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조의 구조 (pp.123~139)1. 개관 : 물질성에서 비물질성으로 (From Matter To Transparency)로마네스크식 교회가 물질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고딕의 대성당은 비물질적이다. 로마의 멸망 후 7 백 년 동안 유럽은 소위 암흑기였다. 권력은 차츰 세습왕조로부터 봉건영주와 수도원의 연합세력의 손으로 넘어간다.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형식적 완성을 본 로마네스크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승려 계급과 귀족 계급의 예술이다. 왕국의 군인 귀족이었던 봉건 영주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요새이자, 자신의 광대한 토지로부터 솟아난 형태이기를 원했다. 독일 같은 곳에서는 반항적인 신하들을 제압할 목적으로 왕이 주교들에게 재정지원을 하여 거대한 주교좌 성당들이 지어진다. 어쨌건 로마네스크 교회는 신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무한한 권력과 재산을 과시하기 위한 ‘신의 성채’이다. 반면 고딕의 교회는 도시의 예술이자 시민계급의 예술이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였다. 영주-승려 계급에 대항하여 이들은 국왕과 연합하고 여러 특허장을 얻어 재정적, 사법적 또는 군사적 자치권을 획득한다.우선 대규모의 공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가능한 한 높게 짓기를 원했다. 높이는 신앙심의 척도이기도 했거니와 그 도시의 위세와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단일 고위 성직자 및 영주의 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건축물을 지을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수공업자들 별로 조직된 길드에는 다양한 종류의 건축 기술이 축적되어 있었다. 고딕의 대성당들은 로마네스크의 교회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고딕의 성당에서는 빛과 가는 구조에 의해 공간은 유동적이고 비물질적이다. 이 유동성과 추상성이야말로 부르주아적 가치의 핵심이다. 화폐 경제에 의해 봉건제가 와해되었듯이 고딕의 빛은 로마네스크의 물질을 대체하며 새로운 시대를 연다.2. 로마네스크식 교회로마네스크식의 교회는 중세의 암흑을 깨는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끌뤼니 수도원에서는 묵시론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설교하며 십자군 원정, 활제와 왕의 파문 등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체를 종교적 권위 아래 두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로마네스크식 교회는 이의 산물이다.암흑기를 거치면서도 수도원은 기술과 예술을 보존시키고 교육시키는 유일한 존재였다. 가장 획기적인 구조적 발전은 바실리카 양식 교회의 목재 트러스 구조가 석재 볼트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다. 로마시대에 쓰였던 반원형 아치, 도움, 배럴 볼트와 크로스 볼트가 사용되었다. 배럴볼트는 차츰 크로스 볼트로 바뀐다. 이렇게 됨으로써 두 가지 결과를 낳게 되는데, 하나는 건물이 일련의 베이들의 결합이 됨으로써 교회의 용도와 위엄에 맞추어 연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붕이 무거운 돌로 바뀜에 따라 벽과 기둥이 엄청나게 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타워도 로마네스크의 발명품이다. 1093년에 세워진 더램 성당에서는 최초의 리브볼트가 보인다. 이 리브볼트 시스템은 고딕 건축에 전달되어 가장 중요한 구조기술이 된다.로마네스크 예술이 변화무쌍하고 이질적인 개입이 원천 봉쇄된 상태에서 오로지 순수한 종교적 혁신만이 화두였던 시대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어떻든 고딕은 로마네스크라는 준비기간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다.3. 고딕의 건축고딕 성당에서 느끼는 감흥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다. 고딕의 성당은 공간적 특이점을 만들어 ‘구별된 장소’를 만드는 데 완벽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공간적 특이성을 만드는 요소는 높이와 빛이다.(1) 높이넓은 공간을 얻기 위해 높이도 따라 커졌다는 말은 단순한 생각인 것이 스케일이 커지는 만큼 건물의 세장비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딕 성당은 높이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 건축적 장치를 동원한다. 우선 주공간인 네이브의 수직성은 아일로부터의 점층적인 높이 변화에 의해 극대화 된다. 가늘면서 긴 기둥 다발도 수직성을 강조하는 장치이다. 플라잉 버트레스에 의해 서평 추력의 부담을 던 기둥은 최대한 가늘게 만들 수 있었다. 로마네스크의 반원형 아치와 달리 고딕의 첨두 아치는 베이의 폭을 반 정도로 줄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투시 효과를 통해 앱스를 향한 수평의 방향성도 동시에 강하게 만든다. 지상에서 출발하는 직선들은 리브 볼트 첨두아치의 정점에서 소멸됨으로써 수직성은 극도로 강조된다.(2) 빛네이브의 비례가 점점 세장해지면서 고창의 면적도 커지게 되고 이는 내부 공간을 밝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비자연적인 채색된 빛은 마치 그 빛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 같지 않고, 빗물질화 된 내부와 결합되어 외부 세계의 현실과 분리시키는 ‘초자연적인 빛’으로 느껴지게 한다.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세 가지 경로를 가진다. 첫째 네이브 벽 위에 서있는 트리포리엄창과 고창, 두 번째는 외부와 내부아일 사이의 벽의 창, 그리고 세 번째는 외부 아일에 있는 창이다.고딕 성당 내부의 빛은 어두운 로마네스크의 빛과도, 자연광인 르네상스의 빛과도 다르다. 반면 고딕 성당의 내부는 빛으로 충만하다. 신은 빛이 그러하듯이 가시화 될 수 있다. 이제 신은 물질에서 빛으로 거처를 옮긴다. 밝고 가벼운 성당은 자본주의적 거래에 필수적인 투명성, 개방성을 표현한다. 물질이 빛으로 추상화 되는 것은 중세의 물물교환이 화폐경제로 바뀌는 추상화 과정과 내용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4. 고딕의 구조고딕 성당의 구조는 돌의 구조적 능력을 한계점까지 밀어붙인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 시대의 건축 기술자들은 과거의 미숙하고 흩어져 있던 기술들을 정교화 시키고 통합하여 예술과 기술의 완벽한 화해를 이루었다.(1) 첨두아치원형 아치와 달리 곡선의 중심점이 유동적일 수 있기 때문에 첨두아치는 그 어떤 공간적 요구에도 대응할 수 있다. 첨두아치는 대각선 리브 마루의 높이에 두 개의원호를 접합하여 첨두형으로 한 것이다. 첨두아치는 반원형 아치에 비해 그 지지점이 조금 움직여도 그것에 순응하기 쉬우므로 첨두아치를 조합한 리브 볼트는 석조 볼트 중 가장 탄력성이 풍부한 것이다. 첨두아치는 원형아치에 비해 높아서 공간감이 있는 반면 더 많은 볼트 면적을 가지게 되어 돌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고 이것은 무게의 증가와도 연결된다.(2) 볼트로마네스크 후기에 이미 교차 볼트와 각 볼트의 경계에 튼튼한 횡단 아치가 보인다. 중앙부가 도움 형태가 되고 이것은 측압을 발생시켜 이것에 저항하기 위한 보강용 횡단 아치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건축기술사1. 서론건축사적으로 뛰어난 건축물은 특징시대의 전반적인 예술과 문화, 사회적 요구, 건축주 그리고 건축기술 수준을 드러낸다. 건축물의 이러한 측면을 밝혀내기 위하여 건축사가는 보통 형태 분석과 고고학적 조사에서 나온 정보와 사료의 연구 결과를 종합한다. 건축 십서에는 건축적 균제와 조화 그리고 비례에 관한 고전적 규범뿐만 아니라 대지의 선정 방법, 기초, 건축 재료와 심지어 음향에 관한 내용까지 실려 있다. 13세기 초에 작성된 빌라르 드 온느꾸르의 특출한 스케치북에는 고딕 성당의 기본적인 평면과 입면 뿐 아니라 기계류와 이에 적용된 기하학, 그리고 석재의 조적과 가공에 관한 여러 가지 스케치와 설명이 실려 있다. 사르트르 문서는 당시에 이미 1세기가 경과된 고딕성당 버트레스 작업의 문제점에 대하여 모호하게 다루고 있고 유명한 밀라노 문서 또한 기술자가 쓴 것이 아니라 서기가 기술적 토의내용을 요약해서 싣고 있을 뿐이다.비트루비우스에서 출발하여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건축에 관하여 기술한 일련의 저술가들은 건축십서 이후 거의 16세기가 경과된 1638년에 출판된 갈릴레오의 ‘두 분야의 신과학에 관한 독백’에 이르러서야 의문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갈릴레오의 이 책은 분석적인 구조 역학을 소개하고 있다.건축물의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양식의 발전을 정의하기 위하여 학자들이 오랫동안 사용하여 왔지만 단순한 기하학적 법칙의 적용으로는 구조적인 성공과 안정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로마 판테온의 내부 공간은 주로 반구 형태로 조성되었지만, 돔의 외륜은 내부보다 완만하고 복합적인 형상을 보이고 있다.보다 중요한 문제로는 당시의 사람들이 기하학적 형상을 연구하고 적용하면서 건물의 규모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 갈릴레오는 그의 저서를 통해 기하학적인 형태만 강조하다가는 구조물에 심각한 역학적 오류가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규모가 큰 건축물에서 체적 때문에 생기는 응력, 즉 고정하중을 설명인 평지가 드물고 고저차가 많은 대지가 대부분이어서, 인공적으로 단을 지우거나 언덕을 깎아내어 대지를 조성하였다. 베레키아라고 불리는 역암이 종종 기초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상부 구조물을 세울 때 재료를 따로 가공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이 시대에는 보통 아테네식의 우물 쌓기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신전 기초에 대한 조적적인 발굴사업을 통해 기초 속에 감추어진 구조 형태뿐만 아니라 그 하부구조까지도 알 수 있다.제정 로마그리스 건축을 이어 받은 로마의 건축은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서 새로운 재료와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건축물을 만드는데 벽돌과 콘크리트가 주재료로서 사용되었고 볼트로 이루어진 내부공간이 조성되었다. 지지 보강물과 같은 건축적 경험을 쌓은 로마의 건축가들은 새로우면서도 기술적인 방법들을 도입하였다.공사를 위한 준비가 끝나면 기초를 위한 굴착공사는 그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통 암반까지 진행된다. 건축 재료로서 석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벽돌로 치장된 콘크리트가 별체로서 사용되었다. 로마의 지리적인 환경도 기초구조에 영향을 끼쳤는데, 수도 로마의 도처에 널려있는 화산재 때문에 목재 버팀벽을 사용하진 않고는 좀처럼 굴착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목재 버팀벽의 유구는 로마 구조물의 콘크리트 기초에 대한 부정적인인상을 주게 되었다.로마 건축의 기초구축에 있어서 육중한 콘크리트는 온통기초는 가장 중요한 발전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그리스의 영향도 일부 있었으나, 콘크리트를 이용한 개선방법은 특기할만 하다. 로마 건축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경기장 시설인 콜로세움은 앞에서 언급했던 네로의 황금궁궐이 있던 저습지 위에 세워졌다. 성 베드로 성당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수 황제의 바실리카도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바티칸 언덕의 묘지 위 익부에 세워졌다.로마식 기초벽은 대부분 콘크리트 면을 가진 형태로 구축되었다. 그렇지만 밀실한 실트와 점토가 주로 쓰였던 북유럽의 경우는 기초 지지를 위한 굴토를 한 뒤, 석재와 콘크리트를 함께 사용하여 기초면서도 깊은 기초를 가졌던 고딕 성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고 규모 면에서도 중세 초기의 성당에 가까웠다.기초와 토양이 어떤 건물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기술과 형태가 나타났다. 그리스로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건축가들은 벽에서 발생한 하중이 토양에 전달되는 과정과 기초의 연속성뿐만 아니라 불연속성은 분석하여 여러 가지의 효과적인 해법을 찾아낸 것은 확실하다. 그리스의 신전, 로마의 공공건축, 그리고 고딕 성당을 받치기 위하여 건축가들이 어떤 기초를 놓았는지 알기 전에는 결코 이들 건축물의 신비스러움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3. 벽과 기타 수직 부재일반적으로 교회나 공공건축의 벽체는 프레스코로 처리하거나 융단을 걸거나 주두 모양을 새겨 넣거나, 프라이즈를 하거나 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넣는 등, 건축물의 설화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벽체를 어떻게 장식하거나 혹은 그 상징적인 내용이 어떠할지라도 벽체는 하중에 견뎌야 하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실내로 빛을 도입할 수 있어야 하는 벽체의 기능적 요구 조건 내에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벽체는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외부환경에서 침투하는 시선과 바람과 비, 그리고 외기를 막아 내부공간을 안전한 피난처로 만들어주는 기능과 건물 상부구조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능이 그것이다.비내력벽에 창문이 규clr적인 간격으로 뚫려있는 경우에는 중간에 구조재가 설치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창문과 창문 사이에 있는 수직벽은 독립된 수직 부재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비내력벽에 더 가까운 다른 혼성 방식은 벽체가 볼트나 지붕으로부터 집중되는 하중을 받기 위하여일정한 간격마다 두껍게 처리 되는 곳에서 나타난다. 부벽이라고 하는 이러한 돌출 부분은 대개 내부 볼트의 구획 체계나 지붕의 주 트러스의 간격과 일치한다.건물의 하중은 하중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지 변하지 않는지에 따라서 정하중와 동하중으로 구분될 수 있다.과학혁명 이전 서양의 역사적인 건물들은 구조체로서 거의 모두 돌태양광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선원들이 쳤다는 무대를 가로지른 덮개 천막은 돛대를 고정시킨 석제 코르벨로 짐작할 수 있다. 콜로세움의 건설은 매우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종래의 공법으로는 공기가 너무 많이 걸렸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최종적으로 벽돌 아치는 경사진 원통 볼트를 지지하기 위하여 건설되었는데, 이 원통 볼트가 차례차례로 좌석열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금속공사의 또 다른 측면은 저온에서 시공된 조적조의 거동과 관련된다. 물이 얼어 팽창함으로서 젖은 몰탈을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에 영하의 기온은 양생이 안된 몰탈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아치는 채광 혹은 출입용의 큰 개구부를 설치하기 위하여 건축물에 널리 사용되긴 했지만 그보다는 로마제국의 기술자들이 건설한 거대한 수도교에서 보다 철저히 연구되었던 것 같다.가르 수도교의 건설은 다음의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이TEk. 즉, 석재 접합부의 몰탈이 물에 씻겨 내려감으로서 수도교가 붕괴될 위험을 없애기 위하여 몰탈을 사용하지 않고 조적한 커다란 석재 덩어리들, 공사 중 공중 가설 틀을 받치는 선반 역할을 하는 아치 굽의 튀어나온 석재 작업자가 올라서고 건설 재료를 올려두는 비계를 받치는 데 쓰이는 피어 외부와 스팬드럴 외부의 튀어나온 비슷한 석재, 그리고 이미에서 서술한 가설 틀의 광범위한 재사용 등이 그것이다.서기 118년부터 128년 사이에 건설된 로마의 판테온은 벽체의 구조와 설계에서 전혀 다른 문제를 제시한다. 판테온 내부 공간의 장식적인 분절이 인방보로 처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벽체의 대리석 마감판 뒤에 감추어진 숨은 아치는 이 건물이 아치 구조에 의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돔을 둘러싸는 다단식의 돌림띠가 돔을 보강하는 역할을 하고 또, 돔의 기부에서 벽체 상부로 전달되는 수평추력을 많이 제거하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판테온의 원통형 벽은 지나치게 두꺼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서기 100년부터 112년 사이에 로마에 건설된 트라얀 시장은 콜로세움의 경우와, 양쪽 모두와 관계된다. 플라잉 버트레스는 볼트의 집중추력 혹은 거대한 지붕에 작용하는 풍하중의 집중추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직선 버팀대처럼 단순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고안물은 고딕 벽체를 지지하는 구조물을 조금씩 삭감하는 효과로 나타났고 삭감된 그 자리는,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할 수 있는, 거의 완전한 자유공간으로 남게 된 것이다.쌩 드니 성당과 같은 시대지만 훨씬 더 큰 규모로 계획된 쌍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착공된 후 보다 최신 양식으로 짓기 위하여 변경되었다. 쌍스 성당의 고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보통 2,3층을 넘지 않는 로마네스크식의 입면이 아직 남아있다.19세기 중엽의 복구운동 이전에 만들어진 도면이나 사진뿐만 아니라 노트르담의구조체계와 파리 지역에 있는 동시대의 다른 건물에서 나온 고고학적 단서에 의존하여 네이브 구성의 구조적 원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여기에는 플라잉 버트레스가 처음에는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구명하는 작업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원래의 노트르담 네이브 구조를 재건의 모형의 분석은 강력한 폭풍의 결과로 국소적인 균열은 여전히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는데, 이는 현대의 기록이 시공직후의 구조의 40년 남짓한 세월동안 이따금 일어날 수 있는 것을 기록해 둔 것과 같다.플라잉 버트레스는 높은 초기 고딕건축의 벽체를 상부 갤러리의 하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중요한 고안물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퍼졌다. 새로운 기술의 잇점이 모두 적용된 초기 고딕 양삭의 건물 가운데 뛰어나게 능률적이며 우아한 구조물로 브뤼쥬성당이 있다. 브뤼쥬 성당의 채광은 높은 클리어스토리 창문보다 낮은 클리어스토리 창문을 통과한 빛이 축소가 덜 되기 때문에 바닥면에서는 이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증명한다. 브뤼쥬 성당의 구조 또한 예외적인데, 어느 대규모 고딕성당보다도 낮은 응력 수준을 나타내기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성당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르네상스전통적인 관례는 더 이상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지식의 공급하는 우물이 아니었다.
2. 구조의 구조 (pp.111~122)1. 개관 : 외부 건축에서 내부 건축으로 (From Exterior Architecture to Interior Architecture)그리스인들은 아치공법을 알고 있었지만 건축에는 채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내부공간이 아니라 외부공간의 형태이었기 때문이다. 장사이든 토론이든 어떤 행위가 일어나는 곳은 어둡고 진입하기 어려운 실내가 아니라 옥외였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도 신전 안이 아니라 바깥이었다. 19세기 파르테논 신전을 실측하여보니 직선이 거의 없었다. 엔타블레쳐 역시 활꼴을 하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의도적 실수이고 직선이 주는 경직함을 탈피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리스건축은 보여지기 위한 건축인 것이다.로마인들은 철저히 실용적인 인간들이었다. 로마인들은 한 지역을 정복하면 가장 먼저 로마 가도라고 일컫는 길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는 효과적인 병참선으로 이용되어 적은 병력으로 넓은 지역을 장악하는데 필수적이었으며, 무력에 의한 지배보다는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 내는 고도의 방책이기도 하였다.로마의 발달한 건축기술은 이러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가도를 건설하기 위해 교량, 포장 등 토목기술이 발달하였다. 도시의 위생을 위해 수도교와 공중목욕장을 건설하니 건축 기술 역시 발달한다.그리하여 아치 기술은 로마인을 맞아 만개하는데, 이들은 더 나아가 아치를 응용한 볼트, 교차볼트를 만들어 더욱 풍요로운 내부공간을 만들었다. 반면 오더는 장식적 의미로 퇴색하게 되었다.2. 파르테논 신전 (B.C. 447~432)약 3세기 동안 그리스 신전의 인방은 목재였다. 그 이후에 돌로 교체가 되었는데, 화재와 부식 등에 목재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장력에 취약하고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인방-기둥 시스템에서는 기둥 간격의 최대치가 대략 5~6m사이였다.스팬을 다소라도 늘리기 위해 기둥의 주두를 넓혀 순수 스팬을 줄이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동양의 목조건축 방식에서 공포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리스에서는 시대와 모양에 따라서 도릭, 이오닉, 코린트 방식의 주두 양식이 보인다.파르테논 건물은 종 방향 축에 대하여 평면상 좌우 대칭으로 계획되었고 기존의 6주식 대신에 정면 입면에는 8개, 측면에는 17개의 원주가 있다. 내진에는 피디어스의 아테나 상이 있었다.이 신전은 전통적인 도릭 신전 내부 공간의 구성요소가 구조적으로 변형된 특징을 보인다.다른 어떤 도릭 신전보다 더 넓은 지붕의 스팬을 가지고 있고 중앙부에서 두 번째의 기둥 열에 맞추어져 있다.그리스인들은 모르타르를 전혀 쓰지 않았다. 드럼형태를 겹쳐쌓아 한쪽은 약간 볼록하게 한쪽은 오목하게 만들어 끼워 맞추거나 연결철물을 꽂아 상하를 연결하였다.수평 보의 형태를 한 아키트레이브는 차례로 겹쳐진 많은 석층으로 이루어져 원주의 주두에 올라와 있다. 아키트레이브 위에는 프리즈가 있고, 프리즈에는 트라이그리프와 메토프가 교차로 나타나는데 이 역시 목조구법의 잔재이다.트라이그리프는 균등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단부의 트라이그리프는 정확히 건물의 코너에 배치되어 있게 된다. 이것은 구조적 진실보다는 시각적 완성도를 중시했던 방법론의 증빙이다.지붕은 목구조로 되어있다. 목조 인방보는 엔타블레쳐와 페디먼트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출입구 포치의 열주랑이 받치고 있는 지붕 하부에 하나의 수평선만 나타난다.신전은 공간 기능적으로는 그 안에 모셔져 있는 신의 거처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구조적 보수성이 공간상의 절실함이 부각되지 않는다.3. 콜로세움 (A.D. 71~80)로마시대의 황제의 의무는 대강 국방, 식량조달, 오락거리 제공 이 세 가지였다. AD71년에 네로가 거대한 정원을 건설하기로 한 자리에 베시파시우스 황제는 경기장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9년 만에 완공된 콜로세움은 타원형의 다목적 투기장으로 단변 118m, 장변 156m의 타원형이고 높이는 48.5m이고 최대 55000명의 관객을 수용했다. 벽은 기본적으로 아치 구조이고, 3개의 층으로 된 외벽에 도릭, 이오니아, 코린트식의 열주를 층 별로 부조하여 구조와 오더의 절묘한 조화를 꾀한다.이 건물은 로마시대 아치 공법의 진수를 보여 준다. 원형의 거대한 기초는 콘트리트와 석재 블록으로 만들었다. 접착재로 쓰여진 포졸란 콘크리트는 물과 혼합될 때 열을 내며 양생되기 때문에 비교적 따뜻한 로마의 겨울에도 공사는 계속 될 수 있었던 것도 공기 절감에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이다.4. 판테온 (A.D. 118~125)판테온은 로마의 건축 기술의 혁명적인 작품이다. 직경과 높이가 43.6m에 이르는 무주공간은 1300년 후 피렌체 성당의 돔이 세어지기 전가지 어떠한 건물보다도 큰 내부 공간을 가지고 있다.평면상 긴 방향 축에 대하여 대칭형으로 계획되어 있으며 입구부분인 포티코와 본체인 로툰다의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기초는 연속된 원형 콘크리트로 밀실한 기반이 조성되었다. 로마의 일반적인 벽체공법은 영구적인 거푸집이 되는 벽돌벽 사이에 콘크리트를 채우는 방법이지만 여기서는 하중과 이에 따른 추력을 줄이기 위하여 경량 골재로 단을 지어 건설되었다.판테온의 구조적 혁명의 핵심은 반구형 도움에서 생기는 인장력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있다. 여기에서 쓸 수 있는 재료는 돌이나 콘크리트처럼 인장 강도가 없는 재료이기 때문에 인장력을 없애야 했다. 이를 위해 경선 방향과 위성 방향 양쪽에 압축력만이 있는 영역만 순수 도움구조로 하고 도움의 아래쪽은 드럼형 구조로 한다. 각 기둥은 반원형의 공동 모양으로 파내어져 만들어진다. 8개의 깊은 벽감 중 가운데 하나는 출입구가 되고 다른 7개에는 일곱 로마신의 신상을 모셔놓았다.
건축의 사회사근대의 프로메테우스(산업혁명)18세기 중엽의 유럽사회-귀족세계에서 부르주아 세계로물질적 조건 즉 사회제도, 정치기구, 그리고 예수로가 건축을 포함한 일반적 의미의 문화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한 사회가 경제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방법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근대의 건축과 디자인은, 18세기와 19세기 대혁명들이 공업생산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사회를 창조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그때부터 시작된, 바로 그 근대 경제체제의 맥락 속에서 바라보고 정의해야한다.18세기 중엽까지는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는 전통적인 지주 계급이 지배하는 농업경제가 대부분이었고, 정치는 구체제의 왕과 귀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귀족계급의 태도와 사상은 서구의 경제와 정치뿐 아니라 문화까지도 지배했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로마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이래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지적 전통은, 모든 나라의 지배계급들을 통합하는, 그리고 그들을 노동자 계급과 구별 지어 주는 특별한 언어를 만들어 냈다.교육수준과 교양을 갖추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신사계급 건축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축가들은 궁전?대저택?공공건물을 설계하면서 이러한 계급 표현을 기꺼이 돕고 있었다. 그들 자신, 그리고 그들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건축현장의 장인이 되지 않고서도 건물을 설계하는 일이 처음으로 가능해진-더욱이 그것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보다 유리해진-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었다. 건축가 교육은 실무적이기 보다는 이론적이었고 고고학적이었다. 때문에 건축가는 이제 건축과정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공동사회에서 건축과정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진 존재가 되었다. 그가 지적인 작업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했던 간에 말이다. 사회 하위계층에는 장인건축가가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건축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한 주택과 오두막을 짓는 일을 맡았다. 비록 그들의 선조인 중세 석공과 목수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중세의 기술을 구전으로 이어받아 실제 작업을 통해 그 기술 동부 도시들에 시기적적하고 풍부한 예비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공장생산이 증가하면서 국내 물가가 하락하자 영국 상품을 수입하면서 얻는 경제적 효과가 줄어들었다. 공장의 기계화 설비가 증가하면서 섬유산업은 열배로 팽창했고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의 석탄산업과 제철사업이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영구에서처럼 새로운 철도건설에 투자가 집중되었다.연방정부의 공화주의 정치권력도 산업발전에 일조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동부 도시들은 도시 중심부를 정비하는 새로운 도시개발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그들의 부와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서부 미개척지역의 사회는 처음에는 변동적이고 비정하며 자족적이었고, 동부지역과의 연결망도 거의 없었으며 원자재나 농산물밖에 없어 부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철도가 들어오면서 은행?공장?상점, 그밖에 중간 계급 자본주의에 부속되는 모든 것들이 따라 들어와 주변 지역 일대에 편의를 제공했으며 그 대가로 이익을 거두어 들였다.미국에서의 경제 불황과 독점화1837년에는 불황이 닥쳤다. 불황은 산업자본주의의 특징인 호경기와 불경기가 연속되는 한 국면이었다. 이는 주기적 패턴으로 반복되기 마련이었다. 지속되는 팽창,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재투자가 자본과 노동력의 부족으로 귀결되면서, 원가와 대출이율은 상승하고 이윤은 하락했다. 이윤이 낮아지자 투자자들은 산업에서 자본을 회수했으며 생산을 줄어들고 실업이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임금노동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주거와 식료품은 모두 스스로 구입해야했고, 그들을 보호해 줄 복지제도론 없었으며, 빈곤?기아?질병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비로소 시 당국은 위생문제, 도시 내부의 과밀, 그리고 목조주택 밀집지역의 상존하는 화재 위험성 등에 주의를 기우리게 되었다.이러한 불황은 1841년까지 지속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일면이었다. 많은 금융가들이 파산했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실업과 기아에 허덕였다. 미국에서는 즉각적으로 산업과 철도로부터 유럽 자본이 빠져나갔는데, 그 듯 한 흥분을 경험하도록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친근한 문화적 전통을 암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소심하거나 비판적인 사람들을 진정시켜 주었다.철 건축의 확산스티븐슨의 브리타이아교와 솔태시의 타마르 강에 있는 브루넬의 걸작 로열 앨버트교는 거대한 연철 튜브를 사용함으로써 구조기술의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했다. 발로의 지붕은 구조기술의 걸작으로, 높이 삼십 미터에 스팬이 칠십오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포물선형 볼트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것이었다.존 러스킨고딕 부흥운동의 후반기에는 예술비평가 러스킨이 주도했다. 그는 디자이너가 지켜야 할 일곱 개의 기본 계율을 제시했다. 탁월해지려는 노력에 따르는 ‘희생’, 재료의 정직함 사용에서 오는 ‘진실’, 단순하고도 당당한 형태가 갖는 ‘힘’, 자연을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함으로써 얻는 ‘아름다움’, 수공에를 통해 얻는 ‘생명’, 후세를 위해 만드는 예술작품이 미래 세대들에게 제시하는 ‘기억’, 그리고 과거 양식 중 가장 훌륭한 양식들만을 사용하도록 자신을 교육하는 ‘복종’이 그것이었다.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러스킨은 심오한 통찰력을 지닌 훌륭한 작가이자 뛰어난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당대의 많은 건축가들과 장인들에게 파상적이긴 하지만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가 재발견한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는 그들에게 새롭고도 자극적인 것이었다. 러스킨시대의 이후에는 특히 총독 궁에서 사용되었던 자연적인 식물형상 장식을 새긴 평판 트레이서리와 같은 이탈리아 장식의 사용이 두드러졌으며, 다채로운 효과를 내기 위해 여러 재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러스킨의 건축적 추종자들 중 다수가 고교회 국교주의에 경도되었지만 고딕에 대한 러스킨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반 기독교적인 것이었다. 그는 건축적 진실성에 대한 퓨진의 다분히 편협하고 종교적인 관점을 좀 더 광범위한 세속적 이념으로 진전시켰으며, 바로 이것이 설계자들과 이론가들에게 괄목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건축의 일곱 등]에서 개진된 진실성과 힘의 개념은 근대 건축이비례, 여닫이 창틀로 구획된 길고 수평적인 창문들, 어디에나 등장하는 흰색의 잔돌붙임 마감, 그리고 경사진 슬레이트 모임지붕, 이 모든 것들이 하위 중간 계층의 교외주거지에 지은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지겹도록 반복되었다.루티언스의 풍요로운 컨트리 하우스들은 지킬의 사뭇 시적인 정원 조경과 어우러지면서 귀족들과 성공한 자본가들에게 목가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여러 주택을 설계했던 루티언스는 건축가로 성공하면서부터 점차 과대망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건축의 소 귀족과 원시적 수공업 산업가의 세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 세계를 영속화시키려는 데에 완곡한 방식으로 일조하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시대착오적이었으며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미국에서도 부르주아 주택 설계자들이 역사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비슷한 시도들을 하고 있었다. 설리번은 이제 활동이 뜸해졌지만 그의 동료인 엘름슬리는 1909년 퍼셀과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중서부 지역과 서부 해안지대를 주 무대로 시카고의 전통을 이어나갔다.시카고 전통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사한 것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다. 1893년 일리노이 주에 자신의 사무실을 개업하면서부터 그라 ‘프레리’주택이라고 불렀던 주택작품들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93년부터 1909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이 작품들에서는 라이트의 ‘프레리’주택 개념이 진전된 과정을 명료하게 살펴볼 수 있다. 윌리츠 주택에서 라이트는 평면을 십자 형태로 확장하면서 주변 풍경을 향해 사방으로 연장되도록 했다. 교외의 좁은 필지조건 때문에 쿤리 주택과 같은 확장되는 평면이 불가능했지만, 라이트는 여기에서도 주변 풍경과의 밀접한 통합감을 이루어냈다. 로비 주택은 삼층이지만 낮고 평온하며 안정적인 외관을 갖고 있으며, 커다란 모임지붕은 이 집을 대지에 눌러 붙이는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내부공간은 계단실과 벽난로로 구성된 견고한 중심 공간 주변으로 다른 공간들과 맞물려 있고 바닥 높이의 변화로 생동감을 주면서 자유롭게 계획했다. 계획의 물리적인 형상은, 바넷이 재단을 설립하여 재정을 댄 런던 근교의 햄스테드 교회주거지에서 먼저 실현되면서 훨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좀 더 밀도가 낮은 주거지를 설계할 기회를 확보한 그들은 토튼업·킬번·완즈워스 등지에 ‘소 주택 단지’를 건설했는데, 이는 최초의 노동자 계급용 교외주거지이자 공공자금으로 건설된 최초의 주거지였다. 웜우드 스크럽스에 건설된 올드 오크 단지가 가장 뛰어난 사례로서, 이는 몇 가지 점에서 햄스테드에 필적할 만했다.근린주구론주거지 설계가 한 단계 더 진전한 것은 대략 1910년에서 1929년 사이에 시카고와 뉴욕에서 활동하던 페리와 다른 몇몇 계획가들이 ‘근린주구’개념을 발전시키면서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정체성’이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미국 도시의 익명적인 격자형 도로망에서는 상점과 학교와 오픈 스페이스가 아무렇게나 배치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가르니에와 공업도시이 시기에 나온 가장 완전한 도시이론은 프랑스 건축가인 토니 가르니에가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 제안한 ‘공업도시’모델이었다. 이 모델 프로젝트는 리옹 인근의 부지에 설계 되었는데, 매우 다양하고 실현 가능한 건축적 디테일로 이루어졌다. 이 제안은 세계대전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지만 여기에 포함된 많은 개념들은 이후에 그가 설계한 건물들에서 사용되었다. 그는 로스의 절제된 건축어휘를 사용하여 주로 철근 콘크리트로 설계했으며, 단순하고 입체파적인 주택들, 경간이 넓은 산업용 건물들, 그리고 우아한 탑과 교량들에서 이 재료의 다양한 강점들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가르니에의 도시는 여러 중요한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 토지와 건물들은 공동 소유로 하여 산업과 교통의 흐름 등 주거환경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대해 강력한 통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렇듯 생생하게 표현된 가르니에의 개념과 설계가 창출한 이미지는 20세기의 사회적 건축 속에서 지속되어 많은 도시계획 이론가들에게 영양을 미쳤다.도시문제의 현실과 추상적 형식주의하워드와 가르니에는 모두 당시의공했다.
1. 서양 건축 이야기 (pp.311~350)오스만의 파리 개조 계획1848년 혁명 이후 대통령에 선출된 나폴레옹 보나 파르트의 조카가 4년 후 자신을 나폴레옹 3세라고 칭하면서 프랑스는 제2제정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 통치하의 프랑스는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도래하여 은행이 창설되고 공장과 철도가 건설되었으며 대규모의 공공사업이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비스콘티와 르푸엘에 의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루브르 궁 확장사업도 포함되었다.제2제정의 가장 큰 사업 중 하나로서 중세 파리의 구 시가지를 바로크식 도시로 장대하게 정리한 오스만 남작의 파리 중심부 개조계획을 들 수 있다. 오스만이 지향한 것은 단순한 도시미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혁명의 여파가 남아 있는 파리에 시가지 전투에 대비한 안전대책을 세우기 위한 방안이었다. 베르사유에서 영감을 얻은 방사상 도로는 새로운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즉 중심에 있는 분수에서 시작하여 대포를 분산 배치시킴으로써 전 지역을 통제하게 하였다. 1858년 프란츠 요셉 황제는 루드비히 푀스터 가로를 넓은 말굽 형태로 설계하여 구 시가지의 전지역에 군대가 접근하기 쉽도록 배려하였다.파리의 새로운 대로들에는 가로에 면해서 상호 연결된 중산계층의 아파트 건물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는 르와이얄 광장이나 리볼리 대로와 개념상 같은 계획 유형이다. 샤를 가르니에의 파리 오페라 좌는 제2제정 중산계층의 부를 대변한 건물로서, 여기에서는 루브르 궁에서 볼 수 있는 풍요로운 네오-르네상스 양식을 사용하여 장엄한 기존 극장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규모가 크고 호화로운 청중석도 훌륭하지만 비슷한 규모를 가진 입구 홀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천장화와 도금된 조각상,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네오 고딕나폴레옹 3세가 1864년에 창립한 국립 파리 미술학교에서는 프랑스 디자인의 전통양식을 기반으로 학술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미술학교 출신자에 의해 그 영향은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토마스 풀러와 스텐트가 공동 설계한 프랑스 고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노이슈반스타인성을 들 수 있다.영국의 교외 주택낭만적인 이미지가 부유한 사람들이나 왕족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도시 중심부가 점차 불량해지자 중산계층은 도시를 떠나 철도의 확장으로 편리해진 교외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나쉬의 파크 빌리지의 영향을 받아서 각 주택이 각자의 토지 안에서 가능한 한 독립하여 세워졌지만, 토지가 좁은 경우에는 이웃끼리 근접할 수밖에 없었다. 건축 스타일은 대개 양식적으로 혼합된 절충식 고딕으로서 급경사 지붕, 상투적인 수법의 지붕창과 박공, 다갈색 벽돌, 창과 문의 가장자리를 두르는 회반죽한 석재 또는 인공석재 등고 k같은 요소들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공장에서 생산된 네오러스킨 류의 잎사귀 무늬로 장식되었다.철과 유리많은 건축가와 건설업자들이 과거 건축양식의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적인 건축의 자세가 싹트고 있었다. 고가 설계한 성 클로틸드 소재의 파리지앵 교회의 지붕과 부알류가 설계한 성 으제느 교회의 골조에는 상당부분 철제가 사용되었다. 빅토르 발타르의 작품인 파리 중앙시장은 철골조로 이루어진 대규모 복합건물로서 주요 부분은 순환통로들에 의해 나뉘어져 있고 지붕은 대부분 유리로 덮여 있다.공업화가 진전함에 따라 더 규모가 큰 상품의 판로 개척이 필요하였다. 19세기에 유럽의 수출은 급격히 증가하였고, 자국 내 판매도 증가하였다. 따라서 도시의 시장 성격이 정기시장에서 상설시장으로 발전하여 물건을 항상 구매할 수 있는 쇼핑센터의 성격으로 변모하여 갔다.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은 나폴리에 있는 움베르토 1세의 갤러리아와 멘고니가 설계한 밀라노 소재의 화려한 빗토리오 에미뉴엘라 2세의 갤러리아이다. 건물은 종교적인 예배의 처소가 아닌 상품 구매라는 세속적인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미와 현실감 그리고 쾌감을 건물 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자본주의에서 생산과 소비를 계속적으로 증대시킬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세기에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다. 회, 현세에 대한 개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의 작용을 하였다. 산업혁명시대의 고조적인 걸작품들은 형태면에서는 매력적이었으나 건물의 내용면에서는 보잘 것이 없었다. 단시 시대적으로 필요한 건물을 지어냄으로써 일반적인 신뢰감만을 조성하려 하였을 뿐이다. 막대한 자원과 고도의 기술을 투자하여 사회적인 가치가 모호한 대형 구조물을 건설하는 것은, 건축적인 측면에서의 근대사회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국가의 위엄과 시민의 자부심건축에서 자본주의가 미치는 영향을 가장 훌륭하게 예언하고 비평하였던 사람은 아마도 시인이며 디자이너인 동시에 혁명가인 윌리엄 모리스일 것이다. 그는 것은 임금은 노예화나 소외감뿐만 아니라 혐오감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해서 자본주의를 증오하였으며, 미래는 노동자들이 자유를 얻음으로써 사상과 기술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며 다시 한 번 중세 성당에서 보여주었던 수준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본질적으로 기계는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고 재능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며 자유롭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기계로 만든 상품들을 추구하는 그 시대의 풍조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공예예술로서 그러한 경향을 표현하였다.그 동안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팽창하였다. 비스마르크와 몰트케 치하의 프러시아 군대는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를 계기로 1870~90년 사이에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며, 가리발디와 마치니에 의하여 통일된 이탈리아도 공업 생산력이 점차로 증대되었다. 미국의 동부도시는 산업과 상업의 중심도시로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러시아는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독재정치로 되돌아가게 되어 공업화를 향한 실질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이 시기에는 자본주의 정치의 계속적인 성장을 비판하는 사람보다 옹호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고, 자본주의로 인한 모든 것들이 문명사회에서 최상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과거의 영광과 현재를 동일시하는 설계로써 자본주의 옹호론을 펼쳤던 건축가들도 있인 경사지붕들을 보여주고 있다. 라이트 초기의 두 개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오크 파크의 유니티 교회와 뉴욕 주 버팔로에 위치한 7층의 라킨 빌딩을 들 수 있다.시카고와 뉴욕, 초기 마천루 건물지가의 상승과 기술적인 발달로 인해서 미국 전역에는 고층 사무소 건물이 앞을 다투어 세워졌다. 내구력이 강한 철골구조와 결합되면서 1880~90년대에 세계 최초로 마천루들이 건설되었다. 고층건물은 주로 대도시에 지어졌으며, 특히 리처드슨, 아들러, 설리번과 같은 건축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건축형태가 시도된 시카고에 많이 세워졌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설계접근방식이 발전되어 기둥 등의 지지재와 바닥 슬래브가 입면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건물들은 안전하게하중을 받는 외벽과 철골구조로 이루어졌고, 막대한 하중을 기초까지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설계상에서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초기 단계의 마천루 건설은 카스 길버트가 설계한 뉴욕의 울워스 빌딩에서 끝을 맺게 된다. 전체 높이 240m로 50층이나 되는 건물의 높이는 주목할 만한 기술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철근 콘크리트강철이 반드시 주요한 구조 부재로서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사기간은 짧아졌지만 내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화재 시 열에 의해 형태가 변하기 쉽고, 값이 비싸기 때문에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값싼 대체 용품이 발전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국립고등공업학교에서 육성된 프랑스 토목공학의 오랜 전통의 결과로서 사용된 구조방식은 1880년대에 조셉 모니에르에 의해 발전된 철근 콘크리트이다. 철근 콘크리트는 콘크리트의 강한 압축력과 내화성에 철근의 높은 인장력을 가미한 복합재료로서 가소성이 있으므로 거푸집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선축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건축가 오귀스트 페레는 신소재의 특성을 최초로 건물에 활용하였다. 페레가 설계한 노트르담 뒤 렝시 성당에서는 근대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고딕 양식의 자유로운 공간적 효과를 나타내었다. 얇은 쉘 구조의 콘크리트 볼트는 가느다란 기둥으로 지지되며, 창문의 역할을 로 기하학적인 고전주의나 경직된 네오-고딕과는 흐름을 달리하는 양식이다. 아르 누보 양식은 벨기에 출신 건축가인 빅터 오르타와 앙리 반 데 벨데의 실내 디자인을 통해서 구체화 되었다. 외관 양식에서 아르 누보적인 수법을 강조한 예로는 곡면 처리 강재의 파사드가 두드러지는 노동당사 건물과 리노바시온 백화점을 들 수 있다.아르 누보의 주요한 양상 중 하나는 매우 관습적이라는 사실인데 이는 본질상 아르 누보 양식이 매우 장식적이되 2차원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신소재의 사용을 통해 가능해진 극적인 공간감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우디의 건물은 역사상 가장 개성적인 건축물의 하나로서 금욕적이면서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게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그의 스타일은 아르 누보 양식이긴 하지만, 스페인의 과거 상황인 기독교와 모슬렘의 혼합된 특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가우디는 흐르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을 얻기 위하여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하였고, 거기에 도기나 유리 파편과 장식적인 금속들을 끼워 넣었다.아르 누보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은 또 다른 건축가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찰스 레니 맥킨토시이다. 그의 건축은 가우디의 작품들처럼 개성이 강하지만, 가우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맥킨토시의 건축은 질서적이고 긴장감 있게 구성되었고, 다소 경솔하게 표현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엄격하며 아주 세부적인 부분까지도 건축가 스스로에 의해 디자인되어 있다. 특히 내·외부에서 아르 누보적인 디테일의 정교함은 전통 스코틀랜드 석재의 거칠고 편평한 특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실내를 다소 빈약한 듯 하지만 신선한 느낌을 주도록 흰색으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아르 누보의 지나친 장식으로부터 곧 나타나게 될 장식의 억제 경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그의 공간 처리 방식은 근대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영국 전통 건축맥킨토시는 19세기에 대한 반발로서 단순하며 토속적인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관심을 리처드 노먼 쇼의 작품에서 볼 수 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