에 비해 호주 인구가 너무 많이 더 이상 해외이민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불필요한 해외 이민자, 특히 유색인종을 받아들인다면 호주의 전반적인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현재 필립 러독 Philip Ruddock 이민성 장관이 밝힌 향후 호주 정부의 이민 정책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책정되고 있다. 첫째, 젊고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호주의 국제 경쟁력을 높인다, 둘째 노동력 감소폭이 전체 인구 감소에 비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노동력 확충을 위해 호주 국민들이 노동 참여를 적극 유도한다. 셋째, 출산율 하락에 따른 심각성을 인식하고 출산율 저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