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7
검색어 입력폼
  • 이력서 양식
    이력서 ㅣResume성 명한글한문영문주민등록번호생년월일현주소H.P)e-mail학력기 간(년 월)학교명전공컴퓨터활용가능사용정도컴퓨터활용능력상 중 하워드프로세서상 중 하외국어언어시험명점수경력근 무 기 간회 사 명담당업무병역1.현역 2.방위 3.면제 4.미필기 간-군 별1.육군 2.공군 3.해군4.기타병과계급면제사유동아리&봉사활동활동명기간내용가족사항관계성 명연령학력직업기타부모동생기타종 교취 미특 기위 기재 사항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확인합니다.작성일년 월 일작성자(인)
    표준 이력서| 2010.11.25| 1페이지| 1,000원| 조회(668)
    미리보기
  • 조선후기 지방지배
    국가의 지방지배와 새로운 세력1. 국가 지방지배의 기본입장조선왕조는 17세기 이후 군현제의 정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세분화된 향촌조직과 기구 정비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면리제의 전면적인 실시로 구체화되었다.18세기에 들어와 왕권 강화가 시도되고 그 기초로서 수령권의 강화가 모색되고,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더불어 부세 또한 면리를 기초로 운영되면서 면리임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왕권 강화기에도 여전히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았던 노론 전제권력 또한 재지사족에 대한 견제가 더욱 절실하였다. 18세기 이래의 이러한 사정은 국가 또는 수령의 지방지배에서 새로운 세력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대시켜 가고 있었다.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아래에서 사회적 활동이 거의 봉쇄되어 있었던 새로운 세력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신분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관권과의 결탁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세력이 기본적으로 18세기 이후 사회경제적인 변화 속에서 일정한 부의 축적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국가재정의 궁핍과 빈발하는 기민(饑民)의 구휼을 위해서도 이들은 주목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전개된 납속(納粟)과 권분(勸分)은 바로 이들을 그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18세기 이후 정치?사회?경제적인 변화 속에서 성장하는 다양한 새로운 세력의 실체가 무엇이며, 이들의 역할과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국가의 지방지배에 이들이 어떻게 포용되어 갔는지를 통해 검토하고자 한다.2. 새로운 세력의 성장배경과 존재형태18세기는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농민층뿐만 아니라 사족도 분화시킴으로써 사족의 물적 토대와 향촌사회 신분질서를 혼란시키고, 이것은 나아가 국가의 지방지배정책까지도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어느 것이나 사족의 향권(鄕權)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력 또한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고, 기존의 사족지배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존재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화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일정한 사회세력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기존의 지배세력인 사족과 이들의 향촌지배체제가 한계를 드러내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 지배층의 이러한 한계는 우선 사족 자신의 문제, 즉 경제적 분화와 이에 따른 공론(公論)의 불일치 등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 지방지배정책의 변화에서도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면리제(面里制)의 정착과 이정법(里定法)의 실시, 공동납(共同納)의 강화, 부세(賦稅)의 금납화(金納化), 그리고 서원(書院)정책 등을 들 수 있다.2-2 새로운 세력의 존재형태새로운 세력의 존재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향전이었다. 향전이란 향촌사회 내부에서 향권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각종 쟁단(爭端)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기본구조는 사족과 사족 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대체로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존의 사족에 대한 새로운 세력의 도전이었다. 여기에서 새로운 세력이란 새로운 사회세력이라기보다는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기존의 재지세력인 재지사족과 향리가 아닌 다양한 제 존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신향과 향족으로 표현되고 있었으며, 재지사족의 기존 지배조직에 참여하거나 향임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들 중 신향은 주로 서얼을 지칭하며, 향족?향반이란 지역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였겠지만, 대체로 16, 17세기의 사족지배체제에 참여할 수 없었던 하층양반, 또는 과환과 혼벌을 잃음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몰락해 가고 있던 양반가문, 또는 이들과는 반대로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라, 그리고 수령권과의 결탁을 통해 양반으로까지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던 요호?부민층(饒戶?富民層) 등으로 규정할 수 있다.서얼은 특히 18세기 이후에 법제적이며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차별철폐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앙관직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도 향안?교안?원안(鄕案?校案?院案)등 이른바 3안에의 입록과 입록의 순차를 나이에 따를것[序齒]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법제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서얼에 대한 향촌사회 또는 가문 내에서의 차별은 여전하였다.18세기 이후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던 것은 요호부민층이었다. 이들은 생산력의 증가,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등을 통하여 일정하게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계층이었다. 이들은 18세기 이후 부세운영이나 향촌통제 차원에서 중앙권력 도는 수령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중요 대상으로 한 권분, 향교?향청과 관아(官衙)의 각종 수리를 목적으로 한 원납전(願納錢)의 징수, 목민서류(牧民書類)에서의 이들을 이용한 행정체계의 정비 등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권분과 원납은 요호부민층의 향임?교임?군임(鄕任?校任?軍任) 등으로의 진출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었고, 나아가 이들의 이러한 향임층으로의 진출은 하고 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권분과 원납은 요호부민층의 신분상승과 수탈체계에서의 이탈, 그리고 관권과의 결탁을 한층 용이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관권과의 결탁은 요호부민층의 성장에 필수적인 관권이 되고 있었다. 이들은 시간의 진전에 따라 양반층으로 또는 향임으로 신분과 직임을 고정시키면서, 그리고 수령권을 매개하여 사족의 향촌지배체제에 도전하고 있었다.3. 국가의 지방지배와 새로운 세력의 포섭3-1. 납속?권분과 새로운 세력납속제도는 시기별로 그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시기는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선조에서 효종대까지로 이 시기는 실직제수기(實職除授期)로 영직(影職)?노직(老職)?가설직(加設職)의 공명고신과 면향?면역?면천 등의 첩문이 판매되기도 하였지만, 특히 전임관과 사족의 의곡납부(義穀納付)가 장려되어 이들에 대한 실직제수가 주된 것이었다. 둘째는 현종에서 경종대에 이르는 시기로, 이 시기에는 주로 기근에 따른 진휼곡의 마련과 각종 산성축조 등의 재원확보를 위하여 모속이 실시되었다. 正職의 제수는 없어지고 노직?추증직?가설?실직첩과 허통첩?교생면강첩 등이 발매되었다. 속 인하되었으며, 납속자가 원하는 납속첩이 발급?판매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실직제수가 줄어들면서 사족의 호응이 부족하자 양인층의 납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양인납속자의 역(役)을 면제하기도 하였다. 셋째 시기인 영조?정조 대의 모속(募粟)은 주로 기근에 따른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 때에는 신흥부민층을 모속의 주대상으로 지목하는 부민권분론상제도(富民勸分論賞制度)가 시행되었다. 모속의 대상을 모든 사민(士民)으로 잡았지만, 특히 경제력을 가진 중인계층을 위주로 하였다. 공명첩의 남발과 수령에 의한 늑령권분(勒令勸分)이 문제가 되자, 영조 21년(1745)부터는 일도의 큰 흉년이 아니면 공명첩 판매를 제한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납속제도 정비정책은 이후 부민권분논상제도와 함께 법제화되었다.3-2 서얼의 성장과 신생노론의 형성탕평론을 앞에서 왕권 강화를 모색하던 영조는 서얼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소통과 처우개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당색 간의 대립과 갈등은 영조의 의지를 관철시키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영조는 마침내 48년(1771)에 서얼통청(庶孼通淸)을 결정함과 동시에 서얼을 청요직에 임명하였다. 서얼은 이러한 조치를 적극 환영하였고, 나아가서는 태학에서의 서치(庶齒)와 향안에의 통록(通錄)을 요구하여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향안통록은 곧 번복되었고, 향촌사회에서의 서얼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였다.서얼에 대한 관심은 정조대에도 계승되어 나갔다.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탕평책과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한편 영조대 이후 제대로 실시되지 않고 있던 서류통청과 태학서치를 더 구체화하고자 서류소통절목을 제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절목(丁酉節目)이다. 이것은 비록 적서구분의 명분론에 입각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서얼정책을 집대성함과 동시에 이후 서얼정책의 기준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규장각에 검서관제도가 마련되면서 서얼들이 핵심권력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정조가 남인, 서북인 등과 함께 서얼을 왕권강화 또는 노론전제에 대한 견제얼은 그들 자신의 조직적은 상소운동과 왕권의 지원하에 마침내 중앙정계에서의 허통과 함께 향촌사회의 여러 조직에서도 수임(首任)을 제외한 제반 직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얼은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신생노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관권의 협조 아래 향교에 출입하면서, 교안(校案)?향안(鄕案)?원안(院案)에의 허통을 요구하였고, 때로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뜻을 관철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는 언제나 기존 사족층과의 충돌이 수반되었고, 반면에 관권과 신생노론의 적극적 또는 암묵적인 협조가 있었다. 그러나 서얼과 신생노론과의 관계가 항상 일치하였던 것은 아니다. 기존의 지배세력인 남인과 그들의 독점적인 향촌지배체제에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치할 수 있었지만, 신생노론 역시 서얼의 통록(通錄)을 반대하면서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향촌사회에서나 중앙정계에서 서얼세력의 성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성장이 아직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관권의 지원 또한 적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한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 같은 한계는 당연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학문적으로나 사회경제적인 기반이 기존의 사족층과 결코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얼들의 활동은 결국 기존의 체제에 편입되고자 하는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들이 비록 부분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농민전쟁기에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민중적 기반을 토대로 사족의 체제에 재도전 하고 있었음은 주목해 볼 일이다.3-3 면리제의 운영과 요호부민층면리제는 조선 후기 국가 지방지배의 가장 중요한 장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임란 후의 하층민의 안정과 통제, 양역(良役) 확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면리제는 이미 ?경국대전?에서 체계화되어 있었지만, 본격적인 실시는 17세기 이후였다. 그리고 숙종 원년(1675) ?오가통사목?이 마련되면서 국가의 기본적인 지방지배의 다.
    인문/어학| 2009.06.12| 5페이지| 1,000원| 조회(172)
    미리보기
  • 조선후기 지방사
    Ⅰ. 서론1980년대 이후 조선 후기 지방사는 주로 향촌사회 지배구조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어 사종지배체제의 성격을 밝히는 데 비교적 주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아래에서 군현제로 편제된 향촌사회의 지배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는 사족중심의 파악 뿐 아니라 국가의 대민지기정책과 피지배 촌락민들의 동향 등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조선 후기 지방행정제도의 정비 측면을 관주도 지방지배의 심층화, 어사 파견과 지방지배 강화, 향교의 개혁안과 수령권의 강화, 지리서,지도와 지역파악의 체계화 측면에서 알아보기로 한다.Ⅱ. 본론1. 지방지배의 심층화(1) 지방지배의 배경18세기는 노론집권→탕평정국→국왕의 주도력으로 정국 운영방식의 변화가 진행되고 수령권을 통한 국가의 직접지배가 강조되며, 17세기 국가재조(國家再造)의지의 근본적 한계와 사회 변화의 가속으로 법제적 지배와 다양한 제도개선이 모색된 시기, 국왕의 대민 지배 의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시기라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 차이를 보인다.(2) 지방지배와 국왕의 주도력조선 초기 의 분위기가 18세기에 이르러 의 풍조로 바뀌면서 강력한 왕권을 지향하던 18세기 중후반의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변화하는 지방사회의 실정을 철저히 파악하고자 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왕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도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지방현실의 철저한 파악은 현실개선을 위한 기초자료의 확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확인 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여 보겠다는 의지를 국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각 읍에서 개별적으로 편찬한 기존 읍지들을 국가가 재정리하여 『輿地圖書』를 편찬하였으며, 정조는 『海東邑誌』를 편찬하였다.또한, 법전을 재편하기도 하였는데 18세기 법전의 정리 작업은 17세기 이래 계속적으로 미루어 왔던 『경국대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적극적인 노력인 셈이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방식의 모색이기도 하였다. 그리고『속대전』의 마련은세기에 들어와 지방관(수령)의 모습은 전 시기와 대비되었다. 政?敎의 분리로 인한 수령권 강화는 물론 향촌사회 운영에서 과거 사족이 지니고 있던 이념적 지배권마저 많은 부분이 수령에게로 이양되고 있었고, 향촌운영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부세 운영, 면리임의 차출 등에서도 수령의 전권이 행사될 수 있었다. 수령권은 사족의 간섭과 지원을 배제할 수 있는 법적 뒷받침을 받게 된 것이었다. 공동납 형태의 부세정책이 실시되어 향촌사회에서 부세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사족들의 견제력이 위축된 상태에서 수령에게 이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주어졌다. 이에 수령들은 수취를 독려하고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이향들을 동원하였고 이들 또한 향촌사회에서 새롭게 부를 축적해가며 성장한 부민층들을 수세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2) 국가의 수령 통제장치수령권의 강화는 도덕적, 능력본위의 인물 임명으로 효율적인 지방 지배를 기대하는 것이었지만 국가의 지방 지배를 위해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수령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 방법으로 첫째, 잦은 국왕의 구언윤음이나, 민소(民疏)의 직접 수용형태를 통하여 규찰의 근거 마련이다. 둘째, 어사 파견을 통한 수령의 감찰 기능 강화이다. 셋째, 비변사를 통한 수령의 통제이다. 조선후기 국가의 최고 지배기구로서 비변사가 가진 지방지배 기능은 의천권을 통한 지방관에 대한 인사권 행사와 팔도구관당상제를 통한 지방의 행정? 재정권 장악이다.2. 어사 파견과 지방지배 강화(1) 지방지배의 강화1) 정부의 수령통제 강화첫째, 수령의 탐학을 규제하기 위해 장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였다. 영조는 징탐법(懲貪法)을 강화하여 장리는 영불서용(永不敍用)) 에 처하도록 하였다. 둘째, 수령추천제(守令椎薦制)를 강화하였다. 수령을 추천하는 방식은 관례상 연초에 천거하는 이른바 예천(例薦)이 있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숙종대에 이르러 천주를 특별히 정하여 경재(卿宰) 이하로부터 삼사에 이르기까지 각기 3인씩 천거하는 별천의 법규를 새로 제정하였다. 셋째, 삼으면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2) 비변사의 지방지배 강화비변사를 통한 지방지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지방관 임명에 대한 의천권 행사의 강화이다. 개성, 강화, 광주, 수원 등의 4도유수와 함경도, 평안도감사, 함경북도, 평안도병사, 의주부윤, 동래부사, 제주목사 등을 비변사에서 의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팔도구관당상을 통한 지방통제 방식으로 역사제(歷辭制)가 있다. 원래 비변사의 팔도구관당상제는 각도의 장문과 문보(文報)를 원활히 처리할 목적으로 18세기 초에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비변사의 당상관이 팔도를 각각 분장하는 팔도구관당상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비변사가 지방관에 대한 통제력을 확고히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2) 어사역할의 확대1) 외관 감찰의 확대? 강화조선후기에 이르러 지방관에 대한 어사의 감찰 기능이 확대 강화되었는데, 이는 염찰 범위 확대로 나타났다. 염찰 범위의 확대라 함은, 어사가 염찰하는 지역이 종래의 생읍중심(?邑中心)에서 벗어나 연로제읍(沿路諸邑)에까지 확대된 것을 말하는 동시에 염찰대상이 지방관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감사의 폄제거하에 대한 수령의 반발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수령의 남형탐장에 대한 민인들의 저항이 고조되자 정부는 수령의 비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민은을 해소하기 위해 어사의 감찰 권한을 강화하였다. 즉, 수령권 강화에 따른 폐해를 어사파견을 통해 완화하고자 한 것이다.2) 민은(民隱) 파악정조대에 이르러 어사의 지방관 감찰 기능이 강화되는 추세와 짝하여 민은 파악의 기능 또한 강화된다. 어사의 민은 파악이 강화되는 경향은 별단 비중의 증대와 재거사목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민은의 내용은 부세수탈, 비리횡침, 형옥남용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 부세수취와 관련된 읍폐, 민막은 주로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과 연관된 문제들이었다. 비리횡침과 관련하여 특리 리(吏), 향층(鄕層)의 침탈이 민은의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었는데후기 향교의 실상과 폐단1) 인적구성 - 유생), 교생), 재임)의 폐단유생의 경우, 학문에 대한 열의나 성취도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출신 가문이나 신분만을 따져 유생을 선발하였기 때문에 유생의 질적 수준이 점차 낮아졌고, 교생은 향교에 수학하기 위해 입교하기 보다는 고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와 각종 의례를 주관하기 위한 목적이 더 앞섰다. 재임은 향교를 자신들의 사적인 기구와 같이 생각하여 재물을 마음대로 탕진하고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였으며 물러나거나 후임을 선발할 때에도 자기들 마음대로 천거, 사면하여 이를 수령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수령에게 과도한 청원을 하기도 하였다.2) 재정 - 교위전), 교위노), 보인), 제역촌)의 폐단교위전, 교위노, 보인, 제역촌은 조선 후기 향교 재정으로써 폐단이 많았다. 교위전으로부터 얻어지는 수입은 재임들이 먹고 마시는데 사용하거나, 양반들이 교위전을 경작한 후 흉작 등을 핑계로 조(租)를 납부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였고, 재임들이 사사로이 부린 교위노의 도망이 증가하여 향교 수호에 어려움이 커지기도 하였다. 또한, 재임들이 재정 부족을 핑계로 수령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교보를 모집하여 이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돈을 착복하였고, 제역촌민에게 군역과 잡역을 면제해 준다는 명목 아래 제반 경비를 제공토록 하여 촌민들이 받는 피해가 매우 컸다.(2) 향교의 개혁안과 수령권의 강화1) 개혁안의 내용① 인적 구성심이지는 『교원교폐절목』에서 동재유생은 반드시 문학과 행의(行誼)가 뛰어나 선비들로부터 널리 추앙받는 자를 선발토록 했고, 교생은 평민 출신으로 글을 알고 식견이 있는 자로 선발하고 선발 권한을 재임이 맡되, 정원에 대해서는 수령이 일일이 점검하여 이를 어기지 않도록 하였으며, 재임은 인격이 훌륭하고 향전(鄕戰)에 가담한 경력이 없는 유생 중에서 선발하되, 유생들이 후보자를 선발한 후 집강(執綱)의 동의를 얻어 수령에게 천거토록 하였다.② 재정향교의 재정원에 대한 폐단을 관리하기 위한 방안으로, 재임이 장부를 작성하여 주안점을 두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불요불급한 지출을 폐지하고 절차를 간략히 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2) 수령권의 강화심이지가 제안한 향교 개혁안의 내용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사실은, 이 개혁의 내용이 수령의 향교에 대한 통제권 강화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인데, 향교에 대한 수령의 통제권 강화는 대략 세 가지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첫째, 재임을 임명할 때, 유생들이 후보자를 선정한 후 집강의 동의를 얻어 수령에게 그 명단을 제출하면 수령은 인격과 학식 등을 살펴서 그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임명하였기에 재임의 임면은 완전히 수령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둘째, 재원에 대한 통제 강화를 살펴보면 수령은 재임이게 재원 장부를 철저히 작성하여 제출토록 하였으며 이를 일일이 대조하여 재임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셋째, 재임과 유생의 향교 출입을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수령권을 강화하였다. 그 이유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재임과 유생의 무단 취식이 곤궁한 향교의 재정을 더 어렵게 했기 때문이며,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향교에서 유생과 재임들이 모여 시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결론적으로 유생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운영되어 왔던 향교가 수령의 철저한 통제를 받게 되었으며 이것이 결과적으로 지방 유생에 대한 수령권을 강화시킨 일면이 있었던 것이다.(3) 개혁안의 의미와 한계개혁안의 의미로는 첫째, 영?정조대에 관학진흥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일련의 향교개혁안이 제시된 것은 정부의 관심이 사학인 서원으로부터 관학인 향교로 옮겨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향교를 ‘향촌사회기구’로서 인정하였다. 향촌사회기구로서의 기능과 역할이란 향교 유생들의 주도로 향약을 실시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충신과 효자 및 열녀를 표창함으로써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한 유교의 이념을 널리 보급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향교의 이러한 기능이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보다 더 컸다고 판단되며 심이지의 개혁안은 바로 그러한 .
    인문/어학| 2009.06.12| 5페이지| 1,000원| 조회(231)
    미리보기
  • 국사과 교수-학습 지도안
    국사과 교수 학습 지도안교과국사단원Ⅲ.통치구조와 정치활동2. 중세의 정치 2) 통치 체제의 정비차시3 / 7대상고1장소교실일시2009. 5. 18교사최지영학습목표1.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고려10c말 중앙집권적 귀족 정치 체제가 마련됐음을 이해한다.2. 고려의 중앙 정치 체제와 지방 행정 제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삼국,통일신라,발해의 제도와 비교하여 그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3. 과거 제도의 실시로 고려 지배층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교수-학습 활동수업 자료도입(7´)?전시학습을 확인한다→질문?주제를 개관한다.?학습의 주안점을 제시한다.·PPT자료전개(38´)?중앙 정치 조직→ 삼국시대,통?신,발해와 비교하여 설명-2성6부제:중서문하성,상서성/이병호형예공-중추원:군사기밀+왕명출납-어사대:관리참찰-삼사:회계,곡식출납-도병마사,식목도감:재신+추밀/고려의 독자성-대간:낭사+대관/간쟁,봉박,서경→왕권 견제?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삼국시대,통?신,발해와 비교하여 설명-5도양계:일반행정,안찰사/군사행정,병마사-주현과 속현:지방관 파견의 유무에 따름, 속현이 많음-특수행정구역(향,소,부곡),속현:간접적 통제 받음-향리:실제적인 행정 사무 담당?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삼국시대,통?신,발해와 비교하여 설명
    교육학| 2009.06.12| 1페이지| 1,000원| 조회(261)
    미리보기
  • 조선왕조실록 평가D별로예요
    Ⅰ. 서론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대별로 서술하여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1893권 888책이다. 고종과 순종 때의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아 편찬한 것이므로, 보통 조선왕조실록이라 하면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실록만을 말한다. 본래 실록 형식의 사서는 중국 양(梁)때 처음 편찬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편찬했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은 태조가 죽은 이듬해인 1409년(태종9)에 태종이 하륜 등에게 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Ⅱ. 본론1. 실록의 편찬 과정조선시대에는 춘추관에서 실록 편찬을 담당했는데 왕이 죽으며 다음 왕이 즉위한 뒤에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해 각종 기록을 토대로 앞선 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 편찬에 이용한 자료는 사초(史草)를 비롯해, 조정과 각 지방 관청의 보고서 등을 날짜별로 정리한 춘추관시정기, 와 같은 각 관청의 공식 기록과 각 개인의 일기, 상소문, 문집, 야사 등이다. 특히 사초는 예문관의 봉교? 대교? 검열 등의 사관들이 매일 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조정의 크고 작은 사무를 정리 기록한 것이다. 그 중에는 ‘사평(史評)’이라 하여 각 인물과 사건에 대한 비평도 있었다.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열람할 수 없었는데 이는 사관에게 직필(直筆)의 자율성을 줌으로써 후세에 정확한 역사 기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임시로 실록청 또는 찬수청을 설치했다. 대체로 정승을 총재관으로 삼고 대제학 등 문필에 뛰어난 관리들을 뽑아 편찬을 담당하는 도청(都廳)과 각 방(房)의 당상으로 임명했다. 각 방은 해당 왕의 재위 기간에 따라 3~6방 정도로 이루어졌다. 각 방에는 당상 이외에 실무를 담당하는 낭청이 있어, 사초를 비롯한 각종 자료를 연? 월? 일 순으로 정리하여 실록의 초초(初草)를 만들어 도청으로 넘겼다. 도청에서 초초 중 문제가 있는 부분을 고치거나 내용을 추가? 삭제하여 중초(中草)를 작성한 후, 총재관과 당상들이 중초를 재수정하고 교열하여 최종 원고인 정초(正草)를 완성했다. 이 정초본을 여러 벌 인쇄하여 각지의 사고에 봉안한 뒤, 기본 자료로 사용한 사초와 시정기, 초? 중초는 모두 세초(洗草 :물에 씻는 것)하거나 태웠다. 세초를 하는 것은 방대한 양의 종이를 다시 이용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역대 조정의 역사 기록을 두 종류 이상 후세에 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정초본 이외의 다른 기록이 남을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시비와 논란을 미리 방지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독 만은 오늘날 중초본이 남아 있는데 정초본과 대조해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세초까지 마친 뒤 실록 편찬에 관련된 작업이 모두 끝나면 그를 기념해 잔치를 열거나 총재관을 비롯한 당상, 낭청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2. 실록의 정치적 의미실록은 각 왕대에 있었던 일과 그에 대한 평가를 후대에 전하는 가장 중요한 공식 기록이므로 각 정치 세력은 사관의 선발과 실록의 찬수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관의 임명 절차는 매우 엄격하여 문과에 급제한 인물 중 재주가 있는 자를 추천받은 뒤, 정승, 좌 ?우 찬성, 좌?우 참찬 춘추관과 예문관의 당상관 이조판서 등이 모여 회의를 한 뒤에 임명했다. 이는 사관의 선발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 때 대북파의 영수였던 이이첨은 자신의 정치 비리가 실록에 기록되거나 비판받을 것을 우려하여 다수의 합의에 따라 사관을 선발하는 관행을 무시하고 모든 사관을 자기 세력의 인물로 충원했다가 비난을 받았다.정권의 교체나 정파의 세력 변화에 따라 실록을 아예 고쳐 쓰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 , 이다. 은 광해군 때 처음 편찬했다. 그런데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기자헌등 북인이 잘못 찬수했다며 대제학 이식이 고쳐 쓸 것을 건의 했다. 인조 당대에는 완성하지 못하고 1657년(효종 8)에 채유휴, 김육 등이 완성했는데 본래의 과 대비하여 보통 이라고 부른다. 이들 실록들을 비교해 보면 사안에 따라 각 정파의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관 등에서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3. 실록의 보존조선 초기 태조 정종 태종의 실록은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한양의 춘추관사고에, 1부는 충주사고에 보관했다.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새로 설치한 전주와 성주의 사고에 각각 보관했다. 이후에는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활자로 인쇄하여 위의 4곳의 실록은 불타 없어지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방 유생인 안의와 손홍록이 힘을 기울여 내장산으로 옮김으로써 고스란히 남았다. 전주사고의 실록은 왜란이 진행되는 동안 해주, 강화도, 묘향산 등을 전전하면서 보관되었다.왜란이 끝난 뒤에 정부는 다시 실록 출판에 착수하여, 1606년(선조 39)에 실록 3부를 다시 출판해 최종 교정본과 전주사고의 원본까지 합쳐 모두 5부를 갖추었다. 그 가운데 1부는 이전처럼 한양의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만일을 대비해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태백산, 평안도 묘향산, 강원도 오대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각각 1부씩 보관했다.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사고에는 선조 때 새로 출판한 실록을, 마니산사고에는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 실록을,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을 보관했다. 그러나 춘추관사고의 실록은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 불타 없어졌고,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병자호란 때에 상당 부분 파손되었다. 인조 이후의 역대 실록은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인문/어학| 2009.06.12| 3페이지| 1,000원| 조회(311)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2
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1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4일 일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0:1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