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주의를 사조보다는 극의 한 형식으로 보고 싶다. 이 형식은 19c후반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100년을 훨씬 넘어서 지금까지도 연극의 주된 형식이면서 연극의 기본으로 여겨지며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어떠한 예술의 한 형식이 이토록 오래토록 인정되고 사용되어지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실주의 등장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입센을 통한 본격적인 사실주의가 등장한 1870년대 말은 급격한 사회 격동기였다. 과학과 사회학의 발달 시기였으며 그 중에서도 산업화의 시작과 다윈의 진화론, 콩트의 실증사상은 사실주의가 발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760년대 산업혁명이 영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1863년 농노해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유주의 노선과 산업화는 중산층 및 사회하층을 일자리가 풍부한 도시로 모여들게 했다. 사람들은 유토피아적 환상을 가지고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현실은 환상과는 달리 노동문제, 인구문제, 빈부격차 등의 사회병패 들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유럽 전역에 동시적으로 팽배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였다. 동시대 사회를 반영하는 예술가들의 초점, 즉 작품의 소재는 당연히 사회문제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빈부격차, 여성문제, 매춘 등 환경(사회)과 사람의 자아실현이 부딪히는 내용이 소재가 된 작품들이 많았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처럼 과학의 발달로 인해 종교적 관념이 약해진 현실에서 이제 인간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던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사회문제와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다윈의 진화론은 환경에 따라 인간의 행동이 달라짐을 말하면서 시회문제라는 소재에 더 불을 당겼고, 인간을 하나의 관찰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개념을 만들어 주면서 인생의 한 단편을 떼어 내어 극장 안에서 그 인물의 행동(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는 듯한 극 형식을 취하게 했다. 또한 진화론의 영향으로 극은 종전의 낭만주의의 성격비극에서 환경 비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현존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며 원인과 결과에 의해 논증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는 환경을 원인으로 인간의 행동을 결과로 보았으며 당시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원인이 되는 사회 병폐들을 연극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실증주의의 과학적 논증을 중요시 여기는 점 또한 현미경으로 인물의 일생을 엿보는 듯 한 사실주의 형식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 또 현존하는 것 자체를 중요시하게 여기게 되면서 실재 생활과 되도록 가장 흡사하게 연극을 만드는 것이 사실주의 자들의 목표가 되었다.이 극 형태를 위해 고안된 것이 ‘제 4의 벽’ 이다. 프로시니엄 아치 앞면을 제 4의 벽으로 관객과 배우 사이에 약속함으로써 관객은 제 4의 벽을 통해 배우가 연기해 내는 인물의 삶을 몰래 그리고 세세히 관찰하고 엿보게 되는 수법이 가능해 졌다.
식민이란 것이 무엇인가? 식민이란 강한 세력이 약한 세력에게 있어 힘의 우위에 서는 것을 말할 것이다. 1945년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그 후로 부터 지금까지도 정신적 식민이란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이렇듯 눈에 보이는 영토를 벗어나 정신적 식민으로부터 벗어나 자아를 되찾기 위한 예술 운동을 ‘탈 식민주의’라고 본다.이 탈 식민주의의 시초는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볼 수 있다. 사이드는 이 책을 통해 서구적인 것의 우월함과 비서구적인 것의 열등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유럽 중심적 보편주의를 꼬집고 동양을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세계로 그렸다. 그러나 탈 식민주의가 예술의 한 분야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90년으로 그 역사가 길지 못하다. 1990년 프란츠 파농의 『지상의 저주받은 자들』을 비롯한 그의 작품은 아프리카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경험한 서구인들이 흑인들에게 폭력을 자행하는 모습에서 받은 영향을 토대로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소재로 삼아 쓴 것으로 ,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통치에 대한 ‘문화적 저항’으로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탈 식민주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곳은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강하게 서구의 식민지로 있었던 아프리카 였다. 극작가 에이메 세자르는《어떤태풍》이라는 셰익스피어의 《태풍》을 재구성한 작품을 통해 각 나라의 고유한 연극은 인정하지 않고 제의나 영웅담 초자연적인 행위 따위는 하위장르로 여기고 유럽 연극은 완전무결한 미학의 전범으로 보는 편견에 반발하였다. 여기서 칼리반은 매우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를 통해 유럽 연극 권력의 속내와 제 3세계 연극 미학의 탈식민화를 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렇듯 탈 식민주의 연극은 식민을 경험한 나라에서 그 잔재가 아직 깨끗이 청산되지 못했을 때, 또는 그런 직접 경험으로 인해 주체성을 잃었을 때 성행하는 경향을 띈다. 따라서 위안부,일본어 잔재, 독도 문제 등 일제 시대로 인한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일본을 동경하는 우리나라에도 탈 식민주의 연극의 중요성의 이유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식민 경험을 넘어서 하이너 뮐러 같은 경우는 《햄릿머신》을 통해 유럽을 학문적,기술적으로 주조된 문명으로 바라보고 소비와 부당한 소유분배로 규정된 서구의 ‘상품세력’과 국민을 정치적으로 조종하고 개인행동이나 결정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주의 질서 사회 무두를 비판했다. 이처럼 탈 식민주의는 식민을 당한 나라와 자행한 나라(인종)에 국한되는 관점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 인간과 인간이란 넓은 범위 즉, 힘의 차이가 있는 두 세력만 있다면 탈 식민주의 예술적 관점은 적용될 수 있는 것 이다.우리는 힘의 논리에 지배 받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식민의 상황은 언제 어디서든 주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현대의 식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여중생이 탱크에 깔려 죽게한 미군의 재판을 어느 나라가 맡을 것이냐 하는 문제나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고 일본의 문화나 상품 또는 서양의 것들 나아가 행동과 성향까지도 동경하는 경향이 후기 식민의 예 이다. 정신과 문화는 밀접하기에 오늘날 탈 식민주의가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스트로프스키 [Ostrovskii, Nikolai Alekseevich, 1823~1886]작자의 생애오스트로프스키(Aleksandr Nikolaevich Ostrovskii) 1823년 태생의 러시아 극작가. 일생 동안 50여편의 희곡을 썼고, 그 반수 이상이 아직도 소련에서 공연되고 있는 인기 작가로서 러시아 국민극(國民劇)의 확립자, 러시아의 셰익스피어로 일컬어지고 있다.모스크바의 관리의 집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대학을 중퇴하고, 모스크바의 상사재판소(商事裁判所)에 서기로 근무하면서 관리의 생활, 금권이 지배하는 상인 사회의 암흑과 습속(習俗)을 관찰함으로써, 그때까지 러시아 문학에서 다루지 못한 상인의 가정생활이며 도시의 서민들의 생태를 박진감 있게 무대화하였다. 그의 작품 『친척의 계산은 나중에』(50년)는 문단에서 호평을 받았으나, 한때 상연이 금지되었고 관직을 잃었다. 지주, 상인들의 위선·무지·횡포를 폭로한 『뇌우』(60년), 『뜨거운 마음』(69년), 『숲』(71년), 민화에서 취재한 환상적 시극 『백설 공주』(73년) 등, 많은 명작 희곡을 남기고, 1886년에 세상을 떠났다.러시아 연극에 있어서 오스트로프스키의 역할은 지대했다. 러시아 희곡에만 전념했던 작가 오스트로프스키의 등장으로 외국의 번안물이나 번역극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약 50편의 희곡을 썼다. 전제정치와 농노제, 상인과 귀족의 생활 등 러시아 현실을 다면적으로 반영하는 그의 작품 속에는 일상생활의 언어와 풍습들이 치밀하게 담겨있다. 오스트로프스키는 희곡의 인물들을 확실하게 묘사하며 작가와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인공들을 창출하려했다. 그의 희곡들은 서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러시아의 연극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853년은 그의 작품이 처음 무대에 올려진 뜻 깊은 해인데, 그 이후 그의 작품들은, 러시아 생활과 유리된 고전 작품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진보적인 배우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오스트로프스키는 번역극 우선의 상연 체제와 싸우면서 187자이고, 그녀의 아들 찌폰은, 고집이 센 어머니의 손아귀에 잡혀 노는 의지 박약한 사내이다. 감수성이 강하고, 종교심이 두터운 그의 아내 카체리나는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와 무기력한 남편에 싫증을 느끼고, 남몰래 디코이의 조카 아들 포리스를 사모한다. 찌폰의 여동생 봐르와라는, 어머니의 눈을 피하여 디코이가(家)의 점원 쿠도랴시와의 밀회를 즐긴다. 남편의 여행 중 카체리나는 시누이 봐르와라의 주선으로 마침내 포리스와 밀회를 한다. 그러나 봉건적인 도덕관과 신비적인 죄악감에 고민한 그녀는, 뇌우가 진동하는 어느 비 오는 날에, 남편과 가족 전원 앞에서 자기의 밀회를 고백한다.홧술을 퍼마시는 찌폰, 며느리의 부정을 탓하는 카바니파, 애인을 데리고 도망가는 무력한 포리스……절망에 빠진 카체리나는 구태 의연한, 생활에 굴복하지 않고, 결국은 볼가강에 몸을 던진다.주인공 하이라이트이 비극의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어떤 뜻을 함축하고 있다. 신흥 부르조아지의 대표자, 디코이는 「잔인한」을 뜻하지만, 방언(方言)으로는 「우매한」「광적」인 뜻이고, 고집이 센 여주인 카바니파는 「야만적인 암퇘지」의 뜻이고, 무지 몽매와 암흑이 지배하는 제정 러시아의 전제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왈가닥이자 인간성이 풍부한 그녀의 딸 봐르와라는, 「세련되지 않은」「무교육자」를 뜻하는 희랍어에서 유래된 말이고, 그녀의 오빠 찌폰은 「조용한」「착한」뜻이다. 아름다운 여주인공 카체리나는 희랍어로 「순수 무구」를 뜻한다. 시적인 꿈을 지니고, 자유를 희구하고, 낡은 체제에 죽음으로 항거한 그녀는, 러시아 문학에 등장하는 매력 있는 여성의 하나이다.명문구 낙수「어둠의 왕국에 스며 비친 한 줄기의 빛.」(비평가 도브롤류보프의 논문의 제명, 1860년)*도브롤류보프는 완고·고루·무지·몽매가 지배하는 농노제 러시아를 「어둠의 왕국」이라고 불렀고, 『뇌우』의 여주인공 카체리나의 자살을, 전제와 억압에 대한 민중의 항의의 싹으로 보고, 그녀를 「어둠의 왕국에 스며 비친 한 줄기 빛」이라고 불렀다.심화 자료오스긋는 인물로 성장해 나갔으며 마침내 모스크바 예슬 극장의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단체코라는 걸출한 지도자들을 만나며 극대 연극사에 길이 빛날 이정표를 확립시킨다. 그러나 1884년부터 앓게 된 그의 폐결핵 증세는, 끊임없는 극장활동과 소설 작업에 힘입어 1900년 학술원 명예회원으로 피선되기도 했지만, 마침내 1904년 6월 15일 독일 휴양지 바덴 온천장이라는 이국땅에서 폐결핵에 의한 심장병으로 인생은 마감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 넷이었다. 아쉬움 남는 삶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이정표가 후대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결코 아쉬움으로 표현될 수 없는 거장의 모습으로 영원히 존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체홉은 처음에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과소평가 되었다. 그들은 체홉극의 특이성에 주목하였으나 그 특이성이 살아있는 극적인 인물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낼 만한 능력을 체홉이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지루함, 무대 기교의 결핍, 불충분한 행동, 플롯의 미약함을 못마땅해 하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리포트를 쓴다, 그는 무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저버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말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우연히 사진과 같은 그림들을 제시한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체홉을 비난했다. 그 후 스타니 슬라브스키와 단첸코는 처음으로 체홉극에서 회부의 산문체적인 에피소드들과 개개 인물들의 대사 속에 숨겨진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서정시의 흐름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력을 기울여서 이 서정적인 흐름을 연출하려고 했다. 그 후로 체홉의 극은 특수한 '분위기의 극'으로 규정되었고 비평가들은 드라마 작가로서의 체홉의 부적격함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19세기 말 - 20세기 초 체홉에 이르러 러시아 극작계는 절정을 이룬다. 그의 최초의 대 희곡은 지식인의 정신적 위기를 그린 『이바노프』인데 이 작품은 1887년에 상연되었다. 얼마 후 체홉은 4대 희곡 『갈매기』, 『바냐 외숙내고 니나를 유혹한다. 몇 년 후 작가가 된 트레플레프에게 갑자기 니나가 찾아온다. 그녀는 트리고린에게 버림받고 배우로서도 실패하였지만 재출발을 결심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본 트레플레프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절망과 불확실한 앞날에 비애를 느끼고 자살한다.바냐아저씨부제는 <전원생활의 정경>이며, 쓰여진 시기는 미상이다. 1899년 10월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누이와 사별한 매제 세레브랴코프교수의 생활을 원조하기 위해 주인공 바냐는 누이동생의 딸 소냐와 함께 자기를 희생해가며 일하나, 교수는 후처 엘레나를 맞이한다. 교수가 한낱 평범하고 자만심만 강한 이기적인 속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자, 바냐의 인생은 허물어진다. 한편 소냐는 의사 아스트로프를 사랑하지만, 그는 엘레나에게 마음이 쏠려 소냐의 사랑을 거절한다. 상처받은 소냐는 바냐를 위로하고, 둘은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결의한다.벚꽃동산1903년에 씌어져, 이듬해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라네프스카야부인은 파리에서 같이 살던 남자에 대한 애정이 식어, 조상 대대의 영지인 벚꽃동산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부인은 이미 많은 빚을 졌기 때문에 벚꽃동산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에는 농노였으나 이제는 유복한 상인이 된 로파힌은 별장지로 팔아 버리라고 권했으나 부인과 그녀의 오라버니는 시류를 알지 못하여 아무런 대책도 세우려 하지 않는다. 얼마 뒤, 벚꽃동산은 경매에 붙여져 로파힌에게 넘어간다. 부인은 슬프게 영지를 떠나 파리로 되돌아가나, 막내딸 아냐는 벚꽃동산으로 상징되는 옛 세계와의 결별을 오히려 기뻐하며 혁명가라고도 할 수 있는 만년 대학생 트로피모프와 손을 잡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달려간다.세자매1900년에 씌어졌으며, 이듬해 모스크바예술극장에 초연되었다. 지방도시에 사는 올가·마샤·이리나 세 자매의 인생의 꿈은, 전에 살았던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올가의 남동생 안드레이는 미래의 대학교수라는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속물녀(俗物女) 나타샤와 결혼하고부터전에 참가하고 이 전쟁을 기초로 "세바스토폴리 이야기"를 집필 더욱 문명을 높혔다. 1856년에 제대. 페테르브르크와 야스나야에 거주하면서 당시의 작가들과 교유를 가졌다.1857년 서유럽을 여행 후 귀국하여 [세 죽음], [가정의 행복]을 발표했다. 톨스토이는 이때 다시 농민에 관심을 쏟아 농민의 자녀 교육과 농민의 이익을 옹호 [카지카]를 발표했다.1862년 소피아와 결혼하고 이 후 문학에 더욱 주력하여 [폴리쿠시카]를 저술하고 [전쟁과 평화]를 완성했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시대에 취재한 것을 기초로 그 예술성, 내용의 깊이, 웅대한 구상 등에 있어서 세계문학 사상 비교할 수 없는 최고봉으로 알려진다.그 후 다시 2제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러시아의 국가 조직과 특권 계급의 생태와 모랄을 비판 작가의 최고 걸작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소설 후 정신적 위기에 봉착 과학과 철학 에 몰두했으나 결국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종교에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견해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의 모든 가치를 재검토하고 국가 교회를 부정, 초대 기독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이 때는 예술가로서 보다는 종교가로서 더욱 위치를 높였다. 이런 세계관의 기초에는 악에 대한 무저항, 선과 사랑에 의한 구원, 사회생활의 모든 경제적 형식의 부정의 사상으로서 이는 혁명의 부정과 결부되어 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다시 예술적 향기가 높은 [문명의 열매], [부활] 그리고 희곡 [살아있는 송장]등을 발표했는데 [부활]은 만년을 장식한 대작으로 카츄샤란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졌다.그는 1882년 [참회]에서 내적인 고민과 절망을 해명키 위해 눈물겨운 종교적 탐색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말년의 시리즈[나의 신앙],[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인생독본] 등이 그것이다.이들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저항주의, 반국가, 반문명, 반토지사유론, 이웃에 대한 사랑, 선과 악, 신앙
리얼리즘(realism)이란'예술가의 체험을 기초로 한, 사회적 현실의 생활 형태에 대한 형상적 인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리얼리즘은 가장 뛰어나고 가장 유효한 예술적 창작방법이다. 예술적, 형상적 인식은 과학적, 개념적 인식과는 대상과 방법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예술적 인식의 방법은 자연과학에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회과학에서의 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리얼리즘인 것이다.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는 이상주의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혹은 유물론과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다. 예술상의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는 19세기 중엽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사실주의(realism) 연극 ?사실주의는 계몽주의 이래로 새롭게 대두한 19세기말 이성과 과학의 시대 조류 아래 콩뜨의 과학적 실증주의의 방법론과 마르크스, 다윈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문학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이다.연극에 있어서 이것은 에밀 졸라의 서문으로 선언되어졌다. 졸라는 이 글에서 연극은 마치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실험하듯 한 인물이 특수한 환경에 처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관찰, 기록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졸라의 연극론에 영향받아 앙드레 앙트안느는 를 설립하고 새 연극의 중심지로서 사실주의 연극운동을 펴나갔다. 그는 당시 공연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던 입센, 스트린드베리 등의 선구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공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사실주의 연극 공연 양식을 확립하였다.한편 그의 영향을 받아 유럽 각국에서 소극장 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오토 브람이 를 영국에서는 J.J. Grein이 를 건립하고 각기 사실주의 연극을 주도하였다. 이로써 사실주의 연극은 전 유럽에 정착되게 됐다.사실주의 연극론의 효시는 졸라의 앞서 서문보다 한 세기나 먼저 나온 디드로의 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연극의 완벽함은 행동의 모방에 있으며 관객 스스로가 기만될 수 있도록 정확해야 한다고 했으며 인과법칙을 예술에 적용시켜 자연과 예술을 연결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연극=현실(자연)'이라는 극적 일루젼(illusion)과 과학적 결정론을 연극의 지상과제로 삼았으며 이는 곧 사실주의 연극의 본질을 이루는 논리였다.사실주의 연극의 공연 양식은 삭스-마이닝겐 극단의 선구적인 작업에 힘입어 앙트안느와 그의 에 의해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는 연기자가 실생활에서와 같이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였으며 장치도 4면벽을 모두 설계하였고 실제의 물건을 무대 도구로 사용하였다. 또한 조명도 시간, 절후에 따른 실제의 광원을 모사하고자 애썼다. 그는 이러한 모든 공연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극적 일루젼을 이루도록 연출의 감독하에 전 제작 과정에서 사실주의적 공연 양식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 스타니슬라브스키 (1863~1938)????????- 연출가, 요즘 연극의 연기법 기초, 연출법 등의 이론 제시????? ??- 연기 : 심리적 사실주의?????????? 연출 : 무대 사실주의??????? - 무대 장치는 장식물이 아닌 환경.??????????? 극 행동 자체가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삶의 정확한 재생을 목표로 함.???????????? → 유럽 뿐 아니라 미국에도 영향.?????? *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법의 기초????????? ① 육체와 발성의 일상적인 훈련????????? ② 현실을 관찰하는 습관????????? ③ 무대 위에서의 모든 기술 습득????????? ④ 감정 기억의 결합 (감정 심리적 투사)????????? ⑤ 주어진 작품의 철저한 연구????????? ⑥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는 연습????????? ⑦ 주의 집중????????? ⑧ 극중의 진실을 믿고 따른다 (동일시)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이란무엇인가?스타니슬라프스키시스템 [Stanislavsky system]??stanislavsky system이라고도 함.러시아의 연극 배우·연출가·이론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시킨 연극훈련방식.19세기의 꾸민 듯한 연기양식보다 위대한 예술인 20세기 사실주의 연극에 더욱 부합하는 연기양식을 찾아내려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새로운 연기양식을 개발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지배적인 연기양식에 개의치 않고, 대배우들이 어떻게 하여 공연에 성공하는가의 방법을 집대성하여 지도방식과 연기방식으로 삼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의 방식은 배우가 자신의 정서적 기억(과거의 경험·정서에 대한 회상)을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방식에서는 배우가 무대에 들어서는 것을 연기 또는 등장인물로서의 인생의 시작이 아니라 배우가 겪었던 이전 상황의 연속으로 여긴다. 배우는 전체 무대상황에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도록 집중력과 감각을 키워야 한다. 또 온갖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을 감정이입의 방법으로 관찰함으로써 무대 위의 행동과 반응은 관객이 믿게끔 꾸며낸 것이라기보다는 실제 세계의 한 부분으로 보이도록 폭넓은 정서적 범위를 개발해야 한다. 이 연기방식은 사실성을 강조하나 스타니슬라프스키 방식의 지지자들은 이 방식에서의 훈련이 실생활보다 더 폭넓고 자유로운 연기가 요구되는 고전극에도 적합하다고 주장한다.연기자의 내적 충동에 기초하여 배역을 해석하기 때문에 연극의 일부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 연출가들은 공연의 방향 조절에 위협적 요소가 될 수 있다면서, 이 방식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많은 연출가들은 특히 공연연습중에 생각지도 않았던 면을 등장인물이나 극적 행동에서 발견하기에 이 방식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소련을 제외하면, 스타니슬라프스키 방식이 가장 널리 활용된 곳은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에 이 방식이 실험되기 시작하여 많은 학교와 뉴욕 시의 유명한 액터스 스튜디오와 같은 전문 극단에서 실험이 계속되었다.모스크바 예술극장과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19세기말 유럽 각국이 앙드레 앙트완느의 에 자극 받아 사실주의 연극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단체코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새로운 사실주의 연극 양식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이 극단은 삭스-마이닝겐 극단의 순회 공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단체코가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는데 사실주의 뿐 아니라 여러 양식의 공연을 하였으나 그 주요한 업적은 체홉의 작품들을 무대 위에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하였다는 점이다.체홉의 희곡은 작가의 자기 주장이나 교훈, 사상을 배제하고 있으며 플롯이나 클라이막스, 흥미를 끌만한 사건 조차 없다. 이렇게 다소 헐겁게 이어진 구성법은 오스트로브스키 이래로 시작된 러시아 희곡의 특징으로서 체홉에 와서 완성된 것이다. 이것을 보통 '심리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앙트완느가 정교한 외면적 사실주의를 추구한데 반해 인간의 내적 심리 파악을 추구하는 내면적 사실주의로 방향 전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스타니슬라브스키는 이러한 체홉의 작품들을 무대 위에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독창적인 연기법을 개발해 냈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궁극적으로 역할과 배우 자신의 내적 심리적 동일화를 꾀함으로서 무대를 생활 환경으로 역할을 생활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배우는 '정서의 기억(emotion memory)'을 발달시켜 자신의 일상 생활 속의 경험 가운데서 맡은 역할의 그것과 흡사한 감정과 심리를 극중 인물에 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은 지금까지 배우 연기술의 기본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삭스-마이닝겐 극단의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체홉의 작품을 형상화 하는 가운데 외면적 사실주의로부터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는 심리적 사실주의로 연극 세계를 심화해 갔다. 한편 스타니슬라브스키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현대 연기술의 기초가 되고 있는 그의 독특한 연기법을 개발해 내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앙트완느와 그의 의 영향이 이미 시든 뒤 까지도 오랫동안 유럽의 여러 극단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우리가 공연한 작품들의 또 다른 방향은 직관과 감각의 흐름이다.스타니슬라브스키 자서전에서 말하는 심리적사실주의(책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므로 두서가 없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우리가 공연한 작품들의 또 다른 방향은 직관과 감각의 흐름이다.우선 체홉의 가 이 흐름을 열었다.이책에서는 체홉 희곡들의 공연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오히려 그 내용을 언급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체홉 작품의 매력은 공연된 내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데 있다.그것은 대사가 감추고 있는 침묵 속에, 배우들의 눈빛 속에 배우들이 발산하는 내면적인 느낌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들이 무대 위의 죽어 있는 것들에 숨을 불어 넣는다. 단어들이, 소품들이, 배우가 창조하고 있는 역들이, 희곡의 분위기가, 전체 작품이 살아나는 것이다.??직관과 감각의 방향은 체홉이 일깨워 주었다.체홉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신의 영역에 천착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의 작품을 연기할 수없다.?....?체홉의 작품은 단번에 시적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체홉의 역들은 대부분 전체 구성이라는 실에 꿰여 있지 않은 조역 같다. 작품속에 있는, 작품과 무관한 대사나 장면을 떠올려보라.
1.아일랜드와 우리나라의 유사점자기 민족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순결하며 뛰어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 자신들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그리고 실제로 강대국 곁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 등 두 나라간에는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닮은 구석이 많다. 대서양의 동쪽 끝 브리튼 섬 옆에 위치한 아일랜드 섬은 유럽의 변두리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도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한반도와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옷 잘 입는 아이누’, ‘두발로 서서 걷는 원숭이’라는 한국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듯이 잉글랜드 사람들도 ‘하얀 검둥이’, ‘하얀 침팬치’의 이미지로서 아일랜드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30년 정도쯤 해서 독립) 아일랜드는 ‘분단국’이라는 의미에서도 우리와 친영성을 보여준다. 1920~1922년간 진행된 영국과 아일랜드 조약이 맺어졌는데 이때 신교도 수가 우세한 북부의 얼스터 지방은 영국의 한 부분으로 남고 그 외 지역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딴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다.2.싱그(John Millington Synge, 1871~1909)-아일랜드의 소재를 아일랜드의 특수한 언어로 표현한 작가“이 땅은 우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게 해 줄 극을 필요로 한다.”1871년 더블린 교외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난 싱그는 몸이 허약하여 대학 입학 전까지 가정교사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 불친은 싱그의 탄생 1년 후에 사망, 그는 엄격한 신교자였던 모친밑에서 자라났다. 그는 모치의 철저한 칼뱅주의(프랑스의 신학자 칼뱅의 종교 개혁 운동에 바탕을 둔 기독교 교의 엄격한 성서주의, 신의 절대적 권위, 예정설, 깨끗한 신앙생활 등을 그 내용으로 함)적 생활 태도에 싫증을 느낀 듯 기독교를 포기했다. 그 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 어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얻었다. 특히 게일릭어와 헤브류어에 능해 특상을 받기도 했다. 생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음악에 대한 관심은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자연, 음악성의 토대가 되었다.원래는 음악가가 될 작정을 하고 독일로 가서 학업을 닦았으나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여행하여 문학과 가까워진 동안에 국민극 운동을 하고 있던 예이츠의 권유를 받아 아일랜드 서부의 알랭제도로 돌아가 원시 생활을 하면서 아일랜드 방언을 수용시킨 영어를 구사하여 비애와 유머가 섞인 시적세계를 창출해냄으로써 아일랜드 국민극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다음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하에 프랑스 문학을 일생의 업으로 삼으려던 싱그에게 한 아일랜드 민족극의 선구자 예이츠의 충고 내용이다.예이츠의 충고-“파리를 포기하게. 자네는 라신느를 읽어서는 창조적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일세. 아란 섬으로 가게. 거기서 사람들 속에 묻혀 살아보게. 그곳의 삶은 문학으로 표현된 적이 없네.”예이츠의 충고를 받아들인 싱그는 1898년에서 1902년 사이에 아일랜드 서쪽 해안 걸웨이에서 30마일 떨어진 아란 섬을 몇 차례 찾아 그곳 사람들과 생활을 같이 하며 그들의 순박하면서도 신비에 찬 생활을 관찰하고, 그들의 특수한 언어를 수집, 이것을 바탕으로 주옥 같은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싱의 첫 번째 극 『골짜기의 그림자(또는 계곡의 그늘)In the Shadow of the Glen』(1903)는 당시 아일랜드민중에게는 충격이었다. 사랑없는 결혼 생활을 버릭고 떠돌이 남자를 따라나서는 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이 작품은 많은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담이지만 1903년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너무도 현실적이고 그의 언어는 너무도 토속적이어서 청중들은 그 극의 현실의 묘사가 아니라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작된 것이라고 믿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아일랜드 여성에 대한 모독”, “어떤 아일랜드의 농부의 아내도 남편을 속이지 않는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자들은 ‘민족의 명예’라는 명분 하에 모든 아일랜드 사람들은 용감한 애국자이고 모든 아일랜드 여성은 덕의 화신이며, 나라에 대한 주저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영광이라는 주장을 모든 작가들이 따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싱이 극을 쓰면서 염두해 둔 것은 이러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문화적 민족주의였다.『골짜기의 그림자』보다 더 큰 소동을 야기한 것은 싱의 다음 희곡『서쪽 지방의 한량』이었다. 극의 줄거리는 메이요 주의 어떤 마을에 나타나 아버지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젊은이가 마을 사람들의 존경심을 얻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극을 풍자적 소극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허무맹랑한 사건 속에서도 인간의 약점을 웃음 속에서 끄집어 내면서 그 약점을 오히려 관대하게 포용이라는 싱그의 인간애가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반어적 재생과 좌절된 로망스, 그리고 오이디푸스적 갈등이라는 주제를 일련의 희극적 역전을 통해 제시한 이 극은 구어체의 걸작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이라면 이 극은 아이랜드 민족주의자가 지니는 감상적 이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태한 농부들의 삶을 풍자한 것이다. 이 극은 진실로 위대한 역작이었지만 청중들은 이 작품을 감당할 수 없었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아일랜드 농부들을 폭력과 살인을 용인하며 저속하고 조잡스럽고 편협한 무리로 거칠게 묘사하는 것에 격양했다. 아일랜드 민족을 위한 연극이 아일랜드인에 의해 그처럼 공격을 받은 예는 드믈다.싱은 아일랜드 시골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전혀 색다른 방법으로 다루었다. 거칠고 무질서한 농부의 삶은 그에게 지속적인 경외의 근원이었다. 그는 아일랜드를 알고 있었고 사랑했으며, 그의 극들은 시적이면서 강렬한 관용어, 난폭함, 그리고 농부들의 거칠면서도 풍요로운 성격이 주는 기쁨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문제는 싱이 그린 아일랜드 농민이 생각한 이미지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싱 역시 아일랜드의 농촌을 이상화했지만, 그는 아란섬에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아일랜드 영혼의 신화와 그들의 열정적이고 무자비하며 거친 영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반면 민족주의 이론은 가톨릭적 경건함과 물질적인 잉글랜드에는 아일랜드의 영적인 내적 우월성을 통해 농민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일랜드 농민의 실상은 ‘켈트의 여명’이나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만들어놓은 석고로 빚어진 성인상이 아니라. 싱의 극이 그리고 있듯 수세기에 걸친 무시와 억압에 의해 타락하고 미신적이며 폭력적인 모습에 더욱 가까웠다.싱그는 교훈적 연극을 지양했다. 또한 있는 사실(reality)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연극에는 이와 더불어 희열(joy)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희열이란 신성과 수(獸)성의 표현인 숭고함과 거친 것을 동시에 경험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이미 선택된 어휘를 쓰지 않고 잊혀졌던 방언 또는 속어를 구사, 시어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에 의하면 극이란 관객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주어야 하며, humour라는 자양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싱그의 극에 대한 신념은 그 후 아일랜드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예이츠느 싱이 죽었을 때 그를 근대 아일랜드 문학의 첫 번째 순교자로 표현하였다.그는 아일랜드에서 그 나라가 발견되기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가 발견한 대로 아일랜드를 제시함으로 그의 의무를 수행했다.2.오케이시(Sean O'Casey, 1880~1964)-아일랜드의 실상을 고발Sean O'Casey는 1880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13형제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이 가운데 8명은 어려서 사망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종교적 배경과 건강 때문에 outsider로서 지내야 했다. 대부분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이 캐톨릭교도인 반면에 O'Casey의 집안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캐톨릭교도인 가난한 이웃에게 소외되었고, 부유한 개신교도에게서도 소외되었다. 심한 가난과 눈병 때문에 정규 학교 교육을 3년밖에 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학교에 다니거나 친구들과 놀 수도 없어서 친구로부터도 소외되었다. 그러나 14살 때 누이가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비범한 암기력을 보였고, 가끔 아마츄어 극단에 출연한 형의 영향을 받아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O'C asey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으며 날품팔이, 부두 하역부 등의 막노동판 노동자로서 지내야 했다. 그의 관심은 자연히 노동자로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쏠리게 되었다. 그는 1906년에서 1914년경까지 아일랜드의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된다. 또 노동운동에도 관심이 있어 노조 파업을 지지하기도 했고, 공장폐쇄된 가족들을 후원하는 단체인 Women and Childeren Relief Fund의 서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Ilish Citizen Army에도 가입했었으나 구성원들이 세계의 사회주의에 보다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헌신하는 바람에 환멸을 느껴 곹 탈퇴하였다.O'C asey는 40세의 극작가가 되었다. Abbey극장에서는 그의 The Shadowof Gunman을 1922년에 받아주었고 1923년에 공연되었다.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었을 때 극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의 초기 세 편의 극은 격동의 시대인 아일랜드 독립운동 전야의 더블린 빈민층을 소재로 하고 있다.The Shadowof Gunman , 주노와 공작, 쟁기와 별-이 초기 그은 오케이시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며 그의 전체 극가운데서도 성공작으로 인정되고 있다. 주노와 공작은 대성공을 거두어 아비극장을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구해주었고 이 주일 동안이나 만원 사례를 이루었다. 1926년에 공연된 쟁기와 별은 국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로 폭동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부활절 봉기를 비영웅적인 극으로 다룬 이 극은 용납할 수 없었고, 술집에 공화군의 깃발을 세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도덕주의자들의 입장에서도 매춘부를 다루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