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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콥슨의 담화 전달체계 중심의 대중문학적 요소 :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어머니 담론과 가족 담론-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미디어문예창작학과 2006540001 강예실- 목 차 -1. 90년대 문학과 작가 신경숙2. 식민지 엄마의 귀착지가. 엄마와의 대면나. 엄마의 귀착지3. 가족의 귀착지가. 이분법적 세계관나. 혈통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다. 위기의 가족을 대하는 방법4. 맺음말1. 90년대 문학과 작가 신경숙)1990년대 한국문학 자신이 원했건 원치 않았건 간에 당시에 나타났던 문학적 경향 전환은 뚜렷했다. 그 중 신경숙이 주목받기 시작한 『풍금이 있던 자리』의 위치는 대단히 시사적이다. 해당 작품은 진보이념의 급격한 퇴조가 불러일으킨 정신적 공황상태 속에서 사적개인의 내면성에 대한 공세적 자기노출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문단의 집중적인 관심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경숙의 문학적 역량이 주류 문단에게 승인되었다는 현상을 넘어서 90년대 소설의 경향성 변모를 상징적으로 징표하는 것이었다.『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다소 통속적인 소재를 차용하고 있는데, 신경숙 특유의 서정적인 심리 묘사와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풍금이 있던 자리』 이후의 신경숙의 작품들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딸기밭』 으로 이어지는- 역시 그리 큰 변화없이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러한 신경숙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경숙의 특징들이 90년대 한국문학의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경숙은 공지영, 은희경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대중에게 승인받는 작가였을 뿐 아니라, 이상 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비롯한 주요 문학상을 휩쓸어 왔던 것이다.외부의 시선에 묻혀 있었던 개인의 발견과 개인 정체성의 구현과정. 그 개인이 이제껏 익숙했던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 특유의 더듬거리는 문체 등의 특질은 신경숙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갈등의 지표를 형성해 오기도 했다. 이른바 ‘여성문학’, ‘사소설적 경향’ 그리고 ‘감성적 문학’에 신경숙이란 실제인물의 코드와도 대면하여 더욱 강력하게 엄마와 마주하는 존재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다소 이질적으로 튀어오르는 것이 3장 형철-그 라는 3인칭인데, 작가는 이러한 이질성을 서술의 일관성으로 덮어버린다.각 장에서, 각 장의 주체들은 실종된 어머니의 상태에 멈추어 서서, 자신의 서사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너-큰딸, 그-형철 그리고 당신-남편의 서사는 그들 주체의 이야기이기보다 그들의 기억 속에 담긴 엄마의 형상화 작업들이다. 엄마의 형상화 작업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형태로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엄마가 어떤 사람임을 만들어간다. 에피소드들을 더듬어서 각 장을 이끄는 주체가 자신의 엄마를 형상화하면 할수록, 주체는 더욱 선명해지는 엄마와 마주하게 된다. 장의 결미로 갈수록 주체는 마주한 엄마와 자신을 비교, 대조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강화시켜나간다. 이러한 일관성은 다소 다채롭게 변하는 인칭변화를 혼란스럽지 않게 한다. 결국, 주체가 누구든지 간에, 각 주체의 개별 특질들은 소멸하고, 엄마와 ‘엄마를 대하던 가족 구성원’이란 관계로 재구성된다. 2장의 형철-그 라는 3인칭 또한 그것이 유별나게(?) 존재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질이 포기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떤 주체로 나타나건 간에 감성적인 고백조의 문체가 유지되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개별 존재들을 덮어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2장의 3인칭의 존재이유는 일종의 숨고르기 정도라 할 수 있다. 너라는 지칭이 고조시킬 수 있는 추궁의 포즈를 조금 완화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론, 1장에서 형성한 ‘작가 신경숙’-너-독자라는 강력한 이입관계의 틀에서, ‘작가 신경숙’이 빠진 상태에서 2인칭을 유지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결국, 겉으로 보기엔 다채롭지만, 실상은 다층적인 ‘엄마와 대응하는 이들’과 ‘각기 다른 모습의 엄마’ 이기를 포기하고 일대일 대면의 포즈를 보여주면서 작자는 같은 이야기를 계속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면 작자는 결이 형상화되는 엄마의 모습을 쭉 지켜보다 보면, 작품이 엄마라는 이름이 붙여진 한 ‘사람’을 이해시키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그런 엄마’ 와 맞대면 하는 ‘당신’ 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데, 더 심혈을 쏟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작품 속 엄마의 모습이란 너무도 상투적이다 못해 신파적이며, 그런 잃어버린 엄마에 반응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형상화되는 엄마에 대한 죄의식에 취해 버렸다.아버지-당신을 주체로 하는 3장은 ‘아버지-당신’과 엄마의 대조관계를 통해 슬픔의 기복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뿐, 1-2장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장을 형성하고 있다. 동어반복적인 죄의식과, 죄의식에 처해진 아버지-당신의 극적인 반응을 통해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부재하고 있는 아버지-당신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지난 기억들을 반추하고, 부재하는 엄마를 부르면서 통곡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독자. 독자는 결국 어떤 자신과 마주하는가. 작가가 ‘부탁했던 엄마’를, 부재하는 엄마의 귀환을 격정적으로 촉구하게 된다.가. 엄마의 귀착지엄마는 귀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를 귀환시키기보다, 엄마의 전환을 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껏 그렇게 귀환을 고대하게 했던 그런 엄마의 다른 면모가 4장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것은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엄마이다.곰소는 당신 때문에 내게 잊지 못할 곳이 되었재요. 나는 늘 내가 감당하기 벅찬 일이 생겨야 당신을 찾았재. 그리고 내가 그만 그만 평화로워졌을 땐 당신을 잊었소. 곰소라 찾아간 나를 보고 당신이 내게 한 말도 무슨 일이요?였재.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당신을 찾아간 건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오로지 당신을 찾기 위해 간 길이었네. (pp. 233-234)은규란 남자는 엄마의 말을 빌어서, ‘내 인생의 동무’가 되어주었던 자였지만, 은규쪽에서는 사뭇 다른 듯했다. 은규는 엄마에 맺힌 감정의 내적 혼란을 겪어, 곰소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물론 은규 혼자만의 짝사랑은 아닌 재였다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가 엄마를 최종적으로 성모로 수렴시키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작가가 바라보는 어머니의 기원이자, 미래는 곧 ‘성모 마리아’ 로 신성화된다.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 극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인이 되는 존재. 이런 ‘성모 마리아 되기’ 는 어쩌면 예견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다.아내의 손은 무엇이든 다 살려내는 기술을 가졌다. 원래 이집의 짐승은 잘되지 않았다. 아내가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개를 얻어다 기르면 새끼 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낙갔다. (중략) 그리 데려온 강아지는 마루 및에서 아내가 주는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를 다섯 배 여섯 배 낳았다. (중략) 가지를 모종하면여름이 지나 가을까지도 보라색 가지가 지천이었다. 아내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풍성하게 자라났다. (pp. 160-161)밭에서 내려와 고모에게 이러저러한 사람하고 온종일 밭을 같이 맸다고 하니 고모의 얼굴이 굳어지며 얼굴의 생김을 묻더니 그이는 오래전 그 밭주인으로 그 밭에서 김을 매다가 일사병으로 죽은 이라 하더라, 했다. (중략) 무섭긴, 내 혼자 그 밭을 다 매려면 이삼일을 걸렸을 틴디 함께 매줘서 고맙기만 했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p.65)위 인용은 엄마가 생명과 죽음에 있어서 범인(凡人)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는 모티브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이 외에도 작품의 엄마가 지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자욱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타인의 아이(은규의 아이)에게까지 젓을 물려주고, 자신의 아이를 사산했을 때 별도의 의식을 치루던 모습. 뇌졸중이란 극한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 등의 것들 등.엄마란 존재를 이렇게 신성화시키는 것은, 작품 속 엄마를 특수하게 숭상할 만한 존재로 만들기 보다는, 이 세상의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마리아상을 덮어 씌움으로써 작품 속 엄마만이 특수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이다. 극한 희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엄마들의 기원. 작가는 그런 이야기가 해 보고 싶은 듯하다.수 있다. 큰아들 형철은 검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나마 큰딸이 문자세계의 발화자가 되면서 엄마의 자랑이 되긴 하지만 도시란 공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는 볼 수 없다. 큰 딸은 무엇보다 결혼하지 않은 불안한 상태로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글을 쓴답시고 연락두절로 집에만 박혀 있는 비정상적인 생활상이 언제나 엄마에겐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하지만 엄마는 자식들이 농촌과 문맹이라는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자식들을 문자와 도시의 세계로 보내는 것은, 그녀의 자식들이 그 곳에 가서 자신의 기원을 발화하기를 원하는 것인 듯하다. 엄마 자신의 매개물이기도 한 감나무를 막내딸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그러한 엄마의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렇게 서울의 땅에 심겨진 감나무는 좁은 흙에서도 '땅속 깊이 뿌리를 쫙 뻗은 채 엉겨붙어' 서울의 흙에서 생존할 것이다. 문자와 도시의 세계에서 엄마라는 기원은 그렇게 끊임없이 현대산업사회를 '좋았던 시절'로 이끌려고 한다. 실종된 엄마의 복원을 바라는 서사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것은, 자식세대가 엄마와 함께했던 시골 가족공동체의 복원을 꿈꾸고 있다는 것과 대응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못 말릴 회귀가 퇴행으로 보이지 않고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시골 공동체의 행동양식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결국 이분법적 세계관의 노림수는 두 가지 절차를 밟는다. 문자와 도시 세계로의 진입 그리고 진입 후 자신들의 기원을 소망하라는 것. 어찌보면 전도사의 역할이라고까지 극단화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귀환을 소망하게 하는 그 가족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야 한다.나. 혈통 중심의, 가부장제 가족『엄마를 부탁해』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소적으로 그려지는 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족 내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가족의 맏며느리인 '올케'이다.이번엔 올케가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고 했다. 분명한 액된다.
    인문/어학| 2010.06.19| 9페이지| 2,000원| 조회(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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