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디영화와 멀홀랜드 드라이브1. 미국의 인디영화미국 영화산업에 있어서 LA를 근거지로 한 거대 영화공장 헐리우드가 존재했다면 그 반대편에는 뉴욕을 근거지로 하여 생명력을 이어 온 미국 인디영화가 존재한다. 헐리우드가 꿈과 사랑, 희망, 서사 등 삶의 밝은 면을 이야기할 때 한편에선 소외된 자들, 동성애, 노동자, 미디어 등 삶의 어두운 면을 그들만의 힘겨운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라고도 불리며 끊임없이 훌륭한 작품들을 힘겹게 생산해 온 미국 인디영화에 대해 알아본다.2. 미국 인디영화는 로저 코먼에게서 시작되었다.과거 헐리우드 영화는 텔레비전의 등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거대 자본과 치밀한 기획의 영화와는 별도로, 동시 상영 등을 통해 값 저예산으로 다량의 영화를 제작하여 일정 수익을 올리기 위한 싸구려 영화를 생산해 냈다. 소위 B급영화라 불리는 영화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B급영화들은 저예산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제작자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럼으로 해서 좀 더 자유롭고 개성적인 영화들이 만들어 질 수 있었다. 이것이 곧 미국 인디영화의 시작이 되었다.이러한 B급영화의 대표적인 제작자가 바로 로저 코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작사인 뉴월드픽쳐스를 통해서 수많은 B급영화들을 제작했고 또한 자신들만의 개성을 가진 뛰어난 감독들을 발굴해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조나단 드미, 론 하워드, 브라이언 드 팔마, 조 단테, 인디영화의 끊이지 않는 맥이라 할 수 있는 존 세일즈 까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진 수많은 감독들이 그를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있다. 이 감독들은 로저 코먼의 영향 하에 적은 예산으로 여건과 타협하며 자신의 주제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노하우를 키워냈다. 또한 직간접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 팀 버튼을 비롯한 수많은 감독들이 로저 코먼이 유지해온 B급영화의 영향아래 놓여있다. 연출자들뿐만 아니라 제작자, 배우, 아트디렉터 등등 영화현장의 수많은 인력이 그의 뉴월드픽쳐스를 거쳐 성장했다.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등의 민주적인 작업방식으로도 유명했던 뉴월드픽쳐스는 로저 코먼이 만든 영화제작의 이상적인 장이라 할 수 있다.3. 80년대80년대는 미국 인디영화에 있어서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내적으로는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했고 그 규모도 성장했으며 외적으로는 선댄스영화제 등의 지원도 늘어났다. “성난 황소” “블루 벨벳” “메이트완” “똑바로 살아라” 등이 80년대 등장한 독립영화의 걸작들이다.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헐리우드 주류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비평가들과 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그 힘을 아직도 과시하고 있다.독립 제작사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극장에 배급되기 위해서는 메이저 배급사를 이용해야했던 영화들은 거대한 홍보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대로 극장에 걸리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운 좋게 극장에 걸리게 된 경우에도 편하지 않은 주제들로 인해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고 금새 내려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런 영화들이 살아날 수 있는 통로는 심야상영이었다. 보통 컬트영화라고 하는 이 심야영화들은 골수팬들을 만들어내면서 미국문화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가장 큰 힘을 받은 감독이 데이빗 린치이다.4. 데이빗 린치데이빗 린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레이져 헤드”는 평단과 일반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며 일찌감치 극장에서 내려지지만 독립 배급사의 눈에 들어 심야상영을 통해 수많은 컬트 팬들을 만들어낸 당대의 컬트영화로 재탄생된다. 이후 B급 영화 제작자로 이미 널리 알려진 멜 브룩스의 눈에 띄어 “엘리펀트맨”을 감독하게 된다.1986년에 제작된 “블루 벨벳”은 미국 중산층이 베트남전 등을 거치며 미디어와 사회에 의해 조장된 가치 속에서 가지는 내면의 광기와 위선, 허위로 가득 찬, 진실 되지 못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소수의 골수 컬트팬들을 거느린 감독에서 평단과 대중의 고른 지지를 받는 작가로서 거듭나게 된다.이후 “트윈픽스”의 성공과 계속 제작된 영화들의 좋은 호응에 의해 주류 감독으로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결국 그의 영화의 기반은 미국 인디영화, 특히 컬트영화라는 틀 안에 존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간섭이 심한 헐리우드 메이저 자본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그에게는 아직도 탐탁치 않은 일이며 미국의 독립 자본이나 유럽의 자본으로 영화를 계속해서 제작해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의 영화와 TV시리즈 등을 통해서 기존의 독립영화의 위상도 높아졌으며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들에도 영향을 미쳐 보다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5. 멀홀랜드 드라이브두 시간 동안의 베티와 리타의 이야기 그리고 삼십분 간의 다이안과 카밀라의 진실. 이것이 큰 줄거리이다. 과연 다이안이 베티로서 꿈을 꾼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의 자신은 정말 자신일까. 베티는 다이안의 욕망이 구현된 자아이자 자신은 결코 이룰 수 없는 타자이다.다이안의 현실을 살펴보자(말해두지만, 이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꿈꾸는 자와 꿈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틀이다). 지방의 지루박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그녀는 배우의 꿈을 갖고 헐리우드로 왔다. 하지만 연줄도 능력도 없는 그녀는 카밀라라는 동성의 애인을 얻어 근근이 영화에 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밀라가 변심을 하는 순간 카밀라와 그녀의 애인인 영화감독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다. 그녀는 청부업자에게 카밀라의 살인을 의뢰하고, 절망적으로 자위를 하며 꿈을 꾸게 된다. 바로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꿈은 시작된다.다이안은 카밀라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모든 걸 잊고 자신에게 의존해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카밀라는 폭주족이 낸 자동차 사고로 기억을 잃고 베티(다이안은 베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청부의뢰를 하던 레스토랑에서 본 종업원의 이름이다)를 찾아온다. 영화감독 아담은 여기에선 잘나가는 감독이 아니라 끊임없이 간섭받고, 아내의 정부에게 얻어터지는 우스꽝스런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마피아의 압박에 못 이겨 베티를 오디션에서 떨어뜨린다. 다이안은 자신이 정말 실력이 없어서 배역을 맡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현실에서 아담의 어머니로 나왔던 코코 또한 베티에게 묘한 압박감과 적개심을 일으키게 한다. 베티는 리타(기억을 잃은 카밀라)를 돕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다이안(자신)의 끔찍한 시체를 보게 된다. 리타는 베티를 클럽 실렌시오로 데려가서 이것은 환상이라고 주지시키면서 시작하는 립싱크 쇼를 보게 되지만,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 베티는 리타를 위로하면서 현실에서 못다한 사랑을 나눈다. 카우보이의 협박은? 파란열쇠? 리타가 가진 돈? 어쩌면 더 완벽하고 디테일한 설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걸 그럴듯하게 설명해냈을 때 과연 석연할지는 알 수 없다.
포 스 트 모 더 니 즘과 소비사회포 스 트 모 더 니 즘과 소비사회포 스 트 모 더 니 즘과 소비사회포 스 트 모 더 니 즘과 소비사회포 스 트 모 더 니 즘과 소비사회포 스 트 모 더 니 즘과 소비사회포 스 트 모 더 니 즘과 소비사회프레드릭 제임슨의 논문 를 바탕으로 먼저 포스트 모더니즘의 태동배경과 몇 가지 두드러진 성격들을 살펴보았다.모더니즘 이전, 모더니즘 시대, 그리고 모더니즘 이후모더니즘 이전은 시기적으로는 19세기 이전의 고대, 혹은 전근대의 미학 규범이 적용되는 시기를 통틀어 얘기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으로 대표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일반적으로 엄격한 형식을 통해 보편적인 미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나 여기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중세의 신성 중심 사회에서 인간 본성으로의 이행을 뜻하는 르네상스의 발생, 혁명과 계몽의 시대, 마침내 수많은 희생과 착오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개인이 등장하게 된다. 이렇듯 예술과 시대는 밀접하게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나아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이성 혹은 이성으로 대표되는 세계에 대한 반발과 개인주의의 대두는 인상주의를 비롯한 모더니즘의 시작을 준비하게 된다.모더니즘의 대표적 특징으로 들고 있는 것들은 전통과의 단절·반리얼리즘·전위적 실험성·비역사성·비정치성 등이다. 무의식의 발견과 실존주의의 바탕 위에서 예전의 권위적인 규범들은 파괴되고, 다양하게 등장하는 새로운 가치들에 맞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을 강하게 규정짓는 틀은 ‘주체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실제‘이다.포스트모더니즘은 이 같은 ‘주체’, 그리고 ‘실제’를 회의하거나 부정하고, 그러한 환상이 주는 지배와 억압에 대항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방을 모색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분분한 의견들이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모더니즘의 토대와 그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용어상으로 아직도 여러 부분에서 혼동되고 있을뿐더러,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모더니즘의 정신을 극단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며,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의 변증법적인 합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다.어쨌거나 이오네스코나 베케트의 연극을 보러갈 때는, 체홉이나 입센을 보러갈 때와는 분명히 어느 정도 다른 시각이 필요할 것이다.우리나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뒤늦게 짧은 기간에 받아들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담론이 형성되거나 원래의 의의들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으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아직도 대부분은 생소하고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미학이라는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시각을 완전히 달리하라는 뜻이지, 모더니즘 작품을 분석하는 식으로 어렵게 접근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유의해야 했다.패스티쉬와 정신분열증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패스티쉬와 정신분열증이라는 두가지 주요한 양상으로 설명하고, 이러한 특징에서 소비사회와의 관계를 밝혀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미 힘을 잃은 과거의 양식을 불러오고 재활용하는 패스티쉬는 분명한 합목적성을 전제로 한 패러디와는 구별해서 죽은 모방이라고 불린다. 필자는 시대를 표현할 적합한 양식이 부재하다는 데서 원인을 찾고 있지만, 어쩌면 이러한 혼성모방의 현상들 자체가 우리 시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만큼, 무의미의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정신분열증은 언어적 이상이나 부적응에서 나타난다고 하는데,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언어학과의 연관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징후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의도로 보인다. 즉, 모더니즘이 주창한 실체에 대한 의심이고, 라깡이 설명하는 소위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매트릭스처럼 실제와 비실제가 모호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에 대해 논의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각자의 꿈에 대한 경험을 나누어 보았다. 실제로 잠에서 깨어나서 꿈을 직접 글로 써보려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 기표들이 어지럽게 떠돌아다니고 시간적으로도 뒤죽박죽이지만, 어떤 이미지나 감정만큼은 생생한 경우가 많았다. 즉, 우리는 잠시 동안 자폐아나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서 ’현재의 미분화된 환영‘을 경험한 거라고 가정해 보았다. 꿈은 실제로 언제나 현재적이다. 기의를 상실한 기표가 이미지로 변환되는 꿈 속은 억압이 해방되는 공간일 수도 있고, 욕망이 폭로되는 순간일 수도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는 설명도 있었다. 일단 기술되면 금방 사라져버린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었고, 존케이지는 이러한 단절과 침묵을 음악으로 표현했다고 보았다.문학을 예로 들어, 언어시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들은 일반적인 서사 즉, 이차원의 시간을 따르지 않고, 그 단어 자체만으로는 맥락 속에서 정확한 뜻을 알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고립된 물질적 기표들의 상호관계 속에 있고, 이러한 작품들은 꿈처럼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소비사회의 미학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형식을 띠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변화로 인해 이러한 특징들이 주류로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었다. 위대한 모더니즘 예술들도 이미 전통적 ? 학구적 영역이 되었고, 그것들이 가진 전복적인 힘들은 이제 너무나 익숙해져서 무용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피카소나 제임스 조이스는 교양의 영역이 되고, 히피나 펑크는 패션이 되었다. 물론 세상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가 좁아지고, 미디어는 발달하고, 자본주의는 고도화되었다. 예술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간의 구분도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크로스오버나 하이브리드, 퓨전이라는 말은 일상용어가 되었다.이 논문은 우리가 결국 전통들을 말살하고, 영원한 현재, 영원한 변화 속에서 살게 되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재현하거나 되풀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논리에 대항할 방식 역시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끝맺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다원화된 논리, 가부장적인 가치의 와해, 페미니즘을 비롯한 소수자들에 대한 이해와 개성 중시 등 다양한 역할들이 얘기되고 있지만, 상업화된 예술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들이 있는 것 같다.오늘날의 광고는 소통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이고, 자본과 예술이 가장 긴밀하게 결합된 형태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R.해밀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1956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식을 상당부분 차용하고 있는 TTL광고를 예로 들어보았다. 모델에 대한 정보도 철저히 차단한 TTL은 정확히 무엇의 이니셜인지 알려주고 있지 않다. The Twenties Life, Time To Love, Time To Leave... 아무 뜻도 아니면서, 또한 어떠한 뜻이라도 될 수 있다. 박제된 물고기, 깨진 어항, 공중을 나는 물고기.. 초현실적인 이미지들 위에서 기표는 미끄러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반형식적, 비합리적, 서술구조의 해체, 시선일치의 파괴, 페미니즘적 시선 등이 전략적으로 사용된 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열린 구조는 단지 광고인만큼 호기심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광고는 매체와 장소를 불문하고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광고가 예술일까- 라는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단 예술의 개념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예술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토론해 보았는데, 먼저 상대적이고 넓은 의미로 보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첫 휴가를 나온 군인이 집에서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먹고 하는 말과, 게임을 좋아하는 중학생이 임요환의 스타크래프트 중계를 보면서 하는 말, 야구팬이 호수비를 보고 하는 말, 봄처럼 화사하게 차려입고 나온 여자친구에게 하는 말이 똑같이 “와- 예술인데.”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가치에 우선적인 척도를 두는 소박한 견해이다. 하지만 어떤 학습되고 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예술의 개념도 각자 염두에는 두고 있었다. 실제로 유일무이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미술이나 무용 등과 같은 경우에는 별개의 순수예술로 본다고 대답했는데, 이렇게 어딘가 석연치 않는 부분을 고려해서 다시 ‘상업예술‘ 이렇게 붙여보니까 대충 모두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하지만 상업적인 의도와 예술적인 의도가 모두 충족되어야 ‘예술적인 광고’가 되는 건지,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충돌할 경우에는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예술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서는 대체로 같은 대답들을 했다. 어떤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 감정을 풍요롭게 한다든지, 시대의 반영이나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든지 등- 만약에 광고가 예술이 아니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예술의 목적들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서 상품의 판매라는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예술작품들이 표현을 위해 판매를 수단으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영리활동으로 여겨지는 광고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아직 협소하게만 인정되고 있다.
러시아 이중신앙 체계의 원리를 통해 살펴본우리 기독교의 문화적 양상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영상학전공1999314262 김석1. 서론 / 연구의 목적과 범위이 글은 러시아 정교의 특수한 수용양상의 예를 현재 우리의 종교가 자리 잡게 된 배경과 비교하면서, 새롭게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가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나름의 세계관에 어떻게 문을 두드리는지,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단순히 충돌과 갈등의 반목 상황으로 치닫지 않고 하나의 공인된 토착 문화로 자리 잡게 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반에 관심을 두고서 논의를 전개시키고자 한다.먼저 러시아의 ‘이중신앙’이라는 용어에는 실로 애매한 관점들이 혼재해 있다. 이를 문화적 헤게모니의 쟁탈 양상으로 볼 것이냐, 조화로운 공존의 상태로 볼 것이냐, 특수한 풍토에서 파생된 하이브리드 문화로 볼 것이냐의 관점에 따라 뉘앙스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이 민간신앙과 혼합되어 발전한 전례들은 러시아-슬라브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서구의 기독교적 관점으로 편재된 이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이중신앙’이라는 용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황성우).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중신앙’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유입된 종교가 토착 종교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의 한 형태로서 러시아적인 특수성을 고려해 지칭하기로 한다.문화관광부가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1999)’를 토대로 한국의 종교현황을 파악한 결과 우리나라의 종교인구 비율은 53.6%이며, 종교별 인구비율은 불교가 26.3%로 가장 높고, 개신교 18.6%, 천주교 7%, 유교 0.7%, 기타 1.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로 나머지 46.4%를 단순히 세속론/무신론자로만 볼 수는 없다. 유교로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터무니없이 낮은 것은 실제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설명하는 체계로서의 종교라기보다는 전통적인 관습, 현세적인 실천 사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관점에 걸쳐있는 수많은 토론들을 일일이 세계관이자 생활철학으로서 유교사상이 한국인 다수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민중 속에 뿌리깊은 무속신앙도 간과할 수 없는데, 심지어 원시 샤머니즘에서 발전된 무교(巫敎)가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선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최준식). 이러한 다원종교적 상황 속에서 단지 통계적 수치만으로 어느 한 종교의 주도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판단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르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근대화의 요구가 서구 종교의 유입과 맞물려졌던 첨예한 시기에 기독교가 한국인의 정신적인 토대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2. 러시아 정교의 수용 양상알려진 바대로 988년에서 1905년까지 정교는 러시아의 국교였다. 즉, 달리 말해 정교는 국가의 종교였다. 블라지미르 대공이 문화적 선택의 역사적 귀로에 섰을 때 요구되었던 것은 교역에의 이점과 국가의 통합을 위한 강력한 종교 이념이었으며, ‘원초연대기’의 일화에서 비잔틴의 시각적인 심미체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은 이후의 이콘 문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러시아 종교 문화의 한 특수한 경향을 예고하게 된다. 교육의 기회가 요구되는 성서와 달리 성상화는 보다 손쉽게 민중들에게 신성하고 유일한 종교적 이마쥬로 각인될 수 있었고, 집집마다의 ‘성스러운 구석’에 놓임으로써 현세구복의 의미도 함께 획득하게 되었다. 여기서 당시 러시아 민중들이 비잔틴 정교의 내적의미를 정말로 이해했느냐를 논하기보다는 그들 나름의 상징체계로 새로운 문화적 요구들을 흡수해 나갔던 과정들을 강조해야 한다. 블라지미르는 외부로부터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시도했던 빼룬화 정책이 실패하자 뿌리깊은 슬라브의 범신론과 지중해 너머의 기독교를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절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빼룬 - 엘리야, 벨레스 - 바실리, 야릴로 - 게오르기, 모꼬쉬 - 빠라스께바의 경우와 같은 고대신과 성인들의 변용된 매치업은 문화적 충돌과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럽게 통합을 꾀할 수 있는 변통정교 축일이 뒤섞이는 것도 오랜 농경사회의 맥락과 궤를 같이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들이 모두 정부로부터 주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주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생적인 관성이 갑작스러운 충돌 없이 긴 기간에 걸쳐 가장 자연스럽게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어찌 보면 ‘이중신앙’이라는 용어는 ‘위로부터의 종교’와 ‘아래로부터의 종교’가 갖는 이중적 의미를 포괄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러시아는 정치와 교회가 혼합된 특수한 양상을 보여 왔으며, 17세기 니꼰의 개혁에서는 反그리스-서구적 경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이후 근대에 이르러서는 전체의 조화라는 정교의 상징체계가 소비에트 혁명에 이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성스러운 러시아’의 양상들을 우리는 ‘민중종교’의 탄생 과정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김우승).3. 한국 기독교의 수용 양상한국 기독교의 선교 역사는 봉건적 사회 질서의 붕괴와 근대적 시민사회로의 이행에 있어서 러시아가 정교를 받아들였을 때 보다 더 절박한 국가적 시국상황이었다. 그 정착 시기는 한국적인 특수성을 고려한 어떠한 준비의 여지도 없이 상대적으로 짧을 수밖에 없었으며, 곧바로 개화와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벅찬 민족적인 요구에 직면해 있었다. 그것은 상당부분 외부적인 압력으로 말미암은 역사적인 흐름이었고, 삼국이 불교를 받아들였을 때와 같은 내부의 정치적 요구가 아니었다. 이미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학문으로써 먼저 받아들였고, 18세기 말 중국을 통해 먼저 들어온 천주교의 경우에는 신유, 신해, 병인, 기해박해 등 가톨릭 박해사가 따로 연구될 만큼 심각한 좌절을 겪었다. 그 도입과정에 있어 외래 선교사를 통한 일방적 유입이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자생적인 연구와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병인양요와 쇄국정책의 강화로 이어지면서 민족과의 접점을 찾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가톨릭의 보수적 입장은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고자 하는 위정척사의 입장과 극명시기적으로 조선 말기의 시대적 불안상황과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한 결과였으며 정부와의 공조 없이는 어떠한 사상의 전파도 용납될 수 없었던 당시의 긴박한 배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정부의 통제력이 예전과 같은 효력을 상실해가는 시점에서 개신교를 전파하기 위한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면서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이전의 가톨릭과 다르다고 하는 새로운 전략을 내세워야 했다. 그들은 정교분리를 선언했고, 호혜적인 차원에서의 선진문물의 도입을 약속하게끔 되었다. 일단 정부로부터의 간섭을 최소화한 다음에는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해야 하는 중대차한 과제가 남아있었는데, 당시의 선교사 헐버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 때에는 영혼 숭배자’라고 언급했다(*김흥수). 이들은 질서유지의 체계로서의 유교의 윤리적 측면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효 사상을 기독교적 윤리와 연관지어 부각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제사에 담긴 조상 숭배 사상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으며 유교의 지나친 현세지향적 성향을 비판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갈등들은 현재까지도 미묘하게 존속하는 상태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불교에 대한 입장은 좀 더 극단적이었는데, 바로 우상숭배에 관한 기독교의 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여성들 속으로 파고 든 미신, 무속적인 기복신앙으로 불교를 격하시키고, 국가와 결탁해서 부패한 부정적인 사례들을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대중불교가 사머니즘에서 비롯된 무속신앙과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그들이 선교를 위해 넘어야 할 가장 커다란 장벽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이 작용했다. 한국의 무속신앙은 고대 슬라브의 범신론처럼 수많은 정령들이 존재하고 있는 자연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었으나, 끼에프 루시가 정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있었던 융화에의 내부적 노력보다는 처음부터 외부적 시선에 의해 타파의 대상으로 치부되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의 ‘반민족 혐의’)를 피해가면서 국가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민족 공동체와의 공통분모를 찾아내야만 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계몽주의적인 신학의 방법론을 선택하면서 민중들의 고유 신앙 속에 남아있는 ‘하나님(天主)’이라고 하는 개념을 유일신 개념으로 치환시키기도 한다. 개신교는 ‘정교분리’의 주장이 갖는 효용과 한계를 재빨리 파악해야 했고 국권상실의 위기를 맞아 하나의 입장을 선택해야만 했다. 초기의 신자들은 이러한 민족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교회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기대로 충만했으며 이미 ‘민족교회’의 탄생이 무르익었다고 보고 있었다. 이는 종교가 실제의 삶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 있느냐는 본질적인 질문과도 맞닿아 있었는데, 이러한 도전에 직면해서 초기 외국인 선교자들과 자생하기 시작한 한국 기독교도들의 입장이 충돌을 보였다. 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이때부터 이미 보수와 진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로 종교의 성격이 나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현실적인 민족적 결단이 그만큼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원동력을 제공했던 3.1운동을 통해 기독교는 민족종교로서의 가능성을 일단 인정받게 되지만, 일본 정부는 개신교에 호의적이었으며, 오히려 학교와 병원을 중심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종교 공동체를 이용하고자 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교회는 점차 탈속화되는 경향을 보이거나 신사참배를 요구받는 등 일제의 압력에 의해 왜곡되고 본래의 교리에 있어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을 정도의 심한 손상을 입기도 한다. YMCA가 주도한 농촌운동 등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진행된 활발한 사회참여와 소수의 저항은 이어졌으나, 해방 이후 남북분단의 순간에도 기독교는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공통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반공정부에 이용되는 질곡을 겪는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이 땅에 성공적으로 토착화되기 이전에 너무도 벅찬 한국 근대민족사의 과제들에 직면하면서, ‘이중신앙’의 사례라기보다는 ‘이중적 신앙’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