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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제 문제점과 개선방안
    호주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목차》Ⅰ. 머리말Ⅱ. 호주제 폐지 논의의 경과Ⅲ. 호주제의 문제점Ⅳ. 호주제 폐지와 외국의 호주제Ⅴ. 호주제의 개선방안Ⅵ. 맺음말Ⅰ. 머리말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가부장제 가족제도, 즉 이른바 종법제를 그 基幹으로 하여 가족생활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종법제는 봉건적인 토지경제와 유교적인 사상에 근거를 둔 사회제도를 기초로 하여 특히 조선조 500년간에 서서히 뿌리를 박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제 가족제도의 특징은 바로 한 가족집단에는 반드시 가장, 즉 戶主가 그 가족원을 통솔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지배와 복종의 규율만이 존재할 뿐이며 또한 그것은 남성 중심이기 때문에 남존여비의 사상에 투철하다.물론 이러한 가부장제 가족제도는 그 근거가 되는 봉건적인 토지경제체제의 붕괴와 그로 인한 봉건적 사회제도의 붕괴로 가장의 권력이 위축되어 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그 봉건적인 토지경제체제를 농촌에 간직하고 있고, 이에 따라서 봉건적 예속관계가 아직도 많이 유지되고 있다. 도시에서는 물론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가지게 됨으로써 봉건적 예속관계는 약해졌다고 하지만, 가족원의 경제적 독립이 곤란하기 때문에, 그곳에도 역시 가부장제 가족제도가 존재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가족제도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되는 경제구조에 있어서나 사회제도에 있어서 가부장적인 특징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법도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가부장제가족제도의 테두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전연 눈을 감을 수 없었기 때문에 민법은 제정 당시 호주를 중심으로 하여 縱的으로 연결되어 나가는 봉건적 가족제도를 그 基幹으로 삼으면서도 종전에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던 호주의 권력을 대폭 약화시키는 동시에 남자에게만 속하였던 호주상속권을 2차적으로나마 여자에게 일정한 경우에 잠정적이 아닌 호주상속권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을 서로 분의 문제점을 알아보기에 앞서 호주제 폐지를 두고 어떠한 논의가 생겼는지 그 경과를 먼저 살펴보고 지나가도록 하겠다.호주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란은 민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미 민법 제정과정에서 호주제를 비롯한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古來의 美風良俗이니 유지하자는 관습존중론과, 이는 헌법의 민주주의와 평등조항에 위배되니 폐지하자는 헌법존중론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회는 입법 방침에서 家제도가 소규모 가족으로 변화한 현실에 뒤떨어져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家제도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강력한 호주권을 인정하며 호주상속제도를 유지하는 한편 모의 친권을 제한하는 등 봉건적 요소를 잔존시켰다. 그 후 1974년 민법 중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친족상속법 개정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1977년 12월 17일 가족법의 일부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호주제 관련 규정은 이에 포함되지 아니하였고, 1990년 1월 13일에야 호주상속을 호주승계로 바꾸고 호주의 권리의무를 대폭 삭제하며 호주권을 축소하는 개정이 이루어졌다.그 후로도 호주제폐지 논의가 끊이지 않았고, 1998년 정부 주도의 민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는 일제의 천황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호주제도의 존치로 인한 가부장적 국민의식의 잉태연원을 삭제하며 헌법상의 가족정책 이념에 배치되는 호주제도를 삭제하여야 하고 家관념이 퇴조하고 변모된 호주의 위상에 부합하고 현대산업사회의 생활현실에 부합하며 세계적인 입법추세에의 낙후성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호주제폐지를 합의하고, 1999년도 정기국회에 호주제폐지의안을 상정하도록 정부에 건의한 바 있다.또 1999년 10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인권규약에 따른 우리 정부의 정기인권보고서를 검토한 후 호주제를 존속시키는 등 남녀가 위 규약에 명시된 모든 권리들을 동등하게 향유할 권리와 법의 동등한 보호를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가 전반적인 사회적 태도로 인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에게 종속시켜 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부정하고 일률적으로 순위 지워 평등한 가족관계에 위배된다. 자녀는 출생하면서 父家에 입적하여야 하고 혼인 등으로 분가하지 않는 한 아버지의 호적에서 나올 수 없고(민법 781조 1항), 여성의 경우 혼인하면 夫家에 입적(민법 826조 3항)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은 혼인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인 호적에, 결혼하면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호주인 호적에 올라야 하는 예속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둘째, 호주승계순위를 아들-딸(미혼)-처-어머니-며느리 순으로 정해놓아 아들선호를 조장하고 있다. 아들을 1순위로 하는 호주승계제도는 아들이 딸보다 더 중요하다는 감정이 내재된 것으로써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남아선호사상을 부추기고 있다. 남아선호는 여아낙태라는 반생명적인 현상을 낳고 있으며 그 결과 인구 구성의 균형을 깨뜨려 초등학교에는 여자 짝이 없는 남자아이들이 늘어나고 이들이 성장하면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는 남성이 늘어나는 등 사회문제가 예상된다. 또한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린 아들이 호주가 되는 경우, 할머니와 실질적인 가장인 어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들이 호주가 되어 형식적으로는 어린 아들이 가족을 대표해야 하므로 현실의 가족질서와도 맞지 않는다.셋째, 부성강제계승을 통한 가족제도 유지는 다양해지는 가족형태를 반영하지 못해 한부모가족, 재혼가족을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만든다.) 자녀는 출생하면서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고(민법 781조 1항), 예외적인 경우에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이러한 부자동성 원칙은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어머니의 재혼으로 부자간에 성이 다른 가족을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보게 한다. 선진국에서는 부부의 협의에 부부동성을 사용하고 자녀의 성도 부, 모의 협의에 의해 선택할 수 있다. 부성강제조항은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 제 16조 ‘가족성씨 선택의 자유권’에도 위배되는 조항으로 우리나라가 이 조항을 비준하지 않고 있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넷째,며 호의 대표는 있었지만 호의 대표인 아버지가 사망하면 어머니가 그 뒤를 잇는 일이 조선 후기까지 일반적이었으며 조선 중기까지는 딸, 아들이 똑같이 재산을 상속받고 제사도 형제자매들이 나누어 지냈다. 우리나라에 호주제를 이식한 일본은 1948년 호주제를 폐지했고 중국도 호주제는 없다. 따라서 호주제는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강제 이식한 외래적인 제도이고,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은 가족 간의 평등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Ⅳ. 호주제 폐지와 외국의 호주제지난 2003년 5월 27일 국회의원 52명이 발의한 호주제 폐지에 관한 민법중개정법률안의 주요 골자를 보면 호주에 관한 규정(778조)을 삭제하고, 호주를 중심으로 그 家에 입적한 자를 가족으로 규정(779조)하는 것은 실제 가족공동체와 전혀 부합하지 않으므로 삭제하며 戶主承繼制度(980조 내지 982조, 984조 내지 987조, 989조, 991조 내지 995조), 父家入籍制度(826조 3항 및 4항) 등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성을 강제하는 781조를 삭제하는 대신 제 865조의 2를 신설하여 자녀의 姓 선택시 원칙적으로 부계혈통만을 강제했으나 자녀의 姓과 本을 결정함에 있어서 부모의 협의에 의해 父 또는 母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고, 자녀의 복리를 위해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는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가정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였다.그렇다면 외국에서는 호주제도가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비추어 우리나라 호주제도에 대한 대안을 얻어 보도록 하자.)일본은 전쟁 후 민법개정을 통해 호주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부부와 미혼 자녀를 기본으로 하는 호적을 창설하였다. 즉, 혼인을 하면 부부는 하나의 성씨(부부동성제도)를 쓰고, 호적은 부부와 그들과 동일한 성을 가진 자녀로 편제(동성동적원칙)한다. 그리고 혼인한 모든 자녀는 호적을 새로 편제(3대 호적금지)하도록 되어 있다. 자녀의 성은 부모 성 중에 선택(가족 수도 있다.독일은 개인별, 사건별 편제방식에 따라 출생?혼인?사망의 각 사건마다 호적부를 작성한다. 따라서 출생부, 혼인부, 사망부가 존재하며, 각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기록하고 보관한다. 그리고 개인의 이러한 사항을 일람하여 파악하기 위하여 이러한 호적부 간을 연결하는 난외부기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나아가 가족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가족부도 작성하는데, 家族簿는 이사에 따라 함께 이전한다. 가족부는 혼인으로 개설하고, 부부와 미혼자녀의 신분사항을 기록하며 출생부, 혼인부, 사망부에서 가족부에 기록할 사항을 통지한다. 특히 독일신분법은 입양사실을 출생부, 가족부에서 분명히 하지만 법률상 당연히 그 공개를 제한하고 있으며, 가족부의 부모란에 양부, 양모라고 표시하지 않고, 부모로서 양부모를 기록하는 출생증서와 친부모를 기록하는 혈통증서라는 두 종류 출생증명서를 마련하고 있는 등 비적출자와 양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공개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자녀의 성은 부모가 선택할 수 있되, 자녀의 출생 1개월 이내에 합의가 없으면 후견재판소가 부모의 일방에게 결정권을 주도록 법에서 규정(1993 민법)하고 있다.프랑스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개인별, 사건별 편제방식에 따라 호적부를 편제한다. 프랑스는 호적제도로서 신분증서제도를 두고 있고, 출생증서, 혼인증서, 사망증서, 인지증서 등 다양한 증서들을 작성한다.) 이러한 증서에 기록한 사항을 일람하여 파악하기 위하여 역시 난외부기방법(프랑스 신민법)을 채택하며, 나아가 출생증서에 다른 증서사항을 난외에 대부분 부기하여 출생증서의 개인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가족관계를 파악하기 위하여 가족대장을 각 가정에 발급하여 보관하도록 하고 있다.스위스는 대부분의 서구유럽과는 달리 예외적으로 민법에 부부공동체 및 자녀의 복지를 위해 상호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둠으로써 부부공동 가장제의 원리를 채택하여 시행하고 있다.영국과 미국은 철저한 사건별 기록제도를 가지고 있어, 출생, 혼인, 사망에 따라 각각 증능하다.
    인문/어학| 2009.12.16| 6페이지| 2,000원| 조회(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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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
    제1장. 해방과 분단국가의 수립1. 해방해방 소식은 전국으로 감격의 물결을 이뤘으며 -심훈, -홍명희, -윤석중 등 시를 통해 그 감회가 어떠하였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해방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참여가 가능, 경제적으로는 미족 경제 활성화, 국제적으로는 세계와 대등관계, 사회적으로는 능력에 따라 출세할 수 있는 기회 확보, 문화적으로는 민족문화의 재발전과 발전을 의미했다. 해방을 기점으로 봉건적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며 민족주의가 발전하였다. 또 미?소의 개입으로 우리나라는 가장 발전된 사회?자본주의 체제를 직접 수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꿈같이 찾아온 해방은 우리에게 그저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만든 해방이 아니었으므로 우리의 권리주장을 할 수 없었으며 미?소의 군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건국이념이 좌절되었고 미?소의 군정(점령정책)이 실시되고 말았다.2. 남북분단과 군정실시- 국내 : 해방 당시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인 보호를 위한 인물이 필요하여 송진우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소련이 쳐들어 올 가능성을 보고 좌파인물인 여운형에게 부탁하자 여운형은 정치범 등의 즉시 석방, 서울 시민을 위한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을 방해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 활동에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들의 건설사업 협력을 방해하지 말 것 등 건준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제의를 수락하였다. 송진우가 건준 불참한 원인으로 6가지가 있는데 첫째, 친일세력이었으므로 총독부 관리의 요청대로 협조할 경우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힐 수 있었고 둘째, 일제 시기 때부터 벌였던 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은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체제적 성격의 대립이었다. 셋째, 협동전선운동 자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넷째, 미국과 중경 임시정부의 위력을 과신하였다. 다섯째, 동아일보, 경성방직, 보성전문학교, 중앙학원 등의 관계 인사들을 망라하면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하였고 여섯째, 노동자, 농민 조직 등 대중조직이 없다는 점이 대중역량이 있는 세력에 합류로 선언을 확인했을 뿐 한국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 결국 해방될 때까지 연합국은 신탁통치를 실시한다고 잠정적으로 합의했을 뿐이었다.미국이 소련에게 일본군 무장해제 군사경계선을 목표로 38선을 제안하였고 소련은 이를 쉽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소련은 만주와 산림이 목적이었고 동아시아보다 동유럽 땅에 중점을 두었었으며 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피해를 미국의 전후복구비 충당으로 만회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에 반대하여 분할되었고 힘 약화용 분할이었지만 한국은 지리적으로 세력 확보를 위한 분할이었다.45년 9월 소련 25군, 미국 24군이 한국에 들어왔고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소련은 간접통치방식으로 민정부를 두어 5도 행정국을 조종하였다. 당시 공산당은 토착세력, 소련파, 만주파, 연안파 등이 있었는데 소련은 김일성이 소속된 만주파와 결탁하였다. 46년 2월 김일성을 수장으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를 본 토착세력과 조만식을 비롯한 민주당세력이 반발하였고 조만식의 체포로 인해 모두 월남해버렸다. 공산주의가 이미 자리을 잡았고 후원만으로도 충분히 성장이 가능하였기에 48년 12월에 소련군은 자진해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직접통치방식으로 반공친미국가를 세우고자하였다. 미군은 한국인 고문을 두었는데 45년 말까지 한민당계열인들이 한국인 고문을 하였고 미소공동위원회로 인해 중도파가 하다가 47년 7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버리자 우파가 하게 되었다. 군사영재학교와 조선경비사관학교을 만들어 군인을 배출시켰고 경찰 기구의 강화로 물리적 강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11월에 미군을 전국에 배치하였고 미군은 한국인을 경계하고 일본인 관리들을 그대로 근무하게 했으며 일제 통치기구도 존속시키자 한국인들의 불만과 원성을 크게 샀다.3. 신탁통치안과 미소 공동위원회좌익은 찬탁은 합리적 통일방법이라 하며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였고 우익은 찬탁은 나라를 넘기는 것이라며 반탁을 주장하였다. 모스크바 3차 회담의 목적은 임시정부 수립임 가능하였으나 우익이 반탁을 주장하였기에 미국은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소공위는 미소공위에 협력한다면 과거의 반탁행위를 불문에 부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의대상으로 하겠다는 공동성명 5호를 발표했다. 계속 김구 등이 거부하자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면 반탁의 의견 발표를 보장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냈다. 이에 소련은 하지의 특별성명을 문제 삼았고 미소공위는 휴회에 들어갔다. 미소공위가 결렬된 것은 단독정부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미국은 좌익을 약화시키고자 하였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인해 남한에서 좌익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좌익들은 신전술로 대응하였으나 결국 자멸하고 말았다.제 2장 남북한의 성립과 6?25전쟁1. 대한민국의 수립(1). 남한 내 정치 세력의 동향 - 좌, 우, 중도파정치적으로 친일파 청산, 경제적으로 토지개혁이란 민족적 과제가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권력 장악만 하려고 하고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익 정치세력1). 이승만과 독립중앙협의회(후에 독촉국민회)이승만(1875-1965)은 황해도 평산에 태어났다. 계속 과거시험에 응하였으나 떨어지고 1894년 과거가 폐지되자 이승만은 바로 배제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가 감옥에 구속되었는데 탈옥하려하다가 잡혀 사형수가 되었으나 사면 받았다. 감옥에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1904년에 풀려났다. 미국 유학을 떠나 많은 학위를 수여하고 귀국 후 YMCA활동을 하였고 인정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탄핵받았다. 1913년에 미국으로 가 30년 이상의 이민 생활로 이승만은 국내기반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초당파적인 모임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 지지기반으로 삼았고 친일파청산을 두려워하여 이승만을 지원해주려는 한민당과 유대하여 정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1948년 74세부터 1960년 86세까지 대통령을 하였다.2). 한국 민주당(한민당, 송진우와 김성수)처음에 임정을 추대하였으나 임정 귀과 관련하여 감옥에 갔었고 신민회 활동하다가 1919년 상해로 망명하였다. 임정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45년 귀국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한독당의 당원이자 서북청년단 단원이기도 했던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1949년 김구는 사망하였다.임정을 기반으로 한 한국독립당은 반탁운동, 좌우합작과 남북문제를 해결하려하였고 단정에 불참하였다. 정권에 진출하지 않았던 한독당은 김구의 암살로 인해 맥이 끊겨버렸다.4).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 : 중도우파김규식(1881-1950) 동래 출생으로 87년 고아가 되자 언더우드가 돌보았다. 센브란학교, 경신학교를 거쳐 미국유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언더우드의 비서가 되었다. 1913년 망명하여 임정의 외교활동을 하였고 귀국하여 좌우합작, 남북협상을 이끌어갔다. 처음에 여운형과 합세하여 좌우합작을 추구했다. 여운형 사망 후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패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력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 170여개 중 8개 (표 참고)170여개의 많은 청년단체는 정치기반세력으로 이용, 정치참여에 대한 열의, 많은 실업자 발생 등이 원인이 되어 생겨났다. 이 청년 단체는 정치세력에 의해 몰려다니는 이합집산으로 미군정과 경찰 등 우익세력에 힘입어 노동운동, 4?3사건 등을 진압하였다. 주로 친일파, 지주, 월남인사들이 활동하였다.중도세력 -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건국준비기관으로 좌우합작을 추구하였다. 건준은 주로 치안대 조직, 식량대책, 강령준비를 하였다. 안재홍이 빠지면서 인공으로 바뀌었고 좌파중심이었다.* 좌익청년단체공산주의는 1920년대 초에 등장하였고 러시아는 이동휘와 미르크츠크파, 중국은 상해와 만주, 일본은 유학생을 통해 공산주의가 들어왔다.1)조선공산당(1925. 4)정식으로 소련에 승인받았고 28년까지 존재하였다. 책임비서가 일본인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4번 바뀌었는데 김재봉, 강달성, 김철수, 차금봉 순으로 명맥만 이어갔고 공산당으로서가 아닌 공산주의자로서만였다. 이들은 순수파로 변절자가 거의 없었고 해방 후 재건파가 된다.- 일월회(25.1) : 공산주의 사상단체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ML당(막스레닌당, 26) : 제3차 조공의 별명, 연원은 동경 일월회, 만주 공청, 서울신파 + 화요회계, 조공, 경서콤서울파가 핵심이었고 여러 당을 인위적으로 합쳐 결속력이 떨어졌다.- 해방 후 공산당(프린트 표 참고)1) 장안파 공산당45년 8월 16일 이영의 주도로 공산당이 만들어졌고 서울 종로 장안빌딩에서 만들어져 장안파라 불린다. 일본압제에 의한 전향자들이 많았고 후에 재건파에 흡수된다. 이들은 초기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했고 서울파 출신으로 나이가 지긋했다.2) 재건파 공산당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재건파를 만들었고 이들은 주로 순결파로 비전향자들이었다. 미군정이 체포하려고하자 북한으로 갔으며 남로당을 지지하였고 인민군 중장계급이었다. 후에 이들은 해방후 최초 정당인 조공으로 계승된다.3)조선인민당조공-장안파/재건파인민-좌/우신민당-통합 적극적/통합 소극적재건파, 좌, 통합 적극적 = 남조선 노동당 // 장안파, 우, 통합 소극적 = 사회노동당좌익청년단체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45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 학병동맹, 조선국군준비대로 치안대역할을 하였고 46년 전반에는 전국청년단체총동맹(청총)이 탁치지지파로 활동하였고 46년 후반부터 정부수립 전까지 조선미주청년동맹(민청)이 비합법적 투쟁을 하였다. 신전술로 인해 투쟁, 봉기, 파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무장야산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다.(2).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1) 좌우합작운동좌우합작운동은 45년 해방부터 46년 초에는 시도기였고 46년 중반부터 47년 말까지는 미구정의 지원으로 본격화되었다. 미군정에서는 버치중위, 선교사는 아펜젤러,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미군정은 급좌파를 고립시키고 미소공위를 타계시키기 위해 이를 추진하였고 한국은 임정수립과 내전방지를 위해 이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급좌와 급우의 반발, 미군이 단정수립만다.
    학교| 2009.12.16| 4페이지| 1,500원| 조회(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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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철학
    중국 고중세 철학 요점정리1. 철학사는 어떻게 기술해야하는가?철학사를 기술하는 것은 지나가 과거의 철학사상을 서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에 의거하여 서술해야한다. 하지만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과는 다르다. 철학가의 입장 및 사상을 서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러 철학가의 사상과 관계를 살펴보아야한다. 또한 각 철학가 사상의 지향방향을 파악하고 그의 이론을 분석 정리해야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철학 그 자체의 문제에 대한 절실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이러한 철학사는 내적인 심령세계와 외적인 문화성과가 포함되어야한다. 때문에 철학사는 다음의 세 조건을 만족시켜야한다. 첫 번째로는 사실의 기술의 진실성이다. 철학사에 기술되는 이론은 반드시 원저와 일치해야한다. 두 번째는 이론 서술의 계통성이다. 단순히 사상을 나열하기 보다는 이론적 구조 맥락을 명확히 표현해야한다. 세 번째로는 전면 판단의 통일성이다. 철학사를 기술할 때에는 일관된 판단원칙으로 표현하여야 한다.그러나 중국 철학사를 기술할 때에 많은 문제점과 마주하게 된다. 첫째, 중국 고대 서적이 너무 산만하게 되어있어 정리 작업이 쉽지 않다. 둘째, 표현방법이 격언이나 비유 우화 등을 사용하였기에 중국 철학을 이해할 때 쉽게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셋째, 중국철학은 고인들의 견해에 자신의 주장을 의탁하는 경향이 있다. 넷째, 중국철학은 서양철학과 다르므로 서양 철학의 연구 방법을 도입하였을 경우 본질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다섯째, 중국철학의 각 학파는 발원처에서 학문의 방향이 이미 경정되어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유의하여 신중한 철학사 서술을 하여야한다.2. 유가, 법가, 묵가, 도가에 대해 쓰시오.중국사상의 황금기는 춘추전국시대였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주의 왕실의 힘이 약화되자 제후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민심을 얻고자 했고 그 방책으로 각지의 현자를 등용하였다. 혼란한 사회상으로 인해 처음 제자백가사상들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전쟁기술 등이 주된 관심이었으나 전국시대 중기 이후로 접어들면서 천하 통일의 방법으로서의 ‘전쟁’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맞서게 되었다. 이들을 크게 나누자면, 전쟁을 불가피한 정치적 해결수단으로 생각하였던 주전론의 부류와 전쟁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반전론의 부류이다.법가가 주전론의 입장을 대표하였고 유가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전쟁인 의전론을 인정하였으며, 묵가는 공존을 해치는 침략전쟁을 비판하는 비전론을 대표하였다. 도가는 별애에서 나온 유가의 의전론이나 겸애에서 나온 묵가의 방어전이나 법가식 국가공리주의 등에서 벗어난 반전론을 주장했다. 즉 그럼으로써 유가는 제한된 질서를 추구하여 도덕을 강조하였고 법가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 부국강병을 추구하였고 묵가는 공리주의적 성격을 지닌 실용주의를 추구하였으며 도가는 개인주의를 표방한 무위자연을 추구하게 되었다.3. 공자가 말한 충서의 서와 기독교의 황금률을 비교하시오.공자가 말한 충서의 서는 ‘인이란 자기가 서고 싶거든 남을 세워 주고, 자기가 통달하고 싶거든 남을 통달시켜 주라. 늘 가까운데서 비유를 찾는 것이 인을 행하는 방법이다.’를 말한다. 가까운데서 비유를 찾는다는 것이 곧 자기 마음을 표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보다 더 가까운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면 남도 좋아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이면 남도 싫어할 것이니, 그러므로 자기가 서고 싶은 곳에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고 싶은 곳에 남을 통달시켜 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고 바람직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또한, 기독교의 황금률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내가 먼저 남에게 인격적인 대접을 하면 남도 나에게 인격적인 대접을 해 준다. 내가 존경을 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존경해야 한다. 내가 무시당하기 싫으면 남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모든 인간관계는 메아리와 같다. 내가 남에게 먼저 대접하면 언젠가는 그 대접하는 대로 자기에게 돌아온다. 먼저 선을 베풀면 반드시 자기에게 선이 돌아온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해결을 남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의 태도가 달라지면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위에서 설명했듯이 공자의 충서의 서와 기독교의 황금률은 약간 다르다. 둘 다 상대방을 배려하라는 이야기이지만 공자는 상대방의 마음이 자신과 같으므로 자신의 마음을 기준으로 하여 배려하는 말이고 기독교에서는 남을 배려해야 내가 배려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오묘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4.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긍정하는가?맹자는 인간을 금수와 구별하는 기준을 도덕으로 본다. 나 또한 금수와의 차별점으로는 인간은 사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본다. 특히 인간이 느끼는 측은지심 같은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느껴지는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들의 죄는 마음을 잃어버렸기에 행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나와 의견이 같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 할 수가 없다. 모두 다 선한데 갑자기 악이 출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두 선한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가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가정해 보았을 때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선함이 없다고 해서 악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은 성인과 같이 선하다고 긍정하다고 선의 평등은 주장하였는데 왜 신분평등사상까지는 도달할 수 없었는지도 의문시된다. 선을 잘 기르는 사람이 성인이고 선이 없는 군주는 바꿀 수 있고 신분제를 긍정한다면 가장 선을 잘 보존한 자가 군주가 되어야하고 마음을 잃은 자가 가장 천한 신분이 되어야 하지 않을 까 한다.5. 묵자가 주장한 겸애설의 난제는 무엇인가?묵자는 겸애의 실천만 강조하였지 겸애의 철학적 체계는 갖추고 있지 않았다. 첫째, 서로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로부터 발생하였는가? 그리고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인성론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변을 갖추고 있지 않다. 둘째, 묵자는 겸애가 치란의 근거로 제시하였는데 겸애만 하면 반드시 혼란이 없어지는가? 또한 모든 이들이 겸애 할 수 있는가? 즉 묵자는 검증도 안 된 겸애를 주장한 것이다. 셋째, 겸애는 정당한가? 묵자는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하였고 그것은 곧 천지가 정당하면 겸애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말했다. 하지만 천지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6.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가의 무위자연 사상은 어떤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을까?자연이란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것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며 무위란 자연스럽게 행하고 억지로 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위자연이란 우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인간의 욕망이 무리하게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며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만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발?발전이라는 이름하에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댐을 건설하고 공장을 만들고 운하 사업을 추진하는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급속하고 무분별한 개발에 의하여 생긴 환경파괴이다. 서양의 인간중심의 가치관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환경친화적 개발이 아닌 무분별한 개발을 해왔고, 또 그 결과로 환경파괴라는 것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무위자연을 통해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도가사상에 의하면, 자연계는 거대한 순환체계이고 그 속에서 만물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모든 개체는 완전하고, 서로 간에 평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도가사상에서 본 환경문제의 원인은 인간이 과학적 지식과 기술로 자연계를 조작하여 평형과 조화를 깨트림으로써 생태계가 파괴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생태계를 깨뜨리지 않도록 하여야 함을 뜻한다. 즉 현대에서 도가의 무위자연사상은 환경보호주장의 기반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교| 2009.12.16| 3페이지| 1,500원| 조회(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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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48년 38선 충돌의 특징과 성격
    1945~48년 38선 충돌의 특징과 성격- 목 차 -1. 도입2. 1945~47년 : 점진적 고양1) 1945년 2) 1946년3) 1947년 4) 전력문제5) 구암ㆍ예의저수지(연백저수지)3. 1948년 : 남북갈등의 격화와 전환1) 1948년의 특징 2) 원대리ㆍ구만리사건3) 옹진 은동리저수지 사건 4) 미군정의 대책1. 도입인위적인 38선이 한반도에 적용되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38서의 정확한 좌표판정 문제부터 38선 때문에 발생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자연지형의 분할 문제,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 군사적 문제 등이 발생했다.미군은 38선상에서 발생한 제반 문제를 통칭해서 경계선 사건이라 명명했다. 내용적으로는 사건의 성격을 충돌, 경계선 위반, 기습, 총격 등으로 구분했다. 가장 많은 경계선 위반의 ‘범인’은 남북한의 민간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선 위반이 곧바로 ‘사건’이 된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중반까지는 사소한 월경 사건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이후부터 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폭력 충돌의 빈도가 높아졌다. 특히 군사적인 사건ㆍ충돌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북한 역시 1945~46년도에는 미군ㆍ남한군의 군사정찰이 있었을 뿐이지만, 1947년 들어 갑자기 무장 도발이 급증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소ㆍ남북이 쌍방에 대해 가한 모든 유형의 군사행동이었다. 이하에서는 주로 군사적 충돌을 중심으로 38선 충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2. 1945~47년 : 점진적 고양미소 점령기 38선 충돌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945~47년이며, 두 번째 시기는 1948년이다. 이러한 소시기 구분의 가장 큰 차이는 1945~47년에는 비정치적이며 사소한 충돌이 지배적이었던 반면, 1948년에 접어들면서 충돌의 양상이 점차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성격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차이는 1948년이 되면서 한국인들이 충돌의 주역으로 전면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1) 1945년미소가 진주한 직후인 1945년에는 38선의 정확한 위치 판단이 어려워 비행기와 순찰대 등의 월경 사건이 발생했으나 우호적 분위기에서 사태는 수습되었다.2) 1946년38선상에서 수많은 경계선 위반과 경계선 사건이 발생했지만, 심각한 군사적 충돌이나 긴장ㆍ갈등 등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가장 많이 발생한 사례는 미소 경계병의 순찰 과정에서의 월경과 항공기의 월경이었으나 총격을 포함한 무장 충돌은 없었다.미소간의 유일한 총격전은 7월 1일 배천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하지는 미군 순찰대가 실수로 38선을 월경한 데에 대한 소련군의 발포사건이라며 소련군 측에 사과하고 책임자인 미군 대대장을 해임했다.3) 1947년1947년 4월 제2차 38선 합동조사가 후에도 경계선 침범 및 사건은 줄어들거나 종식되지 않았다. 1947년의 대표적인 38선 충돌은 소련군 병사 2명의 사망사건(경기도 개성 눌목지서, 1947. 3. 18), 소련구의 미군 병사 3명 억류사건(경기도 여현, 1947. 8. 12)등이었다. 이외에도 북한경비대의 남한 부락 습격과, 남한 청년단들의 북한 지역 습격 및 보복 등의 악순환이 이어졌고, 미소 양 주둔군 사령관의 항의 및 비난서한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971CIC파견대가 지적했듯이, 미군과 소련군 간에는 군사적 충돌이나 분쟁이 거의 없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개입한 경우, 양측 지휘관의 명령 하에 대체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사태가 수습되었다.문제는 남북한 병력 간, 미군-북한경비대ㆍ북한군 간, 소련군-남한 경찰ㆍ청년단 간에 발생했다. 이 경우, 무수한 총격전과 경계선 침범 사건으로 사건이 격화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중반부터 38선 일대의 경비를 위해 경찰병력을 증강했고, 경찰은 서북청년단ㆍ대동청년단 등을 일종의 의용군ㆍ예비군으로 활용했다. 소련 역시 38선 경비업무를 38경비대에게 담당시키면서 한국인을 매개로 한 남북(南北)ㆍ북미(北美)ㆍ남소(南소(蘇)) 간의 무력 충돌은 격화되었다. 가장 많은 대결의 쌍방은 남한 경찰-소련군ㆍ북한경비대의 경우였다. 1947년 중반은 38선에서 발생하는 경계선 침범ㆍ충돌 사건이 점차 한국인들에 의해 폭력적인 양상으로 주도되는 경향을 보여주며 남북한의 경찰병력과 청년단 등이 이를 주도했다.1947년 들어 또 하나 부각된 점은 미소 양측이 38선 분단으로 생긴 경제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실무적인 합의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미소 양측의 대결의식과 정치적 의도 속에서 남북한 간의 적대의식과 분단 의식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는 (1)전력요금 문제, (2)연백저수지로 통칭되는 구암ㆍ예의저수지 문제였다. 두 문제는 1년 뒤인 1948년 4월 김구ㆍ김규식이 남북협상에서 북한의 김일성ㆍ김두봉과 협의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고, 남한의 단독선거와 함께 협력이 단절된 문제였다.4) 전력문제38선이 결정된 이후 발생한 경제 문제 중 남한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전력문제였다. 해방 직후부터 북한의 대남송전은 전기요금 문제를 둘러싸고 예각화되어가고 있었다. 1946년 3월 소련은 그 동안 남한에 공급된 2억2천만kw의 전력의 대가를 미곡으로 지불할 것을 미군정에 요구했다. 만약 지불하지 않을 경우 전력공급을 차단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다. 남한은 전기와 비료가 필요했고 북한은 쌀이 필요했다. 자연스럽던 단일경제가 인위적으로 분단되고, 경제자원들이 미소 양군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일종의 무기로 활용됨에 따라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5) 구암(鳩岩)ㆍ예의(禮儀)저수지(연백저수지)1946년 늦봄 소련은 연백저수지의 물 공급을 중단하고 대가를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거부하였고 1947년 6월 하지는 1945년의 물 값은 못 주겠지만, 1946년부터의 물 값으로 연간 150톤의 미곡을 제공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북한은 매년 1,500톤씩 1945~47년 간 총 4,500톤의 미곡을 내라고 요구했다. 양자가 인식하는 물 값의 차이가 무려 10배에 달했던 것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1947년 중반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소련군 대신 직접 미군정의 상대로 채무상환을 요구하였고 미군정은 거부하였던 것이다.위 사례는 미군정이 소련군 혹은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채무를 지고 있었으며, 소련군은 막대한 요금을 요구했고 미군정은 이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소련군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북한정권기관으로 인정해 미군정의 상대역으로 내세움으로써 협상과정에서 미군정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사실상의 정권기관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했다. 또한 부족한 발전용 기재 및 미곡 등을 남한에서 보충할 경제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북한과 소련군은 문제를 실무적으로 해결하는 자세보다 단전ㆍ단수 위협과 요금 과다청구를 통해 미군정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는 전술을 택했다. 나아가 북한은 남한 선거가 실시되지 대금 미청산을 이유로 단전ㆍ단수를 단행했다.이에 미군정은 요금을 지불하거나 협상으로 요금을 현실화하는 대신, 소련과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을 위협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미군정은 쌀이나 부속품 대신 북한이 선택할 수 없는 미 달러화 청산방법을 제시하는 등 공격적 자세를 견지했고, 전력ㆍ관개용수를 단절시킴으로써 북한의 호전성과 반민족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결국 미소 양측은 전력ㆍ관개용수 대금 문제를 단순한 채권ㆍ채무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활용했다.3. 1948년 : 남북갈등의 격화와 전환1) 1948년의 특징1947년 중반부터 38선상의 충돌 및 관련 문제들이 점차 정치ㆍ군사적인 색채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1948년 들어 38선상에서의 충돌은 분명 미소간의 분쟁이 아니라 남북 간 분쟁의 성격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48년 발생한 38선상의 갈등ㆍ분쟁들은 이전의 주요 교통로, 마을 등 평지에서 점차 구릉과 산악지대로 옮겨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38선 충돌(1947. 8~1948. 11) 현황 : 월별 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38선 충돌은 선거가 실시된 1948년 5월과 그 직후인 6월 최고조를 이루었다. 이는 5ㆍ10선거와 관련된 충돌임이 분명했다. 미소 역시 이 시점에서 비난과 서한전을 벌였다.둘째, 선거 일정이 종료되자 38선상의 충돌은 이전처럼 줄어들었다.셋째, 1949년의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1948년 5~6월의 폭발적 증가가 정치 일정과 연결된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절적 추이가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위장과 은폐가 가능한 녹음기에 38선 충돌이 격화되었다. 늦가을 이후 잦아드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빨치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충돌횟수의 변동 외에도 1948년을 특징짓는 것은 충돌의 성격이었다. 38선 충돌 데이터는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주한미군 정보참모가 이 시점부터 성격별 분류를 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충돌의 강도ㆍ횟수의 증가 때문이었다. 둘째는 이 시점부터 정보당국이 38선 충돌 보고에 대해 정보평가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즉 이전의 정보들은 평가되지 않는 채 정보보고서에 수록되었지만, 이 시점부터는 정보원 및 정보의 신뢰도를 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9.12.16| 4페이지| 1,000원| 조회(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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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사고고학
    한국의 선사고고학 연구1. 고고학이란 무엇인가?2. 고고학에 있어 시간이란 무엇인가?3. 고고학에 있어 공간이란 무엇인가?4. 선사고고학이란 무엇인가?5. 구석기시대 연구6. 신석기시대 연구7. 청동기시대 연구8. 철기시대 연구1. 고고학이란 무엇인가?고고학이란 말을 들으면 주로 황홀한 예술 작품이나 전설적인 보물들을 발굴하는 것이나 발굴된 것에게 물질적 가치, 즉 가격을 매기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도굴이 그러하듯 결과만 중시하는 행위로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다. 고고학을 뜻하는 영어 archaeology는 과거를 뜻하는 archaeos와 학문이라는 logos, 두 희랍어의 합성어로서 이 두 가지로 미루어 보아 고고학은 유적과 유물을 해석함으로써 인류의 과거 생활과 문화 변천의 과정을 밝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양에서는 考古라 함은 ‘옛 것을 생각한다.’는 두 문자의 결합으로 유물, 유적을 통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즉 고고학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우선시 하며 과거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과거 인간들의 활동은 반드시 그 잔존물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유물, 유구, 유적 등의 고고학적 자료이고, 이 물질적인 잔존물을 통해 고고학의 연구가 이루어진다.고고학의 연구목적은 과거 사람들의 문화를 복원하는 것과 그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어 왔으나 신고고학이 등장하면서 문화변천과정의 연구를 또 하나의 목적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고고학의 발달과정에서 연구대상이 과거에는 유물 중심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문화 중심으로 바꿔진 것이 큰 변화이며, 유물은 문화 안에서 인간행위의 잔존물로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고고학적 자료도 유물뿐만 아니라 유규, 유적으로 확대되면서 처음에는 관심 밖이었던 자연유물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유물 중심에서 문화중심으로 바뀐 만큼 여러 학문과의 교류 없는 고고학 연구는 꿈꿀 수 없게 되었다. 최근 들어 고고학이 세분화되면서 지질고고학, 환경고고학, 수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순환적 시간 또는 순환적 시간과 직선적 시간이 혼합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순환적 시간관은 ‘출생-성장-성숙-죽음-출생-...’의 순으로 계속 반복된다고 보는 것이다. 편년으로는 유적과 문화 사이의 편년적 상호관계를 설정해주는 상대편년과 횟수로 된 연대를 가리키는 절대편년으로 나뉜다. 상대편년은 사건 사이의 정확한 시간차는 모르지만 선후관계를 설정하는 것이고 예를 들면 지층 누적의 법칙이 있다. 절대편년은 연대를 아는 인공물들을 이용하여 연대를 측정하는 것이며 예를 들면 방사선탄소연대법 등이 있다.우리는 어제를, 1달 전을, 1년 전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기록을 해놓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인 100년 전, 1000년 전, 또는 이 이전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긴 시간을 무작정 연구한다면 혼란만 가져올 것이다. 과거 연대 측정법을 연구하는 것은 시간별로 공통적으로 특징적인 시대를 묶음으로써 보다 용이하게 연구할 수 있게 함이다. 이에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순으로 배열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나 미흡한 점이 많아 수정,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3. 고고학에 있어 공간이란 무엇인가?고고학은 인간, 시간, 공간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리며 죽지 않은 자는 없다. 시간 또한 흘러가버린다. 공간만이 변치 않는 정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공간을 활용하였고 활용했던 공간은 이동하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잔존물을 향유하고 있기에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공간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추정되지 않은 것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공간 속에서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문화를 이뤘다. 인간은 먹고 자고 번식하는 등 추구하는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마다 각각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왜 그런 것일까? 처음 인류는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정착하지 못하였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고 해 자체적인 기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역사고고학이란 문자에 의해 기록이 등장한 이후의 고고학을 말한다. 한국고고학의 경우 선사고고학은 구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까지이고, 역사고고학은 삼국시대 이후의 고고학을 말한다.선사고고학의 공간적 범위로는 지구 전체를 꼽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대륙뿐만 아니라 해양도 포함된다. 특히, 약 1만년전 이후인 후빙기의 모든 상황들에 관련하여 선사시대의 인간생활은 과거의 기후에 관한 정보가 주로 관련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육지와 더불어 사람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했던 자원들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기후가 끼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각 시기에 이용할 수 있었던 땅의 면적이며, 고대의 해안선들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생활을 뒷받침한 지리 환경적 범위는 신대륙으로의 인류이동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 중 하나이다.5. 구석기시대 연구구석기 시대의 연구는 편년과 연대문제, 석기의 기능과 분석방법연구, 석기의 전통문제, 동물화석의 분석 등으로 대별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1) 구석기 시대의 편년과 연대에 대한 논의(1) 중기 구석기 설정문제구석기시대의 편년에 있어 약간의 혼란이 있다. 즉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시기 편년을 전기와 중기를 합하여 전기 또는 초기로 보려는 설과 중기 설정이 가능하다는 설이다.성춘택은 중기구석기라는 용어가 한국 구석기의 진화와 편년과는 무관하게 특정 시대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고, 이시대의 특징적인 기술이나 문화 양상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 점을 들어 중기 구석기 설정에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반해 박영철은 4개 유적을 검토하여 전기의 전통을 가진 자갈돌 찍개문화에서 후기의 중ㆍ소형의 격지석기 제단단계 문화로 발전되는 과정을 들어 문화의 연속성 측면에서 중석기시대를 설정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헌종은 전기부터 나타난 석영제 자갈돌석기 제작의 다양한 기술 분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중기구석기로부터 보고, 후기까지 중기구석기시대 자갈돌석기전통이 유지되었기 연구에서 기능적인 면을 연구한 글로, 한국 후기구석기 유물의 가장 특징적인 석기인 슴베찌르개를 분석한 글이 있다. 수양개유적 출토 슴베를 분석하여 사냥과 관련된 용도로 쓰였지만 다른 용도의 가능성을 제시한 글과 찌르개를 이용한 수렵이 후기구석기인들에게 수렵문화의 특징과 수렵도구 제작에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는 글, 슴베찌르개는 기능적으로 뚜르개와 자르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글이 있다.석기의 분석에서는 석기 사용흔 연구에는 분석자마다 서로 다른 기준으로 사용흔을 관찰 판별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여 사용흔 분석이 객관적인 원칙과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글과 비슷한 석재를 사용한 구서기 유물을 여러 용어로 지칭하는 문제점과 지역에 따른 차별적인 석재 분포가 세석인 제작기법의 차이를 보일 수 있음을 밝힌 글, 가공되지 않는 박편과 돌 부스러기 즉 데비타쥐(debitage)에 관한 연구를 통해 구석기 유적지의 기능이나 석기 제작기술, 나아가 그들이 행위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다고 하는 글이 있다. 이런 논의들은 석재의 산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축적, 구석기시대 수렵채집민의 이동서과 지역적인 구조, 사회경제 체계의 양상,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구석기 연구에 있어서 외국의 예를 통한 연구 방향을 제시한 이형우의 글이 있다. 영국 태임즈강유역 프린트로 제작된 전기구석기 유물의 탈색화 과정 소개한 글과 영국 태임즈강유역의 프린트계와 규암계의 주먹도끼가 우리나라 전곡리 출토 아슐리앙형 주먹도끼와 동일한 유물형식으로 동일한 표지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글이 있다.3) 석기의 전통 문제이헌종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선택된 석재 즉 석영제 자갈돌석기 제작의 다양한 기술 분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중기구석기시대로 설정하고, 전기구석기시대부터 후기구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강 자갈을 석기 재료로 선택한 것은 당시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경 적응에 따른 적절한 선택이었으며, 제작기법물조합상을 보이고, 러시아 아무르강 하류의 고통기 사용기와 일본열도 승문 초창기 유적과 비견되고 있는 점에서 11,000~10,000년전을 상한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글과 즐문토기의 새로운 편년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남해안지역 융기문토기를 기원전 6,000~4,000년으로 추정하여 조기 후반대로 편년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2) 중서부 신석기시대 편년의 재검토와 중기 설정중부지역 신석기시대 편년을 위해서는 기본 인식틀의 재고와 함께 암사동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 및 새로운 자료 확보가 있어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양성혁은 기존의 토기문양의 가상적인 나열에 근거한 중서부 신석기 시대의 시기구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물질문화 및 생계경제의 변화상과 토기문양의 변화를 연동하여 시기구분을 시도하였으며, 김장석도 기존의 편년안과 관련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암사동에 대한 체계적인 재발굴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암사동유적의 층위학적 검토가 불분명하여 주거지간의 중복관계를 층위별로 선후관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다.그리고 중기 설정에는, 구획반복문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중서부 신석기시대 중기 설정 기준이 된단,s 견해가 제시되고 있고, 서해안과 금강유역에 출토되는 능격문의 발생과 변천을 분석하여 태선침선문토기의 전통을 이어 출현한 것으로 보고 방사선탄소연대의 의거 신석기시대 중기로 편년될 수 있다는 글도 있다.2) 생계 양식과 자원이용에 대한 연구이의 연구는 분석 방법론, 패총 출토 패류와 동물자료 분석, 토지 이용 자원 문제, 식물자원의 분석, 잔존지방산 분석 등 신석기시대 연구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자료 분석의 방법론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패총에서 나타난 유물의 분석과 유적의 기능을 통한 생계의 변화 방법을 추론하는 글이다. 이준정은 패각자료 분석으로 시료의 채취 방법, 同定, 계량화, 서식환경의 복원, 패각크기의 측정법 등을 제시하였으며, 신석기 시대 생계와 주거체계를 밝히기 위해 패총 유적의 기능을 유구있다.
    인문/어학| 2009.12.16| 8페이지| 1,000원| 조회(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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