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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관계학]70년대초 데탕트시기와 한미동맹의 관계 그리고 유신정권
    70년대 초 데탕트시기와 한미동맹의 관계 그리고 유신정권중국지역학과 199933064 유기훈1970년대 초에 남한의 정권은 유신정권이었다. 유신정권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반공주의 사상과 권위주의와 강제성을 띠고 있던 정권이었다.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이루어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유신정권은 친미적인 성격과 반공적인 성격이 있던 정권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닌 역사적인 한 인물의 영구적인 정권존속을 위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이 왜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하였는가?’ 이러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박정희 정권은 71년 대선과 총선을 치른 후에 본격적인 남북대화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남북대화를 통해 국내정치적으로 권력을 강화, 연장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데탕트 흐름에 편승하려 했다. 이를 계기로 한미동맹관계에서 협상력을 높이려 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와 강력한 대한안보 공략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국제정치에서 라이벌관계는 동맹관계와 함께 외교사의 전쟁과 평화의 열쇠를 쥔 중요한 개념이다. 라이벌은 서로 상대방을 안보상의 주요 위협요소를 지닌 한 쌍의 국가를 지칭한다.라이벌 관계는 시작과 끝이 있는 유기성의 주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주기 중 전쟁, 위기, 갈등뿐 아니라 화해(데탕트)의 국면을 반복적으로 거치며 때로는 급격히 소멸하고 때로는 천천히 잊혀진다.50년이 넘는 라이벌관계를 가지고 있던 남북관계는 70년대 초반의 화해국면에는 세 축의 변수들이 작용한다. 첫 번째는 국내 정치적측면의 변수이다. 국내 정치적 변수는 여러 측면에서 라이벌간의 대화를 추동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남북대화가 국내 정치적으로 정권강화와 정권연장의 기회를 확대시키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박정희 정권과 일반국민과의 관계, 박정희 정권과 야당세력과 반대세력과의 관계, 박정희 정권 내 권력투쟁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남북대화에 진전의 영향을 미쳤다.슨 대통령은 중국,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베트남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는 한편 다른 열강과 세력균형 유지를 통해 국제 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미국은 한반도의 분쟁이 자신들이 국제정치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데탕트 정책을 방해하는 라이벌 관계의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대화를 동한 한반도 긴장의 재발 방지역할을 하였다.(2)편승: 약소국이었던 한국은 미중화해, 일중 국교수립, 미소 데탕트 등 4대강대국 공존체제의 마련이라는 일련의 지역질서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전반기에 이루어졌던 남북한 간의 대화는 주변 강대국들 간의 데탕트 구조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데탕트에 편승한 소데탕트의 추구였던 것이다.(3)모방: 역사의 많은 부분이 모방과 흉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박정희 정권의 남북대화 추진도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남북대화에 있어 모방은 7.4 공동성명을 앞두고 이루어진 비밀회담은 키신저가 마오쩌둥을 만나러 가는 것과 이후락이 김일성을 만나러 가는 것과 같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동서독의 대화의 벤치마킹한 흔적도 엿보인다.(4)포기의 두려움: 72년 미국무성의 브리핑비망록이 지적하고 있듯이 주한미군의 감축과 미중화해, 그리고 미국의 수세적인 베트남 정책과 닉슨독트린이 박정희 정권으로 하여금 미국이 동맹을 져버릴 수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추가감축과 북한과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동맹안보딜레마에 의하면 동맹게임에서 안보 공약의 약화나 지원축소, 적대게임에서 화해의 추구는 동맹파트너에 포기의 두려움을 증가시킨다. 미국의 개입의지를 의심한 박정희 정권은 자구책으로 자주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북한과의 일시적인 대화를 통해 북한의 의도를 간파하고, 시간을 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5)동맹의 관리: 박정희 정권은 남북대화를 대미 동맹관계의 강화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을 이끌어나감으로써 정권은 닉슨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당황하고 있었다. 닉슨독트린이라는 정책을 발표함으로써 미국은 냉전분위기보다는 데탕트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그러한 주체로 변화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8.15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선의의 경쟁을 선언하였으나 구체적인 남북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시기에는 71년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난 후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남북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71년 여름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되었고 11월부터 여러 차례 비밀 회담이 이루어지다가 마침내 1972년에 7.4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7.4공동성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자주와 평화 그리고 민족대단결이다. 이 시기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요구대로 남북대화의 적극적인 시기였으며 이를 국내정치와 동맹 강화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마지막 시기는 남북대화가 시들어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8월 북한은 대화의 중단을 하였고 두달 전인 6월에는 한국정부가 6.23선언을 통하여 두 개의 한국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국과 미국은 두 개의 한국에서 이해를 구하게 된다.*미국의 한반도정책의 변화와 대화권유위협인식은 상수가 아니라 변수이다. 50년간 한반도대치 상황 속에서 양진영 간의 위협수의에 대한 평가는 종종 변해왔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맥락 속에서 대북강경론을 고집했던 부시정부 사이에서 한미동맹의 균열이 잘 나타내주고 있다. 70년대 초 데탕트물결 속에서 한국과 미국의 정책결정가들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평가를 놓고 심각한 의견대립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북한의 평화공세를 증거로 북한의 대남 침략의도가 줄어들었고, 중국의 견제로 대남공격능력 또한 줄어들었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이에 반해서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위협도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존슨 행정부시기 한미 양국은 베트남파병을 매개로 하여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하는 한 주한.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의 짧은 회동에서는 한국정책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지만 미 국무성은 주한미대사관에 주한미군 20,000명 감축을 통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단계적으로 주한미군의 철군계획에 박대통령에 의해 제안되기를 희망했었다. 미국은 미 대사관에 “남아있는 미군병력만으로도 대북억지력에 충분하며 한국군의 현대화 작업은 물론 한국의 힘을 크게 신장시킬 것”임을 한국 측에 주지시켜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주한미군감축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감축은 무리이며, 한국의 방위력이 현저하게 증강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감축은 미국의 실행대로 계획에 옮기고 있었다. 한반도에 긴장완화를 원하던 미국은 한국 측에 북한과의 대화를 종용하였다.포터대사의 “통일에 대한 단상”이라는 전문에서 보면 미국이 남북대화를 설득하려는 노력과 한국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대해서 적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북한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꺼리고 있었으며, 한국정부의 방향이 잘못잡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이러한 포터 대사의 희망은 두 달이 지나서야 박정희대통령의 8.15선을 통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8.15평화통일구상선언1970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대통령은 북한이 무력통일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한에 가로놓인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 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 시행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평화통일구상선언은 박정희대통령의 주도에 의해 발표한 것이었다. 닉슨독트린이 발표는 평화공존과 긴장완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통일구상선언의 발표에 대해 국내정치세력간의 갈등이 빚어졌다. 국방부와 중앙정보부는 찬성했으나 국방부와 외무부에서는 시기상조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법무부장관인 이호장관은 “북한의 남침의도가 있는 시기에 대통령 남과 북의 만남을 만족스런 시선으로 바라봤다. 남북대화가 분단국 당사자들 사이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미국은 드러나지 않게 한국의 대북정책의 변화를 추인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정희대통령과 그의 관료들은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 힘의 우위의 입장에서 대화하기 위해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한국은 미국에게 남북대화가 진전되는 시기에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대북협상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1971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25차례의 적십자회담과 여러 차례의 비밀실무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본격적인 남북 간의 대화의 결실은 1972년 7월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7.4공동성명이후에도 북한이 남한정부에 바라는 조건은 군비경쟁중지, 주한미군철수, 군대10만 이하축소,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 반입금지, 평화협정체결 등 5개항을 제의하였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는 못하였다. 남한은 북한체제를 장기적으로 변화시키는 목적이었지만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와 한국정부의 약화를 바랐다.박정희 정권은 7.4공동성명이후에 북한 인사들이 방문한 1개월 뒤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72년 10월 유신은 미국정부에 큰 딜레마를 안겨주게 되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탈 아시아정책에 맞는 한반도정책을 찾기에 골몰했다. 60년 후반기에 한국과 미국은 밀월을 즐겼고, 그 이후에는 한일수교와 베트남파병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그토록 원하던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환심을 샀고 그 반대급부로 국내정치에서 미국반대를 사전저지하거나 또한 미국의 의도된 무관심 속에 자신들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실천해나가는 등 정권의 자율성을 신장시켰다.*미국의 대한반도 정책변화와 한미관계미국의 대 공산권 데탕트정책은 한국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미국은 북한을 고립시키기 보다는 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안보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박정희 정권이 적극적인 남북대화의 추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다.
    인문/어학| 2006.06.23| 6페이지| 1,000원| 조회(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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