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학 그 끝없는 평행선(?)20012410 건축공학과 박찬도Ⅰ.서론1. 과학과 신학Ⅱ.본론2.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3. 이성과 신앙의 분리Ⅲ.결론4.우리는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Ⅰ.서론1.과학과 신학 (Science and Rheology)과학은 자연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자연이란 우주라는 거대한 존재에서부터 원자(더 작은 물질도 존재한다)와 같은 작은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세계가 어떠한 구조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지 밝히는 학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스스로 그것들을 설명하는데 그 과학적인 방법이란 우리가 실제로 경험되어지는 것에 의해 증명할 수 있음으로 가치중립적이고 절대적 사실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그리고 증명되는 과학이야 말로 모든 진리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재로 우리의 인식의 기준은 소위 말하는 합리성에의해 어떠한 주장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야 그건 말이 않되’ 가 보여주는 인식의 기본 틀은 f=ma 가보여주는 인식적 틀을 기본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주장했을 때 우리는 어떠한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그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는 반드시 어떠한 힘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이에 반에 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신학은 과학에 비하여 경험적인 데이터가 거의 없다. 눈에 보인는 거의 유일한 증거인 성경은 과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의 신화적 소설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가 경험될 수 없는 소위 비과학적 이야기로 가득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의 지배에서 벗어 날수 없었던 우리는 신앙을 저기 비이성적인 영역으로 몰아내었다. 여러 신학자들 또한 성경에서 일어나는 여러 비과학적인 네러티브를 하나의 신화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학의 인식의 틀은 믿음에 기초를 두기 시작했으며 종교(특히 기독교)믿지 않는 현대인들은 과학을 의지 존재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존재하게 되었고 지금가지 존재해왔던 모든 물리적 구조와 생명 형태를 포함한 전체 우주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들을 처음부터 부여 받았다고 생각한다. 드리고 이러한 창조물에 대한 연구(과학의 역할)는 창조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즉 기독교 신학과 자연과학은 이와 같은 문제를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상호 정보를 교류하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 이성과 신앙의 분리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신앙은 비이성적인 영역으로 다분히 신비한 것으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과학은 다분히 이성적이어서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학과 신학은 서로 갈등하며 지내오게 되었다. 중세)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시절 갈릴레오로 대표되는 과학적 발견이 신성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교회는 과학을 탄압했으며 그대 뉴턴역학과 맥스웰 전자기 방정식으로 대표되는 시대에는 이러한 완벽한(?)자연이해의 덕분에 데카르트와 같은 절망적이 결정론적 사고를 낳으면서 과학은 신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근에야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등장으로 화해하려는 움집임이 보이긴 하지만 신학은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과학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은 것으로 생각되어진다.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우리의 사고를 이분법화 시켰을까? 인간의 영원한 갈망중 하나는 진리에대한 추구가 아닐까싶다. 그러한 추구에대한 철학적 사고중 하나는 반정립이다. 이러한 반정립은 “어떤 것이 참이된다면 그 반대는 당연히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에게 ‘착한 학생이 되어라’라고 말했을때 반정립의 세계에 살고 있는 그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이가 바로 헤겔이다.반정립의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그는 정반합)이라는 상대적 명제를 생각해내서 현대인의 사고를 지배했다. 이를 발전시킨이가 키에르 케고르라는 사람인데 “그는 신앙의 도약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신앙과 합리적인것을 완전히 분리하였다. 그 결과로 합을 종교적 다양성의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이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교에서 어느 정도 구원을 제공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보편적인 종교적 인식의 성취요 최고의 현현이다.”(God is salvifically available in some degree in all religions, but the gospel of Jesus Christ is the fulfillment and highest manifestation of universal religious awareness) 즉 하나님의 내재적이며 구원적인 계시가 모든 세대와 문화에서 가능하지만, 종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증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즉 “기독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종국적인 종교(The all inclusive and final religion)라는 것”)이다.(2)19세기 후반)문화적 종교적 상대성들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면서 역사주의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종교의 완성이라고 하는 내포주의자)들의 규범적 주장에 도전했다. 특히 에른스트 트릴취(Ernst Troeltsch)는 이를 매순간 이루는 순전한 역사적 존재들이므로 종교적인 주장들은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진 우리의 신 이해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즉 기독교는 서구 유럽에 있어 현존하는 최고의 계시인 반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생명에 이르는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3)20세기 후반)이 시기에는 종교들에 관한 대화를 강조한 시기였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용어인 특정주의), 내포주의, 다원주의라는 말들이 생겨났다.역사주의)가 종교적 주장들을 정치적 사회적 논의로부터 고립된 개인적인 영역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 각 종교에 대하여 다른 종교들 역시 하나님께 구원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종교적 신념들은 그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기독교는 신과 . 과학은 사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자 하며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반면에, 종교는 가치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다룬다. 즉 과학은 경험적 세계를 기술하는 반면, 종교는 의미의 주제를 다룬다. 따라서 과학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에 관심 있지만 종교는 왜(why)라고 질문한다. 예를 들자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 을 발견해 내었다. 그러나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왜 땅에 떨어지는지는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 부분을 종교가 설명해야할 부분이 된다.과학과 종교를 서로 독립시킬 경우 양자 간에 불필요한 대립이나 갈등을 피할 수 있다. 양자를 철저히 분리시켜 각자의 독특한 영역을 인정할 경우, 서로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확보할 뿐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그러나 과학과 종교 양자를 완전히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리시킨다면, 양자 간에 건설적인 대화를 통한 상호발전의 기회나 교류 또한 상실하게 된다. 실제로 과학과 종교 사이에 대화가 없을 경우 잠정적으로는 평화가 유지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더 큰 갈등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있다.?조건적 일치 관계- 현대 과학과 “신 가설”의 복귀과학은 성운설, 자연선택의 이론을 등장시키면서 신의 존재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이러한 과학의 발전은 과학과 신학이 서로 충돌한다고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을 절대가치의 중립으로 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조건적 일치를 주장하는 이들은 과학 이론들의 전부가 이러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과학 이론들 몇몇은 형이상학적 함의들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진리와 신학적 진리가 하나의 초월적이고 합리적인 근원인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여긴다. 과학적 증거가 기독교 유신론을 인식론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지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기독교인은 세계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믿고’있다. 조건적 일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대과학의 놀랄만한 진보들이 어떻게 이러한 창조, 다시 말하면해 항쟁한 지도자였다. 주요저서에 《세계의 미래상 Das Weltbild der Zukunft》(1904) 《복음적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evangelischen Christentums》(1926) 《신앙과 삶 Glaube und Leben》(1928) 《복음적 신앙과 현대의 사상 Der evangelische Glaube und das Denken der Gegenwart》(6권, 1934∼1952) 등이 있다.2. 하임의 시간의 이해칼 하임의 시간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은 ‘지금’ 혹은 ‘현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아’ 혹은 ‘실존’이란 단어도 중요하다. 하임은 시간을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하였는데, ‘물리적 시간’(객관적 시간)과 ‘본질적 시간’(실존적 시간)이 그것이다. 먼저, 그가 말하는 물리적 시간이란 말 그대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시간 영역으로, 이 시간은 나 자신 즉, 자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객관적인 시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시간상과는 달리 하임은 또 하나의 시간상을 제시하는데, 이는 자연과학이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시간상으로, 본질적 혹은 실존적 시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우리 각자의 실존이 서로 관계성을 형성하게 될 때 생기게 되며, 이는 시간의 영속적인 흐름인 바로 지금의 상태 즉, '영원한 현재'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원한 현재’는 본질적인 시간의 상이며, 또한 이 시간이야말로 대상화할 수 없는 참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임의 사상 속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현재’ 개념과의 유사성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하임의 독창적인 공간 개념은 주로 그의 저서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의 제12, 13, 14장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하임에 따르면, 공간의 다양성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공간은 기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유클리드 공간이며, 두 번째 공간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표상될 수는 없지만, 추론은 가능한 리만공간이다.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