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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1. 머리말갑신정변에서 처음 부르주아적 정치운동이 나타났고 독립협회 운동에서 그것이 한층 더 확대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러일전쟁의 결과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함에 따라 민족운동도 그 폭이 한층 더 넓어져 애국계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전현직 관료, 지식인층, 자산가 층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계몽운동은 개화파의 문명개화론의 전통을 잇고 있었다. 곧 신학문을 교육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교육 계몽’과 산업을 발달시켜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실업 구국’이 핵심이었다. 운동의 주체들은 국권이 미약하게 된 원인을 민족의 실력이 부족한 데 있다고 인식하였다. 때문에 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보급하고 식산흥업을 민족 산업을 발전시켜서 실력을 쌓고 자강을 이루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모체는 보안회에서 신민회까지 연결되는 정치 ? 사회단체들이었다. 이들 단체는 일부 정치운동도 했지만 회보 발행 ? 연설회 ? 토론회를 통한 국민계몽이 주된 활동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이들 단체의 활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각 분야에서 국민을 계몽하여 실력을 양성하려는 활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2. 사상적 기반한말 계몽 운동가들의 실력양성론의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약육강식, 우승열패(優勝劣敗)를 골자로 하는 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진화론은 19세기 후반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진행되면서 부르주아들이 그들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론으로서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고 있다. 당시 계몽 운동가들은 사회진화론을 대체로 두 가지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었다. 하나는 사회진화론에 나타난 제국주의 침탈을 합리화 시키는 근대지향적인 논리의 결과, 한국의 국권상실의 책임은 그 동안 실력을 키워오지 않은 한국 국민에게 있다는 식의 식민주의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일제 통감부에 의한 지배를 합법적인 것으로 보고 일제의 지도로 실력을 양성하자는 주장을 펴고의의 침략이 생존경쟁의 결과 나타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침략행위가 보호, 평화라는 좋은 명분으로 자행되었음을 비난하였다. 이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이 단순한 영토의 점령이 아닌 경제적, 문화적 침략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계몽 운동가들은 점차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립되면서 일제의 ‘보호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모아지게 된다.3. 정치적 지향계몽 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하는 데는 반드시 국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이 구상하였던 국가의 정체는 입헌제로서, 군주전제정치를 청산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의적인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였다. 입헌제가 논의가 대두된 이유는 대한제국이 전제국가였고 일제가 이 점을 악용해 고종을 위협, 국권을 탈취하였으므로 전제군주제가 계속되는 한 외세에 의한 국권의 피탈을 막기 어렵다는 자각이 생긴데다가 이 운동에 참여하는 계층이 확대되면서 그들도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주층, 사상인층, 도시근로자들이 포함되었으며 계층으로는 전현직 관료, 신지식인, 봉건귀족출신의 개화지식인, 개화한 유생 등이 망라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전통적으로 지배층으로서의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계층도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에서 그들이 성장한 사회세력에 걸맞는 정치세력을 얻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들이 주장한 국가주의적인 입헌군주제는 국민 개개인의 민권은 국권에 종속되는 것으로만 이해 될 뿐이었다. 즉 이들은 입헌제를 논의 하면서도 개개인의 인간적 해방을 바탕으로 한 근대국민국가 건설과 국권회복을 꾀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계몽 운동가들이 가지고 있던 민중에 대한 우민관 때문이다. 이들은 의병을 폭도로 보았을 뿐 아니라 민중들에 의해 전개된 의병전쟁에 대해서도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에게 민중은 무식하여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반면 이들은 국가는 영영웅의 출현을 기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국민은 국가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애국심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지녀야 항 절대적인 덕목으로 강요되었다.4. 경제적인 지향계몽 운동가들은 산업진흥정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고 자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확립하여 국부를 증진시키는 것이 곧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들은 농업, 임업등 각종 산업을 연구하고 자연과학, 기술 등을 연구하여 근대적인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경제구상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그들의 주도세력이 봉건지주, 봉건관료, 특권상인층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경제구상은 지주적인 토지소유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근대적인 상공업을 발전시키자는 것으로, 지주층의 이득이 그대로 보장되는 위에 지주자본을 근대적 산업자본으로 전화시킴으로서 근대적 산업을 발달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당시 가장 큰 사회적 모순이었던 지주적 토지 소유에 관해서는 하등의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 동안 민중들이 갈망해온 농민적인 토지소유, 즉 자립경제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우민관, 민중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경제구상은 밑에서부터의 계급의 성장과 물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실제적인 활동보다는 그것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계몽활동 위주로 전개 되었다. 이때 계몽 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운동으로 대표적인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 또한 국가의 빚을 갚는 것이 민족경제의 독립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국권회복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재정권을 일제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한 국가의 빚을 갚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현실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5. 한계성 극복일제는 해가 갈수록 갖은 압박을 해왔으며 이는 체제내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계몽운동에 대해서까지 탄압을 시작하였다. 게다로 인해 서구식 자본주의를 모장하여 근대화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계몽운동의 방법과 이념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반성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이 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지고 점차 대중적인 기반을 갖게 되면서 당시 중심세력들은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현실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분명한 현실로 다가오자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의 성격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현실적인 조건을 반영해 보면 국가끼리의 경쟁은 서구 근대문명을 모방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실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6. 정치결사의 조직과 활동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제의 한국 침탈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계몽 운동가들은 반일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국가체제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한국이 당면한 정치 ? 사회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정치적인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정치운동을 전개한 단체로는 1904년 보안회(輔安會)가 있었는데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며 영토강탈의 의도를 드러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보안회는 보국안민을 기치로 하여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시키는 등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안회의 뒤를 이어 1905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가 조직되었다. 헌정연구회는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등 반일정치활동을 전개하였고 입헌군주제를 달성하여 국민의 민권을 확대시키고 이를 기초로 국가의 발전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면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에 정치단체들이 속속 설립되자 일제는 서울에서의 정치적인 집회를 일체금지하고 각 단체의 정치활동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리 하여 헌정연구회도 해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06년 헌정연구회의 뒤를 이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설립되었다. 대한자강회는 윤효정등 헌정연구회 계열의 인사들이 주도한 단체로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교육과 식산(殖産)활동을 전개하였다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회원구성도 도시의 지식인 봉건관료층을 벗어나 지방의 상공인 ? 지주 ? 유생층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고, 월보를 간행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며 서울과 지방에서 활발한 대중계몽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계몽운동은 대한자강회에 이르러 대중적인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고종을 퇴위시키고 난 일제는 계몽운동에 대해 더욱더 억압하기 시작하였고 자강회는 해산되게 된다. 자강회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것을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달성하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즉 기본적으로 일제의 지배체제를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교육과 식산을 통해 실력양성을 꾀할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애국사상의 고취와 민권의 향상, 경제적 발전 등을 목적으로 대중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전국적으로 70여 개의 지회를 갖출 정도로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아 계몽운동을 지방 곳곳에 까지 확산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채제내적인 실력양성론을 극복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수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교육과 식산의 필요성을 대중에게 계몽하는 방법만으로는 진정한 독립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일제의 지배체제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무장독립투쟁론이 주장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단체로 합법적인 문화운동을 표방하면서 비밀리에 반일 정치활동을 벌이던 신민회(新民會)가 있었다. 신민회는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활동목표는 공화정체의 독립국을 건설하여 국민이 주인인 국가가 되어 자주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신민회 회원은 8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확장되었으나 민족운동의 방향을 두고 둘로 세력이 갈라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안창호는 계몽운동이 본래 추진하고 있던 교육과 식산을 통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고 이동휘, 이서영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실력양성운동을 극복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직접적인 무장.
    인문/어학| 2008.03.30| 5페이지| 1,000원| 조회(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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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신문화 운동과 5.4운동 평가B괜찮아요
    신해혁명이 실패하고 원세개의 황제 부활운동이 진행되어 복고풍조가 전국을 휩쓸던 암울한 시기인 1915년 9월 15일 상해 진독수(陳獨秀, 1878~1943)의 [청년잡지(1916년 9월 제2권 제1호부터 으로 개명]는 신문화운동 발발의 신호탄이 되었다. 신문화운동의 주요 구호인 ‘민주’와 ‘과학’은 창간호 [청년잡지]의 “청년에게 고한다”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이 글은 현재의 사회에는 한 공기로 충만해 있으며 이대로는 중국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이 병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각해서 용감히 분투하는 청년”뿐이라고 하면서 “청년이여, 이 임무를 제군들은 떠맡겠는가” 라고 격렬한 어투로 묻고 있었다. 그리고 뒤 이어서 그를 위한 6개의 방침을 거침없는 필치로 하나씩 호소했다.1. 자주적이어야 한다. 노예적이 아니어야 한다.2. 진보적이어야 한다. 보수적이지 말아야 한다.3. 진취적이어야 한다. 은둔적이지 말아야 한다.4. 세계적이어야 한다. 쇄국적이지 말아야 한다.5. 실리적이어야 한다. 허식적이지 말아야 한다.6. 과학적이어야 한다. 공상적이지 말아야 한다.결국 필자인 진독수는 중국 사회의 보수성*퇴영성을 날카롭게 규탄한 다음, 자주적*진보적인 의 출현에 의해서 미래를 이룩하도록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유교야 말로 중국 2000년 전제정치의 정신적 지주이며 암흑을 낳는 근원이다”라고 유교사상과 공자를 비판했으며 근대 서구문화 학습을 통해 민주주의와 과학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강력하게 민주정치를 선전하고 봉건적 군주전제를 반대 하였으며 민주국가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신문화 계몽주의자들은 과학과 민주를 같이 논하고 과학과 민주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신청년]은 민주와 과학 사상을 고양하며 청년세대를 자각시키고 진리추구를 위하여 앞장섰다. [신청년]은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여 많은 청년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으나 봉건세력에게는 아주 큰 공포와 원한을 초래했다. 봉건 보수파들은 앞을 다투어 사방에서 비난 하였다. 그들은 [신청년]을 상식에서 벗어난 사설(邪設)과 괴물로 여겼다. 그들은 [신청년]이 유교를 파괴하고 예법을 파괴하며 국수(國粹)를 파괴하였으며 신문화운동은 중국문명의 토대를 동요시킨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청년]의 과감한 주장은 현 상태로부터 탈출을 찾고 있었던 청년층의 마음속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들어갔다. 처음 겨우 1천부로 출발했던 이 잡지가 1,2년 안에 1만 5천,6천부까지 급증했다. 말하자면 사상이 시대를 포착했던 것이며 하나의 사상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옛날 맹목적으로 숭배되던 우상을 타도하고 인간들을 오랫동안 속박하던 사상을 대대적으로 해방시켜 신사상, 신학설, 신문화가 중국 대지에 널리 전파되고 발전하도록 길을 개척 하였다.북경대학(청말시기 경사대학당)은 여전히 진부한 봉건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해혁명 때 이 대학을 북경대학으로 개명하였으나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학생들은 실용성이 없는 학문을 하는 것 외에 마작을 하고 연극배우를 떠받들고 교풍(校風)이 아주 오염되고 학술연구 분위기가 유난히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북경대학이 채원배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들에게 과거시대의 구 관념을 바꾸도록 했다. 채원배는 운영하는 과정에서 사상의 자유, 학술의 자유를 주장하고 “유명한 모든 것을 포용하자”는 방안을 제출했다. 사상의 자유, 모든 것을 포용하자는 방침에 따라 채원배는 있는 힘을 다해서 인재를 모으고 자유스런 학술강의를 격려하였다. 또한 신문화 운동의 제창자인 진독수를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으로 초빙하였고 빼어난 진보인사들을 초빙하여 교직을 담당케 하였다. 채원배가 신진인물들을 북경대학에 초빙하여 교직을 담당케 한 것은 그들에게 신문화*신사상을 선전할 강단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북경대학은 진독수, 이대교를 주축으로 신문화진영을 형성하여 문학혁명 사상자유의 풍조가 드디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이 혁명에 불을 지른 것은 당시 미국 유학중인 호적(胡適)이었다. 그는 [신청년]지 상에 [문학개량추의]란 논문을 투고, 생생한 문학의 생명을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문어체에 의한 문학을 버리고 오히려 살아있는 언어, 실제로 사용되는 구어를 과감하게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까지 중국의 문학은 문어적인 표현을 정통으로 해왔다. 그러한 문어체에 의해서 씌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럼 도대체 훌륭한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절실한 감정 혹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사상*이상 등 확고한 내용이 없으면 안 되며 그것을 위해서는 또한 그것에 적당한 참신한 표현수단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호적에 따르면 문어, 즉 예부터의 서술방식에 의한 표현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사물(死物)로 변했으며 그 결과 문학의 생명조차 상실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문학의 면에서의 왕조체제를 곧 구 중국 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커다란 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호적의 이와 같은 제창을 받아들여 그것을 넓은 전선으로 확대시킨 것은 다름 아닌 진독수였다. 그는 곧바로 [문학혁명론]을 발표해서 암흑이 조금도 걷히지 않고 있는 원인의 대부분은 정신영역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윤리*도덕*문학*예술 등이 검은 장막으로 드리워져 있으면서 때와 더럽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 그 자체는 역시 시대의 조류에 밀착되어 있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사고는 표현수단, 새로운 발표양식을 요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이른바 문학만의 문제는 아니고 진정으로 문화*사상 전체에 관련된 문제였다.봉건적인 가족제도는 개인의 해방에 혹독한 질곡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굴욕적인 지위를 강요받아온 것은 여성이었다. 인권*평등의 사상을 말했던 [신청년]은 거의 매호마다 여성문제를 논해서 남녀동등권, 여자교육, 정조의무의 평등을 주장하고 구제도에 대한 원리적 비판을 가했다. 그러한 주장에 촉발되어 여성 해방의 새로운 움직임도 어느 정도 싹트기 시작했다. 하나의 움직임이 교육계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19년, 북경대학은 비로소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고 남녀공학을 인정했다. 북경대학이 문호를 개방하자 북경의 각 고등전문학교는 다투어서 이 예를 따랐으며 그 후 몇 년 안에 남녀공학은 전국에 걸쳐 극히 일반적인 것으로 되 버렸다.우리는 여기에서 이와 같은 움직임이 중국의 사회변혁의 진정한 첫걸음에 불과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아울러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확실히 신문화운동의 깃발은 드높이 치켜 올려졌고 또한 문학혁명의 주장은 역사적의미를 갖기는 했지만 그 무렵 이러한 문화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람은 대체 어느 정도나 있었을까.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는 문맹이었다. 약간이나마 한자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2할도 안되었다. 그리고 또한 봉건적 가족제도의 타파라고는 해도 대체로 그것은 일부의 지식청년의 시골의 가정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데 불과했다. 신문화운동은 광명에 막 눈뜨고 있었던 청년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군번치하의 암흑의 중국 속에서 광명은 바로 저기다 하고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광명이 비치고 있다고 해서 실제로 어떻게 그것을 붙잡을 수 있을까.1919년 5월 4일 직전의 중국에서는 정치적으로 군벌들에 의한 반동*반혁명의 복고정치가 행해지고 있지만 사회*경제*사상적으로는 신학제의 실시와 외국 유학으로 각성된 두터운 신지식인과 학생층의 형성, 백화운동으로 인한 교육과 학식의 보급, 신사상의 소개로 인한 일반 민중의 각성, 민족 산업의 발달로 인한 민족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형성 등 혁신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계층과 계급은 제국주의 열강과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군벌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증오와 분노를 품고 전국적으로 결집되어 있었는데, 이 같은 민족적 증오와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 일본의 중국에 대한 21개조 조항의 요구였다.제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이유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중국 내에 갖고 있는 교주만과 산동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전쟁 중에 일본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각국과 은밀히 교섭하여 이 같은 이권의 인정을 요구하고 북경 정부에도 승인을 강요했다. 이 21개의 조항의 내용을 보면 산동에서 독일 이권의 승계, 여순*대련의 조차 기간 연장, 만주 및 몽골에서 일본 권익의 확대 등이었다. 그런데 당시 제제(帝制)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원세개는 제제 부활과 황제 취임에 대한 일본의 협조를 조건으로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던 중에 연합 측의 요청에 따라 중국도 참전하여 전승국이 되었으므로 파리강화회의(1919년)에 참석하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14개조 원칙에 희망을 걸면서 주권회복을 위한 5개항의 조건을 제기하였는데 그것은 일본의 21개 조항의 무효를 포함하여 열강의 세력범위 철폐, 외국군대와 경찰의 철수, 민사 재판권 폐지, 조차지 반환, 관세자주권의 회복 등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의 요구는 거의 관철되고 중국의 요구는 묵살되었다.이러한 굴욕적인 소식이 5월 1일 북경에 알려지자 국민 각 계층에 위기감과 분노가 확산된 가운데 당시 신문화운동의 중심지였던 북경대학 학생을 중심으로 북경의 각 대학과 고등전문학교의 학생들 3000여명이 5월 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21개 조항을 취소하라’, ‘매국노를 처벌하라’등의 깃발을 들고 시위행진을 하고 친일 각료 조여림(曺汝霖)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 32명이 체포되었으나 학생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6월 3일에는 북경학생연합회(北京學生聯合會)가 전국 시민*학생*노동자의 공동투쟁을 호소했으므로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동맹휴학*철시*상품불매 운동이 전개되고 지식인과 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 상인, 노동자들도 가세하여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문/어학| 2008.03.27| 5페이지| 1,000원| 조회(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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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활동과 그의 사상 졸업 논문
    -목차-머리말1. 일본 내 한인 아나키즘의 수용과정2. 박열의 생애와 무정부주의사상의 수용3. 박열의 활동과 그의 사상(1)박열의 무정부주의 단체활동(2)박열의 무정부주의 사상1. 급진적 아나키즘 혁명론2. 박열의 해방이후 자주 독립국가 건설 방향(3)박열의 민족주의적 특성맺음말박열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무정부주의를 주장한 아나키스트였으며 실천적 독립운동가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서 민족의 독립과 권익을 위해 싸웠으며 해방 후에도 자주적인 민족국가, 계급의 대립 없는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해방 전 일본에서 그는 흑로회, 혈거단, 흑도회등을 이끌어 나갔고 해방 후에는 신조선건설동맹 위원장과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우파 대열에서 앞장서기도 했다.하지만 현재 박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 지지 못했다. 이는 현재 박열에 대한 연구 성과 또한 거의 없으며 그에 대한 연구논문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단순히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로, 6*25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잊혀지고 기피된 인물이 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박열에게 아나키즘은 일제의 강권주의에 대치되는 구원의 이념이었다. 그래서 일본 아나키즘의 거두 오스기 사카에와 교우하게 되고 강권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살해 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박열의 사상적 근거를 이룬 것은 조국해방을 염원하는 민족주의였다.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상극인 관계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배격했고 해방 후에도 이승만을 도와 건국운동을 지원했다. 그런데도 북한에서 활동 했다는 이유로 기피인물이 되고 잊혀진 독립지사로 역사에 묻혀 져온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잊혀져 있던 박열에 대해, 과연 그가 어떤 일을 해 왔으며 어떠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1. 일본 내 한인 아나키즘의 수용과정일본에서 활동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계급의 착취에 맞서 민족해방과 신 사회 건설을 위한 아나키즘운동을 전개했다. 한인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 이와사 사쿠타로와 만나 그들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로의 첫 발을 내 딛는다.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일본의 발전된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내 민족적 자각심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자연히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19년 2*8독립선언과 국내의 3*1항쟁으로 독립의식이 고취되면서 1920년대에 들어 일본에서는 유학생과 노동자 사이에 일본의 혁신세력과의 연대가 형성되어갔다. 이러한 현상은 종래의 개별적이고 소극적인 운동에서 탈피하여 국제적 연대의식이 첨가됨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민족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일본 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억제하면서 민족적 전통을 지키는데 머물렀으나 점차 가중되는 일제의 박해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여 민족운동은 보다 조직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3*1항쟁을 전후하여 국제적 조류가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발흥한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1921년 10월 원종린은‘신인연맹’이란 사상단체의 조직을 계획하고 창립취지서를 발표하여 10여명의 동조자를 얻었다. 그는 또 이와 는 별도로‘흑양회(黑洋會)’를 조직하고자 준비하여 1921년 11월 29일 동지 20여명이 회합하여‘흑도회(黑濤會)’를 발족시켰다. 이 무렵 박열은‘혈거단(血擧團)’이란 단체를 조직했다. 그 목적은 조선인의 사상퇴폐문제와 공공연히 친일을 표방하고 일본정부와 일본의 사회단체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조선인 학생과 노동자 조직을 분열, 와해시키려는 자들을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박열은 이들이 조선민족의 체면을 오손시키고 독립운동에 저해된다고 단정하면서 이들 타락분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혈거단을 조직한다고 그 취지를 동지들에게 밝혔다. 혈거단이 처음 조직되었을 때의 명칭은 ‘의거단(義擧團)’이었으나 곧‘철거단(鐵擧團)’으로 고치고 나중에 혈거단으로 바꾸었다. 명칭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단체는 물리적인 힘을 써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일본정부가 이 사건을‘대역사건’으로 확대시킨 의도는 관동재진재로 인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과 진재의 와중에서 수많은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여 국제적인 비난과 지탄이 빗발치자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실제로‘대역음모’세력이 있었음을 내외에 알리려는 데 있었다. 일본관헌은 박열의‘대역사건’을“대중의 반역을 선동한 무정부주의의 선동과 직접폭력론을 목적으로 조직된‘불령사’라는 비밀조직이 황태자 암살을 음모했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이른바 황실에 대한 불경사건으로 꾸몄다. 박열의‘대역사건’이란 것이 발표되자 일본의 국내의 신문들은 연일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박열의 동지들은 물론, 도쿄의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총궐기 태세로 수감 중인 박열을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엄격한 검열로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보도되지 못했고, 그저‘대역사건’이라는 정부의 발표내용과‘국경을 넘은 애정사건’이란 센세이셔니즘으로 보도됐을 뿐이다.대역사건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불령사 회원들이‘보호’라는 명목으로 일제히 체포되었다. 그러나 일본경찰은 보호검속 기간이 지났음에도 이들을 석방시키지 않고 오히려 경찰서에 유치하였다. 이들에 대한 취조 과정에서 박열이 폭탄을 구입하고자 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일본은 이것을 대역사건으로 비화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열과 가네코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풀려났다. 그러나 곧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도중 가네코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으며 박열은 일제가 패망할 때 까지 복역하다가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이는 일본의 항복과 함께 진주한 미군사령관의‘정치범 즉시 석방’에 관한 포고령에 의해 이루어진 석방이었다. 1924년부터 1944년까지 만 21년이 동안의 옥살이었다. 기나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석방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47세의 장년이었다. 그가 20년이 넘는 옥중생활을 견뎌낸 것은 그의 굳은 신념이었다.“인간은 살석했다. 창립 당시의 간부는 최고위원 조소앙*안재홍*오하영, 상무위원으로 이들 외에 윤기섭*최동오*엄항섭*김약수*박열*박보렴*원세훈*노일환*명제세*조헌영*박승호*김효석*구중회*장연송*황윤호*양재하*김동영*신석빈*류기수*김의환*김칠성*김장렬*구덕환*권태희*김헌식*김경배 들들이 참여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창립 초기에는 3명의 최고 위원제로 운영되다가 얼마 후부터 회장제로 바뀌어 박열이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전한다.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창립 대회는 다음과 같은 7개항을 협의회의 행동강령으로 채택했다.1. 남북의 전 조선 땅에서 모든 군대는 무조건 즉시 철수하도록 할 것2. 외국군대가 완전히 철수한 후 미*소 등 유관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며 불간섭하고 자주권 보장을 선언하고 약속하도록 할 것3. 남북한 군대를 10만 명 선으로 축소하고 모든 군사장비의 반입을 반대하며 외국과 맺는 군사행동을 폐기하도록 할 것4. 남북의 모든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정치협상회의 또는 연석회의를 소집하고 나라의 평화적 통일문제를 협의하며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남북의 통일적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나라의 완전 통일을 앞당기게 될 것5. 남북협상에서 통일헌법의 초안을 토의, 합의하고 전 조선적 직접, 비밀, 평등에 입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입법기관을 설치, 통일 헌법을 채택하고 합법적 통일 정부를 구성하여 국제적 중립화를 선언하도록 할 것6. 남북간의 자유로운 내왕과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를 실현하고 남북의 모든 정당, 단체들의 집회, 결사 등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실시하도록 할 것7. 통일된 후 중립국으로서 국제적 자유를 확보하고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모든 균등의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도록 할 것이 단체는 또한 규약에서“협의회는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독자적 민족세력과 민족진영의 대표로서 활동한다”“협의회에는 정견*신앙*재산 유무관계*과거 활동 여하 등을 불문하고 협의회의 행동강령과 규약을 찬동 승인하는 개인*단체 등이 가의견을 유린하고 법률을 설정하여 사회민중의 의사를 강제하고 있으므로 일종의 국가주의의 변형에 지나지 않으며 러시아의 민중은 60만 상비군대의 위협 속에서 구식의 로마노프가 대신 공산당의 신식의 흡혈귀에 의해 가장 조직적으로 착취당하고 기계화되어 가고 있다고 보고 파악하였던 것이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권력과 지배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던 박열로서는 무계급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과도기로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설정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기구를 창설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책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박열리 가지고 있었던 민중에 대한 불신 또한 박열로 하여금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다른 길을 걷도록 하였으며 파괴를 위한 파괴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몰락해 가는 소자산계급의 관념적 급진주의의 소산에 불과할 뿐이다.2.박열의 해방이후 자주 독립국가 건설 방향박열에게 있어서 민족의 독립과 민주사회의 건설은 무정부주의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제의 실시가 필주적인 것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조선은 봉건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가 구상한 민주사회가 정치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중앙과 지방을 통해서 민치조직이 확립된 사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각급 기관의 구성이 각각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완성되고 그 기관 자체가 민주화되며 각자가 민주적인 교양을 쌓고 민주적 운영에 위임한다.박열은 지방자치제를 철저하게 실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방행정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최저변의 부락*면*읍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민주화가 취해져야 하며 이 최저변의 말단조직부터 갱신되어야 민주정치의 기반이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의 기반이 이 최저변의 국민의 실생활 면에서 두어지지 않으면 표면적이고 기만적인 쇄신으로 끝날 것이며, 결국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였다.
    인문/어학| 2008.03.27| 17페이지| 2,500원| 조회(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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