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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반고흐vs폴고갱 평가A+최고예요
    ?목차?1. 반 고흐2. 폴 고갱3. 반 고흐 VS 폴 고갱4. 함께하기엔 너무 강했던 개성. 두 친구가 미술사에 미친 영향1. 반 고흐 [Gogh, Vincent van, 1853.3.30~1890.7.29]네덜란드의 화가.국적 네덜란드활동분야 예술출생지 네덜란드 프로트 준데르트주요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1885) 《아를의 도개교(跳開橋)》《해바라기》1853년 3월 30일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마침내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타히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하니?》 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타히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다. 그리고 고갱과 고흐는 테오의 화랑이나 고흐가 기획한 전시회에서 처음 만난다. 그곳에서 고갱은 고gm의 작품을 보면서 고흐형제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고흐와 고갱의 첫 만남은 대단히 짧았다.이 두사람의 그림 스타일은 아주 달랐다. 고흐는 거친 기법을 써서 고갱보다 여러모로 진보적이기는 하나 고갱에게는 서툴러 보였고 고흐가 쓰는 분할묘법은 고갱이 싫어하는 양식이었다. 더구나 고흐의 그림에는 고갱이 보여주는 우아한 곡선이 없었기에 고갱으로선 고흐의 그림에 대해 애매하고 모순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고갱은 고흐의 재능을 의심하면서도 그림을 교환하기로 하고 해바라기 정물화를 골랐다. 이것은 앞으로 고흐의 가장 유명한 주제가 될 꽃에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갱이 받은 초기작에 속하는 해바라기 그림은 아주 급진적인 것으로 눈처럼 생긴 두개의 원에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주었고 꽃 주위에 ‘후광’을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터치부터 씨를 표현하는 날카로운 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붓 터치를 보여주고 있다.반면 고흐는 고갱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다. 비단 그림 때문 만이 아니라 예술적인 면에서 볼 때 고갱은 확고한 자기 위치를 구축했고 방황하는 청년인 고흐와 다르게 가정이 있고 그림으로 돈도 벌었던 성공한 화가였던 것이다. 고흐는 고갱을 큰 영웅처럼 느꼈고 그와 함께 해야 한다는 믿음을 더욱 굳혔다.고갱은 1888년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그림을 그리러 간다며 파리를 떠났다. 당시 고갱은 마르티니크의 흑인이든 브르타뉴의 농부 같은 ‘원시인’을 그릴 때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갱이 파리를 떠난 후 고흐 역시 아를로 출발했다.꿈만 같은 공동생활의 시작두 사람의 만남은 1888년 2월 먼저 아를에 정착, 남부의 눈부신 햇살에 반한 고흐가 고갱을 불러 가로 6m, 세로 4.5m짜리 작은 아틀리에를 공동사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인상주의 거장 모네의 작품이 1000프랑, 고갱 그림이 250~300프랑 정도에 팔리고 고흐의 작품은 회의적이다. 성적 욕망이 강하며 자기 중심적인 거만한 고갱과, 미학적이고 윤리적이며 격정적인 고흐의 관계는 사실 견원지간이다.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풍경이건 사람이건 다 시시껄렁하고 구질구질하기만 해. 빈센트와 나는 사사건건 충돌하는데 그림에서는 더욱 그래"하고 밝힌 바 있다.두 거장은 함께 지내기에는 너무 개성이 강했고, 달랐다. 고흐는 말이 많았고, 고갱은 과묵했다. 고흐의 그림 속도는 고갱의 2배였다.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견해차는 극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였다. 고갱은 "보이는 것만 그리지 말고, 생각과 상상도 함께 그려야한다"고 했지만, 고흐는 반대했다. 아틀리에 안에서 똑같은 모델을 놓고 그려도 고갱은 배경을 카페 풍경으로 바꿔놓지만, 고흐는 있는 그대로 그리는 식이었다. 그들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리고 강도를 더해 갔다. 피로한 논쟁과 화해, 또 다시 반복되는 다툼은 그들을 사슬처럼 얽어 맸다. 파국이 가깝다고 내심 느끼는 순간 그것은 의외로 빨리 왔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고흐가 왼쪽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 이어졌고, 고갱이 12월에 파리로 떠나버림으로써 두 거장의 동거는 2개월 만에 끝났다.두 거장의 짧은 공동생활의 추억. . 그리고 위대한 작품들.좌측은 폴 고갱의 ‘밤의 카페’ 우측은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 두 그림속의 여인의 자세와 옷차림과 머리모양까지 비슷한 것은 같은 사람을 모델로 두고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고갱이 아를의 고흐에게 온지 2주가 지나서 두 화가는 밖에 나가 주로 경치를 그날따라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그 대상은 반 고흐가 아를에 처음 왔을 때 묵었던 라가르 카페의 주인 지누 부인이었는데 지누 부인은 반 고흐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어 고흐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반 고흐는 지누 부인에게 아를 지방의 전통 민속 옷을 입도록 부탁했고 그녀는 손님이 없는 오전시간을 택해 모델 서는 것에 응하고 카페의 탁자에 나와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반 고흐는 방 안에서 보이는데 이 손님들은 반 고흐가 좋아서 모델로 삼았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고갱은 이 사람들을 그리면서 경멸이 깔려 있는 의도로 그린듯한 모습이 깔려 있다.폴 고갱이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 그림에 앉아 있는 여인들은 창녀들이라고 했다.그리하여 지누 부인의 표정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고 고갱의 스케치에서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유화로 옮겨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좀 더 옆으로 당겨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있어 마치 뒤에 앉아 있는 여인들의 뚜쟁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창녀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 이는 바로 반 고흐가 좋아하는 우체부 조셉 룰랭이다. 반 고흐는 룰랭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해박한 지혜와 풍부한 인간성을 존경하였다. 고갱이 그런 룰랭을 창녀들과 희희낙락 하는 졸부로 둔갑시킨 것은 반 고흐가 다정한 아버지 상으로 이상화한 룰랭의 이미지를 깎아내린 것이다.그리고 술에 취해 옆 탁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반 고흐의 친구이자 가끔 같이 그림을 그리곤 했던 프랑스 군인 밀리에이다. 사실 룰랭이 창녀들과 술을 마시거나 밀리에가 술에 취해 스러져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갱은 이 카페안의 사람들을 모두 타락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반 고흐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모독하는 것으로 무시무시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냈고 이로써 두 화가의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흐는 이런 그림을 그린 고갱의 의도를 눈치를 챘지만 고갱이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애써 이해하고자 했고 실현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위의 그림은 폴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이다.해바라기는 여름 꽃이다. 아를 지방에서 여름이면 해바라기 밭에 꽃이 만발하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고갱이 아를에 온것은 10월 말이기 때문에 해바라기 꽃은 다 시들 무렵이고 반 고흐의 아틀리에는 말라빠진 몇송이 해바라기 만이 꽃병에 있었을 뿐이다. 고흐다.
    예체능| 2006.07.11| 13페이지| 1,500원| 조회(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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