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불교해석과 그 비판 (불교의 입장에서)-선악의 개념을 중심으로-목차1.서론2.본론-니체의 종교 평가(선악의 개념에서)-허무주의를 통해 본 불교-영원회귀를 통해 본 불교-니체의 불교평가 비판3.결론서론.니체. 그의 철학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 온 정신과 제도, 삶의 방식과 가치들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시작한다. 사후에야 자신의 철학을 비로소 인정받게 된 비운의 철학자인 니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굉장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니체는 기독교 1000년의 역사를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간단히 없애버렸다. 유태교의 여호와, 기독교의 야훼, 이슬람교의 알라와 같은 유일신은 이름은 다르지만 사실 하나의 신이며, 섬기는 신은 똑같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이와 같이 있지도 않은 신이라는 것에 스스로 엎드리는 것을 굴욕, 치욕이라 하였다.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공격한 셈이다. 니체는 유일신 종교에 대한 대안으로 디오니소스와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붓다를 들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술의 신이다. 술은 포도주를 상징하며 포도주는 대지, 대지는 다양성을 상징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 붓다는 불교에서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물론 이들은 유일신이 아니며, 특별한 신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본론.-니체의 종교 평가(선악의 개념에서)니체가 말하기를 기독교는 이 세계를 부정하고 저 세계를 갈구하며 현실의 삶은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피안, 천국, 지옥 등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며 기독교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인간의 본능에는 스스로를 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자신을 선 이라고 미화하기 위해서 쓰는 방법이 바로 악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를 비난하고 선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선과 악은 경계가 있지 않다. 어떤 이에게 있어서 선을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바로 악이다. “나는 선하다, 그래서 너는 악하다.”와 “너는 악하다, 그래서 나는 선하다.” 라는 명제를 보자. 같은 사람이 이 두 가지다. 창조주는 진리 자체, 선 자체, 미 자체 이다. 여기에 대립되는 개념으로는 불완전, 결핍, 비 진리, 악, 추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선과 악의 개념이다. 선 자체인 신이 있다면, 악은 누가 창조했는가? 창조주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했기에 창조주라 일컫는데 선자체인 신이 어떻게 악을 창조했는지 논리에 오류가 생긴다. 이에 대한 기독교 측의 입장은 신은 선 자체이고 악마가 있어 이것이 악을 대변한다고 했다. 인간이 선악의 측면을 모두 다 갖고 있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악한 면을 갖게 된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선악과로 시험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오류가 보인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지만 애초에 선악과를 만든 신이 있다면 애초에 악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기독교에서의 선악의 개념은 많은 오류를 담고 있다. 니체는 기독교는 신과 피안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며 현실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또한 병적으로 자기를 기만하며 있지도 않은 허구의 신 앞에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다며 기독교를 맹렬히 비판했다.이에 반해 불교는 신과 피안이라는 것을 설정하지 않아서 유일한 실증주의적 종교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반면에 무욕의 평정인 열반을 추구 하는 점에서는 힘의 약화가 일어나며 삶을 부정하는 일이 일어난다며 불교를 약자의 종교라 비난하기도 했다.니체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지만 불교와 기독교를 유사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니체는 기독교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작풍을 만나면서 새롭게 변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종교 또한 힘에의 의지에서 발원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개인과 존재의 양상의 외적 틀에 의해 역동성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니체는 기독교, 불교 등은 농도와 명암의 차이만 있을 뿐 허무성을 내포한 인간부정의 종교라고 말했다.-허무주의를 통해 본 불교이제 니체가 불교를 비판한는 무가치하다는 선언을 했다. 야스퍼스는 허무주의에는 존재의 허무주의와 가치의 허무주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불교는 존재의 허무주의라고 했다.불교에 있어서 일체의 존재는 공이다. 공이라는 의미에서 일체의 존재는 ‘없다’. 다만 불교에서 이미 반복해서 기술하였듯이 공은 단순한 없다가 아니며 더구나 텅 비었다는 뜻은 아이다. 오히려 일체는 상의상관이기 때문에 만일 이것을 간파한다면, 존재는 없다가 아니라 충실한 것이다.니체는 무엇보다도 불교적 특징을 “무(無) 가운데로의 동경"이라고 보았으며 불교의 그것처럼 "순수하게 도덕적인 가치 정립"은 "어느 것이나 니힐리즘으로 끝난다."고 쓰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불교에 관한 중요한 견해들을 시사해준다. 불교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비존재에의 길이며, 이 때문에 그들은 욕정으로부터의 온갖 충동을 기피한다. 불교의 이상가운데는 심지어 선악으로부터의 해방이 본질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기에는 완전성의 본질과 합치하는, 도덕의 세련된 피안성이 고안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선한 행위도 역시, 단지 수단으로서만, 즉 모든 행위에서 해방되기 위한 그것으로서만, 잠깐 동안만 필요로 하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불교는 철저히 무 욕망, 무 행위, 비존재, 해방의 교의로서 인식되고 있다. 니체는 기독교와 불교에 관한 비교적인 언급도 남기도 있다.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은 우리를 불교로부터 구제해야 한다.”고 했다. 니체에게 있어 불교는 “활동 없는 평온함”이었다. 따라서 불교보다는 비극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무기력함보다는 활동성을 선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니체가 오직 평온함만을 추구할 정도로 유약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곧 힘을 마비시키는 평화보다는 전쟁, 비폭력과 체념보다는 권력과 힘의 대결 그리고 정복자의 지배를 선택함을 의미한다. 니체가 불교대신 비극을 선택하는 것은 고통을 택하는 것이다. 붓대에게는 제거, 해소의 대상인 삶의 고통이 니체면서 불교에서 삶보다는 무를 선택하는 허약성만을 본 것은 아니다. 니체는 불교에서 평화의 구현을 보고 있다. 니체는 또한 불교는 명철함을 구현하고 있다고도 보았다. 왜냐하면 불교는 정신적 가치의 초월성에 대한 환상의 덫에 빠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엄격한 심리학적, 생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감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저서 ‘반 그리스도’에서 불교의 명철함에 대한 그의 예찬을 찾아볼 수 있다. 반 그리스도에서 니체는 “불교는 역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실증주의적 종교이다. 불교는 그 인식론에서조차 ‘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고통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이미 불교는 도덕관념의 자기기만을 떨쳐 벼렸던 것이다. 이점에서 불교는 기독교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나의 언어로 말하자면, 불교는 선악의 너머에 있다.”)라고 말했다.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를 분명히 좋게 평가한 점도 있지만 니체의 눈에 불교는 가장 대표적인 허무주의의 얼굴 가운데 하나처럼, 그리고 기독교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세계에 대한 부정’처럼 비치고 있다. 니체가 불교와 전략적 결연을 맺고 있는 것은 단지 기독교에 대한 반대의 일환이었을 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불교를 “무에 대한 의지가 삶에 대한 의지를 압도하는” 두 개의 거대한 허무주의적 종교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무를 향한, 열반을 향한 불교의 열망”을 주지시키면서도 또 열반을 “동양의 무”로 제시하는 주석을 덧붙이고 있다. 이렇듯 니체는 열반을 완전한 사멸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불교를 무의 숭배로만 이해하고 있다.-영원회귀를 통해 본 불교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는 그 운동의 원인이나 목표를 초월적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영원회귀로 형식화된 허무주의는 그 의미가 보다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윤리적 의미에서의 허무주의를 존재론적 의미로까지 확대시키기 때문이다.영원회귀 사상을 유럽식 불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존재나 사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니체는 무신론적이며 초월적 도덕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말하자면 정신 위생적 처방으로 삼으려는 불교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마치 결벽증에 걸린 환자처럼 계속해서 자신을 씻어내려고 하는 점에서 위생학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훨씬 더 현실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니체의 불교평가 비판니체는 근원적으로 불교를 잘못 이해했으며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을 다수 남기고 있다. 니체는 붓다가 공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기 때문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던 사실을 모르고, 불교의 공의 교의를 소극적으로 허무주의적이라고 잘못 이해했으며, 불교가 고통의 제거를 목표로 삼음으로써 삶/생명의 거부가 그 목표가 되었다는 이유로 불교를 "소극적 허무주의"의 한 형태라고 비난했다. 니체는 고(苦)라는 단어가 불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적절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불교가 고(苦)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잘못 이해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기쁨, 심지어는 지복이라는 뜻까지 함축하기 때문에 단순히 "고통"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붓다의 초점은 "이기적인 갈망, 자기통제의 결핍, 증오, 적의, 슬픔, 게으름, 타성, 음욕, 걱정, 의심, 그리고 형이상학적 개인적 자아 실체" 등등 고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 두어진다. 비슷하게 니체는 또 갈망, 갈애를 근절하고자 하는 불교적 노력이 생명 혹은 삶을 거부하는 것 이라고 오해했다.니체는 불교에 대하여 상당부분 오해하기도 했지만 서구 세계에 불교가 득세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니체의 판단에 의하면,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귀한 가치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될 때, 그에 대한 반응으로 깊은 상실감이 뒤따를 것이고, 삶은 진정으로 아무런 인간적인 목표도 목적도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같은 시련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교 같은 즐겁고 세련된 허무주의적, 비 신적 종교의 매력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라며 았다.
지하철 경로우대 폐지. 과연 노인들이 문제인가?최근 지하철적자가 심각한 것이 드러나면서 지하철 경로 우대 제도를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난해 6대 도시 지하철의 무임승차 액수는 2635억 원으로, 전체 영업 손실 7214억 원의 36.5%에 달한다. 더구나 서울은 영업 손실 3514억 원 가운데 무임 비용이 1789억 원으로 무려 51%에 이른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뒤늦게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한다.지하철 경로 우대 제도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무임으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경로사상이 담긴 아름다운 제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켜져야 한다.지하철의 엄청난 적자 때문에 정부는 무임승차 제도를 개선할 움직임이 보인다. 서울 메트로는 “운수수입의 감소는 노인인구의 증가로 인한 우대권 이용자의 증가와 환승인원 증가 등이 주원인으로 분석됐다.”고 밝힌 바 있다. 65세 이상의 노인 우대권 발급으로 적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서울 메트로는 업무와 무관한 직원 가족들을 위한 승차권을 발급하는데 매년 10억원을 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지하철 적자의 원인으로 노인들의 무임승차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직원과 직원가족의 불필요한 무임승차부터 줄여야 할 것이다. 지하철 공사 직원이라도 업무 외에는 운임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직원가족이 왜 무임승차의 혜택을 받는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런 합법적인 무임승차제도로 일어나는 손실은 지하철 요금 인상을 통해 메꾸고 있다. 이러한 불필요한 손실부터 줄인 후에 경로 우대 제도를 논해야 할 것이다.지하철 적자의 원인이 노인의 무임승차로 인한 것은 아니다. 노인이 승차한다고 해서 전기가 더 소비되는 것도 아니고, 운행 횟수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논리에 따라 지하철 무임승차에 따른 손실액이 커졌다는 분석은 문제가 있다. 지하철 적자운영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국세로 이용하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싶다.그렇다면 지하철의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령화 사회로 인해 노인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노인인구의 증가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지하철 공사가 모두 떠맡는 것은 문제가 있다. KTX는 30%, 선박 20%, 비행기 10% 등을 노인에게 할인해주는 것에 비하면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는 분명히 크게 혜택을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적자해결을 위해서 우선 국가에서 자금을 조달해주어야 한다. 물론, 자금 조달에 앞서 지하철공사 직원의 업무 외 무임승차나 직원가족의 무임승차 혜택은 폐지해야 할 것이다. 직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업무용으로 매달 일정금액을 지불하는 것이 더 합당한 방법이다.그리고 생활수준에 따른 차등혜택을 주어야 한다. 노인들 중에는 노인 무임 승차제도를 적용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노인도 있고 기초 생활조차 어려운 노인도 있다.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혜택을 받고 못 받고를 구별한다면 현재 경로우대제도의 혜택을 받던 노인들 중의 일부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실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