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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만갑의 병자록에 기재된 병자호란 당시 조정 및 남한산성의 상황표
    일기 날짜주요 활동병자년(1636)12월 12일오후에 김자점의 장계를 통해 적의 침입 확인12월 13일아들인 김경징이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자 김류가 칭찬함김류의 행동을 비판12월 14일최명길이 호장(胡將)과 만남12월 15일최명길이 호장(胡將)을 만나고 돌아옴12월 16일나만갑 : 세자를 보낼 수 없으며,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김류 : 군세가 약한데 패하면 어떡할 것이냐?장수들 및 대부분의 신하들이 김류에게 동조인조와 김상헌은 나만갑의 의견과 같이 함12월 18일나만갑이 쌀과 잡곡을 합쳐서 16,000 여 석이 있는데 이는 만여 명이 한달 정도밖에 먹지 못할 양이라고 하였음, 남한산성을 축성한 이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함12월 20일馬夫大가 사람을 보내 화약을 요구하자, 김류는 중신을 보내자고 한 반면, 나만갑은 성문을 닫은 채, 성 위에서 적의 장수와 대화하자고 주장하였고, 결국 나만갑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12월 22일馬夫大가 왕자와 대신을 보내면 화의하겠다고 하였으나 인조가 거부하였다.12월 25일사신을 적진에 보내는 것에 대해 비국(備局) 및 여러 신하들이 동의했으나, 나만갑과 김신국만이 이에 거부하였다.12월 26일김신국과 이경석이 적진에 갔으나, 그냥 돌아왔다.12월 28일김류가 한편으로는 화친하고 한편으로는 싸우자고 하자, 나만갑이 그 의견에 반발하였다. 이 때 적의 계략에 걸려 교전에서 패하였는데 전사자를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충청감사 정세규가 구원을 오다 패배하였는데, 나만갑은 홀로 군사를 이끌고 온 그의 충정을 높이 평가하였다.일기 날짜주요 활동정축년(1637)1월 1일汗(청 태종)이 성 밖에 옴1월 2일홍서봉, 김신국, 이경직이 적진에 감이서가 사망함1월 3일홍서봉 등 3인이 청의 답서를 받아옴1월 9일각지에서 올라오던 장계가 단점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어림이 거짓으로 전공을 세우려 하다가 죽임을 당함1월 11일나만갑이 장유에게 적의 요구와 관련된 글을 올릴 때 애걸하는 투로 올리지 말 것을 요청하니, 장유가 이에 찬성함1월 12일홍서봉, 최명길 등이 국서를 전하러 갔으나 전하지 못함1월 14일김신국과 양식을 마련할 계획을 세움1월 17일홍서봉, 최명길, 윤휘가 청의 답서(항복, 전쟁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내용)를 받음1월 18일홍서봉, 최명길, 윤휘 등에게 국서를 주어 전달함국서는 최명길이 작성하였는데, 김상헌이 국서를 찢은 것을 최명길이 다시 붙임1월 20일척화신들을 잡아 보내라는 요구가 있었음1월 21일출성 및 척화신 관련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서를 전하지 못함구원을 오지 않은 도원수 김자점을 벌주라고 정온이 요청함1월 22일척화신 대표로 홍익한이 뽑힘정온이 자신 또한 척화신이라고 주장함1월 23일
    인문/어학| 2017.01.16| 3페이지| 1,000원| 조회(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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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남한산성, 삼전도비 답사내용
    남한산성, 삼전도비 답사내용
    남한산성(南漢山城)1) 남한산성의 기원과 축성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기 남한산(南漢山)에 지어진 성을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여, 남한산의 동쪽 봉우리 위에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외적 방어의 요새지로 활용한 것이라 보여진다.그 뒤 고려에 와서는 수도가 송악(松岳)이었기에 그리 중요치 않게 여겨졌다. 고려 太祖 이후의 축성 관계 기록 중에도 이곳에 산성을 수축했거나 중수한 일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그 후 조선 초에도 축성에 관한 언급이 없었는데, 이는 명나라와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북방민족에 대한 위협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급진적으로 변화되어 한양의 종묘(宗廟)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도 수도로부터 멀지 않은 남한산에 축성을 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전란이 일어난 이듬해 10월 柳成龍이 남한산성 등을 지키면 호남을 방어할 수 있다고 하였다.그 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조정 대신들은 경기지방의 방어를 튼튼히 하라고 강조하고 특히 한강 일대에 성곽을 쌓도록 하고 각도의 산성을 살펴 미진한 곳은 지체말고 속히 개축 보완하라고 하였다.그러나 남한산성을 수축하자던 일은 난이 끝나고 흐지부지 되었다가 선조 36년(1603)에 이르러 축성논의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곳은 巨鎭으로 남도 왕래의 요충지대라고 교통의 편리함을 들었으며, 만일 이곳을 수축하고 병사를 훈련시켜서 이를 지키면 안팎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부 대신들은 축성사업에는 반드시 인력을 대거 투입, 사용해야 하므로 곤란한 점이 있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이후 광해군이 즉위했으나, 남한산성의 축성문제는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이르러 공홍도(公洪道:지금의 충청도)의 군병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지키게 하라는 전교를 통해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였2월에 12만 병력을 출동하여 9일 압록강을 건넌 적군의 선봉은 산성 위주의 전술을 알고 있는 듯 조선의 방어군과 충돌하지 않고 14일 도성 근교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는 강도(江都) 입거를 시도하였으나, 정황상 그러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입보하게 되었다. 이후 청의 요구조건을 주고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논의가 갈리게 되었다.12월 20일, 21일에 연이어 청의 사신이 남한산성 아래에 와서 청태종이 개성에 도착한 것을 알리며 화친의 성사를 압박하였으나, 조선측의 거부로 더 이상 협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미 조선은 12월 18일 협상이 결렬된 이후로 외부 근왕병(勤王兵)과의 연결을 도모하고, 선제공격을 시도함으로써 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쪽으로 대응의 기조를 정하였기 때문이다.조선군은 성밖으로 여러 차레의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병력만 소모하였다. 청군은 조선군과의 교전을 최대한 회피하고 역습을 노리는 전술을 취하였는데, 후속 부대와 장비가 미처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군과의 전면 대결을 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군도 남한산성 주위에 목책을 둘러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한 채, 소규모의 공격을 시도하거나 공격해 오는 조선군을 요격하였을 뿐이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한 군사의 수를 과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진영에 허수아비를 세워 놓거나, 굶주림에 못 이겨 부역(附逆)한 조선인을 군사로 편입하였다.외부의 지원군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소모전은 병사들의 사기를 점점 떨어뜨렸다. 더구나 조선군이 장기 농성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이 있었다. 농성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여건 가운데 하나는 군량이었다. 남한산성에 농성 중이던 군사는 13,800여명에 달했는데, 초기 남한산성에 저장된 식량은 米와 太豆(식용으로 쓰는 소의 콩팥)가 100,800石, 피곡이 5,800여石, 甘醬(간장)이 200石, 소금이 90여石 정도였다. 이 정도 비축량은 守城郡과 농성 중인 신료들이 50~6었을 것이다. 결국 청의 요구에 의해 도성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대로변의 산성들은 이후 당분간 수축되지 못하였다.남한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17세기뿐만 아니라 18세기에도 지속되어 숙종·영조·정조 등은 여주의 영릉(寧陵)을 참배하는 길에 반드시 남한산성에 들어 치욕의 역사를 회상하고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결의를 다졌다. 숙종은 돌아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러 야간군사훈련을 참관하였고 장대(將臺)에 올라 호란 당시를 생각하며 서러워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여 시를 지었다.영조 연간에는 효종 대의 북벌대의(北伐大義)가 점점 잊혀져 가자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남한산성의 서장대 위에 무망루를 세웠다. 영조 27년(1751)에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은 병자호란은 천고에 차마 말하지 못할 치욕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안석경(安錫儆)도 이기진이 남한산성의 서장대에 무망루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그날을 생각하며 비분강개하였다. 그는 “우리 명(明)은 義主이고 師父이고 원수는 오랑캐에 있는데 오랑캐는 곧 개와 돼지일 뿐이다. 개와 돼지에게 절을 하고 원수를 가까이하고 君父를 저버리는 자는 어찌 사람의 정(情)이겠는가” 라고 하였다.남한산성은 18세기 말까지도 군사상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정조는 1799년 남한산성에 들러 굴욕의 삼전도비를 보았다. 그는 융복(戎服)으로 행차하여 남한산성에 가서는 갑주(甲?)로 갈아입고 말을 탔다. 그는 수어사 서명응(徐命膺)의 영접을 받으며, 남문으로 들어가 행궁의 정당(正堂)에 나아가 갑옷과 투구를 벗고 융복을 입고서 수행해온 대신과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이와 같이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대명의리의 연원지로, 역대 국왕들이 영릉을 왕래하는 길에 들러 북벌론을 회상하고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그 날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대명의리를 줄곧 확인하던 곳이었다.5) 남한산성에서의 항일투쟁과 일제의 침탈1896년 항일의병들의 투쟁지역은 남한산성이었다으로 참담했을지도 모르겠다.두 차례 답사를 갔을 당시에는 터만 남아있던 남한산성 행궁의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 가니 주요 건물들의 복원이 완료된 것을 아울러 확인할 수 있었다.삼전도비(三田渡碑 : 大淸皇帝功德碑)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후 청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을 인질로 대동하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들의 요구에 의해 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비문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발의과정이 나타나 있지 않아 자세한 전말을 알기는 어려우며, 비문 건립에 관련해서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637년 3월 12일 처음으로 등장한다. 청은 이미 조선과 강화조약을 맺고 철군했지만, 조선을 믿을만한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조선에는 여전히 척화파(斥和派)에 동조적인 여론이 있었으며, 인조가 이후 어떤 식으로 나오게 될지도 사실상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변사는 삼전도에 세울 비석 석재가 준비되었으니 사신을 청에 보내 비문을 얻어 와서 비석에 새기자고 제안했다. 비석을 세우면 청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비변사의 제안을 일단 보류시켰다.삼일 뒤, 비변사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비변사의 논점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비석 건립이야말로 크게 공들이지 않고도 빛은 많이 나는 일이다. 당초 馬夫大가 이 문제를 발의했는데, 그가 다시 우리에게 물어온 뒤에 일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가 미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먼저 주도적으로 세우는 편이 좋다” 이에 인조는 “馬夫大가 다시 묻거든 이미 조치했노라고 답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답하였다.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로 구성된 비변사는 청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馬夫大의 요구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만, 인조로서는 그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叩頭禮를 행함으로써 이미 한번 실추된 권위를 비석을 세움으로써 더 이상 손상시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친청(親淸)정책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비석 문제의어 사로잡힌 병장들을 모두 놓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 조선이 여전히 명나라를 돕다가 다시 大淸에 죄를 얻게 되었다. 이에 정묘년에 황제가 大兵에게 정벌을 명하셨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하고 마침내 강화도에 숨었다가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하고 오히려 형제국으로 여겼으며, 빼앗은 토지를 모두 돌려주고 강홍례도 또한 환국하게 했다.2) (정묘년 이후) 십년동안 황제는 형제의 예를 자했으나, 우리 조선국이 깨닫지 못하고 미혹되어, 여전히 명을 돕고 大淸을 형으로 여기지 않더니, 먼저 병화의 단서를 스스로 일으켜 변신에게 신칙하기를 ‘충의지사로 하여금 각기 책략을 바치게 하고, 용맹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종정토록 하라’고 하였다. 대청국의 사신이 이 문서를 얻어 황제에게 보였다. 황제가 우리 조선이 화평을 무너뜨렸음을 밝히 아시면서도 오히려 好生의 마음으로 그 죄를 밝히 들어 ‘모년 모월 모일에 정토하리라’하시고, 우리에게 정토의 시비를 밝히 가르쳐 주시기를 하늘이 재이로써 사람에게 보여주듯,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듯, 형이 동생을 가르치듯 하시었다. 만일 진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살해하려는 마음이 있으셨다면 반드시 불시에 군사를 내시어 그 방비 없을 때 공격하셨으리니, 어찌 기꺼이 밝히 우리를 가르치셨겠는가. 그런데도 국왕이 깨닫지 못한 고로 황제가 개병을 친히 이끌고 우리 조선을 정벌하신 것이다.3) (조선이) 감히 맞서지 못하여 君臣의 처자들은 모두 강화도에 숨고 국왕은 남한산서응로 몸을 피했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성안 사람들은 가마솥 안의 물고기 신세가 되었다. 동남도로는 병장들이 서로 이어져 무너졌고 서북도에서는 협곡에 둘러싸여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 조선국왕은 안으로 군량이 없고 밖으로 원병이 없었으며 형세는 궁하고 힘은 다하였다. 강화도에 있던 우리 군신의 처자들은 모두 황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황제께서 만물을 포용하시는 마음으로 우리 군신 처자에 대해 병장들이 요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조선관碑
    인문/어학| 2017.01.09| 28페이지| 4,000원| 조회(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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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란~호란 당시 평안도 주요 임명자들 임기
    평안도관찰사 임기표인물기간비고이원익1592.6.21.~1595.6.1윤승길1595.6.1.~1596.6월 후반(병으로 그만둠)한응인1596. 7월 초? ~ 1598. 3. 22박홍로1598.3.22.~1599.8월 초(살인사건 처리 문제로 교체)서성1599.8.8.~1601.9.3허욱1601.9.3~1603.8.17김신원1603.8.17.~1605.5.16한효순1605.5.16.~1605.8.2.(나이가 들어 그만둠)박동량1605.8.2.~1607.7.23한준겸1607.7.23.~1608.6.1.이시발1608.6.1.~1610.윤3월?滿期최관1610. 윤3월 이전 ~ 1612. 2. 6정사호1612.2.12.~1613.5.15癸丑獄事에 연루김신국1613.5.19.~1617.5.15안응형1617.5.15.~1619.9월?추정박엽1619. 9. 28.~1623.3.13인조반정 이후 처형김신국1623.3.15.~1623.11.4.?추정이상길1623.11.4.~1625.9.3.성곽붕괴 문제로 파직윤훤1625.8.12.~1625. 9.27.1625.9.27.(仍任)~1627.1.24.정묘호란 중에 도망김기종1627.1, 24.~1629.1.28.김시양1629.1.28.~1630.9.24.민성징(휘)1630.10.3.~1633.8.1장신1633.11.13.?~1635.12.25.11월 13일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홍명구1635.12.25.~1637.1.28.金化전투에서 전사.남선1637.2.9.~ 평안병사 임기표인물기간비고신잡1593.1.30.~1595. 9월?추정변응규1595.9.6.~1596. 3.4.9월 6일에 논의가 있었고 이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3월 4일 급서이경준1596.3.7.~1599. 8월?8월까지 한 것으로 추정이시언1602.7.19.~1605.2.24.?2월 24일 이전에 체차된 것으로 추정성윤문1605.2.24.~1607.3.6변응성1608.8.2.~8.17.능력이 안된다는 이유로 8월 17일 체차유형1608.8.20.~1611.1.16.장만1611.1.20.~1614.5.23.?5월 23일 이전에 체차된 것으로 추정됨이시언1614.5.23.~1617. 6. 10.?6월 10일 이전에 체차된 것으로 추정성우길1617.6.10.?~1618.4.11.?6월 10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되며, 체차는 4월 11일로 추정됨김경서1618. 윤 4. 21.~1619. 3. 12.심하전투로 포로가 됨우치적1619. 3.13.~ 1624. 1. 251월 25일 이전에 바뀐 것으로 추정됨이수일1624.1.25.~1624.8.3정충신1624.8.3.~1624.12.15남이흥1624.12.15.~1627.1.25.신경원1627.12.6.?~1628.8.18.?12월 6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8월 18일 이전에 체차된 것으로 추정윤숙1628.8.18.?~1630.3.4.?8월 18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3월 4일 이전에 교체된 것으로 추정유비1630.3.4.?~1630.6.22.3월 4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龍骨大와의 갈등 등으로 인해 체직유림1630.11.16.~1631.9.24.胡人들이 들어왔는데 파발을 제대로 하지 않아 파직이완(李浣)1631.9.24.~1632.1.3.(전 병사 이수일의 아들)나이 문제로 비변사에서 체직을 건의하여 체직됨신경원1632.1.19.~1634.7.4.?7월 4일 이전에 체직된 것으로 추정됨유림1634.7.4.~병자호란이 끝날 때까지 평안병사에 있었음 의주부윤 임기표인물기간비고황진1595.2.23.~1599.6.16.?6월 16일 이전에 바뀐 것으로 추정됨허욱1599.6.16.~1601.2.25.?2월 25일 이전에 바뀐 것으로 추정됨심극명1601.2.25.~1601.7.11.?7월 11일 이전에 바뀐 것으로 추정됨최염1601.7.11.~1603.1.13.?1월 13일 이전에 바뀐 것으로 추정됨이병1603.1.13.~ 1604. 10.6.?10월 6일 이전에 바뀐 것으로 추정됨정사호1604.10.6.? ~ ?해당 시기 의주부윤에 있었다고 표기되어 있음, 임시로 임명된 것인지 확실치 않음이효원1604.10.12.~ 1605.9.10.?憲府의 탄핵상소 이후 물러난 것으로 추정됨, 이후 의주부윤을 비변사에서 천거하도록 명함한덕원1606. 10. 11.? ~ ?10월 11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체직 날짜가 나오지 않음?1608.1.13.? ~ ?인명 언급되지 않았으며, 이 때 曆官통행문제로 추고하라는 기록 있음이이첨1608.8.13.? ~ 1609.3,15,8월 13일 이전에 임명됭 것으로 추정됨이홍주1609.3.26.~1612.윤11.19임기 동안 諫院에서 몇 차례 추고건의를 했으나 윤허하지 않음홍명원1612.12.8.~1613.10.28.이극신1613.10.28.~1613.11.16박엽1613.11.16.~1616.2.14.이극신1616.11.24.?~?11월 24일 이전에 재임명된 것으로 추정이선복1618.2.6.~7.13.노모 사망으로 사직함정준1618.7.13.~1623.3.13.이경직1623.3.20.~1623.9.27.유비1623.9.27.~1624.10.11.?10월 11일 이전에 바뀐 것으로 추정이완(李莞)1624.10.20.~1627.1.20.정묘호란 중 전사김우1627.2.9.~6.9.공석이 된 부윤자리를 채우고자 임명된 것으로 여겨짐정봉수1627.6.9.~8.8.김우와 같은 경우임, 후임자가 천거되면서 체직엄황1627.8.8.~1628.6.8.?6월 8일 이전에 체직된 것으로 추정됨황즙1628.6.8.~ 1629. 7. 20.호병(胡兵)이 침입한 문제로 물러남이시영1630.2.30.?~3.25.2월 30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명나라 사람들과의 마찰 등으로 체직정지한1630.6.3.?~6.246월 3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胡差가 왔는데 명나라 파발을 숨기지 못한 이유로 체직신경진1631. 3.27.?~1632.1.29.?3월 27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됨, 1월 29일 이전에 체직된 듯윤진경1632.1.29.?~?1월 29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체직일이 나오지 않음황박1634.5.19.?~?.5월 19일 이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 체직일이 나오지 않음
    인문/어학| 2017.01.09| 7페이지| 1,000원| 조회(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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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사족연구경향 및 참고자료들
    朝鮮時代 士族 연구 경향조선 전기다른 두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 성과가 적개 나온 편이다, 아무래도 조선 전기이다 보니 사족의 형성에 집중한 연구성과들이 주로 나온다, 임호민의 2004년 글이나 지두환의 2011년의 글 등이 이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사족들을 국가통치와 연관지어 접근한 글들이 주로 나와 있는 편이다, 김현영의 2000년의 글, 최진옥이 2003년에 쓴 글, 최선혜의 2007년 글 등의 연구성과들이 이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조선 중기이전의 연구성과보다 많은 편이다, 다양한 지역의 사족들에 대한 연구성과들이 나온 편이다, 그 중에서도 영남지역 사족들에 대한 연구성과들이 많이 나왔다, 정진영이 1986년과 87년에 쓴 글 또한 예안지역과 상주지역의 사족들에 대해 접근한 글을 들 수 있으며, 이수건이 1990년에 쓴 글 역시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서면 최호, 박현순, 정해은 등의 연구성과들을 연구사례로 들 수 있다,영남지역 외의 지역 사족에 대한 연구성과들도 들 수 있는데, 호남지방에 관한 글로 김문택과 송은일 등의 글들을 들 수 있으며, 호서지방의 경우, 전용우, 박인호 등의 글들을 들 수가 있다,조선중기 사족들에 대한 연구를 비교적 많이 한 이로는 김성우와 장동표를 들 수가 있다, 김성우의 경우 사족층의 성장, 농장 발달, 신분구조의 변동 등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하여 이후 16세기의 사족에 집중하여 여러 글들을 썼다,장동표는 영남지역의 재지사족들에 중점을 맞추어 연구를 하였는데, 청도지역, 함안지역, 고성지역, 밀양지역 등의 사족들과 관련한 글들이 주로 있다,이 시기의 사족들에 대한 연구가 나온 요인으로는 왜란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기존 지역에 있던 사족들의 활동에도 변화가 생기고 또한 그들의 향촌지배와 관련해서도 기존과는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해 활발한 연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여 진다,조선 후기조선 후기 사족에 대한 연구는 이전에 비해 빈도수도 많고 그 분야도 이전의 연원래, 「조선 전기 순천지방의 신흥사족과 향중신물」 『순천향교사』 , 순천향교, 2000.?지두환, 「조선전기 경기북부지역의 집성촌과 사족의 동향」 『북악사론』 8, 북악사악회, 2001.?최진옥, 「조선전기 서울사족을 통해 본 중앙정치세력의 동향」 『조선시대사학보』 27, 조선시대사학회, 2003.?임호민, 「조선전기 강릉지방 사족가문의 형성에 대한 고찰」 『영동문화』 9, 관동대 영동문화연구소, 2004.?박헌순, 「조선 초 수원지역 사족의 시대적 대응 -수성 최씨의 수원 정착과정과 재향활동을 중심으로」 『수원학연구』 2, 수원학연구소, 2005.?최선혜, 『조선전기 지방사족과 국가』 경인문화사, 2007.?지두환, 「조선전기 사족세력의 형성과 변천 -사계 김장생 집안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 59,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조선 중기?김성우, 「조선중기 사족층의 성장과 신분구조의 변동」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이해준, 「17세기초 진주지방의 이방재편과 사족」 『규장각』 6, 1982.?김무진, 「조선중기 사족층의 동향과 향약의 성격」 『한국사연구』 55, 한국사연구회, 1986.?정진영, 「16세기 향촌문제와 재지사족의 대응 - '예안향약'을 중심으로 -」 『민족문화논총』 7,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6.?정진영, 「임란전후 상주지방 사족의 동향」, 『민족문화논총』 8,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7.?정진영, 「16,7세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와 그 성격」, 『민족문화논총』 10, 1989.?이수건, 「퇴계 이황가문의 재산유래와 그 소유형태」, 『서연 김영하교수 정년퇴임 기념 사학논총 역사교육논집』 13,14, 1990.?김건태, 「16세기 재지사족의 농장경영에 대하여 -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 『성대사림』 7, 1991.?안승준, 「1554년 재경사족의 농업경영문서 - 안씨치가법제 -」, 『서지학보』 8, 1992.?김문택, 「16~17세기 나주지방의 사족동향과 서원향전」, 『청계사학』 11, 1994.?29, 호서사학회, 2000,?장동표, 「조선중기 고성지역 재지사족의 형성과 발전」, 『지역과 역사』 6, 부산경남역사연구소, 2000,?조원래, 「16세기 순천지방 신흥사족」, 『조선시대사학보』 14, 조선시대사학회, 2000,?최호, 「조선시대 영남사족의 향촌지배 -16-18세기 영남의 향약과 동약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이행기 사회연구』, 신서원, 2000,?김성수, 「16세기 향촌의료실태와 사족의 대응」,『한국사연구』, 113, 한국사연구회, 2001,?김성우,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김성우, 「16세기 중반 국가의 군역동원방식과 성주 사족층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 18, 조선시대사학회, 2001,?김현영, 「16세기 한 양반의 일상과 재지사족」, 『조선시대사학보』 18, 조선시대사학회, 2001,?김소은, 「16세기 양반사족의 수입과 경제생활 -“묵재일기”를 중심으로-」, 『숭실사학』 15, 숭실대 사학회, 2002,?박인호, 「조선중기 제천지역 사족의 형성」, 『지역문화연구』 1, 지역문화연구소, 2002,?이수건 외, 『16세기 한국 고문서 연구』, 서울: 아카넷, 2004,?장동표, 「임진왜란 전후 밀양 재지사족의 동향」, 『역사와 현실』 55, 역사연구회, 2005,?박현순, 「16세기 예안현 사족층과 사족사회의 구성」, 『진단학보』 102, 진단학회, 2006,?신동원, 「조선시대 지방의료의 성장 :관 주도에서 사족 주도로, 사족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강릉 약계(1603~1842)의 조직과 해소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35, 한국사연구회, 2006,?정해은,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 사족의 전쟁 체험 -함양 양반 정경운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연구회, 2007,?김성우, 「15, 16세기 사족층의 고향 인식과 거주지 선택 전략 -경상도 선산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98, 역사학회, 2008.?장동표, 「17세기 초반 밀양 재지사족 손기양의 향촌활동」, 『한국민족문화』 사회구조 - 사족지배구조의 변화와 그 성격 -」, 『역사와 현실』 2, 1989,?강창룡, 「17, 18세기의 제주향촌 사회구조와 그 성격 - 제주 향안과 천기를 중심으로 -」, 『제주도연구』 8, 1991,?김경옥, 「조선후기 영암사족과 서원 - 전주최씨가문의 성장과 녹동서원의 건립사례 -」, 『호남문화연구』 20, 1991,?김현영, 「조선후기 사족의 촌락지배 - 남원 둔덕방을 중심으로 -」, 『한국문화』 12, 1991,?유봉학, 「18, 9세기 경, 향학계의 분기와 경화사족」, 『국사관논총』 22, 1991,?최호, 「18세기초 상주지방 사족의 경제적 지위 - 상주양안을 중심으로 -」, 『한국사론』 21, 국사편찬위원회, 1991,?이종일, 「조선후기의 사서족의 신분구조 변동에 관한 사례연구 - 대구부 하북면, 하서면을 중심으로 -」, 『하석김창수교수 화갑기념 사학논총』, 1992,?한국영, 「조선후기 어느 사족가문의 자녀생산과 수명」, 『택와 허선도선생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장필기, 「조선후기 재지사족의 노비상속 및 소유형태 - 은율거 부여서씨가의 호구단자, 준호구 등을 중심으로 -」, 『국사관논총』 43, 1993,?김인걸, 「조선후기 재지사족의 거향관 변화」, 『역사와 현실』 11, 1994,?유봉학, 「19C 경화사족의 생활과 사상」, 『서울학연구』 2,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4,?이수건, 이수환, 정진영, 김용만, 「조선후기 경주지역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민족문화론총』 1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이정우, 「조선후기 회덕현사족의 향권장악」, 『충남사학』 7, 충남대학교 사학회, 1995,?정청주, 「조선후기 전남지역 사족의 누정 건립」, 『호남문화연구』 24,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96,?한예원, 「"사소절"을 통해 본 조선후기 사족가의 규범의식에 대한 일고」, 『대동문화연구』 31,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6,?서병패, 「조선후기 강릉지방 사족의 존재형태에 대하여」, 『인원, 가의 건립성격」, 『민족문화』 22호, 민족문화추진회, 1999,?이정우, 「17-18세기 초 청주지방 사족동향과 서원향전」, 『조선시대사학보』 11, 조선시대사학회, 1999,?김준현, 「사족층의 단성 이거와 향촌지배체제 구축과정」, 『남명학연국』 9,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00,?유영숙,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질서변동과 성황사」, 『강원문화사연구』 7,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2,?송양섭, 「조선시대 관권과 사족, 타협과 충돌」, 『역사비평』 65, 역사문제연구소, 2003,?김준형, 「향안입족을 둘러싼 경남 서부지역 사족층의 갈등 -진주향안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33, 조선시대사학회, 2005.?김성우, 「조선시대 ‘사족’의 개념과 기원에 대한 검토」,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김준형, 「조선후기 단성지역의 사회변화와 사족층」,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0.?김학수, 「황산계를 통해 본 조선후기 재지사족의 결합양상」, 『고문서연구』 16~17, (남풍현, 이수건교수정년기념특집호), 한국고문서학회, 2000,?김현영, 「방법으로서의 지방사 -조선시기 ‘사족지배체제론’을 중심으로-」, 『한국지방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사연구회, 2000,?김현영, 「조선후기 친족의 결속과 갈등의 한 양상 - 대구 월촌 단양우씨 종계관계문서의 분석-」 『고문서연구』 16~17, (남풍현, 이수건교수정년기념특집호), 한국고문서학회, 2000,?우인수, 「조선후기 한 사족가의 생활 양식」, 『조선시대사학보』 12, 조선시대사학회, 2000,?이정우, 「17~18세기 충주지방 서원과 사족의 당파적 성격」, 『한국사연구』 109, 한국사연구회, 2000,?장동표, 「조선중기 고성지역 재지사족의 형성과 발전」, 『지역과 역사』 6, 부산경남역사연구소, 2000,?정승모, 「향집강안을 통해 본 조선 후기 순천의 향권추이」, 『순천향교사』, 순천향교, 2000,?최호, 「조선시대 영남사족의 향촌지배 3,
    인문/어학| 2014.10.23| 10페이지| 1,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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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엔트~고대그리스 간략정리한것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고대의 주요 어족군 - 셈 어족, 인도-유럽 어족제1장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원신석기혁명(정착생활)의 요인 : 안정적인 식량확보이 시기에 두 종류의 농업 방식이 나타남- 천수농업, 관개농업(자연 관개와 인공 관개 모두를 포함), 관개 농업이 천수 농업보다훨씬 더 생산성이 높음- 파종종자 추수하는 비율이 1 : 10 내지 1 : 15에 이르렀음cf) 그리스와 이탈리아, 중세유럽에서 관개 농업과 천수 농업을 통해 생산된 곡물의 비율- 평균 1 : 4 정도, 최고치가 1 : 7BC 4000년기에 이르면 주요한 강둑 주위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도시들이 세워짐강 주변에서 가장 많은 식량이 생산되었고 따라서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살수 있었기 때문이다.메소포타미아 도시의 중심 - 도시 수호신의 거처인 신전이었음신전 경제의 필요성에 따라 BC 3400년에서 BC 3200년 사이에 문자가 만들어짐정착민과 유목민 사이의 차가 크지 않았음(정착민인 농부 또한 지력이 다하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 지리적 환경이 대체로 유사하나 농업환경은 이집트가 더 좋았음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은 파종기가 한참 지난 후에 범람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주민은 땅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를 파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음, 작물에 좋지 않은 염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범람하게 되면 지하수와 섞임주변 환경에서도 차이를 보임이집트(폐쇄적), 메소포타미아(개방적)※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오래 지속됨 - 새로운 민족이 원 거주민의 문화에 스스로 적응제2장 BC 3000년기고대 이집트 역사 - 두 가지 방식으로 시대를 구분함(왕조별, 왕국)왕조별로 → BC 3세기에 사제 마네토가 창안(30개 왕조 혹은 왕가로)사료비판 · 과학적 접근이 발전하지 않음왕국 →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세 부분으로초기왕조시대(BC 3000~BC 2600) - 이집트 신성문자가 발명, 상하 이집트가 통일고왕국시대(BC 2600~2150) -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당시 수도인 멤 BC 2000년경독립, 소아시아와 그 밖의 지역 도시들과의 무역을 통해서 많은 이득을 얻어번영, BC 1840년경 일시적인 경기 후퇴, 아무루의 샴쉬-아다드 1세가 왕위에 오른 BC 19세기 말에 새로운 번영, 왕권이 강해짐고 바빌로니아 제국(BC 1800~1600년경)BC 18세기에 이르러 바빌론이 정치적으로 강력해짐, 이후 오랫동안 권력 유지함무라비(재위, BC 1792~1750)시대에 바빌로니아 문화의 기초가 확립, 함무라비법전함무라비 이후에 고 바빌로니아 제국이 붕괴, 왕권 약화BC 1600년경, 히타이트의 침입을 받기도 함, 이후 카시테 인들도 침입BC 1600년에서 1200년 사이의 4세기 동안 강대국들에 의해 어느 정도 안정된 세력 균형의 시대가 전개됨당시 강대국 - 이집트(신왕국), 미탄니, 히타이트 제국, 앗시리아, 바빌로니아크레테에서는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본토에서는 미케나이 문명이 번영하였던 시기BC 1600년경, 전차가 근동 전체에 퍼짐(권력 상징)이집트 신왕국(BC 1550~1100년경)테베왕조에 의해 이집트가 재통일됨, 17왕조가 힉소스 몰아냄, 18왕조 때 완성(마네토의 오류)제 18왕조(BC 1550~1300년경) -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할 것임제국의 건설, 시리아의 유프라테스 강, 누비아까지 원정투트모세 3세(BC 1450년경)가 대표적인 정복 파라오아케나톤(BC 1350년경) : 종교개혁가, 아케타톤 천도예술에도 변화가 생김, 행정적 측면에 소홀투탄카문 - 이집트의 전통 복구, 수도 멤피스BC 13세기에 이집트가 다시 통일 - 제 19왕조의 라메세스 2세(재위 BC 1279~1212)아부 심벨 등의 거대 신전들을 건축BC 1600년경, 고 바빌로니아 제국 몰락 직후, 카시테 인들이 400 여 년간 메소포타미아를통치, 전차가 바빌로니아에 들어옴카시테인 - 근본적으로 수메르와 아카드 문명이 혼합된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적응문명이 그대로 이어짐미탄니 -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 사이에 위치주민 : BC 3000년비아인 파라오가 통치후기왕국(BC 715~332), 거의 지속적으로 외세에 의해 통치강대국들의 약화를 틈타 약소국가들이 다시 독립, 대부분의 도시들을 아람인이 통치다마스쿠스 : 성서에서 아람이라고 일컬어진 상당히 광대한 영토를 가진 아람인 국가의중심이 됨비블로스, 티로스, 시돈을 포함한 레바논 산맥 서쪽에 있는 항구들의 원거주민들은 외래인에 의해 쫓겨나지 않음, 그리스어로 페니키아라고 불림페니키아 : 근동과 서구 간의 중개 무역을 담당cf) 그리스가 해외 무역에 본격적으로 종사하지 않은 시기BC 10세기에 북아프리카, 시실리, 스페인 남부에 식민시 건설BC 800년경에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카르타고가 대표적 식민도시, 알파벳시초이스라엘 - 다양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짐시와 역사, 법률과 지혜, 문학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은 유다교의 기반이면서신약성사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기반이기도 한 구약성서를 만듬가장 오래된 기록 : BC 550년경 바빌론 유수 시기의 기록, 종교적 사명에 많은영향자신들의 신 야훼(목양신)만을 섬겨야 했음 - 유일신사상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모세의 출애굽기팔레스타인에 도착, 필리스틴인과 대립1대 왕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2대 왕으로(BC 1000년경)다윗 시기에 예루살렘 정복, 왕국의 수도로, 강력한 국가로 만듬, 당시에 주변강대국이 없었음3대 왕 솔로몬 말기에 왕국이 분열시작, 사후 북부(이스라엘)와 남부(유다)로신 앗시리아 제국 - BC 1200년 이후의 어려운 시기 잘 극복티글랏-필레세르 3세(재위, BC 745~727)이후를 신 앗시리아 제국속국들을 정복하여 태수령으로 삼음(원주민 강제 이주 정책)아슈르바니팔(재위, BC 669~627) : 마지막 위대한 왕고 바빌로니아의 문화 유지코자 노력, 다른 왕들은 철저히 파괴전성기 때 이집트까지 병합, 지방 태수들을 예속 통치자로 만듬이집트를 상실하면서 몰락, 아슈르바니팔 사후 가속화속주들의 반란, 동방의 메디아인 등에 의해서 붕괴옛 영토에 신 바빌로니아 제국과 메디아 제국이와 식량이 중요한 보수의 수단(화폐가 없던 시기)BC 8세기와 7세기에 시리아, 앗시리아, 리디아의 왕들은 표식이 된 특정한 무게의 귀금속 덩어리를 제공하기 시작무역 : 육로무역의 경우 여러 면에서 불편함고대 근동의 모든 사회 : 계층 구조, 자유민과 노예 사이에 차별 존재모든 사람은 왕의 노예, 자유라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상대적인개념이었음, 상품취급 노예는 거의 자유 없음, 포로들, 이방인채무노예의 경우, 전쟁 노예에 비해 자유로움, 일정 기간만신분에 따른 법 적용도 차등제7장 정부법전 - 특정한 행위에 일반적인 도덕적 원리를 적용하는 결의론적 방법으로 구성일종의 판례집 - 로마의 법체계 역시 이런 법률 형태를 포함대부분의 왕은 절대 권력을 행사, 어떤 시기에는 장로회, 혹은 자유민 모임의 의견을 참작해야 했음당시 세금면제를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앗시리아 제국 - 아슈르 근처의 의식 수도만이 면제, 때때로 바빌론 같은 존중받던 소수의도시들만이 특권을 가짐페르시아 제국 - 심장지대인 페르세스가 면제, 페니키아 도시들 같은 일부 중요한 무역 중] 심지들은 상당한 정도의 자치가 허용당시 전쟁 - 계절에 따른 업무(근대 국가가 들어서기 전까지)BC 8세기 말부터 앗시리아인은 계속 계절에 따라 농업 인구 중에서 군을 소집하기도 했지만 상비군도 운용하였음제8장 암흑시대(BC 1200~800)미케나이 문명의 사멸(BC 1200년경)의 영향이 오랫동안 지속됨, 상당수의 주민들이 소아시아 서해안으로 도망감, 이오니아 이주, 도리아인의 침입과 때를 같이함암흑 시대 : 호메로스(BC 750년경)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등에서 추론왕은 광대한 도시 생활과 연관된 왕궁 경제의 지도자가 아니라, 전시에 동등한자들 중에 일인자가 되는 부유한 지주로 묘사됨제9장 고졸기(BC 800~500)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음, 인구가 급증헤시오도스(BC 700년경)가 이미 그리스인에 의한 해외 무역을 언급폴리스가 탄생, 아고라인 광장을 포함, 요새화된 언덕, 일종의 질서 유지에도 관심BC 4세기에 타렌툼(오늘날 타란토)같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일부 도시에서는 한동안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플라톤의 친구들 중에도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이 포함그리스 귀족정의 붕괴, 참주정이 나타남, 이후 과두정이나 민주정으로 대체스파르타 - 초기에 3개 부족이 있었으나 이후에 1개 부족이 소멸했다고 추측두 명의 왕이 군림, 에포로이(에포르)라 불리는 5명의 감독관이 행정 장악소수의 스파르타인(와전한 시민권), 페리오이코이(일부 자치), 헤일로타이(국가노예, 권리가 없다),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가 다수 차지시민들은 일하지 않는 대신 일생을 군인으로 복무민회가 있었으나 민주적인 집합체로 발전하지 못했음(혼합정치체제의 형태)왕 : 전시에 군 총사령관 역할, 제사장 역할도 겸임아테나이 - 민주정, 그리스 문화에서 특별히 뛰어난 담당자로 만듦초기 귀족이 통치, 왕정은 암흑 시대에 자연스레 폐지아르콘(초기 3명, 이후 9명)이 군사령관, 제사장, 최고재판관 역할오래된 귀족 가문의 사람들만이 아르콘을 맡을 수 있었음1년 임기가 끝나면 회의 장소 이름을 따서 아레오파고스 회, 혹은 아레스 언덕의 협의회라고 불리는 귀족 협의회의 구성원이 되었음귀족의 지위가 점차 흔들림BC 630년경, 킬론이 참주시도, 귀족정에 의해 실패드라콘이 일반적이었던 관습법을 법전으로 만들어 귀족들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에첫 번째 타격 가함BC 594년, 솔론이 아르콘이 됨, 부유한 시민과 농민의 불만 해소하고자 노력재산에 따라 네 개의 신분으로 → 귀족-신흥부자-농부(제우기타이)-테테스아테나이 시민들에게만 적용, 상위 두 계급만이 아르콘으로, 농부까지 400인회 참여귀족 세력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음세이삭테이아 실행 - 가난한 농부들과 채무 노예 구제(토지 재분배는 실행 안됨)헥테모로이(생산량의 1/6을 지주에게 바침) 폐지, 노예제 완전 폐지 안됨식량공급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정책도 실시배심원 법정 설치(헬리아이아), 6000명의 시민명단, 일정수(501명)를 추첨페이 형성
    학교| 2011.06.24| 11페이지| 2,000원| 조회(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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