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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보상절의 국어학적 가치
    석보상절의 국어학적 가치에 대하여『석보상절』은 조선 세종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왕명으로 석가의 일대기를 찬술한 불경언해서이다. 이것은 세종 28년(1446)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가의 전기를 엮게 하였는데, 《석가보(釋迦譜)》《법화경(法華經)》《지장경(地藏經)》《아미타경(阿彌陀經)》《약사경(藥師經)》등에서 뽕아 모은 글을 한글로 옮긴 것으로, 1447년(세종 29)에 완성한 것을 1449년(세종 31)에 간행하였다.이 책은 조선 전기의 언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불경 언해서(諺解書)와는 달리 문장이 매우 유려하여 당시 국문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석보상절』의 국어학적 가치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석보상절』은 그 서와 본문이 형태를 조금 달리한다. 『석보상절서』는 “석보상절서(釋譜詳節序)”라는 권두서명이 나오고 줄을 바꾸되 권두 서명과 같은 칸에 구결문이 나오고 한 칸 낮추어 이에 대응되는 번역문이 짝을 이루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중세의 대부분의 다른 언해 자료의 구결문과 언해문의 체재와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다. 판심의 위쪽에는 판심제 석보서가, 아래쪽에는 장차가 배치되어 있다. 서의 끝에는 수양대군이 정통 12년 7월 25일에 서문을 쓴다는 말만 나온다. 한편,『석보상절』본문은 ‘석보상절제육(釋譜詳節第六)’과 같이 권두 서명과 권 차가 나오고 줄을 바꾸되 권두 서명과 같은 칸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판심제명은 ‘석보육’으로 되어 있고 아래쪽에 장차가 나온다. 이 점은 「석보상절서」와 형식이 같다. 각 권의 끝에는 권말서명과 권 차가 ‘석보상절제육’과 같은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석보상절서」와 같이 한 줄에 15자를 박았다.『석보상절』은 분량의 방대함 때문인지 8자 종성 규정을 지키는 점밖에는 표기법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같은 표현이 권 차에 따라 달리 적힘은 물론, 같은 책에서도 일관된 규칙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적혀 있다. 그러한 표기의 대표적인 것은 종성 ‘ㅇ’의 표기 문제, ‘ㅭ’과 각자병서, 사이글자이다. ㅇ을 받침으로 가잔 명사가 모음으로 된 조사와 만나면 이어 적히기도 하고 끊어 적히기도 한다. 추측관형사형어미는 『용비어천가』에서는 뒤따르는 머리글자가 ‘ㅁ’과 ‘ㄴ’으로 된 명사 앞에서는 ‘ㄹ’이, 나머지 환경에서는 ‘ㅭ’이 선택되었고, 훈민정음언해에서는 예가 많지는 않지만 뒤의 명사의 머리글자에 얽매임이 없어 ‘ㅭ’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석보상절은 일관된 규칙을 찾기가 쉽지 않다. 본문에서는 원칙적으로 머리글자가 ‘ㄴ,ㅁ,ㅇ’일 때에는 ‘ㄹ’을, 나머지 환경에서는 ‘ㅭ’을 취한다. 「석보상절 서」는 예가 적기도 하지만 본문과 양상이 다르다. 고유어 가운데는 관형사형에 ‘ㆆ’을 취하는 대신, 뒤에 오는 머리글자가 각자병서로 적히는 일이 있었다. 사이글자는 『용비어천가』에서는 ‘ㄱ,ㄷ,ㅂ,ㆆ’의 4자와 ‘ㅅ,ㅿ’이 음성적 환경에 따라 규칙성과 융통성을 유지하면서 쓰였고, 훈민정음언해에서는 ‘ㄱ,ㄷ,ㅂ,ㅸ,ㆆ’의 5자와 ‘ㅅ’이 또 그 나름의 규칙성과 융통성을 보여 가며 사용되었다. 그런데 『석보상절』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ㅅ’으로 통일되기는 하였으나 그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지 않다. 대표적 예가 ‘ㄱ’이다. 권에 따라 ‘ㄱ’이 나타나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마지막으로『석보상절』이 학문적으로 갖는 가치에 대해서 알아보자. 첫째, 불교학적인 면에서 당시의 불교를 조직화한 것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학 수준을 말하는 것이며, 최초의 번역 불경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둘째, 문학적인 면에서 국문으로 된 최초의 산문 작품이지만, 세련된 문장이 유려하여 후대의 고전 소설 등의 문체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셋째, 국어학적으로는 풍부한 어휘와 이에 따른 어법?음운?표기법 등 15세기 중엽의 국어 연구 및 한자음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서지학적으로는『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최초의 국문활자본이란 점에서 값진 문화재로서 가치가 인정된다.
    인문/어학| 2010.12.07| 2페이지| 1,0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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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와 칼뱅의 신학이론과 종교개혁이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 검토
    루터와 칼뱅의 신학이론과 종교개혁이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 검토국사학과 3학년 20610366 김윤지目 次Ⅰ. 들어가며 Ⅲ. 칼뱅Ⅱ. 루터 (1)칼뱅의 생애(1)루터의 생애 (2)칼뱅의 신학사상(2)루터의 사상 (3)칼뱅의 종교개혁(3)루터 신학의 특징 Ⅳ.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 검토(4)루터의 종교개혁 Ⅴ. 나가며-참고 문헌Ⅰ. 들어가며중세기 기독교회의 권위 아래 있던 유럽에서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문예부흥운동이 새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운동은 성경을 보는 안목을 본격화 시켰고 인간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때, 즉 15세기 후반에 걸쳐서 전 인류와 교회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종교 개혁자 루터라든가, 칼뱅, 멜란히톤), 에라스무스)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루터와 칼뱅은 종교 개혁의 선두자라 할 만큼 커다란 역사적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사상과 개혁들을 알아봄으로써 신학의 삶을 살 펴 보도록 하겠다.Ⅱ. 루터(1) 루터의 생애마틴 루터는 1483년 동부 독일의 작센주의 아이슬레벤에서 하층민인 가난한 鑛夫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강건함을 지닌 광부였고 어머니는 신앙이 절실한 분이였다고 전하고 있다. 루터는 만스펠드 등지의 市立學校를 거쳐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Magister artium까지 수학을 하였으며?그 이후 法學을 공부하려 하였으나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성직자로서의 자기 행로를 변형하여 그의 나이 22세인 1505년에 수도자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속세를 완전히 떠난 모범적인 수도자로서 수도원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무척 힘겨워하며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그 이후 비텐베르크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곳에서 신학부의 교수로 재직을 하며 지도자 계급까지 올라가게 된다. 루터는 엄격한 부모에 의해 가톨릭신앙을 배우고, 마크데부르크와 아이제나흐에서 학교교육을 받았고 1505년 에르푸르트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법학부에 십자가 신학자는 사안을 바로 직시한다. 하나님의 비가시적 존재를 행위에서 인지하고?보는 그러한 지혜는 부풀려진 것이며, 완전히 눈멀게 하는 것이고 완고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날카로운 대립은 모든 스콜라 신학과 루터가 에어푸르트에서 알게 된 스콜라적인 경향과는 다른 것이며, 오히려 당시 이미 시작된 로마와의 싸움에서 신 인식에 대한 많은 견해들을 죄론과 은총론에서처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하나의 논쟁 형식이다.루터는 신 인식의 문제를 가지고 철학과 신학의 귀속문제를 이해하고 있다. 영광의 신학은 창조를 근거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나 십자가 신학은 창조로부터 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를 죄와 하나님의 심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동시에 또한 자신을 계시하시는 십자가만을 오로지 중요하게 여기고 영광의 신학 및 십자가 신학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구원의 문제를 신학의 중심 테마가 되게 했다. 하나님의 比可視的 및 그의 可視的 존재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질서를 통한 능력이라는 오캄의 구별과 유사하게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구분은 구원의 문제를 고려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의 의미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라는 표현이며, ‘Crux probat omnia’는 십자가가 모든 것을 시험하듯 ‘십자가가 모든 것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오로지 십자가만이 심판자요 진리의 증인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첨예한 진술들은 논쟁의 와중에 생겨났다고 보아야할 것이다.③하나님과 인간의 인식?1532년 시편 51편 2절에 대한 강의에서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을 인식하는 것은 신적인 지혜이며 본래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신학적이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학의 대상은 곧 죄인이며 잃어버린 인간인 동시에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이전 생각의 연속과 종교개혁적인 새로운 성찰이 예리하은 우선 다른 논쟁의 연장이거나 혹은 다른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생긴 새로운 국면으로 보일 수 있었다. 새로운 갈등의 소지들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주제들이 급진적인 단면을 지니고 있음은 1518년에야 비로소 명백해졌으며 16세기 초에 人文主義者들과 스콜라 학자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의 공적인 대표자들 사이에 벌어진 많은 논쟁들이 루터로 하여금 그에 대해 입장을 표명토록 원인을 제공했다.?1518년에 완성된 면죄부의 출판은 루터와 로마의 갈등을 여러 차원에서 발생시켰으며 95개의 논제 및 면죄부 논제해설을 통해 제기된 문제들은 많은 글을 통해 계속 취급되었고 그로 인하여 양측의 입장이 더욱 명쾌하고 정확하게 되었다. 그 후 루터에 대한 교회 소송 준비가 시작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루터의 주장뿐만이 아니라 글을 통한 갈등에 대해서도 반응이 생겨났다. 1518년 여름 이후 세속정부의 루터 문제에 대한 개입은 1518년 8월 5일 교황에게 루터로 인하여 신앙의 일치가 끝나게 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하여 서신을 띄웠고 독일 제국 회의가 루터를 처벌할 교회의 대책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돕고자 했다.?1518년 8월 7일 로마에 출두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그는 반박의 글을 썼으며 여기에서 루터는 노골적으로 교황과 공의회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음을 피력했으나 루터는 로마 교회가 지금까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며, 참된 신앙으로부터 이탈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교황에 대한 판단은 루터에게 더욱 예리해져 갔다. 1518년 말 루터는 처음으로 교황이 아마도 적그리스도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결과 1520년에는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제명당하는 파문 칙령을 받았고, 1521년 국회에 소각 처분을 받았다 그는 교황의 파문 칙령을 찢어버렸고, 그는 당시 황제의 유력한 경쟁자였던 작센公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내에 숨어 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종사하며 다음해에 이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기사의 반란과 농민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몰락 기사들은 1능하신 섭리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신학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관심에 대한 그의 기본적 확신이 섭리론)과 예정론 모두에서 표현된다. 칼뱅의 예정이란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개인에게 이루어지도록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두 종착점 가운데 어느 쪽으로 창조되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은 살도록 예정되었다던가 아니면 죽기로 예정되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제 1편에서는. 예정 혹은 선택이 교회론과 연관되어 다루어졌다. 기독교 강요의 예정론, 성경 주석의 예정론,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구원할 자와 유기할 자를 자위에 의하여 예정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예정한 것도 아니며, 타락 전 즉,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으며 예정한 자는 끝까지 보전하셔서 확실히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칼뱅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 안에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는 그 가르침은 마땅한 겸손함을 가지고 설명한다.③ 성서론칼뱅은 철저하게 성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이는 성서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영원까지 전파,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인식한 칼뱅의 계시론을 함축하고 있는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칼뱅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의식에는 도달할 수 없으나, 순수하고 참된 종교성,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경외감을 지향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성서와 더불어 피조 세계가 갖는 계시의 2차적 가능성이며, 자연신학의 목적이기도 하다. 자연신학은 '창조'와 '구속' 이 두 가지의 신 인식 가운데에서 전자만을 그것도 희미하게 통찰할 수밖에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성을 증언하는 특별 계시인 성서를 요구하는 것이다.하나님의 인식과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의 원천이 되는 성서, 곧 특별 계시와 인간 본성의 관계도 인간의 본성이 거듭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에게도 적용되며, 인간과 천사들의 거룩한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죄악 된 행동들에게까지도 적용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 적으로 결의하시고 그가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 적으로 금하시는 것을 우리는 반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원의 신앙과 경외를 요구하면서 가장 예리하게 바로 문제에 초점을 모은다.(3) 칼뱅의 종교개혁① 사회다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뱅은 자신의 시대가 영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위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매우 치열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그의 통치 아래 살도록 전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셨다."라는 것을 볼 때 종교 개혁은 세속적 영역의 개혁을 지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칼뱅은 가끔 세상의 무질서를 비난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질서의 회복을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했다. 이러한 동일한 원리는 또한 칼뱅의 사회윤리에 항상 칼뱅주의와 연계되지만은 않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부여해 주었다. 칼뱅은 비록 세상의 지혜를 불신한다고 자주 고백하긴 했지만, 기독인의 어리석음을 결코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융통성이 자신의 생각에 의하면 성서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일종의 부르주아적 현실주의로 그를 기울러 지게 만들었다. 그는 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갖가지의 신중한 전략들을 권면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신은 그에게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칼뱅은 기독교인들이 정상적으로는 금지된 수단들을 취해야 할 이러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수단들을 취하는 것을 주저 없이 장려했다.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있어서의 칼뱅의 이중적이고 모순 된 태도는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렇기에 그는 중산층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하여금 노동을 존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도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칼뱅은 중용의 입지를 얻.
    인문/어학| 2010.12.07| 16페이지| 2,000원| 조회(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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