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우리 사회는 분명히 교육에 있어서의 남녀평등은 가져왔다. 즉 과거와 같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과 다른 대우를 받으며 교육을 못 받는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고용과 승진에 있어서의 성차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참가인구의 여성의 비율은 이제 40%를 상위한다. 하지만 직종별로 보면 여성근로자의 상당수가 사무직, 서비스직 등의 직종과 하위직, 저임금직에 집중되어 있으며, 기업 내에서도 기업의 중요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고위직에는 여성이 거의 없다. 이러한 현실의 적극적 조치로 여성고용할당제가 이야기 된다.여성고용할당제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한 법적? 정치적 수단으로써 여성참여의 몫이 일정한 비율에 이를 때까지 여성이 일정한 요건 아래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조치로서 즉 채용과 승진 시 일정량의 인원을 법률 및 정부규제에 의해 여성에게 배분하는 제도이다. 여성고용할당제는 여성의 실제적 평등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 된다. 하지만 남성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역차별의 이유와 법적으로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법적 평등에 위배된다 하여 반대한다.필자는 여성고용할당제가 여성의 양적 ? 질적으로 실질적 평등으로 가기위한 적극적 조치로 한시적 제도로 옹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먼저 고용에 있어서의 성차별 원인을 전통 유교적 규범과 고용주의 이율 타산의 손해로 살펴보고 여성고용할당제의 반대의견을 들어보고 그것을 논박해 본 뒤 법적근거와 여성고용할당제의 사회적 의의를 바탕으로 찬성의견을 개진하겠다.2. 고용에 있어서의 성차별 원인1) 전통 유교적 규범성차별적 고용에 대한 이유로 흔히 성별에 따른 능력의 차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피상적인 이유에 그친다. 고용의 성차별을 부추기고 있는 실질적 주범은 취업의 우선권은 남자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사회적 통념이다.) 실제적으로 만약에 부부가 같이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에 자녀양육이나 가사노동의 원인으로 한명이 직업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여성이 된다는 시각은 일반적이다.이 시각의 근본적인 원 바로 현모양처였다. 지금 시대에서도 미혼여성에 대해서 자신의 능력발휘도 중시되지만 한편으로 결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기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적 통념은 여성이 가정에서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주체라 생각한다.상기한 내용과 연관하여 고용에 있어서의 성차별이 전통 유교적 규범으로 야기되는 원인으로 가부장제도에 있다. 가부장제도에서의 경제 주체는 항상 남성으로 보았다. 이것은 비유교적 문화권에서도 보인다. 하지만 서양의 가부장제도의 통념은 단순히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자는 가정 내의 역할을, 남자는 사회적 역할이라는 차별적 역할분담에 그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서구사회에서는 여성이 사회활동 하는 것에 대해서 배타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또한 고정적인 성역할이라는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가부장제도에서의 큰 특징은 남성이 가정에 있어서의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성은 하늘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시각이 지금 현재도 가정이 있는 여성이 직업에 능력을 펼치는데 열을 다하면서 가정에 조금만 소홀해도 안 좋은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여성들의 전통적 생각 때문에 여성이 고용에 있어서 성차별을 받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생각한다.2) 고용주의 이율타산기업 측에서 여성이 남성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의 근거는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된다. 실제로 어렵게 취업을 한 여성들 중 상당수가 결혼으로 인한 출산, 자녀양육, 노부모 봉양 등의 가정적인 이유나 성차별을 이유로 직장을 그만뒀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후배들에게도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능력이 미래의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에 입장에서는 이렇게 되면 일을 이제 능숙하게 할 나이에 여성들이 그만두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직장을 그만두는 것 이외에도 여성은 출산이라는 공백 기간에 고용주 입장에서는 유급 양육에 있어서의 직장 활동이 보장 될 수 있도록 복지 시설을 구축해야한다. 또한 여성들의 경우에 성차별적 요소나 성희롱과 같은 일을 당했을 경우 신고 할 수 있는 신고센터도 만들어야 한다. 이것 또한 고용주의 입장에서 손해되는 일이다.마지막으로 일의 효율성을 생각하는 고용주 입장이다. 기업은 조직사회이다. 바로 수직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 처리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처리에 강압적인 모습도 보여야한다. 이렇게 되면 여성보다 남성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편하기 마련이다. 남성들이 군대라는 계급사회를 체험한 것도 요인이다 생각 된다.3. 역차별에 의거한 여성고용할당제 반대의견여성고용할당제는 정책이 시행될 시기가 아니다. 물론 과거에의 여성 차별은 누가 봐도 심할 정도로 옛 시대부터 아니 불과 90년대만 해도 상당히 심했다. 과거에,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해도 여자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여성들이 부지기수였고, 당연히 여성들의 학벌은 전체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세대에의 여성고용할당제라면 인정을 하겠지만 현대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의 여성은 절대 능력적으로 남성들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은 집에서 살림만 한다는 말은 옛날 일일 뿐, 현재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업에 대해 차별을 두는 집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도는 최소 2~30년전 에나 필히 시행이 되었어야 할 법이지, 지금에 와서는 큰 의미가 없는 오히려 역차별을 부추기는 법이다.역차별이란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들이 고용되었을 경우 역차별을 당하는 남성의 입장에 있을 경우이다. 여성고용할당제를 옹호하는 입장은 남녀평등을 위해 필수적인 법이라고 하지만 모순이 있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면서 여성에게 해택을 주는 여성고용할당제는 양성평등을 오히려 막는 제도이다. 바로 양성평등을 위한 제도라 하지만 한쪽 성에게만 혜택을 주는 이 제도가 어떻게 양성평등을 가져 오는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이다력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는 고용할당제로 입사하는 여성들을 보는 남성들은 자신들보다 실력이나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들을 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집단 이기주의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명문대 대학 입시에 있어 농어촌 특혜를 받은 지역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또한 여성고용할당제 찬성론자들은 실질적 평등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럼 여성이 더 많은 직종에서는 남성고용할당제를 실시해야하는 것인가? 초등학교 교사, 스튜어디스, 간호사, 전화 상담원, 은행원 등과 같은 직업들은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주장은 원색적이기 하지만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직종들의 남녀의 실질적 평등을 위해서는 남성고용할당제를 실시해야 되는 것이다.4. 여성고용할당제 반대의견에 대한 논박먼저 정책시기가 아니란 주장은 일단 여성이 경제참여인구만 보면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여성고용 현황의 수치를 보면 여성고용할당제는 정당성을 얻을 것이다. 2008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전 세계 93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2008년 여성권한척도(GEM) 지수)에서 한국이 0.54를 받았다. 이 수치는 6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3.7%, 여성 임원 비율은 8.0%, 전문직 여성 비율은 40.0%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국가 평균은 각각 19%, 29%, 48%로 우리나라는 세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즉 고위직에 여성들의 비율이 낮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반대 입장의 반박으로 지금은 이러한 비율을 가지고 있지만 20년 후에는 이 비율이 달라져 비슷해 질것이라 예상을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미래를 낙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제도로써 여성고용할당제가 이루어져야 고용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맞춰지고 20년 후에 기업에서의 고위직 남녀비율이 맞춰질 것이다. 이처럼 여성고용할당제는 장기적으로 남녀의 실질적 평등으로 가기위한 제도이다.다음으로 역차별이라는 주이 잠깐의 차별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 생각된다. 국가가 사회적 구조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에게 제도 즉 강제권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 여기는 것이다. 물론 동등한 능력을 가진 남성들이 떨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여성고용할당제가 고용 시 민간 기업이나 공기업이 여성 할당 인원을 높은 비율로 하지만 않는다면 이러한 문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역차별 주장의 법적근거에 대해 여성고용할당제도 법적인 근거들이 있다. 이것은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다.마지막으로 여성이 상대적으로 많은 직업에서의 남성고용할당제를 실시해야 되느냐의 문제는 여성들이 더 많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은 하위직이 대부분이다. 또한 그것들은 여성의 능력이 더 필요한 직업들이다. 남녀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고용할당제가 실시를 주장하면서 남녀의 차이가 나는 모든 직업에서는 여성고용할당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 능력의 차이가 나지 않은 직업에서 남녀의 비율이 남성이 높은 경우에 실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5. 여성고용할당제의 법적근거 및 사회적의의1) 법적근거여성고용할당제에 관해서는 우리의 헌법과 남녀고용평등법, 그리고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을 법적 근거로 다룰 수 있다. 먼저 우리나라의 헌법에서는 제 11조 제1항)을 들 수 있는데 이 내용은 1948년 제헌헌법 때부터 성차별 금지를 선언한 양성 평등의 원칙조항이 있다. 이 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헌법상의 기본권의 보장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모든 기본권의 주체가 된다. 특히 고용분야와 관련하여 헌법 제32조 제4항은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신체적, 생리적 특성에 따른 모성보호에 근거한 여성의 근로에 대한 특별보호와 근로관계에서의 성차별 금지를 명문화한 규정이다.다음으로 근로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지증진을 목표로 1987년에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제2조 1항에서 차별을 “사업주가 .
1. 들어가면서2004년, 희대의 살인극이라는 이름으로 신문지상을 뜨겁게 달군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경찰에 붙잡혔다.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처참하게 살해했던 범인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이나 인간에 대한 회의를 가져보았을 만하다. 반면 철길에 떨어진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철로 위로 뛰어들었다가 진입하는 기차에 치여 두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던 한 철도원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 오거나 그 철도원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가져보았을 듯하다. 이 두 사건 모두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기회를 던져 주고 있다.인간에 대한 연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어 온 분야 중 하나이다. 특히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혹은 인간의 본성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가 등의 질문을 둘러싸고 수많은 철학자 및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연구하며 논쟁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인간본성이라는 주제는 합의되거나 도출된 정설이나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를 ‘성무선무불선론’)의 고자와 ‘성선설’의 맹자, ‘성악설’의 순자를 내 사유 속으로 불러 들여 토론하는 형식으로 풀어 나가겠다. 토론의 쟁점은 먼저 인간의 본성이 과연 있는 것인가? 인간 본성의 선천성 문제와 인간 본성이 있다면 그것이 과연 선한 것인지 아님 악한 것인지에 대해 논의 하겠다.2. 인간 본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1) 토론의 시작과 인간본성의 선천성 문제나 :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는 공자님이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후천적인) 노력에 따라 서로 차이가 생겨났다.”) 라고 말한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구별되는 같은 본질을 가지며 같은 본질 안에서는 그가 어리석은 인간이든 성인이든 천부적 본성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 자리에 나와 주서 본능과 욕망을 지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목마르면 마시고 배고프면 먹고 이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육체적 욕구인 것입니다. 즉 식욕과 색욕이 인간은 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性)은 맹자님이 말하듯이 선하지도 않고 순자님이 말하듯이 악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성 행위는 자연의 상태(性)에서는 분출될 수 없고, 오히려 그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필요에 의해 교정되어 생깁니다. 맹자님처럼 선한 성이 성설의 제1전제로 잡고 각종 다양한 도덕적 감정이나 행위, 규범들은 선한 성의 자연스런 분출물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이 제 주장을 물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본성은 갇힌 채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아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릅니다. 사람의 본성에 선함과 선하지 않음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에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물을 트는 방향에 따라 가는 방향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천적인 것에 달렸다는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나 : 인간 본성은 본래 선하지도 불선 하지도 않는 육체적 욕구 그 자체가 본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감정이나 행위, 규범들은 자연 상태에서 나오지 못하고 후천적인 것에 달렸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이 주장은 서양의 철학자 로크(Locke)가 말한 백지설에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로크는 인간은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그가 어떠한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 인성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의견에 대해 맹자님이 한 말씀 주시겠습니까?맹자: 일단 고자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럼 고자님이 말한 타고난 것을 본성, 즉 식욕과 색욕 같은 것들이 인간의 본성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으로 일체의 희게 생긴 것들, 즉 종이에 흰 것과 백설의 흰 것, 등등에 흰 것들은 희다는 것에서 다 똑같다는 의미가 되겠군요. 제 말이 맞습니까?고자: 그렇습니다. 일체에 흰 것들은 희고 그 성질의 차이는 없습니다.맹자: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개 그 형세가 그런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흘러내려가지 않는 물이 없듯이 그 본성이 선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나 : 이 물에 비유 이야기는 어차피 결론은 나지 않을 테니 정리해 보겠습니다. 고자님은 물은 원래 동쪽이나 서쪽으로 흐른다는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아서 그 흐르는 방향 은 환경에 의하여 결정될 뿐이며, 인성 역시 그러하여 선악의 구별이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맹자님은 물이 동서의 구별은 없지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본성 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인성은 본래 선하며, 사람이 불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은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서 형세에 좌우되었기 때문이니, 이는 마치 물은 아래로 흐르나 산과 돌을 만나 막히게 되면 거꾸로 위로 흐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 하셨습니다. 두 분 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비유로 적절 했던 것 같습니다.여기서 고자님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그럼 인성과 도덕 속성의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2) 인과 의의 문제들고자: 그것에 대해 비유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본성은 버들가지와 같은 것입니다. 의는 버들가지를 휘어 만든 버드나무 그릇과 같습니다. 사람의 본성으로 인과 의를 행하는 것은 버들가지로 버드나무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버들가지가 곧바로 버드나무 그릇이 될 수 없고 그 사이에 모종의 가공하는 과정이 있듯이, 인이나 의와 같은 도덕 행위도 인성에서 곧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모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곧 인이나 의와 같은 도덕적 행위는 본성과 무관하게 외재하는 것이며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맹자: 전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버드나무의 본성에 따라서 버드나무 그릇을 만듭니까? 버드나무를 무리하게 구부린 뒤에 그릇을 만드는 것이니, 버드나무의 본성을 거슬러서 그릇을 만든다면 사람의 본성을 거슬 맞습니다.나 : 제 생각으로는 고자님이 인간의 본성을 생득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식욕’과 ‘색욕’으로 볼 때 도덕에의 가능성의 터전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도덕이 성립하려면 인간의 안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소질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없기 때문에 인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 것 같은데 제 말이 맞습니까?고자: 맞습니다. 그러나 맹자님과 같은 선천적으로 선적 소질을 갖춘 것은 아니고, 물이 어느 방향으로든 흘러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형 방법에 따라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즉 잠재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은 성질인 것입니다. 이 인은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사랑과 같이 본능적이고 이기적이며 또 자기가 즐거워서 하는 행동, 말하자면 어떠한 강제나 명령이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행동이나 경향, 태도 등을 의미하는 개념입니다.맹자: 질문 하나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의 또한 인간 안에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의가 밖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 하시겠습니까?고자: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나이 많은 이를 어른으로 여기며, 또한 내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니, 이것은 어른을 위주로 하여 기쁨을 삼는 것입니다. 바로 어른이라고 하므로 내가 그를 어른으로 여기는 것이고 나에게 그를 어른으로 섬기려는 존경심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외부에 의해 사회화 된 것이므로 곧 의는 밖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맹자: 저는 고자님의 말씀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어른을 섬기는 마음을 본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자연적인 발현이 존경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나 : 그럼 여기에서 이 인간 본성의 선천성 문제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자님이나 맹자님의 의견이 너무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결론은 결국에는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선천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좋은 대화였다 생각합니다.3) 인간 본성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나 : 지금까지 인간이 ,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되므로 이런 까닭으로 저와 같이 대머리처럼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민둥산이 된 것만을 보고는 애초에 훌륭한 재목이 있은 적이 없다고 여기지만,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습니까? 비록 사람에게 보존된 본성이라고 해서 어찌 인의의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그 양심을 잃어버림이 또한 도끼가 나무에 대해서 아침마다 베어가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아름답게 될 수 있겠습니까?)바로 사람들은 그 금수 같은 행실만 보고는 일찍이 훌륭한 재질이 있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게 어찌 인간의 본래의 성이겠습니까? 본래에는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군자인 것이지요.순자: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나 : 처음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반론 제기해 주시겠습니까?순자: 맹자님의 말씀은 너무 인간을 너무 신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현실에서만 봐도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은 명확합니다.맹자: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선한 본성을 잃어 버렸기......순자: 잠시만요. 제가 더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맹자님의 생각에 반하여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이란 것은 후천적인 인위적인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집니다. 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맹자: 순자님의 말씀은 인간을 너무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전 다시 한번 말해서 인간은 인의예지라는 사단, 즉 도덕감을 본래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덕인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은 이것들을 .
1. 머리말동성애(同性愛)란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같은 性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동성애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점은 개방된 성문화로 인해 자유로워졌다 할 수 있으나 비판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또한 유교의 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는 사회인 한국에서는 그 비판의 정도가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름 있는 명사들의 동성애 논란이 있다.소크라테스에서 마돈나까지 -게이 100선 과거와 현재-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게이와 레즈비언의 순위)에 소크라테스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실제 아테네의 나이 어린 소년들의 연인이었을 뿐 아니라 동성애에 대해 호소력 있게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는 논리를 펼친 교사였다. 그는 아테네의 동성애적 관습의 화신이었다.” 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플라톤과 디온의 사이를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동성애는 지금의 동성애의 시초라고 까지 보고 있다. 주로 그들을 비판할 때 동성애자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우리가 동성애라는 이름에 갖는 혐오감과 우리의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인가?우리는 동성애라는 말을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오해 속의 동성애를 이번 보고서에 다뤄보고자 한다. 동성애라고 불리는 그들의 사랑은 지금의 동성애와 같은 것일까?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 즉 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지금의 동성애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랑에 대해서 살피면서 특별히 남성끼리의 사랑으로 Paiderastia라고 불리는 그것을 플라톤의 『심포시온』을 살피면서 밝혀보고자 한다.2. 플라톤의 동성애에 대한 생각 - 아리스토파네스 이야기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플라톤의『심포시온』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주 먼 옛날에는 인간이 세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말한다.인간은 오늘날처럼 남성과 여성의 양성이 아니라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아야부터 상상할 수 있을 것이네. 걸음걸이를 보자면, 그들은 지금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이면 어디든지 똑바르게 걸어갈 수 있고 빨리 달려가고 싶을 때는 마치 지상 회전을 하는 사람들처럼 다리를 원모양으로 회전하며 앞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네. 이때 그들은 여덟 개의 사지를 지지점으로 이용하여 수레바퀴 모양이 되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쓴다네.그들은 대단한 힘과 능력 그리고 오만함가지 지녀서 신들을 공격할 정도였다네. ……중략 …… 달걀을 말총으로 자르는 사람처럼 인간들을 둘로 잘랐다네.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이렇게 나뉜 사람들의 얼굴과 목의 반쪽을 잘려나간 쪽으로 돌려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항상 자신의 잘린 단면을 보면서 좀 더 분별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네. ……중략 ……결과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하나가 둘로 나눠진 존재 즉 반편의 사람이어서 그 모습이 마치 넙치 같다네. 그리하여 우리들 각각은 자기로부터 나뉘어져 나간 또 다른 반편을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라네. 따라서 남자들 중에서 그 옛날에 자웅양성으로 불리었던 이러한 혼합적 존재가 반으로 나뉘어 남자가 된 사람들은 여자들을 매우 좋아하고 이중에서 많은 색광들이 나온다네. 마찬가지로 남자를 밝히고 간통죄를 저지르는 여자들도 이 종에서 주로 나온다네. 반면에 본래 순전히 여성적인 존재가 나뉘어져 반편이 된 여성들은 남자들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여성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이러한 부류로부터 레즈비언들이 생겨나는 법이라네. 마지막으로 순전히 남성적인 존재가 나뉘어져 반편이 된 남자들은 남자들만 따라다니기 마련인데,)우리는 흔히 사랑을 하게 될 때 “인생의 반쪽 찾기”라는 말을 많이 쓴다. 위 이야기에서 플라톤은 벌써 2000년 전에 사랑이란 인생의 반쪽 찾기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본 인간의 사랑은 인간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것임을 보게 된다. 인간의 본래의 상태가 2명이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일고 있는 동성애와 다를 게 없는 것일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다음으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자.3. 동성애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먼저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동성애라는 개념으로 묶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밝힐 필요가 있다. 그리스에서의 성인남자와 소년과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것을 동성애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그것은 우리와는 아주 다른 구분 체계와 가치, 경험의 역사를 가지는 그리스를 담아내기에는 적절치 못한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동성에 대한 사랑과 이성에 대한 사랑을 배타적인 두 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행동유형으로서 대립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경계를 따라 분리선이 그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덕적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절제하는 남성과 쾌락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남성을 대립시키는 것이 가장 기꺼이 몰입할 수 있는 쾌락의 범주였다.그리스인들에게 소년과의 교제 또는 여자와의 교제를 분류하는 범주가 없었다. 따라서 파이디카)를 선호하는 남자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동성애라 부르면서 혐오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애와는 다른 특별한 구조의 욕망이라 생각하는 이분법에 있다고 본다. 더불어 기독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 시대의 동성애를 지금의 관점에서 동성애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년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법적으로 허용된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여론에 의해서도 수용되었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교제였다. 이 교제의 우수성의 근거를 마련해준 성찰과 그것을 찬양하는 모든 문학 작품에 의해 문화적 가치를 부여받았다. ) 또한 그리스에서 소년에 대한 사랑은 많은 문화의 생성을 야기했다. 그럼 다음으로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관계를 살펴보자.4.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관계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사이를 동성애로 분류하는 근거로 드는 것들은 그들의 대화에서 드러난다.나는 이분과 단둘이만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분이 마다네. 그리고 방 안에서 우리 두 사람 외에 자려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네.…중략… 나는 남신과 여신에 모두 걸고 말하건대, 소크라테스님과 함께 잠을 잔 후에도 나의 아버님이나 형과 함께 잤을 때와는 다른 어떤 특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자네들은 잘 알아두어야 하네.)위 인용문은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와 있었던 일을 말하는 부분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 둘만 남는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그를 유혹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의 유혹에도 소크라테스는 무덤덤함으로 일관했음을 알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런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비판한다. 문제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와의 신체적 접촉을 통해 그의 지식을 넘겨받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방식으로는 지식을 전달 할 수 없다고 말한다.친애하는 알키비아데스여! 만약에 자네가 나에 관하여 말한 것이 사실이고 자네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어떤 능력이 내 안에 들어 있다면, 정말로 자네는 지각없는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네. 자네는 내 안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자네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네. 따라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보고 나서 자네가 나와 사귀면서 자네의 아름다움과 나의 아름다움을 서로 교환하려고 시도한다면, 자네는 나로부터 조금밖에 이득을 취하지 못할 걸세. 반대로 자네가 아름다움의 허상이 아니라 그 참 모습을 소유하려고 시도한다면, 자네는 정말로 동을 주고서 금을 얻는 교환을 생각하는 것이네. 어쨌든 훌륭한 젊은이여! 자네는 별로 대단한 존재도 아닌 나를 잘못 파악하는 일이 없도록 더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보게.)소크라테스는 수동적으로 지식을 넘겨받으려 하는 알키비아데스에게 그의 잘못된 생각을 이야기 해주는 지혜로운 연장자 - erastes) - 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대화는 지극히 철학적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받길 원하고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아름다운 하자.5. PaiderastiaPaiderastia는 ‘소년애’라고 번역한다. 연장자와 소년과의 애정관계를 나타내는 고대 그리스의 교육적 관계로 에라스테스(erastes) 와 파이디카(paidika)로 구성된다. 에라스테스는 ‘사랑하는 자’로 번역하는데 그는 그리스의 자유 시민이었다. 파이디카는 ‘사랑 받는 자’로 번역하고 턱수염이 나기 전의 소년을 말한다. 파이디카는 일단 턱수염이 나서 남자가 되기 시작하면 에라스테스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남성간의 교제 중에서 이와 같은 유형은 무척 명예로운 것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런 관계는 당시에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여자를 쫓아다니는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Paiderastia는 고대 그리스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스파르타의 경우 소년들이 7세가 되면 아고게에 들어가 집단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육체적인 성행위까지는 아니지만 성인 남자와의 교제가 법적으로 허용되었다고 한다. 성인 남자와 소년 간의 도덕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동성애가 교육적으로 좋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육체적 관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 남자들은 오랜 동안 군대에서 복무해야 했으므로 이성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고 군대에서 같이 생활하는 남성에 대해 애정을 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반면에 아테네의 경우 당시의 체육학교에서 소년들이 벌거벗은 채 운동을 했기 때문에 소년들의 이러한 모습을 성인 남자가 보고 혹여 육체적 욕망을 가지고 소년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소년들의 교육과 관련이 없는 성인 남자가 일반학교와 체육학교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을 보면 소크라테스와 친구들이 ‘아름다운 뤼시스’를 보기 위해 체육학교를 방문하여 그의 모습에 감탄하는 장면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법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성인남자가 소년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소년 또한 이것을 받아들이면 P다.
1. 머리말저작권은 영어의‘copyright'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2001년에‘소리바다’가 저작권 위반으로 피소)되면서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저작권은 자신이 문학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창작물인 저작물에 대한 배타적, 독점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작권에 대한 침해 사례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에 문제되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정보가 있으면 그것에 대한 복제 또한 쉽다. 저작권 침해는 저작자들의 지적재산권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엄연한 불법이다. 더욱 심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지적 재산을 훔친 도둑질이다.그런데 우리 한국인의 저작권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저작권이라는 것은 지적재산권을 지키기 위한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인 재재가 남의 것에 대한 저작권은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것에 대한 것은 저작권을 지키려고 하는 한국인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논의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태도 중 부정적이라 생각되는 남의 지적 재산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원인을 지식을 공짜라 생각하는 한국인의 태도에서 알아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것에 대해서만 저작권을 인정하려는 한국인을 제도와 교육을 통해 모든 지적 재산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저작권법의 완전한 실현에 대해 말하겠다.2. 한국인의 저작권에 대한 이중성2008년 현재 한국의 음반 시장이 최대의 가뭄이라고 한다. 올해 5월까지 1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음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10년 전의 음반 시장은 1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음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음반 시장이 축소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명백하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불법 다운로드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엄연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불법 다운로드를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남의 글 도용 또한 마찬가지 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자신의 사진이나 글 같은 것들, 즉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해서 남이 가져간다고 하면 민감하게 들인 영화는 공짜로 다운 받아 보면서 자신의 것을 공짜로 가져가는 사람들은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그럼 먼저 한국의 남의 저작권에 대한 미온적 태도부터 보자.불법 다운로드는 영화, 음악, 도서 등 여러 문화 산업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많은 돈을 들이고 정성을 들인 영화나 음악 등을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주고 향유해야 문화 산업의 발전이 이루어 질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법 다운로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문화 선업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불법 다운로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글을 쓸 때 남의 글에서 가져와 인용과 각주 표시를 하지 않고 마치 자기의 생각인 것처럼 하여 쓰는 경우도 많다. 이것들은 엄연히 말해서 도둑질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지적 재산권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저작권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의‘2007 대한민국 관객 영화 관람 성향’조사에 따르면, 온라인 다운로드를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관객은 절반 이하(47%)에 불과했다. 2006년 영화진흥위원회 조사에서 56%가 “불법”이라고 답했던 것 보다 밑도는 수치이다.) 저작권에 대한 준법의식이 더 희박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엄연히 법적으로 만들어진 저작권법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절반도 되지 않는 것이다.이 생각은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 불법 다운로드나 인용과 각주를 하지 않는 글을 불법이라 완연히 생각하지 않는 한국인들이“내가 제작한 콘텐트를 다른 사람이 불법 다운로드로 이용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즉시 법적 대응한다”(25%), “개인적으로 대응한다”(19%), “잘 모르겠다”(41%)는 등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였고, “무대응”은 15%에 불과했다.) 즉 법적이든 개인적이든 대응하겠단 사람이 50%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한 사람들 중에서도 대응 쪽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적재산권에 침해가 있으면 대 되는 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이 지적재산권인 저작권을 인정안하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나 남의 글을 도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 조사에 의하면 자신의 지적재산권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한국인들의 저작권에 대한 이중성인 것이다. 자신이 남의 지적 재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남이 자신의 지적 재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 생각은 어떤 일에 대해서 내가 하면 괜찮지만 남이 하면 잘못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이중적 태도이다. 자신의 지적 재산을 지키려는 개인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남의 지적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럼 남의 지적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식을 공짜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마음에 있다.3. 지식을 공짜로 생각하는 한국인지식을 공짜로 생각하는 한국인에 대한 일화로 미국 교포 사회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이민 가서 사는 한 한국인이 운동장에 가서 미식축구를 구경하는데 갑자기 몸에 오한이 났다. 마침 가까이에서 구경하고 있던 안면 있는 미국인 의사가 있어 의논을 했다. 그 의사는 집에 돌아가 안정을 취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한지 며칠 후 난데없는 청구서가 날아왔다. 운동장에서 만났던 그 의사가 진단 및 처방료를 청구해 온 것이었다.한국인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전화를 해서 약 한 봉지 주질 않고서 무슨 청구서냐고 따졌다. 상대방은 억울하면 소송하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화가 난 이 한국인은 역시 지면이 있는 미국인 변호사에게 전화로 상의를 했다. 그는 소송을 하면 불리하니 그만두라고 했다. 한국인이 고맙다며 전화를 끊으려 하자 고마워할 것 전혀 없다는 대꾸였다. 그런지 며칠 후에 또 한 장의 다른 청구서가 날아왔는데, 이번에는 그 변호사가 부쳐온 것이었다.)이 이야기는 아무리 간단하게 주고받은 지식일지라도 그 지식에 값을 부여하는 미국인과 웬만한 지식은 공짜로 주고받는 것으로 아는 한국인의 차이에 이야기가 비유적인 이야기일지라도 봐도 우리 모두가 어이없게 생각할 것이다. 의사에게 병원에 가서 정식으로 상담을 받은 것도 아닌 우연히 본 의사에게 의논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서와 전혀 다른 것이다. 특히 그 의사가 안면이 있는 의사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더 어이없어 생각 할 것이다. 한국인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식을 구해서 얻었는데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고는 있지 않는 것이다.우리말에 대가 없이 얻는 것을 공것 또는 공짜라고 한다. 이 공것이라 말에서 공이 空에서 왔는지 公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지식에 관한한 우리 한국인은 공(公)것으로 공짜로 생각해 왔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학문이나 예술 같은 만져지지 않는 정신적 가치는 만인이 공유하는 공유물로 여겨 돈으로 따져 주고받는 것을 천하게 생각했다. 바로 지식이 마음의 재산은 될 수 있지만 지식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봤던 것이다.예를 들어 서당 훈장은 편지를 읽어주고 써주고 지방을 써주는 문화 산업을 영위 했었다. 그 일에 대해 물론 해택을 받은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에 대가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문화 산업에 얼마라는 단가를 매겨 대가를 받는 법이 없었다. 서당의 훈장이 이러한 문화 산업으로 돈을 벌기 위한 목적 보다는 자신의 아는 것에 대해 대가 없이 알려주는 의미가 컸던 것이다. 또한 사당패가 굿판을 벌이고 판소리꾼이 몇 마당을 벌여도 그것은 예술의 전달이기에 타산된 입장료를 받는다는 법이 없었다. 물론 여기에서도‘인정’이라는 임의의 금전으로 공연이 유지돼 내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인정’이라는 임의의 금전 또한 꼭 정해진 게 아니었다. 돈을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구지 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바로 공짜의 개념이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고전소설은 여느 문명국의 그것보다 양적으로 적지 않다. 한데 외국에서는 그 작자가 뚜렷한 데 비해 우리나라는 거의가 작자 미상인 것도 바로 문학은 사적 이 공(公)적인 것이기에 작자의 존재가 뚜렷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문학을 누가 읽는 것에 대해 꼭 금전적인 대가를 구하지 않은 것이다. 오죽하면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관행까지 있게 되었다.이런 생각 때문에‘공(公)’것이라고 생각하던 지식이나 문화 산업을 사유화하는 저작권, 복사권 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하게 진통을 겪는 이유라 생각된다. 바로 유형의 물질에 대해서는 재산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인들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 지식에 대해 공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남의 저작권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국인의 원인이라 생각된다.4. 교육과 제도를 통한 저작권 문제 해결 방안지금까지 저작권에 대한 한국인의 이중적 태도와 한국인이 남의 저작권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원인을 살펴보았다. 저작권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긍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이나 컨텐츠에 대한 지적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긍정하는 바이다. 현대의 사회는 지식이나 정보가 곳 돈이 되는 사회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지식에 대해 지키는 것인 저작권은 당연히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문화 산업에서의 자신들의 저작권 문제를 주장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의 저작권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고치기 위해선 남의 저작권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고쳐야 한다. 저작권 침해의 가장 큰 문제로 나오는 문화 산업의 불법 다운로드에 한해서 먼저 살펴보면 불법 다운로드는 어쩌면 급격한 과학 기술의 발전의 산물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된 것이다. 불법 다운로드를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의 잘못이 있는 것이다. 불법 다운로드 근절을 위한 방법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불법 다운로드 이용자 스스로의 인식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절반 가까운 42.7%가 나왔다.) 이 자료를 보아도 사람들의 인식 전환이 바뀌어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