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경국전-경국대전의편찬과정목차서문연구사조선경국전경제육전경국대전참고문헌과목명교수명제출일학과학번이름서문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그의 즉위 교서(敎書)에서 “정치의 요체(要諦)는 법을 세우고 그것을 행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군왕이 지녔던 이와 같은 통치이념 즉, 법치국가의 이념은 조선왕조 전 기간을 통하여 계속되었던 법전편찬사업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조선 초기에 이뤄졌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는 편찬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서문에서, 우선 조선왕조에서 법이 어떻게 제정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성문법의 체계를 따르지 않은 조선왕조 시대 법의 실체는 바로 방대한 판례의 체계였으며, 이는 최종적으로 국왕의 판결인 수교(受敎)에서 유래되었다. 물론 왕명이라 해도 모든 것이 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서화된 왕의 명령인 수교(受敎)라는 판례체계가 바로 이 시대 법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이루었다.그에 따라 법전을 편찬하는 작업이란 새로운 법전을 기초(起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각 관청(各曹)에서 이미 발급된 수교를 수집하여 이를 선별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정한 시기별로 수교를 모두 수집하여, 이를 육조별로 정리하면 이것이 곧 조선왕조의 법전이 되는 것이었다. 여러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새로운 수교가 수교집에 수록되면서 이와 같은 법전은 점차 증보되어 갔던 것이다.이제 법전에 대한 연구사를 알아본 이 후에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는 편찬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법전에 대한 연구사지금까지 법전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분류될 수 있다.하나는 법전 자체에 대한 연구로서 법전의 편찬시기와 편찬경위를 살피고 법전에 수록된 내용과 의미 등을 밝히는 작업이다. 이는 일종의 법제사적인 연구로 주로 법학분야에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 반면, 역사학 분야에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법학 분야에서의 연구도 대부분 조선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우며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심하다. 조선후기 연구가 중세사회의 해체양상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연구자들 또한 법전 자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1394년 정도전이 조선 개국(開國)의 기본 정책을 규정한 법전(法典)으로 필사본이며 상 ·하 2권으로 되어있다. ?경국전?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의 헌법(憲法)이라 할 수 있는 책으로서, 정도전 등이 지었다. 그러나 조문은 전하지 않고, 6전마다 총서(摠序)와 항목별 개요라고 할 수 있는 소서(小序)만 남아 있다. 서문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고려 말 개혁파 사류(士類)의 집권 이후 발표한 수교를 모으고, 여기에 자신이 수정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편찬하였다. 그러나 공식 법전으로 채택되지는 못하고, 3년 후 조준이 책임자로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이 공식법전이 되었다.삼봉집)의 7~8권에 수록된 ?조선경국전?(상, 하)은 ?경제문감?보다 1년이 앞선 1394년에 제작된 것인데, 이는 ?주례?의 육전체제를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조정한 것이다. 정보위(正寶位) ·국호(國號) ·안국본(安國本) ·세계(世系) ·교서(敎書) 등으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술하였으며, 이에 주례(周禮) 이래의 중국의 전통적 관제(官制)에 따라 치(治) ·부(賦) ·예(禮) ·정(政) ·헌(憲) ·공(工)의 6전(六典)을 설치하여 각 전(典)의 업무를 규정하고 있다.치전에서는 특히 재상의 직책과 관리임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부전에서는 국리, 민복이 조화된 수취체제의 강화방안을 제시하였다. 예전에서는 유교적 사회질서의 안정과 우호선린의 사대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정전에서는 병농일치에 입각한 국방강화의 원칙을 논하였다. 형전에 해당되는 헌전에서는 덕치주의적 형벌제도의 원칙을 강조하였고, 공전에서는 사치의 억제와 민력의 축적이 수공업이나 토목공사의 요체라고 제시하였다. 특히 이편은 뒷날 ?경제육전?을 거쳐 ?경국대전?을 만 발간되면서 점차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경제육전?의 편찬사업은 국왕의 수교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던 시기에 따라 모두 4가지의 단계를 거쳐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는 그 때마다 각기 약간씩 다른 모습을 나타내었다.그 첫 번째가 1397년(태조 6) 12월 26일에 공포하여 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육전?의 편찬사업이었다. 이 법전은 대표 편찬자였던 조준의 이름을 따서 흔히 ‘조준육전’이라고도 불리어졌다. 이는 영의정 조준의 책임 하에서 법령의 정비와 법전편찬 업무를 관장하던 ‘검상조례시’에서 편찬한 것으로써, 1388년(고려 우왕 14)부터 1396년(태조 5)까지의 모두 9년 동안의 수교를 모두 다 수집하여 정리 · 분류 · 편집한 것이었다.그러나 이 책은 건국 초에 급작스럽게 편찬된 것이어서 일반적인 법조문과 같이 추상화 및 일반화 되어있지는 않았다. 수교의 형태로 공포된 원문을 그대로 편집한 것이어서 이두와 방언까지 조문에 섞여 있었고, 심지어 수교를 시행하였던 연월일까지 붙어 있는 소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법전은 육전의 분류나 항목의 구성방식에 있어서도 ?경국대전?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두 번째는 1413년(태종 13)에 반포된 것으로 ‘조준육전’에서 이두를 빼고 한문으로 상정한 ?원육전?(詳定元六典)과 1397년 이후의 수교를 모아 편찬한 ?속육전?(續六典)의 편찬사업이었다. 이 법전은 편찬자의 이름을 따서 ‘하륜육전’이라고도 불려 지기도 한다. 조준의 육전에 대한 최초의 개정작업은 정종 즉위 초부터 시작되었으나 곧 중지되고, 1407년(태종 7)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이 해에 ‘속육전수찬소’를 설치하고, 하륜을 책임자로 법전의 개수 작업에 착수하였다.그에 따라 하륜과 이직 등은 1412년(태종 12) 4월에 ?원집상절? 3권과 ?속집상절? 3권을 찬진하고, 다음해인 1413년 2월에 주자로 인쇄 배포하였다. 이 때 전자를 ?경제육전 원집상절?, 새로 편찬한 것을 ?경제육전 속집상절?이라 칭하였다. 이들을 ‘지는 않은 미완의 법전 편찬사업을 지칭하는데, 이법은 흔히 ‘이직육전’ 또는 ?신속육전?이라고 지칭되었다. 이는 하윤의 ‘속육전’에 1408년(태종 8) 이후의 수교조례를 통합하여 새로운 통일법전으로 꾸민 것으로써, ‘속육전’ 5권과 ‘등록’ 1권으로 구성된 새로운 법전이다. 이 법전 편찬사업은 1422년(세종 4) 8월에 정식으로 ‘육전수찬색’을 설치하고 이직, 이원, 맹사성, 허조 등을 책임자로 임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4년간의 본격적인 개찬작업 끝에 1426년(세종 8) 12월에 탄생하였다.이 세 번째의 법전은 기존의 법전체제에 몇 가지 수정을 가하였다.이른바 ① ‘속전’에서 ‘원전’의 조항을 고친 것은 모두 삭제하였고,② 태종 8년 이후의 수교를 모아 연원을 불문하고 유별로 모아 모두 ‘속전’에 합록(合錄)하였다.③ 각년 수교 가운데서 하나로 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합하였다.④ 각 사안에 신설이 있으면 ‘모년 설립’, 개호가 있으면 ‘모년 모사로 개호했다’고 주를 달았다.⑤ 1424년(세종 6) 이후 다시 고친 조목들도 주를 달았다.⑥ 일시적인 법들은 등록으로 편찬하고 중복된 것은 삭제하였다.그러나 이 법전도 수교문의 체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기본 골격은 유지한 채 그 변동내용을 추가하거나 문장 일부를 삭제하는 등의 편찬방식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신속육전?은 완성 후에도 그 법조문에 대한 이의 제기가 그치지 않았다. 그에 따라 곧바로 재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1428년(세종 10) 11월에 이직 등이 개찬하여 ‘속육전’ 5권과 ‘등록’ 1권을 올리고, 다시 하륜이 1429년(세종 11) 3월에 개수 편찬한 것이 1430년(세종 12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새로운 ?신속육전?이 만들어졌으나, 이 역시 반포되지 못한 채 미완의 장으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신속육전?은 엄격히 따지면 세종 8년의 편찬본과 세종 11년의 편찬본이란 2가지의 판본이 있는 셈이지만, 후자는 반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속육전?은 흔히 세종 8년 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던 ?경제육전?의 편찬사업은 1397년의 ‘조준육전’으로부터 시작되어, 1413년 하륜의 ?속육전?(續六典) 편찬사업 및 1429년의 ?신속육전? 편찬사업 등으로 이어졌었다. 특히 이 세 번째의 편찬사업도 여러 차례의 개수와 편찬이 이뤄졌으나 이 역시 반포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1433년에 황희가 편찬한 ?신찬 경제육전?으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36년이란 오랜 세월과 노력을 거쳐 조선왕조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편찬사업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었던 것이다.경국대전(經國大典)?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왕조의 여러 법전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대법전(大法典)이다. 이는 조선 건국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여러 종류,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만든 통치의 기본이 되는 통일법전이었다. 이 법전은 1460년(세조 1)에 국왕 세조의 명에 의하여 최항(崔恒: 영성부원군), 노사신(盧思愼: 우찬성), 김국광(金國光: 우의정), 강희맹(姜希孟: 형조판서)을 위시하여 한계희, 임원준, 홍응, 성임, 서거정 등에 의하여 그 편찬사업이 시작하여 148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조선왕조는 건국하자마자 곧바로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1397년(태조 6) 12월에 ?경제육전?을 간행했으며, 그 후 곧 개정작업을 벌여 1433년(세종 15)까지 무려 3차례의 ?경제육전속전? 등의 간행사업 추진되었다. 특히 국가제도와 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개혁과 수정 사업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발생하였던 법조문과 현실과의 괴리와 법조문 간의 모순현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에 따라 “만세불변의 법전을 편찬”하려는 조선정부의 의도는 세조 때에 이르러 드디어 실현되었다. 이른바 세조는 즉위와 더불어 새로운 법령이 계속 반포되면서 이것들이 기존의 법체계와 모순되거나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새로운 법전을 간행하는 고식적인 법전 편찬방법을 지양하려는 의도를 정책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그는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
실증주의 사학자, 이병도서문본문이병도의 가계와 생애이병도의 국사관(國史觀)이병도의 국사연구고대사연구고려, 조선시대 연구저서국사교본(國史敎本)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한국사(韓國史)이병도의 사학사적 위치부록: 이병도의 약력결문과목명교수명제출일학과학번이름서문실증주의 사학자인 두계 이병도는 친일파란 꼬리표를 달고, 요즘 이곳저곳의 화두에 오르내리고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인 네이버에서 이병도를 검색한 결과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 많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병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표현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다수에 의해 진정한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고 몰아붙여지는 실정이었다. 사람들이 올려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수백 개가 넘는 글들은 김정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가 이병도에 대해 쓴 글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몇 사람의 생각과 평가가 진실이고 전부인양 치부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가 이렇게 심한 비판을 받을 만큼 친일적인 행동을 했던 자였던가.. 우선 문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명단자료와 보고서자료를 찾아보았다. 명단에서 교육, 학술분야에 이병도가 적혀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고서자료에서 주요인물의 친일행적과 약력)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떠한 선정기준아래에 이병도가 친일명단에 선정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분야별 선정기준 중 교육, 학술 분야를 찾아보았다.) 위의 모든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이병도는 특별한 친일적인 행동을 보였다기보다는 우선 그가 일제치하에서 보장된 역사연구를 하였고, 현대사학계에서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점이 맞물려서 그를 비판하려는 의식이 상승화작용을 일으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본문에서는 이병도의 생애, 학문적 배경, 사관, 연구적 업적, 저서 등을 살펴봄으로 하여 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덧붙여 부록에서는 그의 학력, 경력, 가족 및 지인, 활동사항 등을 보기 쉽게 표로 작지를 통해 발표된 13편의 논문은 그 주제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사실고증의 측면에서는 수준이 매우 높은 것이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사학 논문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934년의 진단학회 창립과 그 학회지인 진단학보의 창간은 이병도 개인의 학문생활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학 연구와 나아가 국학 연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최초로 사학을 전공한 이는 구한말의 최남선이었으나, 그의 유학생활은 단기간에 그치고 말아 학자로서의 기초를 충분히 다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대학과정을 정상적으로 마치고 논문작성훈련을 쌓고 귀국한 것은 이병도가 최초라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 김상기, 이상백, 손진태 등이 와세다대학에서 역시 사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였으며, 국내에서도 1924년에 경성제대가 창립되어 1930년대에는 유홍렬, 신석호 등 사학자와 이숭녕, 조윤제 등의 국어국문학자들이 배출되어 어느 정도 학회를 조직할 만한 인력을 갖추게 되었다.여기에다 1930년대 초에는 유물사관의 백남운이 《조선사회경제사》와《조선봉건사회경제사》 등 무게 있는 저서를 내고 이청원, 이북만 등이 비슷한 경향의 학문 활동을 전개하여 우파 계열의 학인(學人)들로서 이와 경쟁할 만한 학회를 결성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또한 국학을 전공한다면서 일본학회지에 일문(日文)으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학인들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말로 글을 쓰던 민족주의 계열의 학인들에 비해 명분상으로도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진단학회(震檀學會)는 바로 이와 같은 여러 상황이 복합되어 탄생된 것이다.《진단학보(震檀學報)》는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여 편집진용이 짜여 졌는데, 와세다대와 경성제대 출신이 20~30대 소장학자들이 핵심위원으로 논문을 기고하였으며, 재정적 후원은 이병도 자신과 김성수, 윤치영, 윤치호, 최규동, 이능화, 송진우, 조만식, 안확, 문일평, 황의돈, 권덕규, 최두선, 이광수 등이 맡았다.우리나라 최초의 학으며, 1960년의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許政) 과도정권이 들어서자 4개월간 문교부장관에 취임하기도 하였다.(1960.4) 그리고 같은 해 학술원 원장에 올라 20여 년간 학술원을 이끌었다. 그가 일시적이지만 관계로 나간 것은 허정과의 보성전문 동창관계가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1961년 대학교수 정년제가 실시되면서 그는 서울대학을 물러나(1961), 국민대학 학장(1961), 성균관대학 교수(1965)를 역임하고, 각종 교육, 문화단체의 이사를 겸임하는 한편,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국토통일원 고문(1970),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국정자문위원(1980) 등을 맡기도 하였다.해방 후, 특히 6.25전란 후 우리나라 학계를 대표하는 위치에서 교육행정과 사회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생활 속에서도 이병도는 연구 활동을 잠시도 멈추지 아니하고 근 60편의 논문과 28권의 저서를 출간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우선 저서만 가지고 말해도, 순수학술서적으로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사상 연구서인 《고려시대의 연구》, 한국고대사 연구논문을 모은 《한국고대사연구》, 우리나라 유학사를 체계화한 《한국유학사》를 대표로 꼽을 수 있다. 그밖에 대학생과 일반인들의 교양도서로 쓴 《국사대관》은 수정판을 거듭 내면서 1940~1960년대까지 국사개설서의 왕자의 자리를 누리면서 널리 읽혔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역주본은 지금까지도 이를 능가하는 업적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수상집 《두계잡필》(1956), 《두실여적》(1975), 《성기집》(1975), 《나의 인생관》(1984) 등은 그의 인생관과 학문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이병도의 국사관(國史觀)이병도는 94세의 생애 중 60여 년간을 학자생활로 일관한 순수 역사학자이면서도 어떤 사관을 표방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떤 사관을 특별히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는 엄밀한 문헌고증에 바탕을 두고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학자의 임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념은 일평 부정적 시각을 보이면서도, 중국과 일본의 강대국 사이에서 민족사회를 유지해온 자기자성(自己自性)이 있었음을 주목하고 그 자기자성을 공동체적 정신에서 찾고 있다. 그가 우리 민족의 지도이념이라고 강조하는 ‘공동체적 정신이란 개인이 전체(씨족, 부족, 국가, 민족)을 위하여 협동 부조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타협주의‘로도 이해되고 있다.)이병도에 의하면, 공동체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두 종류가 있는바, 개인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결합된 것이 이익사회라면 개인의 희생과 종속 위에서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결합된 형태가 공동사회 인 것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최고 지도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공동체적 정신이란 바로 공동사회를 위한 협동정신을 말하는 것으로서, 신라의 화랑도정신과 고려 태조의 고구려통일정신, 삼국사기에 나타난 인종의 민족의식과 삼국유사의 민족의식, 그리고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두레, 행도, 계, 향약 등의 민간협동체를 들고 있다. 이밖에 고대의 화백회의와 고려의 도병마사 그리고 조선의 비변사회의 등에서도 타협정신과 민주주의적 요소가 깃들여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이병도가 우리 민족의 지도이념으로서 협동과 타협의 전통을 찾으려 한 것은 6.25이후 국민적 단결을 호소하려는 데 현실적 목표를 둔 것으로서, 그의 냉정한 학문태도가 다소 이념 지향적으로 변해간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의 전반적 특성을 정체적, 인습적, 편파적이라고 규정한 입장과 협동과 타협의 아름다운 전통을 찾으려 한 두 입장 사이의 논리적 통일성을 찾기 어려운 것은 이병도사학의 자기갈등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이병도의 국사연구고대사연구이병도의 국사연구는 고대사와 고려시대 풍수지리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의 세 분야로 크게 압축된다. 이 중에서 가장 역작(力作)으로 꼽히는 것은 고대사 연구로서 학계에 끼친 영향도 가장 크다. 이병도의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한사군의 위치와 삼한 문제에 대한 일련의 연구이다.)이병도는 낙랑(樂浪)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다음에 《이율곡(李栗谷)의 입산동기(入山動機)에 대하여》(1926)부터 시작된 이병도의 조선시대 유학사연구는 권근(1929), 서경덕(1936), 이구(1936), 이언적(1936), 성해옹(1938), 정도전(1959), 박세당(1966), 이이(1957), 이덕무(1966) 등에 대한 개별연구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유학사에 관한 개설서로서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1959)를 한문으로 써서 등사판으로 펴낸 데 이어, 이를 한글로 풀고 설명을 보충하여 《한국유학사》(1987)를 저술하였다.이병도의 유학사연구는 20년간 조산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 규장각 도서를 참고할 기회를 가졌던 데서 얻어진 성과인데,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이후 실증적인 방법론으로 유학사 연구가 시작된 것은 그의 연구가 최초라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유학사의 서설에서 유교의 현대적 학문체계의 수립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주장하면서 유교 자체에 대한 비판과 과거 유교사상에 대한 취사선택 및 동서사상의 절충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유학사를 다루고 있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이병도의 유학사 연구는 대표적 유학자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을 주로 소개하고 정치, 경제, 사회사상을 다루지 않아 사상사의 차원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성리학과 도맥(道脈)에 치중했던 조선조 학인들의 유학사 인식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은 인정될 수 있다.저서그의 수많은 논문과 저서 중 국사교본과 조선사대관, 한국사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국사교본(國史敎本)(이병도, 김상기, 서울 진단학회, 군정청 문교부, 1946, 국판 177면)이 책은 미군 군정청에서 진단학회에 교과서 편찬을 의뢰하여 진단학회에서 활동하던 이병도, 김상기가 나누어 편찬한 것으로 군정 치하의 국정 교과서였다. 진단학회에서는 1945년 해방이 되자, 그해 9월 10일부터 국사 교사에 대한 강습회를 개최하면서 교과서 편찬을 준비하고 있다가 미 군정청에 교섭하여 국사 교과서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