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스터디 5월 21일 (이재호)- 서양사Ⅰ. 구체제의 모순1.신분제의 모순(장기적 원인)1) 제 1신분: 성직자· 프랑스 인구 2,700만 중에서 10만 명, 그러나 교회의 영향력 막강· 종교생활 이외에도 교육, 구빈사업 독점, 언론 통제 및 출판 검열을 통제하면서 국민들의 정신생활을 지배· 토지의 10% 정도가 교회의 소유였고 성직자들은 귀족들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함.2) 제 2신분: 귀족· 40만 명 정도, 토지의 20% 보유, 면세 특권과 명예특권을 누렸다.3) 제 3신분의 계층분화)· 상부시민계급· 신흥중산적인 매뉴팩처 경영자· 농민계층⇒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전담2. 제정의 위기)(직접적 원인)· 루이 15세때 존로우의 미시시피 버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7년전쟁, 미국독립혁명원조등으로 재정이 파탄, 국체가 누적되어 있었다.· 루이16세는 1789년 5월에, 150여 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3부회를 소집해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3부회에서 귀족신분과 제 3신분 특히 부르주아가 서로 반목.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6월17일에 국민의회 선포. 사회엘리트 집단의 와해 및 분열이 시작. 사회 하층인민중이 움직 일 여지가 커졌다.3. 구체제의 모순· 18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문화가 가장 발전된 국가이고, 계몽사상의 발원지로서 사상운동이 가장 극렬하고 깊이 침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발전은 가장 느리고, 모순된 체제였다.· 법률체계와 행정체계가 다원적이었기 때문에 一元的, 전국적 지배가 불가능 했다.· 봉건족 반동현상이 나타남? 왕권약화를 계기로 귀족계층의 특권 회복을 위한 반동운동이 발생, 왕정하의 소외되었던 계층이 결합하면서, 혁명의 주요 세력이 됨Ⅱ. 혁명의 전개1. 국민의회1) 삼부회의 파행· 제3계급을 중심으로 국민의회 개최(1789년 5월) -테니스코트의 맹약· 1789년 6월 27일 → 합동회의 개최, 국민제헌의회 구성2)바스티유의 날(1789년 7월 14일)· 파리시민들의 폭동과 바스티유 감옥 습격 → 루이 16세 국민의회 승인· 바스티유 사건은 절대왕정에 대한 민중의 첫 승리를 의미한다.3)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인권선언은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 루소의 민약론을 위시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과 영국의 혁명사상과 권리정전, 미국 각 주의 권리장전, 제퍼슨이 초안한 독립선언의영향을 받아 작성되었다.·법률은 일반의지의 표현, 법의 지배의 원리, 평등한 개인의 시민권, 인민의 공동주권,인민의 자유권, 재산권의 신성함, 삼권분립의 입법원리, 저항권이 포함되어있다.4)국민의회의 개혁정책· 봉건제와 농노제 폐지를 선언, 행정제도 개혁 착수)· 군제개편, 국민개병주의에 의한 국민방위군 체제 확립· 재정문제, 국체문제 해결책 논의)· 자유주의 경제정책 실시 → 길드제도 폐지, 통행세와 관세폐지, 개인기업 장려· 91년 헌법 완성)2. 혁명의 과격화1) 자코뱅세력의 등장? 91년 헌법 비판 → 과두적 야합정치를 비판하는 결사체 등장)· 로베스삐에르가 영도하는 자코뱅클럽이 가장 우세2) 입법의회와 제2의 혁명· 反혁명의 분위기와 국왕피신사건으로 입헌군주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 쟈코뱅 중심의 입법의회구성·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 시정부의 자치, 즉 파리코뮨 선언· 입법의회의 개혁정치)· 당통의 공포정치 시작3. 제 1공화정과 국민공회1)국민공회? 1792년 국민공회 소집, 보통선거제를 채택하였다.? 무정부상태와 내분을 종식 시키고 반혁명 세력을 타도, 국민과 자원을 총동원하여· 국왕의 사형문제 대두)· 1793년 국왕의 단두대형 시행 → 전유럽 경악, 대불동맹 체결의 계기· 1793년 5월 산악파 쿠테타 → 국민공회장악· 「93년 헌법 제정)」2) 공포정치· 국내외의 혼란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임시적 공포정치의 필요성이 대두· 공안위원회 설치(1793))· 정적숙청)· 방토즈법), 프로레알법) 제정3)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 국민공회→ 자코뱅클럽 패쇄, 공안위원회 축소· 파리코뮌의 자치제도와 민주적공화정 종식,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 폐쇄· 반동정치로 극심한 혼란을 야기)· 「95년」헌법 채택 )4)집정정부의 취약성· 로베스피에르 정권 붕괴이후「95년헌법」을 근간으로 집정정정부 수립· 양원제(500인회와 원로원)의회와 5인의 집정과으로 구성? 신흥부르주아지와 소토지소유농민이 주요구성원이었다.· 집정정부의 혼란과 정치세력들의 이산, 충돌이 금심하게 나타났다.· 유산계급에 입각하여 수립된 총재정부는 전쟁에 따른 경제난과 좌 우파)의 압력으로말미암은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Ⅲ. 프랑스 혁명의 평가1. 정통해석1)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자코뱅적 해석(보벨)2) 프랑스혁명이 반봉건적, 반귀족적 부르즈와 혁명2. 수정주의 해석)·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보는 견해를 반박하고 정치사적 혁명으로 그 역사적의미를 축소시키려 함3.수정주의의 재견해1)연속설 : 프랑스 혁명은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 아니라 과거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2)엘리트혁명론 : 혁명의 주체세력으로서 자유주의적 귀족을 중심으로 부유한 제3신분즉 부르주아 상층을 포함한 엘리트 집단이 16세기 이래로 형성. 이들은 귀족의 상위를인정하면서 토지재산과 부 그리고 재능을 소유한 ‘개방적 엘리트’이며 계몽사상과 자유주의라는 공통된 유대로 하나의 정치집단화.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계몽주의혁명. )3)세 가지 혁명의 상충 :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으로 통칭될 수 있는 하나의 일관된 사건흐름, 곧 한 덩어리가 아니라 제각기 별개의 혁명들이 상충되며 진행된 것이고우연적 상황에 의해 서로 결합되었을 뿐임. 국민의회의 혁명과 도시인민대중의 혁명, 농민혁명.4)일탈설) : 8월 4일 밤의 결정과 인권선언으로 과거의 제3신분대표들은 그들의 주요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1791년 7월의 상 드 마르스 학살 사건 이후 민중의 개입으로 혁명은 빗나가기 시작했으며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이 왕궁을 습격한 사건은혁명을 본 궤도로부터 완전히 일탈시켰다. 이는 거대한 붕괴였으며 제헌의회가 쌓아올린건설의 대들보가 무너진 것으로 ‘제2의 혁명’이었고 이후 혁명은 ‘전쟁과 파리 군중의 압력으로 18세기 지성과 풍요로 닦여진 대로를 벗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특권신분이 사회적 특권을 향유하는 가운데 제 3신분에 속 한 시민계급이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성장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는 구체제의 사회모순과 절대왕정의 행정적 무능력이 변혁의 계기였다.) 프랑스 혁명의 발단은 구체제에 대한 반발 자체에서 보다는 헤어날 수 없는 국가제정에서 시작되었다.) 도, 군, 읍, 시에 자치제도(코뮌)를 두어 지방분권적운영,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 교회령 몰수결정, 교회령을 담보로 불환지폐인 아씨나 화폐 발행 → 악성인플레의 원인이 되기도 함) ①국왕에 대한 정지거부권제롸 단원제의 입헌 군주제도 채택, ②입법의회 구성→ 법률제정의 권한, 선전 포고 및 조약체결 동의권을 획득 ③제한선거와 간접선거의 원칙을 채택 ④ 적극적 시민과 소극적 시민 구분 → 납세의 의무에 적극적인 시민에게만 투표권 부여, 부르주아층의 이권을 보호) 과두지배적인 입헌군주제를 수립했다고 인식하며, 국민의회가 금권정치로 변질되었다고 비판) 국왕과 프로이센의 내통 소문 → 반군왕적 폭동이 대규모로 발생, 제 3회 바스티유 기념일을 계기로 파리 시민들의 궐기가 발생) 브리소에 의해 「자유의 십자군이 주창」되었다.) 입법의회는 왕정을 폐지, 왕권의 정지를 선언 하였다. 보통선거에 의한 국민공회 구성을 결정(1992)) 산악파-국왕의 사형주장, 지롱드파-국왕의 사형 반대→ 국민투표로 결정, 투표결과 산악파의 승리) ①적극적 시민과 소극적 시민의 구별폐지, ②생존권과 노동권을 보장, 실업자와 병약자에 대한 공공지원을 규정, ③ 보통선거에 입각한 민주주의 구현 ④봉건제 지대와 공조들을 철폐⑤매점금지법과 일반생필품 최고가격법 제정⑥ 빵배급제도 실시, 구인법도 시행) ①전시내각과 같이 운영 ②국민총동원, 반역자와 반혁명 용의자의 체포 ③ 통화안정정책, 공동생활 개선 정 책 ,곡물개량정책등을 강력히 집행 ④혁명재판소, 일반보안위원회 설치) 미온적 공화론자를 숙청, 자코뱅과 상퀼로트와 결탁하여 내외의 반혁명세력을 분쇄하고 혁명과업을 달성하고자함) 교회, 유죄 망명자 반혁명주의자의 재산 몰수 → 가난한자에게 무상분배) 혁명재판절차 간소화, 비기독교화운동 전개) 경제정책 폐지로 물가폭등, ‘백색테러’의 만연⇒ 파리에서 대규모 폭동발생) ①아테네의 의회제도, 아메리카의 헌법, 91년헌법,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등을 참고하여 양원제를 채택, ② 집정정부는 헌법적으로 도시와 농촌의 유력한 재산소유자들의 수중에 놓이게 됨 ③ 총재정부 구성) 좌파 → 노동을 동등하게 부과, 사유재산제폐지, 평등주의적 사회주의 구상 -봐뵈프 중심-
왕조전쟁)스터디 5월 21일 (이재호)- 서양사Ⅰ. 30년전쟁과 베스트팔조약1. 30년 전쟁(1618~48)1)발단: 종교분쟁의 씨앗- 留保權(Geislicher Vorbehalt)→ 종교제후는 개인으로서만 신교로 개종이 가능하며,개종과 동시에 관활하던 재산과 교직을 카톨릭측에 반환하는 규정-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의 모순→ 칼빈파는 공인받지 못함, 카톨릭과의 대립? 칼빈파( 팔츠 선제후를 중심으로 한 연합(union)↔ 카톨릭 (바이에른 공을 중심으로한 동맹(liga)2) 베스트팔렌(Westphalen)조약-근대에 들어와서 가장 큰 국제 조약이었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승자의 입장을 취하였다.?전쟁문제, 종교문제, 국경문제, 영토문제, 국가의 주권과 권력문제등을 취급?독일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영방국가의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독일의 모든 국가들의 종교결정권을 인정, 루터주의, 카톨릭주의, 칼빈주의를 동등하게 인정?1552년 이래 사유화된 교회영토의 소유권에 대해서 프로스테스탄트 기득권 인정3)세력균형론의 대두-어느 하나의 국가가 다른 모든 국가를 예속시키는 정치적 상황을 조정하여, 외교관들이 꺼리는 “보편군주국"을 지향했던 세력에 대한 저항적 동맹체제이다. 주로 보편군주국에 대항하여 사용되던 수법이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었다. 합스부르크가의최고권은 주로 프랑스가 주도하는 세력균형에 의하여 봉쇄되어 왔었으며, 그 중에 “30 년 전쟁” 과 베스트팔렌 조약은 현저한 승리였다.Ⅱ. 17C 세력균형의 변화1. 세력균형의 변화(대 합스부르크→ 대 프랑스)1) ‘유럽의 병자’ 스페인-사회경제적으로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왕족들은 유전적으로 체질이 나빴다. 유약해진스페인 영토에 대한 야욕은 왕위계승문제로 첨예화된다.2)세력균령의 변화?평형(equilibrium) 또는 균형상태: 여러국가들 사이에 세력이 분포되어 균형을 이룬상태?균형이 동요를 일으켜 한 국가가 강력하게 되고, 다른 국가들이 동시에 연합을 이룸?한 국가가 맡아야 할 세력이나 비중을 증대시켜 균형을 유지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17,18세기에 있어서 세력균형의 정책을 추구한 위정자들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자기행동의 독자성을 지키는데 있었다. 1차적 대책은 영토를 노리는 강대국에 대하여 동맹을맺는 것이었다. “세력균형” 이란 국가들이 국제적 문제에 있어서 자기들의 힘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가담하여 자기의 국제적인 비중을 높이는 체제로 정의 할 수 있다. 세력균형정책의 목적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참략자들에 대항하여 여러 유럽국가의 주권과 독립을 지키고 이른바 “유럽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다.3) 반프랑스 세력 동맹? 루이 14세의 야망이 더욱 대담해지고, 이에 대항하는 스페인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프랑스의 세계 재패를 막는 길은 여러나라가 결합하여 루이 14세에 대항하여 세력균형체제를 결성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 네델란드 중심의 반프랑스 세력균형체제 확립2. 네델란드 상속전쟁(1667~1668)1)네델란드 공화국? 네델란드의 정치는 자유를 추구하던 시민계급과 국방을 담당하던 오랜지 공 사이의 각축전이었다.)?윌리엄 2세 사후 22년동안 새로운 총독이 선출되지 않음. ‘시민계급, 민간인, 지방분권적 경향이 우세’ → 윌리엄 3세 등극 (영국의 메리와 정략결혼)2)대외문제?영국이 1651년 항해조례 발효→ 수송업중심의 네델란드 경제에 치명적 위협?1652~1674년 세차례의 간헐적 전쟁 발발 ?1667년 루이14세의 네델란드 침략? 스페인 출신의 왕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스페인령 네델란드와 프랑스-꽁테 요구네델란드의 캘반주의와 자유주의체제, 고율관세에 대한 불만이 원인3)세력균형체제?영국과 일시적인 전쟁중단 선언→ 영구구, 네델란드, 스웨덴 결성? 윌리엄 3세 총독(6개주) 등극)?덴마크, 브란덴부르크의 군소세력, 오스트리아-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새로운 동맹을 통해 프랑스에 대항4)님베겐조약체결(1678)?루이14세 프랑스-꽁테지역 획득, 플랑드르지역의 군소도시 획득?대불동맹국들 분산, 네델란드 중립을 약속 받음, 네델란드 자기영토 완전히 보존3.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1689~1697)1)발단→ 알자스로렌지약에 대한 불명확한 권리 문제 상충)?1679년 루이 14세의 알자스 로렌지역 침탈?1681년 프랑스군대의 슈트스부르크시점령?1686년 아우크스부르크동맹결성황제파
인간은 왜 웃는가?철학과 01 이재호철학과 04 황가영철학과 04 도송이Ⅰ서론- 인간은 왜 웃는가?Ⅱ. 본론: 웃음이란 무엇인가?1. 스피노자와 베르그송- 결정론과 자유의지2. 플라톤과 니체- 인위적 웃음과 자연적 웃음Ⅲ . 나가며- 웃음과 행복Ⅰ. 서론- 인간은 왜 웃는가?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감정을 표출하며 살아간다. 웃거나, 울거나혹은 웃다가 울거나, 거의 매시간 복잡한 감정의 뒤섞임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때로는 그것이 고통의 단초일 수 있다는 때로는 그것이 살아가는 원동력일 수 있다는 대칭적 판단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생에 있어서 무시 할 수 없는 탐구대상으로 끊임없이 궁구한다. 우리는 체계적이던 비체계적이던 혹은 지속적이던 간헐적이던 그 누구의 예외 없이 천차만별의 방식으로 감정을 탐구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러한 감정에 대해 궁구하고 있는 것일까? 단지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놓여져 있는 상황 때문인 것일까? 즉 감정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져있기 때문에 탐구를 할 수밖에 없는 까닭 때문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목적을 위해 주어진 그것의 궁구가 필요하기 때문일까?많은 철학자들이 그리고 뭇 사람들이 인간의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고 이야기해 왔다. 다양한 인간이 가지는 행복의 로드맵은 서로 달랐지만 그것의 과정에서 감정은 인간 행복의 비밀을 상당량 비은폐해왔다. 특히나 웃음이라는 감정의 표출은 행복에 보다 가까이 다가 선 긍정적 표출 방식으로 궁구의 최우선 대상이 되어왔다.그렇다면 인간은 왜 웃는 것일까? 웃음은 감정 그 자체라기 보다는 감정의 표출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은 왜 웃는가에 대한 두 가지 문제를 접하게 된다.하나는 감정 그 자체의 문제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감정과 감정 표출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그러나 여기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후자의 경우에 대한 문제이다. 왜냐 하면 실제로 감정과 감정표출의 관계를 해명하고자하는 탐구가 전자의 탐구를 내포하고 있으며 현실에서 웃음이라는 것이 하나의 원인과 형태로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과 형태로 들어나기 때문에 이 후자의 탐구가 더 실효적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Ⅱ. 본론: 웃음이란 무엇인가?이제부터는 감정과 감정표출의 관계에 대한 여러 견해에 대해 살펴보자. 감정과 감정표출 사이에는 인간의 의지와 이성이 개입된다. 뿐만 아니라 nomos와 타자와의 관계 또한 무시 할 수 없을 만큼 영향을 미친다 . 그래서 종종 감정과 감정 표출의 상이함이 들어난다. “내가 웃고 있나요, 모두 거짓이겠죠”라는 광대라는 노래 속에서 감정은 울고 있지만 감정의 표출은 웃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모사한다. 또한 ‘썩소’ 라는 신조어 속에 들어있는 세태 또한 사회적 행위양식과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불일치에서 감정과 감정표출의 부자연스러움이 들어남을 시사해주고 있다. 즉, 나와 대면하고 있는 너라는 사람이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지만 나의 사회적 지위와,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행동양식, 그리고 너라는 사람이 가진 나와의 관계문제 때문에 웃을 수밖에 없는 그 부자연스러움 즉 썩은 미소를 통해 감정과 감정 표출사이의 복잡 미묘한 문제들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묘한 문제를 다른 사람들 특히 이러한 질문에 보다 더 긴밀히 궁구했던 사람들은 어떤 추론을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1. 스피노자와 베르그송- 결정론과 자유의지웃음이 정신에 관계하는지 신체에 관계하는지에 따라 그 원인이 다를 것이다. 여기서는 전자에 관해서만 논하여 보기로 한다. 그리고 두 철학자의 견해를 서로 비교 고찰하면서 웃음에 관하여 알아본다.Spinoza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도록 어떤 원인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 원인 역시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결정되고, 이것은 다시금 다른 원인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렇게 무한히 진행된다.’)이 말은 결정론적인 입장인데 즉, 내가 웃고 싶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정서는 예속되어 있고 인간 또한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원인은 운명의 힘으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다.비록 우리의 의지가 어느 정도 우리의 정서를 조정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억제는 불가능하다.Bergson에 있어서 자유는 내적인 감정이며 구체적인 경험일 뿐이지 설명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결정론자들의 입장인 “행위는 그것의 선행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인과성의 법칙이 우리의 의식 상태에도 적용되는지에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의 의식 상태는 그 나름대로의 인격과 고유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요소들은 부단히 변화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두 상태가 단순히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동일한 원인은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는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외적 대상은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요소적 조건에 접할 수가 있지만, 내적 의식에서는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동일한 조건에 접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순간은 두 번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 세계에 있어서는 동일한 원인은 항상 동일한 결과를 낳지만, 내적 의식에 있어서는 심원한 내적 원인으로 결과를 보인 후에는 결국 다시는 동일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따라서 인과성의 원리가 의식 상태에 적용되려면 끊임없이 변화하고 지속하는 의식을 배제하고 시간을 공간에놓인 고정된 의식으로 만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과성을 의식 상태에 적용한다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현상간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인과율은 물질의 세계에는 적용되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내적 의식의 영역에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으므로,필연적인 결정을 통해 삶을 설명하려는 인과율의 모든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베르그송은 인과율의 필연성을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여 가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를 일어난 행위와 일어나지 않은 행위와의 관계에서 찾아서는 안 되며 행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뉘앙스나 질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베르그송에 있어서 자유는 ‘구체적 자아와 그 구체적 자아가 행하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찾아져야 하며 자유로운 행위는 전인격에서 우러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자유스럽지 못한 행위는 우리의 전인격에서 유래하지 않은 행위이며, 이것을 그는 표층자아에 근거한 행위라고 한다. 표층자아는 타인과 관계 맺을 때 사회적 필요성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Bergson의 입장에서는 웃음은 표층자아의 표현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Spinoza의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하여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에는 웃음에 대한 냉소성을 포함하는 어떤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2. 플라톤과 니체- 인위적 웃음과 자연적 웃음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웃음의 동기는 병리학적인 웃음을 제외하고 기쁨, 행복감, 즐거움,자기만족, 조롱, 모멸감, 경멸, 반항심, 속임수, 교활함, 비열함 등이다. 이는 자연적인 웃음일 수도 있고 인위적인 웃음일 수도 있다.)인위적 웃음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플라톤 이래로 우월성의 이론과 불일치 이론으로 전개된다. 우월성의 이론이란 타인에게 실수나 결점을 발견했을 때, 혹은 무언가 모자란 행동을 보게 되면 웃게 되는 것, 또한 강자에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연민과 애정을 이끌어내는 도구로써 웃게 되는 것을 이른다. 그리고 불일치 이론이란 고정관념이 깨질 때,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행위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이 전개 될 때 유발되는 놀람의 소리가 웃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이 둘 이론은 사회적 규범과 행위양식, 타자와의 관계가 웃음이 가지는 표출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웃음의 의미를 궁구하고 있다. 플라톤 이후의 이성중심 철학은 감정과 감정 표출의 차이를 억제와 수양을 통해서 인위적 웃음의 합리화를 통해서 사회화 하고 있다. nomos에 합당한 웃음을 위해 자연적 웃음은 그 표출방식 이 규정되어졌고 이 규정으로부터 벗어났을 경우에 심각한 내면적 괴리와 혹은 사회적 고립이라는인간의 비극을 초래했다. 니체는 이러한 인위적 웃음을 비판한다.왜 인간만이 웃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인간만이 웃음을 고민하지 않을 만큼 깊이 괴로워 하
현실의 삶 속에서 인도철학적 사유의 유효성-서로주체성의 회복의 단초로써 인도적 사유-2001004019 철학과 이재호Ⅰ. 서론- 다원주의 사회의 합리적 중제Ⅱ. 본론1. 다양한 사상의 용광로2, 변증법을 넘어선 인도적 사유3. 타자와 자아의 연기적 인간관Ⅲ. 결론 - 인도철학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기울이며Ⅰ. 서론- 다원주의 사회의 합리적 중제현대 사회는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 가치들은 위계질서 없이 상생하며, 상호 존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충돌을 반복하고 있다. 이전 사회의 보편적 이념이 그 절대성을 잃고 또한 국가의 정체였던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가 공고한 토대를 상실하면서 현대 사회는 차이의 가치가 인정되는 다원주의 사회로 변화 하였다. 인류는 다양한 가치들이 특정한 가치에 종속되거나 억압받지 않고 상생할 수 있는 현대 사회를 또 하나의 역사적 진보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에서도 해결하기 힘든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있지만 그 가치의 正不/貴賤/愚劣을 가늠하기 힘든 다원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가치충돌의 문제는, 절대가치의 해체만으로 해결 될 수 없는 또하나의 과제이다. 심판자의 잦대와 권위가 해체된 시대, 가치충돌의 중제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현대사회에 던져진 화두는 바로 이 합리적인 중제를 실현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제국주의의 몰락과 이념국가의 몰락 이후 역설적이게도 제국의 질서 속에 독점적 권력인 경찰국가가 등장한 21세기 다원주의 사회의 절망적 귀결은 더욱이 이 합리적 중제의 깊은 고찰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서양철학의 현대담론 속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 유목주의, 타자의 윤리, 서로주체성의 회복이라는 키워드들이 해체철학 이후의 구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합리적 중제의 문제에 대한 고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철학적 고민 속에서 현대의 삶을 인식하고, 절대적 힘에 의탁한 중제가 아니라, 서로주체성의 인정과 타자성의 차이를 기반 한 상생의 중제를 그 지향으로 하는 철학적 모험을 시작하고자한다.이러한 목적 하에 주목한 것은 인도철학의 사유방식이다. 다양한 사상의 용광로, 변증법적 투쟁의 폭력적 사유를 넘어선 서로 주체적 사유, 타자의 존재성 없이 자아의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연기적 인간관, 바로 이러한 인도의 사유방식이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합리적 중제의 원리로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실마리를 포착하고, 그것의 구체적 사유방식 속에서 그 실마리를 추적하고자한다.Ⅱ. 본론1. 다양한 사상의 용광로인도문화의 특색을 몇 개의 키워드로 정의 하자면, 다양성, 변화, 연속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인도 문화의 한 단면이자, 인도 문화의 뿌리인 인도 사상의 특색 또한 이 세 가지 특색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인도 사상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관념들이 다양한 언어적 표현을 통해 상호 교섭하며 영향을 주어, 고대 인도를 위대한 다양성을 지닌 역동적이고 약동 하는 사회로 만들었다.인도의 사상이 융합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기원은 기원전 2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적 발굴 속에서 북쪽의 정주 민족과 남쪽의 정주 민족의 현격한 문화적 차이가 보이고, 북쪽과 남쪽의 사이인 중앙지역의 문화적 절충의 흔적들이 보인다. 기원전 3만년 전 쯤 유럽 대륙의 유럽인들이 인도 중서부로 이주하여, 기존의 다양성을 넓혀주었고, 이들의 사유방식은 베다 문헌 속에서 그 흔적이 발견된다. 이러한 왜래 문명과의 상호 작용에서 오는 자극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속 되었다. 기원전 6세기경 북서부지역에 페르시아 문명이 다리우스 1세에 의해서 전파되었고, 2세기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패배시키자, 희랍인을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또 인도를 중개로 한 로마와 중국의 교역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인도 전파의 단초가 되었다.)이처럼 다양한 동서양의 사상이 인도대륙으로 들어와 인도인의 사상을 만들었고, 이들은 정복과 파괴가 아닌 융합의 원리로 새로운 인도인의 사상을 창조했다. 이러한 다양성은 상호의 교섭 속에서 변화하며 인도의 사유를 전개했고 그 전개는 단절이아니라, 연속에 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연속은 지양의 법칙이 아니라 다양성을 포괄하는 방식의 연속으로 전개되었다.인도철학자들은 유물론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관념론자들이며, 일원론자, 다원론자도 있다. 어떤 사람은 경험지(經驗知)를 강조하고 다른 이들은 선정(禪定)에서 오는 통찰을 강조한다. 아지비카는 인간의 자유를 완전히 부인하고 전적으로 결정된 우주의 본성을 강조하는 반면, 요가의 주창자는 자연의 결정적 영향력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했다.)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다양하고 모순 된 각각의 사상들은 시대의 조류 앞에, 서로의 투쟁속에서 적자생존의 법칙 속에 사멸했던 것이 아니라, 더 세련되고 풍부한 다양함으로 인도인의 삶 속에 흐르고 있다. 이것은 다름을 같음으로 승화하려는 서구 사상과는 달리, 다름을 인정한 인도적 사유의 독특한 생존전략이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현대 사회의 이러한 다름의 인정이 가지는 생존전략은 그 시사점이 크지 않다 할 수 없을 것이다.2, 변증법을 넘어선 인도적 사유현대 철학 담론의 주 공격대상은 변증법에 있다. 변증법의 폭력은 일찍이 전체주의적 사유를 비판한 한나 아렌트의 지적으로부터 시작하여 포스트모던 철학의 주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변증법에 내제하는 지양의 원리는 합에 부합하지 않는 개체적 속성을, 즉 다양성을 억압함으로써 모든 것을 합목적적인 절대성에 복종시키고자한다.이러한 변증법적 전략은 가치 충돌의 문제를 절대적 심판자에 의해 의탁하고, 또한 충돌을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고 치유하는 필연적 요소로 치부하면서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전체주의 속에서, 냉전의 이데올로기 전에서 인간의 고유함을 상쇄시키고, 거대 담론에 의해 나약한 인간들이 비참한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소외되는 역사 속 병폐로 들어났었다.더 이상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가 현대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 했다. 그리고 그 대안의 모색을 변증법적 논리를 탈피한 상생의 원리를 추구해야함을 과제로 떠안았다. 필자는 이러한 상생의 원리를 인도철학 속에서 모색해보고자 한다.인도철학 사상전반에 흐르는 인도 사유의 기본적 개념은 카르마와 윤회이다, 카르마와 윤회의 해명의 역사가 인도철학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카르마와 윤회가 상생의 원리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의 해명을 통해 우리는 상생의 원리적 근거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아래의 연기적 존재와 결부시켜 해명해 보는 작업을 통해 카르마와 윤회 속에서 상생의 원리의 근거를 추출해보기로 하자3. 타자와 자아의 연기적 인간관상생의 원리는 타자의 존재성에대한 인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타자가 주체의 세계에 대한 완전한 해석욕망에 봉사하는 분석대상으로 전락하는 전통적 세계관속에서 타자를 살려내려는 움직임 속에서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생원리의 가능성은 타자와 나의 관계성속에서 해명될 수 있다. 나의 절대성도, 타자인 그의 절대성도 부여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즉 연기적 세계 속에서 존재적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상생의 원리의 시작이다. 연기적 인간관은 카르마의 법칙과 윤회의 구조 속에서 에서 파생 된다카르마는 인과와 응보의 원리를 그 기본구조로 하고 있다. 인과와 응보의 법칙이 기본구조를 이루고 있는 체계 속에서 주체는 절대적 존재로부터 자유롭다. 주체는 행위의 결단과 책임을 동시에 지는 자율적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체가 절대자가 되지는 않는다. 윤회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행위 하게 되고, 그 행위를 통해서 자율을 얻는다. 그러나 그 자율은 동시에 자신의 이후 행위를 결박하는 타율적 방어기제로써 주체의 절대화를 견제한다. 이러한 카르마의 원리 속에 존재하는 주체는 타자에 종속되어 존재하는 주체도 아니며, 타자를 종속시킨 절대자로써의 주체도 아니다. 이는 주체만의 해명을 통해서도, 타자만의 해명을 통해서 인간을 해명할 수 없는 결론에 귀결한다. 그 귀결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연기적 인간관으로 전개된다.
윌리엄 오컴의 철학사적 위치서론: 철학적 변혁기의 시대사적 맥락본론: 변혁기 철학으로써 오컴 철학이 가지는 motivation1. 보편논쟁 - 실재론과 유명론2.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의 결별결론: 중세에서 근대로- 오컴 철학의 파급효과서론 - 철학적 변혁기의 시대사적 맥락)윌리엄 오컴이 활동했던 13세기는 중세와 근대의 획을 긋는 변혁기였다. 이 시기 봉건사회의 기초인 장원제도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노동 지대가 점차 사라지고 대신 생산물지대가 나타났으며 나아가 생산물 지대가 화폐지대로 바뀌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영주-농노의 관계를 지주-소작인의 관계로 변화 시키며 봉건 장원을 해체하고 근대시민인 부르주아의 출현과 도시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 시켰다. 이와 더불어 화폐 경제의 발전은 중세 사회의 기초구조를 변화시켰다.이러한 구조의 변화는 중세 사회와 문화에 전면적인 동요를 일으켰고,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교황권의 쇠퇴라는 정치적인 변화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기사 계급의 몰락을 초래했다. 그 결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공인 계층의 시민 계급이 형성 되었고, 시민계급의 정치적 의식이 향상되었으며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이 새롭게 형성되었다.중세말기 농민봉기는 반가톨릭적인 종교개혁운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세속적인 왕정은 시민계급과 손을 잡고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였다.) 봉건시대 왕정은 영주들을 통일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으며, 교황은 이러한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의 수립을 항상 견제했었다. 교황권이 쇠퇴하고 시민 부르주아 사회의 태동이 시작되며 군주와 시민계급 사이의 유대가 형성되었다. 절대왕정의 성립과 부르주아 사회로의 변화는 봉건적인 기독교적세계관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힘 이였다.이와 같은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교권에 대항 할 수 있는 왕권의 확립이라는 정치권력상의 새로운 역학관계의 성립은 신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이 서서히 붕괴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사조에 부응하여 철학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포기하고점이 된 유명론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중세 말기 유명론을 대표 할 수 있는 오컴의 사상을 통해 우리는 변혁기 철학의 맥락과 이후 철학 전개의 생동감 있고 유기적인 흐름을 살펴 볼 것이다. 더불어 변혁기 철학으로써의 오컴의 사상이 가지는 철학사적 의의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고자한다.본론: 변혁기 철학으로써 오컴 철학이 가지는 motivation1. 보편논쟁 - 실재론과 유명론중세 철학에서 스콜라주의는 확고한 이성적 전형을 확립하고 있었다. 오컴의 비판은 스콜라철학의 철학적 근거를 비판하는 것 이였다. 오컴의 비판은 당시의 신학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감각적 지각을 문제시하고 사유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전의 견해를 무너뜨렸고 실체와 실체의 속성들에 관한 스콜라철학의 견해를 비판했다. 이러한 오컴의 사상은 전통적인 교리에 집착한 교회의 수호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 하였다.)“아퀴나스는 개별적 사물에 내재하는 형상을 수용하는 것은 감각의 기능이다. 사물이나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므로 사고할 때의 형상은 그것이 관련을 맺고 있는 질료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필요하다. 질료는 개별화의 원리라고 가르친 아퀴나스와는 대조적으로 스코투스)는 동일한 종(種)의 구성원 사이에 상이함을 조성하는 것은 질료라기보다는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개개의 인간은 자신을 타인과 구분시키는 독특한 형상을 지닌다. 형상이 언제나 질료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개별적 사물의 개성(個性)(quidditas)에 대하여 개별성(haecceitas)을 부여하는 것은 형상이다.”)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오컴은 스코투스와 아퀴나스를 모두 비판했다. 오컴은 스코투스와 아퀴나스를 상대로 그들의 "잠재적", "형상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오컴에 의하면 이 사상가들은 그들의 보조 구조를 사물과 신에 대한 그들의 이성 개념을 구해 내는 데 던저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개별 인간을 마치 하나의 (실재적)보편적 본질을 서술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보편적 본성이 이차적으로 질료를 통해 개별화되는 속에서 다음으로 보편적 구조를 구성한다. 이러한 "명칭"이 사실적으로 실존하는 개별 사물을 지탱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모든 주의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컴은 보편적 "명칭"에는 어떤 것이든 보편적인 어떤 것이 상응한다는 것을 공격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사람들은 오컴을 유명론자”)라고 불렀다.오컴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추상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모든 현실적인 것은 개별적이고 이론이란 가능한 한 단순해야 한다는 근본 법칙에서 나왔다. 추상된 모든 인식은, 그 인식이 현실성을 서술해야 한다면, 하나의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파악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오컴에 의하면 안다는 것은 사실과 관계되지만, 세계를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명칭은 사물에 "대해 있다", 그러나 학문은 이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증명은 보편적 표현이 어떻게 개별적 사물로 환원되는지를 보여 주는 결과로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개별 사물의 인식은 그 출발점이고, 학문은 그 개별 사물에서 함축성 있는 추상에로의 길을 비판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문의 이론들이 "경제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중세 철학이 수호해 왔던 수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것을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컴의 면도날은 조금이라도 신비스러운 기미가 있는 보편자 따위의 존재자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리는 것이다. 어떠한 전제를 세울 때는 괜한 추상적이거나 불필요한 수식어로 그 뜻을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베어버리고 필요한 부분으로 명확하게 단순화해야 한다. 즉 진리의 나무에서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2. 신학과 철학 - 신앙과 이성의 결별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하여 오컴은 스콜라철학의 시기동안 두드려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장한 입장과 철저하게 결별하였다. 모든 과학적, 철학적 지식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지하는데 유용하다고 가르친 아퀴나스와는 반대로 그는 그러한 것들이 신학분야하기 때문에 신학의 목표는 단순한 지식보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오컴은 중세에 있어서 철학의 합리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선두에 섰다. 오컴은 신학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리를 다루는 학문은 신앙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중세 스콜라주의에서 오컴의 사상이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은 그가 철학에서 근본적인 경험론을 표방하면서 신앙의 이해를 거의 최소화 하려했던 시도 때문이다. 오컴의 철학은 신학이 증명해야만 하는 중세의 난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 이였다.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해서 답해야 하는 신학이 오컴 철학의 정신으로 인하여 사정없이 난도질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후기는 오컴의 등장으로 인해서 스콜라 철학과 아울러 스콜라 신학의 전체적인 파괴를 이성과 계시의 최종적인 결별이라는 필연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결론 - 중세에서 근대로: 오컴의 철학의 파급효과오컴의 철학적 정신은 철학적 연구대상을 신학으로부터 철저히 증류하면서 철학을 형이상학으로부터 이탈 시켰다. 이후 오컴의 후계자들은 -유명론자- 신의 질서가 붕괴되고 기독교 신의 의지를 넘어선 자연법칙의 발견이 생활세계에 그 합리성을 인정받으면서 점차 자연주의 철학자로 변모해갔다. 이후 이들은 경험론의 스승이 되었고 오컴에 의해서 미증류 된 체 철학으로부터 버림받은 형이상학은 대륙의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입안된다. 유명론은 개체를 중시함으로써 인간해석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자연적인 개체를 초자연적인 보편에서 분리하여 현실적이고 자연적인 보편과 결합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으로, 천상에서 지상의 사물중심의 자연주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이와는 달리 대륙에서는 신비주의) 철학이 나타난다. 형이상학적 사유가 이성의 범위를 넘어 즉 감각세계와의 단절을 통해 논의 되었던 것 또한 오컴의 정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독일 신비주의는 교리나 외적 형식보다는 신앙의 내면성을 중시하였다. 신비주의 철학의 미 했으며 기독교적 신 개념을 해체 시키는데 기여했고 나아가 어느 정도까지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사유를 예비하기도 하였다.)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특히나 서론에서 보았던 시대적 맥락과 본문에서 보았던 오컴 철학의 사상사적 모티브- 14세기 유명론의 부흥과 그 이후의 신비주의의 대두는 중세질서가 분열, 해체되는 시대적 흐름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혁기 사상의 이해 없이 중세와 근대라는 단절된 사상의 특징을 탐구한다는 것은 맹인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변혁기 철학의 모체인 오컴의 철학을 연구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 문헌 ※- 이병수, 우기동지음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돌배개, 1991.- 렘브레히트 지음. 김태길 외 옮김「서양 철학사」, 을유문화사, 1998- 임석진 외 엮음 「철학사전」 중원문화. 1999- 박상욱 석사학위 논문「오컴의 사상과 생애에 관한 연구」- http://blog.naver.com/chose777) 이병수, 우기동지음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돌배개, 1991. 참조) 도시가 형성되고 시민계급이 발생하면서 절대군주들은 봉건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제한하기 위해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도시의 시민 계급을 지원하였다. 또한 시민 계급은 상품의 유통거래와 그 안전을 위해 봉건사회에서처럼 지역적으로 제한된 사회 질서보다 통일적인 국가질서를 요구했다.3) 1324년 오컴에게 사상적 변혁을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그 해에 그는 아비뇽으로 소환되었다. "오컴은 논리학을 오용했으며, 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파괴하여 개념과 단어를 불신하게끔했다."라는 죄목으로 요한네스 루텔렐(Johannnes Lutterell)에 의해서 기소되었다. 오랫동안 재판이 진행되면서 판결은 루텔렐쪽으로 유리하게 되었고 오컴의 사상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와의 분쟁과 갈등으로 인해서 그의 사상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1324년 이전까지 오컴의 철학적 관심은 논리학과 명제집, 아리스토텔레스에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