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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90년대 한국정치경제
    1950~90년대 정치·경제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의 주역인 열강들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국토가 분단되면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이어 4차례에 걸친 회담은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던 즉각적인 통일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남쪽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으로한 대한민국 정부, 북쪽에는 김일성이 이끄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소련의 도움으로 최신무기를 앞세운 북쪽의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 시키려는 의지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하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9월 15일)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다.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고 1951년 7월, 개성에서 1차 회담(정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개성이 38선 이북에 있다는 점을 이유로 유엔군측은 새로운 회담장소를 원하게 되었고 이에 소련군측은 유엔군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1년 10월,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민족의 동의 없이 분단된 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6.25전쟁이 가져온 피해는 우리 민족이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참담한 것이었다. 3년 동안의 전쟁 중에 남북한 합쳐 대략 600만 명 정도의 인명피해(사망, 부상, 실종을 포함하여)가 발생하였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를 대략 3,000만 정도로 추산할 때 5명당 1명 즉, 한 가구당 한 명 꼴의 피해가 발생한 셈이다조가 줄어드는 것과 함께 경기도 불황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57년 3억8,000만 달러였던 미국의 원조는 1958년 3억 2,100만 달러, 1959년 2억 2,0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실업률도 증가하여 1960년의 실업률은 34.2%에 달했다. 1957년 보건사회부 조사에 의하면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만 153환이었는데 세대 당 생계비는 4만 509환이었다. 노동자의 1/3이상이 결핵 등 만성 질환에 시달렸다. 이러한 사정은 농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선거에서 공공연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온 국민의 분노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마산에서부터 대규모 시위가 터져 나왔고 4월 19일부터 각 대학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곧이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당시 미국식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군대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장기집권에 대해 점차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나라의 운영에 대해 자신들의 위상에 맞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이끌 세력은 군인들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군인들이 늘어나면서 군 내부에서 쿠데타의 기운이 조금씩 무르익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군인들이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고는 바로 국가 권력을 탈취하였다. 합법적 정권을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취약한 정통성의 문제를 반공과 경제개발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박정희는 우선 4·19혁명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민중의 통일 논의와 교원노조운동 등을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 대거 구속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와의 효과적인 투쟁이라는 명분 하에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정권 유지의 도구로 삼았다. 그러면서 선건설 후통일이라는 명분 하에 대대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하였다. 문제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의 문제였다. 국내에서의 자금 동원이 불가능한 만큼 외국에서 유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미국뿐만 아니라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에 목말라 있던 박정희로서도 절실한 문선거에서도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2/3를 넘는 129석을 확보했다. 개헌을 추진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하자 박정희는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장기집권을 위해 1969년 박정희는 3선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4.19의 주체세력인 학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이 개헌을 저지하기 위하여 나섰다. 그러나 1969년 9월 14일 3선개헌안은 국회에서 공화당 국회의원들만 모인 가운데 날치기 통과되었고, 이어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77.1%의 투표에 65.1%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한국 사회도 변하기 시작했다. 수출 주도의 외자의존형 경제 성장은 우리 경제의 대외 의존성을 심화시켰다. 생산원료와 중간재를 수입하여 조립, 가공, 수출하는 경제구조 하에서는 수출이 늘면 늘수록 수입도 따라서 늘 수밖에 없었다.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차관은 자본수입국에 의해 그 쓰임새가 지정되었으며 원리금 상환을 위하여 수출도 강제되었다. 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한국경제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권에 깊숙이 편입시켰다. 또한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도 변하기 시작했다. 농업 인구가 급속히 감소했고, 노동자 특히 제조업노동자의 수가 증가했다. 농업 인구는 1960년 총인구의 58.3%에서 1970년 44.7%로 감소하였다. 1960년 전체 취업노동자의 수는 153만 명으로 그 중 제조업노동자는 19%인 30만 명이었으나, 1970년에는 전체 취업노동자 390만 명 중28.2%인 111만 명이 제조업 노동자였다. 특히 여성노동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수출의 주 종목이 섬유산업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위주였기 때문이었다. 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해갔다. 노동집약적인 수출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위한 정부의 저임금정책은 필연적으로 저곡가정책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농업에 대한 상대적인 저투자와 함께 농촌 전반의 해체를 가져왔다. 공업화 정책으로 도시에 상대적으로 많은 취업 기회가38.6%에서 1980년65.9%에 달했다. 한국 경제의 취약한 대외의존도는 1973년과 1979년 발생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 때 한국 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원유도입액은 1972년 2억 7,700만 달러에서 1974년 9억 6,600만 달러, 1975년에는 12억 7,1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물가상승의 압력으로 작용하여 3차 5개년 기간 중 물가상승률은 연 20.1%였고, 1973년 석유위기 직후에는 무려 42.1%까지 올랐었다.도시와 농촌간의 경제적 격차가 확대되어 정부는 낙후된 농업과 농촌을 개발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71년에서 82년까지 새마을운동에 투자된 금액은 5조 2,583억원인데 이 가운데 정부가 51%를 투자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점차 소득증대분야, 생산기반조성분야, 복지후생분야, 정신계발분야로 확대되었다. 이와같은 투자로 농가소득이 증가하여 71년에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소득의 79%에 불과했으나 82년에는 103%로 도시근로자소득을 상회하기도 하였다.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였다.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하자 시민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서 시위는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시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이튿날인 17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세무서, 언론사까지 공격하였다. 18일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나, 이번에는 마산에서 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10월 26일 저녁 궁정동에서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이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7년을 버티던 유신체제가 붕괴하였다.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권력은 공백상태가 되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여 11월 10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후 민의를 수렴해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하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는 중 12월 12일 비상계엄으로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군부 내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났다전두환 정권이 평화적인 서명운동마저 탄압하였지만, 3월 30일 광주에서 열린 개헌추진위 결성대회에는 무려 30만 명의 시민이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민주화를 외쳤다. 5월 3일의 인천 개헌추진위 결성대회를 계기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나섰다. 민통련을 강제 해산시켰고, 수많은 민주 인사들을 감옥에 가두었다.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일이 일어났다. 경찰은 사건을 날조하려하였으나 부검에 참여한 의사의 증언으로 물고문에 의한 것임이 알렸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으나 아직 거리로 뛰쳐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4월 13일 전두환은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차기 정권도 간접선거로 치르려는 것이다. 사회 각계에서 이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이 김승훈 신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리고 28일 종교단체와 민통련, 양 김 씨 등 민주화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향린교회에서 출범식을 가졌다. 6월 10일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명 받고 청와대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6월 29일 노태우는 대통령직선제를 전면 수용하겠다고 선언을 발표하였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노태우가 전체 유효투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980년의 GNP성장율은 -4.8%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 노동통제부터 강화하였다. 1970년대 민주노동조합이 강제 해산되고 제3자 개입 금지조항 등 노동관계법이 개악되었다. 그 결과 80년과 81년에는 실질임금이 감소하였고, 월간 총 노동시간은 1980년의 230.6시간에서 1986년 237.7시간으로 늘어났다. 더불어 중복과잉 투자된 중화학공업 분야에 대한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다.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중화학공업에 대한 구조 조정과 1986년부터 다다.
    경영/경제| 2008.09.17| 7페이지| 1,500원| 조회(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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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르조 데 키리코
    미술사학과 2학기임영진2008.4.14-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키리코와 입체파의 관계1911년경 파리는 입체주의와 추상의 다양한 현대주의가 태동하여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중이었으며 특히 아폴리네르를 중심으로 한 바토 라부아르 그룹이 1908년에 결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피카소의 초기 입체파를 거쳐 오브제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형상으로 분석하는 분석기 입체주의가 실험되고 있었다. 그러나 키리코와 입체파의 예술에 대한 접근방식은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건축에 대한 입체파는 ‘그림 그 자체의 건축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반해 키리코는 초기 작품들에서 ‘건축술의 그림’에 몰두한다. 둘 다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나 키리코는 입체파적인 의미나, 분석적인 의도, 논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진 않다.1913년에 종합기 입체파로 넘어가면서 빠삐에 콜레나 콜라주의 방식으로 작업을 한 피카소의 작품들과 키리코의 오브제를 쌓아 올리는 식으로 그린 방법은 표면의 통일성과 연속성의 전통적 관념과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입체주의의 쌓아 올리기는 추상적 구조로 나타나는 반면 키리코의 것은 알아볼 수 있는 요소들로 모아졌다. 그래서 키리코의 쌓아올리기 방식이 입체주의에서 유래되었는지는 모호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화실에서 쉽게 찾아 질 수 있는 오브제들 가운데 흔한 것으로 쌓여진 캔버스와 틀이 되는 것에서 유래한다.키리코와 미래파의 관계미래주의 운동은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창립선언’과 ‘달빛을 죽이자’라는 두개의 선언문을 가지고 1909년 밀라노에서 일어났는데, 그 내용은 기억되어지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종합이 심적 상태의 동시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각 오브제의 특이한 리듬과 다이나믹한 감각이 힘찬 선들에 의해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즉 그림이 설명적이 되는 것을 피하고, 미학적 경험으로써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지했다.미래파들과 키리코의 관계에 대한 비교 대립적인 분석은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가 고전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뒤집어 놓으면서 실제 진정한 현대 스타일에서 나온 현대적 경험을 전달하지만 미래파들은 비록 겉으로는 합리주의적 과학적 기술로 지향한 현대주의에 둔다 할지라도, 어떤 것은 키리코보다 더 과거로 소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적 언어와 정신에서 뜻밖의 시적 주관성이 깃든 작품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예술과 미래주의는 서로에게 예술적 성숙에 도달할 수 있게 간접적으로 도움으로써 한 동전의 앞뒤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1919년 형이상학 예술에 대한 설명에서 키리코는 자신의 예술의 속성으로써 상호 관계적이고 절대적인 움직임에 대한 보치오니의 베르그송적 관념을 채택한다. 베르그송의 관념은 도전적인 긴장이 섞여있는 현재와 미래의 역동적인 종합처럼 지속의 개념을 등장시키고 과거의 관념을 배제시킨다. 키리코의 시?공간에 넓게 펼쳐진 오브제들의 비합리적인 병치는 보치오니가 베르그송의 정신적 흐름과 지속과 유추를 묘사한 작품과는 상대물로써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에는 영원하고 상호 관계적 특성, 조형적인 고독 혹은 정물의 이차적인 삶으로 구성하고 키리코에 의해 기호들과 꿈들의 고독이라 불린 직관과 감정이입이 오브제를 뛰어는 것을 암시한다.초현실주의자들과 키리코1919년 이전에 키리코가 작업을 했던 형이상학적 회화의 몽환적 스타일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면과 일치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비합리성과 불가사의를 이용해서 의식적인 과정을 분열시키고 테러와 에로티시즘의 예술적 가능성을 개척함으로써 잠재의식의 활동을 해방시키기 시작했다. 키리코의 작업은 일종의 자기 분석이었는데, 꿈의 변하기 쉬운 장면들에서 잠재적인 생각을 점차적으로 재구성하는 대신에, 갑자기 화면에 꿈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광장, 조각상 등의 사물들을 묘사할 때 그것이 본래 갖고 있던 존재를 되찾아주기 위해 감각의 범위를 넘어 지각된 사실로써 우리들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결과로부터 그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초현실주의적인 오브제로 만드는 것이다. 키리코의 꿈의 스타일은 기억의 세계, 빛과 그림자가 햇볕으로 날카롭게 나누어진 세계, 폐허의 세계 등이 표현하는데 의식의 표면 아래 일상의 모습들을 넘어서서 더 깊고 진실한 세계가 놓여져 있는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이것저것의 결합하면서 구조적인 동시에 추상적이고 엄밀하게 정의된 도구들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상한 배합으로 인해 합리적인 원근법이 삭제되어 이 구조는 그 자신의 의미나 어떤 다른 것과 바꿀 수도 없이 불투명하게 나타나게 되고 재결합된 오브제들은 신비스럽게 되었다. 또 무의미한 존재들은 놀랄만한 새로운 형태를 가지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꿈의 해석으로 혼합된 환상과 환상적인 변형을 보여준다면 키리코는 그가 재현할 오브제를 변형하거나 수정하지는 않는다. 그의 오브제들이 수수께끼같은 결합일지라도 자서전적인 것이 도상적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예체능| 2008.09.17| 3페이지| 1,000원| 조회(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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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미술이 뉴욕으로 소개된 케이스
    미술사학과 2학기임영진2008.4.14-유럽미술이 뉴욕으로 소개된 케이스-ㆍ초현실주의의 및 미국으로 이주한 몇몇 화가들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과거 유럽 문화와 정치를 주도해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도 절정을 이루었던 이성주의가 결국은 파괴를 야기시켰다고 보고 그에 대한 반대를 표방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운동의 대변자로서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공표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경험의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수단이며, '절대적 실재, 즉 초현실' 속에서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적인 이성의 세계와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또한 시인이나 화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천재성은 일반적으로 미개발된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접근가능성으로 규정했다.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피에르 르베르디 등의 시는 전과정에 걸쳐 논리적이 아닌 심리적인, 즉 무의식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 생경한 단어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회화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뿐만 아니라 히에로니무스 보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전 시대의 화가들과 오딜롱 르동, 조르조 데 키리코, 마르크 샤갈 등 동시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인간심리의 탐구와 그 표현을 촉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적 연구와 실험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25년 파리에서 전람회를 열었으나 초현실주의의 역사는 제명과 탈퇴, 인신공격 등으로 얼룩졌다. 제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이 급부상하면서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는 피에트 몬드리안, 페르낭 레제, 앙드레 마송, 부르통 등이 이곳으로 이주면서 이러한 유럽 미술을 알리는데 주력하였다.막스 에른스트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독일 표현주의 화풍을 보인 그는 이미 유망한 젊은 작가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그는 "쾰른 다다 운동"의 주동자로 철저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예술에서 무의식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쟁의 대량 학살과 파괴를 복돋아준 기계 문명에 대한 환멸을 표현했다. 1922년 파리로 이주한 막스는 초현실주의 그룹을 형성했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아래 잠재하는 악과 폭력적인 요소를 탐구하며 잠재 의식 속의 이미지를 끌어내 묘사함으로써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존재임을 표현하려 했다. 그런 무의식의 이미지들을 끌어내기 위한 한 방법으로 막스는 "프로타주"와 "데칼코마니"라는 새로운 그림 기법을 창안해 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생겨나는 우연의 형태를 통하여 그것에서 연상되는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개발해 냈다. 그러면서 조국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한 날, 막스는 적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수용소 생활을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수용소를 탈출했다. 다시 망명국 미국의 끊임없는 추방 위협 속에서 그는 세계적 부호 미술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과 거의 강제 결혼하게 된다. 페기의 도움아래 뉴욕으로 망명하였지만, 결국 페기와 이혼하고 남은 30여년 동안 동반자가 될 절세 미모의 초현실주의 화가를 만나 뉴욕 근방 작은 마을에서 작품에 전념한다.호앙 미로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때까지 제작한 작품(공간과 시간에서 해방된 대형 정물화와 풍경화 및 일련의 환상)에서, 그는 묘사 대상을 자연스러운 문맥에서 차츰 떼어내어 수수께끼 같은 새로운 문법에 따라 조립함으로써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1925~28년에 그는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 및 파울 클레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그림에서는 초기의 구상적 요소가 좀더 확고한 형태 이용한 오브제를 도입해 완화시켰다. 1930년대에 이르자 미로의 예술적 지평은 차츰 넓어져 발레 무대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프랑스와 미국의 화랑에서 정기적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1934년에 그는 태피스트리를 도안했고 그것은 기념물과 벽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몇 년 만에 미로는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그의 조각과 드로잉 및 그림이 전시되었다. 1950년에 그는 하버드대학교에 벽화를 그렸다. 그의 도예에 대한 시도는 파리 유네스코 건물의 대형 벽화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작품으로 그는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이 주는 '국제 대상'을 받았다. 1962년에 파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의 미로 작품전을 개최했다. 그의 후기 작품들 중에는 미국 시카고와 휴스턴을 위해 제작한 대형조각을 비롯해 여러 점의 기념물 조각이 있다.살바도르 달리1924년 키리코와 카라의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의 영향을 받아 그 무렵에 제작하여 1925년부터 1927년에 걸쳐 마드리드 및 바르셀로나에서 발표한 그림은 다소 모순된 양식의 작품들이었지만 어느 것이나 매우 면밀하게 그려져 있다. 1928년 처음으로 파리로 나와 피카소와 쉬르레 알리즘의 작가 및 시인들과 교제하면서 1929년에는 파리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거기서 그는 독자적으로 개척한 환상 예술의 일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같은 해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1931년 "황금 시대"를 브뉘엘과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에 걸쳐서는 "기억의 잔재", "하프의 명상", "안젤라스" 등 중요 작품들을 발표하였는데, 이미 그는 비합리적인 이상한 환각을 객관적, 사실적으로 나타내는 독자적 화풍을 확립하고 있었다.1930년에 간행된 저서 "보이는 여자 La Femme Visible"에서 그는 그러한 자기의 화법을 '편집광적 비판적 paranoiac critical 방법'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편집광적 환각의 하나로서 이중(二重계,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와의 사이에 육체적 장벽과 정신적인 장벽을 동시에 제거하고, 현실과 비현실 및 명상과 행위가 서로 합하여 혼합되어 전 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제 1차 세계대전 후의 사조들에 전염되지 않은 새로운 나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일기 시작하면서 1934년에는 시인 로트레아몽(1840~1870)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의 삽화를 그린 뒤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다. 미국은 그의 정신적 차원에서 부족한 모든 것을 편집증적 작품들로 채울 것이라는 기대하에 뉴욕현대미술관 관장 알프레드 바를 만나면서 더욱 그생각은 빛을 바랬다. 1940년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이듬해인 1941년에는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대(大)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계속 미국에 머무르면서 1942년에는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숨겨진 생애"를 간행하였으며 1950년에는 '잉태한 성모'를 다룬 새로운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브르통 일파의 쉬르레알리스트들과는 일찍부터 교제를 끊고 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상업 미술 분야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 및 발레 등에도 관심을 나타내어 무대 장치, 의상 등의 방면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겨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ㆍ뉴욕에서 유럽 미술을 알리게 되는 일들스티글리츠 그룹 (1902-1946)스티글리츠는 유럽 미술을 미국 미술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모델로 보고 유럽의 문화를 소개하는 대사 역할을 하였다. 1902년에 사진분리파(Photo-Seccession)를 조직하면서 미국의 사진 미술을 새로운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교육을 목적으로 출간하는 잡지를 만들었다. 1903년 창간한 『카메라 워크(1903-1917)』라는 잡지는 매우 세련된 글꼴과 레이아웃, 그래픽을 사용하여 당시 미국에서 발행되던 잡지아는 근본적으로 다른 디자인상의 우아함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사진도 세심하게 선정된 색깔의 마분지에 일일이 손으로 붙여 당시 잡지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다른 예술적 차별리츠에게 있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새로운 미국적인 미술은 테크놀로지를 매체로 한 미술, 즉 사진을 통해 가능하였는데 사진을 현대성의 코드로 제시하면서 도시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291’갤러리를 통해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을 소개하기 시작한 경위를 사진의 예술화를 이루고자하는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후에는 로댕의 드로잉전, 마티스전등을 개최하고 이어서 피카소, 브랑쿠시, 세잔의 작업들이 뉴욕으로 건너와 처음으로 유럽 모더니즘 미술이 전시되고 알려지기 시작하였다.아모리 쇼아카데미에서 전시를 거부당해 헨라이 그룹이 열었던 전시가 이었다면, 는 헨라이 그룹이 자신들의 그림을 판매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의 공식적인 주최측인 미국 화가와 조각가 협회(AAPS)는 헨라이를 비롯한 그룹의 중심인물, 즉 슬로언, 신, 글래킨즈, 럭스, 아서 데이비스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데이비스가 회장을 맡은 조직체였다. 전시 이후에도 국립미술학교가 표방하는 편협한 기준들에 반대할 목적으로, 그간 새로운 미술을 소개해 오던 ‘291’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미국과 유럽의 현대미술을 대대적으로 알릴 굉장한 규모의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1913년 2월 17일 뉴욕의 렉싱턴 애비뉴 25번가 305번지에 소재한 제 69기병대의 병기창고에서 전시 장소의 이름을 따 로 불리는 국제 현대 미술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낭만주의 이후 현대를 망라하는 약 400여점의 작품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들라크루아, 앵그르, 코로, 쿠르베,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 세잔, 로댕, 브랑쿠시, 피카소와 브라크 같은 입체파, 상징주의 작가들인 르동과 샤반, 키르히너 같은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과 칸딘스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는 열리기도 전부터 신문이나 잡지들에 소개되고 여러 모양새로 선전되었는데,『뉴욕 타임즈』와 『선(Sun)』잡지, 당시 가장 진보적인 미술 잡지로 평가받던 스티글리츠의 『카메라 워크(Camera Wo가)』등에서 소개되었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 였다.
    예체능| 2008.09.17| 4페이지| 1,000원| 조회(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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