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관광자원과 관광활성화 방안대구의 관광자원대구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영남내륙의 중심도시이다.지형적으로 팔공산, 비슬산 등이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분지로 형상되어 있으며, 금호강, 신천 주변으로 시가지가 발달해 있다.신천은 시가지 중심부를 남에서 북으로 흘러 금호강에 합류하며, 금호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다. 이같은 자연조건은 대구의 역사와 시민생활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사방을 둘러싼 산들은 한서의 차가 심한 기후와 대륙적으로 보수적은 시민기질을 낳았으며 낙동강의 풍부한 물은 대구를 산업도시로 성장시키는 주요자원이 되었다.지금부터 대구시티투어를 시작해보자.1. 대구의 명소일단은 팔공산권과 앞산권, 달성권 시내관광 등으로 구분된다.(1) 팔공산권팔공산은 대구의 북동쪽을 감싸 안고 있는 대구의 진산이다.대구사람들은 마을 뒷산처럼 스스럼없이 오르내리는 산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규모이다.팔공산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동화사이다.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호국 불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동화사에서 수태골 방향으로 차를 몰아가면 부인사, 파계사가 잇달아 나타난다. 도로 오른편에 큰 돌로 세워 놓은 ‘부인사’ 이정표를 보고 길을 오르면 포도밭이 좌우로 펼쳐지고, 이어 부인사가 나타난다. 부인사는 동화사의 말사로 7세기경에 창건되었으며 신라시대에 선덕여왕의 축원당으로 사세를 크게 떨쳤다.그리고 갓바위는 너무나도 유명한곳이다. 정식이름은 석조여래좌상이며 머리위에 두께 15cm 정도의 평평한 돌 하나를 갓처럼 쓰고 있어 갓바위라 불린다. 갓바위는 정성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원 가운데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소문으로 이른 새벽부터 방문객들로 줄을 잇고 있다. 매월 1일이나 입시철에는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며 매년 1월 1일은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더욱 붐빈다.(2) 앞산권앞산 일대는 맑은 공기와 푸른 숲, 각종 위락 시설이 어우러진 곳으로 대구 시민들에게 친숙한 자연휴양지이다. 비슬산에서 뻗어 나온 산맥이 산성산, 대덕산으로 이어진다. 또한 앞산은 골짜기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중 큰골, 고산골, 안지랑골은 비교적 크고 이름난 골짜기이며 이외에도 용두골, 매자골, 달비골 등이 있다.큰골은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곳으로, 대구시민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어, 앞산의 장쾌한 전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으며, 종점의 전망대에는 대구 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이외에도 한국 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낙동강승전기념과과 천년고찰 은적사가 있다.고산골은 앞산에서 제일 긴 골짜기로, 갖가지 운동기구가 마련된 심신수련장과 약수터가 있어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안지랑골은 한때 영험 있는 약수가 사방에서 샘솟아 유명해진 골짜기 있다. 안일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피난처로, 일제 강점기하에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장으로 겹겹의 내력을 간직한 유서 깊은 절이다.(3) 달성권달성군은 대구광역시의 개칭과 함께 대구에 통합되었지만 아직도 시골정취를 완연히 느낄수 있는 곳이다. 달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비슬산이다. 비슬산은 산수가 수려하고 공기가 청량하며 유가사, 용연사, 소재사 등 사찰과 약수터가 사방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구지면의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도동서원에서 현풍으로 내달려 현풍곽씨들의 아름답고 애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현풍곽씨 12정려각을 둘러본 후, 현풍할매집에서 그 유명한 ‘할매곰탕’을 먹으며 시장기를 풀 수 있다.하민면 묘리에는 사육신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힘겹게 일으킨 순천박씨 세거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사육신 여섯 어른을 제사지내는 육신사가 세워져있다. 묘리에서 다시 큰 도로로 나오면 멀리 성주대교와 함께 낙동강의 큰 물줄기가 온전히 드러난다. 정자 하목정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옛 선비들처럼 풍류에 적어 보는 것도 묘미이다.(4) 시내관광대구역에서 정남향의 보행 전용도로로 접어들면, 대구의 번화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거리에는 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상가들이 발달해 있으며 극장, 대형서점, 병원등이 밀집해 대구의 중심가를 이루고 있다.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 대구에서 가장 낭만적인 거리로 통하지만, 이 거리의 역사는 아주 길다.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대구의 경상감영이 들어설 때부터 이곳은 대구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다. 중앙로에서 가까운 경상감영공원은 경상감영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당시 이 관아 주변으로 객사, 진영, 군창, 형장, 등 주요기고나이 몰려 있었다. 또, 인근 교동에는 교육기관은 향고가 있었다.여기서 남편에 위치한 남산동은 대구의 크리스트교가 맨처음 전파된 곳이다. 남산동에는 가톨릭 대학, 교구청, 수녀원등이 밀집해 거대한 가톨릭타운을 형성하고 있으며, 도로 건너편에는 영남최초의 고딕양식 성당인 계산동 성당이 세워져있다.2. 문화와 놀이(1) 명물거리동성로 - 대구역에서 중앙파출소로 이어지는 동성로는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각종 브랜드제품을 취급하는 상가들을 비롯해 음식점, 카페, 호프집 등이 늘어서 있다. 또한 대구역 맞으편 교동시장 일대로는 컴퓨터를 비롯한 전기, 전자제품을 싸게 파는 전자상가 외에도 분식점이 늘어서 먹자골목과 교동귀금속거리도 있다.봉산문화거리 -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거리인 봉산문화거리는 봉산동 대구학원에서 봉산오거리에 걸쳐 펼쳐진다. 봉산문화거리를 상징하는 장승이 서있는 입구는 평소와는 다른 거리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전시회가 많이 열리는 봄, 가을이면 각종 미술전시회 개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주로 작은 규모의 개인전이 개최되는 곳이 특징이지만, 전시화가 열리지 않는 날에도 자체 소장품을 전시한다.약전골목 - 중구 남성동 중앙파출소 맞은편에는 한약방과 한의원이 즐비하게 늘어선 약전골목이 펼쳐진다. 도로를 따라 800m나 이어지는 약전골목은 조선시대에 개설된 대구 약령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대구는 약재의 본산지인 경상도를 배후에 두고 있으며 풍부한 낙동강 물로 약재의 운송 또한 수월해 약령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조선시대 대구 약령시는 봄, 가을에 열렸는데, 성시를 이룰 대는 대구 인구보다 약령시 출시자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서양의 양약이 보급되고, 일제의 강점기 정책이 가중되면서 약령시는 점지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약령시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현재 그 자리에 약전골목이 조성되어 맥을 잇고 있다.(2) 공원달성공원 -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원래 대구에 있었던 옛 부족국가인 달구벌의 토성이었던 달성은 성관발달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축성된 토성으로 달성공원이라는 이름도 바로 그 토성에서 유래한다. 달성고원에서 가장 인기를 모으는 곳은 동물원이다. 1970년에 문을 연 이 동물원에는 코끼리, 사자, 원숭이, 물개, 타조 등이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또, 공원 곳곳에는 대구를 대표하는 큰 인물들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경상감영공원 - 경상감영공원은 400년 전 대구로 옮겨온 경상감영이 처음 자리 잡았던 곳이며, 그 터를 영구히 보존하자는 취지로 1970년에 첫 문을 연 중앙공원 자리에 담장을 허물고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어 1997년 10월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아직 끝나지않은 전쟁?중국속의 티베트?1) 개요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며 ‘달라이라마’라는 종교적인 지도자의 통치아래 자연의 진리에 순응하며 순박하게 살고 있던 티베트인들, 그들에게 중국이라는 존재는 총과 무기로 무장하여 그들의 나라를 지배한 침략자들을 뿐이었다.티베트는 13세기 이후 중국의 통치와 영국의 영향을 번갈아 가며 받아 왔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1950년까지 티베트는 베이징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 소위 맥마흔 라인이 히말라야 산맥 분수령에 설정되어 영국령인 인도와 티베트간의 국경선으로 간주되었는데, 영국은 동 라인의 서쪽까지만 행정권을 행사하여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중국은 티베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많은 근거를 갖고 있었다.중국은 한국전쟁 개입과 유사한 시점인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을 동원,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당시 티베트인들은 유엔, 인도, 영국 등에 지지를 호소하며 저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 티베트는 1951년 5월 서장자치구로 통합되었고, 1954년 중국·인도간 협정에서 인도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권을 인정하였다. 나라를 잃어버리게 된 티베트에서는 이후 본격적인 폭동, 독립을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2) 중국의 티베트 점령 그 후① 2000년 이전1911년 : 신해혁명 후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남 ? 1914년 : 인도와 티베트 간 맥마흔라인 설정 ? 1949년.10월 중국정부 수립 ? 1950년.10월 : 중국군, 티베트를 점령 ? 1951년.5월 : 티베트, 중국의 서장자치구로 편입 ? 1954년 : 중국·인도간 협정시 인도,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권 인정 ? 1959년.3월 : 티베트에서 대규모 폭동 발생 후 달라이 라마 인도로 망명 ? 1989년.1월 : 판천 라마 사망 ? 1989년.3월 : 59년 폭동 30주기 소요 발생(1989년.3월-1990년.4월 티베트에 계엄령 선포) ? 1989년.6월 : 천안문래 티베트-네팔 국경 통제 강화 ? 6월 : 달라이라마, 클린턴 대통령 면담 ? 11월 9일 티베트 수도 라사에서 폭탄 폭발사건 발생(사상자 없음)③ 2002년1월 21일 : 중국, 티베트 출신 미국 학자 석방했다. 중국은 대미관계개선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티베트 출신 음악 학자를 20일 석방했다고 한 인권운동가가 언급했다. 샌프란시스코 소재 뚜이화 재단의 존 캄 이사장은 티베트에서 전통 음악과 무용을 녹화하며 연구 활동을 벌이다 중국 당국에 간첩 혐의로 체포됐던 응가왕 초펠씨가 병보석으로 석방을 언급했다.1월 23일 : 중국, 티베트 등 서역 이주정책 재개.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들의 고유문화 훼손가능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족 등을 대거 티베트와 몽골 접경지역에 이주시켜 정착시키는 정책을 재개한다. 이에 따라 주로 한족 등으로 구성된 이주민 2만여명이 티베트와 접한 칭하이(靑海)성의 두란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칭하이 성 빈곤대책부처 관계자가 전했다. 지난 1990년대 말 세계은행은 약 5만8천여명을 대상으로 한 중국의 이주민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4천만 달러를 배정했으나, 티베트와 몽골 등 독특한 현지문화와 전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비난여론에 따라 이듬해 지원계획을 철회한다.3월 11일 : 티베트자치구 서기,'달라이 라마 대표자격 없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국민을 대표할 권한이 없다고 레그콕(列確) 티베트(西藏)자치구 서기가 주장하였다.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참석차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레그콕 서기는 이날 중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당국과 달라이 라마가 대화를 해야 한다는 미국 측의 주장에 대해 '티베트 국민들은 중국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며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은 티베트 국민을 대표할 권한이 없다'고 언급했다. 레그콕 서기는 또 '달라이 라마는 이미 티베트에서 인기를 상실했고 해외 반중(反中)세력에 의해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이며, 달라이 라마의 불성실한 태도로를 옮겼다면서 티베트 내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면 해외 신병치료도 검토하기로 중국 당국이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지그메 상포는 1983년 9월에 체포돼 `반혁명 선전 및 선동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88년 스위스 대표단의 교도소 방문 당시 티베트 독립 발언을 했다가 형이 5년 연장됐으며 1991년에도 8년 연장형을 받았더. 캄 회장은 이에 따라 지그메 상포의 형 집행 만기일은 그의 나이가 80세 중반에 달하는 2011년 12월 3일. 중국 당국은 몇년전부터 지그메 상포에 대해 노령을 이유로 육체노동을 면제해주었다고 전했다.4월 9일 : 중국은 티베트자치구(西藏自治區) 개발과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자치구 수도 라사(拉薩)시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회전 관광전망대 겸 식당을 갖춘 153m 높이의 회전 관광탑을 개장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회전 관광전망대는 관광거리와 미식을 함께 모아놓은 곳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불과 45초 만에 이곳에 도착하면 1천300년 역사의 포탈라궁과 라사시의 전경, 눈덮인 히말라야 설경 등을 관람 가능하다. '눈덮인 지역의 진주(雪域明珠)'로 명명된 이 관광탑은 해발 3천746m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이처럼 티베트의 현대화와 개발을 선전하고 있으나,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통치에 반대해온 서방 운동가들과 국제 인권단체들은 중국의 티베트 개발과 한족(漢族)들의 티베트지역으로의 지속적인 대거 이주는 티베트 문화와 이 지역 고유의 분위기를 말살시키기 위한 중국의 책략이라고 비난한다. 런던 소재 국제 인권단체인 '티베트정보네트워크'는 이 콘크리트탑의 건설은 라사시의 역사성과 독특한 문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관광탑의 건설 경비는 베이징시가 부담했으며, 중국 중앙 정부는 티베트의 경제 발전을 돕는다는 이유로 전국 주요 도시들이 티베트를 지원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나 서방 운동가들과 인권단체들은 이를 중국의 `티베트 중국화 전략'으로 간주할 뿐이다.7월 8일 : 달라이 라마, '관련해 중국과 더욱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관영 중국일보는 6일간의 일정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중인 갸넨드라 국왕이 10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보도했다. 갸넨드라 국왕은 '네팔은 양국관계 발전을 거스르는 요소들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중국의 이익을 해치는 어떠한 활동도 네팔국경 안에서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네팔은 티베트와 약 1천km의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지난 51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이래 약 3만5천명의 티베트인들이 중국의 통치를 피해 네팔에 망명, 중국 정부의 '골칫거리'로 등장하였다. 한편 장 주석은 이 자리에서 네팔 정부의 마오쩌둥(毛澤東)주의 반군소탕에 '정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장 주석은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네팔 정부의 테러척결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고, 중국은 네팔 반군이 마오쩌둥 사상을 추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팔 정부의 반군소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아울러 장 주석과 갸넨드라 국왕은 티베트와 네팔의 지리적 인접성이 양국의 상호협력에 도움이 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으며, 장 주석은 정치, 경제 부문을 비롯해 언론, 비정부단체 등 양국의 활발한 교류를 촉구했다.11월 8일 : 중국은 달라이 라마 축원기도에서 티베트인 5명 체포했다. 중국군 병력이 최근 중국 서부 시추안(四天)성의 티베트인 자치지역인 간지에 진입, 티베트인 5명을 체포해 갔다고 테베트 지원단체가 발표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은 간지 거주 티베트인들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위한 기도행사를 개최한 것과 관련하여, 지난달 18일 35∼55세 사이의 티베트인 남자 5명이 중국군에 검거됐다고 언급했다. 이 단체는 그러나 지난 2월 달라이 라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전통 불교의식이 간지에서 개최된 적이 있다면서, 이번 사건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11월 18일 : 티베트 망이 점령의 결과로 사망하고, 6000개 이상의 사원들이 파괴되었으며, 수천명의 티베트인들이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투옥되고, 고문당했고, 지금도 그러하다.② 티베트인들의 정치적 & 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1959년 티베트를 탈출했다. 그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자유를 향한 그들의 투쟁에 있어서 비폭력과 자비라는 불교도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③ 중국 정부는 언제나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를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들이 많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과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 종교 및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독립국가로서 티베트는 주권을 가진 정부와 통화, 우편체계, 언어, 법류, 관습등을 행사했다. 또한 티베트 정부는 1951년 이전에 영국, 몽골, 네팔 등을 포함하여 외국과 승인된 조약을 맺기도 했다.④ 현 서장 자치구는 티베트가 아니다. 현재 중국정부는 역사적인 티베트 영토를 여러개의 지역과 도로 나누어서 기존 시에 편입시켰고 역사적인 티베트 영토 중 중부지역과 동쪽 일부 지역만을 서장 자치구로 선포하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티베트의 고유 영토 중 반 이상이 중국으로 흡수된 셈이다.⑤ 오늘날 티베트는 의사표현과 종교, 언론등과 같은 기본적인 자유가 철저하게 제한되고 있으며 임의 체포가 계속 되고 있다.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헌재 티베트에는 천 이백명 이상의 정치범이 있으며 이들 중에는 1995년 중국당국에 의해 납치된 판첸 라마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승려와 비구니, 일반 시민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⑥ 중국정부는 티베트 여성들에 대한 강제적인 낙태와 불임수술이 자행되고 있으며 수만명의 대륙 내 중국인들을 티베트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어 티베트 문화의 생존 자체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중국인 정착자들은 현재 대부분의 도시지역과 많은 농촌지역에서 이미 티베트인들의 인구를 넘어서 티베트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조차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 반면에 지금도 수천명의 티베트 인들은 있다.
사상, 기원, 그리고 혁명1. 혁명의 시작2. 다니엘 모르네 :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2.1.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한 걸음 (1715~1770년)2.2. 빠르게 달려가는 혁명 사상 (1771~1787년)2.2.1. 귀족과 중간계급에 있어서의 혁명사상과 혁명2.2.2. 혁명적 사상에 민중적 지지와 그 원인3. 기원이라는 이름의 망령4. 로제 샤르티에 :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4.1 계몽사상이 혁명을 부르지 않았다.4.2 사회변화에 의한 혁명5. 완벽하지 않은 혁명의 기원6. 사상혁명 그리고, 혁명의 역동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1. 혁명의 시작1789년 7월 14일, 100명의 민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사격한 바스티유 감옥수비대에 격분한 민중들은 폭도로 돌변해 6명의 수비병을 무참히 죽이고 바스티유를 함락했다. 왕권의 상징이자 원한이 서린 바스티유의 ‘함락’ 소식에 고무된 민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부르봉 왕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혁명의 불꽃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다.)앞의 글은 『프랑스혁명』이라는 책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프랑스 혁명’은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여러 관점에서 연구되었으며,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볼 다니엘 모르네(Daniel Mornet)의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과 '로제 샤르티에'(Roser Chartier)의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도 그 연구 성과의 하나인데 이들은 프랑스 혁명과 사상 간의 관계에 대해 접근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여러분은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의 관계를 어떠한 관점에서 읽어 내고 있는가? 하나의 기원, 혹은 어떤 여러 가지의 원인으로부터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고 보고 있는가? 혁명이 자신의 정당성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계몽사상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가?하나의 원인이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다시 원인 되어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는 직선적, 목적론적 시도도, 혹은 이런 시도를 완전히 배제한 끝없는 목록에 지나지 않는 서술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715~1770년)1715년경 새로운 사상이 글로써 표현되면서 점차 문필가들 사이에 전파되었지만 사람들은 아직 계몽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영생을 얻는다는 미명아래 복종하고, 인종하는 삶은 거부하지만, 은밀한 빈정거림 속에 삐뚤어진 에피쿠로스파로 나타났을 뿐이었다.당시는 절대군주제의 괴리에 관하여 많은 불안이 싹트던 시기였지만, 문인들은 아직 순수한 의미의 정치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씩 불만을 느끼고 거부하는데 익숙하게 되어갔을 뿐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신앙 경시 풍조가 발전하였다. 상류사회에는 일종의 냉소주의의 생활태도가 생겨났고 살롱 등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관용과 행복의 윤리와 함께 무신앙의 요소가 발전하였다.이러한 흐름은 상류사회에만 영향을 미치다가 1748년경에는 지방학회를 통해 지방에까지 약하게 퍼져나갔다. 이때쯤 사람들은 정통 교리에 대해 반대하고 그 잘못을 드러내려 하였다. 이것은 점차 종교 서적에도 퍼져나가게 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심은 깊지만, 마치 종교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는 경향을 보이게 하였다. 이들로 인해 단순한 사교 장소였던 살롱이 철학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당파를 형성하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이들 새로운 목소리는 사상의 자유와 관용을 중요시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절대권과 감수해야 하는 복종에 대한 이론 대신 합리적인 권력 이론을 대두시켰다. 그러나 실제의 폐단을 언급하고, 치유책을 제시하는 이러한 목소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아주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아직은 정부의 기본원칙을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으며, 분노와 폭력을 강조하는 것은 드물었다.2.2. 빠르게 달려가는 혁명 사상 (1771~1787년)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있어서 예전의 전통적인 엄격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지방일수록 더욱 그랬다. 정치적으로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찬양하며, 개혁을 관해서 아무에게도 살롱이 되는 경향을 띄기 시작하였다.중류계급에서 또한 처음 무신앙에 대한 굉장한 혐오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점점 중류 부르주아지 가운데 무신앙과 미온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아졌다.이러한 것은 살롱보다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카페나 클럽을 통해 대화, 토론 및 언쟁으로까지 이야기 되어졌다. 혁명정신은 이러한 곳에서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학위를 필요로 하지 않고선 유명무실했던 파리 대학 대신 문학회들이나 협회 같은 것들이 대중들에게 주어지지 못하였던 교육을 제공하였다. 다양한 강좌를 열었던 협회들은 정치주제나 철학적 주체를 다루기도 했고, 점점 규모가 커지면 많은 파리시민이 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계몽사상의 전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지적 어둠이 여전히 심하였던 지방의 경우도 이시기에 수도인 파리와 비슷한 형태의 점차적인 사상 전파의 모습을 보였다.파리와 더불어 지방에서의 지식욕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에 만연한 병폐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낳게 되었으며, 이것은 즉, 혁명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2.2. 혁명적 사상에 민중적 지지와 그 원인민중에 있어서는 계몽사상은 어떠한 관계로 이야기 될 수 있을까?이것을 살펴보기 위해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글을 읽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기도서 외의 다른 것을 읽을 수 있는 실력과 그들이 실제로 다른 것을 읽었느냐의 문제이다. 이것과 관련한 증언들을 보면 민중들이 종교나 법률 공부를 하는 풍조로 농업과 공업에 일손이 부족하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민중 속에까지 계몽철학 사상의 영향이 스며들어간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영향은 프랑스 전체에 걸친 보편적인 것이었다.하지만 이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민중이 혁명을 받아들이고 그 전개를 촉진시켰지만 그 사상이나 교조는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히 열성적으로 따랐을 뿐인데, 이들이 이 결과서로 사건을 전제로 기원을 추적하는 일은 여러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잡다한 사실이나 이념들을 한데 그러모아 한 사건의 ‘원인’이나 ‘기원’으로 제시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인과론적 선별과정을 전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소위 ‘기원’으로 추정되는 사상과 행위들에 대한 소급적 재구성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기원이라는 망령”은 무의식적으로 총체성, 연속성, 인과성을 요청하고, 이러한 목적론적인 일체의 역사적 전통은 일련의 사건들을 있지도 않은 단일한 관념적 연속성속에 일치시킴으로써 역사가 지닌 독특성과 단절성을 훼손하게 된다.4. 로제 샤르티에 :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4.1 계몽사상이 혁명을 부르지 않았다.샤르티에는 모르네가 주장하는 계몽철학이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혁명의 단절이 생겼다고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은 제기 한다.먼저 이 주장은 계몽철학을 논할 수 있던 공적 영역의 확대, 이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태도 수용적 태도를 전제한다. 문화적 기원에서는 여론이 철학정신에 대해 수용적이었는가, 완고하였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해야 될 것은 18세기에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개념적 용어인 ‘여론’이 형성되었던 상황이다.여론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개념적 실체로 정의 된다. 이러한 여론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새로운 정치적 사회 유대성 단체에 직접 참여했던 소수의 사람들에 국한되고, 팸플릿에만 한정되어 있는 절차를 가지지 않는다.정치, 행정, 사법 등 사회 모든 분야의 담론에 침식하여, 공동체가 영주에 대항하건, 직인 노동자들이 장인에 대항하는 법률소송의 배후에도 존재할 만큼 분열과 사회적 정당화의 강력한 도구로 작용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권위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즉, 이것은 자율적 영역과 비판적 영역이 출현하여, 절대군주제의 구조 내에 군주제의 원칙들을 파괴시키는 담론의 영역을 창출한 것을 의미한다.샤르티에에 의하면 위의 전제에서 다음으로 제기할 수 있는 지적 기원의 문제점은 곧 철학적인 책 등의 텍스트가 담론에 속하였던 증명해준다.우리는 혁명이 계몽사상을 만들어 냈다는 다양한 회고적 모색(모르네의 지적 기원에 반하는)의 여러 방법과 수단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혁명 의회는 볼테르와 루소, 두 명의 작가만을 진정한 혁명의 선구자로 인정하였다. 나머지 작가들은 거부되어졌던 것이다. 즉, 혁명에 의해 영웅들이 선별되어졌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혁명이 책을 만든 것이다.4.2 사회변화에 의한 혁명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텍스트, 즉, 사상과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면, 종교에 있어서, 또한 왕에 대한 태도, 정치적 면에 있어서 급진적인 변화와 언어에 대한 관계 또한 재고찰 할 수 밖에 없다.먼저는 종교이다.18세기에 들어오면서 비기독교화의 과정은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먼저 가톨릭에서 강요하던 미사참석과 부활절 의무가 18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본당들이 주일미사 때 신자를 모으지도 못하였고 부활절 의무도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잘 이행하지 않았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연옥에서 죄를 감소하거나 완화시키기 위해 미사를 요구하는 것조차 소멸하였다.)또한 이전의 금욕을 강요하던 교회의 입장과는 상반되게 피임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출산율이 통제되었는가 하면 혼전 성교로 인한 사생아 출산율은 오히려 증가한다.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성적 행태도 교회의 기준으로부터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었다.인구의 이동 또한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 사람들의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은 인쇄물, 뉴스, 유행을 확산시켰고 이는 공동체의 새로운 사고와 행동유형을 도입시켰고, 전통적 가르침과 주입된 행동방식에서 벗어나 자유와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했다.이러한 비기독교화와 세속화 과정을 샤르티에는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위와 같은 상황들 속에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 것이다. 또한, 회의주의의 일반화로 사람들이 완전히 기독교로부터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영역의 축소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크게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왕에 대한 실이다.
국가 그리고 주권의 탄생역사교육과 20500084 김미현1. ‘국가’와 ‘주권’ 개념의 등장2.『국가론』의 탄생배경3. 국가와 주권의 탄생3-1. 가족의 주권과 국가의 주권3-2. ‘국가’ -구성원들이 원하는 안전보장에의 욕구의 산물-4. 주권을 정립하는 보댕과 홉스의 접근방식의 차이4-1. ‘하나의 주권’에 대한 불완전성4-2. 인민의 계약으로 만들어진 ‘국가’4-3. 자연법을 넘어서는 주권의 권위5. ‘국가와 주권’ -근대로의 인식전환-6. 참고문헌1. ‘국가’와 ‘주권’ 개념의 등장“국가”라는 개념은 언제 등장하였을까, 고대에는 국가라는 개념도, 영토국가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것은 중세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세를 거쳐 근대로 넘어가며 종교전쟁이 시작되면서 의식의 전환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에 장보댕은『국가론』이라는 책을 저술하며 국가의 개념을 정립하고, 국가가 존재하지 위한 주권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100년이 흘러 홉스라는 인물이『리바이어던』을 집필하며 국가의 개념과 역할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장보댕이 『국가론』에서 말한 국가의 개념과 주권의 개념, 그리고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것을 비교해보면서 그들의 사상을 알아보도록 하자.2.『국가론』의 탄생배경먼저『국가론』의 저자인 보댕은 16세기 프랑스의 종교전쟁의 혼란스러운 시기에서 출발한다. 당시 프랑스는 위그노전쟁)으로 이해 대단히 황폐해져 있었고 여기저기서 정치학 서적들이 출판되었다. 보댕의 저서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 다른 책들과는 달리 보댕은 종교적 당파심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왕을 모든 종교적 분파와 정치적 당파 위에 군림하는 민족국가적 통일의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두 번째로,『리바이어던』의 저자인 홉스가 살던 시대에는 처참한 종교전쟁과 치열한 계급투장의 시대였다. 1640년 의회에서 왕권 옹호자에 대한 처벌을 결의하자, 홉스는 프랑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영국의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어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댕이나 홉스가 살았던 시기는 치열한 종교전쟁과 사회의 급박함으로 인해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살육이 계속되던 이시기의 혼란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강력한 국가를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강력한 국가를 정당화 해갔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3. 국가와 주권의 탄생3-1. 가족의 주권과 국가의 주권먼저 보댕의 경우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보댕은 책의 첫 부분에서 “국가란 다수의 가족과 그들의 공유물로 이루어진, 주권에 의한 정당히 통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후 8장에서 이루어진 주권에 대한 정의에서 보댕은 “주권이란 국가의 절대적이며 영구적인 권력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국가를 하나의 합법적 정부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합법적이라는 단어는 자연법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고, 국가를 강도단과 같은 불법적 결사와 구별되게 만드는 것으로 쓰여졌다. 보댕은 이러한 국가와 주권에 대한 정의로부터 구체적으로 주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 그에 따르면 주권의 세 가지 속성은 영구적이고, 절대적 권리이며, 명령이다. 또한 보댕은 가족을 사회에서 생겨나는 자연적 공동체로 간주했다. 가족의 종속자들은 가부장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활시킬 것을 제의 했고, 국가는 가족이 결합한 하나의 정부로 정의했다. 또한 가족은 사적 개인의 영역이며 국가는 공적 혹은 공동의 영역이다. 따라서 보댕은 이 둘을 확고하게 분리시켜려고 했다. 그러나 가족이 가진 이 사적영역은-즉 재산을 포함하여- 가족에게 속하며 주권은 군주와 그 장관들에게 속한다. 라고 말하며, 가족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국가의 절대권력과 결합시키려 하는 난점을 노출시켰다. 그가 주장하듯 주권이 분할될 수 없다면 보댕이 말하는 구성원인 가족은 주권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3-2. ‘국가’ -구성원들이 원하는 안전보장에의 욕구의 산물-다음은 홉스다. 홉스는 심리학적측면에서 인간행동의 법칙을 밝히고 안정된 사회가 가능한 조건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홉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나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성향의 하나로서, 죽음에 의해서만 비로소 끝나는, 권력에 대한 항구적이고도 끊임없는 욕망을 들겠다. 이러한 욕망의 원인은 인간이 이미 획득한 것보다 더욱 강한 기쁨을 바라기 때문이거나 혹은 좀 더 온건한 권력에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많은 권력을 축적하지 않고는 현재 그가 지니고 있는 권력이나 보다 잘 살기 위한 생계수단을 확실하게 지켜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위에서 홉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안전보장에 대한 욕구이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힘이나 교활성에 있어 대체로 차이가 없고, 누구도 안전할 수 엇으며, 이 때문에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이들의 행위를 규제할 시민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만인에 대한 만인에 대한 투쟁’에 대한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더럽고 야수적이며 단명으로 끝난다.” 이러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홉스도 보댕과 마찬가지로 주권은 절대적이고 양도가 불가능하며, 불가분적 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4. 주권을 정립하는 보댕과 홉스의 접근방식의 차이4-1. ‘하나의 주권’에 대한 불완전성자,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국가와 주권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주권을 가진 국가에 대해서 그 구성원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또한 주권을 가진 국가가 구성원들에게 해야 할일은 무엇일까.먼저 보댕을 살펴보자. 보댕이 주장하는 주권은 자연법과 신법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드러난다. 물론 주권이 자연법을 유린한 데 대해서 법률적으로 책임을 지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은 협약의 준수와 사유재산의 존중을 요구한다. 주권자의 협약은 그 신민이나 혹은 다른 주권자에 대한 정치적 의무를 포함하며, 그러한 경우 보댕은 주권자가 구속된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주권이 자연법에 반하는 것을 명령한다면 장관의 의무는 무엇일까? 법률은 주권자의 의사였지만 때로는 자연법과 대립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왕이 합법적으로 행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것을 통치법이라고 불렀다. 그 법은 그것을 유린하면 주권자체도 소멸한다는 것을 분명히 내포했다. 주권자는 법률의 원천인 동시에 또 주권자가 제정하지도 않고 변경할 수도 없는 어떤 헌정적 법률에 종속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가 말했던 주권에 관한 정의의 이면에 나타낸 통치법이 주권개념에 함께 존재하며 혼란을 야기시켰다.또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연법에 기초하여 사유재산의 불가침성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자연법에 기초한 사유재산은 주권자의 권력에 의한 제약보다 더 큰 것으로 여겼다. 재산권은 주권자가 그 소유자의 동의 없이는 그것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댕이 말했던 ‘잘 질서잡힌 국가’는 그 법률적 권한이 무한한 하나의 주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사유재산에 대한 과세는 동의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통치법과 마찬가지로 주권에 대한 고유한 제약으로 취급했다. 결국 그는 가족의 이론이 국가의 이론과 결합하여할 할 시점에서 그 둘을 분열 시키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다음 홉스를 언급할 때 이야기 할 것이지만 국가의 주권에 시민들-혹은 인민들-이 복종해야 하는 이유의 부재이다.4-2. 인민의 계약으로 만들어진 ‘국가’홉스는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을 통해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악한 존재이며, 자신들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계약에 의해 국가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홉스는 계약을 모든 사람들이 자립을 포기하고 하나의 주권에게 자신을 종속시키는 개인간의 계약으로 묘사했다. 홉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당신도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동일한 방법으로 그의(주권자의) 모든 행동들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나는 나 지신을 지배한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사람 또는 그 회의체에 권위를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리바이어던, 또는(좀더 경건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불멸의 하느님의 가호 아래 우리의 평화와 방어를 힘입고 있는 저 ‘현세의 신’ Mortal God의 출현인 것이다.”)그렇다면, 주권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민들이 국가라는 기구를 만든 목적, 즉 안전보장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다. 시민들이 복종하는 유일한 이유인 안전을 국가는 지켜주어야 한다. 시민들에게 있어서 절대권력과 완전한 무정부상태,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절대권력 일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안전에 대한 욕구를 국가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권위는 주권자에게 집중된다. 이렇게 되면, 법과 도덕간의 구별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사회는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주권자의 목소리와 의사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권위는 무제한 적이거나 혹은 스스로의 권력에 의해서만 제한받게 된다. 여기에서 주권이 제한된다든지, 분할된다든지 한다면 주권을 만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4-3. 자연법을 넘어서는 주권의 권위홉스는『리바이어던』26장에서 시민법에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시민법이란 국가가 말이나 글 또난 그 밖에 그 의지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표시를 통해 옳고 그름의 구별, 즉 무엇이 규칙에 어긋나고 무엇은 어긋나지 않는지를 구별하는 데 쓰기 위해 모든 백성들에게 명령하는 규칙들이다.”)
*목차*1. 헤로도토스의 일생을 함께한 『역사』2.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헤로도토스의『역사』2.1 제 1권 - 제 6권 :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성장, 그리고 마라톤 전투2.2 제 7권 - 제 9권 : 그리스를 페르시아에 복속하려는왕의 기도와 페르시아의 패퇴3.『역사』속에 나타나는 헤로도토스의 생각3.1 『역사』속에 잔재하는 신(神)의 존재3.2 『역사』속에 나타나는 ‘민주주의’와 ‘자유’4.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 원칙과, 비판적 자세의 함양1. 헤로도토스의 일생을 함께한 『역사』『역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책은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 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 - 특히 양자(兩者)가 어떠한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 - 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연구 ? 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이다.”) 이 책은 일반 사람들이 ‘역사학의 아버지’ 라 부르는 헤로도토스가 쓴 방대한 역사서이다.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기에 간단한 언급만 하고 넘어가려 한다. 그의 탄생은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 남서부의 그리스 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탄생연대나 죽은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할리카르나소스에서 B.C 484년 즈음 태어나 B.C 431년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맞추어 아테네로 돌아왔고, B.C 427년 이후에 약 60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것이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그는 본래 도리스계였지만, 이오니아 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배경은 그로 하여금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탐구는 사모스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그러면, 과연 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역사』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2.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헤로도토스의『역사』2.1 제 1권 - 제 6권 :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성장, 그리고 마라톤 전투)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설명할 때 리디관지어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여러 나라의 풍습, 제도, 입법, 종교, 지리 등 자세한 사항까지도 기술했다.제 2권에서는 이집트에 대한 자세한 사항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집트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기술에는 이집트에 대한 정보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일강의 수원에 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고 서술하고 있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피라미드 규모나 건축방법과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다수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들려 준다. 제 2권 또한 이집트의 풍습이나 제도 그리고 지리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것들뿐만 아니라 신탁면에서도 매우 상세히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제 3권에서는 이민족에 관한 원정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권에서는 캄비세스의 사생활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가의 계보에 치중하고 있고, 신에 의존한 신정정치에 초점을 두고 있는 헤로도토스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키로스의 아들 캄비세스의 난행과 ‘가우마타의 난’) 이라는 반란과정을 거쳐 마무리 된 후 다레이오스라는 왕이 등장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제 4권에서는 다레이오스의 바빌론 점령 이후 과정에서 시작하며 스카타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다레이오스의 스카타이 원정은 성과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스키타이의 민족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적나라한 설명을 펼친다. 스키타이 민족의 전쟁에 대한 관습을 표현함에 있어 점점 다가오는 페르시아 제국의 위압감 속에서 그들의 강인함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에 대한 자긍심을 표현하고 있다. 즉 그리스의 주체의식에 입각해서 페르시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제 5권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관한 언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특히 아테네가 독재자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점점 부강해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그것이 한가지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당시 사람들의 감정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서사적 구조에 입각하여 묘사를 진행하고 있다.제 6권에서는 본격적으로 동서 전쟁이 시작된다. 페르시아 왕에게 땅과 물을 바치라는 서신의 요구를 받들었던 그리스의 수많은 섬 중 하나인 아이기나는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아이기나가 그들에 대한 적의에서 페르시아 왕에게 굴복했고, 결국 페르시아와 합세하여 아테네를 공격할 속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는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하고 아테네를 향해 군대를 진격시키고자 했다. 곧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마라톤전투를 시작으로 동서항쟁의 막은 올랐는데 그러나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아테네군에게 패하고 말았다.2.2 제 7권 - 제 9권 : 그리스를 페르시아에 복속하려는 왕의 기도와 페르시아의 패퇴제 7권부터 제 9권까지는 동서항쟁의 최정점을 볼 수 있다. 제 7.8.9권에 이르기까지 서술되는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은『역사』의 핵심으로써주제에 적합한 서술을 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전투가 실제적으로 시작되는 이 부분부터는 군더더기 표현과 설명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도착한 후 그리스로 진격한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맞서 싸워 동서항쟁의 최정점이었던 살라미스 해전)을 거쳐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고, 페르시아는 패퇴한다.3.『역사』속에 나타나는 헤로도토스의 생각3.1 『역사』속에 나타나는 신(神)의 존재헤로도토스는 인간이 오만하면 신이 징벌을 내려 곧 파멸된다고 보았다. 번영하고 있는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는 그리스의 현인 솔론을 왕궁에 초청한 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자기라고 생각하면서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누구냐고 질문을 한다. 솔론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뿐 그를 거명하지 않지 크로이소스는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인다. 그러자 솔론은 신은 질투심이 강하고 인간을 괴롭히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떠난다. 지나친 번영은 신의 에서 신의 번개에 맞아 죽는 것은 눈에 띄게 큰 것들뿐으로, 신께서는 그렇게 해서 큰 것들이 지나치게 우쭐거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아르타바노스는 강대해져 번영을 맞고 있는 페르시아를 염려하는 것이다. 후에 페르시아의 패배를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오만함으로 신이 벌을 내렸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신화적 요소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헤로도토스가 살았던 당시 사람들은 호머의 작품에 빠져 작품 안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을 신앙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역사』속에 신화적 요소를 등장시켰고, 또한 전쟁터에 나가기 전, 신탁에 의존하는 아테네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 7권을 보자. 페르시아의 침공 위협 속에 있던 아테네 시민들은 델피)에 사자를 보낸다. 델피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다리나 손과 사지도 성치 못하고, 모든 것이 짓밟히고 파괴되리라 … 신들의 많은 신전들도 불로 파괴되리니, 벌써부터 겁에 질린 듯 진땀에 젖어 있으니,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피는 절박하게 다가올 심한 재앙을 예고하는도다…”) 그러자 아테네 사자들은 다시 신전에 들어가 두려움에 떨며 델피에게 좋은 말을 내려달라 청한다. 앞의 신탁에서 보다 훨씬 온화한 말을 들은 그들은 그제서야 페르시아와 싸울 용기를 얻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신탁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종교적 관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신에 대한 경건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헤로도토스나, 아테네 사람들이 전통적인 종교관에서 크기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3.2 『역사』속에 존재하는 ‘민주주의’와 ‘자유’『역사』속에는 헤로도토스의 자유에 대한 그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를 언급하기에 앞서 그의 탄생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통치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역사』가 탄생한 정확한 연도를 모르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최종적인 구상은 헤로도토스가 아테나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집어먹고 조국을 포기했다거나 비록 포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항복해 버렸다면 해상에서 페르시아 왕을 맞아 싸우려 하는 자는 전무했을 것이다.” 라고 비판받더라도 말하겠다고 서술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앞에서 언급했던 신(神)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그는 당시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인은 일인의 군주에 예속된 노예지만 그리스인은 오직 법에만 종속하는 자유인이기 때문에 일인의 자유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서술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의 민주정에 대한 예찬과 그것을 밑바탕으로 그리스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그리스인을 찬양으로써 보답한다.4.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 원칙과, 비판적 자세의 함양지금까지 헤로도토스『역사』의 전반적 내용과 그가 책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위대한 여행가였다. 그의 서술 방식에서 볼 때 헤로도토스의 진정한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기란 어렵다. 애매모호한 부분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통해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나 수집한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확성과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들은 이야기의 대부분이 전설이기 때문에 진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제 2권에서 “이 책을 통해 내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각각의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 이라고 했던 반면, 제 7권에서는 “내 의무는 전해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본시 전체에 걸쳐 적용될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나름대로의 역사 서술의 원칙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에게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한 B.C 1세기 키케로가 “역사에서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진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