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us Dei와 프랑코 체제Opus Dei의 정치적 개입에 대한 입장은 두 가지로 나뉘고 있다. Opus Dei가 정치적으로 개입했었다는 근거와 프랑코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는 근거로는 Escriva가 스페인 내란 막바지에 프랑코의 반란 군 측으로 합류했으며 1958년 5월 23일 프랑코에게 지지입장을 나타내는 편지를 쓴 것을 든다. 또한 비평가들은 많은 Opus Dei 회원들이 1939년부터 75년까지 지속된 프랑코 통치시기에 스페인 정부 요직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언급한다. 특히 1969년 내각에서 수많은 장관들이 Opus Dei에 속해 있었다. 이 임용들은 정권의 고위층에 영향력을 침투시키고 강력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려는 Opus Dei의 시도로 본다. 참고로 Opus Dei의 Madrid 에 처음 설치된 사무실이 그 당시 국무장관과 같은 건물에 있었던 믿기지 않는 우연으로 이는 Opus Dei로 하여금 FelipeⅡ세 하의 스페인의 마녀사냥과 비슷하게 고위관공서의 사상적 신뢰성 조사에 정치적 역할을 하게 한 계기를 부여했다고 보여진다.콜롬비아 백과사전에 의하면 Opus Dei는 1950년대와 60년대 스페인에서 가장 유력하고 보수적인 정치적, 종교적 세력으로 팔랑헤당을 대신하였고 그 영향력은 1970년대 초 이후로 쇠퇴했다고 본다. 그러나 최근(1998-2004) Jose Maria Aznar 수상 정부에서 국가 검찰 총장(Jesus cardenal)을 포함하여 여러 장관들이 Opus Dei 회원이다.그리고 현재 영국교구의 신부로 재직 중인 전 Opus Dei 회원인 Vladimir Felzmann는 Escriva가 “ 히틀러는 반유대주의고 반슬라브주의다. 이는 곧 히틀러는 반공산주의‘라고 말했다고 밝혔으며 이와 같은 언급은 언론에 알려져 Escriva의 시성식에 대해 논란이 일었었다. 이에 대한 Escriva의 행동의 근거로서는 스페인 내전 중에 사회주의세력이 가톨릭세력에 저지른 잔인한 행위를 목격한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극단적인 우익 사상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위에 언급한 것의 근거들에 반대하는 입장으로는 몇몇 근거들이 가톨릭 조직에서 정치에 대한 획일적 접근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 Opus Dei의 고유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과 개인적 책무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들의 관점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Escriva가 프랑코에게 보낸 편지는 연합군과 미국 등이 프랑코 정권을 승인한 후 8년 뒤에 쓰였고, 편지에서 Escriva가 “어떠한 정치에 낯선 사람일 지라도 신부와 스페인인 으로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고 쓴 부분에서 시민과 가톨릭 신부로서의 전형적인 미덕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가톨릭교회 즉 믿음의 가르침에 따라 신의 법을 받아들여야 함을 최고통치자에게 장려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편지에서 그는 스페인 국민들의 스페인 전통에 충성하는 것이 정부의 법이 성공할 수 있는 최선의 보장이며, 국가 공동체 내의 평화를 지속시킬 수 있는 확신성이 항상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Escriva가 프랑코에게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 , 자유 등을 존중 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라 한다. 지지자들은 Escriva 가 스페인에서 프랑코의 역할은 인정했지만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한 어떠한 정당의 형태를 갖추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성직 자치 단을 갖고 교회의 비종교적인 힘의 수단으로서 공공의 권력을 이용한 것뿐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정권의 개입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Escriva가 가톨릭교회의 일원이었을 때 스페인 내전후의 잔인한 억압의 시기에 50,000의 사람들을 갑작스럽게 파병시킨 독재정권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프랑코 정권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다고 한다.John Allen은 최근 Opus Dei에 관한 책에서 프랑코 정권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Escriva는 프랑코 정권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Escriva의 기록 중에 프랑코 정권에 관한 비판이나 찬성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공적인 진술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1930년대와 40년대 그 침묵은 수동적인 저항으로 여겨졌다. 그 후 스페인 가톨릭교내의 막을 수 없는 입장이 프랑코 정권에 대해 비판하게 되는 1960년대와 70년대 까지 그의 침묵은 무언의 지지로 받아들여졌다. Allen에 따르면 이 침묵은 프랑코 정권에 대한 Opus Dei의 조직의 입장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몇몇 장관들이 프랑코 정권하에서 일했음이 파시즘과 Opus Dei를 연결시키는 증거라는 것에 대해 독일의 역사학자인 Peter Berglar는 거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근거로는 첫째로 Opus Dei 회원 중에 정부에서 일 할 능력의 개인적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으며 둘째로는 파시스트 권력자로서의 경험이 없는 독재자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다. 총통아래서의 스페인 정부는 “권위주의적이고, 사무적인 지배”가 더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학 정치과학 교수인 Vincent Navarro 는 Franquismo o Fascimo 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다른 결론을 펼쳤다. 그는 스페인에서 프랑코 정권을 서술함에 있어서 일부러 “Fascism"이라는 단어를 회피하는 것은 독재정권하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계층이 현대 스페인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해석에 대해 Opus Dei지지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수십 년 동안 권력을 잡고 있기 때문에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그리고 프랑코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프랑코 정권 하의 116명의 장관 중에서 Opus Dei 회원들은 겨우 8명이었으며 그 중 5명은 단지 몇 달이나 한 시기 밖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연합군이 정부를 승인한 뒤 몇 년 후인 1956년 이후에 장관을 지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프랑코 정권의 마지막 내각 구성 때는 Opus Dei의 회원이 없었으며 그전까지도 다수 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많은 역사학자들이 다수의 사람들이 프랑코의 정책과 정권에 반대해서 감옥에 보내지거나 추방당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Antonio Fontan과 앞에서 언급한 Rafael Calvo Serer 가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프랑코 정권의 탄압을 받은 저널리스트들이라 할 수 있다. Antonio Fontan은 스페인의 민주정부의 첫 번째 상원의장이 되는 사람이다. 프랑코의 팔랑헤당이 나중에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이끌게 되는 Opus Dei회원들을 탄압하고 그 중 몇은 국외 추방시켰다고 언급하고 있다. Berglar 에 따르면 프랑코를 지원했던 정치 조직인 팔랑헤당은 Escriva에 대해 “세계 공산주의와 반 스페인 정서주의, 프리메이슨주의”의 혐의를 의심했으며 프랑코 정권의 처음 10년 동안 Opus Dei와 Escriva는 적이 아닌 새로운 스페인 국가에 대한 지지자들에 의해 광신에 가까운 인내의 공격을 당했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