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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 시냑Paul Signac
    폴 시냑Paul Signac차례Ⅰ. 서론Ⅱ. 본론1. 폴 시냑의 생애2. 신인상 주의3. 폴 시냑의 작품Ⅲ. 결론Ⅰ. 서론폴 시냑(paul signac)의 생애를 시작으로, 그가 생존하였던 그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예술형성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폴 시냑과 쇠라를 대표하는 신인상주의를 알아보고 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본다. 또한 폴 시냑 작품의 변천 과정과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그의 예술 작품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Ⅱ. 본론1. 폴 시냑의 생애 (1863.11.11 ~ 1935.8.15)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J.P.기요맹의 제자이다. C.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가 될 뜻을 세워 1883년 20세 때 아카데미 리브르 드방에 들어가 인상파의 화풍을 익혔다. 1884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 처음 출품하고, 그때 출품된 G.쇠라의 작품에 공감하여 그와 친교를 맺고부터는 색채의 동시대비의 이론과 기법을 연구하여 그 성과를 1886년의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쇠라와 함께 발표함으로써, 신인상주의의 기치를 선명하였다. 그의 작품은 과학적 점묘주의에서 나중에는 쇠라의 점묘보다 큰 점을 이용한 모자이크풍의 묘사법으로 변화했는데, 풍경화가로서 각국의 바다 풍경, 특히 프랑스 각지 해항(海港)의 풍경그림에 특색 있는 작품이 많다.앙데팡당전의 창설자의 한 사람이며, 1908년부터 종신토록 앙데팡당전의 회장을 지내면서 청년화가들을 격려하였고, 신인상주의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 》(1899) 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생애를 신인상파 지도자로서 정열적으로 활약하였다. 주요작품에 《마르세유항의 풍경》(1905) 등이 있다.폴 시냑은 신인상주의 화가이자 이론가이다. 팔레트에서 섞지 않은 물감의 색점을 캔버스 위에 찍어, 병치된 색채가 관람자의 눈에서 혼합되게 함으로써 순수하고 밝은 화면을 만들고자 했던 점묘법 혹은 분할주의 기법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는 신인상주의는 조르주 쇠라에 의해 개발되었으나,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이후 신인상주의를 이론화하고 실천하여 후대에 이를 알리고, 이 새로운 회화 언어를 수많은 화가들이 시험하게 한 사람은 폴 시냑 이었다.[아스니에르에서의 목욕 1883~84년, 캔버스 유채, 200*30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시냑은 곧 쇠라의 친구이나 제자가 되고 이 두 사람은 서로 연구를 함께 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조언도 주곱다았다. 시냑은 쇠라에세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에서 흙색을 쓰지 말고 강렬한 색채의 점을 추가해볼 것을 권했고 쇠라는 실제로 그렇게 작품을 수정했다. 1885년에 쇠라는 시냑에게 분할주의를 써 볼 것을 권했다. 1886년이 되면 두 화가 모두 점묘법을 사용하게 된다.2. 신인상주의쇠라, 시냐크 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 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빛의 분석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계승하였고, 인상타의 본능적, 직감적인 제작태도가 빛에만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이를 위해, 색을 원색으로 환원시키고,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즉,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위의 시각 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나가면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게 하는것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는 ‘황금분할(黃金分割)’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6)와 시냐크의 《펠릭스페네옹의 초상》(1990)이다.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 207*308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시냑은 당대의 실내 정경을 주제로 색채 분할과 점묘를 실험했다. 무정부주의자와 잡지(레뷔 앵데팡당)관련자들과 어울렸던 시냑은 작가 펠릭스 페네옹과 친해지게 되는데 페네옹은 쇠라의 1886년 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보고 이 회화에 ‘신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늘 자신감에 차있고 명석한 대화에 능했던 시냑은 신인상주의의 대표적 선전가가 되었다.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와 시냑의 친구였던 그의 아들 루시앙 피사로도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적극 수용했다. 쇠라는 거기서 시냑을 만나 함께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써, 캔버스에 색칠을 해 나갈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뒤섞지 않으면서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위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방법은 와토, 들라크루아, 터너 등이 이미 사용하였으며 인상주의자 중 르노아르가 최초로 사용했다.쇠라등의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기법을 좀 더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자신의 기법에 '점묘주의' 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과학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색채 분할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시켰다. 세잔느와 더불어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 인물로 취급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신인상주의는 뤼스, H.크로스, D.피에, C.앙그랑, 리셀베르크 등의 동조자를 얻는 한편, 고흐, 고갱, 피사로 등에게도 한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형이론의 존중과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성주의 및 구도나 형태의 기하학성 등 여러 특색은 20세기의 큐비즘과 오르피즘, 추상회화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회화운동의 이론을 체계화한 시냐크의 저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1899)가 있다. 신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쇠라과 시냑이 있다.3. 폴 시냑의 작품1883년에 그림 [젠느빌리에 거리, 파리 근교]와 같은 도시 외곽 풍경화에는 인상파적인 양식으로, 멀리 보이는 공장 굴뚝과 같은 근대적인 도시 이미지가 포착되어 있다.[젠느빌리에 거리, 파리 근교 1883, 73*92cm 오르세 미술관,파리]1893년 작품 [양산을 든 여인]의 모델은 그가 1892년에 결혼한 베르트 로블레이다. 결혼 이후 그는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생 트로페로 이주하여 평생의 취미가 된 항해를 시작했다. 그의 항해 여행은 생 트로페의 집을 출발하여 파리의 거의 모든 항구와 이탈리아, 네덜란드, 콘스탄티노플 등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여행에서 본 모티브를 스케치하여 작업실로 돌아와 유화로 수많은 바다, 항구 풍경화를 완성했다.[양산을 든 여인 1893, 82*67 오르세 미술관, 파리][콘스탄티노플 풍경 1907년, 93*74 마르세이유 미술관, 프랑스][ Snow, Boulevard de Clichy, Paris 1886]는 다른 점묘법으로 그려진 그림들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 이 겨울을 소재로 하였다고 해서 춥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겨울햇살 이 눈에 내려앉아 밝고 따듯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 의 대표적인 색으로 흰색, 파랑, 회 색등을 들 수 있겠지만 이 그림의 대표적인 색으로 노랑, 흰색, 파랑이 쓰여져 햇살을 가득 머금은 한낮의 겨울 풍경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일상의 소박한 정경을 옮겨놓은 듯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그 주제가 눈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이 그림 안에서의 점묘화법은 크게 답답하거나 억지스럽지 않고 조용히 풍경과 어우러져 소통한다. 이 그림의 눈여겨 볼 것은 하늘과 나무인데 그림 안에 하늘은 노랗게 물들어있고 나무는 파랗게 얼어있다. 이것은 빛을 표현하는 인상주의의 영향이겠지만 시냐크에 의해 하늘과 나무는 재해석 되어 빛을 담고 다시 그 빛을 그림에서 발산하고 있다. 나뭇가지 끝에 내려앉은 눈의 간지러운 무게와 흩날리는 눈의 묘사는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그날의 아련한 바람까지 몰고 와 흥을 안겨준다. 작가의 구도적인 생략과 확대가 들어간 재미있는 풍경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포근한 햇살을 품고 있다.
    예체능| 2012.12.24| 10페이지| 1,000원| 조회(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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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차례Ⅰ. 서론Ⅱ. 본론1. 터너의 생애2. 시대적 배경 및 경향3. 터너의 작품Ⅲ. 결론Ⅰ. 서론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생애를 시작으로, 그가 생존하였던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정신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예술형성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터저 작품의 변천 과정과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그의 예술 작품을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Ⅱ. 본론1.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생애 ( 1775. 4. 23. ~ 1851. 12. 19.)윌리엄 터너는 영국의 화가이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회화에 손을 대어 왕립 미술원에서 그림 수업을 한 뒤, 잠깐 사이에 준회원으로부터 27세 되던 1802년에 정회원으로 올라갔다.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 획기적인 표현을 낳은 화가이다. 일찍이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터너의 첫 번째 직업은 건축가의 어시스턴트였다. 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4세 즈음으로 그가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초기 작업을 살펴보면 드로잉과 수채화 작업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유화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볼 수 있다. 1796년 작품인 [바다의 낚시꾼(Fishermen at sea)]은 그가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한 첫 유화로서, 21세의 젊은 나이에 터너는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 학교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27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성공한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다른 작가들이 전시 공간으로 왕립 아카데미를 이용한 데 반해, 할리 스트리트의 자택에 마련된 넓은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했다. 다른 화가들의 수많은 작품들과 함께 전시해야 하는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와는 달리, 터너는 그곳을 자신의 작품만을 위한 공간으로 꾸밀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다 쉽게 알릴 지역을 막론하고 농업중심 사회에서 공업중심 사회로 이행하는 것을 뜻하지만,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영국에서 1780년부터 1840년까지 일어난 대규모 산업화를 가리킨다. 그 변혁의 주요 동력은 터너의 그림 속 증기선에 사용된 것 같은 증기기관의 발명과 그밖의 기술 혁신이었다.물론 증기기관의 발명만으로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고, 농업과 가내수공업이 주를 이루던 사회가 기계공업 사회로 변모한 것은 아니다. 영국은 18세기부터 그 여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봉건사회적 길드가 공장제 수공업으로 전환됐고, 농업의 대형화에 따라 몰락한 군소 농민들이 도시의 노동자가 됐다. 게다가 식민지 개척으로 면화를 포함한 풍부한 자원이 해외에서 들어오고 있었고 해외시장이 커지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18세기 후반에 새로운 방적기가 연이어 발명되면서 본격적인 공장 시대가 열렸다. 기계 제작에 필요한 철을 가공하는 제철업과 제철을 위한 석탄산업이 발전했으며, 마침내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증기기관으로 대규모 기계를 돌릴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증기선과 증기기관차가 나타나 운송의 혁신이 일어났던 것이다.이런 격변을 미술가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어떤 비평가들은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가 위대한 옛것에 대한 향수와 새로운 기계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드높은 돛대를 단 창백한 범선 테메레르는 고귀하고 영적으로 묘사된 반면 그것을 끌고 가는 검은 증기선은 무미건조하고 세속적으로 묘사돼 있다는 것이다.당시 많은 영국인은 특별히 목적지가 없어도 증기기관차에 오르곤 했다. 기차라는 새로운 탈것이 주는 그 놀라운 속도감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획기적인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도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에~”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듯이 기차를 타는 것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일종의 ‘놀이’였다.런던 토박이 터너는 ‘시골영감’은 아니었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이미 영감님이긴 했다. 그는 어느 비 오는 날 기차를 타고 가면서관차가 더욱 극적으로 속도감 있게 모습을 드러내게 해준다. 빗줄기와 안개를 뚫고 나타나는 기차의 불빛을 보고 있으면 증기기관의 굉음까지 귀에 들릴 듯 박진감이 넘친다. 고전주의 풍경화들과 달리 거친 붓질로 묘사된 빛과 대기의 떨림이 역동성과 속도감을 더해준다. 이런 작품이 나온 것은 터너가 동적인 에너지에 주목했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혁명이 모든 것의 속도를 빠르게 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3. 터너의 작품생전에 무려 1만 9,000점의 스케치와 200여 권의 스케치북을 남긴 터너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그것들을 전부 기증했다. 그의 유가족과 기증자들 사이에 있었던 오랜 법정 투쟁 끝에 1908년이 되어서야 조지프 듀빈 경이 그의 작품들을 수용하기 위해 테이트 미술관 내에 별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28년 템스 강의 범람으로 테이트 미술관의 창고가 침수되자 안전을 위해 그의 모든 데생과 수채화들이 영국 박물관으로 옮겨지기도 했다.현재 그의 작품들은 2000년 이후 분리된 테이트 갤러리 중, 20세기 이전의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는 테이트 브리튼에 전시되어 있다. 터너 갤러리는 테이트 브리튼의 35번부터 45번 전시실까지 11개의 방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생전에 세상을 다니며 스케치북에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현재에 고스란히 이어져 온라인상에서는 그의 작품과 생애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Turner Online이 전 세계의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이 그림은 트라팔가르해전에서 나폴레옹군을 물리친 전함 테메레르호가 선박해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그린것이다. 트라팔가르해전은 1805년 10월 21일 넬슨의 영국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스페인 남서쪽 끝의 트라팔가르에서 격파한 해전으로 이 해전을 통해 영국은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100여년 동안 지속되는 해군력의 우위를 획득하게 됩니다. 특히 이 해전은 넬슨이 저격병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 것장 보는이의 시선과 마음을 흔드는 부분은 전함 테메레르를 둘러싸고 있는 빛과 색채 혹은 빛과 색채 속에 녹아든 물과 불입니다. 태양이 이제 막 저물어가며 하늘과 강물을 불타는 듯한 붉은색으로 물들이지만, 강이며 하늘이며 차가운 초록빛으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말로는 다 표현할 길 없는 미묘한 순간이 전함 테메레르호를 감싸고 있습니다. 빛과 색채에 대한 그리고 물과 불과 대기에 대한터너의 뛰어난 작품들이 많지만, 이 작품속의 표현은 유독 대상에 대한 작가의 복잡미묘한 감정-단순한 애국심도 동정심도 아닌- 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녹아들어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작가가 우연히 템즈 강가를 걷다가 테메레르호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 광경을 스케치했을때의 심정과 성찰에 함께 빠져들게 합니다. 1842년. 캔버스에 유채. 87*86.5cm. 런던 테이트 미술관 1796년. 캔버스에 유채. 91.5*122.4cm. 런던. 테이트 미술관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한 터너의 첫번째 유화 작품으로 달빛 아래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바다와 어부들의 모습을 묘사한 풍경화이다. 터너는 자연을 있는 그래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적절히 이용한 표현 기법으로 풍경을 재창조했다. 빛에 따른 색의 변화와 효과를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터너는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눈보라 : 알프스 산캑을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 1812년. 캔버스에 유채. 145*236.5cm. 런던. 테이트 미술관'태양의 화가'라 불리는 터너의 강렬한 기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터너가 생생한 현장을 작품에 담기 위해 선원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나가 네 시간 이상 사투를 벌이며 관찰한 뒤에 완성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림에서 보이는 모습은 사실적인 자연 풍경이 아니라 빛의 이미지로 재구성된 모습이다. 눈보라치는 거친 바다에 맞서는 인간의 투지와 극적인 상황을 그려냈다. 1835년. 캔버스에 유채. 92.7*123.2cm. 클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밝은 색과 어두운 색.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대비시켜 극한 혼란과 갈등의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다[맘스베리 수도원의 폐허] 1792년 경종이에 수채, 19x26cm, 베리 아트 갤러리터너의 이 작품은 그가 17세 되던 해 여름에 했던 첫 스케치 여행의 결과물이다. 비록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그려졌지만, 그의 초기 걸작으로 꼽히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중세 수도원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하여 원래의 색보다는 회색 계열의 색과 초록색, 그리고 파란색이 더 강조되었다. 건물의 위쪽으로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표현되어 있다. 임시 거처와 울타리 등의 모티프는 이 그림이 수도의 남쪽 건물 날개 부분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요소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남아 있는 수도원의 모습을 통해서 고대 문명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당시의 낭만주의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터너가 당시 여행을 하며 들고 다녔던 스케치북은 현재 테이트 브리튼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스케치북을 통해서 그가 스케치를 한 후에 자신의 아틀리에로 돌아와 작품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그의 초기 여행은 영국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특히 1790년대에는 영국 북부와 스코틀랜드를 여행했다. 그는 이 국내 여행을 통해서 산맥과 폭포, 협곡 등 자연의 거대한 형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이 잠시 주춤해질 무렵, 그는 첫 번째 국외 여행을 하게 되었다. 스위스와 사부아 지방을 통해 알프스 산맥의 거대함을 경험하고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둘러볼 수 있었던 이 여행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터너의 중요한 두 번째 국외 여행은 나폴레옹 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그의 나이 44세가 되어 이루어졌다. 그가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던 시기에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 이 여행은 그에게 풍경화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고대 문명의 역사적 유적으로 가득 찬 풍경을 경험함과 동시에,다.
    예체능| 2012.12.24| 13페이지| 1,000원| 조회(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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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항정신
    유럽인의 삶 속에숨어있는 저항정신우리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억누르는 모든 체제, 권력, 빈곤, 그리고 억압에 대하여 저항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마땅히 저항하여야 할 때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처사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 역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자격을 잃게 된다. 3.1 만세운동이 위대하였던 것은 맨 몸으로 일제의 총칼 앞에 온 몸으로 저항하였다는 사실이다.북유럽의 핀란드(Finland)의 저항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핀란드는 에스토니아(Estonia)란 나라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이들 두 나라는 국토의 넓이도 비슷하고 인구 숫자도 비슷한데다 같은 종족이다. 그런데 핀란드는 국민소득이 3만2천 달러를 넘어서고 에스토니아는 1만9천 달러 이다. 비슷한 조건의 두 나라가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나게 되었을까? 저항정신이 있고 없음에서 오는 차이였다. 핀란드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히틀러의 군대가 들어 왔을 때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히틀러 군대 다음에 소련의 스탈린 군대가 밀어 닥쳤을 때에 온 국민들이 죽기를 작정하고 싸웠다. 얼마나 악착같이 투쟁하였던지 소련군 쪽에서 휴전을 제의하고 독립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에스토니아는 그렇지 못하였다. 히틀러의 군대에도 스탈린의 군대에도 처음부터 항복하고 말았다.그런 역사의 결과 핀란드는 일류 선진국으로 살고 있고 에스토니아(Estonia)는 중진국이다. 불의와 억압에 대하여 저항할 줄 아는 백성들이 위대한 역사를 창출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3.1 만세운동이 우리들 후손들에게 값진 유산이 되는 것이다.이렇듯, 유럽에서의 독립전쟁(1775-81)과 프랑스 혁명(1789)이 저항의 정신을 퍼트린 이후로 유럽인들의 삶속에 숨어든 저항정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프랑스에서 고등학생들이 일찌감치 거리에 나선 것은 연금개혁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이 아니라 닥쳐올 직업시장의 척박함을 호소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등교도 하기 전에 학교를 포위하고 있는 CRS(과격시위진압대)의 위압적인 태도와 거리에 나선 고등학생들을 향해 플래시 볼을 날리고 곤봉과 최루탄으로 강경대처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연금 개혁안이 법안 양원에서 통과되었다고 하더라도 학생들과 노동계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저항정신은 프랑스인들의 정체성이다. 프랑스 대혁명, 2차대전 시의 레지스탕스, 그리고 6.8학생혁명의 주인공 프랑스인들의 저항정신이 21세기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르코지 정부의 물살을 뚫고 과연 어떻게 생존할 것 인가.이런 사르코지의 개악에 맞선 지난10월 19일 대중 파업, 시위, 학생 반란은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의 정유소 12 곳이 모두 무기한 파업에 동참하면서 연료 부족 사태가 나라 전체로 번지고 있다. 화물차 운전사들도 파업에 들어갔고, 주요 도로에서 거북이 운행을 하는 ‘달팽이 작전’을 펼쳤다.프랑스 전체 4천3백여 곳의 중고등학교 가운데 거의 1천여 곳이 휴교했고, 그 가운데 6백 곳은 봉쇄됐다. 중고등학생들이 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언론들은 이 운동을 ‘제2의 68혁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조들 간 경쟁과 기층 노동자들의 압력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운동을 팔아먹는 것으로 보이길 원하지 않는다. 노조 연맹들은 11월 23일 추가 행동의 날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그러나 이전 행동의 날과는 달리 11월 6일 행동의 날에는 전국적 파업과 대규모 시위보다는 토론회와 작업 중단을 포함해 다양한 활동들이 벌어졌다.?활동가들은 이런 활동들에 최대한 전투성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해야 한다.?이 운동의 최대 장점은 놀라운 단결력이었다.1968년의 프랑스, 그해 2월 고다르와 브뉘엘을 위시한 누벨바그 영화인들의 행진은 당대의 저항정신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강력한 전조였다. 같은 해 5월 파리의 대학들은 일제히 봉기해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샤르트르의 책을 읽고 극장에서 누벨바그 영화를 감상했으며 광장에서 짱돌을 들었다.프랑스인들에게 샹송 가수의 거장 네 명을 꼽아보라면 그들은 우선 백이면 백 주저없이 조르주 브라상스를, 그리고는 벨기에 가수 자크 브렐을 꼽을 것이고, 차례로 레오 페레와 장 페라를 열거할 것이다. 예의 브라상스는 무정부주의자이며 음유 시인이고, 자크 브렐은 그의 샹송 '장 조레스'에서 보여주듯 좌파 지식인이다. 모나코 태생의 레오 페레는 파리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사회과학도 출신의 공산주의 성향의 가수이고, 장 페라는 공산당 소속의 가수이다. 이쯤 되면 샹송의 사회성은 극명하게 드러난다.그들의 강한 저항 의식과 가사의 정치성에도 불구하고, 사후 10년이 넘었으나 한결같이 브라상스가 모든 프랑스 가수의 우상으로 존경받고 있고, 텔레비전 출연을 거부하는 공산당 가수 장 페라의 64년 앨범 '밤과 안개 / 라 몽타뉴'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인 40만 장이 팔려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운 것 등은 그들 저항 가수들이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샹송 가수들의 사회성은 이들처럼 노래의 메시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직접 정치의 장에 뛰어드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브 몽탕의 경우 '고엽'풍의 대부분 분위기 있는 서정 가요를 주로 불렀으나, 레오 페레의 노래나 원래 레지스탕스 노래였다가 전후 대중 가요로 정착한 '빨치산의 노래'도 불렀다. 또한 젊은 시절 그는 열렬한 공산당원이었고 기성 정치인에 회의를 느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려고 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고용시장의 유연화를 도모하겠다는 프랑스의 새 고용법이 2개월여에 걸친 노동계와 학생들의 극렬한 저항에 결국 무릎꿇고 말았다??CPE는 고용주가 26세 미만 청년을 고용한 뒤 첫 2년 간은 사유설명 없이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함으로써 노동시장 유연화를 보장하겠다는 조치였다. 시라크 대통령은 지난 1월 16일 발표된 이같은 법안에 대해 국민적 저항이 들끓자 지난달 31일 시범 고용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이고 해고사유에 대한 설명을 의무화하도록 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그러나 학생들과 노동계는 CPE의 완전철폐 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달 17일까지 법안을 철폐하라고 '최후통첩'을 내놓은 상태였다. 시라크 대통령의 CPE 조항 폐기 발표는 이같은 '피플 파워'에 대한 항복선언에 다름아니다.?엘리제궁의 이같은 발표에 대해 학생들과 노동계는 시위대의 승리라며 일단 환영의 뜻을 표했다.???삶에서의 또다른 저항정신을 살펴보자. 태그들,?이 거리낙서들, 이 허용되지 않은 새김들의 역사는?곧 저항의 역사다. 80년대 사회적 불안의 폭로들인 이 태그들은 파리의 신문들에서 분류되고 보호되어야할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차라리?시각적인 폭력의 새로운 도시적 형태로 그려졌다.?그리고 마침내 웅장한 그랑빨레에 전시된?작품은 건축가 알랭도미니끄 갈지아가 세계적인 낙서예술가들에게 요청한 300점의 작품들이다.??지난 10월14일에는 그리스 아테네도 저항으로 뒤흔들렸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그리스 정부와 IMF의 긴축정책 강요에 반대하는 시위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공무원 노동자들은 체불 임금을 요구하며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를 점거했다. 파업 중인 철도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함께 그리스 의회 앞 시위에 참가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민영화에 맞서 투쟁하고, 학생들은 교육예산 삭감에 반대해 전국에서 대학 건물을 점거하고 있다.통신 노동자들 역시 임금 문제로 파업했고, 지방정부 노조들은 수당 삭감에 항의해 조합원들이 오는 지방 선거 관리 업무를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람브라키스 프레스그룹의 언론 노동자들은 해고에 맞서 파업했고, 10월 7일에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긴축에 맞선 파업도 있었다.
    인문/어학| 2012.12.24| 4페이지| 1,000원| 조회(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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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축구 4대리그
    유럽 축구 4대리그와 K리그목차1. 서론2. 본론1) 스페인 프리메라리가2) 이탈리아 세리에A3) 독일 분데스리가4)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5) 유럽축구의 마케팅3. 결론1. 서론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는 무엇일까? 누구는 축구라고 말할 것이고, 누구는 야구라고 말할 것이며, 누구는 F1이라고 말할것이다. 인기에는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주관적일지 모른다. 이러한 인기 스포츠 중에서 축구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세계 경제 시장에서 가장 큰 손인 미국에서는 축구의 인기는 4대 스포츠에도 끼지 못하는 정도이다. 사커맘이 생기는 등 축구에 대한 인기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국의 4대 스포츠의 인기는 굳건하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그 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유럽에서 최고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당연 축구하고 할 수 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선진국은 이미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프로 축구리그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프로축구는 전세계를 걸쳐 5억 명의 시청자를 보유한 리그이다. 월드컵은 어떠한가?이번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의 전 세계 시청인구만 해도 7억 명이나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2. 본론1)스페인 프리메라리가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기술 축구의 본고장으로서 역사는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대결로 요약할 수 있다. 프랑코 독재 시절 핍박받았던 카탈루냐 사람의 희망이 바르셀로나였다면, 카스티야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팀이 레알 마드리드였기 때문이다. 이들 팀의 맞대결은 '엘 클라시코(el clasico) 더비' 라 불리며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한다. 현재 레알 마드리드에는 지단, 베컴, 호나우두, 호비뉴, 카를로스, 라울 등이 활약하며 바르셀로나에는 호나우디뉴, 메시, 라르손, 에투 등이 뛰고 있다. 양강을 위협하는 팀으로는 '박쥐 군단' 발렌시아를 꼽을 수 있으며, 셀타 비고는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가끔씩 강호들을 꺾는 이변을 연출한리가는 세계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축구를 구현한다. 라틴 축구의 유연성과 기술 창의성이 돋보이며 유럽 리그 순위에서 1위를 유지한다. 하지만 스페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 간의 지나친 경쟁심은 오히려 스페인 대표팀의 분열을 조장하는 요소이기도 하다.프리메라리가에서 지켜볼 한 선수를 꼽으라면 브라질 출신 호나우디뉴를 선책하고 싶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거쳐 간 마라도나, 호마리우, 호나우두 등을 넘어서는 신의? 경지의 플레이로 고집불통인 바르셀로나 팬들을 매료시켰다. 한국 선수로는 이천수가 2003년 7월 레알 소시에다드에 입단했지만 누만시아로 임대된 후 적응에 실패하고, 국내로 복귀했다. 현재는 청소년 대표 출신인 이호진이 라싱 산탄테르에 입단하여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2)이탈리아 세리에A? 이탈리아 세리에A는 수비와 역습 축구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리에(serie)는 영어로 '시리즈'를 뜻한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전 세계축구 선수의 엘도라도라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최근에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이탈리아 축구하면 떠오르는 게 '빗장 수비(카테나치오)' 이듯이 세리에A는 지나치게 수비적이어서 재미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불러들여 이탈리아 수비수들과 매주 벌이는 공수 전쟁을 꼼꼼히 살피면 치밀한 전술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촘촘한 수비 라인을 환상의 기술로 뚫는 최고의 선수들을 '판타지 스타' 로 추앙한다. 유벤투스의 전설인 미셸 플라티니, 로베르토 바지오 등이 판타지 스타에 걸맞은 스타다.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벌전은 밀라노에 연고를 둔 AC 밀란과 인터 밀란의 더비 매치다. 유니폼 색깔을 본뜬 두 팀의 애칭은 AC 밀란이 '로소네리(Rossoneri, 적-흑)'. 인터 밀란이 '네라주리(Nerazzuri, 청-흑)'다. 노동자의 지지를 받는 AC 밀란과 중산층 이상 화이트 칼라의 응원을 얻는 인터 밀란이 한 경기장인 산시로에서 벌이는 대결은 세리에A 최고의 백미로 꼽힌다.A 셰브첸코, 카카 등이 활약 중이고, 인터 밀란에는 피구, 아드리아누가 속해 있다. 하지만 세리에A의 최다 우승팀은 토리노에 연고를 둔 유벤투스다. 무려 28회 우승. 유벤투스의 독주를 저지하려는 밀란 더비의 추격전이 매년 반복된다. 한국 선수로는 안정환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페루자에서 뛰었다. 하지만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펼친 16강전에서 골든골을 터뜨렸다는 이유로 팀에서 퇴출당해 화제를 모았다.3)독일 분데스리가?독일 분데스리가는 차붐을 배출한 과학적인 리그이다. '연방 리그' 라는 뜻의 분데스리가는 '차붐' 차범근(현 수원삼성 감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지난 1980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후 레버쿠젠을 거치며 10년간 308경기에서 98골을 잡아낸 차범근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축구 영웅이었다. 특히 1980년과 1988년 다른 팀 소속으로 유럽축구연맹(UEFA)컵에서 우승한 불세출의 스타다. 세 차례 월드컵 우승과 세 차례 유럽선수권 우숭의 역사가 말해주듯 독일 축구의 저력은 과학적인 체계와 조직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차붐이 활약했던 1970년대의 전성기를 지나면서는 바이에른 뮌헨을 제외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여주는 팀이 거의 없다.도르트문트-살케의 중부 라인 더비 매치, 브레멘-함부르크의 북부 독일 더비 매치 등의 경쟁 관계를 꼼꼼히 살펴보고, 독일 남부의 터줏대감 바이에른 뮌헨이 배출한 베켄바워, 뭘러, 회네스 등과 역사를 살펴보면 독일 축구의 저력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바이에른 뮌헨은 한일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한국에 통한의 결승골을 안긴 미하엘 발라크가 홀로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독일 월드컵 후에는 잉글랜드 첼시로 이적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차붐의 아들 차두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뛰고 있으며, 프랑스 메스에서 뛰던 안정환이 뒤스부르크에 둥지를 틀었었다.4)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마지막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축구 종가의 자존심으로서 전통적으로 힘과 높이, 롱 패스에 따른 '킥 앤드 러시' 등 축구를 추구해 왔지만 최근 라틴계 기교파 선수들이 대거 입성해? 힘과 기술, 스피드를 겸비한 세계 최고의 축구를 선보이고 있다.1992년에 리그 명칭을 프리미어리그로 바꾼 후 최고의 인기와 수익을 누리고 있다. 1950~196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70년대 리버풀의 전성기를 지나 1990년대에는 맨유와 아스널의 양강 체제를 갖췄다. 하지만 첼시가 지난 시즌 50년 만에 챔피언에 등극하여 새로운 라이벌 구도로 재편되고 있다. 맨유의 퍼거슨 감독, 첼시의 무리뉴 감독, 아스널의 벵거 감독 등이 매주 벌이는 설전도 흥밋거리다.이영표가 속한 토트넘과 아스널의 '북런던 더비'와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 맨유와 맨체스터 시티의 '맨체스터 더비' 등이 볼 만하다. 첼시의 드로그바, 람파드, 마케렐르, 리버풀의 제라드, 맨유의 반 니스텔루이와 루니, 뉴캐슬의 오언 등 세계 유명 스타가 즐비하다. 그 자존심만큼이나 한국 선수들에게는 인색했다. 그동안 최용수, 김도근, 안정환, 김태영, 이을용 등이 노크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박지성이 맨유에 둥지를 틀며 첫발을 내디뎠고, 이영표가 토트넘으로 이적하며 그 뒤를 이었다. 박지성은 풀럼전에서 마침내 프리미어리그 첫 골을 터뜨리며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다. 설기현은 잉글랜드 2부리그(챔피언십리그) 울버햄튼에서 활약하고 있다.5) 유럽축구의 마케팅프리미어리그는 전 세계 5억 명의 시청자를 보유한 리그이다. 그 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가장 부유한 클럽 가운데 하나도 자리잡고 있으며, 2007년 포브스의 세계 스포츠 구단 평가에서는 14억 5300만 달러의 평가를 받아 전 세계 축구 구단 중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승팀인 스페인의 국가대표 주전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선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금세기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불리는 메시 선수를 데리고 09-10시즌에 리그 우승을 일궈냈다. 또한, 아시아 시청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이번 시즌부터 경기시간을 앞당겨 편성하면서장 공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마케팅 전략을 펼치고 있다.박지성 선수가 맨유에 영입된 초기에 불티나게 팔린 이청용 선수의 볼튼 유니폼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다. 이나모토라는 유명한 일본선수는 아스날FC로 이적하며 팬들이 선수의 유니폼을 샀고, 이에 대한 수익을 통해 아스날은 많은 재정적 이익을 남기게 되었다. 혹자는 재작년에 완공된 아스날FC의 주경기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이나모토가 세웠다고 할 정도였다. 이 이야기는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프리미어리그의 선수 마케팅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염원과는 달리 박지성 선수는 맨유의 주전 선수로 뛰지 못하였고 현재도 벤치에서 뛸 준비를 하는 선수이다. 영입 초기에는 각 종 언론들은 그의 영입을 마케팅의 전략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식 주전이 아니었지만 후보로 출전하거나 간혹 선발로 출전할 때 그는 빼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그의 몸값을 톡톡히 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볼튼FC가 이청용 선수를 영입하여 티셔츠 판매뿐 아니라 팀 성적에 도움이 되는 좋은 영입을 하기도 하였다.다양한 사례에서 들어난 것과 다르게 아시아 선수의 영입은 티셔츠의 판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중계권료이다. 2002년 직후, 아니 박지성 선수의 프리미어리그 입성 직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프로축구리그를 보기에는 쉽지 않았다. 박지성 선수의 이적을 통해 한국의 축구팬들은 유럽의 프로축구를 볼 수 있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프리미어리그는 아시아 선수를 보유하면서 그에 따른 많은 중계권 수입까지 얻고 있는 것이다.프리미어리그의 두 번째 마케팅 전략은 스폰서십이다. 프로구단과 기업은 스폰서십을 통해서 금전적인 이득을 볼 수 있다. 맨유는 현재 AON이라는 보험중개업 전문회사와의 후원사 계약을 맺고 있다. 맨유는 4년간 1,440억 이라는 금액을 후원 받는다. 이렇듯 프로 스포츠에서의 스폰서십은 구단재정에 이득이 되는 다.
    예체능| 2012.12.24| 11페이지| 1,000원| 조회(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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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사회
    유럽사회이민자의 분노현재 유럽사회는 경제통합에 이어 정치통합에 성공하였으나 이민자 특히 이슬람이민자에 대한 거부감으로 안정적인 사회통합이 실현될 수 있을지 우려되는 상황이나타나고 있다. 유럽의 이민자와 이민정책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한국의 다문화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프랑스, 영국, 독일은 그들의 식민지인 이슬람국가로부터 부족한 노동력을 제공받아 경제재건을 이루었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독일은 터키에서) 프랑스에는 무슬림이민자가 전체인구의 7%인 약 400만 명이 있으며, 무슬림 이민자 수로는 유럽 최대이다. 프랑스는2차 대전 동안 약60만명의 자국 인구를 잃었고, 인구 노쇠현상을 겪게 되었다. 또한 1945년 이후 전쟁동안 국토가 피폐해진 탓에 재건사업이 급박하였고, 인구문제, 노동력문제가 심각하게 되어 1945년 11월2일 법령에 따른 ‘인구 및 가족고위위원회’와 ‘국립이민청'을 설치하고, 애쓴 결과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인 들과 마그레브출신 무슬림들을 대거 프랑스에 유입되었다. 그들은 열약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거주하였다. 1974년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는 이민자 중 무슬림이민자가 전체의 86%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74년 오일쇼크로 프랑스 경제가 어려워지자 공권력은 이민자 수를 억제하는 다양한 조치들을 취하였고, 유럽공동체 소속 국민을 제외하고는 이민의 일시적 중단이라는 중대조치를 취하였고, 외국인에게는 일체 노동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외국인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1만 프랑의 귀국보조금을 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처럼 자국의 필요에 따라 이민자들을 수입하기도하고 제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이민자들이 프랑스 내에 들어와 살고 있고, 2세대의 수가 늘어났으며, 가족들을 초청하면서 무슬림이민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 들어온 이민자의 삶의 질에 관한 재고 없이 필요에 따라 허용과 제한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그러는 동안 이민자들은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로 점점 내 몰리게 되었고, 1990년대 알제리 이민자의 주거환경은 11%가 목욕탕이나 화장실이 없고, 16%는 난방이 되지 않으며, 자기집을 소유한자가 드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데는 준비되지 않은 이민자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필요에 따라 이민을 허용했다가 이민자의 삶을 무관심한 당국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영국은 전통적으로 다문화주의를 표방해 온 나라이다. 그러나 9.11사건과 런던테러는 ‘무슬림=테러리스트’라는 공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영국사회에서 무슬림에 대한 혐오감정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이 만연하고 ‘영국성’을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영국이 이제는 이민자 없이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볼 때 영국이 다문화주의를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영국정부는 2001년 이후 ‘동화주의’ 나 ‘다문화주의’와 같은 고정된 통합방식을 버리고 새로이 들어 온 이민자들에게 ‘시민개인통합방식’을, 기존의 이민자들에게는 ‘반차별주의 통합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것은 반차별주의통합방식인데 무슬림들을 차별의 대상으로 인정해 주지 않은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네덜란드사회는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다문화주의를 통해 복지혜택을 베풀고 학교교육을 시키고 문화를 보존하며 살도록 해주면 사회동화가 자동적으로 이루질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결국 이주민 문제는 아무조치도 취하지 못한채 방치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는 처음 무슬림 이민자들에대해 다문화주의에 입각하여 그들의 이슬람지주를 도와주었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한것은 다른지주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지주들도 네덜란드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해체되고 장기적으로 네덜란드사회에 동화되리라고 기대한 때문이다. 그러나 무슬림이민자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들의 게토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근본적인 삶의 원칙에서 충돌하였으며 환멸과 증오를 느끼며 자신이 전통문화로 되돌아갔다. 네덜란드인들은 그때부터 무슬림이민자들을 네덜란드인의 행복을 위협하는 ‘문제’로 인식하게된다. 그들은 점차 통제하게되었다.2005년 9월 덴마크 일간 은 이슬람 예언자 마호메트가 머리에 터번 대신 불붙은 폭탄을 두르고 있는 모습의 풍자화를 실었다가 이슬람 사회의 거센 반발을 샀다. “풍자는 언론의 자유”라며 국경없는 기자회와 유럽 언론이 옹호했지만, 결국 신문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이슬람 여성이 머리에 쓰는 히잡 사건 건은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정교분리를 국가나 기독교적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여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고, 교사가 취업을 거부당하는 등 유럽의 정서와 충돌하면서 유럽사회에 적지 않은 두려움을 주고 있으며, 실제 유럽사회통합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특히 미국의 지난 2001년 9.11테러, 지난 2005년 영국, 프랑스의 무슬림이민자들의 소요 등은 유럽사회가 이민법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문화주의에서 동화주의로 이민정책의 큰 흐름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유럽의 무슬림들은 빠른 속도로 증가해 왔다. 무슬림의 종교적 가치가 유럽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빈번히 출동하면서 사회불안을 야기시키고 있고, 유럽인들 또한 무슬림이민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인문/어학| 2012.12.24| 4페이지| 1,000원| 조회(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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