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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조선노동당의 위상
    북한 조선 노동당의 위상북한의 정치체제는 조선노동당이 국가. 사회 모든 부문을 통제, 지도하는 ‘일당지배체제’라고 할 수 있다. 조선노동당은 1945년 10월 창당된 이래 북한사회의 형성, 발전, 침체의 전 과정에 유일적 지도체로서 개입해왔다.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유일체제를 작동시키는 핵심기구인 조선노동당은 북한 권력의 핵심이며, 모든 권력은 당에서부터 나온다는 말과 같이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개인의 일상은 물론 내면적 사고영역까지 유일사상으로 통제한다. 당의 위상은 입법, 사법, 행정부 위에 군림하면서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여 하부기관에 전달, 감독한다. 따라서 북한은 당우위의 원칙에 의하여 모든 국가권력이 당에 집중되어 있는 당-국가 체제를 갖는 ‘당이 곧 국가’라는 성격을 갖는다.북한에서 노동당은 전체 인민의 향도적 역량을 갖춘 사상적 지도자이며 국가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도, 통제하며 인민정권은 오로지 당의 노선과 정책을 집행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노동당의 위상과 역할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국가 및 정권기관들은 당의 유일적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하기 때문에 외형상 삼권분립체제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에 지나지 않는다.조선노동당은 헌법상 최고 주권기관으로 규정되어 있는 최고인민회를 비롯해서 내각과 사법기관 및 인민군대를 지도, 통제, 감독할 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들의 사생활 영역까지도 통제하는 지도적 기구이다. 그리고 노선과 정책의 수립 및 결정자이면서 그 수행의 감독자이며, 대중운동의 조직자로서 광범위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는 초월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본질은 ‘수령의 혁명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으로 규정되고 있다. 즉 김일성, 김정일의 혁명사상과 지도방침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이 조선노동당이라는 것이다.이처럼 조선노동당은 북한사회를 이끌어가는 최고 권력기구이며, 이를 보장하기위한 제도적 장치도 완비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계속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당의 위상과 국가사회장악력이 흔들리고 있다. 오늘의 경제위기는 스스로 국가운명의 개척자임을 자임해왔던 당에 대한 인민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김정일 시대의 당은 김일성시대와 비교할 때. 그 위상이 약화되었으며, 기능에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당이 체제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주민들의 당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고 있고, 충성심 및 복종심이 약해지고 있다. 노동당은 직업동맹, 농업근로자 동맹, 김일성 사회주의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4개의 근로단체를 당의 외곽조직으로 포괄시켜 이들 조직을 통해 주민들을 사상교양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가중되는 식량난으로 주민생활 공급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당의 사회장악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이 근로단체들을 통한 사상교양, 정치학습, 생활총화 등이 이완되고 있다. 결국 당이 제시한 목표와 식량난으로 허덕이는 현실간의 현격한 괴리현상은 당의 권위 저하와 통제력 약화로 연결된 것이다.김정일 시대에 이르러 노동당의 일당독재 현상은 상당부분 퇴색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당대회, 중앙당위원회, 정치국 등의 당의 의사결정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대신 군대가 당의 역할을 상당부분 수행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점을 중시한 결과이다. 하지만 인민군대가 당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예외적인 현상은 식량난 및 경제난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북한의 군대는 당의 군대이며, 군대가 당을 대체하거나 그 우위에 서기는 어렵다. 북한의 경제재건 속도에 따라 가변적이지만, 당-국가 체제의 권력구조 하에서 조선노동당은 유일당의 위상과 기능, 역할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북한정치권력의 원천 - 수령유일지도체제/세습영도제북한은 1당 독재체제로서 당이 국가기관보다 우위에 있는 체제이다. 북한의 헌법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주체사상에대하여」를 통해 "당은 수령의 현명한 령도밑에 주체사상을 유일적 지도사상으로 하여 모든 정책을 집행한다"고 지적하고, "수령의 유일적 령도체계란 수령의 사상을 지도지침으로 하여 혁명과 건설을 수행하며, 수령의 사상과 명령, 지시에 따라 전당·전군·전민이 하나같이 움직이는 체계"라고 규정하며 실제로는 수령의 유일적 영도 하에 통치되는 수령유일지도체제임을 보여준다. 수령 체제는 최고 지도자의 지위와 역할을 절대화하여 모든 권위와 권력을 수령에게 집중시키고, 그와 같이 절대화된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후계자에게 승계함으로써, 후계자에 대한 도전 세력의 형성과 그에 따른 권력 투쟁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원천 봉쇄하는 체제라 할 수 있다. 절대화된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계승하는 후계자의 지위와 역할 역시 절대화하고 그 후계자를 중심으로 당과 대중의 통일 단결이 강력하게 추구되었던 것이다. 혁명의 계승은 곧 단결의 계승이며, 단결의 계승을 떠나서는 혁명 위업의 계승 완성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통일 단결을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통일 단결로 대를 이어 계승 발전시킨다는 것이다.현재 북한의 김정일 유일지도체제의 특징은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사상, 조직을 장악하면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지도방식은 철저히 조직적 지도에 의거하고 있다. 당조직을 통한 김정일의 북한 사회에 대한 지도는 당규율의 확립을 통해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일은 1970년대 초반부터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의 철저한 확립을 전당에 요구하고, 이를 자신이 직접 검열하면서 규율을 확립했던 것이다.
    사회과학| 2009.05.25| 2페이지| 1,500원| 조회(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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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 준비하기
    Ⅰ. 신랑 신부 소개Ⅱ. 연애 이야기Ⅲ. 결혼생활에 대한 우리의 의견1. 맞벌이1)신랑2)신부결혼을 했다고 당장 자신의 일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본다. 능력이 되고 체력이 될 때 돈을 벌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요즘 주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 집에서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들이다.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자신감이 생기면 생활에 활력이 생길 것이다.하지만 평생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어릴 적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는데, 방과 후 집에 가면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마중을 나오시거나 맛있는 간식을 해주시곤 했는데 나는 늘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그 덕에 라면도 또래보다 훨씬 일찍 끓일 줄 알게 됐다. 내 아이는 외롭지 않게 하고 싶다.7~10년 정도는 경제활동을 하고, 아이가 생겨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 아이 옆에 있어주는 엄마이고 싶다. 맞벌이는 하면 좋은 것이지만 필수조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2. 경제문제1)신랑2)신부아직 제대로 돈을 모아보지도 써보지도 못했지만, 결혼 후 돈 관리는 내가 할 것이다. 남자친구는 4년째 돈을 벌고 있지만 적금 외에 돈을 모아 놓은 것도 없고 돈 관리를 잘 못하는 것 같다.신랑 월급과 미래의 내 월급 합쳐서 약 월 450만원으로 계산,적금:보험:신랑 용돈:부모님 용돈:생활비:3. 자녀 키우기1)신랑2)신부결혼 3~4년 후 경에 아이를 가질 것이다. 아이는 성별에 관계없이 세 명을 키우고 싶은데, 첫째와 둘째가 중학생이 되면 아이를 입양할 것이다. 물론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를 키우는 건, 부모님들의 반대로 시도조차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내 아이들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을 돌보면서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히 하고 가족애도 키웠으면 한다.아이들이 보육시설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할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부터 아이들 공부하는 것도 지켜봐 주고 옆에 있어 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자존감이 있는 아이로 키울 것이다. 무리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는 아이가 원하는 것은 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또 요즘은 엄마를 공부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 역시 내가 직접 공부를 시키고 싶다.4. 부부의 역할1)신랑2)신부맞벌이를 하면 당연히 가사 분담을 해야 한다. 한 사람만 집 밖에서, 집 안에서도 일만하다 보면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자연히 부부간의 다툼도 더욱 잦아질 것이다. 맞벌이를 하는 동안은 가사 분담을 통해서 어려움을 나누고 줄여야 한다. 말로만 하기보다는 규칙을 정해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예- 아침은 3일은 밥, 2일은 빵으로 식사한다.- 저녁은 3일은 아내가, 2일은 남편이 한다.- 식사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설거지를 한다.- 빨래, 청소 등은 집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한다.- 한 달에 한번 대청소를 한다.- 쓰레기 버리기는 남편이 한다.- 장은 되도록 함께 보러 간다.- 밤에 아기보기는 번갈아가면서 한다.- 아기 키우는 일은 아내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런 식으로 정리를 해 두어야 나중에 다툼이 발생할 일도 적다고 본다. 물론 맞벌이를 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아내의 역할이 그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서로의 의견 정리해서 규칙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Ⅲ. 결혼준비1. D-100 리스트*D-100- 상견례·날짜택일 : 양가 부모님 상견례를 하고 2010년 6월 26일로 결혼 날짜를 정했다. - 분가결정 : 양가 부모님 모두 지방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분가하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결혼예산 작성 : 적용가능범위 안에서 신혼집, 혼수, 결혼식장 비용 등 결혼에 들어갈 비용에 대한 전체적인 틀을 짠다.*D-80- 신혼집 알아보기 : 신랑 부모님께서 전셋집을 해주시기로 하셨고, 적당한 가격 안에서 아파트를 알아보고 몇 군데 후보를 결정했다.- 예단·예물상의 : 신랑 부모님과 예단에 대해 상의를 했고, 나중에 얻게 될 신혼집 전세금의 10%로 하기로 했고, 어르신들 이불과 은수저를 마련하기로 했다. 예물은 결혼반지와 신부 귀고리, 목걸이 세트로 결정하였다.- 혼수리스트 작성 : 꼭 필요한 살림과 갖고 싶은 것들을 작성해 보았다.*D-70- 결혼식장 결정 : 결혼식은 마산에서 치르기로 하였고, 찾아오기 편리하고 시설도 깨끗한 곳을 예약하였다. 그 식장에서 웨딩드레스, 웨딩촬영, 턱시도, 피로연, 피부관리 등을 한 번에 해결하기로 했다. 다음번에 웨딩촬영을 하기로 했고, 미리 드레스와 턱시도를 골랐다.- 신혼집 계약 : 신랑의 회사와 인접한 K아파트로 최종 결정, 계약하였다.- 신혼여행지 결정 : 결혼 전부터 꼭 가고 싶어 했던 “그리스”로 결정하였고 여행상품들을 비교하여 여행사와 계약했다.*D-60- 청첩장 만들기 : 샘플들을 구경하고, 우리 사진을 넣어서 독특한 청첩장을 만들었다. 하객 수는 양가 부모님들과 상의하여 결정하였다.- 혼수 구입 : 가전제품 (TV,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밥솥,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김치냉장고, 에어컨), 가구(침대, 화장대, TV 장식장, 식탁, 책상, 소파), 침구, 커튼, 주방용품- 예단·예물 맞춤 : 시부모님 침구와 은수저, 예물 구입하고 한복을 맞추었다.*D-50- 청첩장 발송, 웨딩촬영, 예단 보내기*D-30- 신혼집 꾸미기 : 새 집이어서 수리를 할 것은 없고, 취향에 맞게 도배를 하고, 큰 가구배치를 한다. 잡지나 인터넷에 나온 집들을 보면서 연구를 해서 최대한 세련되게 꾸민다.- 신혼여행 물품 구입 : 커플 잠옷, 여행가방, 여권확인, 수영복 등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신경 써서 챙겨놓는다. 햇볕이 뜨거운 그리스이니 선글라스와 모자, 선블럭은 필수로 준비한다.*D-20- 우편물수령 주소 변경, 인터넷 설치, 가스 설치 등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나머지 혼수품들을 들여 신혼집 인테리어를 완성시킨다.- 주례는 예식장에서 해주기로 하였고, 사회자는 신랑 친구에게 부탁하였다.*D-5~1- 폐백음식, 웨딩카, 도와줄 친구 등을 확인하고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어보고 재확인한다.- 신혼여행 가방을 꾸리고 회사에 휴가신청서를 제출한다.- 모든 예약 상황을 재확인한다.- 숙면을 취한다.*D-day- 예식장에 일찍 도착하여 드레스, 메이크업, 헤어를 준비한다.- 떨지 않고 예쁜 결혼식을 마친다.- 신혼여행을 간다.2.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품목내용예산금액신랑부담신부 부담예식예식비부모님 부담(식대계산시)2,050,0000웨딩촬영1,000,000500,000500,000신혼여행3,000,0001,500,0001,500,000폐백음식300,000300,000청첩장600+300300,000100,000200,000주례사례비300,000300,000소계6,950,0002,400,0002,500,000예단예물신랑예물1,500,0001,500,000신부예물3,000,0003,000,000현금예단900보내고 400받음5,000,0005,000,000현물예단이불, 수저세트500,000500,000신랑 예복500,000500,000신부 꾸밈예복,가방,화장품1,500,0001,500,000소계12,000,0004,500,0009,000,000한복신랑 한복500,000500,000신부 한복500,000500,000친모한복400,000400,000시모한복400,000400,000소계1,800,000900,000900,000가전TV직원 할인 30%2,200,0001,540,000세탁기직원 할인 30%700,000490,000냉장고직원 할인 30%1,300,000910,000청소기직원 할인 30%200,000140,000에어컨직원 할인 30%900,000900,000김치냉장고직원 할인 30%60,000060,000밥솥친구들 선물가스레인지친구들 선물전제레인지친구들 선물닌텐도 위친구들 선물소계5,500,00005,500,000가구침대1,000,0001,000,000서랍장500,000500,000소파500,000500,000화장대300,000300,000컴퓨터책상200,000200,000식탁500,000500,000책장300,000
    생활/환경| 2009.05.25| 6페이지| 2,000원| 조회(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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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주민들의 생활
    변하는 북한 주민생활* 북한정치외교론* 정치외교학과* 2005020002 이현주Ⅰ. 서론오늘날 북한 주민들은 더 이상 과거의 북한 주민들이 아니다. 해를 거듭하며 계속되는 만성적인 경제난과 식량난은 그들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결과 생활모습이 많이 변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은 더는 국가를 믿지 않으며, 제가 벌어 알아서 생활해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무료의무교육이 무색해질 정도로 교육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고, 사회 일반에는 점술, 관상, 손금 등 미신이 증가하고 있으며, 북한 당국이 자본주의 수정주의 바람이라고 통제하는 외풍, 한류열풍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북한의 통제체제는 많이 무너지고 있으며, 할 수 없이 북한 당국도 장사허용과 장마당 활성화, 물가 현실화, 중국 친척방문 규제완화 등 나름대로 변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조금씩 취해가고 있는 중이다. 독재적이고 폐쇄적인 북한에 있어서 이것은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다.Ⅱ. 변하는 북한의 생활패턴1. 무너진 공급체계북한에서는 “제2의 고난의 행군”을 준비하라는 내부지시가 있었을 정도로 식량난이 다시 심각해지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북한 시장에서는 1달러에 북한 돈 2,500원에서 3,000원이 거래되었다. 북한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맞먹는다. 이렇게 되니,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져 산이나 들에서 캔 풀이나 고사리, 도토리, 버섯 등으로 연명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고, 시장과 역전 등에는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 속에서는 몇 년 전 고난의 행군 시기와 같은 큰 불안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공급체계가 마비돼 갈팡질팡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공급 같은 건 없어도 자체로 살아나갈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생겼기 때문이다.과거 북한 주민들은 국가공급에 의존에 살아왔다. 쌀은 보름에 한번씩, 나이와 직업에 따라 나누어지는 급수에 따라 배급 카드와 직장에서 준 배급표를 가지고 배급소에서 타다 먹고, 생활용품과 시작했다. 이때는 돈이 있어도 국가가 개인적인 쌀 팬매를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장마당이든 어디든 쌀을 살 곳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당과 같은 사회급양망을 통해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공급체계는 1990년대에 들어 식량난과 경제난이 더 악화되면서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식당들마저 운영을 못할 정도가 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북한 주민들은 직장에나 열심히 출근하고 국가공급만 바라보다가는 굶어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을 벌어야 겠다는, 즉 자본주의 사고방식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 이기주의라고 배척되던 장사 행위는 점차 똑똑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해 너도 나도 돈이 되는 것이라면 모조리 장사를 했다. 비록 국가상점과 식량배급소는 텅 비어 있어도 개인장사 활성화로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을 비교적 헐값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차츰 북한 주민들의 내적인 생활은 과거 국가공급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시장경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2. 황금만능주의지금 북한에서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고해지면서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버젓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이제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돈이 있어서 외화상점이 아니면 제대로 된 물건을 사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북한 돈이든 외화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게 됐다. 과거에 북한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북한 당국이 군대를 풀어 국경지역을 4중으로 감시할 정도다. 하지만 그곳을 지키는 국경 경비대들도 돈만 주면 눈감아주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나온다고 한다. 또 북한에서 해외여행은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돈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중국 방문이 일정 정도 허용되었다. 당시 근거리 이동 등에서는 검열과 검사가 느슨해졌다가 최근 몇 년 전부터 탈북러시와 관련해 통타 조건이 좋은 집에서 먹는 것에서 부터 입는 것, 자잘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북한에서는 최고로 여기는 일본제나 한국제를 쓰고 살고 있다. 집에는 따로 장사꾼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이들은 필요한 것을 사러 일부러 장마당에까지 갈 필요가 없다. 북한식 배달 서비스까지 받으면서 편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부자들도 있다. 북한에서는 사유재산이 실지로 허용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갑자기 돈이 많아지면 보위부의 감시대상이 되기 때문에 돈을 묻어놓고 조용히 사는 지하 부자들이 꽤 된다. 이들은 주로 환율 차를 이용한 돈 장사나 이자를 받는 방법으로 돈을 모은다. 이들은 외화벌이 기관이나 기업소들에까지 이자를 받고 자금을 빌려주기도 하며,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무역을 비롯한 유통업에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 전에는 그렇게도 원하던 입당도 이제 와서는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하게 된다. 당증을 가지고 있다고 누가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니라며 출세하고 싶은 사람은 돈만 고이면 된다는 의식이 생겨나고 있다. 북한에서 과거 권력의 상징으로 일반 주민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가정용 전화기 설치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이는 이제 북한에서도 삶의 중심이 권력에서 돈으로 이동하는 단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신흥부자들에 비해 일반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하루하루 매우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북한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3. 흔들리는 통치체계2-3년 사이에 수백만이 굶어죽고, 자유라는 것은 상식으로 통하지 않으며, 특히 수십만의 정치범들이 외부와 단절된 채 인간 이하의 무참한 삶을 강요당하고 있고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고 있는 곳은 북한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데모 한번 변변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거미줄처럼 촘촘한 통제체계가 있기 때문이.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러한 통치체계도 돈이 중요시되면서 많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계속되는 경제위기는 스스로 국가운명의 개척자임을 자임조직을 통해 주민들을 사상교양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가중되는 식량난으로 주민생활 공급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당의 사회장악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이 근로단체들을 통한 사상교양, 정치학습, 생활총화 등이 이완되고 있다.지난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보위부에 일단 걸리기만 하면 뇌물이고 뭐고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필요하면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가벼운 죄도 중한 죄로 부풀려 죽이는 것이 보위부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언제 보위부 그물망에 걸릴지 매사 두려워하며 보위부라는 말만 들어도 오싹해지곤 했다. 하지만 북한 보위부의 이런 무시무시한 통제력도 1990년대 들어 약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북한 주민들의 체제 불만을 보위부도 일일이 다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치성 낙서나 수령우상화물에 훼손을 가하거나 기도한 자들을 적발해 체포하는 일이다. 대부분 목숨을 걸고 하는 행동인데다 이러한 사건들이 1990년대 중반 이후 꼬리를 물고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 북한 보위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3년 6월 중순경 북한의 국경도시인 함경도 무산군 국가안전보위부 건물 앞에서는 강력한 폭탄테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무산군의 한 중학교학생이 강력한 폭발물을 소지한 채 국가안전보위부 청사 안으로 진입하려다 건물입구에서 폭발물이 터져 본인은 물론 주변에 있던 행인 등 수십 명이 사망하거나 중경상을 입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데다 폭발물이 특수제작된 것이어서 북한에서는 내부적으로 큰 사건으로 보고 있다. “고난의 행군시기”에 북한주민들을 무섭게 위협한 것은 보위부원, 보안원들의 통제가 아니라 식량난이었다. 이쯤 되자 보위부 요원들까지 살기 바빠지면서 웬만한 사건은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게 되었다. 이러한 것도 보위부 통제력이 약해지게 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차츰 북한 주민들은 보위부 요원, 보안원들을 종전처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악하게 구는 보위부원이나 보안원에게 뒤에서 보복하게까지 되었다.등 대규모 밀거래에도 개입했다. 100명 가까운 구성원을 거느린 폭력조직만 해도 북한 각지에는 수십개나 있다고 한다. 북한은 국가적인 조직체 외에는 그 어떠한 조직체도 반체제적 요소로 간주해 엄격히 통제한다. 더구나 청소년들이 중심인 조직폭력배 단속은 매우 엄격한 편이다. 때문에 조직폭력배가 적발되면 예외 없이 노동교화형 등으로 엄벌하고 있고, 고위층 인물 자녀가 폭력조직과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어도 해당 고위인물에게는 “철직” 등의 문책이 가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북한에서는 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조직폭력배도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북한의 통제체제가 예전만큼 맥을 못 추고 있다는 증거이다. 결국 당이 제시한 목표와 식량난으로 허덕이는 현실간의 현격한 괴리현상은 당의 권위 저하와 통제력 약화로 연결된 것이다.4. 미신행위의 증가북한에서의 미신은 “인간과 사회를 좀먹는 위험한 독소”, “인민대중의 사상의식을 마비시키는 아편”, “제국주의자들의 사상문화 침투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엄격히 금지?통제되었다. 이런 것은 1960년대까지는 철저히 유지되었다. 그때는 미신과 관련한 대화조차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김일성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자칫하면 산간오지로 추방될 수도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 두려움은 어느 정도 약해지기 시작했고, 식량난, 경제난이 심각해진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에서는 점, 궁합 등 미신행위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부터는 점집까지 버젓이 등장하고 평양의 고위간부집에서까지 굿판이 크게 벌어지는 등 미신행위는 보다 대담해지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무당이 굿을 하면서도 “장군님 은혜”니 “수령님 덕분”이니 하는 말은 빠뜨리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걸려들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점을 잘 보는 무당은 한 번에 최고 100달러도 받는다고 한다. 이제는 북한에서 결혼문제, 학교 진학문제, 장사, 묏자리, 집터 등을 점쟁이에게 먼저 상의하고 행동하는이다.
    사회과학| 2009.05.25| 6페이지| 1,000원| 조회(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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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붕당과 민주주의
    《민주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 붕당》충북대학교정치외교학과2005020002이현주한국정치외교사연명모 교수님Ⅰ. 서론 - 붕당정치에 대한 옹호우리는 어려서부터 세계 역사를 통해서 정치사를 배웠다. 그리스 역사에서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펼쳐진 아테네 민주주의를, 로마사에서는 로마 공화정과 귀족당에 대항한 평민당 출신 호민관의 활약을, 영국사에서는 휘그당이니 토리당이니 하는 전근대 정당사를 배웠다. 곧 서구의 역사에는 ‘정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그러나 정작 한국사에 그러한 정치가 있다는 사실은 배우지 못했다. 차라리 배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고작 ‘우리 민족은 지금도 모이기만 하면 당파를 만드는 후진 국민이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질서와 통치이고, 이는 조선시대 이래로 내려온 당파를 좋아하는 민족성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붕당의 역사는 일제가 왜곡시키려 했던 대상이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사를 내정의 난맥과 외압에 의한 굴욕의 역사로 그림으로써 망국을 합리화하려는 것이었고, 붕당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호재가 되었다. 붕당이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식민사학에서 보는 붕당에 대한 시각은 과장과 악의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당쟁은 곧 악’이라는 역사 인식의 주입이 집요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면에서 많은 부담을 주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의 붕당정치는 근대와 현대의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맹아로 보는 것이 옳다. 당쟁은 당시의조선조 사회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언로였다. 당시의 삼사, 즉 의회제도가 없었던 당시에, 부패한 관리를 탄핵하던 사헌부, 왕의 비리를 간언하던 사간원, 그리고 왕의자문에 응하던 홍문관은 언로를 위한 최선의 정치적 도구였다. 이곳에서 오고간 정론을 당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토론 정치의 조선조적 표현이었을 뿐이다.곧 당파싸움은 무조건 나쁘다는 선입관을 버리고, 조선에서 특이하게 오랫동안 지속된 붕당과 붕당정치의 진정한 모습을 새롭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Ⅱ. 붕당과 정당의 비교1. 붕당에 대한 긍정적 시각흔히 조선시대는 당쟁의 시대로 보고, 붕당들은 민생은 돌보지 않고 쓸 데 없는 논쟁만을 일삼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 이는 왜곡된 역사이고 해석이다. 당쟁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정치세력간의 대립과 논쟁, 다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조선시대 붕당정치는 역기능도 있지만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 상호 경쟁을 하면서 부정부패를 막는 순기능 또한 있다. 붕당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또한 붕당정치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 운영 형태이다.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정치는 현대의 정당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라 하겠다. 16세기 중엽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을 최초의 붕당 성립 시기로 보는데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한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2. 보수정치와 개혁정치조선의 문물제도가 정비되는 16세기 전후, 지방에서 성장한 사림이라는 정치세력이 등장하는데, 당시 중앙 정계에는 훈구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훈구세력은 세조의 집권 이후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세습적으로 장악하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성장한 세력이다. 한편 사림은 15세기 중반 이후 영남과 기호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이들은 훈구세력이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하는 것에 반해, 향촌자치를 내세우고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세력은 주로 전랑과 언관직을 차지함으로써 보수파인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였고, 그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그 후 연산군, 중종, 인종을 거치면서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다툼은 계속되었고,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묘사화 등으로 명종 때가 되어서야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외척들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사림세력을 탄압하여 그 세력은 크게 꺾였다.민주주의에서 야당과 여당이 그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림세력이 훈구세력을 뛰어넘기도 하고 또 엎어지기도 하며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분고투 하였다.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탄압은 과거 공화국 시절에 존재하던 여당의 야당 탄압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3. 사림세력의 변질과 분열선조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오던 사림세력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되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훈구파를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신구세대의 입장 차이에 있었다. 명종 때 정권에 참여해온 기성 사림들은 척신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들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정치의 실현을 강력히 내세웠다.또한 사회적으로는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집단화되어 나타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왕실의 외척이면서 기성 사림의 신망을 받던 신의겸(서인)과 당시 명망을 놓고 선진 사림의 지지를 받고 있던 김효원(동인)을 중심으로 붕당이 이루어 졌다. 동인은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신진세력들이었던 반면에 서인은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하였다. 정치적 이념도 달랐지만 학문적 경향에 따라서도 결집되었기 때문에 붕당은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사림의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화는 대립세력인 훈구파가 사라짐에 따라 내부에서 균열이 생겼기 때문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민주정치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때 당시의 정계흐름으로 볼 때, 보다 다양한 정치적 노선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도 해석 할 수 있겠다.4. 사림세력의 분열과정두 세력은 조정에서의 입지가 처음에는 서로 비슷했으나,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동인이 타격을 입고 서인들이 득세하게 된다. 이 때 동인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던 사람이 가사 문학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이다. 하지만 서인들은 얼마 못가서 광해군의 세자책봉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선조에게 적통이 없는 시점에서 광해군을 지지하는 동인과, 신성군을 지지하는 서인의 대립에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동인들은 송강 정철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서, 송강을 가차 없이 죽이자는 세력의 북인(급진파)과 유보해 두자는 세력의 남인(온건파)로 다시 분열을 하게 된다.그렇게 갈라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임진왜란이 끝나자 의병장이 많았고 광해군과 의견이 잘 맞았던 북인들이 득세를 하게 된다.그러나 북인들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고 하였다. 광해군도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영창 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무리한 토목 공사 진행으로 재정을 악화시키고 민심의 이탈을 불러왔다. 이를 보다 못한 인조가 서인과 손을 잡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이후 북인은 몰락했지만 붕당 정치는 더욱 진전되었다.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되었지만 효종의 왕의계승에 대한 예송이 2차례 발생한다. 이 와중에 서인은 또 노론과 소론으로 한 차례 분열을 한다. 이후 공존을 깨고 일당독재의 정치를 보이게 된다.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분열한 동인과 서인을 제외한 나머지 분열의 시기는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상황들과 맞물려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당시 분열과정을 식민사관의 시점에서 보는 ‘조선인의 천성이 가져온 패악’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분명히 어폐가 있으며 오히려 민주적인 정치로의 전환점에서 나타난 이전과는 다른 정치형태라고 볼 수 있겠다. 현대정치에서도 각 정당은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거치며 변모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당정치의 당연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분열의 이유가 단순한 이권다툼이 아닌 정치적 쟁점에 따른 정치노선의 변화에 의한 것이므로 이러한 과정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5. 예송논쟁으로 본 붕당정치와 현대정치의 비교예송논쟁은 조선시대 당쟁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현대의 정치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1) 기해예송1659년에 발생한 이 논쟁의 표면적 원인은 효종이 서거하고 상을 치를 때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에 대한 것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은 비록 효종이 차자이나 왕에 대한 예우로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치적인 싸움이라기보다는 왕을 사대부와 동등한 입장으로 보아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서인과, 왕을 사대부와 똑같은 예법으로 대할 수 없다는 남인의 정치적 이념이 맞부딪힌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권이 신장함에 따라 왕권과 충돌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왕권위주의 정치에서 신권에게도 정치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갑인예송1674년에 발생한 갑인예송은 효종 비(인선황후)의 상을 당하여 자의대비의 상복문제가 논의가 되었다. 서인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므로 그 부인인 인선황후에 대해서도 둘째 아들에게 하는 대로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 남인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갑인예송의 결과는 당시 국왕이었던 현종이, 집권하고 있던 서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1년간 상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서인은 세력이 꺾이게 되었다. 이는 왕권에 위협을 느낀 국왕의 개입으로 볼 수 있으며 그만큼 신권이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과학| 2009.05.25| 6페이지| 2,500원| 조회(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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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유럽의 민주화
    목차Ⅰ. 서론Ⅱ. 동유럽 공산체제의 민주화Ⅲ. 폴란드의 민주화1. 개혁세력의 등장2. 개혁세력과 엘리트와의 타협3. 정치적 자본주의의 실험4. 민주주의 후 여론과 선거Ⅳ.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1. 탈공산화의 배경2. 벨벳혁명과 민주화3. 국가성과 조용한 결별Ⅴ. 헝가리의 민주화 : 위로부터의 변화Ⅵ. 동유럽 3개국의 민주화 수준Ⅶ. 결론 : 동유럽 민주화의 평가와 그 이후Ⅰ. 서론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을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군사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소련의 동요와 붕괴는 필연적으로 동유럽제국들의 동요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1989년 동유럽의 시민혁명은 21세기를 향하는 현대 국제정치사와 국제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는 이미 1940년대 후반으로부터 냉전체제로 조직되었던 동유럽체제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1990년대에 새로운 국제사회로의 근본적인 변화를 재촉한 것이다. 특히 동유럽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틀 속에서 집단적으로 형성해 왔기 때문에 동유럽의 국제사회는 국가를 초월하고 있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동유럽 사회는 사회주의 블록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사회주의가 침투되어 있었기 때문 가라라는 틀을 벗어나 하나의 사회주의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유럽의 변화는 급하게 국제사회적인 변화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동유럽의 시민혁명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 처음으로 발생한 커다란 정치변동이었다. 루마니아를 제외한 동유럽 제국의 정치변동이 대중운동을 통해 무혈혁명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현대 국제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동유럽 사회의 붕괴를 국제정치사의 심층동인이라는 각도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동인을 찾을 수 있다.)첫째, 이념적인 각도에서 아무리 유연하다 하여도 공산주의 그 자체는 스스로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고르바초프 현상과 개혁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서나,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의 실패로 자본주의가 완전히 승리하였다고 주장하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진영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겪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도 소련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았던 폴란드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폴란드 경제의 위기상황은 집권체제에 대한 불만을 국민 저변에 확산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강력한 민족감정과 가톨릭교회의 옹호를 토대로 한 지식인들의 체제 비판이 거세지고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폴란드의 저항운동은 노동자-농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였다.)1979~1980년에 폴란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정부는 가격을 인상하고 경제를 합리화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자신의 의사를 대변할 위원회들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1980년 8월에는 그다니스크의 레닌조선소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노동자들의 요구 가운데는 공산당과 독립된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로서 바웬사(Lech Walesa)가 출현하였다. 1980년 9월부터 1981년 후반까지 약 15개월 동안 폴란드 정부는 ‘솔리대리티(Solidarity)'로 불리는 자유노조를 인정하고 솔리대리티와 협상하였다. 솔리대리티 조합원의 수가 순식간에 1,000만 명으로 늘어나자 정부는 솔리대리티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솔리대리티의 인정으로 폴란드의 산업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이 통제할 수 없는 노동조합의 탄생에 대하여 소련과 다른 동유럽 국가의 지도자들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따라서 폴란드에 대한 무력개입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산당의 권위는 계속 무너지고 있었고, 솔리대리티의 일부 급진세력은 산업의 자율적 경영과 정치의 자유화까지도 요구하고 있었다.그러나 권력 내부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 권위를 회복시켰기 때문에 폴란드는 외부로부터의 무력 개입을 피할 수 있었다. 새 총리로 임명된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로그램은 1990년 1월에 공표되었는데, 이 계획의 근본 전제는 당시 폴란드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억제하고 동시에 시장경제의 기틀을 닦아나가기 위해서는 포괄적으로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개혁안은 입안자의 이름을 따서 ‘발체로비치 계획’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개혁안이 담고 있는 급진적 내용들로 인해 ‘충격요법’ 또는 ‘빅뱅(big-bang)’ 정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개혁 프로그램은 폴란드 경제개혁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발체로비치(Leszek Balcerowicz)가 추구한 개혁의 목표는 폴란드 경제를 거시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경쟁력 있는 개방적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핵심 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거시경제적 안정화 정책, 가격과 상업적 거래의 자유화 정책, 그리고 제도적 구조개혁 정책이다. 발체로비치는 안정화, 자유화, 제도개혁 정책을 각각 최대한의 속도로 추진하고자 하면서도 제도개혁 정책보다는 안정화와 자유화 정책을 더욱 빠르면서도 동시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안정화와 자유화 정책은 초기단계에서 애당초 목표는 대체로 달성되었으나, 제도개혁과 관련된 기업 구조조정과 사유화는 오랜 기간 지연되었다. 하지만 솔리대리티 정부가 추진한 개혁은 향후 폴란드 경제개혁을 위한 기본틀을 형성해 주기에 충분하였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 경제가 세계자본주의 경제질서로의 통합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폴란드 개혁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발체로비치 계획으로 구체화된 마조비에츠키 정부의 개혁안이 도출되는 데에는 실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은 발체로비치 계획의 설계와 실행을 위한 재정적이고 기술적 지원에 앞장섰고, 이후 세계은행, 서방 국가들의 정부, 국제금융기관들로 폴란드의 경제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국제통화기금을 비롯한 서방의 국제금융기구에서는 폴란드가 19되는 것은 선거구 규모가 전반적으로 작을수록 의회에 진출하는 정당의 수가 적어지며, 비례대표제는 더더욱 불균화(disproportionate)된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의 복귀”(return of communism) 혹은 “민주주의의 종식”(end of democracy) 등의 극단적인 예측은 실제로 실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93년 총선 이후 공산주의 시대의 구집권정당과 대부분의 사회집단 및 원외 정당들이 민주주의를 “도시의 유일한 게임”(the only game in town)으로 받아들인 듯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 정당의 파편화를 나타내는 락소-타게페라 지표에서, 그리고 1993년의 레이파트의 불균화 지표에서의 전례 없이 높은 수치를 보여준 폴란드의 최근 선거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폴란드에서의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기여할 수 있을 정도의 정당의 태도와 행동을 발전시키기까지는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폴란드는 후기공산주의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1989년 체제변화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폴란드 시민사회와 연대운동의 끊임없는 압력은 고르바초프와 소련이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펼치던 게임의 매개(parameters)를 넓히는 데 일조를 했다. 이러한 사실은 폴란드가 차츰 민주주의 공고화를 향해 진보하는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역사적 업적이다.또 다른 주요 업적은 폴란드가 1993~1994년 서유럽 어느 국가보다도 높은 GNP성장률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국내외의 신뢰를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국가 부문(state sector)의 민영화가 체코만큼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새롭게 설립된 중소기업의 원동력으로 경제 활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1995년 초반까지 사적 영역에 종사하게 되었다.폴란드 사회도 경제와 마찬가지로 건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폴란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간의 비생산적 관계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폴란드 시민사회 전반에 대해서 비관적일 필요는 국가였기 때문에 엄격한 중앙집권적 통제경제 정책보다는 투자나 기술혁신을 통한 발전이 적합한 상황이었지만,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정책실패로 인해 경제 불황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프라하의 봄은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오류를 표출시킴으로써 소련의 동유럽에 대한 경제정책의 근간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개혁정책으로부터 동유럽의 탈사회주의가 시작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소련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2. 벨벳혁명과 민주화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벨벳혁명은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공고화로의 진전을 의미한다. 특히 1990년 이행선거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화 이행에 성공하게 되었다.벨벳혁명의 계기는 1988년 8월 21일 바르샤바 조약군 침공일대에 대한 항의 시위였다. 지식인 주도의 반체제운동에 고무된 대중시위는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전국 기념일을 전후해 소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특히 11월 17일 프라하에 집결한 5만여 명의 학생들의 바츨라프 광장 진입을 막기 위한 경찰의 진압도중 한 학생이 경찰에 의해 사망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무력진압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지식인과 연대를 표명하고 대학파업과 11월 27일 총파업을 요구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반체제인사들은 조직적인 반정부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1월 18일에 기존의 반체제운동과 시민들이 포괄적으로 참여하는 ‘시민포럼(Civic Forum)’을 창설했다. )11월 20일 20만 시만이 시위를 하고, 11월 23일에는 두브체크가 21년 만에 군중집회에 참석하여 공산당정권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11월 24일에는 35만 명의 시민과 학생의 시위 압력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야케시 서기장과 당의 중요 간부가 사임하였다.야케시의 후임으로 울바네크가 서기장이 되어 공산당 지도부를 교체하였지만 국민들의 불만은 진정되지 않았다. 11월 27일 민주개혁을 더욱 강도 높게 요구하는 하였다.
    사회과학| 2008.06.02| 19페이지| 3,000원| 조회(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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